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시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이미 시는 이미 달아나 혼비백산(魂飛魄散)한다. 그렇다고 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다시 시는 미궁의 깊이에서 서성이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낸다. 시는 늘 살아있고 생명의 호흡을 날마다 호소하지만 사람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따라 시의 표정은 각기 달라지며 감성과 정서가 많은 시인에게 가면 다른 표정과 언어로 태어나곤 한다. 그렇다면 시는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스피커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진솔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락 펼칠 때, 세상을 향하여 진리에 대한 표정을 관리한다. 그렇다고 시는 진리만을 강조하는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애환에 대한 조언을 멈출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삶의 전면에서 용감한 투사의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더러는 아픔을 위로하는 진정성의 말에 가슴을 치기도 한다. 결국 시는 삶의 곁에 있을 때, 시의 역할과 유용한 임무를 다한다. 한 사람에 시인의 시집은 앞에서 말함과 같이 인간이 만드는 표정의 전부를 시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이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독자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시의 등급은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시적 작품이 탄생에서 명품은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만드는 여부에 따른 이름이 명품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니 누가 명칭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품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2번째 시집을 출간한 홍금선 시인은 여린 감수성과 순수한 정서의 숲이 지고지순하다. 그의 시를 보면 싱그럽고 집약성의 언어가 맛깔스럽다. 자유시와 정형시를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자유스러운 정서의 나열이 시가 될 수도 있고 정형의 일정한 형식에 내용을 담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시라는 범주 안에서는 굳이 구분의 칸막이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문제는 독자가 읽어 감동, 받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시의 맛은 화려한 감동이기 때문이다. 2. 숲의 향기는 어디서 오는가 1) 정서의 특질 시의 구성은 시인의 정서가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이미지의 구축에는 설계로의 얼개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진로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때 한 편의 시는 시인 자신의 표정이고 사상을 나타내는 시인 정신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시는 곧 응축이라는 언어의 절약과 그 탄력으로 튕겨 오르는 리듬의 연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 섞어서 만드는 잡다한 것이 아니라 정제되고 질서 있는 풍경화 혹은 치밀한 구도 속에 언어의 탄력이 튕겨 이미지의 숲을 만들어야 한다면 홍금선의 시는 그런 욕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시가 숲을 푸르게 하고 있다. 가볍게 주섬주섬 온기로 녹이는 마음 빈, 공간 그득히 반질반질 후원하게 ` 돌아보며 빙그레 닦아 보는 너 <마음> 중 원래 시의 특질을 토운(tone)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시적 장치와 특징을 모두 담아서 말하는 총체적인 의미를 말한다. 왜냐하면 단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어조, 소리, 음조, 신호 등으로 해석되지만 시에서는 부드럽다거나 아니면 딱딱하냐, 혹은 냉정한가 또는 직선적인가 등을 의미하면서 한 가지 방향으로 지칭하지 않는다. I. A Richards는 의미와 감정, 의도와 더불어 시의 총체적인 의미라 했고, 르네 웨렉과 윔셑은 “내적 형식”이라는 말로 구분했으니, 한 가지로 특징을 요약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시의 총체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시의 “목소리” 즉 화자의 목소리를 의미할 때 곧 화자의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가의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달리도 말한다.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은 산문적인 장광설도 있고 또 단순하면서 명쾌한 선적(禪寂)인 고요한 방법이 있다면 홍금선의 정서는 후자에서 그의 시적 특성이 집약된다. 시의 중심 언어는 “마음”이다 “가볍게”와 “주섬주섬”을 모아 “빈, 공간을 그득히” 더불어 “반질반질”과 “훠언하게”의 결합에서 어둠이 없고, 밝고 환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빙그레”의 표정에서 시인의 정신이 있어 밝고 투명하고 구김살 없는 정서의 유로(流路)가 아름다움을 남긴다. <마음> 시는 도합 40글자로 되어 있지만 구성된 이미지는 여러 개의 갈래로 파생되는 기교는 시인의 시적 능력을 뜻한다. 이런 특징을 강조한 이유가 함축된다. 하늘을 보노라면 발그레한 노을 물결로 일렁이고 파랑, 파랑 자죽자죽 여울지는 길을 따라 두런두런 하늘 붉은빛 원을 그린 먼 곳 머물고 싶은 마음속 풍경화 <노을 길> 중 시란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는 풍경화 - 이때 시의 특성 중에 회화 즉 (phanopoeia)를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어 그림을 연상하는 일은 의미와 리듬과 3대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이미지 구축술이다. “노을이 물결로 일렁이는” 연상은 고요와 더불어 따라오는 소리의 겹침이 연상 작용으로 이어진다. 또한 <노을 길>의 가장 백미이다. “파랑파랑”과 “자죽자죽”에서 언어의 특징이 한몫으로 드러난다. 이런 언어의 감수성을 터득한 시인의 시적 능력은 감각적인 언어의 탄력을 싱그러움으로 살아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흔히 서정시의 특징을 말하면 자아의 세계와 일체화를 이룩하는 방법론과 주관이나 객관 또는 이성과 감정이 하나로 통합되는 서정적인 자아의 확립을 motto로 나아가는 정서에는 유연한 감성이 파도를 일렁이게 만들어 논을 하는 필자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낙엽> <단비> 풍경> 등 다양한 시가 많지만, 그것을 모두 논한다면 양이 너무 많아 간단하게 그의 주요 부분만 언급하였다. 다만 시는 절망과 아픔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길이라고 늘 말을 하지만 그러나 시는 아무런 힘도 없고 명예도 아닐 것이지만 아픔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한 편의 시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에너지이기에 더욱 위대한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시는 그렇기에 문학이라는 맨 앞자리에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인은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낚아채는 것이 시인이다. 무심히 지나가는 담쟁이넝쿨의 모습에서 삶의 길과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가 시 1편을 보고 느끼는 희망의 담금질을 하는 행위와 표현에서 악착한 삶의 길을 펼쳐야 하는 이유와 기운을 받는 것도 독자의 몫인 것 - 시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는 뜻이다. 3. 에필로그- 독특한 상상의 표현 압축 시인의 시적 언어 감각은 탁월한 것 같다. 특히 서정성의 부드러움과 자아의 대상을 독특한 언어로서 조화를 이끌면서 풍경화를 그리는 섬세함과 솜씨는 일품이라고 장담한다. 더구나 언어의 직조에 번지는 묘미와 응축을 통해 이를 탄력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길은 그만의 성을 구축하는 구상이면서 특징이라 하겠다. 이번 2번째 시집을 출간하면서 꾸준한 열성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시단의 돌풍과 더불어 무서운 기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앞으로 두고두고 볼일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질서 현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력의 조력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갖추면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안을 찾으면서 의미의 조직화에 혼신을 발휘하려 한다. 더러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도로(徒勞)에 그치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망을 얻거나 그 반대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유명이란 말은 부풀어 오른 거품 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생(生)이라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의 정화 혹은 순수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한정된다. 자기 삶의 오뇌(懊惱)와 고통 신산(辛酸)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는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탄생될 수 있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청탁의 의해, 서문용 시인의 시를 접해본다. 그의 시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한다. 물론 저변에는 부모나 고향의 정서 또한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에도 따스한 햇살이 다가든다. 이제 점검의 코스를 통해 정신도(情神圖)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2. 거느린 의식들 1) 헌신의 소리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하다. 거스름이 없다는 것은 달관의 높이와 경지를 점했다는 의미가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교만 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e Souliers』라는 작품이 있다. 한 켤레의 농부화에서 서럽게 살아온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히 담겨 있다. 더구나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의 작품은 작가의 모든 생을 압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언제나 내 발을 꼬-옥 껴안는다 무덥고 지쳐도 언제나 내 편인 남 보기 부끄러워도 전혀 싫은 내색 없다 가다가 쓰려져도 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언제나 보살핀다. 마음도 넓고 고운 아프지도 않는 봄 화신처럼 언제나 나를 지켜준다. 『내 신발』 중 시인이 시집을 상재(上梓)할 때 의도적으로 작품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은 독자의 첫인상을 휘어잡으려는 발상에서 맨 앞자리에 있는 작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머리 위에 모자로부터 발끝을 지켜주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감싸고 의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의상과 어울리는 신발의 모습- 깔끔하면 그 사람의 인상은 멋진 사람으로 인식을 심고 지저분할 때는 흐린 인상을 각인 시켜주는 일은 인상에서 좌우되는 현상이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화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구두는 비교 가치가 연결된다. 시인의 약력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그는 중앙부처의 공무원으로 봉사와 헌신을 좌표로 삼고 살아가는 일이 삶의 방편이다. 공무원은 국민을 위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자리일 때, 그의 임무는 비로소 화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발은 곧 공무원이고 그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은 국민이기 때문에, 신발은 어떤 경우에서나 주인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끈기 있게 “너를 지켜준다.”라는 임무에 헌신해야 한다. “가다가 쓰러져도/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의 무한 성실을 다할 때,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보이는 희망처럼 서 시인의 마음에는 희망의 푸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은 때로 고독할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기본 바탕에서만 성립되는 Eros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날마다 항상 변함없이 환한 웃음을 선물하고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한다 세상 인연 맺은 날로부터 이 시간까지 무한 사랑 에너지를 주었지만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빛은 우리를 향해 행복하게 살라고 알려 주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날마다 감사에서』 사랑이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일 경우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 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햇빛의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펼칠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은 고귀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사랑의 이름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숙고하면서 또 찾아 나서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의 신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어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로 표정을 갖게 된다. 서 시인은 가장 많은 시적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상대를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그의 시는 공고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시인인 듯하다. 『사랑하라』 『당신은』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꽃』 『하얀 눈』 『빈 의자』 등은 사랑의 이미지가 번다, 하게 들어 있다.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교직(交織) 되면서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 정서의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며,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 앞으로 살아갈 시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행복하게 살라 서로 행복하게 살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 행복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중 “살라” “하라”의 형태로 사랑을 명령으로 강조한다. 이런 태도는 독자에게 위압적이고 때로는 독선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타당했을 때는 오히려 감동의 작동 원리로 드러날 수가 있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진리의 정직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에서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는 3인칭 복수의 지시적인 시어에서 사랑을 이룩하면 행복해지는 등식이 전개된다. “하라”와 “살라”의 명령어가 거북스럽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 곧 행복으로의 길을 만들고 있다는 이유에서 시의 묘미는 한층 밝음을 주는 역설의 기교가 된다. 사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된다. 포용의 기대감도 있을 수 있고 하나로 결합하는 통합의 일도 기대되고 또는 포로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면 서 시인은 저축의 의미- 복리의 계산으로 부풀어 오르는 무한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어느날 내게 당신이라는 은행이 하나 생겼어요. 장기간 복리로 사랑 계좌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내게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낼 때마다 고스란히 입금 시켰어요. 『사랑은 만삭』 중 매우 신선한 사랑법이다. 많은 시평을 썼지만, 사랑을 은행에 저당하여 복리로 부풀리겠다는 비유는 서 시인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시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도구를 통해 언어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심지어 언어를 버리면서 언어를 획득하려는 역설의 기교까지 동원한다. 은행의 이름은 당신이고 시인은 사랑의 계좌에서 수시로 입, 출금이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라 복리를 위해 장기간 계약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가치가 한층 고조된다. 더불어 당신이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내올 때 “고스란히 입금시켰어요.”의 진솔성은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지고한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오로지 저금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뒷날 받을 자산 가치는 화려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행복이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함을 뜻한다. 내게 오는 시간을 듬뿍듬뿍 토막 내어 빈 의자에 올려놓고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빈 의자』 중 사랑이 기다림이라는 말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암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의 마음이 허락의 시간까지 기다림이 있어야만 사랑의 진정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은 기다림에서 진실의 불을 켜는 시간 앞에 엄숙한 마음을 가다듬고 긴 시간을 의미로 채우려는 발상이 지극하다. 다음은 포로(捕虜 의식이다. 오늘 하루 이십사 시간 전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 마음 변하여 되돌아오면 내 쳐놓은 그물망에 걸여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두고 오랫동안 묶어두고 싶다. 『사랑의 그물망』 중 사랑의 포로라는 의미를- 앞장서서 오히려 그물로 대상을 포획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강압적인 방법- 이런 강압의 방법은 그 농도에 따라 비례하여 진실함을 나타내는 언어의 기교일 뿐 실제로의 행위는 물론 아니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이라는 가정의 상태이기 때문에 쳐놓을 그물망은 기대할 수 없지만 대상을 사랑하는 깊이가 얼마나 진실한가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어떤 방법이든 진실- 때로 진실이 불통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 시인의 사랑 법은 가능한 한 이룩하고 싶은 열망의 농도와 상관이 있는 것 같은 비유를 모두 동원한 인상이 특이하다. 3) 고향 그리고 부모 인간의 근본은 뿌리를 아는 일일 것이다. 이 출발은 부모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전개될 때 나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친구도 있어 추억의 이름이 더해질 때, 생은 풍윤(豐潤) 해질 수 있게 된다.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먼 나라의 아버지』, 『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 또한 고향을 생각하는 『고향 무정』 『밤하늘 친구』 등 고향에 대한 추억은 많은 편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오십 성상 세월 망각한 채/고향길 달려가서/그때 밤하늘 쳐다 보았네.”(밤하늘 친구)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된 그리움이 있을 뿐 특별한 추억의 이야기는 감춰져 있다. 오십 년이라는 긴 세월의 단절에서 추측의 길이 암시될 뿐이다. 오늘따라 이마엔 골 깊은 주름살이 큰 고랑 선명하게 드러나고 생살 도려내는 아픔처럼 마음이 아프다. 『어머님 모습』 중 “오늘따라”에서 현재의 상황이 느껴진다. 그러니 주름살 낀 어머니의 모습에서 통증을 느끼는 효심에서 느끼는 인상은 가슴으로 따스하게 전달된다. 자기의 원형인 부모에 대한 마음에 통증이 클수록 스스로 모습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커지는 것 같은 형상이다. 효도는 곧 자기 사랑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계신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세상살이 벅차고 힘들 때 더욱 보고 싶습니다. =중략= 『먼 나라 아버지』 부모는 자식의 반면교사가 될 때, 교훈이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강인함을 요구하는 아버지는 때로 외로운 모습이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먼 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가 “밤에 몰래몰래 변신하여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생전의 가난조차도 물려준 아버지를 이해하는 가슴에 그리움이 애절하다. 3. 에필로그 (시 정신의 골드) 1)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고 헌신은 더 큰 사랑의 길을 내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서 시인의 시는 순수와 투명이 남다르게 시의 표정을 밝게 한다. 이는 삶의 질료(質料)가 되기도 했으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 같다. 2) 호수의 아름다움은 관조의 경지에 이를 때라야 하늘이 보이고 맑은 바람조차 시원한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 수양 혹은 정화의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이런 이치를 수행하는 행동의 모범이 날마다 거울 보기 혹은 구두를닦으면서 지혜를 축적하는 비유로 나타난다. 3) 생을 지속하는 데는 정답이 없지만 자기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에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 시인은 당당하다. 4) 사회에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환하게 보이는 정신은 바로 서 시인의 시 정신을 이룩하는 원천이면서 삶의 지표로 적용되는 건강한 시인 서 시인의 시는 그렇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저서]
[어느 모임에서 필자] 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터시(ecttasy)의 경지 즉 신의 경지를 방문으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도는 것이다. 또한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하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홍미선의 감수성과 줄기를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미선의 자아의,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시에 허무 자아의 허기 사랑 의미 찾기> 1)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미선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 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부모의 마음>-중에서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길들여진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온다.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와 정리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 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처진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특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이거나 – 부모는 시련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에서 기인 하지만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숫자에 노작 거림의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이 무엇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강렬하게 띄어본다. <모정> 중에서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자식 사랑>-중에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되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키워 보지만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의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뿐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생(生)>중에서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되는 것이다. 홍미선 시인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서 우는 “허기의 자리”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을 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 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창조주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일진대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페달 <삶의 바퀴> 중에서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절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으로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 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 시인은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사랑> -중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는 홍 시인의 사랑에 담긴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낀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압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는 바람이며 긍정 마인드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이 아닐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 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를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고 사랑 때문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의 마인드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의 저서 1] [필자의 저서 2] [필자 저서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마음의 거울로 출발한다.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아름다움과 고통, 아픔 또는 그리움과 사랑의 목록들이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자극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가슴을 적시는 파문의 물살이 되기도 하며 더러는 가을 하늘 같은 투명하고 환한 미감(美感)으로 오감을 움직이게 된다. 이런 경우 시인은 단순히 언어의 조합을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언어의 중심이 되는 화학적 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과 사물의 이미지가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제3의 이미지로 변모할 때. 시의 맛은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실 시인 개인 성향에 따라 개성의 표현이 부드러운 개성의 시적 묘미가 있는가 하면. 딱딱하고 견고한 표정으로 오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든 시의 발성은 희망과 꿈 그리고 사랑의 체온이 담겨질 때, 비로소 시의 가치는 상승의 효과를 기대하게 된다. 이준영의 시는 부드러움과 상상의 깊이가 출렁이는 인상으로 출발한다. 언어의 감각, 예민한 촉수로 이미지의 사냥에서 건져 올린 언어의 싱싱함이 매우 리얼하다. 그러나 쉽게 다가오는 이미지가 아니라 찾아가는 노력이 배가 될 때, 더욱 빛나는 표정으로 살아난다는 점에서는 발길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는 heart의 시가 아니라 head에서 심사숙고가 있어야 한다는 점과 같다. 2. 언어의 실마리 찾기 1) 시작(詩作) 문법 시인마다 시를 대면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다. 직핍(直逼)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는 시인이 있듯이 비유의 패각(貝殼)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시적 의미를 발굴하는 시인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방법이든 개성에 따라 작시의 태도는 달라지고 이에 대응하여 시의 성격도 다르게 다가온다. 이준영의 경우에 보다 더욱 치밀한 언어의 운용에 따른 비유의 현란성을 부가할 것 같다. 이는 시의 성숙에 이르는 표현미를 수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머리((head)에서 생각의 농도를 높여야 한다. 마치 T.S. ELIOT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치듯 지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데도 많이 씹을수록 단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처럼 방법과 시의 맛도 같다는 의미이다. 이제 그의 시를 따라가 본다. 서해 파도가 옆구리를 찔러 간질이는 늘 겨드랑이 가려운 궁평항 혹시 가본 적 있나요. ...중략... 싱싱한 생굴에 궁평항 통고추를 갈아서 버무린 짭짤한 파란 궁평항을 몽땅 담아 맛을 낸, 그것 뜨거운 밥 위에 한 젓가락 빨갛게 올려 입 크게 벌려 씹다가 한 젓가락씩 먹는 것이 감질나 굴 젓 한 숟가락 푹 퍼넣고 따끈한 밥 한 그릇에 쓱쓱 비벼 먹다 보면 어느새 바다 내음이 입안 그득히 퍼지는 봄 - 『궁평항의 봄』 중 매우 감각적인 뉘앙스를 접하는 시이다. 신선감과 감각성을 주는 이유는 언어의 사용에 탄력적인 기교 그리고 리얼리터의 이미지가 부수적인 효과를 수반하면서 봄의 미각을 자극하는 방법이 매우 생동감 넘치는 인상을 가져온다. 싱싱한 굴 맛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해의 파도가 “옆구리를 간지리는” 묘사에서 궁평항의 바다가 푸른 감수성을 자극하는 인상이며 시의 사실성에 일조를 더하고 더불어 봄의 기운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생동감을 느낄 때, 봄의 정서가 궁평항의 역동적인 상징으로 발길을 맞추면서 다가온다. 시가 감각이라면 이는 시인의 표현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필수 요소 -이준영의 표현미는 뛰어난 감각성을 역동적인 효과로 처리하는 방법이 성공적인 시 쓰기에 일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신선하고 맛 좋은 봄 시라는 존재는 논리는 아니지만 의미의 확충을 꾀하는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정치(情致)성- 구조의 통일을 갖추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감동의 요인은 사실에 접근되어야 하고 과학적인 근거를 의미에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의 효과 혹은 비유의 적절성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때 비로소 잘 지어진 한체의 집이 완성될 수 있다면, 시의 상징이란 감춤도 아니고 드러냄의 성질도 아니고 반 투명성(eranslucency)에서 결국 애매성(모호성) (ambguity)의 의상을 갖추는 조직- 이 특성에서 시는 마침내 질서의 예술이 된다. 즉 봄을 말하기 위해서 결코 봄의 재료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봄의 이미지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봄은 비로 출발한다. 이는 겨울의 살벌함을 씻어내는 역할의 상징이 되어야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깨움의 요소로 작동되는 이미지가 바로 비이기 때문이다. 돋는 싹을 스치고 모든 생명의 풀포기를 만나 열어젖힌 내 창문을 두드린다. 진종일 물안개 뽀얗게 이는 산골 마을 오래도록 울고 또 울고 하느님처럼 산과 들을 거침없이 지나던 비 드디어 연둣빛 물세례로 산천초목이 춤을 춘다. 4월, 부활의 대지는 힘든 숨을 몰아쉬면서 -『봄비』 중 “부활의 대지”를 달성하기 위해 비는 제 역할을 다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생명의 풀포기”를 위해 창문을 두드리는 비유가 다가오면, 대부분 물상은 겨울의 긴 터널을 벗어나는 신호로 일제히 연둣빛 칼라의 행진이 “산천초목”을 덮는 효과를 만들게 된다. 이런 요인은 비의 속삭임이 아니라면 봄의 이미지는 살아날 수 없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시적 전환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기에 시인은 비와 봄을 위해 탄력적인 자연의 노래를 “비”로부터 만들게 된다. 봄비가 내림으로서 생명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자연의 재현 앞에 “시”는 제2의 자연을 재생하는 역할이 수행된다. 왜 그런가 하면 비의 다음 순서는 꽃을 만나는 일이다. 봄의 마음이 되고 싶어 죽은 듯 하나 소생하는 아름다움 생명으로 돋아나는 계절이 싶으며 햇살처럼 가슴 따뜻한 4월, 산 벚꽃 닮아 맘 고운 사랑의 사람이고, 싶다. -중략- -『산 벚꽃 고운 날에』 중 이준영 시인은 4/5월에 가장 시적 흥취를 느끼는 듯하다. 『봄비』 『봄』 『길목에 선봄』 등의 시는 절로 일렁이는 감수성이 가락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인의 정서가 봄에 가장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남기고 있기 때문에 4/5월 자연을 시로 나타내는 뜻이 된다. 인용하자면 “봄의 마음이 되고 싶어.”의 소망은 2연에 “꽃잎의 속삭임”이 되고 3연에선 “사랑의 사랑”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 아울러 4연에서는 ‘봄을 짓고 사랑을 짓고’의 봄과 사랑의 결합 그리고 5연엔 ‘맑은 눈 가지고 싶다.’ 6연엔 ‘정갈한 여자’ 소망을 꼭 껴안은 여자로 양적(兩敵) 의 암시를 봄으로부터 갖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의미를 집합하면 ‘봄엔 순수한 여자의 사랑’이 연상되기도 한다. 더불어 4월에 피는 꽃들의 이미지가 숨어 있지만 향기를 배제할 수 없는 것 같고 꽃의 시각성과 향기의 후각이 결합한 공감적인 효과는 고귀한 사랑을 봄에서 얻고 싶어 하는 시심의 발동이 왕성한 정서를 부추기는 상징의 계절이 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랑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3) 인내의 기대와 희망을 절망은 희망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면, 희망을 절망의 토대 위에서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절망은 희망의 순서를 대기하는 이해에서 희망은 인내의 시간을 가질 때 다가오는 순서일 것이다. 아울러 시는 희망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또 사랑을 위한 방법을 내포할 때, 비로소 시의 가치는 고귀한 이름으로 득(得)할 수 있다. 시를 읽는 것은 희망과 행복을 읽는 것이고, 사랑을 읽은 일이라면, 더불어 따라오는 꿈과 소망의 그림자는 행복을 준다. 이런 이유로 시의 소용(所用)이 있기 때문에 활력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시라는 의식의 높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단, 한번 놓은 적 놓은 적 없는 희망에 살았다. 사방이 꽉 막힌 터널 속이다. 지금 지레 겁에 질려 눈앞이 아찔한 순간에도 잠시 정신 차리자고 속삭인다. 여전히 하늘 떠 있는 강물 위를 바라볼 때 희망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꽉 막힌 벽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면 스스로 열리던 나날의 하늘 문 어설픈 한 손이 공기를 때리고 허공을 휘젓게 하지는 않으리라, 왼손으로 창을 열고 하늘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아침 - 『희망은 늘 그 자리』 중 희망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상은 아픔과 시련이 있을 때 가능한 역설적인 생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즐거움이나 행복 속에서는 희망의 이름이 부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의 이름은 항시 대기 상태에서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지만, 인간은 희망의 가까움을 신념으로 키우지 않으면서 탄식만 길어지는 경우가 절망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고”의 다짐이 있기 때문에 희망의 싹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의 기회를 다짐하는 경우보다 탄식하는 순간에 질리면 “하늘의 문”은 열릴 방도가 묘연(杳然)해지는 일이지만 이 시인의 신념은 이런 처지에서도 앞을 주시하는 일면 “창을 열고 하늘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아침”의 준비를 마련하기 때문에 밝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인자(因子)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침묵의 시간 땅에서 자란 하늘을 뚫고 긴 장대에 메어단 긴 목 나무의 키만큼 자란 꿈 땅에서 하늘로 이어주는 길을 내고 새의 깃털을 입은 소망 하늘을 난다. -『솟대』 중 인간은 늘 하늘을 날아야 하는 소망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은 구원의 이미지가 들어있고 꿈에 대한 열망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험을 감행하면서 날아야 하는 하늘에 동경의 역사로 점철, 되었다는 데에 있다. 하늘이란 원래 고귀한 혹은 정착해야 할 마지막 개념일 때, 새들은 이를 대신하는 이름으로 자유롭게 비상한다. 이는 인간의 뇌리에 정착한 소망이 곧 하늘로 지향점을 마련하는 상징으로 대체될 때, 새는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임무에 헌신했다. 왜 그런가 하면 지상에서 하늘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새의 형상을 갖추면 인간은 여기에 기도를 올리는 경건함을 신앙으로 삼아 왔다. 이 꿈은 곤궁한 현실에서 구원의 하늘로 이어지는 메신저의 역할이 새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의 시에는 희망의 발언이 많은 편이다. 『기다림』 『소망』 등은 꿈과 사랑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노력이 투영되어 미지로 향하는 정서들이 건강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2. 에필로그 – 자유와 소망의 꿈들 시는 마음을 그리는 퐁경화이다. 라는 데에는 이견은 없을 것이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가는 시인의 상상이 빚는 소재라면 이를 기교를 어떻게 표현할 것 인가는 시인의 재능에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적인 상상은 현실의 상상과는 다른 차원의 깊이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라- 이는 시인의 삶이 축약될 수도 있고 오랜 습작의 소산으로도 돌릴 수 있는 이유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소재와 기능이 우수하고 시인의 체험이 상상과 결합 된다면, 그가 빚어내는 시는 탁월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인의 상상은 매우 재치가 넘치고 또 사물의 수용에 감각적인 특징이 보인다. 특히 봄에서 느끼는 생동성에서는 의욕이 분출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고 계절에서 느끼는 편안한 표정으로 사물을 대면 하기가 다양하게 이채롭다. 물과 바다 자연을 재료로 떠나는 여행이 조급하지 않고 한가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주는 인상이라면, 가을의 깊이는 심사(心思)한 사색의 길이 열리고 색깔의 자유가 편안하다. 그러나 겨울은 백색으로 포장된 성주(城主)- 그가 꿈꾸는 성안의 모습은 평화와 아늑함을 주면서도 따스함이 따라오는 그런 투명의 시를 그리는 이준영 시인의 표정이 정겹고 속이 보이는 그런 시인인 듯하다. 장문의 시평이라 일부 잘린 상태에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1] [필자 시평집 2] [필자의 시평집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지 물음에는 거의 명확한 대답을 마련하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도 막상 왜 시를 쓰는지 물으면 답을 어떻게 줄 것인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무한 상상이 내게 들어와 시를 쓴다는 신을 떠올리며 설명을 해주게 된다. 물론 스승께 배운 말이지만 사실 자기 시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시를 쓴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시를 생산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시를 분석하고 해제 또는 정리 이후에 비로소 객관적인 관점으로 탄생된 시에 대한 평론가의 조언에 따라 할 뿐이다. 이 경우 시에 대한 객관화는 쉽지 않으며 모든 시인이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에 마치 잉태 전에 어떤 꽃을 만들겠다고 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삼라만상 우주 섭리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따르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시를 그리는 일은 아이의 잉태, 또는 꽃을 만들 수 없는 일과 같은 것이다. 시인 누구나 멋진 시 좋은 시 쓰기 위해 신명을 다하지만 그런 소망은 쉽지 않은 결말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멋진 시와 좋은 시를 그릴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다. 내면을 통찰하여 사물의 특성을 시로 환치하는 일에 부단한 집중력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누구나 그리고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인이란 명칭을 가진 사람만이 시를 그리고 쓰는 것은 아니다. 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내면에 시심을 감추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 시심을 어떻게 꺼내어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가의 집중력 상상에 의해 아마추어와의 차이는 증명되는 것이기에 증명이 되는 것이다. 서길순 시인은 공예방에서 작품을 만들며 깨끗한 시를 쓰는 시인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잡티가 섞이지 않고 순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다. 이는 그의 직업과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견문으로 시화화 하는 독특한 입지를 만들고 있다. 공예라는 작업은 섬세하고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창작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시곗바늘처럼 행동하는 조용한 조건에서 일을 하며 창작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매시간 순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던 순간의 아픔들이 밤낮을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던 나날들을 발췌하는 순간의 환희- <머리말 중>에서 다소 체계적인 글이지만 시인의 내적으로 아파했던 시절을 말하고 싶은 글들이 응축되어 시로 표현한다. 이렇게 시를 쓰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생동감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볼 때 함축된 언어로 그려지는 그의 특성을 만나기로 한다. 2. 시의 언어 시는 언어로 이어진다. 그 구성이 언어일지라도 시인의 정신이 투영되는 점에서 그만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때 단순한 언어의 조합, 조립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을 모두 투척하는 일이면서 생명과 고통을 맞바꿀 수 있는 신념의 진행이라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자화상이고 영혼의 불빛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서길순 시집을 보면 계절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절에 따른 시인의 의식은 계절과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로 의지하며 봄에 꽃을 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사계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꽃봉오리마다 솜털이 보송보송 꼭대기까지 단물 적시며 양지뜰 푸른 꿈 꾸더니 어느새 바람을 이기고 이쁘게 세상으로 나온다. 아직 웅크린 벌 나비 날개 짓 처마 끝 매달려 앵앵거린다. 꼼지락, 꼼지락 양지바른 돌담 아래 키다리 쑥이 터진다. 어머니가 끓여준 쑥국이 문득 생각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이른 봄에 <봄이 오는 소리에> -중- 물이 오르는 봄날의 허박한 풍경화이며 의식을 풍경과 어머니를 그리는 방법은 서정시의 흔한 작시법이지만 실감으로 다가오는 일은 희소한 일이다. “꽃봉오리”가 “바람”과 싸우고 1연 2연 오면 “벌” “나비”라는 혼란스러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어머니의 추억이 개입되면서 상상의 나래로 펼쳐진다. 서길순 시인의 시는 전반적인 작시법이면서 그의 시적 정신과 의식을 투영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1) 삶에 깊이 모든 시에는 삶에 대한 호흡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 자신의 고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회라는 말은 낯설게하기라는 문학적인 기교를 뜻하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말이 되고 그 말은 감동의 방법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무늬와 같은 것이다. 그의 정서는 아마도 꾸밈이 없어 단조롭게 보일지는 몰라도 아주 깨끗한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구가 돈다. 중략- 빙글빙글 새 희망이 익는다 팔랑팔랑 벚꽃 익는 냄새가 향긋하다. <봄날의 패러디>-중- 모순으로 부풀려진 세상에서 자연의 섭리는 구분과 칸막이도 없이 잘도 돌아간다. 때문에 시인은 빙글빙글 띄어쓰기를 안해도 그냥의 의미를 구축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간의 구분일 뿐, 누가 가을이라고 하지 않아도 사계절은 오고 있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가? 다만 자연적인 현상으로 더불어 팔랑팔랑 벚꽃이 지는 섭리 앞에 숙연해지는 모습- 시인의 얼굴에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남으며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이를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개인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해와 달 끌어안고 우린 달렸다. 지구촌 너무 좋아 낮과 밤 구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략- <우리>-중- “우리”라는 의식은 분야가 다르다 해도 질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불평 불평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는 그의 삶에 적용된 의식이 투영된 것과 동일한 문제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의 시는 담백하면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이치가 대입된다. 2) 의식의 정감 시는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시의 무드는, 결국 시인의 정신 무드를 표현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시인의 정서는 다감성을 포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두루 관심을 나타내지만, 지극히 절제된 표정을 관리하는 것 같다. <엄마 얼굴,> <친구야 너는,> <옛 친구> 등을 보게 되면 주변의 지인이나 육친에 대한 정감이 다감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친구야 오늘 하루는 시원한 감로주 한 사발 거나하게 나누고 날 저문 고향길 함께 걸어가 보지 않으련? 나이테가 몰라보게 두꺼워진 네 눈망울 속에서 새 봄맞이 분주한 고향 땅을 그리련다. <옛 친구> -중- 친구와 감로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언이다. 우정은 곰삭은 맛처럼 깊이가 있고 따스한 체온이 교감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옛 친구의 우정을 찾아 방랑의 길을 터벅터벅 가는 것 같은 시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결국 도착한 곳은 고향 땅, 이는 친근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고향을 못잊어 하는 인간의 여린 심정에서 시인 또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굴을 그릴 수 있지만 결국 그릴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에 이르면 서러움 같은 밀물에 점령당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술래놀이 즐겁던 미루나무 아래로 가리라 돌아가리라 꼬까옷 반짝반짝 차려입고서, 고향 땅 산과 들녘이 반가이 다가와 벌써 내 곁에 있네.-중략- <귀향> -중- 추억은 늘 즐겁다. 왜냐하면 추억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여기서 어린 날들의 “술레놀이” 혹은 “꼬까옷” 등의 기억들이무리지어 “벌써 내 곁에 있네.”라는 생각- 생각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고향이 된다. 순수와 아름다움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어린 날들의 순수와 추억들이 어울려서 오늘에 다가온 이름- 추억 속으로의 여행은 정 깊은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풍경화이다. 이 풍경화는 바라볼수록 다정하고 깊은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며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점철 되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희망의 손짓을 보내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묘연함과 긴 시간의 간격 때문에 애절함을 더하는 요소로 인상을 장악한다는 뜻이다. 3. 자화상의 노래 “만추” “겨울 일상” “그리움” 등을 보게 되면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을 노래한다고 할까? 때문에 그의 노래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명상의 숲을 구축하는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아울러 생각하는 것만이 시의 몫은 아닌 것이다. 행동의 길을 안내하면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의 자리를 항상 견고(堅固)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서길순 시인의 시에는 생동감으로 포장된 정서가 신선미를 자극한다. 인생에 대한 발언은 때로 에피그람의, 목청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깊이를 갖춘 희망의 깃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감이 그의 시심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시에서는 고향을 회상하는 따스하고 안온한 이미지의 옷을 입은 시적 행보에는 즐거움이 따라오는 듯 하다. 다시 말한다면 서길순의 시는 노래로 부르는 자화상의 그림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모든 이들의 따스한 시상을 전해주는 시인이 되기를기대 하며 나의 숙제와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으며 나가려 한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제 7집{공정 정의 사색의 길}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9집 {무의식의 시}]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늘 평범하고 추상적 언어 감각이지만 시라는 특수성을 볼 때 이것은 곧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한 개성의 척도에서는 애매모호성이 너무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각주(脚注)가 많은 T.S Eliot의 황무지를 읽으면 그 나름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독자는 일단 난해의 딱지를 붙이며 돌아서는 것이다. 하여 우리 김소월의 시를 읽을 경우 쉽게 아는 척하는 이해가 문득 다가든다. 김소월이나 엘리옷은 분명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가치를 빛내는 점에서 달리 해석을 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경의 이상의 <오감도>를 명쾌하게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평론을 아직본 적이없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황색저널리즘 <인기주의> 고착의 명성을 부추긴 일면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시는 시 같아야 하고 산문은 산문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각주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비유의 장치나 시 적 포장을 걷어내면 속살이 드러나는 의미의 맛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구상화가 있다. 대체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추상화의 숲을 거닐다 구상화의 밭으로 걸음을 옮기고 다시 추상 공간의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시도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질적인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으며 일테면 특징을 이루는 표정을 말한다는 점이다. 시인의 원고를 일별(一瞥)하고 난 느낌은 추상의 숲을 지나는 느낌이고 마치 이중의 기교가 특이하다는 인상이다. 이제 그 표정을 한번 만나보기로 하자. 시집 《골목길 서사》는 총 5부 100편의 시는 이길여시인의 의식 조감(鳥瞰)이 서사로 그린 듯하다. 서사란 현실의 특정한 시간과 과정을 시간의 앞뒤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 촉수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지는 듯 정서가 이어지고 묘미가 다채롭고 신비하다. <2.길에서 만나는 추상의 표정> 바실리칸딘스는순수 추상 예술의 선구자로서 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키고 음악가 바그너의 선봉자로서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탁견(卓見)을 실천에 옮긴 추상수채화의화가이다. 정신의 고도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추상은 일종의 변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공로를 갖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만의 정서를 점과 선, 면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문법은 찬탄을 이어오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시에서도 이런 기법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 영역의 한 축을 감당할 때 일정한 자리를 갖는바, 시인의 창조 기법은 그런 측면으로 볼 때 가까움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산길 고당으로 돌아가니 이마를 맞댄 지붕 아래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고행의 삶의 소리가 내 마음 긁고 때마침 눈물방울 달고 서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눈길이 간다. 제 키보다 큰 담쟁이에 기대 한숨과 울먹이는 아이와 자아 속의 내가 함께 한다 그을린 마음 달래려 가까이 서서 미소로 그려 준다 양팔을 벌리고 선 아이의 그림자에 깃 고운 날개가 펼쳐지고 그새 배시시 웃는 눈망울 내 세상 어디를 크게 흔들었고 쉽사리 재울 수 없는 뭉근한 떨림에 선뜻 돌아서지 못해 서서히 거꾸로 걷고 있다. <산허리 천사의 눈>중 시적 공간은 협소한 산골의 상징에서 화면은 거친 목소리와 더불어 고단한 삶의 목청에담긴아픔이 눈물방울 달고 나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과 울먹이는 모습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개입은 시간의 테이프를 먼 곳에서 가까이 화폭을 전환하는 기법을 구사하면서 위로의 승화가 천사의 날개를 그려주는 그림 속에 펼쳐지는 날개의 바람으로 “그새 배시시 웃는”에서 현실 공간에 화려한 채색이 마음 밭을 보여준다. 시의 기교나 그림의 기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할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경계가 없음에서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재미는 시인의 능력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서의 파편들이 부유하면서 언젠가 결합하는 요소로 작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대상의 표현은 시인의 심리적인 경과에 따라 특징이 드러난다. 가령 습작기에서 원숙기로 들어가는 도정(道程)마다 삶의 굴곡이 들어 있으며 이를 심리적인 기제(基劑)로 나타낼 때 추상의 묘미는 복잡을 단순화하는 형태로 정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액센트릭 한요소를 배제하고 화면 내에 형태적 질서에 예술의 자율성을 구성한다. 결국은 시인의 정서적 특징과 정신의 자유 구가에한몫을다하는 에너지의 창출일 것이다. 시인의 정서적 공간을추적해 보자 잘 달구어진 여름 한낮의 길을 신기루가 덮는다 그 속으로 영혼의 무게조차 가누기 힘에 부친 누군가가 그늘을 거느린 나무에 기댄다. .... 약....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더 울어야만 나를 한 겹 누구를 위해 벗어낼 수 있을까? <매미의여름 나기>중 전반에는 객관적인 서술이고 후반에는 주관적인 이미지가 작동되며 전반엔 보여주는 것으로 풍경의 느낌을 독자가용해시키거나아니면 간과하거나 유념할 사항이고 후반엔 매미가 곧 시적 화자인 ego로 들어오는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둘의 교합에서 자기를 대입하면서 사는 일이 이치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이 기교는 선명한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또렷한 비교 가치로 승화한다. 이 시인의 시는 그냥 무심코 읽으면 혼란이 올 수 있으나 다시 깊게 읽으면 네거티브 필름에 빛을 쪼이면 포지티브(양화)로 선명한 윤곽이 나타나는 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이를 이해하느냐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3.메신저의 굴레> 새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으로 옛날부터 고귀한 존재로 인식을 키워왔다. 애 그런가 하면 인간은 늘 하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 하늘을 지향하는 정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향하는 꿈의 이름이기에 비행기는 다시 로켓이 되고 미사일이 되면 이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있고 달 혹은 화성이나 우주의 유영(遊泳)에의 꿈을 실현하는 시작의 실마리는 바로 새에 출발점이었다. 밤나무를 집으로 정한 새들 잠에 취해 뭉그적대는 나를 알람보다 먼저 깨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나와 나뭇가지를 건너 딛고 제가끔 넘놀며 재잘거리며 새들을 쫓는다 서로 깃을 다듬어 주다 한 마리가 가지에 걸린 햇살을쪼아 먹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하고 나도 눈 시늉을 한다. 시나브로 입꼬리가슬몃슬몃올라가도록 내 마음도 몰랑몰랑 해진다. 순한 생명들의 열어 놓은 새털 같은 아침에 마냥 빠져들어 짝다리 짚은 다리에 쥐가 놀아 옴짝 못하고 서 있다. <하루를 새와> 1연에서 새와 나는 부지런한 새의 울음이 깨우는 관계로 이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취하기 때문에 새는 자기 생존 방법으로 일어났지만, 시인으로 다가온 의미는 잠을 깨우는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시에 2연에 따르면 새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아침의 동반자로 설정되어 사이좋은 새들과의 관계에 시인 또한 동화되어 새의 행동에 동반자로 변한다. 이러한 감염(感染)의 정서는 “몰랑몰랑”해지는 마음의 상태는 새로부터 받은 정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하면 새들이 열어놓은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망연함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림으로 걸린다. 새와 시인의 관계망은 “좋음”을 유지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보폭이 시작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는 모르나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끌어내는 논리를 굳이 설명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혹은 사물을 노래하는 자이지 해석을 하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요하여 누군가 떠올리기 맞춤한 풍경이다 갑자기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인정사정없이 톡톡 터지는 기억들은 입가에 한숨을 몰고 콧등이 매워지게 한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잊었다 여겼던 네가 살고 있었다. 멀고 먼 시간을 돌아 내게로 오는 사람 하나 있다. 하여 나는 기억의 불을 밝히려 눈 한 움큼 뭉쳐 설 등 하얗게매달아놓는다. <기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바람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바람한줄기 무심히 지나가고”로부터 의식의 창문이 열리고 이로부터 물길이 터진다. 그리하여 잊었던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존재의 이미지로 환생하면서 나와 관계의 과거가 문이 열리게 된다. 즉 그 사람의 모습을 인지할 때, 이 시의 모티브는 바람의 촉수가 일깨워주는 시발점으로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동하는 역할의 바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면의 세계를 깨우는 바람에 의해 외부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달자가 곧 바람의 힘이 될 때 시인은 비로소 길을 꺼내는 시작이 작품으로 창조의 길이 나타난 셈일 것이다. <4.에필로그> 그의 시 “어떤 그리움” “희망 사항” “기억을 찾아” “하루를 새와” 등을 보면 창조의 기법이액자(額子) 기법이있다. 풍경을 그리고 다시 그 속에서 풍경이 들어 있을 때, 감상의 묘미가 길을 넓힌다. 시는 꽃과 자연의 모습이 보이고 향기가 하늘로 오른다. 이는 연상의 꼬리가 따라 이어질 때 풍경을 만들고 다시 전체의 풍경이 아름다움을 생성하면서 여운(餘韻)을 남긴다. 이런 특징은 시적 강조로부각되는것이다. 이미지가 지배소가 되는 사물 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아름다움의 연출은 언어 감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모자이크로 짜 맞추는 미감은 성숙의 시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시로서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그리고 심중의 깊이를 풀어내는 기교는 곧 언어의 운용에서 탁월한 미래를 기대하는 요소가 되면서 창작의 시를 “액자 시” “사물 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높이 사고 싶다. 삶의 고귀한 가치가 빛으로 승화하는 상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펜을 내려놓는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이승섭 제 8집 시의 숲에 빠지다.] [이승섭의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이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을 노래하고 부딧치고, 느끼면서 사고한 상상력을 출현시켜 자기만의 물감으로 채우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스트의 에고와 숨기는 미학의 색채를 아름답게 꾸미려 하는 것이다. 나름의 평가는 자신으로 책임의 한계 속에 존재하기에 남의 허락을 받고 나온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시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시인 자신이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기에 자기 운명을 그리기 위해 표정을 만나고 순탄치 않은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에 존재하고 있기에 본인이 분칠하고 신명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 탐구 또한 철학이란 탐구로 용해될 때 시인이 펼치는 색채는 깊이와 넓이를 구비하는 단계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없는 시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언어의 불과한 것이다. 또한 시의 그릇은 삼라만상 우주와 자연현상 그리고 인간사의 모든 영역을 커버하는 도구로 현실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수필이나 소설, 산문 등이 맨 앞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것은 시처럼 삼라만상의 세계를 단 몇 단어로 그릴 수 없기에 시를 맨 위 위치에 놓아 정신의 지표로 삼는 것이라 할 것이다. {2. 시 표정 시법이란} A. 아우구스티누수는 “시는 악마의 술이다. 라는 말을 했다. 이 경우 “악마”라는 말은 좋은 이미지로 풀어내는 “뗄 수 없는 운”적인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마치 끝까지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이치처럼 시인의 삶에 시는 끝없이 그리고 다시 갈증으로 다가든 악마와 웃음과 같다는 말이다. 더불어 홍신남 시인의 불가분 요소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의탁할 곳 없는 세상에 누굴 믿으며 살겠나. 시만이 전부인데 의지할 곳 없는 세상 객 손이나 온다면 시 한수 넋두리 하고 싶은데 그저 영혼만이 가슴에 남아 그리운 시만 남았네. 이 노릇 어이할까? <시의 영혼> 중 인간은 늘 집중하는 정신과 분주한 일상을 사는 이들이 있다면 전자는 집중의 초점이 되는 사람이며 후자는 정신 줄기를 상실한 사람이라면 홍신남 시인은 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의탁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그의 고백은 진솔한 편이지만 변통이 되지 않는 그런 솔직 담백한 느낌이 들며 고백하는 심경이 “영혼만 가슴에 남아” 간절하게 애타는 마음을 표시하는 시인 듯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특성이 있으며 저마다 개성이 다르겠지만 시인은 독특한 그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성의 톡특함은 곧 시의 특성이 되고 이 특성 속에 시인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일정한 패턴으로 유형화 되는 것이다. 꽃 몽우리 열리는 소리 오, 너무 황홀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비에 젖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 꽃이여 세상 밝히는 아늑한 빛이여 눈부신 꽃향기 가슴에 품는다. <꽃의 향기> 중 홍신남 시인은 친숙하고 온화하며 따스함을 간직한 시인이다. 위의 시를 보면 일종 이미지 구축 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꽃의 등식이 성립되고 꽃은 향기로 상승의 이미지를 남긴다. 중심은 꽃이고 향의 이미지가 맺음을 담긴다. 시는 이미지의 발굴이고 그 이미지를 연결고리로 하여 시인의 사상을 혹은 삶의 표정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응의 예술인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의 넓이가 큰 사람은 소재의 이미지가 크고 보통의 일반 사람에게서는 시인의 정서만큼 따라오게 되기에 시는 곧 그사람을 표현하고 그사람만큼 쓰고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2 연에 “황홀” 6 연에 마무리에는 “향”으로 시각적인 이미지에 마지막 정서가 따스함을 연상하면서 고귀함을 부추긴다. 시라는 것은 순수와 담백한 정서가 꾸밈이 없을 때, 시적 가치가 드러난다. 일산의 소재가 튀느 법이 없고 자연스레 나오는 물줄기가 시원하고 구수하다. 마치 성숙을 넘어서는 안정감을 준다. 일상에 만족을 알면 그의 삶은 가치로 변화한다. 이를 일러 안분지족(安分知足)말로 처리 하지만 이런 지족의 마음을 갖고 사는 욕심없는 무심의 경우가 홍신남 시인이다. 내 무엇을 바랄 게 무엇인가. 더 가질 것이 무에 있는가. 바람도 산천도 구름도 어디로 떠나는지 여기서 이대로 가르쳐 주시게나 =중략= <삼라만상의 이치> 중 이 짧은 글의 시 1편에서 정서와 사상 그리고 느림의 미학으로 시를 그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더” “무엇을 바랄 게 없는” 생활의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가볍고 또 진중하면서도 무게가 넘치는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까. “여기서 이대로 가르쳐 주시게나”. 는 이렇게 무심의 시인인 듯하다. 왜냐하면 시는 욕심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을 내려놓고 무심의 경지로 신명의 정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 것이다. 그의 시 작품 <상상> <내자> <우주> <부자의 삶> <가화만사성> 등 너무도 많은 시를 일일이 논평은 어렵기에 간단하게 일부만 평한다. 어느 정도 그 속을 들여다보니 너무도 여유롭고 자유스럽고 무욕에서 나타나는 그런 시들이다. 편안하고 무심의 여정에서 시를 그리는 모습이 보이기에 너무나도 안정감과 장중함을 느낀다. 3. 에필로그 = 여정의 표정 시는 자연스런 유로(流路)일 때 감수성의 파문은 아름다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생활 속의 진솔함이 바탕을 이루는 요소가 되고, 이런 요소는 곧 정신의 줄기를 이어가는 모태가 된다. 시라는 것은 꾸미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로 진입하는 부드러움이고 여기서 언어의 압축에 따른 시어의 탄력이 생성되기에 홍신남은 계산되어지는 시가 아니라 자연스런 유추해서 그의 심성 기록이고 삶의 모습이 전체로 투영되는 하모니를 이룬다. 그는 시에 생애를 담는 오로지 시와 더불어, 시와 함께 보폭을 맞추는 우직하면서도 꾸준한 시심을 가꾸는 것 같다. 또한 그이 가족 사랑에 아담하고 따스한 양지에서 도란거리는 소리를 삶의 전부로 삼는 일상적인 가치에 헌신하는 모습이 담백하고 향기가 난다. 소시민의 생을 벗어나지 못한 이 땅의 부모요 지아비로서 작은 것들에 애정을 가치로 생각하는 사고에서 가족과 이웃에서 단란함일 일군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그의 시는 욕심없는 투명성의 정서를 시로 담아내는 자연스러움에서 아름다운 가락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그런 시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이 지향하는 느림의 미학에서 정서의 표정이 향기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다하지 못한 숙제를 내려놓은 듯하여 다소 아쉽지만 그 숙제를 시인 스스로 마침표 찍기를 고대하면서 내려놓는다. 2005.01.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집] [이승섭 시평 제 9집 무의식의 시]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 10집 무의식의 평행]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아가페의 변증법과 자기 표정】 『1. 자기 표정 그리기』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生)에 모두를 보여주는 압축성- 인간이 삶에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시의 재능이 있어야 하며 분출하는 욕구와 주관이 있어야만 가능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들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에 뒹구는 돌에도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이기 때문에 시적 장치를 만들고 신명을 다하여 여백을 주면서 의미의 다양성 창작의 결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때 시에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 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에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우주의 하나하나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에 따라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하냥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威儀)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를 가지고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에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에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과 탄식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지혜- 마하반야바라밀다–진리의 이름 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교실은 비워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에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을 하는 것이다.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구나 하고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이러한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에 정서 고백을 하고 내포하는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간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 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아니 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 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을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 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이심전심이 통하는 일종의 자기 암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알고 가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 되는 것이고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애너지의 이름이다.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이는 느낌이 필자만이 그럴 것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낳으신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삶의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이며 독자를 감동케 하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며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은 논리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은 선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에 숙고하고 사랑에 매달리는 일상의 독자에게는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 정신이 숨을 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닐지?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고 답을 내면서 논지를 끝내려 한다. 2025.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신간]베스트셀러 이승섭의 시평집 {무의식의 평행}]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물을 대면하고 그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에는 맹목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이고 공허한 메아리만 들릴 뿐이라면, 후자인 사람은 지식 혹은 지혜로서 분간하는 일로, 사물의 질서를 확립하는 명료함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세상 언저리를 배회하다 보면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더 많은 아우성과 목청 큰 발성으로 진리를 압도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나 이른바 악화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 s law)이 적용되고 후자는 은신 또는 겸손의 키 낮춤에서 존재조차 희미한 경우가 많다. 정치판이나 문학의 판이나 질서를 세우는 사람은 희소하고 오히려 악화(惡貨)가 세상을 점령하는 기세로 압도하는 경우는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문학은 마지막에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기에 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쓰고 또 쓰면서 자기만의 城을 구축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번 예를 들어 보겠다. 1920년대 김소월이나 한용운은 문단의 아웃 사이더였지만 긴 세월이 지난 결말은 이들이 문학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사실 오랜 시간의 언덕을 넘었을 때 비로소 찾아온 이름 자 명성이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건은 필연 현상이다. 무엇을 썼고 또 무슨 의미의 작품을 생산했고 그 가치는 보편성의 기준을 확립하였는가의 여부가 결정하는 일이지 단순하게 시간의 언덕을 넘었다 해서 결정되는 가치는 아닐 것이다. 요약으로 말한다면 의미의 질서 확립과 보편성의 기준 잣대는 문학 가치의 본질이라 보는 것이다. 이 둘의 기준으로 볼 때, 그 당시의 시절과 근본, 보편 타당성, 가치를 넘어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엄청나게 수원지(水源池)를 갖고 있는 노시인 진헌성 시인, 그는 필자 아버지의 같은 동년배로서 의학도로 출발하여 문학의 깊이에도 빠질 수 없는 시인으로 필자가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는 분이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도 과학적 기저를 두고 물리, 생물, 천문, 수락, 종교, 철학, 사상 등에서도 왕성하고 현란함이 요란하다. 그의 시집 잘 살고 갑니다-진헌성 지음, 진헌성 광주 진 내과 원장, 2년 만에 시 전집 제16권 펴내, 104, 5편, 수록 “아흔둘 인생 돌이켜 보면 어리석음의 반복” 등이 있다. 90세가 훨씬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의 명상, 과 종교 비판자이며 자유정신 가치를 구현하는 진정한 본질에 투철한 시인이 아닌가 한다. 광주출생이면서 시는 세상사 모든 그릇을 담는 것이라고- 심지어 주홍사의 천자문은 4연 250 귀의 고시라는 말을 대입한다면 양나라의 주홍사가 어떻게 우주의 일을 알았으며 육안으로 관찰했다 해서 오늘날의 지식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시인의 예지와 인간사의 윤리, 도덕, 등을 시로 구사하면서 광대한 우주 현상으로 좁히고 상상력의 정치성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진언성 시인은 위와 같다고 확신한다. 천년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겠고 현실 또한 냉엄한 비판을 쏟아붓는 철학자요, 비평가요, 과학자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우수한 상상력의 나래에서 나오는 가락을 눈여겨 살펴보기로 한다. 시는 우주의 운행과 질서의 현황과 꼬여있는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냉혹함과 치열함을 갖춘 노시인 - 아울러 휴머니티를 가슴에 내장한 불빛이 환히 보이는 이 땅의 시인이라 칭하고 싶다. 참고로 본 고는 연작시 627편 중 앞부분만 일부분 한정하여 시적 특색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기로 하겠다. 너무 방대한 연작시라 압축을 시켜 유사한 정신 가치의 궤적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2.정신의 건축순환은 무엇인지 시의 정신 순환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도를 나타낸다. 이 명제를 쓰는 이유이면서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려는 것처럼 시의 건축에 임무를 갖는 이치에 이른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의 조합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신 - 맹목의 정신이 아니라 질서를 균제미(均齊美)로 담아야 하고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 공 즉 생이라는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삼라만상의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거나 혹은 전체와 부분은 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사고, 즉 상관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와 생각하는 것도 모순에 휩싸일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입장에 자세히 관찰하는 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 심리학은 결국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만치의 거리 이만치의 거리는 상대적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 흰 지팡이 둘이서 가늣한 산비탈길서 큰 내쉼 짚고 서산마루 보란 듯이 먼저 간 고 새나무들 곧장 못 날고 옹기종기 않았고 ...(중략)... 내 모둠 숨 좀 맞들면 저만큼 명당치고 그만큼은 살겠거늘 오늘은 바랑 멘 체 이만 치 서 보랃자와. -『1.산 바라기』에서 시인은 가장 먼저 간 새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물기에 젖어있고 명상적인 문을 열어야 하는 명제를 숙고하는 인상을 남긴다. “나”와 “지팡이”는 동격으로 나이의 깊이를 헤아리는 “이만치”로의 현재라면 “산마루”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저만치”의 거리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생성한다. 여기서 이만큼의 거리는 속세의 가파르고 숨찬 이미지가 저만치의 먼 거리와는 명상에서 서로 닿아야 하는 언젠가의 숙업(宿業)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돌의 무게가 삶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면 피안(彼岸)의 저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야 할 곳으로의 막연한 노년의 숨찬 호흡이 “모둠 숨”으로 “보라자” 와 머무는 뜻이 삶의 망연함에 해답을 찾지 못한 듯, 마치 두보의 시 『박계행』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사는 일은 항상 해답이 없는 미망의 벌판을 헤매는 일이기에- 바위 굴러 둘로 나눠지고 다시 굴러 넷으로 쪼개지고 쪼개지고 빠개지다 잔모래 돼 모래 엉켜 뭉개 바스러져 고루 가루 떡 됨이 논밭이며 이 조화의 으뜸이 곡식이요 이 곡식의 우듬지가 사람이다. 『고체와 액체』중에서 다시 ‘있고’의 ‘없고’의 사상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우주 삼라만상은 인간과 자연의 고체와 액체의 도정(道程)을 되풀이되면서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다. 형체가 있고 다시 그 형체는 사라지고 순환하면서 본질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 도정에 존재의 어느 현상이 찰나 ‘있음’을 형성되고 반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바위가 모래, 그리고 모래가 흙, 다시 흙에서 논밭 그리고 곡식- 곡식의 끝은 인간이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우주관은 인간 중심을 엿보게 된다. 멸(滅) 생(生)이 하나의 줄기에서 나오고 다시 그 반대의 과정을 되풀이할 때 연기론의 근거는 불가 철학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없음’을 중단한다면/있음은 더욱 중 해처럼 인간은 순환의 도정에서 조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행동에 대입한다면 우리는 유추의 해석이 끝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3.시적 사상의 표정 과학은 1+1=대답에 묶여있다. 그러나 시는 1+1=0, 1, 2, 3 등, 하나의 의미에 국한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예를 들자면 ambiguity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과학은 정확한 인식의 바탕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와 과학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일찍이 l. A. Richards가 설파한 것처럼 시와 과학은 밀접한 상관을 유지한다. 상상력을 증명한다면 시가 되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시는 과학 정신을 이해하는 길에 있다. 이는 과학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관념의 포로에서가 아니라 인식의 확실성을 터득하고 시와 접목의 수순을 밟아 나가는 정신도(情神圖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시가 느슨하거나 설왕설래의 무질서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이유는 내포된 시적 의미의 치밀성에 있기에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논리적인 구축력을 가질 때 비로소 시적 완성도는 높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질서에서는 짜증이 나온다면 엄정한 질서의 배열에서는 찬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공룡이라는 단어는 1841년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존 필립스는 고생대에 식물이 물에 오르고 다음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순서였다고 창조설에 반하는 사람은 화형으로 입을 틀어막었던 가톨릭 교회였느니 자연 과학은 지금껏도하나님 나라의 장애물! 『생물 연대 차이』중에서 종교와 과학은 때로 상반된 표정으로 대척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는 항상 절대의 공식에 있어야 하고 과학은 새로운 발견을 위해 땀을 흘리는 점에서 종교의 원리에 반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진자의 등시성이나 관성법칙 발견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이유로 협박당한 –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의 변명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지동설의 포기였다면, 스콜라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자인 지오다노 브르노(Bruno)는 그의 신념을 사수하기 위해 분형으로 16세기의 언덕은 넘었지만 결국 옳은 것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의 편견은 지금도 사랑의 전파보다 더욱 엄정한 틀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형해(形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느님’ 나라의 장애물이 ‘자연 과학’이라는 시인의 판단은 종교가 구원의 메시지를 휘날리지 못하는 이유- 아집과 편견 독선의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에 비판의 기세가 보인다. 이는 1513년 교황 레오 10세의 면벌부 판매에 95 Theses의 항의문으로 번진 개혁의 불길이 1517년 사건이었다면 결국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찾아간 신대륙 이주의 필그림이 시사하는 종교의 함정에 대한 변화가 오늘날이라고 대입할 수 없는 명제는 아닐 것이다. 이른바 종교의 창조설과 과학의 대립은 결국 19세기의 유물론에서 물질세계와 종교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혼동하는 기계론의 함정에 빠지는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T. H. Hulme의 예술 논에서 말한 무기적 세계(수학과, 물리학)와 유기적 세계(생물학, 심리학, 역사학)와 가치의 세계(윤리, 종교)의 세 영역 중 외부가 물리학의 영역이라면, 내부가 종교와 윤리학의 영역, 그리고 중간을 생명의 영역인바, 세 부분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이면서 서로 연락이 없는 비 연연 속의 원리(Rrinciple of Discontinuity)에 의해 지배된다는 철학 사상을 설파했다면, 종교는 언제나 모든 세계를 지배하려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 등이 현대에 와서는 더욱 고립된 섬이 되는 현상이 종교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노시인의 사색은 무한의 변경을 헤매는 나그네요, 탐구의 불빛에 영일이 없는 서치라이트를 켜고 파수꾼의 임무를 자인하는 것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노시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들어서는 손에겐 제 볼을 마구 문질러대다가도 뒤돌아서 가는 손의 뒷다리를 소리 없이 무는 개의 전략에는 안 내둘릴 수 없지 잉. 『천안함』중에서 국제 정세의 이해나 긴박감도 없고 오로지 반대만 하는 일이 직업인 듯한 신부나 스님에는 이젠 식상해 차라리 북에 가서 살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청개구리를 넘어 없어도 될 국민이 아닌 인간들이라 보기 때문이다. 천성산의 도룡용은 여전히 왕성히 산란하는데 왜 그때 그 스님은 잘못이라는 고백이 없는 것인가? 으레 반대- 정치라고 잘만하면 되는 그런 설득도 있어야겠지만, 아집과 편협해서 이해와 타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다. 점점 이상한 나라 그저 상대를 반대해야만 하는 그런 몰염치 인간들- 지식인들이라는 교수치고 어리석지 않은 경우는 흔히 본다. 아집에 잡혀있는 판단이 고집과 아집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자기 명령에 끌려가는 일로 사리 판단이 마비되었기에 사실조차도 의심으로 궤변을 늘어놓고 편히 살아가는 자는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일과 진배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현실을 수없이 지나치고 있다는 자성이 앞서야 하지 않겠는가? 미친개- 소 대가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이런 현실 - 북한 전략이란 자명하지 않겠는가? 햇빛에 망령을 우려로 바라본 시인은 이젠 달빛을 염려하는 근심 속에서는 얼마나 심각한 우리의 잘못된 자화상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여전히 햇빛 꼬리를 잡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현실에 정말 우울하면서 서글퍼진다. 더 이상 얘기한들 무슨 소용인가? 정부가 바뀌어졌으니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할 운명적 존재라 보기에 조속히 정부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은 있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꼭 - 4. 에필로그 大韓民國은 지금 반만년 역사에서 이처럼 잘살고 민주라는 말이 요란함과 아우성 속에서도 그런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언제 있었는지 자못 신기하다. 힘겨운 끼니를 이어가면서 나름대로 배고픔을 참으며 잘살아 보자는 신념 하나로 지금의 국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은 50대 60대 이상 국민이라면 누구도 부정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주변 강대국과 동남아 어느 나라를 보아도 개발도상국을 지나 세계 경제 6위로 올라선 대한민국이 다시 체제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건국 시기에 체제의 전환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내세워 한미 동맹과 자유 민주주의 경제로서 우뚝 선 현재에 또다시 좌우 이념전쟁을 하고 있다는 현실에 필자는 안타까움을 지나 자유 민주주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도약할 수 있는 전진기지 초석을 다져야 한다고 것이다. 현재 대통령이 고유한 권한인 비상계엄을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무소불위인 선관위를 조사하기 위한 苦肉之策으로 비상계엄 한 것을 가지고 의회 다수라 하여 내란죄로 몰아 이렇게 국가를 흔들고 갈라 치기로 인하여 정쟁을 일삼는 것은 의회 폭거라 할 수밖에 없다. 분명 대한민국은 대통령제가 맞다. 공정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극우와 극좌를 떠나서 상식으로 임한다 해도 그 정신 가치는 인민미주주의가 아닌 모든 국민은 자유민주의 가치 아래서 자유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학의 가치 정신을 높이 올려야 할 때라 굳게 믿으며 이념으로 집합된 모순이 하루라도 빨리 진정되어 원리로 돌아오는 가치의 중요를 알아차리고 정상적 수순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물론 혼돈의 시기는 분명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서서히 20, 30 세대까지 옮겨가고 있다. 시대전환을 꼭 이루어서 5천년의 역사를 지킨 국민이 있기에 자유민주주의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밑으며 남겨둔 마지막 수순을마칠까 한다. 사실 삼삼한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목표라면 깜깜한 시는 아직도 부족을 의미하는 뜻으로 다가올 때, 시에 정진하는 노시인의 모습은 경건하다고 해야겠다. 시는 항상 시인과 갈증을 유발하는 거리만큼에서 손짓할 때, 시인의 상상력은 왕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엄청난 분량으로 놀라게 하였지만 시로 살고 시로 살아온 일상이 보이는 것은 부기(附記)된 창작의 양은 실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노시인의 시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당연 사지만 몇 날을 조감한들 할 수 있으랴- 겉만 들여다보아만 하는 것이 어쩌면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시의 대면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으려 한다. 2025.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 무의식의 평행] [무의 오로라] 깊[사상 가치 형성과 표현의 깊이]이]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生)에 모두를 보여주는 압축성- 인간이 삶에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시의 재능이 있어야 하며 분출하는 욕구와 주관이 있어야만 가능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들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에 뒹구는 돌에도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이기 때문에 시적 장치를 만들고 신명을 다하여 여백을 주면서 의미의 다양성 창작의 결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때 시에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 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에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우주의 하나하나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에 따라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하냥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威儀)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를 가지고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에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에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과 탄식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지혜- 마하반야바라밀다–진리의 이름 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교실은 비워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에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을 하는 것이다.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구나 하고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이러한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에 정서 고백을 하고 내포하는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간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 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아니 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 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을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 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이심전심이 통하는 일종의 자기 암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알고 가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 되는 것이고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애너지의 이름이다.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이는 느낌이 필자만이 그럴 것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낳으신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삶의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이며 독자를 감동케 하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며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은 논리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은 선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에 숙고하고 사랑에 매달리는 일상의 독자에게는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 정신이 숨을 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닐지?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고 답을 내면서 논지를 끝내려 한다. 2024.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저자의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 [무의기의 오로라]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말하는 시 사람이란 말로써 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 한 편의 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무의식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왜냐하면 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함께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더 아파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그러나 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필 때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 지는데>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 시화되었으며, 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더 아파’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 속을 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그리움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긴밀도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고 있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같을 것이다. 겉으로 같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 놀랄 일은 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유종필은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속 몸짓으로 하나일 것 싶은데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 맨가슴에 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발동하는 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이 나게 하는 인자(因子)는 늘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 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일 것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이 된다. 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그렇기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와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 날 때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 닮은 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 열린 마음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면 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자아(ego)찾기 나를 찾는 것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 종점이라고들 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놓았는데 ... 중략...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 뒤집어쓴 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 감동으로의 호소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 꿈 속에 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 여정?>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오욕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물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고 다만 날갯짓이, 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의 삶에 서 있는 듯하도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 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가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 오는 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 시인>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에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 완료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 마무리해줄 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4.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