[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하면 문인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것은 운위(云謂) 하는데 오랜 전통이 따라다닌다. 어느 시대에서나 글은 곧 가치 정신의 지표를 갖는 일면 정신의 고고(孤高)함을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였으며 그만큼 정신의 정수(精髓)를 뇌리에서 짜내는 직업의 신성함을 의미한다. 사실, 인정을 받는 만큼 부수적인 갖춤이 있을 때, 지향의 목표가 뚜렷해야 하고 무게를 갖는 일상의 정서가 부스러기가 아니라 정제된 함축미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에 합치되는 일은 오랜 습작과 단련의 결말이 아니면 지난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통상적인 글에 누습(陋習)을 반복하는 창조성 결여를 지적하게 된다. 창조는 언제나 신선함과 선도적인 사고에 발현 점을 갖는바, 이런 조건에 합치는 곧 개성의 뛰어남을 이룩하는 일이다. 개성이 없다는 글은 또 다른 누습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에서 외면의 눈총을 받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의 고양을 목표로 설정하지 못하면 결과에서 독자는 외면 혹은 침묵으로 지나치는 일이다. 이런 현상은 안 써야 하는 글의 이유를 합당한 논리로 처리된다. 물론 상이나 숲의 푸른 색채는 온갖 초목이 어울릴 때 멀리서 바라보는 녹색의 단일성을 갖지만 가까이서는 필요와 불필요의 구분이 정확성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가 하면 글에 개성의 원인이 아니라 근인(近姻)에서 가치의 감동이 수반된다는 점을 특기할 일이다. 미상불 분석적인 현상에서 특징을 갖는 요인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인은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나타낸다. 어쩌다 문인의 모임에 나가면 생면부지의 신인이 와글대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적어도 수 삼 년에 이력을 내세울 것도, 없지만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름을 가질 때, 선배들이 주눅이 드는 일은 양적인 팽창과 밀도를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인의 숫자가 많음과 창작의 수준과는 불비례의 어긋난 기울임은 결국 탄식을 불러오는 외면이 당연한 것 같다. 때를 벗지도 않고 몇 번의 작품 발표와 한 권의 저서를 출간하면 중견의 어깨가 되는 가벼움이 만연했으니 다시 돌릴 수도 없는 한숨이 고작이고 외면이 당연지사이다. 질서의 무너짐은 잡지의 숫자와 비례하는 것 같다. 신인을 배출하는 일은 곧 잡지의 운영과 상관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은 이 깊이 진행되는 일이라 어느 방향이 옳다고 시정을 촉구할 수도 없는 한계를 넘어 버렸다. 그렇다면 탄식이 정답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올시다, 이다. 잘못된 길을 수정하거나 바른길로 지나갈 수 있는 끝없는 조언이 필요하고 비평의 선도적인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비평은 이미 시들어 기력이 없는 지경임을 필자 또한 인정한다. 물론 뛰어난 논리와 합당한 판단을 구유(具有)한 사람이 전혀 없음은 아니지만, 머리는 기능을 하고 있으나 가슴이 메말라 있는 경우가 흔함을 목도(目睹)한다. 또한 공부의 지속성 연구의 지속성이 없기에 거의 10년이면 비평가의 수명이 끝나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비평가가 많다는 아픔은 문학의 아픔과 비례하고 있다. 자기의 본분을, 잃고 다른 쪽에 고개를 돌리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실패의 문패를 달았다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문학의 질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행위인 점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경우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열심히 정진하는 그룹이 있다면 또 한 그룹은 이름만을 즐기는 명찰 - 귀걸이 목걸이의 장식용 시인 - 전자의 숫자는 매우 희소하고 후자는 흘러넘치는 양상이 한국 시단의 모습이고 문제점이라 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시 공부라는 학습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엉겁결에 시인이라는 호칭에 취하여 문자의 나열 즉 행과 연을 끊어 짧으니까, 시가 된다는 모독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시와 감수성은 훈련으로 어느 정도 젊은 날의 시심을 회복할 수 있지만, 뼈를 깎는 정진에의 노력이 없기에 답보의 정체가 길고 긴 시간에 파묻히는 아픔으로 남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의 운용에 무게를 실감하고 음악성으로 리듬을 깨닫고 그림으로 이룩되는 상상의 회화성과 의미의 초점이 모아질 때, 시는 비로소 감동에 눈을 뜨는 법이다. 이런 난제 앞에 시인은 오직 입학만 있고 졸업이 없는 끝 모를 정진이 요구되는 이유는 나변(那邊)이 아니다. 자기를 아는 행위는 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인격이 들어있고, 한 권의 시집에는 전 생애가 담기는 것이다. 이런 무게를 실감할 때, 시어 한 글자나 마침표 하나에도 신명을 실어야 한다. 시는 모든 것이, 의미로 통하는 문을 가져야 비로소 시다운 시가 되는 것과 같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의 물음은 시인이 들어야 할 몫이다. 독자를 깨우치는 시인이 될 때, 시인은 때로 선생님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위엄을 갖출 수도 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양한 인격을 소화하는 성품은 곧 끝없는 수련에서 시의 길은 환한 불을 밝힐 수 있다. 어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불러 모으는 초점으로의 사고가 단련될 때, 시의 신은 얼굴을 보여주고 금시 달아난다. 왜냐하면, 시는 순간의 예술이며 이를 찰나에 포착하지 않으면 꼬리만 보이고 머리와 몸통이 없는 허무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단은 수렁에서 나올 수 있는가 아닌가는 오직 시인 자신들이 선택하는 고행을 갈 것인가에 갈림길이 분기한다. 시인 자신들이 사명과 책임감을 느낄 때, 밝은 길이 열리는 것은 자명한 조언일 것이다. 시인은 모든 문학인의 맨 앞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깨어난 정신을 소유자라는 말이 합당한 이유이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admission 했다고 가정 해보자, 한국 의학의 경우는 한방이나 양방이나 맥을 짚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문진과 맥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진단이었다면 이는 종합에서 얻은 인간의 시체를 우주로 파악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서양 의학의 경우엔 아픈 부의와 판단에 따라 집중적으로 메스와 항생제가 치료의 주요 수단이다. 우리도 의학이 발전하여 세계적 수준이 되었지만 이는 분석과 해체에서 얻은 전적으로 얻은 서양의 치료 방법이라면 동양은 종합과 분석의 결합에서 제3의 의학적 처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대체 의학이라 말한다. 어느 것이든 전적으로 옳은 일방성은 없다. 문학에서도 이런 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서양적인 이론의 추구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전통의 결합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론에 필요성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문학은 갈림길에 있다는 생각이다. 2000년 초부터 우리 문학의 판도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액티브(activist)한 다양성이 부재한 듯하다. 민중문학이 잠들고부터 정체의 긴 시간이 무료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뚜렷한 없는 이슈가 없는 현실에서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침묵처럼 조용한 현상이 과연 좋은 것인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발전을 위한 모티브가 없으며 고민 없음을 대변하는 현실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물론 우리 문학의 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의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정권 잡이의 문학 – 이도 문학이라면 문학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한 잣대로 말한다면 거론할 말은 제한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정해진 명령의 하달을 실천하는, 이른바 노동당의 기준에 적합한 경우, 충실한 문학인으로 대접받는 일종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우상 같은 표현만 있는 문학은 이미 문학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된다고 믿는다면 남한의 경우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의 승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되뇐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는 간단히 언급하기에는 어렵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전쟁 문학이 없고 – 이런 전통은 고래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 통일 - 나는 통일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의 안목이 없었고 근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 7여 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 통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 때문에 어느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사는 결국 자기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지만 –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에 머무는 논리에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닌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문학이 심도는 돌뿌리에 체이는 안타까움을 맞는다. 북한의 세습 정권을 보면 금새 그 뜻을 알게 된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의 간판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오로지 독재자 김정은이 향하문 이외는 모두 차단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 <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통하여 동원하여 합리 둔갑 될 때 용해되는 <우리> 정서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최면이 깊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벗어나면 악이 되고 나는 우리에 소속된 혹은 없어야 당연해지는 일이 어떻게 문학이 추구하는 휴머니티의 소산이 되겠는가? 한때 남한에서 극심했던 저항의 문화도 그렇다. 결국 끼리끼리의 문화였지 발전적인 <우리>로 이르지 못한 것은 편 가르기의 우리에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란 이분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에 터가 없는바 일방성 때문에, 공통의 선이 없어지고 독선적인 메아리를 던지다가 소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인 사상의 모델이라면 우리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으니,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때 유명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지 정작 작가의 고뇌 어린 해답은 없었다고 느낀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의 깊이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방의 이야기 수준이고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 작품에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다는 예를 들면 결론은 자명해진다. 그는 러시아 귀족으로서 자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땅 만으로는 살 수 없다>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었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 말이 “진리를 나는 열애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은 녹아있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다.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를 이룰 때, 비로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는 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모비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 한 줄도 안 나올 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했었고, 생전에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 후에 평론가의 연구에, 의해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은 1962년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 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은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 1965년 – 40년 후에 박노순 인권 항의<한용운의 연구>에 의해 유명 애국 시인으로 등극했고,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도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런 시인 – 이육사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에는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은 대답이 될 것이다.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한다. 그렇다.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의 실현이고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소설이 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의미로 만드는 비유가 시가 된다면 자기라는 본질에 대한 “찾음”은 결국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와는 멀리 있는 표현일 것이다. 즉 자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신 가치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흥무대왕)의 아우이다. 그는 자녀를 많이 두었고 가정적인 성품을 가진 장군이다. 화랑으로서 풍월주가 되었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생애는 여러 사서(史書)에서 볼 수 있다. 김흠순의 혼인 이야기를 보자. 그는 화랑의 네 번째 지위인 전방화랑이 되자, 지위 높은 화랑들에게 인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마침 정자 안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는 ‘보리’ 풍월주에게 인사했다. 그때 보리 풍월주의 딸 보단낭주(菩丹娘主)가 남동생과 함께 정자 아래 연못가에 놀고 있었다. 김흠순은 보단의 아름다운 자태가 신선 같아 보였다. 그는 첫눈에 마음이 끌려 보단에게 흠모하는 눈빛으로 한참 동안 보다가 갔다. 며칠 후 보리 풍월주를 배알(拜謁)하고는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 보리 풍월주는 김흠순의 의기(意氣)를 장하게 여겨, “남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여색이다. 네가 내 딸을 사랑하면서 더 극진히 사랑하는 첩을 많이 두지 않는다면 사위가 될 수 있다.” 김흠순은 그리하겠다고 맹세하므로 보리 풍월주가 보단을 김흠순에게 시집보냈다. 김흠순은 보단의 재주와 미색이 뛰어나고, 정숙한 덕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기쁨에 넘쳤다. 정사(政事)도 보단의 의견을 많이 듣고 참조했다. 아들만 일곱을 낳았는데 부모를 닮아서 모두 영민하고 용감했다. 김흠순은 늘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나라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내조의 덕이라 말했다. 그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집에 들러서 보단하고 말을 나누고 다시 떠났다. 형인 김유신과는 대조적이다. 김유신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까지 나라에 충성했다. 김흠순은 나랏일로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다. 보단은 원망하지 않고 집에서 무사하도록 기도했다. 그러다가 김흠순이 돌아오면 온 집안이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한 잔치 분위기였다. 660년, 63세 때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김흠순은 장군 품일(品日)과 함께 대장군 김유신을 도와 백제 계백(階伯) 장군의 5천 결사대와 7월 9일 황산(黃山)벌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신라군은 네 번 싸워 모두 패했다. 이때 김흠순은 화랑인 아들 반굴을 불러 적진으로 홀로 들어가 싸우도록 명했다. 반굴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적진에서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본 신라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흠순이 65세~66세 때는 660년 백제 멸망 후 잔당들이 부흥 운동을 일으키자 다른 장군들과 함께 모두 토벌했다. 71세 때인 668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관등이 각간(角干)에 올라 있었다. 김흠순은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군단의 지휘관인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는 항상 김유신을 도왔다. 이때 김유신 장군은 대당대총관으로 본국에 머물러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정벌 이후,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취하므로 당나라 고종이 격노했다. 그러나 당나라와 애초 약정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 고토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잘못은 당나라에 있었다. 그런데도 문무왕은 669년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하도록 했다. 당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당나라는 신라가 사죄함을 생각해서 이듬해 김흠순은 서라벌로 보내고, 양도는 억류당해 감옥에서 죽었다. 사신을 억류하고 죽도록 한 당나라는 신라와 전쟁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670년에 당나라 오골성을 선제공격하므로 7년간의 나당전쟁이 있었으나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김흠순은 젊어서 술을 좋아했다. 항상 보단부인이 손수 술을 담가 다락 위에 저장해 두었다가 내주곤 했다. 어느 날 김흠순이 술을 찾자, 보단이 다락에 올라가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김흠순은 이상하게 여긴 후 다락에 올라가 보니 큰 뱀이 술독에 빠져 있었고, 보단은 놀라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김흠순이 보단을 업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 후로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보리 풍월주가 김흠순의 술 이야기를 듣고는 아내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니 가히 딸 둘을 줄 만하다고 하여 보단의 동생 이단(利丹)도 김흠순에게 시집보냈다. 이단은 3녀 2남을 두었다.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데 서로가 투기하는 일 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김흠순은 재물이 부족하면 항상 ‘염장’ 풍월주에게 구했다. 염장은 김흠순의 인품을 보고 딸들을 김흠순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보단은, “염장은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내니 가풍이 손상될까 걱정됩니다.” 김흠순은 여색을 좋아함은 남자의 본성이니, 나 또한 보단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염장처럼 되었을 것이라 했다. 셋째 아들 반굴 외에는 모두 염장의 딸과 혼인했다. 김흠순의 아들 중 넷째 원수(元帥), 여섯째 원선(元宣), 아홉째 원훈(元訓)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다. 중시는 오늘날 국무총리 지위와 같다. 김흠순 장군은 여러 번 전쟁을 겪었으나 패한 적이 없었다. 군사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680년 2월 보단부인과 함께 천상계로 올라가니 수(壽)가 83세였다. 그때 보단부인은 남편보다 두 살 아래였다. 자손(子孫)이 백 명에 이르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니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경주 통일전 경내에 있는 화랑정]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서현은 신라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다. 김서현의 아버지는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양왕의 둘째 왕자 김무력 장군이고 아들은 김유신 장군이다.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살았다. 금관가야 후예로서 신라를 위해 목숨 바친 김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을 양산 취서사에 있는 영정각에서 만났다. 김서현은 그의 아들 김유신(흥무대왕)의 비석에 보면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라고 했다. 소연(逍衍)이 그의 자(字)인지, 아니면 서현(舒玄)이 고친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김유신 상」 편에 따르면, 김서현은 길에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자 첫눈에 반했다. 숙흘종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동생이다. 그 후 김서현이 현재 충북 진천군인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가게 되었다. 만명이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은 비로소 김서현과 딸이 사귄 것을 알았다. 숙흘종은 만명을 별채에 가두어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나 갑자기 별채의 문에 벼락이 떨어져 구멍이 뚫렸다. 지키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 흩어졌다. 만명으로 봐서는 기회였다. 만명은 그 구멍으로 황급히 빠져나가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김서현과 만명의 사랑 이야기를 볼 때, 두 사람은 용감했다. 운명이 아니었던가 싶다. 신라 왕실의 숙흘종이 자기 딸과 김서현의 혼인을 반대한 이유는 김서현이 진골의 신분이기는 해도 가야계였기 때문이다. 김서현도 신라는 골품제 간 혼인이므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는 신라계 진골과 혼인할 수 없었기에 길거리에서 만명을 유혹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의하면, 김서현은 화랑에 들어가 화랑 조직의 네 번째 지위인 전방화랑을 거쳐, 세 번째 지위인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이후 28세 때인 591년에는 풍월주(국선 화랑) 바로 아래 지위인 부제(副弟)가 되었다. 부제는 대체로 풍월주의 지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김서현은 풍월주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풍월주는 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만명의 어머니인 만호부인은 김서현의 어머니인 아양 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만명이 김서현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김서현과는 계통이 달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화랑 조직에 영향력을 가진 만호부인은 김서현을 부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집안 간의 좋지 않은 관계로 자녀가 피해를 보거나 혼인을 못 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김서현은 신라 진흥왕이 설치한 현재 경남 합천의 대량주 도독이 되어 백제 방어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 후 대량주 도독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 등장한다. 그는 대량주를 642년 백제에 빼앗기면서 부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648년 김유신 장군에 의해 대량주를 탈환하면서 김품석 부부의 유해도 찾았다. 김품석이 대량주 도독이 되기 전 어느 시점에 김서현은 현재 경남 양산의 양주 총관이 된 것으로 파악 된다. 언제 총관이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양산 총관일 때 여러 차례 백제가 신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그 기세를 꺾어 영토를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따라 신라 변방의 백성은 농사와 양잠의 일을 편안히 하였다고 『삼국사기』 에 기록하고 있다. 629년 김서현이 66세가 되었을 때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김용춘과 함께 대장군으로 명하여 현재 충북 청주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했다. 수많은 고구려 군사를 참살하고 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린 후 김서현은 역사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 제25대 진지왕계를 대표하던 김용춘과 가락계를 대표하던 김서현이 대장군으로서 함께 참가한 사실은 두 가문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군사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양산 취서사(鷲棲祠)와 울산 은월사(隱月祠)에는 김무력 장군과 김서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취서사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이 취서사 바로 옆에 있다. 바라보아 왼편에 대도독 김서현지상(大都督金舒玄之像)이 있고, 오른편에 소판부인 만명지상(蘇判夫人萬明之像)이 있다. 취서사와 은월사에는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에 제향을 올린다. 취서사 영정각에 있는 김서현과 만명부인 영정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영정의 크기는 부부 각각 가로 56.1cm, 세로 78.3cm이다. 이 영정은 원래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리 신기북정고분군중 제10호분인 양산 부부총 인근에 있는 존영각(尊影閣)에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당이 훼손되었고, 한 무속인이 이들 영정을 수습하였다. 그 후 가락양산시총친회에서 회수하여 진품은 양산시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취서사 영정각에 봉안했다. 김서현의 관등은 3관등인 소판(蘇判)을 거쳐 1관등인 각간(角干)까지 이르렀다. 관직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 도독이었다. 특별 관직으로 대량주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을 총괄하는 안무대량주 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가 되었다. 그 후 양주 총관을 거쳐 66세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김서현은 564년에 출생했고 사망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김서현의 무덤은 양산시 북정리고분군에 있는 부부총으로 추정하며, 1963년 사적 93호로 지정되었다. 김서현 장군은 가야계와 신라계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30세 경에 혼인했다. 595년에 만명부인은 만노군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만노군은 지금의 진천군이다. 그 후로 만명부인은 2남 흠순, 1녀 보희, 2녀 문희, 3녀 정희를 낳았다. 김서현 부부는 김유신과 김흠순 장군, 문명왕후 등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신라 변방에서 나라를 위해서 큰 공도 세웠다. 부부는 서로가 사랑하면서 힘을 합칠 때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이 있는 영정각 문을 살며시 닫는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 영정(촬영 2018. 8. 20)]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경산소방서 중앙119안전센터 소방장 박진형 -] 12월 20일 오전 8시경 구급 출동 벨 소리가 119안전센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머니께서 두통을 호소한다는 신고였고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환자를 마주하니 어눌한 말투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호소하며 좌측으로 자꾸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환자 상태를 평가 후 뇌졸중을 의심하였고 곧장 환자는 치료가 가능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환자는 각종 검사 후 뇌졸중 진단이 내려진 즉시 혈관을 뚫는 응급수술이 진행되었다. 119 신고로부터 딱 1시간 만에 수술실로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환자는 얼마 후 뇌졸중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퇴원하였고 현재도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뇌졸중은 본인 또는 가족, 지인들의 뇌졸중 의심 증상 바로 알기와 즉시 119 신고로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된다면 뇌 손상 및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다시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증상을 경험하고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좀 더 심해지면 병원 가야지’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기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생명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막고자 뇌졸중이 무엇인지, 뇌졸중의 증상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아보고자 한다. 뇌졸중을 포함한 뇌혈관 질환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중 5위에 해당할 만큼 생명을 위협하는 중증 응급질환이다. 뇌졸중은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뇌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하는 뇌출혈로 구분되며, 고혈압, 당뇨병, 이상지질혈증, 흡연, 과체중, 가족력 등이 주요 위험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뇌졸중은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겨울철 기온이 낮아 뇌혈관이 수축하고 좁은 혈관으로 혈액이 흐르다 보니 혈압이 높아지며 약해진 혈관이 터지거나 막혀버려 뇌출혈 또는 뇌경색이 발생하는 것이다. 뇌졸중의 골든타임은 증상 발현으로부터 3~4시간 이내라고 하지만 증상이 의심되면 1분 1초라도 빨리 응급 재관류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처럼 의심 증상의 빠른 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뇌졸중을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의심 증상 판단법을 소개한다. 첫째, 한국형 뇌졸중 의심 증상 판단법 ‘이웃·손·발·시선’ - 이웃 : “이~” 하고 웃을 수 있나요? 마비된 얼굴은 찡그리지 못합니다. - 손 : 두 손을 앞으로 뻗을 수 있나요? 마비된 팔은 아래로 떨어지거나 힘이 없습니다. - 발 : 발음이 명확한가요? 갑자기 어눌한 말투를 보이거나,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합니다. - 시선 :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나요? 양쪽 눈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확인합니다. 둘째, 글로벌 뇌졸중 의심 증상 판단법 ‘FAST’ - F (Face) : 웃었을 때 얼굴의 좌우 모양이 다른가요? - A (Arm) : 한쪽 팔‧다리의 힘이 약하거나 처지나요? - S (Speech) : 발음이 어눌하고 대화를 잘 이어가지 못하나요? - T (Time to act) : 위 증상 중 한 가지라도 의심되면 즉시 119에 신고 또는 병원에 방문하세요. 위와 같은 증상들이 발생한다면 꼭 기억해야 할 3가지 행동 수칙이 있다. 첫째, 뇌졸중이 의심된다면 스스로 진단하려 하지 마세요. 둘째, 뇌졸중이 의심되면 증상 호전을 기다리지 마세요. 셋째, 즉시 119에 신고하여 병원 진료를 받으세요. 경산소방서(서장 박기형)에서는 보건소 및 지역응급의료기관과 함께 지역응급의료협의체를 구성하고 뇌졸중 환자 및 급성 응급환자의 원활한 이송 및 진료를 위해 지속해서 협의하고 있으며 뇌졸중 응급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상시 파악하여 골든타임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경산소방서 중앙119안전센터 소방장 박진형 - [2022년 사망원인 통계(출처-통계청)]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성인(聖人)들의 나라를 위한 모습은 여러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돌아가신 신라 문무대왕과 김유신 장군은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동해 조그마한 섬에 대나무를 보내어 피리를 만들어 불게 했다. 피리 소리를 들으면 나라의 우환이 없어졌다. 그 내용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 전해지고 있다. 신라는 왜병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제31대 문무대왕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신라를 침범하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사찰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성하여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문무대왕은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호국하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높이 받들며 나라를 지키고 싶소.” 또한 유언으로는 왜적을 막을 테니 동해 어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다. 장사 지낸 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으로 문무대왕수중릉이라 한다. 신문왕이 용의 모습을 본 곳은 감은사와 같이 완성한 이견대(利見臺)이고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700m에 문무대왕수중릉이 보인다. 신문왕은 해룡이 감은사에 들어와 돌아다니다 갈 수 있도록 대웅전의 층계 밑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었다. 감은사는 현재 3층 석탑 두 개가 동서로 마주 보고, 널따란 터만 남아 있다. 682년 5월 1일에 4등급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이 갑자기 신문왕께 아뢰었다. “동해 한복판에 작은 산 하나가 파도에 따라 감은사 쪽으로 밀려왔다 밀려 나갔다 합니다.” 신문왕이 이상히 여겨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일관(日官) 김춘질에게 명해 점을 치도록 했다. 일관이 아뢰길, “돌아가신 문무대왕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어 삼한을 보호하고, 또 김유신이 천상계의 아들로서 우리나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으므로 두 성인의 덕을 합쳐 성(城)을 지킬 보배를 내리시려 하오니, 폐하께서 해변에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을 것입니다.” 신문왕은 기뻐하며, 5월 7일 ‘이견대’로 나가 그 산을 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모양새는 거북이의 머리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로 합쳐집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문왕은 그날 감은사에서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정오에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고 폭풍우가 치며 어두워져 7일 만인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신문왕이 바다에 배를 띄워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바치므로 왕은 영접하며 자리에 앉아 말했다. “이 산과 대나무가 갈렸다 합쳤다 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 치는 손뼉은 소리가 없고 두 손으로 치는 손뼉이 소리가 나듯이 이 대나무도 합쳐진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됩니다.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같은 뜻으로 값을 정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제가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신문왕은 기뻐 놀라서 오색의 비단과 금옥(金玉)으로 보답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칙사(勅使)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를 떠나니 산과 용이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신문왕은 그날 또 감은사에서 밤을 지내고 17일 기림사(祇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행차를 쉬며 오찬을 들고 있었다. 이때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소문을 듣고 말(馬)로 달려와 하례하고서 자세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의 장식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있는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장식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편 두 번째 장식을 떼어서 시냇물에 담그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으므로 용연(龍淵)이라 했다. 신문왕은 환궁하여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했다. 천존고는 신라 때, 나라의 보물을 간직해 두던 창고이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며,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 개의 파도가 있지만, 피리를 불면 조용해진다는 뜻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692년, 효소왕(孝昭王) 원년에 분실했다. 찾는 과정에서 692년에 국선 화랑이 된 부례랑(夫禮郞)이 국경 근처에 놀이 갔다가 말갈족에게 사로잡혔다. 부례랑은 잡혀간 곳에서 목동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 갑자기 단정한 스님이 피리를 들고 부례랑에게 나타나 피리를 타고 기적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파식적도 다시 찾게 되어 격을 높여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고쳤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만만파파식적은 악기이지만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의 천부인(天符印)과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과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묘한 효능을 가진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으로 생각한다. 만만파파식적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혼란스러운 시절이 빨리 지나가고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신문왕과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들어 있기도 하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神物)로도 추측할 수도 있다.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도 보인다. 삼국통일의 완성을 본 김유신 장군과 문무대왕은 천신과 해룡으로 등장하여 신라의 번영을 위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 정치를 볼 때 김유신 장군과 문무대왕의 정신을 본받아 나라의 힘을 한곳에 모을 때가 된 것 같다. [검은색 신라시대 만만파파적 추정 노란색 조선시대 제작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돌아가신 조상은 후예(後裔)를 사랑한다. 후예가 조상을 기리고 훌륭한 점을 거울삼아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꿈속에서 만난 조상이 후예를 위해 가르침을 준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는다. 조상이 후예를 위해 애쓴 경우를 보자. 꿈은 나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 상황의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의미가 담길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만, 꿈속에 담긴 의미를 탐색해 보고 메시지를 삶에 적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번은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나타나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꿈이 깬 후 어머니로부터 어떠한 선물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없었다. 그 물건이 확실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꿈에 부모님을 만나면 행운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서 평소에 관심이 없는 로또복권 열 장을 샀다. 로또복권은 한 장에 수억 원 이상이 걸려 있어서 희망을 품고 일주일을 즐겁게 생활했다. 당첨 발표가 있었다. 한 장도 당첨되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부모님의 환한 모습과 돌아가셔도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모습에 일주일 내내 복권의 당첨 기대감과 함께 컨디션 좋게 생활했다. 부모님은 내가 컨디션이 안 좋은 모습을 보시고 기력을 주신 것일까? 생활에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 조상이 후예의 죄 없는 죽임을 당한 경우를 참다못해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나와, 자기보다 더 윗분 조상에게 하소연한 경우가 있었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시절, 779년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 장군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다.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 신라 제13대 미추 이사금 능으로 들어갔다. 미추 이사금은 신라에서 김씨 왕으로는 처음이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계 김씨이나 신라계 김씨와는 동성(同姓)이다. 그래서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에게 가서 하소연한 듯하다. 잠시 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볍게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 770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는데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한단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 장군이 세 번 청했으나 미추 이사금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은 청이지만 회오리바람은 하는 수없이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회오리바람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을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 보냈다. 김경신은 사죄하고, 혜공왕이 김유신 장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취선사는 경주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절은 김유신 장군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신라시대 30결은 오늘날 약 14만 평이다. 거대한 땅을 가진 취선사가 보존되지 않았다니 후예들이 조상을 기리는 정신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세력에 의해 소멸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은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적군을 물리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또 적군이 신라를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은 다시 전장으로 갈 것을 명했다. 집 앞을 지나 저 멀리서 하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마시면서,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옛날 맛 그대로구나!” “대장군께서 이러하신데 우리가 어찌 골육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모든 병사의 사기가 충천하여 곧장 적진으로 나아가 적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이토록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쳐 왔는데, 후예가 죄없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조용히 있었다면 김유신 장군이 아니었을 것 같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후예는 혜공왕 6년, 770년 8월에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역하다가 처형당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김융으로 추측한다. 김융의 반란 동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유신 장군의 아들 윤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당했던 것으로 보아 김융의 반역도 그러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미추 이사금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장군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다. 신라 사람들은 미추 이사금의 덕을 기리며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추 이사금 능의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고 『삼국유사』 「미추왕과 죽엽군」 조에 전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국가와 후예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도 김유신 장군(흥무대왕)을 기리는 사당은 전국에 10개소가 넘는다. 인간으로서 미덕과 가치를 쉽게 외면하려는 요즈음 조상의 산소 돌보기도 게을리하는 경우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나를 있게 한 근원이 조상이다. 조상을 기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돌아가신 조상이지만 후예를 사랑하는 마음은 꿈속이든 설화로 전해지든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조상의 혼령님은 어디에선가 환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경주 대릉원 미추 이사금 능(촬영 2018. 12. 2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길어야 100세를 넘기가 어렵다. 김유신 장군은 한평생 나라를 위해 전쟁하다가 건강이 다해 승천했다. 사서(史書) 여행에서 승천의 기록을 만나보았다. 신라가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할 때 김유신 장군은 몸이 불편하여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남아 나라를 지켰다. 그 후 5년이 지나 79세(서기 673년)가 되었다. 그해 음력 1월, 신라에서는 큰 별이 경주에 있는 황룡사와 반월성 중간에 떨어지고 지진이 있는 등 천재지변이 있자 문무왕은 걱정했다. 김유신 장군은 왕에게 나아가“요즈음 변고(變故)는 그 액운이 늙은 저에게 있습니다. 나라의 재앙이 아니오니 전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과인이 더욱 걱정할 일이오.” 자기 몸이 불편한데도 문무왕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한 김유신 장군의 충성심에 가슴이 뭉클하다. 문무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해 기도하여 천재지변의 걱정거리를 물리치게 했다. 김유신 장군이 79세가 된 음력 6월에는 간혹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사람들 수십 명이 김유신 장군의 집에서 울면서 조금 후 사라지는 것이 사람들 눈에 띄기도 했다. 김유신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이것은 반드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陰兵)들이 내 복이 다한 것을 보고 떠난 것이니 내가 이제 죽겠구나!” 나라에 충성한 김유신 장군이 먼 미래를 보는 듯하다. 자기를 보호하는 음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10여 일 뒤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니, 문무왕이 친히 왕림해 위문했다. “신은 팔다리의 힘을 다해 폐하를 받들고자 했습니다. 제 병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늘 이후로는 다시 용안을 우러러보지 못하겠습니다.” “과인에게 경(卿)이 있음은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오.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되면 이 백성을 어찌할 것이며, 사직(社稷)은 또 어찌할 것이오.” “신은 어리석고 어질지 못한데 일을 맡기어 신뢰해 주신 까닭에 작은 공(功)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신라, 고구려, 백제가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이 여러 임금님을 보건대 끝까지 훌륭한 경우는 드물어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공(功)을 이룸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또한 이룬 것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아셔서 소인(小人)을 멀리하시고 군자(君子)를 친근히 하시기 바랍니다. 조정은 위에서 화목하고 백성과 만물은 아래에서 평안하도록 하시면 앙화(殃禍)와 난리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를 끝까지 이어지게 하신다면 신은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김유신 장군은 돌아가실 때를 아는 것 같고, 자기를 낮추는 언행은 내가 본받을 일이다. 김유신 장군은 서기 673년 음력 7월 1일 자택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향년 79세였다. 그 당시는 꽤 오래 사신 것 같다. 문무왕은 김유신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크게 애통해하며 여러 가지 물품을 부의로 내리고, 군악대 1백 명도 함께 내려 주었다. 김유신 장군을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 금산원은 현재 경주시 송화산 기슭이다. 문무왕은 관리에게 명해 비를 세우고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묘를 지키는 백성도 두었다. 김유신 장군의 부인은 지소(智炤)이다. 일명 지조(智照) 부인이라고도 한다. 부인은 태종무열왕의 공주로 두 번째 정실 부인이다. 아들 5명을 두었다. 김유신 장군이 사망하고 지소 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베옷을 입고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문무왕은, “오늘날 나라 안팎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김유신 장군 덕이오. 생각해 보면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고 남편을 도와 이루었으니 숨은 공이 크오. 과인은 그 은덕을 갚고자 하여 일찍이 하루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오. 이에 남성(南城)의 곡식을 매년 1천 석씩 드리겠오.” 남성은 경주시 남산의 남산성으로 추정한다. 남산성에는 곡식과 병기를 저장하는 창고인 장창(長倉)이 있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삶을 영위하는 동안 바르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가 존재해야 한다. 국가의 존재를 위해서는 국가를 위한 일에 몸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김유신 장군은 한평생 나라를 위해 살다가 승천했다. 신라 흥덕대왕은 서기 835년, 김유신 장군이 승천한 지 162년만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했다는 기록을 『삼국사기』 에서 만났다. 그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유신 장군은 진정한 신하이면서 리더(leader)였다. 신하와 리더로서 피운 꽃나무가 현재도 피어 있어 내 가슴에 와닿고 있다. 나도 김유신 장군처럼 진정한 나라 사랑 정신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김유신 장군]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박기형 경산소방서장] 이제 11월 중순이 지나 겨울철 초입이 들어서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집안 곳곳에 난방용품의 사용이 늘어남과 동시에 실내 생활이 늘어나 화재 위험이 높아지는 시기이다. 겨울철은 4계절 중 화재 발생 건수가 가장 많고, 화재에 따른 인명피해 비율도 가장 높다. 최근 5년간(2018~2022년) 국가화재정보시스템 화재통계에 따르면 겨울철(11월~2월) 경산에서는 평균 76건의 화재가 발생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부주의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전기적 요인이 뒤를 이었다. 또한 겨울철 화재 발생률이 크게 줄어들지 않는 건 해마다 전기 난방기구 사용이 증가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부주의에 의한 화재가 많은 만큼 월동 준비에 앞서 3대 난방기구(전기장판·전기히터·전기열선)를 안전 수칙을 알아두면 화재 발생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그 방법으로는 난방 기구 사용 시에는 첫째 전선의 파열 여부를 확인하고, 온도조절장치가 정상 작동되는지 점검하여야 한다, 둘째 월동기를 위해 오래 보관되어 있던 기구 콘센트에 낀 먼지를 제거하고 제품의 파손 여부를 파악한다. 또한 전기장판을 사용할 때는 열에 취약한 라텍스 매트와 함께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전원을 반드시 끄고 플러그 뽑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전기히터를 사용할 때는 주위에 불이 붙을만한 물건을 없애고 충분한 공간 확보가 필요하다. 추가로 화재 예방의 가장 기본인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는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0조에 의거 신축 주택은 2012년부터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가 의무화됐고 기존 주택은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를 2017년까지 유예해 5년간 계도기간을 거쳤지만, 시민들의 관심 부족으로 해당 법령이 알려지지 않아 각 가정에 주택용 소방시설의 설치가 다소 미흡한 실정이다. 더불어 올겨울 화재로부터 안전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소화기 구비와 화재경보기 설치해 초기화재에 대비해 보자. 이에 해마다 경산소방서는 11월 ‘불조심 강조의 달’을 운영하여 시민에게 화재 예방 분위기를 조성하고 안전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어린이 불조심 포스터 그리기 공모전 ▲우리 집 안전맵 그리기 ▲겨울철 화재 예방 대책 추진 ▲화재 안전 취약계층 소방안전교육 등 다양한 공모전과 예방 캠페인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은 뒤에 약을 처방한다는 뜻으로 이미 화마가 지나가고 후회하면 이미 늦다. 우리가 모두 안전의식을 가지고 한 번 더 화재 예방에 관심을 가진다면 2023년 따뜻하고 안전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경산소방서장 박기형 -
by 노상균 대구.경북 취재본부장[청송소방서 윤태승 소방서장] 어느덧 계묘년(癸卯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1년의 처음이자 마지막 계절인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겨울하면 사람들은 눈, 성탄절, 새해 등 겨울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떠오르겠지만, 우리 소방에서는 화재라는 단어가 우선 떠오르게 된다. 아무래도 겨울철에 화재가 가장 많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소방청 통계에 의하면 겨울철에 전체 화재의 33.9%인 3건 중 1건의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월은 '불조심 강조의 달'이다. 정부에서 11월을 불조심 강조의 달로 정한 배경은 날씨가 추워지는 입동 기간에 실내 활동과 난방기구 사용, 화기 취급이 증가해 안전시설 점검 및 보완, 불조심 홍보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주택화재 예방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택화재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화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장소도 주택이고, 인명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도 주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독주택의 경우 각 가정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화재 예방의 효과는 미미해지게 된다. 그럼,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안전한 난방기구 사용이다. 자리를 비울 경우에는 반드시 난방기구의 전원을 차단하여야 하며, 주변에 가연물이 있을 경우 난방기구를 이격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또한, 문어발식 콘센트 사용을 자제하여야 하고, 난방기구는 안전성이나 성능이 검증된 규격제품을 사용하여야 한다. 둘째, 화목보일러나 아궁이 난방 시 안전 수칙 준수이다. 보일러나 아궁이 주변 가연물 방치 금지, 불을 피운 상태에서 자리 비우지 않기, 주변에 소화기구나 방화수 등의 비치가 필요하다. 셋째, 주방에서 조리기구 사용 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할 경우에는 자리를 비우지 않아야 하며, 조리가 끝난 경우에는 조리 기구가 꺼졌는지 확인을 하여야 한다. 튀김 등 식용유를 이용한 조리 시에는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만약 식용유 화재 시에는 물로 소화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주방용 소화기가 없을 경우 조리기구 불을 끄고, 주방도구 뚜껑이나 젖은 수건 등으로 덮어 연소확대를 방지하여야 한다. 또한 조리기구 주변에는 가연물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넷째, 무분별한 소각 행위를 자제하여야 한다. 쓰레기나 농업부산물 소각은 가급적 자제하여야 하며, 부득이하게 소각해야 할 경우는 바람이 없는 날 안전한 조치를 한 후 실시하여야 한다. 또한, 소각 시에는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하며, 소각 후에도 불씨가 완전히 꺼졌는지 확인을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화재예방책은 소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섯째, 주택용 소방시설을 설치하는 것이다. 소화기는 초기 화재진압에 용이하고, 단독경보형 감지기는 화재발생 시 주변 사람들에게 경보를 하여 대피를 유도하게 된다. 각 가정에 소화기를 1대 이상 비치하고, 각 실마다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설치하며, 사용법도 필히 익혀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주택 화재예방 안전수칙에 대해 언급하였다. 위의 안전수칙을 준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주택화재는 가정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의한다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화재예방 안전수칙 준수로 따뜻하고 안전한 겨울을 보내도록 노력하자.
by 노상균 대구.경북 취재본부장[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사단법인 가야연구원(원장 김성문)이 주최하고 가락대구광역시종친회가 후원하는 제4차 학술발표회가 2023년 11월 18일(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가락대구광역시종친회 대회의실에서 개최한다. 가야연구원은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 조사, 발굴을 통하여 계승과 선양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번 발표회는 먼저 방송에서 역사스페셜로 방영한 『조선사편수회』에 관한 동영상을 잠깐 시청한다. 김성문 원장은 가야국 명칭과 강역, 가야고분군 현황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가 등재할 가야고분군 등에 관한 발표와 질의응답을 한다. 이찬구 박사는 고조선사 왜곡의 실체와 비판에서 소 고조선론, 단군 신화설, 위만 조선 계승설, 평양 한사군설을 중심으로 발표와 질의응답을 한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청송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신승우]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서늘한 가을 날씨가 느껴지는 요즘,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추석을 맞아 납골당을 찾은 50대 여성이 생밤을 먹다가 목에 걸렸으나 근처에 있던 한 시민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응급처치법으로는 심폐소생술이 있지만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음식물이나 기타 이물질 등이 숨을 쉬는 기관인 기도로 흡인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응급처치법 바로 ‘하임리히법’이다. 물건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습성의 영아, 치아가 없거나 약한 노인, 의식이 저하된 환자에게서 주로 발생하며, 초기 대처가 늦어지는 경우 심정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응급처치법을 미리 숙지해야 한다. 이물질에 의하여 기도가 완전히 폐쇄되는 경우 3~4분 이내 의식을 잃게 되고 4~6분 후에는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기도 폐쇄는 초기 응급처치가 매우 중요하며, 기도 폐쇄 환자가 발생하면 즉시 119에 신고하고 구급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하임리히법’을 계속해서 실시해야 한다. 우선, 환자가 목을 감싸며 괴로워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숨을 쉬는 등 숨쉬기를 힘들어하면 기도 폐쇄로 판단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지목하여 119신고를 요청한다. 다음으로 환자에게 스스로 기침을 할 수 있으면 기침을 크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호전되지 않을 경우 등 두드리기를 5회 먼저 시행한다. 2020년 가이드라인부터 ‘하임리히법’을 실시하기 전 등 두드리기를 먼저 시행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임리히법’은 환자의 등 뒤에 서서 주먹을 환자의 배꼽과 명치 중간 정도에(엄지손가락이 배에 닿도록) 위치시킨다. 이때 다른 손으로는 주먹을 감싸 쥐고 한쪽 다리는 환자의 다리 사이로 다른 한쪽 다리는 뒤로 뻗어 균형을 잡은 상태에서 팔에 강하게 힘을 주며 환자의 배를 안쪽으로 누르면서 상측 방향으로 5회 당겨준다. 등 두드리기와 ‘하임리히법’을 이물질이 제거되거나 119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5회씩 반복해 준다. 만일 환자가 의식이 없다면 심폐소생술을 시행한다. 참고로 임신한 여성이나 비만이 심한 사람은 가슴 부위를 뒤쪽으로 당겨주면 된다. 영아의 경우 왼손으로는 영아의 턱을, 오른손으로는 뒤통수를 감싸면서 천천히 안아 올려서 왼쪽 허벅지 위에 영아의 머리가 아래 방향으로 향하도록 엎드려 놓고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영아의 날개뼈 가운데 부분을 세게 5회 두드린다. 이후 턱과 뒤통수를 다시 손으로 감싸서 들어 올려 반대쪽 허벅지 위에 영아의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바로 눕힌 다음 양쪽 젖꼭지를 잇는 선 중앙 부위의 바로 아래 부위에 두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서 빠르게 5회 눌러준다. 영아는 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커서 손상의 위험이 있어 복부 압박은 하지 않는다. 이물질이 제거되거나 119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반복해 주며, 만일 영아의 의식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면 된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기도 폐쇄 환자를 접할 수 있으며, 나의 소중한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주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기도 폐쇄 응급처치 요령을 잘 숙지하여 안전한 일상생활이 되길 바란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