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평

[회상의 평행]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은 세월의 강을 지나면서 나이를 셈하지만 시는 나이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존재의 형상을 말하는 길을 제시하고 감동의 펄럭임을 항상 여일(如一)하게 설득을 한다. 만약 시가 나이에 비례하여 무게를 갖는다면 태어나 수염이 있는 염소처럼 언제나 할아버지의 역할을 할 것이지만 시는 결코 나이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만 원숙(圓熟)이라는 무게는 연륜과 깊은 상관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젊은 시인들은 패기에 있어, 이것저것 널어놓은 빨래처럼 펄럭이지만, 이미지 연결에서 질서의 시를 갖는 일은 대체로 드물다. 이는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 정당성을 갖는 이론이 될 것이다.     무르익었다는 말은 과일의 원숙성을 의미할 것이고, 인간에게는 품성의 높이와 인격의 향기 그리고 지성의 엄정성이 녹아들어 고매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깊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깊은 맛깔이 담긴다. 맛이라는 추상 명사를 굳이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멋과 맛이 상통하는 그런 이미지가 성립된다. 하서(河書 ) 김시철 선생은 그런 수식사를 입히는 옷이 정확할 것 같다. 제18 시집 [나의 외갓집]의 일람(一覽)에는 그런 맛과 멋이 품성으로 직결되는 통로를 갖고 있어 귀감(龜鑑)의 의상이 된다.   오늘날 시가 넘치고 쏟아지는 것도 잡탕으로 만드는 섞어찌개 같은 詩 아닌 시들이 난삽의 통로가 붐비는 시단에서 하서 선생의 시는 청량감을 주는 시원함이 삽상하다. 작고하셨지만 함북 성진, 태생으로 1/후퇴 때 월남하여 부부 기자로 활동 1956년 임금 출간을 계기로 이산 김광섭에 의해 문단 등단해서 2023년 5월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하서 선생의 깊이가 넘치고 언어가 이끄는 경지를 경청하는 순서대로 직핍(直逼)해보기로 한다.     2. 숲에서 들리는 소리의 시   시는 시인에게서 나오는 의식의 숲을 바라보는 일이고 거기서 들리는 여러 가지의 소리 - 바람과 녹음과 물살의 결합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한 임지들이 엮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복합적인 풍경을 만드는 의식의 풍경화일 것이다. 풍경화에는 다양함과 일관성이 담겨 있어야한다. 첫 번째는 일정한 프레임의 경치 속에서 한가지의 물상만 나열되었을 때는 단조로움을 가져올 것이라면, 일관성은 일정한 패턴의 기법이 담길 때, 비로소 화려한 경치가 수용된 그림으로 완성된다. 이 두 가지의 모티브는 단숨에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체험이 녹아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원만한 조합으로서의 물감이 배역을 감당하면서 조화미를 연출한다. 이는 시인에게 요구되는 감수성의 결합에서 하나로 모은 유일성은 다른 말로 바꾸면 관태(sensuality)fk 부르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한가지의 감수성으로 엮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 둘 이상의 감수성이 결합하여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진다는 과정에서 시는 곧 감수성이 용해에서 시인은 신명을 도하는 기술자일 것이다.   지도자론과 전통론 또는 독신에서 오는 고독의 물길 그리고 미수의 나이에 천진성과 지난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추억들이 엮어져 제18집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인자들이 따로 노는 모임이 아니라 다양하게 결합하는 양상을 눈여겨보게 된다.   1) 지도자의 정신     하서 선생의 제18집 시집에서 많이 등장하는 관심을 본다면 나라의 모양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개꼴”이라는 판단이 앞장서며 비난의 과녁을 항하고 전체 사회 단위 구성을 전체의 구성원으로 일정한 임무를 수행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은 전체 중 일부이면서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절대 요소라는 핵심을 꼬집는다. 그러나 나라라는 단위는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파도로 밀려주기 때문에, 나라의 모양은 개인과 뗄 수 없는 상관을 유추하게 된다. 아주 쉬운 비유가 <3층 논>이라 보고 있다.       예컨대 3층 건물만 해도 1층은 2, 3층을 힘겹게 짊어져야 하고 3층은 2층에 업혀서 산다. 1층은 이 2층의 하중으로 막중한 이들 기둥이요 어머니인 셈이다. 1층을 밟고 거쳐야만 하는 2층 1, 2층을 밟고 오르는 3층의 존재 3층은 휘휘 아래를 두루 굽어볼 수 있으나 1층이 겪어내는 힘겨운 노고는 실로 크다. 1,2 층과의 소통 없이는 무용지물인 3층은 아랫것의 힘겨움을 살펴야만 마땅한 윗자리요 윗것이 갖추어야 할 소임이다. 이를테면 아랫것이 없는 윗것은 없으니까.   <3층 논>   너무 이해가 쉬우며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시는 비유에서 의미를 생산하고 그 의미는 곧 감동을 잉태하는 모태가 될 때, 시의 성공은 담보되기 때문이다. 3층은 윗것 즉 지도자라면 아랫것 1층은 백성이거나 부하라는 명칭에 부합된다, 할 수 있겠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초가 튼튼하면 비로소 위로 올라가는 층수가 안전함을 유지한다. 이 상식은 1층이 없는 2층이나 3, 4, 5의 높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만들어질 때, 비극을 만나는 길이 열린다. 이른바 유행인 필로터 건물이 지진에 금시 무너지는 상징은 곧 기초가 없는즉, 이익에 도취되어 기초를 허술하게 만든 결과물로 무너지는 비극이 오는 것이다. 이는 <용비어천가> 2장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에 꽃 좋고 열매 많나니”의 비유와 일치한다.     세상살이란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정리가 가능하다. 뿌리가 깊으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그 의지의 결과에 열매가 많다는 비유에는 매우 생생한 사실로 통한다. 이는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기초의 문제는 국가의 운영이나 회사 등등 매일반일 것이다. 잘난 사람은 여럿을 한데 묶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는 곧 대중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책임을 갖는 지도자이다. 그렇다면 김시철 선생이 3층 논을 쓴 의도는 확실해진다. 상식이 없는 지도자, 머리가 휑한 지도자, 자기 주관이 없는 지도자, 이것들이 소리 지르고 악다구니 연출을 감행하는 오늘의 판세는 바로 가슴을 겨누는 비수로 날아갈 것이다.   모두 자기 무리끼리 모든 전반적 상황을 결정하고 감행하며 북한에 속을 빼주고도 눈치 보기 줏대 없는 실상은 줏대 없는 신념, 편 가르기 등 사상의 각본 드라마 연출이다. 자신들의 패거리들끼리 의지하고 믿어 결국은 파탄의 길로 질주하는 것이 몰락의 풍경인 듯 하다. 편견과 아집만으로 중심 잃은 몰상식에 무리일 뿐이다. 왜냐하면 백성의 의미인 2층과 1층은 중구삭금의 신라적 비유와 같기 때문이다. 여론의 두려움이고 중구 즉 백성의 입은 쇠도 녹인다는 말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아주 무서운 말이다. 1. 2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무너지는 일은 예약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패거리들의 앞날은 이 점에서 민족사에 아픔과 연결되는 죄악이기에 -     “개”가 붙으면 천박함을 의미하고 세사(世事)에 “개”가 수식으로 오면 엉망진창을 뜻한다. 오늘의 모양을 개판이라고 정의하면 이성이 없고 패거리 당의 무리가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정의 독점주의에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못된 놈 나쁜 놈을 일러 우리는 개자식이라 합니다   헌데 요즘은 가는 곳, 들르는 곳마다 널려있는 개자식들이 -중략- 믿음은 길을 잃고 불신이 불신을 끼고 살아가는 나라 꼴 누굴 믿고 우린 살아야 합니까   <개판>에서   정의는 이미 개판 속에서 길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지도자가 줏대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끼리끼리 노는 정치 속에서 미래의 비젼 없는 무모한 눈치꾼이 군림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 지금은 어떤가? 대답은 “개판”이라는 용어에 녹아있다. “믿음의 길을 잃고”의 선언은 무서운 진단이다. 위정자는 믿음으로 하늘을 삼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또 “불신이 불신을 끼고 살아가는” 나라 꼴에 탄식 -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갈까?”라는 의문에 비극적인 인식이 자리한다. 재판관도 그렇고 절망에 하느님을 찾지만, 하늘은 결코 인간 세상을 어쩌지 못하는 속수무책이 전부일 뿐이다. “권력은 썩을 대로 썩었다 하고/ 나라 꼴은 개판/지랄 같은 환경에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진단이 슬픔을 위로할 길이 없다. 역대 대통령이 쇠고랑으로 이른바 적폐라는 미명으로 휘젓는 장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목적지가 없는 불안의 연속 편이다.     오래 살수록 털면 드러나는 먼지   법은 상식이요 상식이 눈감지 않는 한 인간의 욕망은 한시도 자유롭지 않다.   <죄값론>에서     [법은 상식이다.]는 화해와 용서에 기반한 작용이다. 그물처럼 얽혀 있는 법의 오랏줄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령 자동차를 몰고 길에 서면, 시속 60km에서 단 1km이라도 벗어나면 이미 법의 그물에 걸리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도 용돈을 갖기 위해 마누라의 눈을 피하는 수법은 오래된 일이듯이 얼마의 상식은 용서와 화해로 넘어가야 할 명제 - 국가 경영의 큰 그릇의 운용은 법의 잣대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털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는 우리네 속언은 결국 부메랑이 될 가능성은 복수의 법칙으로 얼마든지 손오공의 여의봉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되풀이 복수가 죗값론의 핵심인 듯하다. 모든 대통령은 결국 털면 먼지가 나는 일이 슬픈 상식이 되어, 자살하고 감옥 가고 또 감옥 가고의 연속이 이젠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지루하다. 모두 자기 합리의 이론으로 무장하는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법의 적용은 정당해야 한다. 이 잣대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을 때, 합리성 또한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적용 목록에서 위와 아래가 모두 어설픈 연극으로 영일이 없다.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허무로 다가올 일이 넓은 줄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애당초 자유와 민주주의 진 맛을 모르는 저쪽과 자유가 넘쳐나 자유를 모르는 이쪽 이 두 어간에서   휴전선은 편할 날이 없고 민초(民草)들만 골병 진전입니다.   <이쪽과 저쪽>에서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로 갈라졌다. 파스칼이 말한 이쪽과 저쪽이 오로지 강으로 갈라진 이유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을 욕해야 하고 또 저쪽은 반대로 이쪽을 욕해야 백성은 산다. 오로지 강을 사이에 두었다는 명분 – 슬픈 일이다. 그러나 국가에는 분명한 잣대가 있어야 한다. 분명 저쪽은 자유가 없는 감옥이고 심지어 고모부까지 기관총으로 가루를 내는 무도한 집단에 비위를 맞추는 놀음은 ‘민초’의 골병을 넘어, 비극이다. 지금 그런 진행형은 연속극을 지루하게 이끌고 있다. 결과는 너무 뻔한 일임을 오로지 모르는 집단 무리는 지금 성업(盛業) 중이다. 회색빛으로는 어떤 명분이든 살 수 없다.     2) 홀로 사는 일[아웃사이더 {outsider}]     사회성의 혼자와 홀로는 다른 것이다. 영어로 alone이지만 전자는 둘이 아닌 혼자이고 후자는 쓸쓸하게 혼자라는 어의로 구분된다. 김시철 선생은 혼자 산다고 한다. 평창의 적당한 높이에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정말 혼자 산다. 쓸쓸하다는 뉘앙스는 없어도 감추고 외로움을 참는 인내도 내면에 담겨있다고 한다. 만약 외롭다느니 고독하다 느니가 지적으로 억제를 받지 않았다면 질 축 거리는 시의 표정이 될 것이지만 억제에서 언어 탄력을 생성하는 노력의 타입이다. 참된 시인의 면모는 여기서 발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감정의 노출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고 탄력으로 생산하는 선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정신의 고귀한 의상을 입어 존경을 획득하는 길을 만든다.   홀로 산다는 것은 온갖 잡사(雜事) 홀로 짊어지고 책임지는 일이다. - 중략 - 달은 언제나 곱빼기로 더 보이고 처마 밑에 늘어 붙은 밤은 빚쟁이가 되어 아침을 막아선다.   <독신 산고>에서   1연과 5연을 옮겼다. 6연은 ‘악산이다.’ 7연 ‘한낱 허공이다.’ 8연은 가슴 속 ‘허기다’ 9연 ‘술잔을 비워내는 노릇이다.’ 10연 ‘두레박이다.’ 그리고 11연은 ‘미지수의 투성인 홀로는/뭐냐 해도 홀로 먹는 밥맛이다로 마무리 된다. 시의 전개는 결국, 홀로 먹는 밥맛이다. 로 모아든다. 혼자 먹는 밥맛을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답안일 것이지만 아마도 소태맛일 것이고 이런 일이 이어지는 일이, 되풀이가 될 때, 슬픈 자화상이 가슴을 쥐어짤 것이다.     오래 살면 항상 가야 할 마지막을 추정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를 移徙))라 부르면, 세상의 먼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마지막 작별의 이미지가 보인다고 한다.   이제, 그만 미련 없이 모두 다 싸들고 이사할 일만 남았다 하네   한 생애 다 주워 담고 짊어지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사할 일만 남았다 하네   <미수를 넘기다 보니 1. 이사>에서   경험의 원숙이나 판단의 문제 앞에 지난 세월이 어지럽게 흐린 안개로 출몰한다. 이 신호는 이제 떠남을 재촉하는 뜻으로 받아드리면 이사는 곧 세상을 하직하는 개념에 운명적인 뜻이 얽힌다. 종착역이고 그 역에서 기차는 다시 떠나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 서글픈 뉘앙스가 다가든다. 필연을 꺾을 수는 없다. 다만 순리에 따라 길을 나서면 그것이 담담한 정리의 일환일 때, 그 뒷모습이 깨끗하면 된다. 이때 그의 시는 뒤에 그림자로 따라가는 행운이면 더욱 아름다운 노년의 발길이라 칭찬할 것이다. 김시철 선생의 행운은 그가 쓴 시가 말하는 가치일 때, 나이는 곧 원숙과 온화 그리고 맑은 호수에 비치는 환영이 될 것으로 믿는다.     3. 에필로그 길(이별은 소식 없이 찾아올지라도)   판단이 늙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니라 젊은이와 같다고 한다. 육신만 노쇠했을 뿐 정신이 깨끗하고 청담(淸潭)한 모습에는 인간의 고귀한 인격이 담길 때, 나이는 더욱 원숙한 그리고 온후한 덕망에 이르게 된다. 김시철 선생은 천진하고 때로는 날카롭기가 비수와 같다. 범접하기 어려운 그의 내면에 담겨진 시선의 정확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정도(正道)의 길에서 질정(叱正)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는 지도자의 덕목이 바른길로 갈 때, 나라의 기틀이 옳게 선다는 이치에 강조되는 긍정의 끄덕임이 옳다. 또한 전통의 줄기를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판단은 미래와 깊은 상관을 강조한다. 추억은 회고적이고 아픔의 이별이 예상되는 다소 처연함으로 다가오지만 나이의 깊이에서 나오는 숙명적인 탄식으로 들으면 이해의 폭은 넓어질 것이라 믿는다. 작고(作故) 한지 3년이나 지났지만 선생의 이미지와 정도를 바라보고 질정을 들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감히 짧은 선생의 길을 논하였다. 우리의 길은 언제나 정도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배우면서 질정을 들으면서 길을 가야 깊이가 넓어지는 것이라 자위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저서]    

[창조의 이상과 창백의 표정] 24

  [한가한 필자 호수에서] 창조의 기교와 표정 만나기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눈으로 보고 오는 것인지 아니면 구불구불한 길에서 오는지 그것도 아니면 직선의 고속도로 길에서 오는 것인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 보일 것도 같고, 올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런 대답은 불가능의 안갯속에서 모호를 헤매는 일로 끝이 난다. 시인들 누구나 자기 시의 행로를 의문으로 설정한 경우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또는 어느 순간에 시심의 발동이 시작하고 얼마 동안 의식의 중심 안에서 느닷없이 사라지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고심하고 곰곰이 않아 정좌를 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고뇌의 길을 한 번도 갖지 않았다면 그 시인은 쓰는 일에만 머물고 말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를 알고 또는 정립하면서 진로를 설정하는 행로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무작정 길을 가는 나그네는 초라한 행로의 비틀거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원래 고민의 산물일 뿐 아니라 때로는 환희의 풍선을 타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표정을 관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소설과는 달리 의식으로 엮어가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인의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의식에서 충만함이 들어온,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의식의 명확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퍼의 섬세함도 구분되어야 하는 그런 알 길이 없는 단애의 벼랑에서 건져 올리는 시심도 있고 또는 평온하고 느긋한 행복 속에서 향기를 피우면서 나오기 때문에, 시는 예측 불허의 심연에서 확실히 만나는 아울러 정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것이다. 어떻든 시는 순간보다 빠른 찰나를 가로지르는 섬광 같은 이름이라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토마스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즉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예술은 선에 가깝고 친절성에 뿌리가 있으며 화합을 위해 위할 뿐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시가 거창한 목표에 헌신하는 것도, 아니며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자의 독백도 아니다. 생기와 발랄, 위해서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로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목적이 뚜렷하고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다. 언제나 시인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게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2.그렇다면 몇 가지 조건이 수반된다.   관(觀 )이란 “보다” 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 있다. 누가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확고할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조합일 뿐 이리저리 무엇을 시로 표현하려는 목적성에 대한 헷갈림이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엔 비록 짧은 응축의 경결함의 언어에 의미의 숲을 이룩할 수 있게 된다. 무작정 길을 걷는 나그네와 목표를 정하고 길을 가는 비유와 다름이 없다는 뜻에서 대부분의 시에 함정은 단순히 언어의 유희에 빠진 나그네들이 많다. 왜 시를 쓰는가. 그리고 무엇을 의미로 구축하는가의 대한 자문자답이 있고 난 후에 대상을 관찰하고 투시하고 난 뒤에 문자로 의식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깊어지면 과거 지향형으로 바뀌고 앞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과거 추수의 길을 확대하는 경향이 다분하여진다. 그러나 지나치면 나태의 그물에 걸리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개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 고향에 돌아와 혼자 여기 서 있네.   신중신 <귀향 시초> 중   어린 시절 기억이 깊은 나이임에도 기억에서 여전히 흔적에 매몰된 시심이 아쉬움으로 나타난다. 넓고 컸던 골목이 기껏 스무 걸음 남짓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파릇파릇하게 고개를 쳐들었네. 의 현상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시의 중심은 “혼자 여기 서 있네”에 모아들고 지금은 “목이 쉰 노래”를 허공에 빛바랜 꿈의 파편으로 회상의 길목을 지키는 오늘의 모습이 처연해 보인다. 깊음이 깊어지면 허무가 되고, 어느 것도, 구분하기 어려운 추상의 숲을, 소요하는 귀향의 꿈 – 노년의 신중신 시인은 소설가 겸 시인이며 거창에서 태어나 서라벌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개인적으로 현재 84세이니 어른으로 모시기는 하지만 시는 진솔함의 문법이라고 외친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3.신명과 혼   하늘과 땅은 신이 만들었다고 하나 신령이라는 의미가 바로 신명, 또는 시인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자주 묻는다면 아주 쉽게 신명이 든 사람 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고 개인적으로 생각된다. 조금 더 풀이한다면 시인은 산문이나 소설가와는 달리 신들린 집중력을 가질 때, 시의 모습은 잠시 스치고 신기루처럼 왔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든다면 무당들이 신이 절정에 올라와 있을 때는 맨발로 날카로운 작두에 올라 춤을 추고 굿판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명이 아니고서는, 절대 해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 언젠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무당이 신이 오르고 있을 때, 전기를 통해 전류를 흐르게 하도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실험을 하였다는 T/V로 본 기억이 난다.   과학으로도 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관습에 젖은 일반 평범한 사람들은 불가능이라 간단히 정리할 것이지만 그러나 타이타닉 호는 “보이는 얼음”에 충돌하여 비극을 맞은 것이다. 얼음덩어리는 70%가 물속에 있다. 이를 관과 했기에 충돌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시인의 의식은 바로 무의식의 깊이를 발굴하는 사람들이 시인일 것이다. 물론 산문을 쓰는 사람들은 리얼리티 하게 그리지만, 보이는 것을, 얼마나 실감 나게 묘사하는 방법을 기술하는 작가와 시인은 이러한 점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논리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후 어떻게 와 무엇을 에 목적의식을 두면서 산다. 전자는 방법의 무게요 후자는 대상에 대한 구분법이 될 것이다. 시를 쓰는 일도 이런 구분의 명확성이 곧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벗어나는 첩경일 것이다.   더러는 비비고 핥기도 하면서 꼬리도 만들어 흔들어 보는 것이다 세상 한번 편하게 살아보는 것이다   최영욱 <달콤한 상상> 중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의 차이는 선택의 길뿐이다. 그러나 중심 잡기의 생은 기준점이 필요하고 여기서 개성은 더욱 필요의 항목이 될 것이다. 비유 – 개처럼 핥고, 고개 숙이고, 유순하게 사는 도처춘풍(到處春風)의 인생을 일러 개 같은 놈이라 칭하면 욕이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없을 때 받는 통칭의 슬픔이며 슬픔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살아 명예를 얻으면 그 가치는 짧고, 중심 잡고 살아가면 명성이 따라오는 차이가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의 지조는 당시는 고관대작의 삶이었지만 그 자손들은 숨기고 감추는 일이라면 어떻게 생은 필요에의 확실한 목록이다. “달콤”의 망상은 쓰디쓴 아픔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역설의 기교가 시인의 의도이다.   4.일체화(ldentity)   시의 가장 중요한 목록은 대상과 시인의 의도가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만드는 일이다. 표현하려는 사물 – 대상을 어떻게 의도에 충실하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의 여지는 시적인 기교를 넘어 재능으로 귀환한다. 언어의 기교이지만 이는 정신의 기교를 뜻하고 목적성의 하나 되기라는 점에서 일체화는 동일성의 원리가 된다. 이를 위해서 시는 기교와 정신적인 면을, 필요로 한다. 언어, 리듬, 이미지, 상징, 시제, 비유의 모두를 일러 토운(tone)에 충실할 때, 시의 맛깔은 살아나기 때문이다. 내 신발은 젖었지만, 그림자는 젖지 않았다. 그림자가 내게 자유를 명령했다. 몸살이 시작된다. 아직 이른 봄, 꽃나무처럼   최종월 <그림자가, 명령했다> 중   주인공인 나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면서 산다. 이 녀석을 떼어버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며도 – 벼랑에서 밀어도, 어둠에 갇혀도 다시 살아나는 숙명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존재의 형상으로 깨닫고 바라볼 때에 새로운 자각의 길이 존재 문제로 부각된다. 여기서 무심히 사는 사람과 시인의 통찰이 주는 삶의 무게는 완전히 길을 달리한다. 시인에게 필요한 사물 이면의 관찰기는 곧 시의 신선함을 부추기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5.신념(信念)   시와 신념은 불가분의 개성으로 “무엇”에 해당될 것이다. 시를 싣는 모든 잡지에서 공통적인 현상은 음풍농월의 그저 그 풍경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을 것이지만 자기 선전의 광고문을 작성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직결될 것이다. 감상의 덪, 이미지 사용의 장식성, 관념이나 의도의 지나침, 모순이나 충돌이 내포된, 지나치게 종교적인 강조는 안 좋은 시의 표본이라는 지적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요점이다. 미상불 시의 신념은 자기중심을 세우는 일이라 시의 표정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관찰하는 요인이 된다. 눈물 씨앗 뿌려도 아직도 통일의 꽃 굳은 땅속에서 몸부림치며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숙영 <그러나, 아직도> 중   한때 민중 타령의 개구리 떼의 놀음이 문단의 중심을 장악한 것이, 80년대를 풍미했다. 그 이후 통일의 문제는 유행 목처럼 아우성이다. 목적의식이 공고하지 못한 유행의 결론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아직도”에서 분단의 아픔은 진행형이고 언제 꽃으로 피어날 것인가는 요원하다. 필자는 일찍이 북한 무학은 선전 선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체제의 선전 도구일 때 광고 문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상업성에 혹은 노랑 매스컴에 휘둘리는 지경이 아픔이 엄존한다. 요컨대 문학성의 가치에 방점을 찍을 때, 참된 가치의 문학으로 꽃이 피어질 것이다. 시의 제목처럼 “아직도”는 유행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본질로 눈을 돌려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통일을 위한 염원은 진정한 우리 민족의 꿈이라는 갈증이 인상적이며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상상의 결합과 서정의 조화]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시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이미 시는 이미 달아나 혼비백산(魂飛魄散)한다.  그렇다고 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다시 시는 미궁의 깊이에서 서성이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낸다. 시는 늘 살아있고 생명의 호흡을 날마다 호소하지만 사람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따라 시의 표정은 각기 달라지며 감성과 정서가 많은 시인에게 가면 다른 표정과 언어로 태어나곤 한다. 그렇다면 시는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스피커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진솔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락 펼칠 때, 세상을 향하여 진리에 대한 표정을 관리한다.    그렇다고 시는 진리만을 강조하는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애환에 대한 조언을 멈출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삶의 전면에서 용감한 투사의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더러는 아픔을 위로하는 진정성의 말에 가슴을 치기도 한다. 결국 시는 삶의 곁에 있을 때, 시의 역할과 유용한 임무를 다한다.           한 사람에 시인의 시집은 앞에서 말함과 같이 인간이 만드는 표정의 전부를 시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이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독자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시의 등급은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시적 작품이 탄생에서 명품은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만드는 여부에 따른 이름이 명품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니 누가 명칭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품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2번째 시집을 출간한 홍금선 시인은 여린 감수성과 순수한 정서의 숲이 지고지순하다.  그의 시를 보면 싱그럽고 집약성의 언어가 맛깔스럽다. 자유시와 정형시를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자유스러운 정서의 나열이 시가 될 수도 있고 정형의 일정한 형식에 내용을 담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시라는 범주 안에서는 굳이 구분의 칸막이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문제는 독자가 읽어 감동, 받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시의 맛은 화려한 감동이기 때문이다.               2. 숲의 향기는 어디서 오는가                  1) 정서의 특질        시의 구성은 시인의 정서가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이미지의 구축에는 설계로의 얼개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진로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때 한 편의 시는 시인 자신의 표정이고 사상을 나타내는 시인 정신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시는 곧 응축이라는 언어의 절약과 그 탄력으로 튕겨 오르는 리듬의 연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 섞어서 만드는 잡다한 것이 아니라 정제되고 질서 있는 풍경화 혹은 치밀한 구도 속에 언어의 탄력이 튕겨 이미지의 숲을 만들어야 한다면 홍금선의 시는 그런 욕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시가 숲을 푸르게 하고 있다.        가볍게 주섬주섬 온기로 녹이는 마음 빈, 공간 그득히 반질반질 후원하게    `   돌아보며 빙그레 닦아 보는 너                                 <마음> 중        원래 시의 특질을 토운(tone)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시적 장치와 특징을 모두 담아서 말하는 총체적인 의미를 말한다.  왜냐하면 단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어조, 소리, 음조, 신호 등으로 해석되지만 시에서는 부드럽다거나 아니면 딱딱하냐, 혹은 냉정한가 또는 직선적인가 등을 의미하면서 한 가지 방향으로 지칭하지 않는다. I. A Richards는 의미와 감정, 의도와 더불어 시의 총체적인 의미라 했고, 르네 웨렉과 윔셑은 “내적 형식”이라는 말로 구분했으니, 한 가지로 특징을 요약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시의 총체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시의 “목소리” 즉 화자의 목소리를 의미할 때 곧 화자의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가의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달리도 말한다.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은 산문적인 장광설도 있고 또 단순하면서 명쾌한 선적(禪寂)인 고요한 방법이 있다면 홍금선의 정서는 후자에서 그의 시적 특성이 집약된다. 시의 중심 언어는 “마음”이다 “가볍게”와 “주섬주섬”을 모아 “빈, 공간을 그득히” 더불어 “반질반질”과 “훠언하게”의 결합에서 어둠이 없고, 밝고 환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빙그레”의 표정에서 시인의 정신이 있어 밝고 투명하고 구김살 없는 정서의 유로(流路)가 아름다움을 남긴다. <마음> 시는 도합 40글자로 되어 있지만 구성된 이미지는 여러 개의 갈래로 파생되는 기교는 시인의 시적 능력을 뜻한다. 이런 특징을 강조한 이유가 함축된다.              하늘을 보노라면 발그레한 노을 물결로 일렁이고  파랑, 파랑 자죽자죽 여울지는 길을 따라  두런두런 하늘 붉은빛 원을 그린  먼 곳 머물고 싶은 마음속 풍경화                                <노을 길> 중                  시란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는 풍경화 - 이때 시의 특성 중에 회화 즉 (phanopoeia)를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어 그림을 연상하는 일은 의미와 리듬과 3대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이미지 구축술이다.  “노을이 물결로 일렁이는” 연상은 고요와 더불어 따라오는 소리의 겹침이 연상 작용으로 이어진다. 또한 <노을 길>의 가장 백미이다. “파랑파랑”과 “자죽자죽”에서 언어의 특징이 한몫으로 드러난다. 이런 언어의 감수성을 터득한 시인의 시적 능력은 감각적인 언어의 탄력을 싱그러움으로 살아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흔히 서정시의 특징을 말하면 자아의 세계와 일체화를 이룩하는 방법론과 주관이나 객관 또는 이성과 감정이 하나로 통합되는 서정적인 자아의 확립을 motto로 나아가는 정서에는 유연한 감성이 파도를 일렁이게 만들어 논을 하는 필자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낙엽> <단비> 풍경> 등 다양한 시가 많지만, 그것을 모두 논한다면 양이 너무 많아 간단하게 그의 주요 부분만 언급하였다. 다만 시는 절망과 아픔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길이라고 늘 말을 하지만 그러나 시는 아무런 힘도 없고 명예도 아닐 것이지만 아픔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한 편의 시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에너지이기에 더욱 위대한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시는 그렇기에 문학이라는 맨 앞자리에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인은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낚아채는 것이 시인이다. 무심히 지나가는 담쟁이넝쿨의 모습에서 삶의 길과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가 시 1편을 보고 느끼는 희망의 담금질을 하는 행위와 표현에서 악착한 삶의 길을 펼쳐야 하는 이유와 기운을 받는 것도 독자의 몫인 것 - 시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는 뜻이다.                 3. 에필로그- 독특한 상상의 표현 압축                   시인의 시적 언어 감각은 탁월한 것 같다. 특히 서정성의 부드러움과 자아의 대상을 독특한 언어로서 조화를 이끌면서 풍경화를 그리는 섬세함과 솜씨는 일품이라고 장담한다. 더구나 언어의 직조에 번지는 묘미와 응축을 통해 이를 탄력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길은 그만의 성을 구축하는 구상이면서 특징이라 하겠다. 이번 2번째 시집을 출간하면서 꾸준한 열성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시단의 돌풍과 더불어 무서운 기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앞으로 두고두고 볼일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투명의 변증과 사랑, 헌신]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질서 현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력의 조력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갖추면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안을 찾으면서 의미의 조직화에 혼신을 발휘하려 한다. 더러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도로(徒勞)에 그치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망을 얻거나 그 반대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유명이란 말은 부풀어 오른 거품 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생(生)이라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의 정화 혹은 순수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한정된다. 자기 삶의 오뇌(懊惱)와 고통 신산(辛酸)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는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탄생될 수 있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청탁의 의해, 서문용 시인의 시를 접해본다. 그의 시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한다. 물론 저변에는 부모나 고향의 정서 또한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에도 따스한 햇살이 다가든다. 이제 점검의 코스를 통해 정신도(情神圖)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2. 거느린 의식들   1) 헌신의 소리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하다. 거스름이 없다는 것은 달관의 높이와 경지를 점했다는 의미가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교만 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e Souliers』라는 작품이 있다. 한 켤레의 농부화에서 서럽게 살아온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히 담겨 있다. 더구나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의 작품은 작가의 모든 생을 압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언제나 내 발을 꼬-옥 껴안는다   무덥고 지쳐도 언제나 내 편인 남 보기 부끄러워도 전혀 싫은 내색 없다   가다가 쓰려져도 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언제나 보살핀다.   마음도 넓고 고운 아프지도 않는 봄 화신처럼 언제나 나를 지켜준다.     『내 신발』 중   시인이 시집을 상재(上梓)할 때 의도적으로 작품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은 독자의 첫인상을 휘어잡으려는 발상에서 맨 앞자리에 있는 작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머리 위에 모자로부터 발끝을 지켜주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감싸고 의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의상과 어울리는 신발의 모습- 깔끔하면 그 사람의 인상은 멋진 사람으로 인식을 심고 지저분할 때는 흐린 인상을 각인 시켜주는 일은 인상에서 좌우되는 현상이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화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구두는 비교 가치가 연결된다. 시인의 약력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그는 중앙부처의 공무원으로 봉사와 헌신을 좌표로 삼고 살아가는 일이 삶의 방편이다. 공무원은 국민을 위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자리일 때, 그의 임무는 비로소 화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발은 곧 공무원이고 그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은 국민이기 때문에, 신발은 어떤 경우에서나 주인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끈기 있게 “너를 지켜준다.”라는 임무에 헌신해야 한다. “가다가 쓰러져도/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의 무한 성실을 다할 때,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보이는 희망처럼 서 시인의 마음에는 희망의 푸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은 때로 고독할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기본 바탕에서만 성립되는 Eros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날마다 항상 변함없이 환한 웃음을 선물하고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한다   세상 인연 맺은 날로부터 이 시간까지 무한 사랑 에너지를 주었지만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빛은 우리를 향해 행복하게 살라고 알려 주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날마다 감사에서』     사랑이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일 경우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 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햇빛의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펼칠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은 고귀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사랑의 이름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숙고하면서 또 찾아 나서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의 신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어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로 표정을 갖게 된다. 서 시인은 가장 많은 시적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상대를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그의 시는 공고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시인인 듯하다. 『사랑하라』 『당신은』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꽃』 『하얀 눈』 『빈 의자』 등은 사랑의 이미지가 번다, 하게 들어 있다.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교직(交織) 되면서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 정서의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며,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 앞으로 살아갈 시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행복하게 살라 서로 행복하게 살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 행복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중     “살라” “하라”의 형태로 사랑을 명령으로 강조한다. 이런 태도는 독자에게 위압적이고 때로는 독선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타당했을 때는 오히려 감동의 작동 원리로 드러날 수가 있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진리의 정직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에서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는 3인칭 복수의 지시적인 시어에서 사랑을 이룩하면 행복해지는 등식이 전개된다. “하라”와 “살라”의 명령어가 거북스럽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 곧 행복으로의 길을 만들고 있다는 이유에서 시의 묘미는 한층 밝음을 주는 역설의 기교가 된다.   사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된다. 포용의 기대감도 있을 수 있고 하나로 결합하는 통합의 일도 기대되고 또는 포로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면 서 시인은 저축의 의미- 복리의 계산으로 부풀어 오르는 무한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어느날 내게 당신이라는 은행이 하나 생겼어요. 장기간 복리로 사랑 계좌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내게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낼 때마다 고스란히 입금 시켰어요.   『사랑은 만삭』 중   매우 신선한 사랑법이다. 많은 시평을 썼지만, 사랑을 은행에 저당하여 복리로 부풀리겠다는 비유는 서 시인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시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도구를 통해 언어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심지어 언어를 버리면서 언어를 획득하려는 역설의 기교까지 동원한다. 은행의 이름은 당신이고 시인은 사랑의 계좌에서 수시로 입, 출금이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라 복리를 위해 장기간 계약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가치가 한층 고조된다. 더불어 당신이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내올 때 “고스란히 입금시켰어요.”의 진솔성은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지고한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오로지 저금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뒷날 받을 자산 가치는 화려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행복이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함을 뜻한다.     내게 오는 시간을 듬뿍듬뿍 토막 내어 빈 의자에 올려놓고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빈 의자』 중     사랑이 기다림이라는 말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암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의 마음이 허락의 시간까지 기다림이 있어야만 사랑의 진정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은 기다림에서 진실의 불을 켜는 시간 앞에 엄숙한 마음을 가다듬고 긴 시간을 의미로 채우려는 발상이 지극하다. 다음은 포로(捕虜 의식이다.     오늘 하루 이십사 시간 전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 마음 변하여 되돌아오면 내 쳐놓은 그물망에 걸여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두고 오랫동안 묶어두고 싶다.     『사랑의 그물망』 중   사랑의 포로라는 의미를- 앞장서서 오히려 그물로 대상을 포획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강압적인 방법- 이런 강압의 방법은 그 농도에 따라 비례하여 진실함을 나타내는 언어의 기교일 뿐 실제로의 행위는 물론 아니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이라는 가정의 상태이기 때문에 쳐놓을 그물망은 기대할 수 없지만 대상을 사랑하는 깊이가 얼마나 진실한가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어떤 방법이든 진실- 때로 진실이 불통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 시인의 사랑 법은 가능한 한 이룩하고 싶은 열망의 농도와 상관이 있는 것 같은 비유를 모두 동원한 인상이 특이하다.     3) 고향 그리고 부모     인간의 근본은 뿌리를 아는 일일 것이다. 이 출발은 부모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전개될 때 나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친구도 있어 추억의 이름이 더해질 때, 생은 풍윤(豐潤) 해질 수 있게 된다.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먼 나라의 아버지』, 『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 또한 고향을 생각하는 『고향 무정』 『밤하늘 친구』 등 고향에 대한 추억은 많은 편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오십 성상 세월 망각한 채/고향길 달려가서/그때 밤하늘 쳐다 보았네.”(밤하늘 친구)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된 그리움이 있을 뿐 특별한 추억의 이야기는 감춰져 있다. 오십 년이라는 긴 세월의 단절에서 추측의 길이 암시될 뿐이다.     오늘따라 이마엔 골 깊은 주름살이 큰 고랑 선명하게 드러나고 생살 도려내는 아픔처럼 마음이 아프다.   『어머님 모습』 중   “오늘따라”에서 현재의 상황이 느껴진다. 그러니 주름살 낀 어머니의 모습에서 통증을 느끼는 효심에서 느끼는 인상은 가슴으로 따스하게 전달된다. 자기의 원형인 부모에 대한 마음에 통증이 클수록 스스로 모습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커지는 것 같은 형상이다. 효도는 곧 자기 사랑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계신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세상살이 벅차고 힘들 때 더욱 보고 싶습니다. =중략=   『먼 나라 아버지』   부모는 자식의 반면교사가 될 때, 교훈이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강인함을 요구하는 아버지는 때로 외로운 모습이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먼 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가 “밤에 몰래몰래 변신하여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생전의 가난조차도 물려준 아버지를 이해하는 가슴에 그리움이 애절하다.     3. 에필로그 (시 정신의 골드)   1)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고 헌신은 더 큰 사랑의 길을 내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서 시인의 시는 순수와 투명이 남다르게 시의 표정을 밝게 한다. 이는 삶의 질료(質料)가 되기도 했으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 같다.     2) 호수의 아름다움은 관조의 경지에 이를 때라야 하늘이 보이고 맑은 바람조차 시원한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 수양 혹은 정화의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이런 이치를 수행하는 행동의 모범이 날마다 거울 보기 혹은 구두를닦으면서 지혜를 축적하는 비유로 나타난다.   3) 생을 지속하는 데는 정답이 없지만 자기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에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 시인은 당당하다.   4) 사회에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환하게 보이는 정신은 바로 서 시인의 시 정신을 이룩하는 원천이면서 삶의 지표로 적용되는 건강한 시인 서 시인의 시는 그렇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저서]  

More News

이전
다음
▲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