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지 물음에는 거의 명확한 대답을 마련하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도 막상 왜 시를 쓰는지 물으면 답을 어떻게 줄 것인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무한 상상이 내게 들어와 시를 쓴다는 신을 떠올리며 설명을 해주게 된다. 물론 스승께 배운 말이지만 사실 자기 시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시를 쓴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시를 생산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시를 분석하고 해제 또는 정리 이후에 비로소 객관적인 관점으로 탄생된 시에 대한 평론가의 조언에 따라 할 뿐이다. 이 경우 시에 대한 객관화는 쉽지 않으며 모든 시인이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에 마치 잉태 전에 어떤 꽃을 만들겠다고 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삼라만상 우주 섭리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따르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시를 그리는 일은 아이의 잉태, 또는 꽃을 만들 수 없는 일과 같은 것이다. 시인 누구나 멋진 시 좋은 시 쓰기 위해 신명을 다하지만 그런 소망은 쉽지 않은 결말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멋진 시와 좋은 시를 그릴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다. 내면을 통찰하여 사물의 특성을 시로 환치하는 일에 부단한 집중력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누구나 그리고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인이란 명칭을 가진 사람만이 시를 그리고 쓰는 것은 아니다. 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내면에 시심을 감추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 시심을 어떻게 꺼내어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가의 집중력 상상에 의해 아마추어와의 차이는 증명되는 것이기에 증명이 되는 것이다. 서길순 시인은 공예방에서 작품을 만들며 깨끗한 시를 쓰는 시인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잡티가 섞이지 않고 순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다. 이는 그의 직업과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견문으로 시화화 하는 독특한 입지를 만들고 있다. 공예라는 작업은 섬세하고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창작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시곗바늘처럼 행동하는 조용한 조건에서 일을 하며 창작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매시간 순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던 순간의 아픔들이 밤낮을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던 나날들을 발췌하는 순간의 환희- <머리말 중>에서 다소 체계적인 글이지만 시인의 내적으로 아파했던 시절을 말하고 싶은 글들이 응축되어 시로 표현한다. 이렇게 시를 쓰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생동감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볼 때 함축된 언어로 그려지는 그의 특성을 만나기로 한다. 2. 시의 언어 시는 언어로 이어진다. 그 구성이 언어일지라도 시인의 정신이 투영되는 점에서 그만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때 단순한 언어의 조합, 조립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을 모두 투척하는 일이면서 생명과 고통을 맞바꿀 수 있는 신념의 진행이라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자화상이고 영혼의 불빛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서길순 시집을 보면 계절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절에 따른 시인의 의식은 계절과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로 의지하며 봄에 꽃을 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사계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꽃봉오리마다 솜털이 보송보송 꼭대기까지 단물 적시며 양지뜰 푸른 꿈 꾸더니 어느새 바람을 이기고 이쁘게 세상으로 나온다. 아직 웅크린 벌 나비 날개 짓 처마 끝 매달려 앵앵거린다. 꼼지락, 꼼지락 양지바른 돌담 아래 키다리 쑥이 터진다. 어머니가 끓여준 쑥국이 문득 생각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이른 봄에 <봄이 오는 소리에> -중- 물이 오르는 봄날의 허박한 풍경화이며 의식을 풍경과 어머니를 그리는 방법은 서정시의 흔한 작시법이지만 실감으로 다가오는 일은 희소한 일이다. “꽃봉오리”가 “바람”과 싸우고 1연 2연 오면 “벌” “나비”라는 혼란스러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어머니의 추억이 개입되면서 상상의 나래로 펼쳐진다. 서길순 시인의 시는 전반적인 작시법이면서 그의 시적 정신과 의식을 투영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1) 삶에 깊이 모든 시에는 삶에 대한 호흡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 자신의 고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회라는 말은 낯설게하기라는 문학적인 기교를 뜻하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말이 되고 그 말은 감동의 방법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무늬와 같은 것이다. 그의 정서는 아마도 꾸밈이 없어 단조롭게 보일지는 몰라도 아주 깨끗한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구가 돈다. 중략- 빙글빙글 새 희망이 익는다 팔랑팔랑 벚꽃 익는 냄새가 향긋하다. <봄날의 패러디>-중- 모순으로 부풀려진 세상에서 자연의 섭리는 구분과 칸막이도 없이 잘도 돌아간다. 때문에 시인은 빙글빙글 띄어쓰기를 안해도 그냥의 의미를 구축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간의 구분일 뿐, 누가 가을이라고 하지 않아도 사계절은 오고 있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가? 다만 자연적인 현상으로 더불어 팔랑팔랑 벚꽃이 지는 섭리 앞에 숙연해지는 모습- 시인의 얼굴에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남으며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이를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개인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해와 달 끌어안고 우린 달렸다. 지구촌 너무 좋아 낮과 밤 구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략- <우리>-중- “우리”라는 의식은 분야가 다르다 해도 질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불평 불평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는 그의 삶에 적용된 의식이 투영된 것과 동일한 문제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의 시는 담백하면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이치가 대입된다. 2) 의식의 정감 시는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시의 무드는, 결국 시인의 정신 무드를 표현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시인의 정서는 다감성을 포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두루 관심을 나타내지만, 지극히 절제된 표정을 관리하는 것 같다. <엄마 얼굴,> <친구야 너는,> <옛 친구> 등을 보게 되면 주변의 지인이나 육친에 대한 정감이 다감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친구야 오늘 하루는 시원한 감로주 한 사발 거나하게 나누고 날 저문 고향길 함께 걸어가 보지 않으련? 나이테가 몰라보게 두꺼워진 네 눈망울 속에서 새 봄맞이 분주한 고향 땅을 그리련다. <옛 친구> -중- 친구와 감로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언이다. 우정은 곰삭은 맛처럼 깊이가 있고 따스한 체온이 교감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옛 친구의 우정을 찾아 방랑의 길을 터벅터벅 가는 것 같은 시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결국 도착한 곳은 고향 땅, 이는 친근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고향을 못잊어 하는 인간의 여린 심정에서 시인 또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굴을 그릴 수 있지만 결국 그릴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에 이르면 서러움 같은 밀물에 점령당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술래놀이 즐겁던 미루나무 아래로 가리라 돌아가리라 꼬까옷 반짝반짝 차려입고서, 고향 땅 산과 들녘이 반가이 다가와 벌써 내 곁에 있네.-중략- <귀향> -중- 추억은 늘 즐겁다. 왜냐하면 추억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여기서 어린 날들의 “술레놀이” 혹은 “꼬까옷” 등의 기억들이무리지어 “벌써 내 곁에 있네.”라는 생각- 생각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고향이 된다. 순수와 아름다움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어린 날들의 순수와 추억들이 어울려서 오늘에 다가온 이름- 추억 속으로의 여행은 정 깊은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풍경화이다. 이 풍경화는 바라볼수록 다정하고 깊은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며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점철 되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희망의 손짓을 보내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묘연함과 긴 시간의 간격 때문에 애절함을 더하는 요소로 인상을 장악한다는 뜻이다. 3. 자화상의 노래 “만추” “겨울 일상” “그리움” 등을 보게 되면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을 노래한다고 할까? 때문에 그의 노래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명상의 숲을 구축하는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아울러 생각하는 것만이 시의 몫은 아닌 것이다. 행동의 길을 안내하면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의 자리를 항상 견고(堅固)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서길순 시인의 시에는 생동감으로 포장된 정서가 신선미를 자극한다. 인생에 대한 발언은 때로 에피그람의, 목청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깊이를 갖춘 희망의 깃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감이 그의 시심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시에서는 고향을 회상하는 따스하고 안온한 이미지의 옷을 입은 시적 행보에는 즐거움이 따라오는 듯 하다. 다시 말한다면 서길순의 시는 노래로 부르는 자화상의 그림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모든 이들의 따스한 시상을 전해주는 시인이 되기를기대 하며 나의 숙제와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으며 나가려 한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제 7집{공정 정의 사색의 길}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9집 {무의식의 시}]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늘 평범하고 추상적 언어 감각이지만 시라는 특수성을 볼 때 이것은 곧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한 개성의 척도에서는 애매모호성이 너무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각주(脚注)가 많은 T.S Eliot의 황무지를 읽으면 그 나름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독자는 일단 난해의 딱지를 붙이며 돌아서는 것이다. 하여 우리 김소월의 시를 읽을 경우 쉽게 아는 척하는 이해가 문득 다가든다. 김소월이나 엘리옷은 분명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가치를 빛내는 점에서 달리 해석을 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경의 이상의 <오감도>를 명쾌하게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평론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황색저널리즘 <인기주의> 고착의 명성을 부추긴 일면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시는 시 같아야 하고 산문은 산문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각주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비유의 장치나 시 적 포장을 걷어내면 속살이 드러나는 의미의 맛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구상화가 있다. 대체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추상화의 숲을 거닐다 구상화의 밭으로 걸음을 옮기고 다시 추상 공간의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시도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질적인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으며 일테면 특징을 이루는 표정을 말한다는 점이다. 시인의 원고를 일별(一瞥)하고 난 느낌은 추상의 숲을 지나는 느낌이고 마치 이중의 기교가 특이하다는 인상이다. 이제 그 표정을 한번 만나보기로 하자. 시집 《골목길 서사》는 총 5부 100편의 시는 이길여시인의 의식 조감(鳥瞰)이 서사로 그린 듯하다. 서사란 현실의 특정한 시간과 과정을 시간의 앞뒤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 촉수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지는 듯 정서가 이어지고 묘미가 다채롭고 신비하다. <2. 길에서 만나는 추상의 표정> 바실리 칸딘스는 순수 추상 예술의 선구자로서 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키고 음악가 바그너의 선봉자로서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탁견(卓見)을 실천에 옮긴 추상 수채화의 화가이다. 정신의 고도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추상은 일종의 변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공로를 갖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만의 정서를 점과 선, 면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문법은 찬탄을 이어오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시에서도 이런 기법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 영역의 한 축을 감당할 때 일정한 자리를 갖는바, 시인의 창조 기법은 그런 측면으로 볼 때 가까움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산길 고당으로 돌아가니 이마를 맞댄 지붕 아래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고행의 삶의 소리가 내 마음 긁고 때마침 눈물방울 달고 서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눈길이 간다. 제 키보다 큰 담쟁이에 기대 한숨과 울먹이는 아이와 자아 속의 내가 함께 한다 그을린 마음 달래려 가까이 서서 미소로 그려 준다 양팔을 벌리고 선 아이의 그림자에 깃 고운 날개가 펼쳐지고 그새 배시시 웃는 눈망울 내 세상 어디를 크게 흔들었고 쉽사리 재울 수 없는 뭉근한 떨림에 선뜻 돌아서지 못해 서서히 거꾸로 걷고 있다. <산허리 천사의 눈> 중 시적 공간은 협소한 산골의 상징에서 화면은 거친 목소리와 더불어 고단한 삶의 목청에 담긴 아픔이 눈물방울 달고 나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과 울먹이는 모습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개입은 시간의 테이프를 먼 곳에서 가까이 화폭을 전환하는 기법을 구사하면서 위로의 승화가 천사의 날개를 그려주는 그림 속에 펼쳐지는 날개의 바람으로 “그새 배시시 웃는”에서 현실 공간에 화려한 채색이 마음 밭을 보여준다. 시의 기교나 그림의 기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할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경계가 없음에서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재미는 시인의 능력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서의 파편들이 부유하면서 언젠가 결합하는 요소로 작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대상의 표현은 시인의 심리적인 경과에 따라 특징이 드러난다. 가령 습작기에서 원숙기로 들어가는 도정(道程)마다 삶의 굴곡이 들어 있으며 이를 심리적인 기제(基劑)로 나타낼 때 추상의 묘미는 복잡을 단순화하는 형태로 정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액센트릭 한 요소를 배제하고 화면 내에 형태적 질서에 예술의 자율성을 구성한다. 결국은 시인의 정서적 특징과 정신의 자유 구가에 한몫을 다하는 에너지의 창출일 것이다. 시인의 정서적 공간을 추적해 보자 잘 달구어진 여름 한낮의 길을 신기루가 덮는다 그 속으로 영혼의 무게조차 가누기 힘에 부친 누군가가 그늘을 거느린 나무에 기댄다. .... 약....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더 울어야만 나를 한 겹 누구를 위해 벗어낼 수 있을까? <매미의 여름 나기> 중 전반에는 객관적인 서술이고 후반에는 주관적인 이미지가 작동되며 전반엔 보여주는 것으로 풍경의 느낌을 독자가 용해시키거나 아니면 간과하거나 유념할 사항이고 후반엔 매미가 곧 시적 화자인 ego로 들어오는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둘의 교합에서 자기를 대입하면서 사는 일이 이치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이 기교는 선명한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또렷한 비교 가치로 승화한다. 이 시인의 시는 그냥 무심코 읽으면 혼란이 올 수 있으나 다시 깊게 읽으면 네거티브 필름에 빛을 쪼이면 포지티브(양화)로 선명한 윤곽이 나타나는 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이를 이해하느냐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3. 메신저의 굴레> 새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으로 옛날부터 고귀한 존재로 인식을 키워왔다. 애 그런가 하면 인간은 늘 하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 하늘을 지향하는 정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향하는 꿈의 이름이기에 비행기는 다시 로켓이 되고 미사일이 되면 이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있고 달 혹은 화성이나 우주의 유영(遊泳)에의 꿈을 실현하는 시작의 실마리는 바로 새에 출발점이었다. 밤나무를 집으로 정한 새들 잠에 취해 뭉그적대는 나를 알람보다 먼저 깨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나와 나뭇가지를 건너 딛고 제가끔 넘놀며 재잘거리며 새들을 쫓는다 서로 깃을 다듬어 주다 한 마리가 가지에 걸린 햇살을 쪼아 먹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하고 나도 눈 시늉을 한다. 시나브로 입꼬리가 슬몃슬몃 올라가도록 내 마음도 몰랑몰랑 해진다. 순한 생명들의 열어 놓은 새털 같은 아침에 마냥 빠져들어 짝다리 짚은 다리에 쥐가 놀아 옴짝 못하고 서 있다. <하루를 새와> 1연에서 새와 나는 부지런한 새의 울음이 깨우는 관계로 이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취하기 때문에 새는 자기 생존 방법으로 일어났지만, 시인으로 다가온 의미는 잠을 깨우는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시에 2연에 따르면 새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아침의 동반자로 설정되어 사이좋은 새들과의 관계에 시인 또한 동화되어 새의 행동에 동반자로 변한다. 이러한 감염(感染)의 정서는 “몰랑몰랑”해지는 마음의 상태는 새로부터 받은 정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하면 새들이 열어놓은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망연함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림으로 걸린다. 새와 시인의 관계망은 “좋음”을 유지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보폭이 시작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는 모르나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끌어내는 논리를 굳이 설명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혹은 사물을 노래하는 자이지 해석을 하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요하여 누군가 떠올리기 맞춤한 풍경이다 갑자기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인정사정없이 톡톡 터지는 기억들은 입가에 한숨을 몰고 콧등이 매워지게 한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잊었다 여겼던 네가 살고 있었다. 멀고 먼 시간을 돌아 내게로 오는 사람 하나 있다. 하여 나는 기억의 불을 밝히려 눈 한 움큼 뭉쳐 설 등 하얗게 매달아 놓는다. <기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바람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바람한줄기 무심히 지나가고”로부터 의식의 창문이 열리고 이로부터 물길이 터진다. 그리하여 잊었던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존재의 이미지로 환생하면서 나와 관계의 과거가 문이 열리게 된다. 즉 그 사람의 모습을 인지할 때, 이 시의 모티브는 바람의 촉수가 일깨워주는 시발점으로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동하는 역할의 바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면의 세계를 깨우는 바람에 의해 외부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달자가 곧 바람의 힘이 될 때 시인은 비로소 길을 꺼내는 시작이 작품으로 창조의 길이 나타난 셈일 것이다. <4. 에필로그> 그의 시 “어떤 그리움” “희망 사항” “기억을 찾아” “하루를 새와” 등을 보면 창조의 기법이 액자(額子) 기법이 있다. 풍경을 그리고 다시 그 속에서 풍경이 들어 있을 때, 감상의 묘미가 길을 넓힌다. 시는 꽃과 자연의 모습이 보이고 향기가 하늘로 오른다. 이는 연상의 꼬리가 따라 이어질 때 풍경을 만들고 다시 전체의 풍경이 아름다움을 생성하면서 여운(餘韻)을 남긴다. 이런 특징은 시적 강조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지배소가 되는 사물 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아름다움의 연출은 언어 감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모자이크로 짜 맞추는 미감은 성숙의 시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시로서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그리고 심중의 깊이를 풀어내는 기교는 곧 언어의 운용에서 탁월한 미래를 기대하는 요소가 되면서 창작의 시를 “액자 시” “사물 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높이 사고 싶다. 삶의 고귀한 가치가 빛으로 승화하는 상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펜을 내려놓는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이승섭 제 8집 시의 숲에 빠지다.] [이승섭의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사실 역사는 아니지만 시인의 일생은 역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살아온 세월이 곧 상상의 나래를 타고 시로 안착하면 시인의 역사는 변용의 이름으로 시(詩)에 용해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시(詩)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시인은 이를 재료로 새로운 공간의 창조를 위해 새롭게 정신을 투척한다. 한 사람의 시인은 때로 역사를 넘어 미지(未知)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시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이는 상상의 힘에 의지할 때, 비로소 가능한 입구를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영주(英主)로서의 역할 - 시적 성공은 정신 서정에 건설의 완성일뿐만 아니라 시인을 영생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스승이라 해서 예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후백) 황금찬 시인은 1918년생, 미수(米壽)를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문학 행사에서 축사를 빈번하게 하실 그뿐만 아니라 필자 시집 상재(上梓) 시 참석을 하셨으니 왕성한 집필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놀라운 모습을 뵐 때마다 경의(敬依)와 존경의 이름으로 느꼈다. 대체로 시집을 발간하는 평균치의 기간이 3년쯤인데 비해 (후백) 황금찬 시인은 이를 상회하는 것으로 보면 모두가 알 것이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 시니어 때는 감수성에 매달리는 앙상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황금찬 시인의 시는 새로운 변경을 찾아 두리번거림 - 되돌아보는 추억이 많은 함량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고희(古稀) 무렵에 발견했던 정신의 흔적(Trauma)이 20년 후에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일 것 같은 호기심으로 논지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큰 윤곽에서 볼 때 1956년 박두진 시인이 지적한 대로 “평범한 주제와 인생을 보는 눈도 일부러 기발(奇拔)함을 꾀하지 않는” 황금찬 시인의 시는 여전히 동일 선상에서 정서의 평형을 유지함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변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첫 번째 변화는 회고(回顧)의 시들이 많은 비중으로 분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대화에서 원숙한 내면의 소리가 들리고, 시 공화국 서정 논 건설의 포부가 두드려진다. 이울러 새와 나비, 그름 그리고 호수 등이 여전히 시 의식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 정신의 중심 표정 1) 회고의 길 찾기 돌아보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물론 아픔이 있는 돌아봄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움의 추억이 아니겠는가? 고향, 어머니, 등을 생각하면 고향의 이미지는 차라리 숙연한 정서를 동원하는 미감(美感)에 포위되곤 한다. 더구나 젊은 날들의 친구에게서는 눈물겨운 기억이 풀려나고 그 이야기는 애달픔으로 부추기는 길을 헤매게 될 때, 무거운 추억의 무게 앞에 스스로를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아스라함이 더욱 심각할수록 돌아갈 수 없는 길 찾기는 아름다움과 애절함을 가중하는 방황- 황금찬 시인은 청록파 삼가 시인 중에서도 묵월에 대한 추회(追懷)가 남다르다. 시적인 증거를 통해 정신의 입구로 들어가 본다. 낡은 책장을 넘긴다. 잠들지 않고 있었다. 음성은 옛날 병들지 않고 시간은 시집 안에 정지되어 있다. 목월 시집이다. 『음악이 열리는 나무』 『목월의 시집』 첫 시집 『현장』에서의 목월이 2살 아래인 황금찬 시인에게 쓴 발문(跋文)의 글이나, 『무제』라는 시에 들어 있는 절절한 우정과 존경의 뜻을 보면, 감회의 깊이가 평생에 얼마나 깊게 각인(刻印)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52년 강릉에 계실 때, 1953년 처음 데뷔를 하였으니까요?. 시를 가지고 박목월 시인을 만나려고 대구에 갔어요. 문인협회 사무소인데, 남의 집 2층입니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트럭을 타고 가는데, 가다가 철사에 걸려 바지가 찢겨 졌어요. 그런데 그 바지는 어떤 바지냐 하면, 광목 같은 데다가 물감을 들인 겁니다. 검정 물인데 새까맣지요. 푸르딩딩한 그런거지요. 말이 아니지요. 그 찢겨진 바지를 바늘이 없으니까 철사로 꿰매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꼴이 말이 아니지요. 그걸 입고 대구 시내로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 같아요. 웃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그렇게 느껴집디다. 그 집으로 찾아갔어요. 악수를하더니 나의 찢 겨진 바지를 보면서 이게 왜 이렇습니까? 오다가 찢겨졌었지요. 그러니까 울기 시작합니다. 눈물을 막 흘리면서 이래요 ·····” 『공상일기』 《나의 시화 인생》에서 최초 목월과의 조우(遭遇)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아픔을 눈물로 대변하는 모습이 처연하다. 이런 인연은 황금찬 시인의 깊은 우정이 되었고, “세상에서 나는/사람을 만났네/평생 어질게 어리석은 눈을/보았네”(『무제』)에서는 황금찬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또한 유치환과의 우정 – 서울에 사는 황금찬이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면 음식을 대접했던 고마움의 우정이 순수로 포장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우정은 황금찬 시인의 다정함이 빚은 추억일시 분명하다. 더구나 1950년 서울에 문인의 숫자가 165명이었음을 감안 하면 시인의 관계는 친밀을 넘어 우정의 각별함이 요즘의 계산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의 특별함이 있었지 않았을까? 박목월에 대한 언급은 『성탄절』에서도 1959년 12월 24일 갈채 다방에서 시인 양명문과의 에피소드로 나타난다. 『3시 30분』에서 목월의 추억은 회상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의 이름으로 문을 두드린다. “박목월 시집/산도화를 들고 새벽까지 않아있다. /내 젊은 날의 복장으로/구름이 찾아온다. ····중략···/그래, 좋은 생각이야/열려있던 시집을 덮었다./새벽이다./시집 속에는 어제와 오늘이 없다.”(『3시 30분』) 새벽 3시 30분은 불면의 시간이다. 물론 잠 못이루는 시간에 과거의 우정이 상념으로 일렁이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저변에는 피할 수 없는 고독이 자리한다. 왜 그런가 하면 과거와 멀리 떠나온 시간의 간격- 더불어 우정을 나눌 수 없는 고독 때문에 과거의 집착이 나타난다. 이는 오늘을 위로하는 인자(因子)이면서 지나온 삶의 가치를 더하는 생각이 더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박목월과의 관계는 더 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일방적으로 정리될 수도 있겠지만 『밤이 깊도록』은 송욱 시인과의 추상을 느낄 수 있다. 송욱 시인과 강가에 않아 밤을 새운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해가 1975년 여름이다. 7월26일(?) ···중략··· 송욱이 일어서며 저 은하의 강물이 곧 쏟아질 것 같은데 그 시각이 새벽 3시 30분 그 송욱 시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공상 일기』 《밤이 깊도록》에서 시인은 정에 굶주린 사람일 것이다. 따스하고 안온함에 쉽게 잠이 드는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감동의 파동에서 쉽게 점령당하는 사람 - 황금찬 시인은 그런 정서에서 항상 갈증을 느끼는 거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평범함이나, ‘기발(奇拔)함이 없는 진솔’ 혹은 ‘수월한 당신에 서정(抒情)에 압도당하는 행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격이다. 기교를 부리고, 호기와 허세 앞에 초라해지는 시가 아니라 친숙하고 다정다감한 그리고 나긋한 속삭임의 시를 쓰는 황금찬 시인의 시는 항상 변함없는 정감으로 길을 넓히는 이유 때문에 지난날들의 우정에 갈급함을 느끼는 현재가 아쉬움으로 길을 넓히는 것 같다. 『그 집 앞』은 학자 강 인산의 소박하고 어눌한 추억을, 『시인의 집』은 지금도 평창에서 살았던 김시철 시인의 경우를 『금원에서』는 화가 박수근, 손웅성, 그리고 지산에의 추억을 애달파 한다. 황금찬 시인의 시에는 실명이 많이 들어간다. 운명(殞命)을 달리한 김종문, 장호, 조지훈, 정한모, 조병화, 김영태 혹은 후배 문인들, 또는 『미완성 교향곡』에 조영숙이나 『벽시계』에 최규창이나 바이런 혹은 블란서 3대 비련(悲戀)의 아벨라르와 에로이즈 혹은 음악가 등이 다양성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시인의 천성적인 다정 다감성이 드러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굴곡(屈曲) 없이 대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으로 앞서가는 마음이 없다면 누구도 황금찬 시인의 면모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황금찬 시인은 순수하고 질박(質朴)한 인간성으로 살아온 면모가 시인의 표정이고 시의 모습이 아닐까? 2) 시의 세상 – 시의 모든 것의 상상 상상(Imagenation)과 공상(Fancy)의 차이는 Coleridge로부터 들을 수 있는 사실 이론의 정론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나온 기억의 형태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공상이라 칭한다면, 상상력은 1차 적인 것 - 감각과 지각을 중개 시켜주는 기능으로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2차의 문학적 상상은 1차적인 것의 변형으로 시적 상상력일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의지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라 본다. 물론 상상력이나 공상이 서로 연결 고리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설정하는가의 여부가 구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면, 셱익스피어는 ‘광인과 연인과 시인에 동류항을 지적하고 있음도 구분에 대한 모호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광인은’ 아무것도 아닌데‘ 비해 시인은’의식적인 의지에서 차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의 시(詩)의 표정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구체화 된다. 물론 조급증이나 급한 느낌의 생각은 드러나지 않지만 일종의 지향을 꿈꾸는 상상이 길을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기 성주(城主) 즉 자기만의 나라 세상을 건설하여 그 공간에서 주인이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 - 일종의 현실을 따라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꿈을 꾸는 일 - 공상으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상상의 조감도를 만들게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는 지번 도가 없었다. 나무, 풀, 꽃 토끼, 사슴, 노루, 이들의 영혼들이 세운 꿈의 세계 어느 곳에 가나 지 번도가 없었다. 그 까닭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음악이 열리는 나무』 「지 번도가 없는 나라에서」에서 나무, 풀, 꽃들의 이미지는 순하고 예쁘다는 느낌을 준다면, 토끼나 사슴 그리고 노루 또한 착하고 선량한 비유적 인상이 겹친다. 그러나 호랑이, 사자, 악어, 뱀 등은 강하고 약육강식의 기피적 사고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상반된 개념은 전자에서는 평화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고, 후자에서는 원칙을 무시하고 ’내가 하늘이요/곧 법이고/내가 하는 일은 진리라고/생각하는/그런 동물들은‘ 싸움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일삼는 악의 축이라면 시인은 이런 동물들을 멀리하고, 나의 것이나 네 것이 없는 평화의 공간을 염원하는 뜻을 가진다. 이런 공간을 천국, 혹은 유토피아라 칭한다면’ 이 세상에는/지, 번이 없다‘와 같이 염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마치 ’고향을 두고 떠났던/새들도 돌아와/날개를 펴고/구름은 국경도 없었다‘. 『주님의 뜻을 따라』처럼 자유 왕래의 땅을 그리워하는 뜻이 구체화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시인의 꿈인 것이다. 태평양 바다 어느 곳에 섬이 하나 솟아올랐다. 하늘 새의 오른쪽 날개 만한 터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구름으로 집을 짓고 상아로 장식한 다섯 칸의 시실(屍室)을 꾸민다. 시인들을 초대한다. 국적을 묻고 연대를 덮는다. 소포클레스, 단테, 밀튼, 괴테 테니슨, 롱페로우, 이백, 두보, 도연명, 말라르메, 릴케, 발레라, 아폴리네르, 북원백추, 칼 슈미텔러, 서정주, 박두진, 청마, 박목월 『공상 일기』 「공상 일기」 중에서 무의식적인 왕래 - 즉 비현실적인 이유 - 구름으로 집을 짓고’와 ’상아로 장식한‘에서 현실성을 일탈한 공상의 근거가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꿈은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하등에 장애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국적이나 언제, 어디서 살아있는 가는 중요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 다만 시인의 이름 - 착하고 선량한 식물이나 토끼, 사슴 혹은 노루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기에 잘났다는 행동이나 위압적인 위협이 없는 오로지 사랑과 평화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고 노래하는 시인의 세계 - 이상을 향한 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꿈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주요 임무라면 현실성 혹은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다. 오로지 사랑과 평화의 공간을 향해 꿈을 노래하는 일이면, 인간사는 악의 땟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시인은 세계 평화의 방 그리고 인류의 자유, 절대 사랑, 핵 반대 운동과 마지막에는 모든 악을 몰아내고 하늘에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다섯 개의 방에, 시인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방에서 작업을 하면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시간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선택과 주제로써 꿈을 그리는 목적에 일치하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세계는 제한이나 구속 혹은 선택의 강요에서는 꿈의 길을 훼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공상은 허무한가? 라는 의문 앞에 서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시인은 꿈꾸는 사람, 오로지 꿈을 꾸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인에게 간섭이나 꿈의 종류를 묻지 않는다는 간명한 자유인의 해답이 도출(導出)되는 것이 아닐까 서술 해본다. 3) 자연의 육화 바라보는 모든 자연과 느끼는 자연이 있다면 전자보다 후자에서 더욱 심화된 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감의 80%가 시각에 의존하는 양이라면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우리는 흔히 과학이라고도 하고 현상적 표현이라고들 한다. 작두 무당이 시퍼런 작두날에 올라가 맨발로 서서 춤을 추는 이치나, 시인이 시의 신을 불러오는 것 – 이를 Ecstasy라 한다면 이에 대한 정확도나 과학적인 설명은 벽에 부딧치고 만다. 그렇기에 눈으로 현상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심안(心眼)(mind’s eye)에서는 천리길도 투시할 수 있는 것이 시인 마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을 마음으로 볼 때, 오히려 새로운 것 그리고 신기한 것, 그리고 창조적인 것을 찾아내는 인간의 마음을 과학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찬 시인은 사물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담담(淡淡)함을 발견한다. 이는 모가 나거나 각(角)이 져서 명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을 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에서 발견되는 표현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약 20년전 (그 당시 70세)의 시와 다른 특징이 되는 것 같다. 시(詩) 창작에 원숙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같은 논리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이기에 - 눈이 내리는 소리는 어느 마을의 발자국소리 네가 내 곁을 떠나던 날 그 발소리 위에 눈이 내리고 어디쯤 가고 있느냐 눈이 내리는데 소리도 없이 눈은 울고 있구나 네 마지막 음성이다 창 앞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울고 있구나 -『고향의 소나무』 「눈 내리는 소리」 시(詩)는 감각의 통합 작용이 빚은 조화미(調和美)라면 편양성을 넘어선 또 다른 지평을 만나는 일이 감각의 지평을 넘는 조화(調和)의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따로따로 구분되는 의식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 속에서 다양함의 특색을 만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의 통합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혼합해서 오는 혼란을 부추기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원숙의 길이 열리면 이러한 이치는 염려를 넘어 조화를 이룩하게 된다. 시(詩)에서 결점 중 장식적(裝飾的)인 요소는 이미지의 과시 혹은 꾸밈으로 인해 시적 팽창을 방해 한다고 하며 한약에서는 독약조차 적절한 배합으로 양약(良藥)이 되는 경험의 배합은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눈이 울고 있구나.’는 시인의 마음을 의탁한 정서이고 ‘눈이 내리는 소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심(詩心)일 때, 울려오는 조화의 소리로 들리며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달에도 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중략··· 아! 달에도 귀가 있어 다 듣고 있구나 그때 은행나무가 “나도 듣고 있는데” 하는 것이다. 달과 은행나무 풀벌레 다 울고 있구나 울지 않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구나 『공상 일기』 「귀가 있는 달」에서 풀이나 벌레조차도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미물(微物)들에게도 사랑을 보이면 활기찬 모양을 보이고, 사랑을 갖지 않고 무관심하게 대하면 우울한 양 표정을 짓는다. 인간만이 우월한 의식을 갖기 때문에 간과(看過)하는 점 – 독선적 인간 사고일 것이다. 자연과의 대화는 인간의 언어 이전에 언어가 존재한다. 시인은 이런 언어를 이해하고 해득(解得)하는 독특한 감수성(感受性)을 가지고 있다. 꽃을 노래하면 꽃은 즐거운 표정으로 살아나고, 우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울고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은 자연과의 대화할 줄 아는 경지에 있다고 본다. 스승이 아니라도 그렇게 볼 것이다. 심지어 “달에 귀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위로의 말을 찾고 있는 모습에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달과 은행나무 그리고 벌레조차 “울고” 있지만 울지 않는 존재는 “나 혼자뿐”이라는 점에서 일체화를 위한 동화가 이룩되지 못했음도 있다. 왜냐하면 정서(情緖) 감염(感染)의 일치성이 안 되는 이유는 대상에 연민(憐憫)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자연과 내가 하나로 결합 되는 관조(觀照)의 경지를 벗어난 것 같다. 연민은 나와 대상이 분리된 정서이기 때문이다. 4) 새, 나비, 호수 새와 나비나 호수 그리고 구름은 황금찬 시인의 시(詩)의 정신적인 흔적물이다. 왜냐하면 자기정화 혹은 수양의 방편이 되기도 하고 의식을 이동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어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는 자유 정신의 표상이면서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의 길을 만들기 때문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는 하늘의 의미와 결부되면서 신비감을 자극했고, 인간의 꿈을 실어 나르는 대상으로 미화도 될 수 있다. 그러나 황금찬 시인은 새는 과거와는 다르게 변했다. 비극의 잉태 속에서 울음을 우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지만 연세 90 여세에 이르러서는 보다 진보된 영생의 이미지가 겹치기 때문이다. 새들도 늙어 가는가. 그리고 삶의 문을 닫는가. 새들은 늙지 않는다. 병들지 않고 새들의 병원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새의 의사도 없다. 『공상 일기』 「새들의 일생」 스승 황금찬 시인의 작고 하시기 전에 전시에는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는 시가 상당한 빈도로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확신하는 시어이며 여백을 줄이는 기교일지도 모르겠다. 새들의 병원을 보았는가. 아니면 새들의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여 고통 시 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나 새들은 하늘 나르며 자유롭게 날고 또한 세상을 유영(遊泳)하면서 내일을 맞는 꿈과 비상(飛翔)의 의미를 버리지 않는 듯하다. 이와 비교되는 인간은 병원 그리고 구원의 종교 간판이 즐비할지라도 악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슬픔의 넓이는 더욱 확장되는 삶에 목이 메이는 인간의 욕심과 갈망 - 갈수록 희망과 사랑의 반대편이 기승을 부리는 인간사와 다른 이유는 자연과 친화된 삶을 살아가는 새들의 정신에서 영생의 의미가 도출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황금찬 시인은 “새는 무덤이 없다/공동묘지도//종교가 없는 /새의 영혼은/어디로 갈까//꽃의 영혼들이 가는/그 나라 일게다/(새)와 같이 꽃과 새의 동일성은 곧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고착되는 듯하다. 호수가 있다. 그 호수엔 이름이 없다. 해가 뜨고 별과 달이 언제나 지기만 했다. 고향과 깊이를 모른다. 내 어머니와 그분의 어머니도 이 호수에서 머리를 감고 수경 속에서 웃었다고 했다. 나는 호수가에서 많은 사람을 많았다. 장자, 이백, 그리고 두보 박목월, 소월, 영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폴 발레리 『공상 일기』 「호수」에서 무심(無心)의 호수는 관조(觀照)의 경지에서 만나는 이름일 것이다. 관조는 사고의 철저화라면 이는 구분이 없는 무경계의 경지를 가질 때, 만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티끌이 일렁이면 이미 파문에서 사물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왜곡되는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경지는 호수가 갖는 진경(眞景)일 수 있고, 또한 호수가 누리는 호사스러운 이미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진실이 숨 쉬는 곳이기에 그곳에서 어머니의 수경을 볼 수 있고 어머니의 웃음을 발견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시인들 - 장자, 이백, 두보, 목월, 영랑 등을 만나는 절차가 호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순수에는 순수의 길이 들어있고, 바람에는 바람이 길이 있는 이치처럼 시심(詩心)의 안온함에는 그런 시인들의 얼굴이 다가온다는 길을 확인한다. 황금찬 시인의 전반적인 시의 변화는 90길로 오면서 형이상학적인 형편이 많아지는 듯했다. 지상의 메시지가 줄어들고, 그리고 철학적인 암시가 앞장선다는 뜻일 것일 것이다. ‘평화와 기쁨’ 혹은 ‘생존의 무게’ 그리고 ‘꿈의 천사’를 암시했던 70세까지의 이미지인 나비가 시 속에서 줄어들었다는 변화는 즉, 자존의 메시지가 줄어들고 평안하게 사물 바라보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맹목의 인간 모습에서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변화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 어느 꽃나무에서 이 꽃나무로 날아왔을까. 나비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않아 있는 꽃나무밖엔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날개를 펴면 또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까. 그것도 정할 수 없다. 나비에겐 금지 구역이 없다. 이것은 나비의 절대 자유이다. 그리고 나비에겐 내일이 없다. 꽃향기가 날아오면 나비는 더듬이를 앞세우고 따라간다. 『나비』 「음악이 열리는 나무」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모든 미덕을 포함하고 또 완성한 인격의 극치를 의미한다고 본다. 자로(子路)편엔 이런 말이 있다. 원시적 인간 문명의 때가 덜 묻은 인간, 시골의 촌부 같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나비를 읽으면서 이런 원시적인 느낌이 앞서고, 여기에 곧 황금찬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 본다. 언제나 계산이 없고 눌 박하고 순수하기에 시인의 체취에는 언제나 믿음의 줄기가 솟아나는 듯하다. 그러나 강의(剛毅)라는 의지의 굳셈이 전제될 때라야 질 박과 어눌함이 있을 수 있고, 비로소 꾸밈이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승 통해 배웠으니 이 또한 필자의 큰 양식이 아니겠는가. 또다시 말한다면 방향은 있으나 방향이 없는 곳을 지향하고 목적이 분명하나 그 목적의 길은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무심의 경지를 찾아가는 길은 결코 있음과 없음을 나누는 일이 아니기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절대의 자유에서는 ‘내일이다.’ ‘오늘이다’의 의미는 필요가 없다는 개념 사실 논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3. [Epilogue 하면서] - 추억과 지난 시간은 언제나 질축한 정서를 이끌고 오지만 황금찬 스승님의 시는 이제 달관(達觀)의 숲에 들어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의 스승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언어에는 무게와 정서 그리고 원숙의 경지에 들면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시인의 경지에서의 인상 바로 그것이다. 길을 재촉하는 인상이나 혹은 조급증이 없는 지상의 시인은 다시 세계의 미지 건설을 꿈꾼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경지에는 아름다운 순수와 투명한 의식을 가진 시인만을 위해 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상상으로 빚은 낙원의 이름일 때, 꿈꾸는 스승의 모습에서 숙연해진다. 자연의 육화는 대상과 대상이 경계를 갖지 않을 때 더욱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들 한다. 심지어 풀과의 대화나 새들과의 대화에서 있고 없음을 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지향하는 순수의 깊이를 방문하게 되는 순간, 스승인 (후백) 황금찬 시인은 시는 이제 그런 길을 열어놓고 손짓을 보내는 모습이 작고하신 지금의 이 순간도 모습이 선하다. 자상하고 인자하고 순진무구한 모습이 백수를 넘어도 상상을 초월하는 스승의 시를 지금도 나는 시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라 불러야겠다. 2024.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라는 언어를 통찰하고 시안에 들어가 시인들이 창조하는 나라 그런 나라는 감동을 잉태하는 공간이고 누구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면서 손님이 방문하면 할수록 빛나는 문패를 달고 살아가는 공간이 시인이 파라다이스를 그리는 공간이라고 본다. 그래야만 시인의 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시인 이름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라 할 수는 없지만 시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자기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시인도 있다. 그 시인의 시 하나를 가지고 권력도 얻고 머니(money) 도 쌓았으니 이 얼마나 성공한 시인인가 하는 이야기도 가끔 듣는다. 과연 이것이 성공한 작가인가는 기준을 정할 수는 없어도 정체성과 가치관을 보고 정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그것이 꼭 정답인지는 필자는 글쎄올시다? 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꿈은 그런 한편의 시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경주한다. 그러나 이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 해야 얻을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이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다.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둘째는 시의 완성도가 비단 대중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시적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언어의 선전 도구가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에 의미없는 시는 공허함을 부추길 수 있음도 우리가 명심할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구가 존재하고 살고 있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한다. 그러나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하다. 왜 그런가 하면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의 분신일 수 있기에 나의 작품이라는 명찰을 갖고 무한의 책임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에는 몇 가지의 표정이 있다. 식물 정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만히 등장하는 것은 夫 군을 사랑하는 노래가 가장 많은 빈도로 등장하며 승가람마(僧伽藍摩)가 시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환경적인 특징이거나 정신의 지향과 맞물릴 수도 있는 유추가 가능하다. 시는 낯설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시의 표현이란 결국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정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복잡한 도시의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면서 그의 그런 흔적과 시의 표정으로 들어가 본다. 『2. 표정과 사랑의 이름』 1) 식물 정서 시인은 개성에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 어디로 관심을 집중하는가에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이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서의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식물적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이라 본다면 역동적인 힘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얕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홍연희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법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필자의 추론, 앞 밭 자락에 잘 익을 호박 하나 거실에 옮겨 놓으니 아 밭도 따라왔다. 지긋지긋한 허기 채워주던 청빈의 시절 추억으로 남고 가난한 시절 견디었던 어머니 인생처럼 가뭄과 더위를 이겼던 둥그런 호박 거실에 가득 채웠다. <그때 그 시절> 사실 가격으로 치면 일상 반찬의 속한 호박에서 술술 풀어지는 이야기는 과거와 추억을 채색하게 된다. 가난의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에서 서글픈 지난날들이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어머니의 가난은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이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재의 모습 과거의 모습이 스크린 되어진다. 시인이 사는 거실에 호박을 놓으면서 추억의 일상이 살아나는 이유와 어머니의 모습이 비록 가난했을지라도 풋풋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든다. 이런 풍경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린 사랑의 감수성이면서 식물 정서가 지배적인 양(量)으로 숫자로 허기를 채우는 증명이 되는 것- 인도에서는 연꽃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상징한다. 들판의 가을걷이는 인간의 노력이 얻는 풍요로운 의미와 시골의 구수함을 가질 수 있고, 동물이 동적인 변화와 현란함을 부추긴다면, 식물은 고요하고 수평적인 암시를 구유한다. 인간의 행로에 동반자 혹은 더불어 동행하는 길에 항상 풀들의 이름은 그 존재를 말함이라- 무심코 걷는 산책길에 태고의 전설 있기에 산길도 꽃으로 돌아 지금까지 그리도 고왔는가? 뉘가 있어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또 걷고 싶다. <산책길> 중에서 시의 구조는 길, 꽃 그리움으로 진행하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길을 목적으로 걷는 좌표가 있지만 시인은 “무심코 걷는 산책길”에서 전설을 만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꽃의 지상은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물론 미지칭으로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으면서 “고왔는가?”의 새삼스런 발견에서 꽃은 역시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된다는 것이다. 홍연희 시인의 식물은 모두가 화려하거나 향기(香氣)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며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특이하다. 독목(禿木)에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 없이 내어준 노을 들녘에 차가운 비마저 내리고 아픈 세월의 잔 등 쓰다듬다가 한기 견디며 인생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물고 까마득히 먼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 시린 헛된 꿈도 가고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마저 쓸고 간다. <뜰 겨울> 중에서 어쩌면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의 한기(寒氣) 젖은 모습을 바라본다. 겨울나무는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러나 독목이 있음으로써 봄을 예약하는 안온함이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運行) 원리와 상통하며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으로 일어난다. “독목(禿木)에 마지막 잎새 하나”가 바람에 스치면 엄혹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뜰 겨울”은 봄을 기다리는 먼 희망의 줄기가 자리한다. 여성의 마음은 부드럽고 여리다. 식물 정서에 들어가면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작용함이 홍연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닐까? 밑은 썩어 때가 끼었는데 위는 화려한 수련이 그윽이 서 있다. 고단한 삶을 묻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에 수려함의 자태가 있다 그림자 뜬 자리 때 낀 물 자리가 가을 햇살에 사랑으로 아픈 듯 창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에 어머니 분 냄새처럼 함처럼 향기가 돋는다. <수련> 중에서 어머니와 수련을 비유로 해서 등가(等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의 수채화로 걸린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에는 시심이 누리는 연상 작용이 복합적, 융합적이다. 조용하고 자태가 유연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기는 것-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모습에서 아름다움과 향기로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된다 2) 사랑의 표정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도착이 되는 것이다.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의 안온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살면서 갚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하기에 사랑은 주는 것이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가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홍연희는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알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그 무엇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눈이 먼다 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하고 고독함이 가득한 날 그 어떤 것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겁고 향기로운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에서 시의 구조는 사랑을 빼고는 그 목적을 위해 몇 개의 단계를 지나면서 공고해지며 단단한 사랑의 깃발로 세우고 있다. 즉 태움-길-뜨거운 사랑의 단계마다 시인의 의지는 그 어떤 것이라도 변화할 수 있는 정서의 전개- 그만큼 초점을 맞추는 시기적절, 1연에서는 그 무엇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의 바람, 2연에서는 /눈이 먼다 해도 길을 밝혀주는/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생각을, 3연엔 /허전하고 고독함이 가득한 날 그 어떤 것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은/ 마음,- 수미쌍관(首尾雙關)의 연상법을 사용하면서 참된 사랑의 진수에 이르고 싶은 시인의 뜻이 하늘을 찌른다. 비유가 부적절하지만, 사랑의 희망이 너무나 강하다. 한 번의 사랑이 황홀경에 찾아 나서는 시인의 사랑은 끝이 특이함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길을 찾아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를 추적한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에 사랑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길을 만드는 듯하다. 이를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는 뜻으로 정리할 수도 있지만 시인의 한 사람은 남편으로 집약된다. 이는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이름으로 행복과 꿈을 선사하고 지켜주는 사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저녁을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에서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것으로 지향하며 빛으로 집약되어 시적 행로를 시작한다. 태움으로 빛을 찾아 나서고, 사랑은 오로지 행동으로 찾는 데서 가장 현실적인 의미를 완성한다. 홍연희의 사랑법은 동적이기보다 정적인 “미소”와 “달빛” 등의 수사에서 시의 무드를 잡고 대부분 구성하며 뿐만, 아니라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안으로 타오르는 열정은 매우 강렬한 특징으로 사랑이 남편임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남편의 가치와 개념으로 정리된다면, 시인의 사랑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으로 보인다. 『3. 에필로그』 홍연희의 시는 담담하면서도 가을날의 가을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한편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靜的)인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푸르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따뜻한 정이 안으로 흐르면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런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인을 말한다면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된다. 물론 사랑의 표정과 요체는 한 사람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로지 정성을 다 바치는 인상이다. 정결함과 식물 정서와 사랑이란 표정으로 언어의 긴축을 사랑으로 환치하는 점에서 감수성이독특한 시인임에는 분명한 것으로 살아 있는 사랑에 대한 열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이라 기대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를 만나는 일은 아름다우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정서의 상승을 부추기는 순수한 마음의 풍경화를 만나는 일이기에 그렇다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사물과 온갖 우주를 심안으로 떠오르게 하는 삼라만상을 헌신할 때 비유로 나타나는 얼굴에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의 그림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고 시를 보는 독자는 시인과 또 다른 정서의 상승효과를 경험하면서 시인이 그린 세계 내(世界內)에서 독특한 추수(追隨)적인 경험을 만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정서의 상승이라는 효과에서 만나는 공간은 시가 갖는 가치의 개념으로 진전한다. 한 사람의 시인이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은 일정하고 단순한 언어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일면 그로 인하여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의 창조에 힘이 부여 되기에- 시에 대한 유사 이래 인간의 곁을 떠난적이 없는 시의 가치는 이렇게 고귀하고 책임을 느끼는 임무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다. 물론 시를 감득(感得)하는 독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독자도 있지만 정서의 차이는 밝은 얼굴과 찡그린 얼굴의 차이는 크다. 순수하고 밝은 표정은 인간사를 아름답게 만드는 얼굴과 찡그린 얼굴을 대하는 독자들과는 반대일 것이다. 김선영 詩 - 그의 모습은 본 일도 없으며 다만 청탁 원고만이 전부이지만 그녀의 시에는 시니어라는 지긋한 경계에서 다가오는 순수하고 깨끗한 강물이 흐르기도 하고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연상 되며 여성의 시가 그렇듯 그리움, 사랑, 혹은 추상적인 정서가 흔한데 비해 현실성의 사물에서 느끼는 감수성이 많은 양상을 보인다. 생의 비유 혹은 식물 정서의 다양성 그리고 차(茶)에 대한 깊이의 음향을 추적하는 섬세함, 외국 여행에서 느끼는 삶의 고달픔을 보는 연민(憐憫)의 눈빛 등이 의식을 채우고 있는 정서에 목록을 본다면 더욱 알 듯도 하지만 나른한 감수성의 퇴락한 언어의 되풀이보다는 감각의 정서가 우월한 것도 독특한 특징에 속하는 부분일 것 같다. 이제 시에서 풍겨 나오는 바람의 향기를 접하는 길목에서 그에 본 모습을 들여다보자 『2. 동서의 감각적인 정서』 김선영의 시에 특징이라 한다면 동서의 감각적 정서가 언어의 조화미를 연출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는 사물과 사물을 결합하는 조화(調和)에서 비유의 언어가 살아남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의 결합의 조건은 시인의 재능이다. 이를 촉매제로 이용하는 방법은 비유이거나 상징 혹은 이미지 결합을 주도하는 시심(詩心)의운용적 재능 - 여기서 시의 맛은 달라지는 것이다. 즉 같은 재료로도 음식의 맛은 주도자의 재능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연출할 수 있다. 비록 평범하고 날마다 접하는 재료일지라도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따라 그 결과는 호불호의 결말은 판연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편의 시를 만난다. 둥실 떠 있는 달 살짝 바가지로 떠다가 장독대 위 정화수(井華水) 띄어놓고 풋별 서너 개 간짓대로 돌려 따 달 위에 얹어 촛불 꽂아 불 밝혀 임 기다리면 이 밤 익지 않아도 좋겠네. 이 밤 석류처럼 익어 터지지 않아도 좋겠다네 <달을 떠서> 중에서 시란 궁극적으로 언어의 그림이다. 여기엔 감각이 들어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긴축에 탄력이 수용되어야 한다. 달을 둥근 바가지로 떠다가 정화수에 띄어놓고 “풋별” 서너 개를 장대로 따는 묘미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추억의 깊이에 이른다. 이는 순수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기교이면서 “촛불”을 밝히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방안의 풍겨이 동화적인 세계로 흘러간다. 이는 무르익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정밀(靜謐)의 속삭임을 연상된다. 다시 말해서 출렁이고 요란함이 아니라 넘침이 없고 고요한 관조(觀照)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의 고요- 그런 고요의 나라에 도달하는 감수성이 아닌가 보게 되는 것이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계추를 잡아당겨 미끄러져 질펀한 진흙 펄에 주저앉는 거나하게 취해버린 반나절 번쩍 일어나 앉아 늦은 대여섯 시의 끈적이면 달라붙는 달디단 엿가락 신음의 소리 요란하다. <낮잠> 중에서 나른하고 낮잠의 깊이에 빠진 경험에서의 익살스러운 실눈으로 시계를 응시하다 “미끄러져 의” 긴 졸음에 깊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다시 “취해버린/나절”의 오수(午睡)에서의 대여섯 시의 시계 손가락을 바라보고 “달디단 엿가락” 같은 비유의 졸음이 익살스럽게 그렸다. 「골다공증」은 나이에 따라 뼈에서 나오는 신음의 소리가 공간을 자극하는 아픔이다. 슬픈 소리의 방문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막상 자기에게 닥치면 지난날 할머니의 신음의 소리가 일치되는 서글픔이 된다. 병환을 앓으시던 소리/점점/뼈마디로 읽어낼 때/ 열 아흐래 날/ 야위어 가는 달빛/ “사묵/사묵”스미는 것이다. 같은 통증으로 창틈으로 “사묵 사묵”이라는 의태어의 묘미는 심각한 아픔이 오히려 친근감으로 접근한다. 이는 시심을 풀어내는 언어 운용의 재치로 돌릴 때 김선영의 시는 그만의 표현을 자극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은 안도의 시심으로 보인다. 시인은 시라는 대상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바라볼 때 높고, 깊이를 위해 심각한 발성을 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자신에 얼굴이고 분신(分身)이고 떠날 수 없는 절대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를 향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경외(敬畏)와 동경의 표정을 짓더라도 시는 항상 냉철하고 냉엄한 모습으로 애달픈 시와 시인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어설픈 언어 꿰서 웃음 앞에 물구나무섰던 그날처럼 뚝 떨어진 시어 하나 줍지 못해 시간 위를 뒹굴 때 기억 저 너머 유년의 멋쩍은 미소 마음 밭에 찰랑댄다. <언어 미달> 중에서 시인이 선택하는 시어 한마디는 시인의 평생을 투척하는 에너지를 소유한다. 시어는 곧 생애의 호흡이 들어있기 때문에 시어는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뚝 떨어진 시어 하나”를 줍기 위해 김선영의 시의 길은 얼마나 감수성의 깊이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인가 의 여부가 가로 놓인다. “유년의” 미소가 찰랑이는 공간을 찾아 나그네의 모습으로 시의 성문을 찾아가는 모습이 평안은 주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나(ego)와 삼라만상』 우리가 불교와 인연이 되어 불심을 갖으면 인연을 나타내는 영원의 개념은 원(圓)으로 나타난다.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渟), 부증불감(不增不減)의 결정은 공즉색(空卽色)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땅위에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하면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무거우면 구름은 비가 되어 땅위에 보이는 것으로 변한다. 이는 현대 물리학의 질량 불변의 법칙이 되기도 하고- 불경이나 노자의 철학은 이런 개념을 포괄하고 있음을 카프라나 쥬커브는 증명하고 있다. 원(圓 )- 이는 인간이 영원을 지향하여 만든 위대한 기호의 개념이라는 뜻이다. 세상 돌고 돌아 굴렁쇠처럼 달려왔다. 아침은 점심을 저녁을 밤을 향해 굴렁쇠를 굴리며 떠날 것이다. 굴렁쇠 안에 지구가 있고 궤적을 쫓던 혼이 이탈해 다른 궤도를 그려댄다. 내가 도는 것인지 지구가 도는 건지 레일 따라가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 옷깃 여미며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돌고 돌아 도는지 <돌고 돌아> 중에서 우주는 돌고 있다. 나 또한 일상이 돌게 되는 일로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내려야 할 정거장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해야 할 순명(順命)의 길이곧 삶의 의미(意味)라면 한계라는 경계는 슬픈 인생사가 아니던가? 그 말 『도랑 사구 안 작은 우주』 은 자기를 알면 철학의 완성자가 된다. 그러나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걸음을 걸을지라도 나를 만나는 일은 결코, 없기에 실망으로 점철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철학의 종점이고 시작이라면 시는 이런 의미를 노래하는 임무가 존재의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값진 시가 아닐지는? 늦은 봄날에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날마다 나를 찾는 일상을 찾아 헤매지만 나는 없다. 숨바꼭질만 하다 말고 또 나는 나를 찾아 숨바꼭질 -중략- <늦은 봄날에> 중에서 마치 봄을 찾아 들판을 방황했지만 끝내 봄을 못찾고 집에 들어와 정원에 핀 꽃을 보고 봄을 찾았다는 예처럼 나를 찾는 일은 일상- 날마다 헤매는 일이지만 나를 만나는 일은 항상 궤적을 달리 하면서 숨바꼭질한다. 그렇다면 나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인간의 숙제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명제나 모든 철학은 나로 돌아오는 회귀의 말을 설파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오로지 참고 사항일 뿐 정답은 바로 나 자신에 의해 터득되는 길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날마다 찾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결국은 숨바꼭질 속에 이방인과 조우(遭遇)에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정말 나를 찾는 일은 허상인가, 이런 의문은 결국 허망으로 끝나는 게임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찾는 일은 끝없는 삶의 궤적의 연관이 있고 또 수시로 변하는 현재는 곧 과거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정지할 수 없는 나의 찾음은 마침내 체념으로 내려놓는 그 장소에 있을 뿐 어디에도 나의 모습은 액자 속으로 다가오지 않는 일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를 찾는 일은 반복적으로 계속될 때, 자아(ego)의 모습을 정립하는 방법이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철학- 시는 노래하는 일이 의무(義務)이다. 『4. 질곡에 삶, 곡예의 삶』 사는 일은 중심의 의무이자 최종 종착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버리면 안되는 명제이고 벗어날 수 없는 숙제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고해(苦海)라 비유했듯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고달프고, 슬프고, 참람(僭濫)한 진행이 있을 뿐, 기쁨이란 찰라(札剌)이고 행복이란 잠시의 그림자와 같은 일이 사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돈, 명예, 감투로 해결하는 일이 아니며 오로지 스스로 힘에 의지해 헤쳐 나가는 일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대처하는 삶의 진수이기 때문이다. 설사 빙벽(氷壁)을 스스로 오른다 해도 훼방의 이름 - 비와 눈보라 혹은 강풍에 오르던 길도 허방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은 누구나 경험할 수가 있다. 찻집에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넝쿨 미끄러운 바닥의 구물구물 애벌레 아슬하게 유리 벽 슬금 기어오른다. 서두르지 않고 우쭐거리지도 않으며 슬슬 숨 고르며 느린 삶의 음계 움켜쥘 곳 없는 음벽 촉수로 더듬어 뱃살 붙여 밀어 올린다. 헛짚어 휘우듬 거리는 위태한 상황 어느 우연의 바람에 등 떠밀릴 수 있까? <담쟁이넝쿨> 중에서 절망의 상태, 담쟁이는 유리 벽 같은 의지할 곳 없는 곳을 기어오르는 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이를 실존주의에서는 한계 상황(grandsituaation)이라 설정하고 마지막 한계 앞에서 인간의 특징을 포착하는 철학의 이름으로 말했다. 비유를 하자면 쥐가 마지막에 몰리면 돌아서서 고양이와 한판 싸움을 하자는 특징이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일 것이다. 애벌레처럼 담쟁이는 유리 벽을 기어 오르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결코 절망의 마지막이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소망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만들게 된다. 시인은 “찻집에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넝쿨” “돌아갈 수 없는 길” /슬슬 숨 고르며 느린 삶의 음계/를 가야 하는 선택은 때로 운명의 방향을 잘못 잡아 고행의 여로가 연속될 때, 두려움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몫으로 다가올 때도 그 길은 오로지 숙명의 숙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비정한 순간이다. 내일을 당기어 오늘을 엮듯 실오라기 당겨가며 뜨개질을 한다. 그물을 짜는 어부로 앉아 한 사슬 한 사슬 가느다란 시간들은 바쁘게 주우면 코바늘에 걸리는 팽팽한 삶의 무게 -중략- <뜨개질> 중에서 여성적인 비유로 섬세하게 삶의 무게를 풀어 나간다. 베짜기와 같은 일-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삶의 하루하루가 한올 한올의 조직으로 직조(織造)되는 이치- 완성의 길에 도달하면 비로소 의복을 만드는 재료로 완성된다. 뜨개질 또한 한 땀 한 땀이 모아져서 “팽팽한 삶의 무게, ” 사는 일은 공짜가 없고 오로지 모든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성실성이 투자될 때 삶의 가치는 소중한 자기 가치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남긴다. 『5. 에너지 공급』 시인이란 자기가 살아온 환경에서 시적 에너지공급원을 설정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오면서 접촉한 대상이 시의 주요 재료로 설정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시골에서 살고 있다면 시골 관념적인 면이 지배하면서 전원에서의 생활 그 옛날 살던 고향의 향수에 젖어 식물 정서가 앞서며 강이나 꽃이나 주요 모티브로 나타나면서 이미지 군으로 자리하는 것도 환경적인 요소가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고향의 강』 『호수의 적요』 『시골 풍경』 등은 김선영의 시적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겹쳐 지면서 현실을 압도하는 시간에 오버랩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순서가 한몫으로 접근이 되는 듯하다. 서로 걸어온 길 달라도 가야 할 길 달라도 어느 정점에서 잠시 풀꽃 같은 인연으로 하얀 토끼풀 엮어서 걸어주며 투명한 웃음 -중략- 꽃잎 흐드러져 마음 비 내리는 날 가슴에 접어든 너의 향기 만져보리라 <들꽃> 중에서 지구상의 풀이 향기로 변화하여 사랑이 내포된 의미로 상승한다. 이 향기는 고귀함을 나타내고 숭고한 가치로 사랑의 옷을 입을 때, 꽃의 가치는 지상의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가슴에 접어둔 너의 향기”를 만지는 것으로 지상의 이미지와 천상의 이미지와 하나로 결합될 때, 궁극의 조화미를 이룰 수 있게된다. “가슴에 접어든 너의 향기 만져보리라” 꽃이 그리운 사람의 가슴에 향기로 만져보리라는 소망- 향기와 시심이 결합하려는 깊은 뜻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기교이다. 그리운 사람에게 향기로 남고 싶은 정서는 모성애적인 발상이지만 세상을 감싸고 싶은 정서가 고귀함으로 포장되는 상상의 나래가 아닐까 싶다. 『6. 나가면서』 김선영의 시는 향기가 있고 그 향기는 일과성이 아니라 상승의 기류를 타면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적 감각은 더욱 순발력이 있는 깊이로 이끌고 갈 때 독자는 감동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시적인 넓이는 철학적인 암시를 상징으로 포장할 뿐만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는 기쁨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삼라만상의 중심이고 개체는 전체를 이루는 본질이라는 점에서 김선영의 시는 “나(ego)” 는 개체의 가치에서 숭고함을 의미하고 시인의 고귀한 정신을 투사(投射)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식물 정서나 강의 이미지는 시인에게 영향을 준 추억들의 집합인 것 같고 이는 향기로 시의 넓이를 고정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 모티브의 중요한 점인 듯하다. 이 모든 논지를 요약한다면 김선영의 시는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 지향점을 갖고 있으며 현실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한 시인 감각적이면서 강인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그만의 자리를 확보한 시인이라 하겠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 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7. 금요저널 주필/평론가/이승섭시인 [필자 시평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트 셀러]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맹목적 사랑이라 한다. 옛 현자(賢者)나 범인(凡人)을 막론하고 사랑 앞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으며 오로지 방황만이 정답이라는 의미이다. 문호 톨스토이는 34세 때 궁정 의사인 베르스의 딸인 18세 소피야안드레예브나와 결혼했을 때 얼마나 기뻤으면 “결혼 생활의 행복이 나를 삼켜버리고 있다”라는 말로 솔직히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부인소피야와 갈등을 겪고 가출을 결정했으니 만년을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괴테는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의 사랑으로서 시(詩) <5월의 노래를> 만들었지만 이 여인과의 결별 후 그는 가슴속에서 자책의 염(念)이 자리 잡아 시작(詩作)의 모티브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은행가의 딸인 시네망가에 사랑이 실패로 끝난 이후 괴테의 정신적인 변환의 계기가 되었으며 세 번째 여인은 궁정 관리 딸이자 7년 연상의 샤를로테폰 시타인과의 사랑은 조화인 인간성의 이상 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 정신의 방랑은 다시 4번째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조화(趙俰)를 만드는 집의 딸인 크리스티아 불피우스와 행복한 가정의 맛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자유 정신의 소유자인 괴테는 여행 중에 재기 넘치는 친구의 아내인 마르안느, 폰 빌레머와의 사랑은 괴테의 정신을 더욱 젊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늙은 말년에 그의 아내가 죽었고 아들마저 객사(客死)로 세상을 뜨자, 외로움에 지친 80세 넘은 괴테는 마리엔바트 온천에서 만난 18세 소녀 울리케 폰 레베조브에게 구혼했으나 그 할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해서 실패의 애틋한 시(詩)가<마르 앤 바트애가(哀歌)로 정리 되었다. 그리하여 사랑은 나이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며 돈도 아니라는 증명은 괴테의 경우 절실한 베터 하프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문호의 편력이자 방황이었다. 또한 플라톤의 <심포지음>의 대화편에서는 여러 입을 빌려 에로스의 이야기 중 <인류의 성(性)은 남성, 여성, 남녀 성의 3종으로 분류했다. 그들은 자기 힘을 믿고 신에게 반발하면서 신을 공격했다. 이것을 알아차린 제우스는 인간들을 어떻게 처벌할까, 다른 신들과 회의를 열었다. 만약 인간을 전멸시켜 버리면 신들에 봉사할 자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신사(神社)도 없어진다는 결론을 얻고 인간을 두 쪽으로 갈라놓아 힘을 약화 시키자는 결론이었다. 이렇게 분할된 인간은 이전의 하나된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반쪽을 열심히 찾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Better Half인 Eros]인 셈이다. 물론 에로스는 육육적인 사랑을 극복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신적 사랑[Platonic Love]이 플라톤의 철학의 요체이자 학문에 대한 목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반쪽을 찾는 행위는 인간의 영원한 방황의 근거를 제시하는 본능에 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른바 낭만파 3인 중에 영국의 바이런은 숱한 염문을 뿌린 불구인 절름발이 시인이다. <차일드 헤롤드의편력, <1812년>은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작품으로 모두 여성에 대한 아픔이 들어 있다. 그는 캐롤라인 램 납작 부인이나 이복누이 오거스터리 부인 옥스퍼드 부인 등과 염문을 뿌렸고<1815년> 양가의 딸인 에너벨러밀 뱅크와 27세에 결혼, 이듬해에 이혼한다. <1819년>엔 테레사귀지올라, 백작부인과 동거했고, 좋아하는 나라 그리스에 내전이 일어나자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여 결국 말라리아로<1824년> 이국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스에서 쓴 연애 시(詩)는 재치와 심금을 울리고 있다. 아테네의 처녀여 그대와 작별함에 앞서 돌려주오. 내 마음 다시 돌려주오. 그러나 내 마음 내 가슴속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이니 그대 간직해 주오. 하나 어찌 그것뿐이랴 내 떠나기 전 나의 맹세를 들어주오. (Maid of Athesns, ere we patt, Give O, give me back my heart! Or, since that has left my breast, Aeep it now and take my rest! hear my before l go,) <Lord Byron: Maid of Athens>4 연중 1연 바이런은 1차 대전을 불러일으켰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일생을 통하여 그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좋아했고, 통일 이탈리아의 거인 가발이나 마니치로 하여금 울면서 그의 시를 읽었고, 빅톨위고를 감동케 했으며, 독일의 괴테로 하여금 19세기 최대의 천재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북유럽 해적의 후손이었다. 영국의 낭만파 3대 시인에 셀리는 명문학교 옥스퍼드에서 재학 중 무신론의 필요성을 써서 퇴학을 당했고 16살의 소녀 Harrict와 결혼했으나 당시의 혁명적 사상가 Godwin과 교류하다 그의 딸 Mary와 연애 헤이르트와세 사람이 공동으로 살기를 바랐으나 헤이르트가 거절, 결국 하이드파크 연못에 빠져 자살로 마감하자 <1816년> 매리와 결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해 이탈리아로 도망가게 된다. <종달새>, <서풍에 부치는 노래>등이 결실로 남아 있다. 셀리의<사랑의 철학>은 처음이 The fountains mingle wich the river,/Andthe rivers whith theocean <샘물이 모여서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서 바다가 되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이다. 시인의 사명은 예언적이라는 사고는 19세기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3대 낭만파의 마지막 막내는 Keats로 25세기에 요절한 천재이자 불운한 삶을 살았던 시인으로 폐결핵에 걸려 유명을 달리했다. 세 동생을 거느린 키이츠는 불운한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로 유복한 것도 넉넉한 것도 없는 가난과 신음하는 그의 정신세계는 미적 아름다움에 생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알려져 있다. 막내 동생이 죽자, 런던의 헴스테드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처녀 파니 브론을 알게 되었고 약혼을 했으니 키엘케골, 처럼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겪은 후에 경이적인 상상의 발동이 <하이피리언>등을 창작하는 시적 영감을 발휘했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 lts loveliness increases; it will never pass into nothgness; but still will keep A bower quiet for us, and a sleep full ofsweet dreams, and health, and quite breathing.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 사랑스러움은 늘어나고, 결코 없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법,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조용한 내실에 머물도록해야 한다. 다디단꿈이 가득한 잠과 건강과 그리고 조용한 숨결 속에 있도록 <Keats <Endymion>에서> 짠 생애를 아름다움에 헌신한 시인의 숨소리는 영원을 향한 구두의 노랫가락이었던 셈이다. 프랑스의 3대 비련(悲戀)에는 석학 아베라르와 에로이즈가 있고 두 번째는 쇼팽과 시인인 조르조상드와 나폴레옹과 죠세피느를 들고 있다. 셋 모두 맺지 못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련의 이야기이지만 모두 진정의 사랑에서 애달픈 사건들이었던 같다. 정말 시인에겐 사랑이란 영감의 원천이고 상상의 창작이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는 상상력의 진원지가 된다는 뜻일게다. 사랑이 없는 예술이란 딱딱하고 굳은 법률 조항처럼무미 건할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자유 정신을 부추기는 데서 때로는 어긋난 길도 있겠지만 대체로 사랑을 위한 마음에는 순수하고 깨끗한 물이 솟구치는 진원이 바로 사랑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시와는 손잡고 가야 하는 것이라며 굳게 믿으며 논지를 내려놓으려 한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시작에 들어가며 시는 언어의 소리가 아니라 사물의 획득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언어와 일체화를 이룰 때 시인은 단지 언어의 매개자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결국 사물과 이미지의 연관을 일체화- 이를 이루고 완성하면서 시의 맥을 짚고 정서를 찾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의 능력은 얼마만큼이고 시의 효용 가치는 인간의 가슴을 얼마나 따스하게 위무(慰撫)하는가? 또한 현재 과거 미래까지 안목을 보는 종합된 상상의 그림인 것이다. 산문과는 다르듯이 보편성의 그릇에 담아 독자를 향해 얼굴을 내민다. 물론 개인의 고백이라 해서 자기만의 암호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식의 기준 잣대를 갖추고 소통이 될 때, 시의 이름은 친밀한 행보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리적인 내면을 그릴 때 체온의 담는 풍경화를 그리는 작업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산문은 현실을 리얼리티 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시과 비교할 수 없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자신을 감추는-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예외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인 내면의 통찰이 필요한 소이(所以)인 것이다. 물론 대상을 나로 끌어들여 동일화를 이루는 방법에서 시는 일정한 어조(語調)- 즉 소통의 대화이다. 이를 담화(Discourse)의 양식- 화자의 의미와 감정 혹은 의도를 일컫는 말로 총체적인 특성을 찾아 나서는 일은 persona 즉 탈을 만나는 데서 발생하는 감정의 반응을 벗겨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독자에 따라 다른 수용의 특성을 내장할 수도 있고 또 같을 수도 없다. 시인도 개성이 있지만 독자의 수용 또한 개성이기 때문이다. 2. 숲으로 들어가 언어 찾기 시는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자연의 숲을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그것도 의미의 숲을 만드는 일은 시인이 생각하는 의식과 실제의 건축물- 숲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난다.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느끼는 사고의 차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시인은 고도의 건축사라는 말을 헌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시의 의미는 건물이며 이 건물의 주변을 치장하는 것은 돌과 나무와 건축사의 뇌리에서 나온 미감일 것이다. 한 편의 시에는 이러한 조망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정인진의 생각의 숲에는 이런 건축물이 들어 있으며 거기엔 사람이 살고 있는 풍광인 듯하다. 얼마나 다정한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가는 전적으로 정인진이 그리는 상상의 공간인 셈이다. 독자는 이를 감상하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1) 봄의 언어 시 여러 편 중 『봄의 편지』『서곡 찬가』 『노을』 등이 있다. 이는 봄 의식에 시인의 내면세계를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동, 혹은 희망, 다이나이믹한 의식, 그리고 로맨스 등 젊음이라는 정서를 시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물론 거울 강, 가을은 10월의 밤, 그루터기, 가을빛 등 몇 편인데 비해 봄이 압도적인 이유는 시인의 정서가 봄을 지향하거나 특별한 이미지로 확정하고 삶의 지속성과 상곤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봄옷으로 치장한 바람이 해금강을 찾아와 강 오리를 묶어놓고 마른 갈대 깃을 끌어 신나게 춤을 춘다. 와락 떼로 몰려온 바람이 나의 옷깃을 들치며 실랑이를 벌이고 바람이 끄는 대로 정신없이 돌다가 몸살을 앓는다. 왕버들 허리를 감고 물비늘을 돋우는 바람 꿈만큼 물이 올라 움이 튼다. 바람은 춤이고 봄이며 꿈이다. [봄의 세상] 중에서 봄이 가득함으로써 신명을 돋우는 시심의 발동이 역력하다. 왜 그럴까? 이는 시심이 안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에너지로 의해 자연스레 약동하는 봄의 정서를 부추기는 정서인 것 같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나오는 바람에 의해 봄의 신명이 돋워지는 자발성의 에너지가 오른 감성이다. 물로 이 에너지의 유인은 바람에 의해서 지상의 배회를 감행한다. 『신나게 춤을 춘다.』의 1연에서 옷깃을 만드는 바람의 광분이 『몸살을 앓는다.』는 봄의 터널 속으로 깊이 들어가며 점차 봄은 세상을 뒤엎으면서 한 가지의 통일을 위한 채색을 준비한다. 『왕 버들 허리를 안고』의 육감적인 무드를 끌어와 바람과의 결합에서 탄생되는 『움이 튼다』와 생명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결국 바람의 역할에 의해 봄은 완전히 세상을 장악하는 신비의 정경이 전개되는 것이다. 『바람은 춤이고 봄이며 꿈이다.』의 마지막에서 봄의 완성을 지향하는 정점에서 시인의 마음 또한 동화되는 일체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입춘 지나고 살바람이 실려 오는 봄을 찾아 언덕에 서 있다. 낯선 듯 낯익은 청매 홍매 산수유가 봉긋이 입 오물거리며 밤새 쓴 편지를 읽는다. 살포시 다가서는 향기에 잠 꼬리 놓쳐버리고 까맣게 언 가슴 하얗게 열린다. [봄에 편지] 중에서 실바람이 가득한 화평의 무드를 조성하며 부드러움이 유익한 바람에 의해 다가온 편지를 읽은 홍매 청매- 이는 시인에게 다가온 봄소식을 의인화의 기교로 변화하여 편지를 읽는 화상이다. 물론 봄소식이고 이들이 향기로 다가들 때, 향기는 얼었던 가슴을 녹이는 순간 마음이 열리는 색채- 하얗게 순수로 포장된다. “까맣게” 가 “하얗게”로 변하면 이는 생명의 이름이 열리는 순간이고 삶의 전환을 받아 드리는 구체적인 암시로 다가든다. 봄은 점차 시인의 의식을 가득 체우는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삶의 지속을 화려함으로 채우려는 정감이 발동되는 듯- 아울러 봄은 꿈을 꾸는 상상의 여백을 넓히는 계절로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박용을 하는 것 같다. 봄 터지고 벌어지고 찢어지는 전쟁터 내 봄 여물지 못해 참전을 못한다 『아직 멀었어』중에서 시인에게 봄은 가장 의미 있는 꿈을 꾸는 계절이자 생명의 용약을 가져오는 계절이지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바라보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아직 멀었어』에서 모든 사물이 봄기운으로 불타고 있을 때 정작 시인은 용감하게 자신을 던져 뛰어들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는 이유- 제약과 한계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부적으로는 봄에 신명을 갖고 있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한계 앞에 시적 화자는 머물고 있다. 아마도 삶의 제약 혹은 그런 환경적인 요소가 행동을 만드는 심리적인 현상일 것 같다. 때문에 정작 화려한 봄을 그냥 바라보는 즐거움, 꿈꾸는 일로 혹은 향기를 감상하는 일로 지나치는 아쉬움이 시인의 법인 것 같다. 2)가을 그리움 시인의 시에 편지의 시가 많이 나온다, 아침을 역고 온 편지를 받는 『행복』과 시인이 직접 쓰지 않고 가을비에 의해 쓴 『가을 편지』 홍매, 청매가 쓴 편지를 읽는 『봄 편지』 등 편지의 형태는 시인이 상대를 향해서 쓰는 적극성의 사연이 아니라 보내온 것을 읽는 소극성의 정서가 시심을 말한다. 이는 시인의 성품이면서 내면으로 향하는 정서를 확인한다는 점이다. 설익은 가을에 앉을 자리가 어줍어 어느 창가에 서성이는 바람 짓이다가 나의 곰삭은 그리움만 건드려 애절한 몸부림을 치게 하더니 그예 풋 가을 몸살을 먼저 안겨주고 있다. [풋 가을] 중에서 “어줍어” 와 바람이 “서성이는 짓” 등의 행위가 다음 단계인 시인의 정서를 흔드는 것- 그리움을 부추기는 일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리움이 몸살에서 진전될 때, 가을의 무드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바람과 가을의 “풀벌레”의 소리에서 촉발된 시인의 감수성이 그리움을 불러오는 일이 가을 편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귀뚜라미 울음으로 밤을 지킨 그리움 노을 진 가슴마다 가을비로 쓴 편지 나들목 신호등 아래 수북이 쌓인다. 『가을 편지』중에서 시조의 패턴은 일정한 형식 속에 정서를 펼칠 때, 언어 및 탄력의 팽창적 의미의 확산을 가져와야 한다. 한계의 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칫 형식 논리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3, 4음의 연속은 곧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합당한 리듬으로 체취에 맞는 형식의 시인 듯하다 시의 리듬을 중시하는 특징이 시조의 운율을 체득한 데서 그의 시적인 또 다른 면을 보는 셈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가을의 청취를 나이브하게 만들고 처연한 마치 처풍고우(凄風故友)의 서글픔을 불러온다. 그리움의 체온, - 따스함이 열망되는 계절적인 특징이 시인의 정서 속으로 다가온 듯하다. 이는 울음이 그리움을 불러오고, 이 그리움은 편지로 삭여지면서 낙엽이 수두룩이 쌓이는 형상으로 그리움의 높이와 비례하는 느낌이다. 불빛이 주는 무드는 처절한 고독을 더욱 아프게 하면서 말이다. 『물소리』 『그리움』 등이 많지만 특히 시인은 자연의 시적 정서는 자연의 음을 터득한 소리로 기득 한 질서를 융합하여 상징으로 일체화를 이룬 이름일 것 같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인간도 자연의 일 부 이 듯 시 또한 자연의 일부로 귀환하는 것이다. 치밀한 정서의 편린들을 모아 조합하는 기교에는 날카로운 비유의 기교가 돋보이고, 자연을 육화 하는 조화의 묘미는 부드럽고 순수함으로 포장된 이미지가 소리로 전환할 때, 정서의 확장은 더욱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봄의 의식이 주요 모티브로 작용하면서 시인의 내면 의식을 펼치는 방법 안으로 삭이는 감성의 줄기가 안온하고 따스할 뿐만 아니라 언어의 탄력을 받아 확대 재생산하는 정서가 언어 마감으로 다가 온다. 봄 이미지에 대한 시인이고 이는 내성적인 성품이 주는 부드러움의 진원이 그리움으로 편지로 받아 읽으려는 정적인 시인으로 자연의 조화를 아는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더 이상 시평을 할 수 없는 깊숙이 박힌 충만한 내면의 인자가 있는 시인이라 하겠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시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사는 세상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영혼을 붙어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면서 사고의 복잡성을 부추기어 문화의 중심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또한 이름이란 부를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영혼이 있음을 신념으로 공고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이라는 이름을 굳이 1이라 고집하는 이유는 인습이라는 장벽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내장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름이 관습의 의상을 걸치고 거기에 안주할 때, 상상의 길은 차단 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시인은 이런 기준질서를 거부할 때, 신명을 불러올 수 있고 이 신명의 불꽃 위에 시인만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적 허용은 산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시는 관습적이거나 기존의 사슬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맞이할 때, 선도적인 시인의 임무가 발휘되고 여기서 시의 길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목도 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상(李箱)의 [오감도]에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역으로 상상을 자극할 때, 새로운 출현의 시를 높이 상찬하는 이유가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언어 혁명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의식의 변화를 과감하게 자극하는 질서의 파괴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개성 있는 시인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혹은 아류의 시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못한 무의미의 의상을 걸친 것에 불과 하기에 시인의 의식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매의 눈을 기저야 하며, 먹이를 찾는 사자의 배고픈 방황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시와 똑같으면 이유가 변화에서 신선함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상재한, 노길순 시인에 시는 그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시인인 듯하다. 봄향기 가득한 봄바람처럼 상쾌하며 안정감이 있는 인상으로 언어 조합의 묘미를 상기시키면서 그만의 영역을 노리는 탐색이 전제될 때, 다가오는 기운은 삽상함을 자극시킨다. 이제노길순의 정신 추구를운위 하는길로 만나러들어가보자. 2.【Dream [꿈], 제조기 1> 자신의 영역 길 찾기 예술은 본질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적 형태로 기교를 표현하고, 선과 색채로는 미술 작가의 사상이나 신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를 그리는 작업이라 보기 때문에 지속한다는 뜻이다. 물론 표현된 결과물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따라 톡특한 양상을 갖는다. 삶이란 결국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이 여정을 어떤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와 또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는 시인의 표현 목적과 의도로 표상될 뿐이다. 이길순 시인의 시에 첫 번째 목록에서 자기를 위한 탐구의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시의 진로를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암시하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곧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에 이를 끌고 나갈 것인가는 목적에 맞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창가에 서 있는 나 거울에 보이는 분명 서 있는데 무더운 염천이 몰고 오듯 그저 땀을 흘린다. 잠시 짧은 흔들림이 머리카락 움직이고 이리저리 내 곁에 있는 나 이제 떠나 주기를 한 번 두 번 기다림에 지쳤건만 오늘도 나를 자꾸 기다린다. <내가> 중에서 나를 알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정의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은 “너”라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혹은 직간접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중추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면 노길순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를“안 보인다면서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거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의 대면에서 시인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노력이 집중된다. “그저 땀을 흘린다.” “나를” 강조하면서 비로소 머리카락이 “움직인다.”에 탐구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음이다. 더불어 “기다림이 지쳤는데”에서 지속적인 삶의 탐험이 스스로의 동력을 얻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인생은 오로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해답을 얻는 길이 있을 뿐이지 타인이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때문에 신열을 감내하면서 길을 가는 나그네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버릴 때, 기를 얻게 되는 역설적인 방법도 있지만 노길순은 직접 자기와 대면- 거울에서 나르시스의 방황을 해쳐나가는 용기가 가상하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을 넓히는 발상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벌써 과거가 나를 비웃는다. 나는 아직 존재하는 숨 쉬는 인간 돌아보니 벌써 과거가 비웃는다. 땅에 붙어버린 발이 언젠가 가장 멋지게 함께할 저 끝 오늘도 나는 내일을 이끌고 무거움이 힘겨운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살아가는 일> 중에서 인간은 세상에 현존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탄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미지의 공간으로 길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이 생의 이름으로 다가든다. 노길순은 자아를 확립하는 방도로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톡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다음 수순으로 진행하는 미래지향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간의 현재를 인식하는 점이 이채롭다. 흔히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이런 유약함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톡특한개성의 의상을 입고 “땅에 붙어버린 발”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가장 멋지고 오늘과 내일을 끌고 출발하는 보폭- “무거움이 있을지라도 전진” 앞으로 독촉하는 시심이 희망의 날개를 달고 전진하는 발상이 희망의 발걸음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동의 목록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항상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소하는 반복성에서는 독자도 수용미학적인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키면서 질서 있는 형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작품의 내면에 수용된 의식의 갈래는 ambiguity, (모호함)이라는 시적 형식 속에 내면의 질서를 살려야 한다. 이는 유기체인 생명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통일될 때 황홀한 감성의 바다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여기서 시의 성공은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반응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의식이 명확해야 하고 균제(均齊)의 형식이가지런 했을 때, 비로소 미의 모범 원리로써 형식적인 통일감이 주어진다, 노길순의 시는 우회적인 기교가 아니라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진솔함이 특징일 것 같다. 홀로 잠든 내 곁에 살며시 별이 왔다. 깊은 밤 숨소리조차도 사랑스럽다. 모른 척힘들지 말라고 침대 모서리를 잡는다. 어느새 작은 새처럼 내 안에 안긴다. 사랑해 난 괜찮아 손발이 차가운데 내일은 좀 더 큰 행성으로 가자 아니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되니까 밤새 나를 밝혀주며 지켜주다가 잠이 깨면 사라질까 두려워 가만히 문을 닫고 홀로 뜰로 나간다. <내 사랑> 중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 속에서 본인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물을 바라보는 대상에도 전이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치는 자발성의 이치로 인식된다. 시인 스스로에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물상에 사랑의 기운이 퍼지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다. 깊은 밤, 별과 속삭이는 마음에는 동화의 세계가 순수로 포장된 노길순의 시심이 또 다른 에너지의 공급처이기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의 에너지원이 [깊은 사랑] [장미꽃 사랑] [어리석은 사랑] 등 가족에서도 오고 자연에서도 오며 다양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밀도가 시인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일일이 일거 하지 않아도 희망의 사랑이 진원지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풍물 유리 바짝 붙어 오르는 넝쿨 구물구물 오르는 벌레들 아슬아슬 유리 벽 오른다. 무아지경 세계 쥘 곳 없는 기행에 촉수 밀어 하냥 오르고 그리곤 헛짚어 위태위태 풍물기행 너무 힘겨워 끝까지 오를 수 있을지 궁금하여 그리워 찾은 그곳 삶의 음계가 마냥 그리워 <풍물기행> 중에서 찻집의 그림을 비유적으로 그려내며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절대, 절명의 상황, 이를 실존주의에서는 한계상황으로 설정하고 인간의 특징을 포착하는 철학의 이름으로 보인다. 넝쿨이 애벌레처럼 아슬아슬하게 유리 벽을 기어오르는 풍물 찻집의 풍경과 어우러진 상황은 결코 마지막 절망이 아니라 찻집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주변의 여유로움이 아슬아슬하게 설정한 시의 맛이 실감 나게 표현한 내용이 응축되는 듯하다. 3. 에필로그 <자아의 문법 구축>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 노래들에는 진실, 사랑, 배려, 등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정작 시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가 있고 또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이같이 전체적으로 자기 발견의 성실성과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이유가 내장되었기 때문에 자기애에 확신성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길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바로 정신 문법이다. 앞으로 절차탁마로 정진하여 더욱 차원이 높은 시를 그릴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내 책임은 이제 끝을 맺어야 할 때인 것 같아 에필로그 한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시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평정심의 미소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T.S ELLOT)는 <고전이란무엇인? 가>에서 언급했었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숙은 행동의 원숙으로 이어지고 모든 조건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글의 무게를 감당하는 역할을 갖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둘의 상관은 인간의 가치와 문학의 가치와 비례 되는 등식(等式)을 도출하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고 선한 사람이 선한 시를 쓰는 것만은 아니다. 사상의 고매성이 묻어나는 언어에는 깊이와 맛깔스런 표현이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왜 그런가 하니 고매함은 그런 격식을 갖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학의 언어는 곧 인격의 수용(受容)이라는 점에서 문학 표현과 인간의 상관성은 궁극의 도달점인 감동에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김인서 시인을 말한다면 지적이면서 원숙한 성품을 가진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언어의 과시가 아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맛칼스런 감수성으로 나타날 때 느끼는 삽상(颯爽)함과 풍미가 있는 점에서 남다른 시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인이라 본다. 김인서의 시에는 가을날의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로 들리는 뉘앙스에는 안도감과 미소를 동시에 받아보는 반가운 편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추적하는 길을 답파(踏破) 해보자. 2. 여정의 상상 속으로 1) 성품의 성찰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 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 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김인서의 시에 담긴 정신의 요체인 듯하다. 왜냐하면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딧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다감하고 따스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으로 다가든다. 지금 난 먼 곳까지 못 갔어요. 고향이 코앞이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어둠 속에 수많은 별들만 주의만 맴돌고 먼 곳만 보이는 아스라한 인걸요.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누군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아, 한참을 망설이다. 문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나 아닌 나가 되어 금방 나간 것같이 두려워지네요. 내 기억 속엔 왜 엄마의 모습이 없나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보고파 저요. 아마도 내 몸에 흐르던 엄마의 피였나 봐요. 엄마 이 냄새가 나를 살아있게 하나 봅니다.- 중략- <엄마의 연서> 중에서 김인서의 시는 부드럽고 지향적이며 향기가 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에는 다양한 언어의 의미를 감추는 기교가 보인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형태를 만드는 일은 확실히 고급하고 고명한 방법이고 지혜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치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그런가 하면 간과의 헤픔이나 어설픔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리 곁에 있으므로 느낄 때 정신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면 김시인의 <엄마의 연서>는 그런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 엄마의 그리움을 마음으로 안으며 끈질긴 주위만 맴돌고 먼 길만 보이는 아스라한걸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애틋한 기다림을 피 같다는 주장에는 수구초심과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엄마의 품이 그립다는 정신의 핵심에는 온갖 애절한 마음이 냄새를 맡는 엄마의 품속으로 돌아간다. 요즘은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도시 체질은 항상 망각을 앞세우는 것 같다. 결코 떠날 수 없는 심상 깊은 곳에 귀향의 에너지는 인자가 길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아마도 김인서의 정신 인자(因子)는 고향에서 만들어졌던 추억 엄마를 그리는 애잔한 맥락을 이루는 길을 만들면서 시로 연결되는 듯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밤이면 슬며시 다가가 입 맞추고 싶어서 그 고운 얼굴 한순간도 놓칠 수 없어서 날마다 매달려 바라만 보는데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그 꽃에 입을 맞춥니다. 약이 올라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다시 오지 않고 그리움 견디지 못하던 꽃 끝내 시들어 버리고 그 순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어둠에다 제 몸만 옭아맵니다. <나만의 사랑> 중에서 ‘글은 사람이다. 라는 말은 프랑스 『뷔풍』 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다른 말도 아니며 외도, 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요즘은 애완동물과 함께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그 꽃에 입을 맞추지 못하게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 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죄책감으로 나비의 기다림을 깨우치는 일은 대상을 포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면하려는 기다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인서의 정신이 펼치는 지도인 것 같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식이 대입되는 사물 관찰법이라는 뜻이다. 이를 굳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대로 대신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말이 될 것 같다. 2) 자연의 식물 정서 시인마다 개성의 진로에 따라 관심의 분야가 다르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인 환경에 의식의 지배를 조종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아는 것에 대한 관대한 관심,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만든 음식을 많이 먹던 시절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음식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증명되는 사실 아닌가? 김인서 시인은 홍천에서 자라나 조그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추억을 쌓고 성인이 되어서는 도시에서 생활하다 고향으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아귀다툼 속에서의 시는 별로 없으며 거의 모든 작품은 전원에서『달맞이꽃』『자귀나무』 『제비꽃』 『연꽃』 『들꽃』 등 대부분 식물로 구성된 향기로 나타내는 시로 구현되는 듯하다. 너에게서 우주는 붉은빛으로 펼쳐지고 모두가 침묵에 잠기는데 네 안에서 언어들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어느새 낯선 것들은 친숙히 다가왔지. 어릴 적 돌담길을 걷는 것처럼 초가집과 골목 사이 아이들 소란함과 어른의 기침 소리 계집아이 봉긋한 가슴 수줍은 듯 잔잔히 머물던 햇살까지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영상들 꽃잎 위에 끝없는 몽상으로 펼쳐졌지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가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 네 우주에 끝없이 여행하는 실바람이 되고 만다. <자귀나무> 중에서 시는 사물의 비유에서 변형(deformaton)의 기법인 것이다. 물론 비유와 상징 혹은 역설 등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물의 본질에 이른바 몰개성의 이론을 더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꾀한다. 가장 핵심어가 시인의 시적 의도와 맥을 같이 하는 이유- ’ ‘어릴 적 돌담길” “아이들 소란” “초가집” “골목들” 들이 다가오는 소란스러운 운영상의 중심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돌담 풍경이 있는 골목이다. 그 공간을 돌아보니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로 현재의 공간이 화면으로 펼쳐진다. 정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모든 동물이 갖는 특징이다. 회귀(回歸) 의식과 더불어 자아의 중심을 거기에 놓고 의식의 넓이를 확대하는 것이 곧 삶의 공식이라면 사람은 항상 원점에서 지향을 갖는 것이 정신으로 압축된다. “자귀나무”는 어디에나 핀다. 다시 말하면 공간을 배타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평균율로 나누어 위치를 정하지만, 자귀의 이미지는 도시나 시골을 불문하고 같은 계절에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한다. 그러나 시인은 수평적인 공간에서 자귀나무를 꺼내어 고향에 절절함에 자신의 사고와 추억을 의탁(依託), 하는 고백이 선행된다. 일종에 상상의 승화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잘 아는 것은 정확하게 또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애매모호한 것을 표현하면 결국 실패의 문패를 달게 되는 위험 때문에 경험했던 것 혹은 익숙한 것이 맨 앞으로 나오는 표정이 곧 시의 주재료가 된 것. 이런 요소가 전체 맥락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마음대로 다가와 온통 흔들어 놓고는 말도 없이 떠나가 터진 심장 끌어안고 이렇듯 애만 태운다. 혹여 다시 만날까? 꿈길로 찾았지만, 그 모습 볼 수 없어 행여 다시 찾아올까? 그 길에 무성히 피어납니다. <들꽃> 중에서 흔한 것은 때론 그리운 것이다. 아무 이름도 없는 풀꽃일지라도 언젠가는 반가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오래전에 기억으로 묻어 있는 인연일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기억의 층을 뚫고 나올 때 시간의 벌판에는 이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을지라도 함께 있던 정서가 춤을 추게 된다. 어린 날들의 추억이 말이다. 자연미는 자족성과 자발성의 특성이 있지만 예술은 이와 달리 노력이라는 담론을 개입하여야 성립된다. 자연미를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에 애정의 결과- 이는 인간의 손이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예술성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에서 미적 순수성은 더욱 고양되는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로 시인의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질서의 구축을 용해하는 작품이 김인서의 자연관이자 놀이가 되는 것 같다. 3. 작가의 상표 <작품> 시는 시인 정신의 바로미터라면 한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항상 치밀한 뇌수(腦髓)의 조력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는 종합적인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에 더욱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김인서의 시는 산뜻한 명칭을 감지할 수 있는 조짐이 넉넉하다. 물론 곰삭은 깊이와는 다르겠지만 인간 정신 성숙에는 정서 균형이란, 그리고 시의 무게 균형이 맞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안도감과 언어 운용의 진정성, 진지성,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나 언어 탄력의 요리 솜씨는 더욱 많은 진전을 가질 수 있는 밑바탕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앞으로 김시인 만의 상표를 부착한 독특한 시가 생산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논지를 내려놓는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절대적 명령권을 가진 신은 아니다. 더구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힘도 느낄 수 없는 다만 언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길 위를 구르는 돌이나 들판의 나무와도 같은 대상일 수도 있다. 또한 시를 모른다, 해서 일상생활에 불편을 준다거나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잘살 수도 있고 또 시를 의식하지 못해도 으쓱거리며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심령을 지배하는 신은 인간이 찾고 존재를 인정하는 의식에서만 신의 음성이 들려오게 된다는 것과 심산(深山)에 돌일지라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에겐 미적 충동을 자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대상을 의미의 옷으로 환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은 정서에서 오는 미적 감수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시의 의미는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시가 아름다움에 헌신하는 점에서는 종교와 다를지라도 순수와 아름다움의 진 면목이 보일 때 신성(神聖)과 미적 일치는 승화의 경지를 탐방하게 된다. 여기서 절대미란 곧 무아의 경지를 방문하는 액스터시와 다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념무상과 무아지경의 비경은 곧 우주의 원리 속에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시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정신의 정점에 오르는 사다리 역할을 예외로 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고로 시를 모르는 경우 범인(凡人)은 될 수 있지만 정신의 엘리트는 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한 편에 시의 무게는 여기서 인간의 가치문제와 등가(等價)를 이룰 수 있음에서 무한의 가치 개념으로 승화한다. 시는 다만 시로 존재하면서 정신의 높이로 자리를 옮길 때 인간의 정서는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기능으로 수행한다. 시의 몫은 여기서 인간을 위한 치장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위한 노래가 될 때, 구원의 땅을 확보하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시인의 정신 시는 체험의 재료를 상상력으로 건축하는 예술이다. 다시 말해 경험이 없는 상상력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상의 원조를 절대적으로 받아야 가능한 예술이 시의 특성이다. 지극정성으로 봉양했던 분의 타계와 이어 다가온 건강의 충격은 곧 시의 바탕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했고- 생의 본질에 대한 명상이 깊어진다. 특히 시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를 생경(生硬)한 상태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가공의 절차를 통해 비유, 상징, 혹은 시적 장치를 동원하여 시인의 정서를 나타낸다. 장연식의 시는 항상 진지와 열정을 상상으로 대치하기 위한 탐구 의식이 남다르다. 이는 시인의 삶에 진정성과 정열이 결합하여 시적인 특성으로 환치되는 결과물이 시로 증명되는 이유로 대신할 수 있겠다. 3.정신 영혼 문학 1) 희망과 그리움 희망이란 인간이 절망으로 빠져 있을 때 인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치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은 더욱 빛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희망은 늘 절망을 먹고 살이 찌는 이름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절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 반대의 이름으로 설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은 희망에 작약하기 보다는 항상 고통과 아픔 그리고 신음을 어떻게 처리하면서 어떻게 사는가의, 여부에 따라 생활의 모습은 달라진다. 이는 시인의 개성이면서 시적인 특질로 전환된다. 장연식 시인의 경우 긍정적인 생의 모습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의 정열 등이 복합하여 시의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따가운 햇살이 배나무 사이로 눈을 뜬다. 아련한 기억들은 안으로, 안으로 물이 올라 이제 막 물이 올라 털고 일어서는 가지마다 조금씩 조금씩 아슬한 밀어를 부풀리고 있다. 머뭇머뭇 나서보는 그대 생각 아득한 그대 생각 까마득한 외길은 삽시간에 안개 자욱한 미로 길을 찾지 못한 바람이 화첩 꺼내 색깔 풀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가슴 가득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입술 터트려 온 동네 소문낼 것만 같은 이 봄 <떠도는 소문> 중에서 자연 상태의 묘사와 시인의 정서가 결합한 작품이다. 즉 봄을 머금고 개화를 시작하는 초봄의 분주함이 보이는 모습과 “머뭇머뭇” 나서보는 “그대 생각에” “자욱한 미로”의 암담함이 “색깔 풀기 시작하는데”에 이르면 “온 동네 소문이 번질 것” 같은 흥에 취해서 봄햇살 찬란함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시는 “눈을 뜬다.”의 능동성과 “밀어를 부풀리고 있다.”와 “물이 올라 털고 일어서는 가지마다 부풀린다.”의 역동성 그리고 봄날의 분주한 변화에서 “소문”의 마지막 처리 “이 봄”에서 군더더기 없는 마무리에 여운의 자극을 주는 듯하다 향기는 언제나 밖으로 나오는 것 때문에 스미듯 다가든다. 시의 맛은 이런 작용을 감추는 언어의 작용에서 빛을 발하는 예술이다. 이정문 시의 맛을 느끼는 세련미는 “온 동네 소문”날 것 같은 자발적인 여백에서 “그대”와 “봄이” 등가를 이루면서 정서의 약동을 대면하게 된다. 는 방법이 “소문”과 같은 패턴을 나타낸다. 여린 살 속내 살며시 드러내며 햇살이 마주한 저 여인 첫 순정이라 <목련> 중에서 첫 순정이라는 이미지는 고아(高雅)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는 언어의 뉘앙스가 간직되어 있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정서가 뒤따른다. 이는 서정적 자아를 나타내는 기교이면서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표출되는 고백이라는 점에서 곧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기교가 된다. 즉 서정적 자아는 세계와 시인이 갈망하는 정서의 고향을 뜻하면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말하는 철학에 접근된다. “여린 살 속내”를 당당하게 드러낸 마음이 아니라 햇살이 오면 비로소 첫 순정의 꽃으로 나타내려는 내면성- 감추면서 살아온 삶의 도정(道程)이 숨어 있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당당하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햇살이라는 조건이 있을 때 은근하게 말하고 싶은 내면성에서 시인의 생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인종(忍從)의 세월이 숨어 있는 정서의 발견이 시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은유라는 함축 속에서 추측의 미학이기 때문에 포장된 이면을 들여다보는 수고가 있어야만 기쁨을 터득하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시에는 전달의 향기가 있다. 그 마른 하나의 결정된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갈래로 다가온다. 박연식의 시가 갖는 위의(威儀)는 적어도 향기를 발산하는 은근함에서 더욱 다정함을 느낀다. 우리 춘삼월 만나자, 했지 살얼음 맨발인 지금 놀라운 하루 알아도 몰라도 내일은 와서 무량의 햇살 꽃 하나 피우기 위해 가득 초록을 풀 것이다. 내 몸 가득 초록 물들일 것이다. 춘삼월 만나자고 했으니 무량한 햇살에 믿어보자 <무언의 약속> 중에서 시인은 예지적인 말을 포장하는 능력과 타고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더구나 화려하고 순수함을 건져 올리는 의식에서 만나는 정서는 희망과 꿈을 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음성으로 환치되는 절차가 수행된다. 그러나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말하는 시인의 생활은 이와는 다른 땅에서 살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차 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이르는 길을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의 도구에 의해 시인의 재질은 빛을 발하게 된다.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는 그리움 호수 위에 나뭇잎 하나 떠있다. 홀로 떠 있다. 바람이 망연하여 관조하며 홀로 호수 위를 밟는다. <그리움> 중에서 그리움의 구체성을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시인이 꿈꾸는 공간을 향하는 일이 상상의 줄기를 이루면서 시의 행로 즉 가는 길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만약 시인의 의식이 일정한 공간에 갇혀 사는 과학자와 같다면 시가 아니라 화석 같은 의미의 덩어리일 뿐이지만 시는 살아 있는 의미를 만든다는 점에서 생명체의 창조- 시는 생명을 창조하는 의미의 축조라는 뜻이다. 박연식의 그리움은 매우 고독한 듯하다. 그리고 “홀로”와 바람 앞에 위태한 상징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위기의식은 현실에서 느끼는 강박함 혹은 병상 일기』에서 나온 초조라는 단서가 첨부될 것 같다. 그라나 “퍼내도”의 반복에서 그 원인은 미지(未知)를 향한 호소로 들려오는 메아리- 시인만이 느끼는 서글픈 이미지의 발상이라는 점이다. 고독은 누구나 갖는 이름일지라도 시인에게 고독은 시의 출구를 제공하는 점에서 운명의 슬픔조차 시의 원료가 되는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4.여백의 무게 시라는 단어는 단순한 문자의 조립이 아니라 시 속에 강한 신념의 에너지를 가질 때, 감동을 줄 수가 있다. 이를 위해서 시인의 행동은 항상 세상에 희망의 불을 켜려는 인도자의 모습이어야 한다면 이정문의 시는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작고 낮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를 위한 싹- 작은 씨앗이 화려한 봄날을 기다리는 일을 위해 우선을 생명의 고귀한 의미를 위해 오늘은 땀을 흘려야 한다. 침체와 절망조차도 동행의 친구로 삼고 언덕을 넘을 때, 그의 시는 희망의 웃음을 바람에 날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를 그리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가진 고백이 집합되어 고도의 언어의 기술로 나타내는 너무나도 깊은 내면을 알 수 있을 것 같으며 사물을 은유와 기교로 나타내는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그리는 시인이라 앞으로도 그가 진행형의 깊이가 넘치는 시집을 기대하며 영혼의 문학을 그리려 한다는 점에서 더욱 찬사를 보내며 에필로그 하려 한다. 2024. 06.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2]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모두들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면 우선 후회와 더불어 찾아오는 의식의 발견에 직면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발전의 의미이고 자기 각성의 길을 확보한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돌아보는 일이라면 나이와 깊이 상관관계가 있으며 체험의 축적이 어느 정도 쌓일 때 지혜의 성을 구축할 때, 비로소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즉 젊음이 있을 때야 가속도로 달리며 길 찾기에는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의 언덕을 넘으면서 자연스레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정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즉 주름살 깊은 모습을 보면서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기에 흰머리가 보이고 잘못 살아온 인생의 후회 또한 겹치고 스크린 되어 검은 강으로 흐르는 의식의 소리가 새벽을 흔들고 있을 때 “허망의 덩어리”에 짓눌러 살았던 지난날들에 보내는 연민이 애절해지는 것이다. 찾고, 쌓고, 높이려는 이기적인 삶을 돌아보면 모두 헛것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무념무상”으로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에 눈을 뜨지만 이미 지난 바람 소리의 행방을 결코 찾을 수 없는 현재 - 고달픈 여정의 자화상엔 또 다른 강물이 흐르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갖는 심사(心事)이겠지만 돌아보는 길에서는 아픔이고 돌아오는 것은 허무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확인하는 것이다. 유난스럽기까지 하지만 여기부터 방황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논어』 양화 편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마치 벽을 보는 것처럼 같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시인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은 감정과 사리 분별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를 모른다 해서 세상을 살아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일 또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에는 아무래도 시를 알고 세상을 너그럽게 보는 안목의 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공자는 세상을 가장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이자 성인으로 자식을 향한 지혜로운 부탁이다. 아울러 시경(時經)에 소재한 시 305수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의 표현에서도 그가 어떻게 시를 접했고 일상의 진실한 삶과 시의 연관을 얼마나 중요 시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시는 진실이라는 방패를 갖추어야 그릴 수 있고 진정한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고정관념의 잣대로는 사물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험의 강에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시는 현재의 모범이 될 수 있고 미래의 안목 가치를 창조할 수 있기에 시는 생명의 영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자연과 사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단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복합이라는 데서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하는 일이 우선이겠지만 대별한다면 동양, 서양적인 태도 또한 저 아프리카 쪽의 삶도 귀중한 요인이라 하겠다. 사실 문화적인 흐름은 서양과 동양으로 대별했던 관례에 따른 차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에서 차이는 동양은 묵언 수양, 또는 침묵으로 전달하는 기교가 우선이라 한다면 서양은 행동 양식으로 증명하는 일로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옛날로 뒤집어보면 종교적인 현상이 지배적인 요인이라는 판단의 근거에서 언어의 표출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상은 두 개의 질서 속에서 세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결국 문학이란 서양적 표현의 기법과 동양적인 표현의 기교적인 차이는 필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삶의 재료가 소재로 작동된다는 것에서 본질은 같을 것이다. 다만 방법상에서 차이는 삶의 원리에 궁극을 찾아 나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 해답이 된다는 일치점을 예외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교란 본질에서 직접 닿기 때문인 것이다.한 가지부연할 점은 서양의 Rheroric은 웅변의 뜻에서 출발하여 예술로 생각했던 서구의 사고와 동양은 애당초 침묵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차이에서 동양은 말과 기교에 발달 논리가부족했을지라도인간 사고의 본질을 나타내는 차이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석가모니와 예수가 똑같은 결론에 답안을 작성한다는 예를 말들을 한다. 제자들과 소요하다 연못에 핀 연꽃을 들고 석가는 그냥빙그레 웃었을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웃었고 다른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가를 몰랐다. 이러한 예가 “염화지중”의 미소 답안이라면 예수는 아마도 연꽃 앞에서 “제자들아 이리 모여라” 이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처럼 너희들도 열성으로 기도하고 따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지의 말을 가정한다면 논리와 함축의 차이- 그 본질에 교훈은 같을 것이다. 방법의 차이는 결국 본질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는 “이지지”라는 말은 시론에 가득 들어있는 말이다. 동서양의 시를 막론하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지를 구사하고 창조하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시는 이미지 구축하는 것이 정서의 답이요. 이미지로 시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소설은 묘사라고 한다면 시는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무를 갖는 언어의 표현이라 이 점에서 시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공통된 정서의 집합을 이루는 특징 구유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같음에도 유사한 생각, 또는 표현에 일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민족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이론- 사고와 판단의 차이가 엄존하는 이질성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휴머니즘의 사랑』 사랑은 결합을 위한 갈증인 것이다. 휴머니즘의 거리가 좁혀질 때 비로소 사랑의 발생은 문을 열고 갈증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변모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거리가발생되고그 거리를 유지 혹은 단축하려는 현상을 삶의 본질이라 정의한다면 갈증은 지정된 대상에가까이하려는마음이 사랑으로 진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갈증이고 그 갈증을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의 따라 표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마음의 거리감으로 생각하는 거리와 실제의 현실감에서 바라보는 거리에는 욕망이 발동될 것이고 거리의 소멸은 존재와 대상을 현상에서 말하는 멸각(滅却)의 상태로 진전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을 위한 마음이 발동될 때 비로소 말의; 성찬(盛饌)이 준비되는 것이다. 시 또한 시인의 정신적 갈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에 대한 열망 혹은 표현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한 거리의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리의 파생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지려는 심리적인 거리와 또 멀어지려는 의도적인 거리가 있을 수 있기에 대체로 시의 경우 가까워지려는 점에서 갈증에 속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갈증과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원(圓)으로의 순환과 같은 연결이 되기에 사랑의 에너지는 갈증이 있기 때문에 비움이고 또 채움을 향해 에너지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는 단안에서 사랑은 인간이 실현하는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부재를 암시하기 때문에 어둠이고 비극이 되는 이치라는 것이다. 인간과의 사랑 혹은 우주 자연의 모든 대상을 바라보는 휴머니터의 가슴을 갖는 일로 강조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사랑의 마음은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 수 있기에 마술사가 될 수도 있고, 또 외롭고 쓸쓸함을 아름다움으로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로 치환(置換)될 수 있다는 이미지 발상법이라 하겠다. 3.『자연풍경과 이미지의 꿈,맥락』 자연이 주는 풍경 이미지는 가장 편리하고 찾기 쉬운 대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보고 듣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오며 자연에서의 일부이며 사건이며 삶의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들어있는 시가 곧 우리의 문제와 직결되며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단편적인 단일 소재로도 수 편의 시를 창작하는 자연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료(質料)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이미지로 구성되는 만큼 인간 모두의 자연풍경 이미지를 어떻게 그리느냐의 시의 근간이 이루어지기에- 꿈도 상상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로 이해될 때 삶의 길을 넓히고 생의 이유를 긍정으로 생각하는 빌미이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정서 이유가 명확하게 조절된다면 많은 시인도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꿈이 명료하고 정확하다면 이는 현실과 구분되지 못하는 잘못일 것이다. 꿈은 선계이며 이 설계는 신념을 가질 때, 꿈은 비로소 현실로 이끌려 나오는 속성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꿈은 모호하고 암담한 색채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꿈을 갖는 것은 신념의 공고화를 요구하고 또 찾아 나서기 위해 고된 일상의 언덕을 넘고 또 넘고 하는 것이다. 쉽고 편안하고 안정된 곳에서는 꿈은 나래를 접고 보이지 않는다. 안개, 호수라는 희미한 곳에서 다가오는 신념의 이름은 꽃의 향기를 대동하고 무지개색을 연출하는 장관이 될 수 있기에 자연의 꽃과 꿈이 보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살아간다는 삶의 이름은 누구나 무거운 것이기에 이런 이유로 짧고 빠른 길을 염원하고 있지만 인생의 길은 그런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직하고 솔직함에는 먼 길일지라도 삶의 자세가 아름다워진다면 시인의 정서는 그런 자리에 서있기를 고집한다.어린 시절의이미지가 오늘을 지탱하는 깃발이기에 산속의 물소리, 그리고 벌, 달, 바람 등 자연의 모습은 천연의 시가 되는 재료가 되기에 삶이라는 말에는 방법의 문제가 담겨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따라다니는철학이자 숙명의 과제물인 것이다. 계절과 새, 그리고 싱그러운 자연의 풋풋함이 시인의 정신을 맑고 꿈과 만나게 되면 환한 길로 인도하는 것 같은 모습, 다음 시로 위안으로 삼는다면 사는 일이 희망으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꿈을 가지면 삶과 인생이 썩지 않고 싱싱해지는 소금의 빛이 되기에 꿈은 늘 그런 방향으로 지시하고 일러 주어야 멋지고 깊이가 넘치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속에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은 겉으로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의 이미지가 내면으로 꾸밈이 없어야만 살아나는 이미지로 결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동초의 시련을 감내하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묻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하여 진정한 삶은 성실하고 바른 삶 가치가 더욱 고귀한 이유로 돌릴 수 있다. 인생 평가는 이름의 무게나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 내면 가치로 환산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4.『고독 그리고 허무주의』 고독과 허무가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은 나이의 깊음을 감지한 시심이 그런 방향으로 지향하는 정서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허무란 인간이 맞이하는 궁극의 지점에서 느끼는 공통성에 있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의 지혜는 시작과 끝을 느끼는 예지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젊은 날의 열정과 노년의 지혜에는 삶의 흔적이 축적되었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습득했기 때문에 노년에 이르면나이브하고처연(悽然)함에 젖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아갈 시간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교차하기에 삶의 모습이 부드러워지고 느슨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돌아와 그 소득의 명세서를 보면 정작 어떤 것도 없다는 공(空)이라는 바닥을 실감할 때 돌아보는 길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여기에 허무가 짙은 음영을 그리면서 출몰하게 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꽃이 핀들 꽃이 진들 무아지경으로 모든 것 가고 있는데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나? 파라다이스가 있을 것인지 황홀경이 있을는지 허무로 모든 것 떠나가는데 이제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부자인들 가난뱅이인들 보이지 않는 작별인 것을 무슨 꿈이 필요하겠나? 이제 놓친 것 잃은 것 얻는 것 무의미로 지난 세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것을 <흔적의 세월> 지나가 버리고 떠나 버리고 작별인 것은 세월이 만든 사연이라 이러한 사연은 곧 허무와 고독을 불러오는 이름인 것이다. 이런 시인의 정서는 자연스레 마음이 공허하고 약해지는 자아를 키우게 되고 모든 것들이 떠나간 그리움과 작별의 아쉬움 그리고 부재에 따른 절망이 자리하는 시간 허무는 그렇게 스미듯 찾아오고 출몰하는 원인은 삶의 고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자연스레 찾아온 이유 나이는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와 가슴을 적시는 현상 때문에 작별이나 이별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란 자괴(自壞)의 마음을 가져왔고, 다시 돌아보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것이 상정(常情)인 것을 어찌하리오. 5.『Humanism』이란<사랑의 가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임무이지만 이를 어떻게 표현미로 이미지 승화 시킬 것인가는 시인의 재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사랑을 말하는 혹은 사랑으로 포장하는 점에서 휴머니즘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시가 모성을 바탕으로 진전할 때, 화려하거나 요란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섬세하고 따스함을 포장하기에 이는 어머니의 마음– 또는 사랑이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모두에 헌신으로 통하고 희생을 앞세우면서 세상을 포용하는 점에서의 아름다움이라면, 아마도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모성애에 대한 회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어머니의 태반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상을 가장 속 깊게 간직하는 정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귀의처의 공간이 어머니의 이미지라는 뜻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인 삶의 회귀를 뜻하는 일이며 휴머니즘은 시의 모태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피에로 엄니 날마다 반복이 변죽 되어 힌종이에 빼곡히 그려보아도 당신의 얼굴 꽃 같은 미소 오간 데없으니 주름살 백옥에 희생의 시간들이 그릴 수 없어 애끊는 마음만 통증으로 변해 버리고 되돌릴 수 없는 한탄 속에 오늘도 피를 토하는 마음 어찌하오리까? <피에로 엄니> 이승섭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인은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특별한 상징의 기법이 들어 있지 않지만 보편성에서 오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매우 구구절절하다. 분신이 날마다 변죽만 울리는 엉뚱한 말만 하시는 어머님을 지켜보는 이는 사실 다시 일어나시기 어렵다는 무 희망 속에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긴병에 장사 없다고 했듯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긴병을 간호하는 필자는 자식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애끊는 마음과 피를 토하는 한탄 속에 원천적 모태 의식을 발동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안타까울것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정감은 연민의 늪에서허우적거리는자화상을 보는 것일 것이다. 10년 넘게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그 마음 아마도 절벽의 늪이 아닐까? 하면서도실낱같은희망에 부모와 같은 인자가 휴머니즘의 일단일 것이다. 6.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이미지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 한다. 건축술의 일정한 방법은 필요할 것이기에 공간의 미학이나 효율성의 문제는 건축에 가장 중심을 이루는 핵심이라 한다면 시에서는 이미지가 그렇다. 이미지는 곧 시의 생명을 활력으로 전환하는 일이 언어의 평면성을 입체적으로 전환하는 가교적인 역할 또한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의 산, 강, 고향, 부모형제, 여행, 삶의 문제, 사랑, 그리움, 자연풍경, 바다, 등의 범주에 시의 표현이 한정되어 있다. 이는 모든 시인들의 상상력의 범주가 대체로 일치함을 추적할 수 있는 소재들- 모든 시인들의 시에 가장 많은 흥미를 유발하는 절실성과 상관이 있는 이미지의 목록들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접촉하는 대상이 곧 시의 소재로 전환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상화가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시인마다 관심의 집중화에 따른 선택의 폭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많은 빈도의 시적 이미지는 거의 비슷하다는 특징이 우리 시의 표정이라는점이다.라고정리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시집 1] [필자 시평집 2]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3]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