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단의 필자] 시를 쓰는 일이나 살아 가는, 일이나 구분에서는 다름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시 또한 유기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생로병사의 과정이 인간의 생애와 유사하다는 점을 건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의 표정은 삶의 표정과 같이 진지하고 때로는 땀을 흘리는 표정도 감지되고 더러는 생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가락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때,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반응을 갖게 된다. 시가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음은 인간의 감정과 반응의 감수성과 유사성을 가질 때 인간은 시에 열정을 투사하면서 감동의 종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감동이란 결국 인간의 정서와 시적인 정서가 함께 매칭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상징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빛- 밝음이면서 의미요 가치의 개념으로 환산되는 상징에서 시의 가치는 인간의 가슴을 장악하는 가락을 만들 수 있게 되기에 시인은 빛을 만드는 자요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점에서 頂點을 향한 노력이 투척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 그리고 생의 심사(深思)한 명상의 숲을 지났을 때, 비로소 의미와 빛을 알아 차리는 인간의 체온을 가져야 한다.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이지(理智)의 냉엄한 잣대를 가지고 사물과 대상을 투시하는 눈을 가졌을 경우 시의 이미지를 조종하고 창조하는 사람의 체온을 가질 수 있고 또한 유지하는 정감의 소유자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초감각 또는 범상한 의미를 위해 자신을 망각하면서 인간의 의미를 위해 의복을 제작하는 창조자라는 뜻이 곧 유기체를 창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김정옥의 온화함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물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창조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다. 이제 그의 시적 특성이 독자 앞에 어떤 소리로 다가오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2. 감수성의 표정 1) 자기만큼의 그릇 인간은 자기만큼 살고, 자기만큼 표현하고, 자기만큼의 한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자기라는 그릇을 가지고 그 그릇에 의미를 채우는 일이 고작일 뿐 과욕은 넘치게 되고 부족은 갈증을 유발하면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에는 자기라는 몫을 모두 맛을 보고 사는가 아니면 부족에 안타까움을 갖느냐는 오로지 당사자의 능력으로 좌우된다는 점에서 존재가 형성된다. 때문에, 열성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장하는 일이 운명일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의 명제를 당시 민중들에게 깨우침의 도구로 말한 것도, 결국에는 존재를 확인하고 살아가는 의지의 사람과 맹목의 인간에게는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그대여 하얀 달빛 되어 연못 위를 비추어 주세요 그러면 난 희망의 꿈을 실은 종이배 하나를 띄우겠습니다 예쁜 나의 꿈과 고운 사랑의 빛은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서 밤마다 별들이 또르르 내려와 놀고 새들의 노랫소리 떠나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작은 호수에 그대의 마음도 와주신다면 언제까지나 달을 품듯 별을 품듯 행복을 꼭 껴안을 수 있을 텐데 『작은 호수』 중 김정옥의 호수는 작은 호수가 자기 자신을 암시하고 표징(表徵) 하는 의미로 인식된다. 이왕이면 크고 큰 호수이지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일은 아무래도 시인 자신의 상징성과 같은 일로 추측된다. 1연에 “그대”라는 미지칭으로 호소로 시작- 그대는 미지의 대상이고 합하기를 염원하는 상징이라면 작은 호수에 동일성을 이루는 일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의지적인 심리가 백색의 감각적인 “달빛”과 같은 은은함을 더하는 무드로 흐르고 있다. 공간적인 이미지가 밤이고 작은 호수 그리고 달빛이라는 뉘앙스가 정적인 현상에서 기다림이 점철, 되었다. 2번째 연에는 희망을 실은 배는 이동의 이미지가 그리고 3연에는 보금자리에 꿈과 사랑의 아늑함을 부추기게 되고 4연에 별과 새가 어울리는 환상적인 호수에 소리의 울림이 노래로 진전하고 이 공간에 그대가 와준다면 에 소망이 애처롭다. 이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시인은 달과 별들의 위호(衛護)를 받으면서 궁극의 지향점인 “행복”에 이를 것이라는 상상의 여백이 넓어진다. 이런 꿈은 곧 작은 호수의 소망이자 시인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최종의 염원을 암시하고 있다. 작은 호수의 시인이고 여기서 행복과 따스함을 염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가득한 느낌을 준다. 적극적인 심성보다는 소극적이고 우람하기 보다는 작고 아담하면서 정다움을 느끼는 평화의 이미지가 앞장선다. 이런 총체적인 이미지가 김정옥 시인의 표정이고 인상인 듯싶다. 2) 사계의 표정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생의 순환과 같이 서로 연계되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진전의 바퀴를 돌린다. 이는 생로병사의 혹은 동서남북 등 우주적인 현상과 인간의 삶은 늘 연결 고리를 갖고 진행하기 때문에, 봄에서 삶을 준비하고 여름에서 꽃을 피우면서 씨앗으로 가을의 준비를 갖출 때, 이미 겨울은 삶의 뿌리를 땅속 깊이 의식을 감추고 계절을 보내게 된다. 이런 비유는 시에서도 높은 빈도로 시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기ㅁ정옥의 시에서 봄 의식은 태동의 의미가 생명으로의 길을 찾으려 한다. 『꿈꾸는 봄』 『기웃거리는 봄』 『봄비는 오는데』 『사계절의 연가』 『봄이어라』 『봄의 노래』 『봄비가 내리는 이유』 『슬그머니 오는 봄』 등 봄날의 이미지는 생동과 삶의 약동을 준비하는 계절로 들어간다. 갈증 난 초록의 군상들 긴 목 뺀 기다림으로 반기며 마시는 빗방울 풀기 없는 응달에도 귀하디귀한 감로주로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비를 흠뻑 맞으며 정처 없이 훌쩍 떠나서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 ··· (중략) ··· 촉촉이 젖어 드는 비처럼 보고 싶은 이를 불러 본다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봄비 오는데』 중 봄은 비로 의해 비로소 문을 열게 된다. 마치 굳은 패각(貝殼)의 땅- 맹위를 떨치던 겨울의 두꺼운 의상을 벗고 비에 젖으면 잠을 깨는 자연의 숨소리가 푸른 이름을 불러오는 진행이 계속하게 된다 때문에, 봄은 비의 전령이 있을 때, 문을 열어젖히는 생명의 약동이 준비를 넘어 세상의 입구에 이를 수 있는- 환희의 준비가 갖춰진다. “긴 목 뺀 기다림”은 곧 봄의 특징이고 준비라는 점에서 여느 계절과는 다른 이미지가 풍부해진다. 왜 그런가 하면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싶다”의 소망이 자라는 계절- 여기에 비가 올 때 비로소 봄날은 화려한 시절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적극적이기보다는 다소 소극적인 이미지-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만나는 열정이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라는 “싶은데”의 소극성 때문에 여성적인 뉘앙스를 대입하면 이해가 된다. 『분수대』 『여름 식탁』 『아직도 여름은』 『소나기 낙뢰』 『여름이 오는데』 등 여름의 시는 맛과 소리와 화려한 꽃들의 이미지가 어울려 분주한 시절이 구가 된다. 가장 왕성한 기운이 계절의 꽃을 피우고 절정의 높이가 녹음으로 덮이는 때를 여름이라 칭하면 인생의 화려한 꽃은 행복을 향한 이미지 구축이 된다. 하늘은 높고 불타는 태양이 나를 맞는 날 파도로 넘실대는 너울이 귓전에 올라앉은 달콤한 속삭임 너와 나의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행복이란 이름으로 살포시 다가와 고운 미소의 속삭임이 너무 좋아 따가운 모래알이 빚어낸 조약돌도 뭐가 그리 좋아 동그라미 그릴까? 아마 행복한 웃음꽃 하트를 그리겠지 『그 여름의 아름다운 날에』 중 모든 사물은 왕성한 시기를 견디는 성하(盛夏)의 계절은 주기적으로 다가든다. 그러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변화일 뿐 전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여름의 중심에서 행복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문에, 여름날이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우고 생의 의미가 한층 빛나는 듯 개화의 중심에 선다. 시원한 분수는 하늘을 향하고 때로 소낙비와 낙뢰는 두려움을 키우는 듯 큰소리로 심장을 자극한다. 여름은 요란과 극성 그리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저마다 특색을 갖추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간다. 김 시인은 파도에서 달콤한 속삭임을 감상하고 만남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행복이란 이름 앞에 스스로 낮추는 겸손이 보인다. 가을은 조락의 이미지가 왕성해진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삶의 미래를 위해 저정 공간을 넓히는 이미지 앞에 전별을 준비한다. 정리의 마음이 앞서고 이별 같은 준비가 목록에 들어갈 때 바람은 스산한 노래를 부르는 계절- 가을 앞에 시심은 가락을 만든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넌 달보다 더 환한 미소로 손짓하며 말을 걸어오는구나! 우리가 정다웠던 그 시절 생각난다. 손잡고 눈짓만 해도 가슴 설레던 순간들 영상으로 그 순간이 머릿속을 회오리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너의 모습 아득히 먼 곳에서 다시 자꾸만 멀어져 저기 별이 되어 반짝이나! 내 가슴 아린 추억이어라 『가을밤에 널 생각하며』 가을은 사념의 길이 넓어지는 때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을의 무드는 애상적이고 페이셔스함이 여린 감정을 조장하는 때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시가 분위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감수성의 계절이라는 듯 시인은 가락을 가을의 이미지에 실어 보내는 분주함에 추억이 넓어진다. “반짝이는 별” 혹은 “달”의 분위기가 “미소”로 시인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부풀어 오르는 추억 앞에 “내 가슴 아린”의 정조가 바람 앞에 더욱 흔들리게 된다. 즉 가을의 정취는 사념의 길을 넓히고 삶의 애뜻함이 길을 만들게 된다. 『갈대의 노래』 『가을아』 『추상』 『이 가을에』 『낙엽』 『10월 마지막 날』 『애수』 등 따스함을 열망하는 의식이 시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 가락이 마음의 길로 유장하게 흐른다.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그것도 흰빛의 이름에 포근함을 꿈꾸는 시절의 낭만이 더욱 여유로워질 때이다. 아울러 마지막을 준비하는 겨울 입구에서는 예외가 아닐 것이다. 서럽도록 시린 향기 내 가슴에 꽃망울로 활짝 피어났다가 빛바랜 꽃잎처럼 시들어 갔었지 어젯밤 꿈속에서 토닥토닥 덮어준 목화솜 이불 그대가 놓고 간 수정보다 투명한 꽃밭 때문이었지 『첫눈 오는 날』 겨울을 바람이 불고 파도는 높이를 위해 너울을 높이면, 따스한 사람의 열기가 더욱 갈증나고 혹독한 냉기 앞에 스스로를 감추는 연습을 진행하는 때이지만 죽음이 덮인 것은 아니다. 오로지 준비의 때이고 삶의 내일을 생각하는 양이 많이 쌓이는 계절이 겨울의 엄혹한 특징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김정옥 시인은 순수로 하얀 계절의 여유를 알아차리는 이미지가 보이고 또 삶의 여백에 쌓이는 미소가 곱다 계절은 변화 앞에 특징이 드러났고, 이는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투명한 정서의 가치로 돌릴 수 있는 부분이면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등 계절마다 변화의 이미지가 생동감으로 특색을 시화한 노고가 두드러진다. 미래로 문을 열기 위해 기다림의 씨앗은 언젠가의 날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겨울의 따스함- 희망과 내일을 대동하고 견디는 인종의 시간 앞에 펼쳐지는 겨울의 환타지가 조요한 화음을 횐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겨울의 미감이 반짝인다. 산기슭 외로이 홀로 피어난 고운 모습 향기로워라, 산새들과 정답게 뛰놀던 들짐승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네. 『들국화 꽃』 중 들국화의 표정은 곧 시인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인상이다. “홀로 피어난”의 적당한 고독과 “고운 모습”에 간직한 향기의 승화와 서로 어울리는 열린 마음의 행방과 “묵묵히 자리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미에서 시인의 모습이 겹치는 것으로 자화상을 삼는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시인 자신을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 꽃은 자발(自發)성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에 몫이기 때문이다. 시는 항상 자신으로 향하는 점에서 비유와 은유 등의 의상을 걸치고 있을 뿐 진실의 모습을 은근히 감추고 있을 때 독자는 이를 알아차리는 수고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의 감흥을 받을 수 있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3. 에필로그 시는 추상의 구름을 걷고 지상의 선명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락을 만들어야 한다면 김영옥의 시는 다양한 사물의 모습에 자신의 표정을 대입하여 가락을 만든다. 아울러 여성적인 섬세한 눈으로 포착한 정서는 그만의 영역에서 훌륭하게 조합하고 어울리는 하모니의 표정에 밝고 환한 이미지들이 수런 거린다. 사계절의 변화를 스크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들어있는 계절의 다양한 표정들이 살아서 담소하는 정겨움이 유난함을 느끼게 한다. 차와 음식에 대한 깊이가 맛으로 다가올 때, 신선미 또한 유난한 정서로 시의 맛을 부추기는 여유가 있다. 더불어 순수한 표정에서의 그리움이 손짓처럼 다정하고 따스함으로 강이 흐르는 시의 품위가 다가오는 것 같다. 꽃을 사랑하고 속삭임에 귀를 열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정말 정겹고 맛나고 맛깔이 난다. 가족을 중히 여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품성의 본질이라면 김영옥의 시에는 그런 속삭임이 정갈하고 순수하다. 이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면에서도 시인의 시적 수원지는 매우 풍부하고 담백한 인상을 남기는 시인의 면모가 인상적이며 출중하다고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낯선 이국에서 생활하면서 시를 쓰는 일이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언어권이 다른 공간에서 우리의 언어로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지만 낯선 섬에서 낯선 언어로 쓰는 정서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의문점은 시인 자신에게서 더욱 갈증일 것이고 고달픈 고행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동일 언어로 소통하는 공간의 정서와 타국에서 표현된 정서의 교류는 매우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낯선 곳에서 감수성은 발성될 것이고 시와 만나는 일이 가능할 것이지만 문자화된 작품의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라 우려가 남는다. 때문에, 모국으로 보내서 소통의 기회를 엿보는 작품의 표정은 현실감이 떨어질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시와의 치열성 문제와 외국에서의 정서와 한국 정서와는- 외국인에게는 낯선 표정만이 교류될 것이라는 점 가장 민감하고 정확한 시의 경우 이국에서 정착한다는 것이 확실히 소통에 지난한 일이라는 데서 동감하게 된다 소통의 어려움은 창작의 이완을 가져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홍일점의 작품을 접하고 위와 같은 갖는 것은, 그가 30년을 조국과 떨어져 살면서 시를 창작한다는 일은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필자 또한 조심스러운 마음이었으며 난감하고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서 섬세하고 따스한 정감이 흐르는 시의 품격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고 그의 고백을 들어가 보기로 한다. 풋고추 된장 눈앞에 아른아른 잠들라치면 흔들어 깨운 생각들이 손잡고 노닐자, 앙탈을 부렸고 서투른 칼질이 젓가락보다 익숙지 않았기에 촌놈이란 명칭은 떼어낼 수 없지만 열 손가락이 있어도 젓가락 잡을 줄 모르고 서양인보다 낫더라 살다보면 내 집이요. 정들면 고향인데 고국산천 옛 친구들도 그리워 달려갔었지만 변해버린 옛정들은 찾을 길도 없더라. 『서문 촌놈이 양식 먹고』 중 매운맛 고추와 구수한 된장 냄새가 그리운 이국의 생활에서 비록 포크나 나이프로 생활하는 일이 서툰 생활이지만- “촌놈”- 아마도 낯선 의미이어라- 이국의 생활에서도 오히려 아른거리는 구수한 된장 맛과 풋고추의 아삭거리는 소리에 자긍심을 갖는 생활에 꿋꿋함일지라도 고국산천- 옛정들이 “변해버린” 현실에서는 아픔을 고백하는 마음이 측은하다. 비록 선택한 고통이고 아픔일지라도 수구초심의 고향을 지향하는 일은 누구나 갖는 본심이고 진실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홍일점의 시는 사계절의 구분이 명확하고 이를 포착하여 정서의 흐름이 매우 유연하다. 봄날의 시에는 생동의 정서가 펄럭이고, 가을에는 삭연(索然) 함과 쓸쓸함의 중첩 그리고 겨울에는 독목(禿木)의 신산한 고독이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오버 랩 되어 다가오고 더불어 여름의 시가 드문 경우는 환경적인 요소- 환경은 정서를 촉발하는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많은 접촉을 하게 되면 생각이 집중되는 것과 같은 이치는 감수성의 친소 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2. 상념의 날개들 1) 비 비는 생명과 물의 상관을 떼어 놓을 수 없고, 정화의 이미지를 수반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고귀성을 유추하게 된다. 스며드는 감각을 나타내면서 기체와 고체의 사이에 변화를 거치기도 하고, 천상의 소식이 지상에 아름다운 변화- 꽃이 되거나 갈증을 삭여주는 느낌에 시원함을 수반한다. 때문에, 비는 곧 지상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생명으로의 에너지가 작동되는 가락으로 화하게 된다. 만약 비가 없다면 이는 사막의 삭막함을 연상하게 되고 불모의 땅이라는 점에서 대척적인 이미지로 작동된다. 인간의 신체 구조나 모든 생물체에 물이 70%가 물의 구성요소일 뿐 아니라 지장의 생명에게는 필요의 절대성 때문으로 물의 역사는 곧 인간의 순환을 이어주는 자연의 고리는 단절되기에 비, 혹은 물의 이미지는 항상 시의 원천의 요소로 자연과 자연의 생명체를 연결하는 바탕이 되어 왔다. 지상의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여 비가 되고, 다시 되풀이, 할 때, 윤회(輪廻)의 업장이 계속되면서 우주의 질서가 형성(形性)되기에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 즉 원형이정으로 돌아간다는 원리이다. 홍일점의 시는 비를 가지고 잦은 빈도로 얼굴을 내민다. 『봄의 일상』 『봄비 내리던 날』 『별이 되고 달이 되는』 『어제 내린 비』 등은 새로운 변화를 유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시적 변화를 갖는 물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어 보인다. 밤새워 울던 비는 구름 위에 앉아 한 줌 햇살 그리워 울먹이다가 무거워 속마음 참아내지 못하고 서글피 우는 눈물이었지만 마음에 파란 창이 열리면 파릇한 새싹으로 마음 달래고 화사한 마음 흰 구름 되어, 여유롭겠지 『어제 내린 비』 중 마치 상사화처럼 비와 햇살은 서로 떨어졌지만 실제로는 밀접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은 햇살이 숨어야 하고, 햇살이 나오는 날은 비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을지라도, 안으로는 이 둘의 관계는 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면서 존재를 왕성하게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뿌리에 물이 공급될 때, 삼투압의 줄기를 따라 잎에 이르는 길이 열리고 햇살은 다시 잎에 영양을 만드는 장치를 지속하게 될 수 있는 이치는 햇살과 물의 연관으로 서로 존재가 분명해진다. “비”는 햇살이 그리워 울먹이는 순간을 지나 “눈물”의 이미지로 지상에 내려오는 과정을 통해서 “새싹”으로 전환하면서 “화사한 구름”이나 “여유로운” 회전(會戰)의 길을 만드는 비의 일생이 그려진다. 불가의 이미지로는 윤회이고, 생명체는 매개체의 역할이고, 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꽃을 볼 수 없는 생명의 기능을 비는 수행한다. 비가 있어야 봄이 온다. 봄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또 꽃이 피어나는 계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비의 역할은 인연의 긴 줄을 잡아 회전하는 역할에 잡아든다. 그대는 아시나요. 비가 오면 무심결에 창밖을 보는 버릇을 그대는 아시나요. 밤새워 내리는 비가 그리워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길잃은 미아처럼 그대 마음을 찾아 나선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그늘진 돌 틈 사이 이끼가 자라듯 알 수 없는 마음에 싹트고 있는 사랑을 그대는 아시나요. 연둣빛 새싹이 움터 오르듯 그대의 마음결에 꽃피운 사랑을 『그대는 아시나요.』 중 그대를 아시나요. 를 5번 반복함으로, “꽃피운 사랑을” 강조하게 된다. 이름을 가져오는 인자(因子)는 비가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부드러움을 상상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랑의 꽃으로 연결되는 길이 형성된다. 그러나 비가 오면 누구나 창밖을 바라보는 버릇이 기다림과 매칭이 되면서 사랑의 감수성이 서서히 자라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기다림은 곧 연정의 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비가 그리워 흘리는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순수의 물결이 되고 이는 “찾아 나서는 길”이 유추가 된다. 다시 비를 통해서 연둣빛이 움트는 것은 사랑의 감정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자연스레 사랑 앞에 당도하기 때문이다. 홍일점 시인은 은근함으로 대표되는 비를 통해 잠을 깨우면서 사랑이라는 고귀하고 순수함으로서 시적, 모티브로 달성하기 위해 한 방편으로 비를 동원한 정서가 유연하고 아름답다. 2) 갈증 그리고 봄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변화를 맛보게 된다.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이 있기에 과학으로 해결하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부족은 만족의 모태가 된다 이 어설픈 명제에는 진리가 함축된다. 부족이 만족을 낳고 만족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족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흐릿한 구름 뚫고 한 줌 햇살 찾아와 슬며시 입맞춤하고 간다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숨 고르면 다소곳이 손잡고 거닐 수 있으련만 뜨거운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민 나무 같이 갈구하는 사랑이지 싶다. 『갈구하는 사랑』 중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뜨거운 사랑”을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에서 통용된다. 때문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홍 시인은 이런 정서에 매우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고 “나무같이” 정정한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갈망』 『갈 길을 잃은 밤』 『당신의 눈 속에』 등은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승한 시들이다. 봄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왜 그런가 하면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 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꺽이는 의미를 남긴다. 봄은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 빈집에 신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를 초대했나 봅니다. 앙상한 가지에 꽃, 단장시킨 풋풋하고 청초한 봄 처녀들의 무희는 가슴을 설레발치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릴지 모르지만 간드러지게 웃고 있는 화신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各樣各色) 무희의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디든지 공연 길을 나서려 합니다. 『축제의 봄』 중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며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대”는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처녀들의 싱싱한 모습의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서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불어 바빠진다. 꽃이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주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의 진행하는 질서- 이겨내는 용기 혹은 고통, 아니면 사랑을 지불함으로써,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는 흥취에 젖는다. 3) 가을 노래 홍 시인은 계절 감각이 유난히 뛰어나고 예민한 것 같다.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심이고 참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된다는 느낌이다.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도 남자의 정서- 깔끔하면서도 서늘함에서 오는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하다. 이는 실제의 외로움이나 고독이 아니라 정서상에서 오는 느낌이 반응이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시인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가을 단풍』 『가을 연가』 『가을 여행』 『그리움의 가을밤』 『몇 잎 단풍』 『한 잎 낙엽』 등 가을의 정취는 낭만적인 무드를 선행하고 있는 시들이다. 낭만을 먹고 토해낸 가을은 시들어간 풍경으로 저물어 가는데 하얀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살얼음판을 만들려 하는데 만추에 만삭이 된 절정의 가을은 절벽 위에 우두커니 고개를 떨어트리고 찬 바람에 발등 찍힌 단풍 야위어간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거린 몇 잎 단풍 외줄타기 고개로 떨고 있구나 『몇 잎 단풍』 중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같은 느낌이 짙을 것이다. 그러나 서늘한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젖게 된다. 이는 질축(嫉逐)의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 때문에, 가을 정서는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진다. 홍 시인의 마음은 대상에 쉽게 반응하는 가을 정서 때문에, 쓸쓸한 가을 풍경에 비유-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게 된다. 1연에 “시들어간 풍경”과 “서리꽃의 앙칼진” 표정의 2연 그리고 3연에는 “만삭이 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고개 숙임과 4연에서 슬픔을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몇 잎의 단풍”이 곡예하듯 위태로운 모습에 연민의 정서가 앞장선다. 결국에는 시인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가을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 같다. 이러한 시들을 하나하나 평을 하자면 너무 장문의 글이 될 것 같아 겨울의 논지는 이만 접으려 한다. 4계절을 마무리해야 하지만 장문의 평도 길어지면 식상한 듯하여 마무리에 들어가려 한다. 3. 에필로그 한 사람의 시인은 영혼을 일러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시는 밝아야 하고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이 곧 햇빛에 상관해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조차도 행복으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시인은 일상의 생활에서 이런 경험의 체득을 시화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고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 개성의 문패이며 이를 확고하게 정착하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생활하고 거듭나는 홍일점 시인의 경우는 낯선 정서에서 우리의 언어로 시를 만드는 고역에서도 매듭이 없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만큼 모국어의 표현과 숙달에 능숙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겠다. 한 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면서 다음 단계의 꽃이나 향기로 승화하는 순서를 갖는다. 꽃이 천상의 이미지 곧 향기에서 그의 시 또한 향기로 감싸지는 느김이다. 갈증이 있어 봄은 더욱 싱싱한 인상 더하면서 그대에게로 향하는 사랑의 신념이 굳어 보인다. 가을과 겨울의 정서는 시인의 심상에서 작동되는 개성의 표현일뿐만 아니라 요즘 말하는 간결한 순수를 내포하는 정서로 일관 된다.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한다는 뜻에서 시인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진다. 이로 본다면 홍일점 시인은 가을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풍경화와 계절의 인용을 잘하는 질축하고 질펀한 시인이라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늘 평범하고 추상적 언어 감각이지만 시라는 특수성을 볼 때 이것은 곧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한 개성의 척도에서는 애매모호성이 너무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각주(脚注)가 많은 T.S Eliot의 황무지를 읽으면 그 나름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독자는 일단 난해의 딱지를 붙이며 돌아서는 것이다. 하여 우리 김소월의 시를 읽을 경우 쉽게 아는 척하는 이해가 문득 다가든다. 김소월이나 엘리옷은 분명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가치를 빛내는 점에서 달리 해석을 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경의 이상의 <오감도>를 명쾌하게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평론을 아직본 적이없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황색저널리즘 <인기주의> 고착의 명성을 부추긴 일면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시는 시 같아야 하고 산문은 산문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각주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비유의 장치나 시 적 포장을 걷어내면 속살이 드러나는 의미의 맛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구상화가 있다. 대체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추상화의 숲을 거닐다 구상화의 밭으로 걸음을 옮기고 다시 추상 공간의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시도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질적인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으며 일테면 특징을 이루는 표정을 말한다는 점이다. 시인의 원고를 일별(一瞥)하고 난 느낌은 추상의 숲을 지나는 느낌이고 마치 이중의 기교가 특이하다는 인상이다. 이제 그 표정을 한번 만나보기로 하자. 시집 《골목길 서사》는 총 5부 100편의 시는 이길여시인의 의식 조감(鳥瞰)이 서사로 그린 듯하다. 서사란 현실의 특정한 시간과 과정을 시간의 앞뒤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 촉수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지는 듯 정서가 이어지고 묘미가 다채롭고 신비하다. <2.길에서 만나는 추상의 표정> 바실리칸딘스는순수 추상 예술의 선구자로서 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키고 음악가 바그너의 선봉자로서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탁견(卓見)을 실천에 옮긴 추상수채화의화가이다. 정신의 고도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추상은 일종의 변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공로를 갖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만의 정서를 점과 선, 면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문법은 찬탄을 이어오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시에서도 이런 기법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 영역의 한 축을 감당할 때 일정한 자리를 갖는바, 시인의 창조 기법은 그런 측면으로 볼 때 가까움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산길 고당으로 돌아가니 이마를 맞댄 지붕 아래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고행의 삶의 소리가 내 마음 긁고 때마침 눈물방울 달고 서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눈길이 간다. 제 키보다 큰 담쟁이에 기대 한숨과 울먹이는 아이와 자아 속의 내가 함께 한다 그을린 마음 달래려 가까이 서서 미소로 그려 준다 양팔을 벌리고 선 아이의 그림자에 깃 고운 날개가 펼쳐지고 그새 배시시 웃는 눈망울 내 세상 어디를 크게 흔들었고 쉽사리 재울 수 없는 뭉근한 떨림에 선뜻 돌아서지 못해 서서히 거꾸로 걷고 있다. <산허리 천사의 눈>중 시적 공간은 협소한 산골의 상징에서 화면은 거친 목소리와 더불어 고단한 삶의 목청에담긴아픔이 눈물방울 달고 나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과 울먹이는 모습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개입은 시간의 테이프를 먼 곳에서 가까이 화폭을 전환하는 기법을 구사하면서 위로의 승화가 천사의 날개를 그려주는 그림 속에 펼쳐지는 날개의 바람으로 “그새 배시시 웃는”에서 현실 공간에 화려한 채색이 마음 밭을 보여준다. 시의 기교나 그림의 기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할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경계가 없음에서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재미는 시인의 능력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서의 파편들이 부유하면서 언젠가 결합하는 요소로 작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대상의 표현은 시인의 심리적인 경과에 따라 특징이 드러난다. 가령 습작기에서 원숙기로 들어가는 도정(道程)마다 삶의 굴곡이 들어 있으며 이를 심리적인 기제(基劑)로 나타낼 때 추상의 묘미는 복잡을 단순화하는 형태로 정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액센트릭 한요소를 배제하고 화면 내에 형태적 질서에 예술의 자율성을 구성한다. 결국은 시인의 정서적 특징과 정신의 자유 구가에한몫을다하는 에너지의 창출일 것이다. 시인의 정서적 공간을추적해 보자 잘 달구어진 여름 한낮의 길을 신기루가 덮는다 그 속으로 영혼의 무게조차 가누기 힘에 부친 누군가가 그늘을 거느린 나무에 기댄다. .... 약....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더 울어야만 나를 한 겹 누구를 위해 벗어낼 수 있을까? <매미의여름 나기>중 전반에는 객관적인 서술이고 후반에는 주관적인 이미지가 작동되며 전반엔 보여주는 것으로 풍경의 느낌을 독자가용해시키거나아니면 간과하거나 유념할 사항이고 후반엔 매미가 곧 시적 화자인 ego로 들어오는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둘의 교합에서 자기를 대입하면서 사는 일이 이치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이 기교는 선명한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또렷한 비교 가치로 승화한다. 이 시인의 시는 그냥 무심코 읽으면 혼란이 올 수 있으나 다시 깊게 읽으면 네거티브 필름에 빛을 쪼이면 포지티브(양화)로 선명한 윤곽이 나타나는 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이를 이해하느냐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3.메신저의 굴레> 새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으로 옛날부터 고귀한 존재로 인식을 키워왔다. 애 그런가 하면 인간은 늘 하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 하늘을 지향하는 정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향하는 꿈의 이름이기에 비행기는 다시 로켓이 되고 미사일이 되면 이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있고 달 혹은 화성이나 우주의 유영(遊泳)에의 꿈을 실현하는 시작의 실마리는 바로 새에 출발점이었다. 밤나무를 집으로 정한 새들 잠에 취해 뭉그적대는 나를 알람보다 먼저 깨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나와 나뭇가지를 건너 딛고 제가끔 넘놀며 재잘거리며 새들을 쫓는다 서로 깃을 다듬어 주다 한 마리가 가지에 걸린 햇살을쪼아 먹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하고 나도 눈 시늉을 한다. 시나브로 입꼬리가슬몃슬몃올라가도록 내 마음도 몰랑몰랑 해진다. 순한 생명들의 열어 놓은 새털 같은 아침에 마냥 빠져들어 짝다리 짚은 다리에 쥐가 놀아 옴짝 못하고 서 있다. <하루를 새와> 1연에서 새와 나는 부지런한 새의 울음이 깨우는 관계로 이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취하기 때문에 새는 자기 생존 방법으로 일어났지만, 시인으로 다가온 의미는 잠을 깨우는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시에 2연에 따르면 새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아침의 동반자로 설정되어 사이좋은 새들과의 관계에 시인 또한 동화되어 새의 행동에 동반자로 변한다. 이러한 감염(感染)의 정서는 “몰랑몰랑”해지는 마음의 상태는 새로부터 받은 정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하면 새들이 열어놓은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망연함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림으로 걸린다. 새와 시인의 관계망은 “좋음”을 유지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보폭이 시작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는 모르나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끌어내는 논리를 굳이 설명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혹은 사물을 노래하는 자이지 해석을 하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요하여 누군가 떠올리기 맞춤한 풍경이다 갑자기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인정사정없이 톡톡 터지는 기억들은 입가에 한숨을 몰고 콧등이 매워지게 한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잊었다 여겼던 네가 살고 있었다. 멀고 먼 시간을 돌아 내게로 오는 사람 하나 있다. 하여 나는 기억의 불을 밝히려 눈 한 움큼 뭉쳐 설 등 하얗게매달아놓는다. <기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바람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바람한줄기 무심히 지나가고”로부터 의식의 창문이 열리고 이로부터 물길이 터진다. 그리하여 잊었던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존재의 이미지로 환생하면서 나와 관계의 과거가 문이 열리게 된다. 즉 그 사람의 모습을 인지할 때, 이 시의 모티브는 바람의 촉수가 일깨워주는 시발점으로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동하는 역할의 바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면의 세계를 깨우는 바람에 의해 외부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달자가 곧 바람의 힘이 될 때 시인은 비로소 길을 꺼내는 시작이 작품으로 창조의 길이 나타난 셈일 것이다. <4.에필로그> 그의 시 “어떤 그리움” “희망 사항” “기억을 찾아” “하루를 새와” 등을 보면 창조의 기법이액자(額子) 기법이있다. 풍경을 그리고 다시 그 속에서 풍경이 들어 있을 때, 감상의 묘미가 길을 넓힌다. 시는 꽃과 자연의 모습이 보이고 향기가 하늘로 오른다. 이는 연상의 꼬리가 따라 이어질 때 풍경을 만들고 다시 전체의 풍경이 아름다움을 생성하면서 여운(餘韻)을 남긴다. 이런 특징은 시적 강조로부각되는것이다. 이미지가 지배소가 되는 사물 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아름다움의 연출은 언어 감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모자이크로 짜 맞추는 미감은 성숙의 시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시로서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그리고 심중의 깊이를 풀어내는 기교는 곧 언어의 운용에서 탁월한 미래를 기대하는 요소가 되면서 창작의 시를 “액자 시” “사물 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높이 사고 싶다. 삶의 고귀한 가치가 빛으로 승화하는 상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펜을 내려놓는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이승섭 제 8집 시의 숲에 빠지다.] [이승섭의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이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을 노래하고 부딧치고, 느끼면서 사고한 상상력을 출현시켜 자기만의 물감으로 채우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스트의 에고와 숨기는 미학의 색채를 아름답게 꾸미려 하는 것이다. 나름의 평가는 자신으로 책임의 한계 속에 존재하기에 남의 허락을 받고 나온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시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시인 자신이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기에 자기 운명을 그리기 위해 표정을 만나고 순탄치 않은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에 존재하고 있기에 본인이 분칠하고 신명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 탐구 또한 철학이란 탐구로 용해될 때 시인이 펼치는 색채는 깊이와 넓이를 구비하는 단계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없는 시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언어의 불과한 것이다. 또한 시의 그릇은 삼라만상 우주와 자연현상 그리고 인간사의 모든 영역을 커버하는 도구로 현실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수필이나 소설, 산문 등이 맨 앞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것은 시처럼 삼라만상의 세계를 단 몇 단어로 그릴 수 없기에 시를 맨 위 위치에 놓아 정신의 지표로 삼는 것이라 할 것이다. {2. 시 표정 시법이란} A. 아우구스티누수는 “시는 악마의 술이다. 라는 말을 했다. 이 경우 “악마”라는 말은 좋은 이미지로 풀어내는 “뗄 수 없는 운”적인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마치 끝까지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이치처럼 시인의 삶에 시는 끝없이 그리고 다시 갈증으로 다가든 악마와 웃음과 같다는 말이다. 더불어 홍신남 시인의 불가분 요소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의탁할 곳 없는 세상에 누굴 믿으며 살겠나. 시만이 전부인데 의지할 곳 없는 세상 객 손이나 온다면 시 한수 넋두리 하고 싶은데 그저 영혼만이 가슴에 남아 그리운 시만 남았네. 이 노릇 어이할까? <시의 영혼> 중 인간은 늘 집중하는 정신과 분주한 일상을 사는 이들이 있다면 전자는 집중의 초점이 되는 사람이며 후자는 정신 줄기를 상실한 사람이라면 홍신남 시인은 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의탁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그의 고백은 진솔한 편이지만 변통이 되지 않는 그런 솔직 담백한 느낌이 들며 고백하는 심경이 “영혼만 가슴에 남아” 간절하게 애타는 마음을 표시하는 시인 듯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특성이 있으며 저마다 개성이 다르겠지만 시인은 독특한 그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성의 톡특함은 곧 시의 특성이 되고 이 특성 속에 시인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일정한 패턴으로 유형화 되는 것이다. 꽃 몽우리 열리는 소리 오, 너무 황홀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비에 젖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 꽃이여 세상 밝히는 아늑한 빛이여 눈부신 꽃향기 가슴에 품는다. <꽃의 향기> 중 홍신남 시인은 친숙하고 온화하며 따스함을 간직한 시인이다. 위의 시를 보면 일종 이미지 구축 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꽃의 등식이 성립되고 꽃은 향기로 상승의 이미지를 남긴다. 중심은 꽃이고 향의 이미지가 맺음을 담긴다. 시는 이미지의 발굴이고 그 이미지를 연결고리로 하여 시인의 사상을 혹은 삶의 표정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응의 예술인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의 넓이가 큰 사람은 소재의 이미지가 크고 보통의 일반 사람에게서는 시인의 정서만큼 따라오게 되기에 시는 곧 그사람을 표현하고 그사람만큼 쓰고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2 연에 “황홀” 6 연에 마무리에는 “향”으로 시각적인 이미지에 마지막 정서가 따스함을 연상하면서 고귀함을 부추긴다. 시라는 것은 순수와 담백한 정서가 꾸밈이 없을 때, 시적 가치가 드러난다. 일산의 소재가 튀느 법이 없고 자연스레 나오는 물줄기가 시원하고 구수하다. 마치 성숙을 넘어서는 안정감을 준다. 일상에 만족을 알면 그의 삶은 가치로 변화한다. 이를 일러 안분지족(安分知足)말로 처리 하지만 이런 지족의 마음을 갖고 사는 욕심없는 무심의 경우가 홍신남 시인이다. 내 무엇을 바랄 게 무엇인가. 더 가질 것이 무에 있는가. 바람도 산천도 구름도 어디로 떠나는지 여기서 이대로 가르쳐 주시게나 =중략= <삼라만상의 이치> 중 이 짧은 글의 시 1편에서 정서와 사상 그리고 느림의 미학으로 시를 그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더” “무엇을 바랄 게 없는” 생활의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가볍고 또 진중하면서도 무게가 넘치는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까. “여기서 이대로 가르쳐 주시게나”. 는 이렇게 무심의 시인인 듯하다. 왜냐하면 시는 욕심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을 내려놓고 무심의 경지로 신명의 정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 것이다. 그의 시 작품 <상상> <내자> <우주> <부자의 삶> <가화만사성> 등 너무도 많은 시를 일일이 논평은 어렵기에 간단하게 일부만 평한다. 어느 정도 그 속을 들여다보니 너무도 여유롭고 자유스럽고 무욕에서 나타나는 그런 시들이다. 편안하고 무심의 여정에서 시를 그리는 모습이 보이기에 너무나도 안정감과 장중함을 느낀다. 3. 에필로그 = 여정의 표정 시는 자연스런 유로(流路)일 때 감수성의 파문은 아름다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생활 속의 진솔함이 바탕을 이루는 요소가 되고, 이런 요소는 곧 정신의 줄기를 이어가는 모태가 된다. 시라는 것은 꾸미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로 진입하는 부드러움이고 여기서 언어의 압축에 따른 시어의 탄력이 생성되기에 홍신남은 계산되어지는 시가 아니라 자연스런 유추해서 그의 심성 기록이고 삶의 모습이 전체로 투영되는 하모니를 이룬다. 그는 시에 생애를 담는 오로지 시와 더불어, 시와 함께 보폭을 맞추는 우직하면서도 꾸준한 시심을 가꾸는 것 같다. 또한 그이 가족 사랑에 아담하고 따스한 양지에서 도란거리는 소리를 삶의 전부로 삼는 일상적인 가치에 헌신하는 모습이 담백하고 향기가 난다. 소시민의 생을 벗어나지 못한 이 땅의 부모요 지아비로서 작은 것들에 애정을 가치로 생각하는 사고에서 가족과 이웃에서 단란함일 일군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그의 시는 욕심없는 투명성의 정서를 시로 담아내는 자연스러움에서 아름다운 가락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그런 시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이 지향하는 느림의 미학에서 정서의 표정이 향기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다하지 못한 숙제를 내려놓은 듯하여 다소 아쉽지만 그 숙제를 시인 스스로 마침표 찍기를 고대하면서 내려놓는다. 2005.01.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집] [이승섭 시평 제 9집 무의식의 시]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 10집 무의식의 평행]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아가페의 변증법과 자기 표정】 『1. 자기 표정 그리기』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生)에 모두를 보여주는 압축성- 인간이 삶에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시의 재능이 있어야 하며 분출하는 욕구와 주관이 있어야만 가능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들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에 뒹구는 돌에도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이기 때문에 시적 장치를 만들고 신명을 다하여 여백을 주면서 의미의 다양성 창작의 결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때 시에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 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에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우주의 하나하나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에 따라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하냥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威儀)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를 가지고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에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에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과 탄식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지혜- 마하반야바라밀다–진리의 이름 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교실은 비워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에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을 하는 것이다.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구나 하고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이러한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에 정서 고백을 하고 내포하는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간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 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아니 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 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을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 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이심전심이 통하는 일종의 자기 암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알고 가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 되는 것이고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애너지의 이름이다.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이는 느낌이 필자만이 그럴 것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낳으신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삶의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이며 독자를 감동케 하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며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은 논리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은 선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에 숙고하고 사랑에 매달리는 일상의 독자에게는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 정신이 숨을 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닐지?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고 답을 내면서 논지를 끝내려 한다. 2025.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신간]베스트셀러 이승섭의 시평집 {무의식의 평행}]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물을 대면하고 그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에는 맹목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이고 공허한 메아리만 들릴 뿐이라면, 후자인 사람은 지식 혹은 지혜로서 분간하는 일로, 사물의 질서를 확립하는 명료함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세상 언저리를 배회하다 보면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더 많은 아우성과 목청 큰 발성으로 진리를 압도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나 이른바 악화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 s law)이 적용되고 후자는 은신 또는 겸손의 키 낮춤에서 존재조차 희미한 경우가 많다. 정치판이나 문학의 판이나 질서를 세우는 사람은 희소하고 오히려 악화(惡貨)가 세상을 점령하는 기세로 압도하는 경우는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문학은 마지막에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기에 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쓰고 또 쓰면서 자기만의 城을 구축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번 예를 들어 보겠다. 1920년대 김소월이나 한용운은 문단의 아웃 사이더였지만 긴 세월이 지난 결말은 이들이 문학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사실 오랜 시간의 언덕을 넘었을 때 비로소 찾아온 이름 자 명성이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건은 필연 현상이다. 무엇을 썼고 또 무슨 의미의 작품을 생산했고 그 가치는 보편성의 기준을 확립하였는가의 여부가 결정하는 일이지 단순하게 시간의 언덕을 넘었다 해서 결정되는 가치는 아닐 것이다. 요약으로 말한다면 의미의 질서 확립과 보편성의 기준 잣대는 문학 가치의 본질이라 보는 것이다. 이 둘의 기준으로 볼 때, 그 당시의 시절과 근본, 보편 타당성, 가치를 넘어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엄청나게 수원지(水源池)를 갖고 있는 노시인 진헌성 시인, 그는 필자 아버지의 같은 동년배로서 의학도로 출발하여 문학의 깊이에도 빠질 수 없는 시인으로 필자가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는 분이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도 과학적 기저를 두고 물리, 생물, 천문, 수락, 종교, 철학, 사상 등에서도 왕성하고 현란함이 요란하다. 그의 시집 잘 살고 갑니다-진헌성 지음, 진헌성 광주 진 내과 원장, 2년 만에 시 전집 제16권 펴내, 104, 5편, 수록 “아흔둘 인생 돌이켜 보면 어리석음의 반복” 등이 있다. 90세가 훨씬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의 명상, 과 종교 비판자이며 자유정신 가치를 구현하는 진정한 본질에 투철한 시인이 아닌가 한다. 광주출생이면서 시는 세상사 모든 그릇을 담는 것이라고- 심지어 주홍사의 천자문은 4연 250 귀의 고시라는 말을 대입한다면 양나라의 주홍사가 어떻게 우주의 일을 알았으며 육안으로 관찰했다 해서 오늘날의 지식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시인의 예지와 인간사의 윤리, 도덕, 등을 시로 구사하면서 광대한 우주 현상으로 좁히고 상상력의 정치성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진언성 시인은 위와 같다고 확신한다. 천년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겠고 현실 또한 냉엄한 비판을 쏟아붓는 철학자요, 비평가요, 과학자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우수한 상상력의 나래에서 나오는 가락을 눈여겨 살펴보기로 한다. 시는 우주의 운행과 질서의 현황과 꼬여있는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냉혹함과 치열함을 갖춘 노시인 - 아울러 휴머니티를 가슴에 내장한 불빛이 환히 보이는 이 땅의 시인이라 칭하고 싶다. 참고로 본 고는 연작시 627편 중 앞부분만 일부분 한정하여 시적 특색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기로 하겠다. 너무 방대한 연작시라 압축을 시켜 유사한 정신 가치의 궤적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2.정신의 건축순환은 무엇인지 시의 정신 순환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도를 나타낸다. 이 명제를 쓰는 이유이면서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려는 것처럼 시의 건축에 임무를 갖는 이치에 이른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의 조합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신 - 맹목의 정신이 아니라 질서를 균제미(均齊美)로 담아야 하고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 공 즉 생이라는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삼라만상의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거나 혹은 전체와 부분은 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사고, 즉 상관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와 생각하는 것도 모순에 휩싸일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입장에 자세히 관찰하는 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 심리학은 결국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만치의 거리 이만치의 거리는 상대적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 흰 지팡이 둘이서 가늣한 산비탈길서 큰 내쉼 짚고 서산마루 보란 듯이 먼저 간 고 새나무들 곧장 못 날고 옹기종기 않았고 ...(중략)... 내 모둠 숨 좀 맞들면 저만큼 명당치고 그만큼은 살겠거늘 오늘은 바랑 멘 체 이만 치 서 보랃자와. -『1.산 바라기』에서 시인은 가장 먼저 간 새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물기에 젖어있고 명상적인 문을 열어야 하는 명제를 숙고하는 인상을 남긴다. “나”와 “지팡이”는 동격으로 나이의 깊이를 헤아리는 “이만치”로의 현재라면 “산마루”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저만치”의 거리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생성한다. 여기서 이만큼의 거리는 속세의 가파르고 숨찬 이미지가 저만치의 먼 거리와는 명상에서 서로 닿아야 하는 언젠가의 숙업(宿業)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돌의 무게가 삶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면 피안(彼岸)의 저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야 할 곳으로의 막연한 노년의 숨찬 호흡이 “모둠 숨”으로 “보라자” 와 머무는 뜻이 삶의 망연함에 해답을 찾지 못한 듯, 마치 두보의 시 『박계행』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사는 일은 항상 해답이 없는 미망의 벌판을 헤매는 일이기에- 바위 굴러 둘로 나눠지고 다시 굴러 넷으로 쪼개지고 쪼개지고 빠개지다 잔모래 돼 모래 엉켜 뭉개 바스러져 고루 가루 떡 됨이 논밭이며 이 조화의 으뜸이 곡식이요 이 곡식의 우듬지가 사람이다. 『고체와 액체』중에서 다시 ‘있고’의 ‘없고’의 사상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우주 삼라만상은 인간과 자연의 고체와 액체의 도정(道程)을 되풀이되면서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다. 형체가 있고 다시 그 형체는 사라지고 순환하면서 본질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 도정에 존재의 어느 현상이 찰나 ‘있음’을 형성되고 반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바위가 모래, 그리고 모래가 흙, 다시 흙에서 논밭 그리고 곡식- 곡식의 끝은 인간이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우주관은 인간 중심을 엿보게 된다. 멸(滅) 생(生)이 하나의 줄기에서 나오고 다시 그 반대의 과정을 되풀이할 때 연기론의 근거는 불가 철학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없음’을 중단한다면/있음은 더욱 중 해처럼 인간은 순환의 도정에서 조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행동에 대입한다면 우리는 유추의 해석이 끝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3.시적 사상의 표정 과학은 1+1=대답에 묶여있다. 그러나 시는 1+1=0, 1, 2, 3 등, 하나의 의미에 국한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예를 들자면 ambiguity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과학은 정확한 인식의 바탕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와 과학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일찍이 l. A. Richards가 설파한 것처럼 시와 과학은 밀접한 상관을 유지한다. 상상력을 증명한다면 시가 되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시는 과학 정신을 이해하는 길에 있다. 이는 과학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관념의 포로에서가 아니라 인식의 확실성을 터득하고 시와 접목의 수순을 밟아 나가는 정신도(情神圖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시가 느슨하거나 설왕설래의 무질서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이유는 내포된 시적 의미의 치밀성에 있기에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논리적인 구축력을 가질 때 비로소 시적 완성도는 높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질서에서는 짜증이 나온다면 엄정한 질서의 배열에서는 찬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공룡이라는 단어는 1841년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존 필립스는 고생대에 식물이 물에 오르고 다음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순서였다고 창조설에 반하는 사람은 화형으로 입을 틀어막었던 가톨릭 교회였느니 자연 과학은 지금껏도하나님 나라의 장애물! 『생물 연대 차이』중에서 종교와 과학은 때로 상반된 표정으로 대척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는 항상 절대의 공식에 있어야 하고 과학은 새로운 발견을 위해 땀을 흘리는 점에서 종교의 원리에 반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진자의 등시성이나 관성법칙 발견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이유로 협박당한 –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의 변명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지동설의 포기였다면, 스콜라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자인 지오다노 브르노(Bruno)는 그의 신념을 사수하기 위해 분형으로 16세기의 언덕은 넘었지만 결국 옳은 것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의 편견은 지금도 사랑의 전파보다 더욱 엄정한 틀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형해(形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느님’ 나라의 장애물이 ‘자연 과학’이라는 시인의 판단은 종교가 구원의 메시지를 휘날리지 못하는 이유- 아집과 편견 독선의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에 비판의 기세가 보인다. 이는 1513년 교황 레오 10세의 면벌부 판매에 95 Theses의 항의문으로 번진 개혁의 불길이 1517년 사건이었다면 결국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찾아간 신대륙 이주의 필그림이 시사하는 종교의 함정에 대한 변화가 오늘날이라고 대입할 수 없는 명제는 아닐 것이다. 이른바 종교의 창조설과 과학의 대립은 결국 19세기의 유물론에서 물질세계와 종교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혼동하는 기계론의 함정에 빠지는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T. H. Hulme의 예술 논에서 말한 무기적 세계(수학과, 물리학)와 유기적 세계(생물학, 심리학, 역사학)와 가치의 세계(윤리, 종교)의 세 영역 중 외부가 물리학의 영역이라면, 내부가 종교와 윤리학의 영역, 그리고 중간을 생명의 영역인바, 세 부분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이면서 서로 연락이 없는 비 연연 속의 원리(Rrinciple of Discontinuity)에 의해 지배된다는 철학 사상을 설파했다면, 종교는 언제나 모든 세계를 지배하려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 등이 현대에 와서는 더욱 고립된 섬이 되는 현상이 종교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노시인의 사색은 무한의 변경을 헤매는 나그네요, 탐구의 불빛에 영일이 없는 서치라이트를 켜고 파수꾼의 임무를 자인하는 것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노시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들어서는 손에겐 제 볼을 마구 문질러대다가도 뒤돌아서 가는 손의 뒷다리를 소리 없이 무는 개의 전략에는 안 내둘릴 수 없지 잉. 『천안함』중에서 국제 정세의 이해나 긴박감도 없고 오로지 반대만 하는 일이 직업인 듯한 신부나 스님에는 이젠 식상해 차라리 북에 가서 살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청개구리를 넘어 없어도 될 국민이 아닌 인간들이라 보기 때문이다. 천성산의 도룡용은 여전히 왕성히 산란하는데 왜 그때 그 스님은 잘못이라는 고백이 없는 것인가? 으레 반대- 정치라고 잘만하면 되는 그런 설득도 있어야겠지만, 아집과 편협해서 이해와 타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다. 점점 이상한 나라 그저 상대를 반대해야만 하는 그런 몰염치 인간들- 지식인들이라는 교수치고 어리석지 않은 경우는 흔히 본다. 아집에 잡혀있는 판단이 고집과 아집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자기 명령에 끌려가는 일로 사리 판단이 마비되었기에 사실조차도 의심으로 궤변을 늘어놓고 편히 살아가는 자는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일과 진배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현실을 수없이 지나치고 있다는 자성이 앞서야 하지 않겠는가? 미친개- 소 대가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이런 현실 - 북한 전략이란 자명하지 않겠는가? 햇빛에 망령을 우려로 바라본 시인은 이젠 달빛을 염려하는 근심 속에서는 얼마나 심각한 우리의 잘못된 자화상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여전히 햇빛 꼬리를 잡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현실에 정말 우울하면서 서글퍼진다. 더 이상 얘기한들 무슨 소용인가? 정부가 바뀌어졌으니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할 운명적 존재라 보기에 조속히 정부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은 있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꼭 - 4. 에필로그 大韓民國은 지금 반만년 역사에서 이처럼 잘살고 민주라는 말이 요란함과 아우성 속에서도 그런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언제 있었는지 자못 신기하다. 힘겨운 끼니를 이어가면서 나름대로 배고픔을 참으며 잘살아 보자는 신념 하나로 지금의 국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은 50대 60대 이상 국민이라면 누구도 부정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주변 강대국과 동남아 어느 나라를 보아도 개발도상국을 지나 세계 경제 6위로 올라선 대한민국이 다시 체제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건국 시기에 체제의 전환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내세워 한미 동맹과 자유 민주주의 경제로서 우뚝 선 현재에 또다시 좌우 이념전쟁을 하고 있다는 현실에 필자는 안타까움을 지나 자유 민주주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도약할 수 있는 전진기지 초석을 다져야 한다고 것이다. 현재 대통령이 고유한 권한인 비상계엄을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무소불위인 선관위를 조사하기 위한 苦肉之策으로 비상계엄 한 것을 가지고 의회 다수라 하여 내란죄로 몰아 이렇게 국가를 흔들고 갈라 치기로 인하여 정쟁을 일삼는 것은 의회 폭거라 할 수밖에 없다. 분명 대한민국은 대통령제가 맞다. 공정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극우와 극좌를 떠나서 상식으로 임한다 해도 그 정신 가치는 인민미주주의가 아닌 모든 국민은 자유민주의 가치 아래서 자유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학의 가치 정신을 높이 올려야 할 때라 굳게 믿으며 이념으로 집합된 모순이 하루라도 빨리 진정되어 원리로 돌아오는 가치의 중요를 알아차리고 정상적 수순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물론 혼돈의 시기는 분명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서서히 20, 30 세대까지 옮겨가고 있다. 시대전환을 꼭 이루어서 5천년의 역사를 지킨 국민이 있기에 자유민주주의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밑으며 남겨둔 마지막 수순을마칠까 한다. 사실 삼삼한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목표라면 깜깜한 시는 아직도 부족을 의미하는 뜻으로 다가올 때, 시에 정진하는 노시인의 모습은 경건하다고 해야겠다. 시는 항상 시인과 갈증을 유발하는 거리만큼에서 손짓할 때, 시인의 상상력은 왕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엄청난 분량으로 놀라게 하였지만 시로 살고 시로 살아온 일상이 보이는 것은 부기(附記)된 창작의 양은 실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노시인의 시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당연 사지만 몇 날을 조감한들 할 수 있으랴- 겉만 들여다보아만 하는 것이 어쩌면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시의 대면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으려 한다. 2025.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 무의식의 평행] [무의 오로라] 깊[사상 가치 형성과 표현의 깊이]이]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生)에 모두를 보여주는 압축성- 인간이 삶에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시의 재능이 있어야 하며 분출하는 욕구와 주관이 있어야만 가능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들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에 뒹구는 돌에도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이기 때문에 시적 장치를 만들고 신명을 다하여 여백을 주면서 의미의 다양성 창작의 결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때 시에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 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에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우주의 하나하나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에 따라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하냥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威儀)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를 가지고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에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에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과 탄식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지혜- 마하반야바라밀다–진리의 이름 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교실은 비워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에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을 하는 것이다.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구나 하고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이러한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에 정서 고백을 하고 내포하는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간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 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아니 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 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을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 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이심전심이 통하는 일종의 자기 암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알고 가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 되는 것이고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애너지의 이름이다.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이는 느낌이 필자만이 그럴 것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낳으신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삶의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이며 독자를 감동케 하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며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은 논리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은 선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에 숙고하고 사랑에 매달리는 일상의 독자에게는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 정신이 숨을 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닐지?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고 답을 내면서 논지를 끝내려 한다. 2024.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저자의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 [무의기의 오로라]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말하는 시 사람이란 말로써 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 한 편의 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무의식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왜냐하면 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함께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더 아파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그러나 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필 때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 지는데>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 시화되었으며, 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더 아파’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 속을 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그리움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긴밀도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고 있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같을 것이다. 겉으로 같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 놀랄 일은 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유종필은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속 몸짓으로 하나일 것 싶은데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 맨가슴에 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발동하는 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이 나게 하는 인자(因子)는 늘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 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일 것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이 된다. 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그렇기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와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 날 때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 닮은 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 열린 마음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면 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자아(ego)찾기 나를 찾는 것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 종점이라고들 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놓았는데 ... 중략...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 뒤집어쓴 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 감동으로의 호소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 꿈 속에 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 여정?>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오욕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물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고 다만 날갯짓이, 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의 삶에 서 있는 듯하도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 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가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 오는 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 시인>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에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 완료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 마무리해줄 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4.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마음의 자아<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가설 1)정서는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오늘의 나로서는 사실 아버지를 닮았고 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잇는 꼬리로 추적하면 결국 사회의 공통, 혹은 민족성에서 공통점에 이른다. 이러한 정서는 현재까지 함께 살아오면서 형성된 유사상의 측면에서 파악이 된다. 이를 한마디로 민족의 특성 혹은 사회 관습의 일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사람, 산속에서 삶을 지속한 정서는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특성이 도출된다. 환경이 주는 영향은 인간의 심성이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기에 - 물론 약간의 차이는 내포하지만 유사성의 접근에서는 특성 혹은 자기 개성을 짜 맞출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시를 서구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감동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정서가 서구인에겐 보편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순종 미학이 참되고 착한 도덕적이었던 것을 대입한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1920년도의 합리성이지만 현대인에겐 전혀 다른 반응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서 또한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변화의 길은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 가설2)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지 정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모한다. 예를 든다면 1592에서 7년 동안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의 변화 – 임란 이전의 문학은 양반의 문학이었고 이후로 내려오면서 서민문학으로서의 변화를 갖게 된다. 언어도 된소리나 거센소리로의 변화, 가령 갈(力)이 칼로 변하는 것들은 전쟁의 참화를 지난 후에 나타난 의식의 현상 등이다. 양반만 문학을 하느냐 서민인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산문으로의 진행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격식의 파괴는 사회변화의 매듭에 따라 나타나는 추수(追隨)적인 현상인 것이다. 작가도 평탄한 일생을 살아온 것보다는 굴곡의 삶을 살아 이것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실감이 필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위대한 명작은 대체로 체험의 원숙한 인생 후반기에 나타나고 시(詩)의 경우는 상상의 산물로 인해 인생 전반기에 왕성한 욕구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2.의식의 집중화–이별과 자연 그리고 물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또 자연으로 돌아간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작품은 자연을 소재로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 혹은 대상화가 된다. 강이 있고 강은 바다로 가고 다시 증발하여 하늘로 순환한다. 너무나 풀밭의 초록 등 흡수력을 갖는 자연의 이름은 작품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용해된다. 이별은 만남의 반대이면서 이 또한 순환의 사이클로 인생사를 이루는 요소일 것이니, 인연 법의 고리를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문학은 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의 축도(縮圖)를 그리면서 비판과 긍정의 모양을 실감으로 재현하려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과 인간의 마주침이 문제를 만들고 다시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고 비판하는 과정도 모두 건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한 일과 더불어 문학의 영원한 명제인 휴머니즘 구축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학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1)이별의 평행 이별이라는 말은 만남의 반대편 개념일지라도 생로병사 혹은 우주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즉 계절의 순환에 해당할 개념인 것이다. 만남은 떠남이 이어지고 다시 만남으로 돌아오는 길이 일정한 궤도로 작동할 때, 인간은 거기에 감정을 개입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며 삶의 열정을 매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줄기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그 줄기를 벗어나는 일이 매우 힘겨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뜻이 이별이다. 부재(不在)로의 거리(距離)를 가질 때, 이별은 문학작품 속에서 비극적인 개념으로 줄거리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문학의 표현은 만남에 대한 사랑과 떠남에 길을 아쉽게 표현하는 관념이 주요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이외는 무대를 장식하는 소품의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이별이나 만남은 줄거리의 본질에 질서를 형성하는 인자(因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이별은 고구려 2 대왕인 유리왕의 <왕조가>는 서정시의 바탕을 찾을 수 있는 이별의 노래이다. 여자의 질투가 가져온 이별이 남자 <왕>의 가슴을 물기로 적시는 줄거리가 한국의 이별 문학의 모태가 되었다면 신라 시대는 향기와 정서에 의한 누이의 죽음을 슬퍼한 <제망 대가> 등은 일찍이 이별로 서정시의 근간을 이루었다 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잡 와 두어리마 선 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셜온님 보내 노니 나 가시 도셔 오쇼 셔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가시리>중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고려 475년은 초기 100년을 제외하고 375년이 전쟁과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시대였으니 고려의 시인 정지상 또한 대동강에서 이별을 노래한 <송인도> 이별의 문학이었으니 백성 양반, 평민 모두가 참상의 아픔을 감내한 슬픔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님 보내며 서글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이 언제 마르랴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더하는 것을 정지상(宋人) 대동강을 건너 진남포로 떠나는 임과의 이별에서 대동강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애절 성은 친구 김부식이 시기할 만큼 명작이 틀림이 없겠다. 슬픔의 마음이 묻어 있어도, 질 축 하지 않고 애타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깨끗한 마음의 진정성이 담겨있어 “청록파에서 이별에 건강성이 슬픔의 고개를 넘어가는 시인의 정신이 빛나는 것 같다. 양반인 시인이 얼마나 깊고 아픔의 시대가 절절했으면 명작의 이별이 탄생할 수 있을까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다시 말하면 멀리서 오는 파도는 점차 다가오면서 모두에게 파급력을 갖는 이치와 같이 아래로 천민 백성에서부터 높이로 양반에 이르기까지 이별이 거의 전 영역에 아픔의 물살을 덮어 씌었다는 뜻일 것이다. 반면에 당시 양반의 술타령은 <한림별곡>에서 부패한 냄새가 얼마나 자심(滋甚)한가를 알 수 있는 모순의 시대였다. 아마도 우리말로 쓴 <가시리>는 이런 시대의 고통을 가장 잘 쓴 시랐는데 일치할 것이다. <서경별곡> 또한 이별의 주체가 여성이면서 좀 더 강한 의사가 담겨있음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다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이별은 아픔이고 슬픔의 언덕을 넘는 한탄과 장탄식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반복 후렴을 제외하고 67자의 <가시리>는 단순히 이별을 아픔으로 노래한 내용이 아니라 빨리 가는 것처럼 “빨리 돌아오라는”는 뜻으로 구속력을 갖고 있음에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서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진달래꽃 1920년대의 사회는 여자는 남자의 종속처럼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이른바 절대의 복종은 고려의 여인상과는 오히려 더욱 순종적인 유교적 문화의 사상 속에 여자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모순의 속내가 <가시리>와 <진달래꽃>과의 거리가 역전되는 전도 현상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의 기류에 삶에 가치도 발전적인 진행이 아니라 역류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왜 그런가 하면 1920년 대의 여인은 거의 숨을 죽이고 남자의 처분에 따르는 ”역겨워 가실 때에는” 진달래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속내 – 사실 속으로는 안 가면 좋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요구는 깊이 감추어 두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완전 수동적인 자세가 1920년대 김소월의 이별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되었던 것이다. 고려 <가시리>는 오히려 현대적인 적극성의 여성상이라면 <진달래꽃>은 에이츠의 <꿈>과 유사하다는 이양하의 지적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 가만히 밟고 내라 ‘ 지내라라는 점 - “꽃을 밟고의” 김소월과 ’ 꿈을 밟고 ‘ 지나가라는 에이츠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 바이런의 <maide of Athens>와는 이별에서 같은 주제이지만 이스탄불로 시인은 떠나갈지라도 나의 마음을 간직해 달라는 부탁하는 것은 아픔이기보다는 작별에 일반적인 형식이 재치(才致)로 담겨있는 듯하다. 이러한 이별의 노래 중에서 아마도 <가시리>는 짧은 형식 속에 강, 약의 되풀이에서 가장 뛰어난 백미(白眉)를 창조한 이별 문학으로서 출중하다는 데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이별에서도 자식과의 이별은 아마도 가장 심대한 통증이 나타날 것이기에 허난설헌 <곡자>에 이르면 처절의 농도는 극치에 이르는 이별이 아니겠는가.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광릉 땅) 雙墳相對起(쌍분상 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은 일고) 鬼火明松楸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불 반짝이고) 紙錢招汝魂(지전초여 혼) (지전을 태워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네들 무덤에 맑은술을 올린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그래, 안다 너의 남매의 혼이) 夜夜相追遊(야야 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안 가기 장성)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느냐)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나오는 슬픈 울음 삼키고 있네) 허난설헌 <곡자> 함종임 <채련>에서 경기도 초월리에 있는 남편 김성립과 후처 홍 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난설헌은 맨 아래 안장되었고, 그 오른쪽에 두 남매의 무덤이 있어 죽은 뒤로 비로소 함께 지정을 나누는 모정의 애달픔 - 먼저 떠나보낸 자식의 죽음은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에 시(詩)의 슬픈 가락으로 이어지며 애석하게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응어리진 한(恨)이 버릴 수 없는 이별의 최고의 정점을 꾸미는 시(詩)의 형태가 허초희의 운명적인 비극의 극치를 대변한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넘어선 슬픔의 가락에 뼈가 슬어지는 느낌이다. 사전적으로 이별은 “서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지만 드라이한 측면이 감동을 일탈(逸脫)한다. 사랑이라는 말도 남녀가 좋아함에 이르면 느낌이 매우 삭막함을 느끼듯이 그렇듯 문학적인 수용으로의 이별은 ”아픔과 눈물“ 그리고 회색의 절망이 깊은 상심을 유발하는 지경에 사전을 간과(看過)한 점에서 깊이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깊고 처절한 인상을 창조하는가의 문학 - 시(詩)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는 체험의 농도가 결정 요소로 작동하리라 본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이별의 용어일지라도 비극적인 인식과 재치의 인식에서 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의 슬픔을 슬퍼한 어머니로서의 허난설헌의 이별은 남녀 사랑에 대한 이별과는 또 다른 절망의 길이 넓어지는 느낌이고 바이런, 에이츠, 김소월의 이별에는 처절성의 농도가 얕은 이별의 형식일 것 같다. 2)대 자연 모든 인간은 자연에서 자라고 자연에서 산다고나 할까 다시 말하면 자연을 응감(應感)하면서 대상으로 바라보는 소재와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갈망과 자신도 대상화로서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이 무한대의 대 자연의 넓이에서 문학은 언제나 배경의 역할 - 인간이란 주체로 활동하고 자연은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 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 미국의 삼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의 콩코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은 시인이자 철학자인 그가 1854년 2년 2개월에 걸친 월든의 숲 속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기록한월든〗은 대 자연과 인생의 참된 삼의 천착에 바친 실험의 저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많은 사람들과 자연의 위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철학적인 명상이자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물론 동양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 또한 대 자연의 대상화를 비유로 살아나게 한 철학서이지만 난해의 숲이 울창한 것이 일반인에게는 난도가 높은 단점이지만 소설에 처음 도입은 항상 전체 줄거리의 예보적인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음산한 영국의 날씨와 줄거리의 전개가 안개 자욱한 날씨로 시작하는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WutheringHeights>는 도입부의 자연 묘사는 남자 주인공 히이드클리프와 주인공 나와의 운명적인 전개를 예고하는<폭풍의 언덕>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터 전개를 해보겠다. <웨더링 하이츠>란 히이드클리프 씨의 집 이름이다.<웨더링>이란 그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이 많은 독특한 형용사로서, 폭풍이 불 때는 위치 관계상 그 집이 정면으로 그 바람을 받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 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올 것이다. 집 옆으로 서너 구루 자라지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가를 알 수 있으리라 - 다행히 이 집을 지은 건축가도 그것을 생각해 집을 정말 튼튼히 지었던 것 같다. 좁은 창틀은 벽에 깊숙이 박혀있고, 집 모서리는 크고 울퉁불퉁한 돌로 튼튼하게 지어 있었으니 말이다. <웨더링 하이츠>는 요오크사 지방의 황야를 무대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가 주변의 환경 묘사와, 일치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핵심구절은 '집 옆으로 서너 구루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 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산등성을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에 앞으로 전개될 인간관계의 설정이 음산하고 거센 북풍에 주인공들의 개성과 맞닥트리는 암시를 엿볼 수 있는 황량한 대자연의 설정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김동인의 단편<배따라기>은 다소 미숙한 형태로 도입부터 흔들리면서, 화창한 봄날의 묘사로 서두가 시작된다.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험성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리고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 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김동인 <배따라기> 서두 우선 서두가 너무나 장활하게 나열된 듯하다. 가령 <마지막잎새>의 오헨리 같으면 간편하게 『It’s fine spring day』의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가 장황하게 6행을 추가한 것은 그 미숙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불구이거나 죽음의 그늘이 있는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1920년대의 우울한 사회 풍토에서는 화창한 봄 날씨의 전개가 어색하지 않은가. 신석정 시인은 대 자연과 밀접한 시적 접근이 그의 수필에서는 더욱 강조점을 마련하고 있다. 40평 남짓한 앞뜰에 그저 되는대로 질서 없이 심어놓은 나무가 시누 대, 식나무, 수수꽃다리, 태산목, 꽝꽝나무, 북 가시나무, 칭영수, 백목련, 독일가문비, 이팝나무, 치자나무, 뽀뽀나무, 동백나무, 호랑가시나무, 낙우송, 산수유, 국로, 감나무, 모란, 청매, 벽도, 은행나무, 후박, 철쭉, 박태기나무, 개나리, 서향, 파리똥 나무, 죽도화 등 30 여종이 있고 이밖에 장미 10 여종이고 보니 그 면적에 비하면 초만원인 셈이다. 이 나무들 사이에 수선화, 백합, 국화, 파초, 등 숙근초(宿根草)가 자리를 잡고, 콘크리트 항아리에는 백련이 있어 모두 제철을 기다리고 있다. 신석정 수필 <정원이야기>에서 신석정의 시는 우아하고 정서적인 노란색《촛불》과 《슬픈 목가》에 주류로 등장하고 있고,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이런 현상이 사라진다. 나무를 주체로 보면 신석정의 정원은 초만원의 욕심이 자연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가짓수로 보면 나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 것인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초목을 사랑하는 신석정의 시심(詩心)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노장사상의 침투와 연결 고리를 가질 것으로 유추가 된다. a)산 경관,초목 경관 유명한 시인들은 자연을 소재로 선택하는 시적 표현이 압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과 경관을 떠나서는 시심의 근거가 작아질 뿐만 아니라 주제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평생 산천초목을 바라보아도 앞산은 앞산으로 있고 뒷산은 뒷모습으로 우뚝 서 있지만 인간은 다른 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마음의 탓이기 때문이다. 2.30대에 보는 산이 다르고 4.50대에 보는 산이 또 다를 것이기에 60의 마루턱을 넘어 올라보지 않고서는 누가 감히 산천초목의 산의 진미를 안다고 할 것인가, 는 신석정 시집 《산의 서곡》에 머리말로 쓴 조지훈의 글이다. 산을 현상으로 바라본 시선과 나이 들어 산을 바라보는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산은 정복으로 올라보고 싶은 충동이라면, 나이 60 넘어 산은 정복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의 체온과 같이 친근 미를 갖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에 - 조지훈은 이런 산의 묘미를 서문에 새겨 놓았음은 매우 조숙하고 가치판단이었을게다. 그는 50 이전에 운명(殞命)했기 때문이다. 산 <파이랗다> 2. 넌지시 뻗어 나간 저어 산맥(山脈)을 보아라 <햇볕이 강물처럼 흐른다> 3. 아슬아슬 저어 봉우리를 보아라 <휘휘 칭칭 구름이 감았다. 4. 말없이 얼싸 않은 산협(山峽)과 산협을 보아라 < 퍽은 다정도 하이...> 5.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껴안은 산 <따스한 체온이 돈다.> 6. 볼과 볼을 문지르고 있는 산 <연거푸 주고받는 뜨거운 kiss> 7. 이윽고 정상(頂上) <정상에 나는 서있다. <신석정 <푸른Symphony>에서> 17까지 이어지는 산의 노래 중 7까지만 옮겼다. 신석정을 정원 시인 혹은 목가 시인이라 칭하는 것도 시(詩)의 대상이 거의 모두가 자연을 소재로 했고 4.19. 이후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은 시들은 비교적 각광을 받지 못한 것도 지나치게 경도(傾倒)한 자연현상의 탐닉(耽溺)때문일 것 같다. 전북 부안의 바닷가에 살았어도 산의 시맥(詩脈)을 두고 자연의 소리를 취합한 신석정의 정서는 자연을 떠나서는 그의 정신이 혼미(昏迷) 해지는 느낌과 감정을 갖게 된다. 그만큼 애착으로 자연에 동화되어 그의 시는 형해(形骸)를 담아 표현미를 구축했을 것 같다. b)강 혹은 바다 물이란 인간 에너지 정신의 중심인 것이다. 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바다는 파도와 파고를 가져오면서 이방(異邦)에의 갈망을 전달하면서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바다가 서구적 향내 대한 동경(憧憬)으로 이어지고, 어둠으로 상징되는 나라 형편을 깨우침으로 방법 논을 삼았던 예지적인 견해와 선지적 사고가 돋보인다. 새로운 문물이 바다를 통해 이입되는 계몽의 길목이었음을 잘 알았던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내륙 충북 옥천을 그리움으로 채색한 <고향(故鄕)>의 시인이다. 그의 <향수>에는 실개천이 흐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짙은 음영으로 배어 있지만 <바다 1~5>와 <갈릴레아 바다>와 <호수 1~2> <호면> 등 그의 시에 비해 물의 소재가 많은 편인 것 같다. 고래가 이제 횡단(橫斷)한 뒤 해협(海峽)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히나 물결 피여 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꼬자꼬 나려 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흠켜잡어 고 빨간 살 빼스랴고 정지용 <바다 1>에서 고래로 배로 환치(換置)하면 - 배가 지나는 길에 파도는 은방울 날리듯, 종달새의 노래를 떨어트리고 가는 모양이 마치 바둑돌의 하얀 포말, 연신 올랐다 내려가는 반복에서 볼 때 외로운 표상으로 그리움을 안고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그네의 표정 -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완상(玩賞)으로 가까움을 대상화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인 것 같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 <호수,2> 순수가 절정을 이루면 천진의 극치에 오르는 것이다. <호수>는 정지용의 마음을 대변하는 아주 간결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는 시화(詩化)이다. 한국시는 비로소 정지용에 와서 거추장스러운 의상을 벗어던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의 신비경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호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정서와 이미지가 결합하여 천의무봉 시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신체 조직은 약 80% 정도가 물로 구성된 5대양 6대주로 되어 있고 물로 구성된 지구의 모습을 함께하는 인간의 신체 조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물은 곧 생명이고 삶의 모든 진행을 영위하는 원소이기에 동물이나 식물은 곧 물에서 존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강물이 되고 강에서 다시 바다로 흐르는 것이 또다시 증발하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인영법의 절차가 물에서 암시되는 것이다. 물은 될 수 있는 대로 힌돌이 퍼져있는 곳을 가려서 걸어 다닙니다. 조이 밭 속에서 그 소리를 엿듣는 팔이 부러진 허수아비는 여기서는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외다. 김기림<물>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추구점은 물에서 “가려서” 다닙니다. 에 이르면 시인이 추구하는 물과 가는 것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답은 흐름을 유지하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노자 적 철학을 꿈꾼다. <<보물섬>>과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봇 루이스 스티븐슨은 <rain>이란 평이한 시(詩)를 썼다. The rain is raining all around lt falls on field and tree lt rains on umbrellas bere And on the ships at sea <R.L.Stevenson <Rain> 들이나 나무 위에 그리고 온 바다에 혹은 우산에도 눈은 변함없이 고루 내린다. 차별이나 구분이 없는 점에서 수주 변영로의 <봄비>와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변영로는 봄비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암시가 되어 있는 반면 스티븐슨은 온 세상을 적시는 비의 모양에 초점이 모아진다. 어떻든 비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바다와 친화적인 인간의 삶은 항상 그리움의 공간이 설정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쯤 파도와 놀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가자는 청에 처음엔 그러마 하더니 몇 걸음 지나니 마음이 변하여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섭섭하여 놓아주니 깔깔거리면서 손을 흔드는 작별은 너무 아쉬운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만날 날을 통보해 달라는 부탁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안도감이지만 내 생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몰라 입을 다물고 뒷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졸 시><바다의묘망(渺茫) 친밀도라는 것은 시인과 대상에 어떤 교감을 나눌 것인가의 달려있다. 대상을 적개심으로 바라볼 때 무서운 파도의 위압에 지릴 수 있지만 바다와 놀이로 삶을 이어갈 때면 바다는 놀이터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쓴 졸 시는 죤 메이스필드의 <바다의 열병>에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의 첫 구절부터 친밀도인 것 같아 흐뭇하다 두려움이 없고 친구와 외로움을 달래는 대상화일 때 <바다의 묘망>처럼 하나로 결합을 꿈꾸는 평안하고 시원함을 가져온다. 떼오필 고띠에의 <바닷가에서>도 시각적인 기교의 바다의 정감이 담긴 것들의 대한 동경과 정서가 서려 있는 듯하다. 모두 바다에서 정서의 고양(高揚)을 추구하고 있음이 공통적이다. 어떻든 비에서 물 그리고 강으로 변화를 이루면서 다시 바다에서 커다란 꿈의 이름이 순환의 곡조로 되풀이될 때, 시인의 선택은 항상 자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논(中論)> 3.사회적 의식 또는 휴머니즘 인간이란 생각으로 삶의 터전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작은 단위인 나로 출발해서 가정 그리고 마음 또는 사회로의 확대 현상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한다. 하여 사회적인 존재로 군집(群集)- 일종의 사회학적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는 일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평안하고 아늑한 세상이기보다는 고통과 신음이 넘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인간사라는 뜻인 것이다. 여기서 어떤 추구의 길을 선택하는가의 따라 마음 - 아무튼, 마음으로 길이 결정되면서 자기의 삶에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의 피륙을 짤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색상의 비단을 만들 것인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만든다는 자기 책임설이 곧 삶인 것이다. a)부정과 칼날 사물을 바라보는 사물에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이 답일 것이다. 전자를 낙관의 태도라 한다면, 후자는 긍정보다는 저항의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려는 복수가 때로 시적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에 항거하는 형태를 저항이라 말하고 순응하는 모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모순의 시대에 목소리에 칼날을 감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가 지나칠 때는 자기를 찌르는 비수(匕首)로 둔갑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부터 모순의 극치에 항거의 목소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김수영시인이라 말들을 한다. 죽기 전에 쓴 (1968. 05.29) <풀>은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그해 06. 16. 사망. 48세 때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수영은 평가 이상의 평가를 누리고 있지 않나 한다. 이는 한국 시(詩) 문단의 판단에 병폐가 아닌가 하지만 엄밀한 분석과 평가에 의해 명성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로 명망의 성가를 높이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되지만 - 사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구절은 췌사(贅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앞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틀림없이 그 구절은 삭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뿌리가 누워서는 논리상 안되기 때문이고 이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한번 전문을 인용해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지난 60년대 말은 흐린 날씨의 사회라 하겠다. 모순과 불합리가 권력자에 의해 또는 가진 자에 의해 침탈(侵奪)당하는 슬픔의 시대라고 해야겠다. 이때 바람은 훼방의 이미지라면 풀은 저항의 탁월한 이미지 구축의 시어였다. 그러나 맨 마지막 구절은 삭제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상의 방해가` 안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김철수의 <잡초>와 비교가 되는 - 영문학 전공에 미국의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 속에서>>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두 사람의 일치된 이미지는 오히려 김철수에서 잡초는 불에도 또는 마차의 바퀴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저항의 이미지가 단단하다. 물론 시적인 완성도에서는 김철수의 <잡초>가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의 전개에서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b)긍정과 휴머니즘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했다. 모든 전제(前提)는 실존의 형태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존재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고기 잡는 항아리”의 처지가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詩) 또한 결국에는 휴머니즘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설득하고 말하는 길을 제시할 때, 감동은 더 커다란 사랑의 뜻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문학의 영원한 숙명은 결국 휴머니즘의 실천에 방법론의 전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시인은 순수와 깨끗함, 영혼이 맑아 추구하는 사랑과 용서하는 사도(司徒) 일뿐, 고함치고 거드름 피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싸는 보자기를 펼칠 때 추위를 가려주고, 목마름에 물이 되는 것이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니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하는 불타는 향수(鄕愁) 네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젠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려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자 김동명 <파초> 조국을 벗어나 이국의 외로운 고독이 밀물 지는 처지를 파초로 의인화되었다. 갈증이 있고 또 남방을 떠난 몸은 추위에 가릴 수 없는 노출에서 휴머니즘의 뜻이 시인의 마음으로 감싼다. 샘물로 갈증을 시켜주고 추위를 가리기 위해 방안에 기거함을 허락한 시심은 곧 사랑의 마음이다. 더구나 종처럼 시중을 위해 “우리”로 펼치는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시심(詩心)에 꿈이 더불어 피는 듯하다. 고함치고 욕지거리하면서 살벌한 아우성이 아니라 뜻깊은 호의로 감쌀 때, 세상은 의지할만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서로의 체온 나누기에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음을 <파초>는 역설하고 있다.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순결한가 대답이 머뭇 거린다 죄 없음도 죄가 되는 사는 일이 그렇기 때문 욕망이 문을 닫을 수는 없지만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말라는 부탁 더불어 고개만을 숙이고 살아 예 이르렀어도 희색 빛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내 그림자의 길이에 안도감이 다시 부끄럽다. 졸 시 <순결과깨끗>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잘해도 때로 비난의 화살이 빛발 치는 경우도 있고 너무 정직해도 아픔을 폭포로 맞을 때도 있다.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며 백지이기 때문에 비난의 과녁은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너무 많다. 그러나 순결함이 미덕이고 깨끗함이 옳은 일이라면 감수의 파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옳은 일이며 바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은 이러한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지만 신념을 개성으로 내세울 때 구름은 항상 비켜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결하고 깨끗함이 인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곧 휴머니즘의 정도에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시와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밝은 표정을 찾아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문학의 숙명인 이유가 아닐까? <결론> 4.에필로그(epilogue)–인간 사랑의 그림 그리기 문학에서 만남이란 기쁨이며 이별은 아픔의 표적일 때, 거기에는 인간사의 복잡 다기(複雜多岐)한 전개가 감동의 줄거리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은 만남으로 순환하는 길에 이어질 때, 우주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라야 이별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간은 그리하여 섭리에 따라 이어질 때 비로소 감동이 정당한 길로 다가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생의 터전이며 이를 통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회전이 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 속에서 생의 가치를 구축하고 발견하는 일은 곧 자기를 찾는 일이며 이를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밭갈이에서 생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개성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푸른 생명을 키우고 강은 물로 바다로 이르는 우주의 법칙에 따르는 표현미는 곧 문학의 질서이며 올바른 한국문학의 평행이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이 이 질서를 벗어나 순응치 않는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으며 질서에 순응한다면 그것을 희극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고 질서에 순응을 가르친다. 비단 도덕적인 가치 우선의 공리주의자 플라톤이나 공자에 이르러도 문학은 인간 우선에 이름을 강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예술은 사진을 모사(copy)하는 것이 아니라 “ 있음 직한(probability) 현실”을 그린다는 점에서 예술론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설득력 있게 주장되는 것이다. 평행이론이란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되는 이론으로 웨이브헴 링컨과 존 F. 케네디의 평행이론이 대표적이라 하지만 삼라만상 평행우주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어제의 태양이나 오늘의 태양은 변함없이 우리 앞에 와서 서 있으나 이는 우주의 질서의 개념일 뿐이지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신기한 개념을 추가하려는 점이다. 모든 작가라 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소재는 삼라만상 우주와 고향, 사랑, 부모, 등을 빼고 나면 과연 글이란 어떻게 진행이 될지는 글쎄올시다 이런 절대 필요성의 반복성에서 평행이론은 근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평행이론의 원천인 근간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우주 틀 안에서 섭리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평행을 이루는 근대사회 우리 문학을 본다면 우리 문학의 근본이 민주라는 허울에 둘러싸여 이념에 노예가 되어 서로 갈라지는 문학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아쉽고 두렵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통일이 되면-? 언제까지 남북이 서로 으르렁 거리며 하나 되는 문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는 것에 이제는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이방인이 되어 아름다운 강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오히려 신관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모든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실천에서 한치도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독자의 감동은 배가 될 것이며 작가라는 타이틀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문학이란 숙명을 안고 변화의 현상을 그려나갈 수 있다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지는 계기라 보면서 논고(論告)를 마치려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3]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1. 말하는 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람이란말로써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하나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한 편의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접신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하나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 모른 채 가슴 아파라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하나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 필적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은 지는데>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시화되었으며,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아파라’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 속을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그리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의해 긴밀도의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겉으로 동일하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놀랄 일은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유종필은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속몸짓으로 하나이고 싶네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맨가슴에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발동하는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나게 하는 인자(因子)를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이고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된다.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때문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를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날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닮은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열린마음을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오버랩되면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자아(ego)찾기 나를 찾는 것은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종점 이러고들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놓았는데 .... 중략.....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뒤집어쓴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감동받는호소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꿈 속에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여정?> 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희로애락의오욕에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 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믈에서헤어 나오지못하고 다만날갯짓이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먼 길을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에 삶에 서 있는 듯하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의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 오는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시인>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의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을 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완료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마무리해줄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이승섭 시평집 2] [이승섭 시평집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