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재한유엔기념공원에서 ]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모임에서 부산에 있는「재한유엔기념공원」에 갔다.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 때 우방국의 젊은이 수천 명이 영면하고 있다. 이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의 무덤 앞에 숙연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리는 참전국 국기가 게양된 곳으로 갔다.   유엔기 게양대 앞에서 한국을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의 명복을 빌며 각각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쳤다. 고개를 들고 게양한 각 나라의 국기를 보는 순간 제일 뒤편 오른쪽에 독일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독일 국기를 주목했다. 한국에 직접 전투병을 파병한 나라는 열여섯이고 의료진을 보낸 나라는 다섯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독일이 추가되었다. 왜 독일이 추가되었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연유를 알아보았다.   독일은 왕권 국가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히틀러는 다시 독일로 국호를 바꾸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평화협정인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도 패했다. 패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담당으로 분할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지역은 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으로, 소련이 담당한 지역은 공산주의 체제인 동독이 되었다. 1990년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한 후 같은 민족으로서 강대국이 되었다. 한국도 평화통일로 더 발전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서독은 6•25전쟁 중에는 의료진을 파견하지 않았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긴 서독은 1953.7.27. 정전협정이 있기 몇 달 전에 자기들도 의료진을 파견하겠다고 유엔에 제안했다. 유엔에서는 서독의 의료진 파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휴전이 된 후에 서독은 자진해서 부산에 의료진을 도착시켰다. 그들이 치료하던 곳을 부산 시민은 서독병원이라 불렀다. 공식 명칭은 적십자병원이다. 일백여 명의 의료진이 1953년부터 5년간 30여만 명의 부산 시민과 피난민을 무료로 치료하고 약도 제공했다. 6천 명 이상의 임산부도 돌봐주었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들의 봉사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서독 의료진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최신 의료 장비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또한 의학 지식도 모두 전수했다. 그들의 인류애가 나의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후 한국은 독일의 위대한 의료정신을 빛내기 위해 통일된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2018.6.부터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독일 국기를 게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공원은 유일한 유엔 묘지로 평화의 성지(聖地)다. 이러한 성지에 자기 나라 국기가 게양된다는 것은 큰 경사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폴란드에 아우슈비츠(Auschwitz), 헤움노(Chełmno) 등의 절멸수용소를 세웠다. 거기에 유대인들을 가두었다가 틈만 나면 죽이곤 했다. 독일군의 유대인 대우는 매우 잔인했다. 목욕탕으로 위장한 가스실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유대인들을 가두고 가스를 살포해 한 번에 수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다. 후에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과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뒤늦게나마 사과를 한 것에 조금은 내 마음이 풀린다.   전쟁은 서로가 희생당한 사람이 많게 마련이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쟁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 국민이 평화의 성지에 자기 나라의 국기가 게양된 것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으로 본다. 2022.11.에 독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내외도 재한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고 계속해서 독일 국민이 단체 참배를 많이 오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독일 군인들이 참배를 많이 오는데 그들이 들어올 때의 표정은 어두운데 자기 나라 국기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환해진다고 한다.   독일은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4.12.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한국은 산이 많은 지형인데 산업 발전을 하려면 일본과 손잡고 고속도로를 놓는 게 나라를 발전할 수 있다.”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거절하자, 에르하르트 총리가 “독일은 프랑스와 열여섯 번을 싸웠는데 그래도 전후에 양국은 손을 잡았다. 지도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라고 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다. 독일의 부활을 위해 프랑스의 지원이 컸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국은 1965년 한일(韓日)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이 체결되자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며 상식을 벗어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에 의한 배상 청구권자금과 서독 차관으로 1970년 포항 종합제철소가 착공됐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포항제철이 생산한 철강 제품으로 ‘포니’ 자동차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지도자는 소신이 있고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숙한 마음으로 유엔기념공원을 계속 둘러보았다. 미국은 6•25전쟁 때 전사자가 수만 명이었다. 이곳에 묻힌 병사가 적었다. 미국은 전사자가 발생하면 그들의 유해를 자국으로 가져가서 봉안한다고 했다. 이곳에 묻혀 있는 40여 구는 전쟁 후에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병사들이었다. 한국에서 사망한 미군들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거나 가족들이 한국 땅에 봉안하기를 원하는 경우라 한다. 자국의 전사자를 모국의 영토에 묻히도록 하는 미국의 병사 사랑 정신도 본받을 만하다. 미군들의 부부 합장묘가 다섯 쌍 있는 것은 부인이 모두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현재 한국을 도운 임들이 있었기에 자유롭고 발전한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희생과 봉사 정신이 고마움으로 내 가슴에 새겨진다. 오늘따라 이 공원에 핀 붉은색의 겹벚꽃이 임들의 고귀한 정신을 한층 더 빛내 주는 듯하다.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  

5월 가정의달을 맞아

  [광주 전남 가정평화 지구 조병석 회장] 5월 가정의달을 맞아 가정평화협회 광주 전남지구(회장 조병석)는 회원 100여 명과 함께 지난달 전국적인 행사가 4/27-28, 문경리조트에서 '한국가정평화협회 FPA지도자 한마음축제'가 열렸다.   저출산, 고령화 대한민국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시점에 열린 이번 행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층이 함께한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듯한 재미있는 분위기로 모든 세대, 연령층이 참여한 행사여서 서로가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더욱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행사였다.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계몽슬로건으로 가정의 위기를 타파하자는 어느 지도자의 소감발표는 제2의 새마을운동 정신으로 전국민이 함께 극복해 가자는 말처럼 의미있게 다가왔다.   내 가정부터 참된 가정을 꾸려 주변 이웃에 실천하자는 홍익인간 정신을 살려 한국형 가족주의의 근본을 되살리자는데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 홍익인간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가정 이상을 올바로 세워 글로벌 가족공동체로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의 큰 이상은 우리가 노력하고 실현해 가야 하는 과제다.   세계를 선도하고 리드하는 정신문명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우뚝서서 가기위해서는 나 자신과 가정을 둘러봐야 하고 '가화만사성' 한자어를 늘 되새겨 봐야 한다   이제, 가정가치회복운동의 큰 깃발을 올리고 올바른 가치관 정립으로 결혼.성, 가정에 대한 정립과 축복된 가정 만들기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그리고, 가족 속에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정의 소중함을 어린 자녀에서부터 가르치고 가정 행복의 아름다움을 사회적으로 더 드러나게 해야 한다.   또한, 모범적 부부.부모, 자녀 발굴하고 칭송해 주는 사회적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국가 사회발전은 가정평화로부터 온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이슈를 대중적인 사회화 운동으로 확대해 가는 K- 가족 축제 한마당으로 진일보해 가기를 희망해 본다.   

[천리포 해변에서]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문학 단체에서 대구에서 먼 거리에 있는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에 갔다. 수목원과 접해 있는 천리포 해변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무인도 닭섬을 보았다.   우리나라 남과 서해안에는 많은 섬이 있다. 각 섬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붙어 있다. 특히 닭의 볏처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무인도 닭섬이 여러 개 있다. 그중에서 천리포 해변에서 보이는 닭섬은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닭의 볏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닭의 볏처럼 생겼으므로 주로 닭섬이라 부른다. 닭섬 서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전한다. 나는 이곳을 낭새섬이라 들었다. 수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한국에 귀화하여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밀러(Call Ferris Miller)가 섬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사는 ‘바다직박구리’인 낭새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낭새섬이라 불렀다고 했다.   천리포 해변에서 닭섬까지는 약간 떨어져 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해변에서 닭섬까지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직접 눈으로 바닷물이 좌우로 갈라져 모래사장이 드러나는 광경은 신기했다. 달의 인력에 의한 밀물과 썰물의 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이곳 주민 모두가 이곳에도 신통한 힘이 존재해 있으리라 믿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닭섬과 천리포수목원 사이를 바닷물이 꽉 채워져서 바닷물 밑이 어떠한 모습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평소처럼 평범한 바다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맑고 푸른 바닷물의 파도 소리는 나의 내면을 뽑아내려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밀려 나가는 파도에 평소 불쑥불쑥 올라오는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훌훌 던져 버리게 한다. 마음이 정화된다는 것은 이러한 느낌인지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닭섬에 살았다는 낭새의 모습이 궁금했다. 낭새의 수컷은 등, 목의 앞쪽, 위쪽 가슴은 잿빛이 도는 파란색이고 가슴 이하 아랫면은 진한 밤색이다. 암컷은 수컷보다 옅은 밤색의 바깥꽁지깃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닭섬에 직접 가 볼 수 없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멀리서 바라볼 기회가 주어져서 이 또한 즐거움이 채워진다. 낭새는 주로 해안 절벽에 살고 내륙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암수 단독으로 생활하고 각자 세력권을 형성한다고 한다. 번식기에는 계속 지저귀며 수직으로 날아올라 과시하는 행동을 한다니 동물의 수컷이 과시하는 행위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낭새는 자기들 영역에 사람이 침범하면 ‘삐이익~~, 삐이익~~’ 소리를 내면서 경고한다고 한다. ‘저리 가라’는 뜻의 울음소리로 들린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예쁜 소리를 낸다고 한다. 낭새들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다. 간혹 산행하다가 보면 자연의 경치와 청명한 새소리에 내 마음이 황홀감 속으로 빠질 때가 있다.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힐링 되는 듯했다. 이럴 때는 나도 그 새의 소리처럼 내면 가만히 있다가 똑같은 소리를 내어준다. 그 새의 이름과 소리의 뜻은 모르지만, 새와 함께 자연 속에 동화되는 느낌이었다.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사람 4명이 썰물 때 닭섬에 들어가 낚시하다가 밀물에 갇혀서 고립되었다는 보도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얼마 후 태안해양경찰서 구조대에 의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는 소식은 나의 가슴을 안정시켜 주었다. 나도 오래전 썰물 때 남해 해변 바위 위에 선글라스를 두고 나온 후 생각이 났을 때는 선글라스 둔 자리가 흔적도 없이 바닷물이 차 들어와서 안타까운 일을 경험했다. 소리 없이 밀려오는 밀물의 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단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도 현명한 삶인 것 같다.   닭섬에 낚시꾼과 해산물 채취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낭새가 날아간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생태계를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닭섬은 천리포 해변에서 보면 바다에 조그마하게 떠 있다. 닭섬과 닮은 뭍닭섬도 있다. 뭍닭섬은 천리포 해변 남쪽에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뭍닭섬이라 부른다. 뭍닭섬 가장자리 해상에 덱(deck)이 설치되어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섬의 산책로 중간쯤에 있는 출렁다리는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한 바퀴 도는데 바다의 풍광과 싱그러운 수목의 향기를 맡으면서 가볍게 산책할 수 있었다.   동료 몇 명과 뭍닭섬을 한 바퀴 산책하고도 출발 시간이 남았다. 천리포 해변에서 한 동료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에 도착해서 닭섬에 들어가 갯벌 체험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갯벌 체험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바다 생물을 채집할 좋은 기회다. 태안의 갯벌은 주로 바닥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바닥이 단단해서 바지락, 동죽조개, 서해비단고둥, 갯고둥 등이 주로 잡힌다. 태안의 갯벌은 찾는 이들에게 체험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밀물 때 바닷물로 덮여 있다가 썰물이 되면 육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썰물 때 바다 깊은 곳까지 가서 갯벌 속에 숨어있는 고둥이며 조개 등을 자녀들과 직접 채취할 수 있는 체험은 부모와 자녀 간의 정을 두텁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천리포 해변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지난날에 가졌던 욕망, 이기심, 불친절 등 마음의 사진들이 한 장, 두 장 떠 오른다. 이내 바다가 삼킨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진천의 농다리]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충북 진천에는 돌로 만든 농다리(籠橋)가 있다. 진천에서 볼일을 마쳤는데 동료 한 사람이 진천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 년된 농다리에 가 보고 싶다고 한다. 어떠한 다리인지 궁금하여 나의 승용차는 농다리로 향했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농다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농다리까지는 지척의 거리라서 걸음이 가벼웠다. 좁은 길옆에 있는 「농다리유래비」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농다리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세금천(洗錦川)에 축조된 석교로써 사서(史書)인 『상산지(常山誌)』와 『조선환여승람』에 축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농다리를 놓기 전 추운 겨울 어느 날 친정아버지의 죽음으로 다리가 없는 세금천을 건너려는 아낙이 있었다. 임 장군은 아낙의 효심에 감동하여 말을 타고 돌을 날라 농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농교라는 용어는 돌들이 대바구니처럼 얽히고설켜 있다고 해서 대바구니 ‘농(籠)’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진천군 향토지 『상산지』에 보면 농다리는 진천읍에서 남쪽 방향 4km 지점에 있는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다리다. 고려 초엽에 굴티마을에 사는 임씨(林氏) 장군이 음양을 배합하여 자줏빛 돌로 축조했다. 별자리 28수(宿)에 따라 수문 28칸으로 만들어 1개의 상판석으로 이어 하나의 활(弓)이 뻗쳐 있는 것처럼 축조했다. 이미 오래되어 4칸이 매몰되어 현재는 24칸이라고 했다. 유래비 바로 옆에는 2008년 11월에 세운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가 있다. 「사적비」에는 28칸을 모두 복원했고, 28수는 신비력을 내포하고 있는 경성(經星)의 수라고 한다. 경성은 천문학에서 별자리를 이루는 항성을 말한다. 이 항성을 대표하는 별자리인 28수는 제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임 장군은 28수의 별자리를 생각하여 농다리를 만들어 소원을 빌게 하는 기도 도량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별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별을 행성이라 하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해와 달을 합쳐서 7정(七政) 또는 7요(七曜)라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 월, 화, 수, 목, 금, 토로 요일 이름이 되었다니 천문학자들의 지혜에 새삼 놀랐다. 동료와 「농다리유래비」,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를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확 트인 세금천에 걸쳐 있는 기다란 농다리가 펼쳐졌다. 농다리 앞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생거진천’이란 글씨를 큼직하게 배치해 두었다. 처음 보는 문구에 매료되었다. 생거진천(生居鎭川)과 함께 ‘사거용인(死居龍仁)’이 사용되고 있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었다.   진천에는 옛날부터 물이 많고 평야가 넓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풍수해가 없어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므로 생거진천이라 했다. 용인은 산수의 경치가 아주 좋고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으므로 사거용인이라 불렀다고 한다.다른 이야기로는 옛날에 같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진 ‘추천석’이 진천과 용인에 살았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은 마음씨가 착한 농부인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용인의 추천석이 아닌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왔기에 다시 돌려보냈다. 이미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신에 진천의 추천석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 살았다고 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라 한다고 했다.   농다리 위로 걸었다. 자줏빛 색깔의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교각을 쌓아 올렸다. 교각을 쌓으면서 석회나 시멘트 없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조상의 지혜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교각과 교각 사이에 약 1.5미터 정도의 기다랗고 무늬가 있는 상판석을 얹어서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농다리 위를 건너는데도 서로가 질서를 지켜가며 웃는 표정으로 상대방이 살짝 건너길 기다려 주는 모습이 농다리를 더 기억하게 만든다. 농다리 교각 위에 걸친 기다란 상판석 옆으로는 좌우에 공간이 있다. 다리 위로 오가는 사람을 피해 잠시 교각 위에 앉았다. 교각 사이를 지나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임 장군이 고장 사람들을 위한 정신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다리를 오가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농다리가 높아서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 바닥이 높아져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강물 줄기가 힘차게 흐른다. 진천의 기상을 연상하게 한다. 농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길 따라 낚시하는 사람의 여유로움은 농다리와 어우러져 시 한 수라도 지어야 할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높은 곳에 있는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덱(deck)이 잘 설치되어 있고 주위에 있는 화초와 나무는 오르는 길을 마음 편하게 한다. 덱 주위로는 따뜻한 봄 햇살을 머금은 벚꽃이 활짝 피어 목화꽃처럼 보인다. 농암정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세금천의 풍광은 구포 다리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만큼 널찍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초평호도 한눈에 보인다. 초평호를 가로지르는 푸른색의 긴 하늘다리는 천상의 세계로 연결하는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옆에는 진천군과 관련 있는 역사 인물들의 명패석이 인상 깊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조선의 문인화가 이하곤, 『여지승람』의 증보 편찬자 최석정, 가사 문학의 대가 정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군 김유신(흥무대왕) 등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세월의 향기가 있는 곳이었다.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고 소박했다. 다리 하나에도 28수라는 천문학을 접근하여 축조한 임 장군의 주민 사랑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농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소원 성취는 지금도 계속되기를. [진천의 농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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