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하면 문인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것은 운위(云謂) 하는데 오랜 전통이 따라다닌다. 어느 시대에서나 글은 곧 가치 정신의 지표를 갖는 일면 정신의 고고(孤高)함을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였으며 그만큼 정신의 정수(精髓)를 뇌리에서 짜내는 직업의 신성함을 의미한다. 사실, 인정을 받는 만큼 부수적인 갖춤이 있을 때, 지향의 목표가 뚜렷해야 하고 무게를 갖는 일상의 정서가 부스러기가 아니라 정제된 함축미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에 합치되는 일은 오랜 습작과 단련의 결말이 아니면 지난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통상적인 글에 누습(陋習)을 반복하는 창조성 결여를 지적하게 된다. 창조는 언제나 신선함과 선도적인 사고에 발현 점을 갖는바, 이런 조건에 합치는 곧 개성의 뛰어남을 이룩하는 일이다. 개성이 없다는 글은 또 다른 누습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에서 외면의 눈총을 받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의 고양을 목표로 설정하지 못하면 결과에서 독자는 외면 혹은 침묵으로 지나치는 일이다. 이런 현상은 안 써야 하는 글의 이유를 합당한 논리로 처리된다. 물론 상이나 숲의 푸른 색채는 온갖 초목이 어울릴 때 멀리서 바라보는 녹색의 단일성을 갖지만 가까이서는 필요와 불필요의 구분이 정확성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가 하면 글에 개성의 원인이 아니라 근인(近姻)에서 가치의 감동이 수반된다는 점을 특기할 일이다. 미상불 분석적인 현상에서 특징을 갖는 요인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인은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나타낸다. 어쩌다 문인의 모임에 나가면 생면부지의 신인이 와글대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적어도 수 삼 년에 이력을 내세울 것도, 없지만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름을 가질 때, 선배들이 주눅이 드는 일은 양적인 팽창과 밀도를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인의 숫자가 많음과 창작의 수준과는 불비례의 어긋난 기울임은 결국 탄식을 불러오는 외면이 당연한 것 같다. 때를 벗지도 않고 몇 번의 작품 발표와 한 권의 저서를 출간하면 중견의 어깨가 되는 가벼움이 만연했으니 다시 돌릴 수도 없는 한숨이 고작이고 외면이 당연지사이다. 질서의 무너짐은 잡지의 숫자와 비례하는 것 같다. 신인을 배출하는 일은 곧 잡지의 운영과 상관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은 이 깊이 진행되는 일이라 어느 방향이 옳다고 시정을 촉구할 수도 없는 한계를 넘어 버렸다. 그렇다면 탄식이 정답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올시다, 이다. 잘못된 길을 수정하거나 바른길로 지나갈 수 있는 끝없는 조언이 필요하고 비평의 선도적인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비평은 이미 시들어 기력이 없는 지경임을 필자 또한 인정한다. 물론 뛰어난 논리와 합당한 판단을 구유(具有)한 사람이 전혀 없음은 아니지만, 머리는 기능을 하고 있으나 가슴이 메말라 있는 경우가 흔함을 목도(目睹)한다. 또한 공부의 지속성 연구의 지속성이 없기에 거의 10년이면 비평가의 수명이 끝나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비평가가 많다는 아픔은 문학의 아픔과 비례하고 있다. 자기의 본분을, 잃고 다른 쪽에 고개를 돌리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실패의 문패를 달았다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문학의 질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행위인 점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경우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열심히 정진하는 그룹이 있다면 또 한 그룹은 이름만을 즐기는 명찰 - 귀걸이 목걸이의 장식용 시인 - 전자의 숫자는 매우 희소하고 후자는 흘러넘치는 양상이 한국 시단의 모습이고 문제점이라 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시 공부라는 학습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엉겁결에 시인이라는 호칭에 취하여 문자의 나열 즉 행과 연을 끊어 짧으니까, 시가 된다는 모독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시와 감수성은 훈련으로 어느 정도 젊은 날의 시심을 회복할 수 있지만, 뼈를 깎는 정진에의 노력이 없기에 답보의 정체가 길고 긴 시간에 파묻히는 아픔으로 남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의 운용에 무게를 실감하고 음악성으로 리듬을 깨닫고 그림으로 이룩되는 상상의 회화성과 의미의 초점이 모아질 때, 시는 비로소 감동에 눈을 뜨는 법이다. 이런 난제 앞에 시인은 오직 입학만 있고 졸업이 없는 끝 모를 정진이 요구되는 이유는 나변(那邊)이 아니다. 자기를 아는 행위는 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인격이 들어있고, 한 권의 시집에는 전 생애가 담기는 것이다. 이런 무게를 실감할 때, 시어 한 글자나 마침표 하나에도 신명을 실어야 한다. 시는 모든 것이, 의미로 통하는 문을 가져야 비로소 시다운 시가 되는 것과 같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의 물음은 시인이 들어야 할 몫이다. 독자를 깨우치는 시인이 될 때, 시인은 때로 선생님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위엄을 갖출 수도 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양한 인격을 소화하는 성품은 곧 끝없는 수련에서 시의 길은 환한 불을 밝힐 수 있다. 어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불러 모으는 초점으로의 사고가 단련될 때, 시의 신은 얼굴을 보여주고 금시 달아난다. 왜냐하면, 시는 순간의 예술이며 이를 찰나에 포착하지 않으면 꼬리만 보이고 머리와 몸통이 없는 허무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단은 수렁에서 나올 수 있는가 아닌가는 오직 시인 자신들이 선택하는 고행을 갈 것인가에 갈림길이 분기한다. 시인 자신들이 사명과 책임감을 느낄 때, 밝은 길이 열리는 것은 자명한 조언일 것이다. 시인은 모든 문학인의 맨 앞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깨어난 정신을 소유자라는 말이 합당한 이유이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admission 했다고 가정 해보자, 한국 의학의 경우는 한방이나 양방이나 맥을 짚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문진과 맥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진단이었다면 이는 종합에서 얻은 인간의 시체를 우주로 파악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서양 의학의 경우엔 아픈 부의와 판단에 따라 집중적으로 메스와 항생제가 치료의 주요 수단이다. 우리도 의학이 발전하여 세계적 수준이 되었지만 이는 분석과 해체에서 얻은 전적으로 얻은 서양의 치료 방법이라면 동양은 종합과 분석의 결합에서 제3의 의학적 처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대체 의학이라 말한다. 어느 것이든 전적으로 옳은 일방성은 없다. 문학에서도 이런 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서양적인 이론의 추구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전통의 결합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론에 필요성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문학은 갈림길에 있다는 생각이다. 2000년 초부터 우리 문학의 판도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액티브(activist)한 다양성이 부재한 듯하다. 민중문학이 잠들고부터 정체의 긴 시간이 무료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뚜렷한 없는 이슈가 없는 현실에서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침묵처럼 조용한 현상이 과연 좋은 것인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발전을 위한 모티브가 없으며 고민 없음을 대변하는 현실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물론 우리 문학의 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의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정권 잡이의 문학 – 이도 문학이라면 문학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한 잣대로 말한다면 거론할 말은 제한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정해진 명령의 하달을 실천하는, 이른바 노동당의 기준에 적합한 경우, 충실한 문학인으로 대접받는 일종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우상 같은 표현만 있는 문학은 이미 문학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된다고 믿는다면 남한의 경우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의 승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되뇐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는 간단히 언급하기에는 어렵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전쟁 문학이 없고 – 이런 전통은 고래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 통일 - 나는 통일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의 안목이 없었고 근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 7여 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 통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 때문에 어느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사는 결국 자기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지만 –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에 머무는 논리에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닌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문학이 심도는 돌뿌리에 체이는 안타까움을 맞는다. 북한의 세습 정권을 보면 금새 그 뜻을 알게 된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의 간판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오로지 독재자 김정은이 향하문 이외는 모두 차단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 <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통하여 동원하여 합리 둔갑 될 때 용해되는 <우리> 정서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최면이 깊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벗어나면 악이 되고 나는 우리에 소속된 혹은 없어야 당연해지는 일이 어떻게 문학이 추구하는 휴머니티의 소산이 되겠는가? 한때 남한에서 극심했던 저항의 문화도 그렇다. 결국 끼리끼리의 문화였지 발전적인 <우리>로 이르지 못한 것은 편 가르기의 우리에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란 이분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에 터가 없는바 일방성 때문에, 공통의 선이 없어지고 독선적인 메아리를 던지다가 소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인 사상의 모델이라면 우리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으니,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때 유명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지 정작 작가의 고뇌 어린 해답은 없었다고 느낀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의 깊이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방의 이야기 수준이고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 작품에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다는 예를 들면 결론은 자명해진다. 그는 러시아 귀족으로서 자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땅 만으로는 살 수 없다>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었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 말이 “진리를 나는 열애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은 녹아있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다.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를 이룰 때, 비로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는 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모비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 한 줄도 안 나올 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했었고, 생전에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 후에 평론가의 연구에, 의해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은 1962년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 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은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 1965년 – 40년 후에 박노순 인권 항의<한용운의 연구>에 의해 유명 애국 시인으로 등극했고,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도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런 시인 – 이육사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에는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은 대답이 될 것이다.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한다. 그렇다.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의 실현이고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소설이 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의미로 만드는 비유가 시가 된다면 자기라는 본질에 대한 “찾음”은 결국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와는 멀리 있는 표현일 것이다. 즉 자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신 가치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우리는 일출과 일몰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동양인들은 일출을 좋아하고, 서양인들은 일몰을 좋아한다고 한다. 음양(陰陽) 이론에서도 일출은 양이고, 일몰은 음으로 해석한다. 동양은 양이고 서양은 음인가. 젊은 시절에는 동료들과 함께 새해 일출 보러 가기를 즐겼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구룡포 호미곶이었다. 전날 도착한 호미곶 주변 식당에는 일출 구경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곳의 대게와 물회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튿날 새해 첫날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함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이는 양팔을 벌려 높이 들어, “와! 대단하다.” “와! 희망이 보인다.” [달성군 사문진 일몰] 나 역시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들어 태양을 보니, 눈앞에 신비로운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새해 일출에서 태양의 큰 기운을 받았는지 그즈음의 나는 가정생활도, 직장 생활도 순조로웠다. 새해 아침에 희망차게 솟구쳐 떠 오른 태양의 정기가 나의 생을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새해가 되면 나는 습관처럼 일출을 찾았다. 나이가 드니 젊은 시절에 무심히 지나쳤던 일몰을 주목하게 되었다. 일몰을 본 경험 중에는 하와이 오아후섬 서쪽 야자수 가득한 와이키키 해변이 제일 기억에 남아 있다. 하와이대학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였다. 하루 연수가 끝나면 주로 와이키키 해변이나 쇼핑몰로 달려갔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갔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와이키키 해변은 반짝이는 모래사장에다 바닷물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해안에는 온통 화려한 고층 호텔이 서로가 자태를 뽐내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일몰 시간이 되니, 해변 모래사장에는 연인끼리 또는 부부인 듯 보이는 남녀 쌍쌍이 어깨동무하여 앉아 있거나 서서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닷가 바위 위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펭귄처럼 보였다. ‘서양 사람들은 참으로 일몰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니 하늘은 황금빛에서 회색으로 변했다. 바닷물도 에메랄드색에서 검푸른색이 되다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이 어둠은 다시 일출로 이어질까. 우리네 인생도 화려한 일출에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일몰이 되었다가 다시 일출로 변하여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 볼 수 있을 텐데…….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달성군 사문진을 찾았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본 일몰의 감동이 남아 있었다. 사문진은 낙동강변에서 떨어지는 해를 통째로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일몰의 시간이 되자 강물에 비친 노을은 용광로와 같이 불타는 느낌이고, 하늘의 노을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자연이 주는 선물 가운데 이런 아름다움도 있단 말인가. 일몰을 보면서 아내는 엉뚱하게도, “여보! 40세 때 찍은 가족사진에는 당신이 뽀송뽀송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네.” 자기는 어떤가. 나를 애태우게 하던 고운 얼굴은 오간 데 없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날 동료들과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고, 내 생활에 빠져서 아내에게 무심했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마음도 모르는 아내는, “노을 좀 봐. 진짜 멋지다!” 강변에서 바라본 일몰의 광경은 장관이었다. 서쪽 하늘과 강이 서서히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오렌지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설레다가 서서히 붉은 노을의 여운만이 남아 안타까웠다. 자연의 섭리인 일출과 일몰은 개인의 성향과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어차피 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라야 하고, 신이 계획한 섭리(攝理)를 지킬 수밖에 없다. 일출과 일몰의 조화도 자연이 빚어낸 산물이 아닌가. 나는 슬그머니 아내의 손을 잡았다. 뿌리치지는 않으나 얼굴을 보니 불그레 물들어 있다. 석양 때문이겠지만 괜스레 울컥하여 야윈 어깨를 가만히 안아본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는 외세에 의해 서기 642년까지 많은 성을 빼앗겼다. 서기 643년 가을 9월에 외세를 막기 위해 사신을 중국 당나라에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으나 도움이 없었다. 김유신 장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길렀다. 오늘은 8월 초순이다. 기온도 높지 않고 답사하기에 알맞은 날씨이다. 현재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에 있는 그 당시 연병장에 가 보았다. 현재 경산시에는 서기 102년(신라 파사 이사금 23년), 신라에 멸망한 압독(押督) 또는 압량(押梁) 소국이 있었다. 신라에 소속된 압량에는 김유신 장군이 48세(서기 642년) 때, 겨울에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왔다. 압량에는 그 당시 외세를 막아내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 기지이자 군사를 모아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훈련하던 군사 훈련장이 보존되어 있다.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모아 훈련한 연병장은 3개소가 있다. 2개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와 내리에 있고, 1개소는 경산시 진량읍 선화리에 있다. 각기 비슷한 형태를 이룬 소규모의 연병장들로 남아 있다. 이들을 경산병영유적(慶山兵營遺蹟)이라 한다. 이 유적은 서기 1971년 국가 사적 218호인 압량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서기 2011년 경산병영유적으로 변경되었다. 제1 연병장은 압량읍 압량리 179번지에 있다. 압량읍 시가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자동차로 10분이면 닿는다. 연병장을 멀리서 보니 야트막한 야산처럼 보인다. 가까이 들어서니 높은 언덕 위에 잔디로 조성한 연병장이 커다란 운동장처럼 보인다. [제1 연병장 군사 훈련 모형도, 출처: 경산시립박물관 제2전시실 촬영: 서기 2019.8.2.(금)1] 이 연병장은 넓이가 13,924㎡(약 4,200평)이고, 높이가 7m이며, 지름이 90m이고 둘레가 약 300m이다. 동남쪽에는 높이가 약 10m 되는 토루(土壘)가 있는데 지름은 약 11m이다. 이 토루에서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직접 지휘했다는 생각에 직접 토루에 올라가 보았다. 아래로 보이는 느낌은 내가 장군이 된 것처럼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보았다. 듣고 있는 군사들이 한 동작 같이 움직여 준다. 제2 연병장은 압량리에 있는 제1 연병장으로부터 약 1.5km 떨어진 압량읍 내리 389번지에 있다. 거의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 든다. 가는 길도 자동찻길이라서 쉽게 도착된다. 연병장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어서 감사하다. 제1 연병장과 비슷하다. 역시 잔디로 조성했다. 관리가 잘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연병장의 면적은 15,987㎡(약 4,840평)로 제1 연병장 보다는 약간 더 넓다. 연병장의 정상 부분은 자연적인 형태이며 토축으로 지름 80m, 둘레 270m의 광장을 마련했다.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가 약 9m이고 지름이 13m가량의 토루를 쌓았으나 동남 부분이 크게 파괴되어 토루의 모습을 잃고 있다. 이 연병장은 둘레가 제1 연병장과 비슷하다. 토루의 파손으로 토루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땀이 흐른다. 땀을 식히기 위해 연병장 가장자리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서 그 당시 군사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똘똘 뭉친 모습이 떠오른다. 제3 연병장은 내리 제2 연병장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진량읍 선화리 948번지에 있다.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 달렸다.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다. 연병장에는 온통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면적은 11,263㎡(약 3,410평)로 세 군데 중 제일 작다. 연병장 말단부에서 높이 10m 정도의 토축으로 지름 80m가량 원형 광장을 구축했다. 토루는 연병장 중앙 북쪽에 치우쳐 있고 높이 2m, 윗면 지름 13m 정도이다. 연병장에 소나무가 많이 있으나 후에 심은 것이다. 제3 연병장을 한 바퀴 돌면서 보병과 기마병은 주로 어느 연병장에서 각각 훈련했는지 궁금했다. 경산병영유적이 있는 곳을 다른 표현으로 두룩산이라 부른다. 두룩산이라는 말은 두리산으로 두리두리한 산, 즉 둥근 산의 지형에서 온 말로 고어(古語)로 두리산(豆里山=圓山)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세 군데 연병장은 서로 1.2km~3.2km 떨어져 삼각형의 배치 모양을 하고 있다. 모두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 구릉 위에 흙을 쌓아 올려서 마치 성(城)처럼 보이지만 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으며, 윗면이 평탄한 광장으로 되어있다. 광장은 군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였다.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에는 마위지라는 연못이 있다. 마위지는 신라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때 훈련한 기마들에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축조한 저수지이다. 이곳 일대의 아낙들은 저녁때가 되면 온종일 훈련에 지친 말을 이 못으로 몰고 나와 귀를 씻는다. 아낙들은 말에게, “전쟁터에 들어서면 적군의 화살과 창칼을 민첩하게 피해 달라.” 는 주문과 함께 남편과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이후 이곳을 마이지(馬耳池)라 칭하기도 했고, 마을 지명 또한, ‘지아비가 적진으로 출정한다.’ 라는 뜻을 담은 지아비 부(夫)에 나아갈 적(適)을 써서 부적리라 전한다. 경산시는 서기 2014년 신화랑 풍류 체험 벨트 조성사업으로 마위지를 경산 마위지 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마이지 동쪽에 세운 무명 용사상 촬영: 서기 2020.10.1.(목)2] 유비무환이다. 모든 일에는 준비를 잘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 세 군데 연병장의 군사들 훈련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 소리가 나라를 지켰다. 내가 태어난 진량읍에 김유신 장군의 연병장이 있었다니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년~1220년)의 『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년 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촬영: 2021.10.22.(금) 경주 통일전에서,작품: 서기 1977년 오승우 작가]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년~1220년)의 『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년 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안도걸(전 기획재정부 차관) 프로필 사진] 안도걸경제연구소(전.기획재정부 차관)는 한라백두평화통일연대 남유정 대표와 만나 ‘광주 탈북 새터민들의 자립 지원과 경제적 시너지 효과’에 대한 정책 간담회를 가졌다. 안 이사장은 광주에 정착한 4~500명의 탈북 새터민들의 생활상을 경청하고 새터민들의 온전한 정착과 경제적 시너지 창출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도걸 경제연구소] 또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일관적인 통일 정책을 위해서는 지역 사회에서부터 작은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광주 탈북 새터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하는 것은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통일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탈북 새터민의 성공신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남북의 시너지가 발생하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으며, 이 작업을 통해 남북 경제 시너지 창출의 로드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한편, 안 이사장은 광주 내 탈북 새터민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뿐만 아니라 광주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를 포용할 수 있는 정책 구상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이 살아났다.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 한반도 지도에는 가야와 임나를 동격으로 표기한 것과 아예 가야를 빼 버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 임나로 표기하여 가르치고 있다. 일본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 왜(大和倭)가 서기 249년에 신라를 깨뜨리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서기 249년에 7국을 평정한 것으로 나오나, 일부 사학자들은 연도 계산의 잘못이라 하면서 120년을 더하여 서기 369년이라 한다. [가야 지역을 임나로 표기한 일본 중학사회 새로운 역사 교과서] 일부 사학자들은 평정한 7국을 가야의 여러 나라로 추정하고, 야마토 왜가 서기 562년까지 가야를 지배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또 그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10국인 가라, 안라, 사이기, 다라, 졸마, 고차, 자타, 산반하, 걸손, 임례와 임나 4현인 사타, 모루, 상다리, 하다리가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가야가 아니라 대마도와 규슈 등 야마토 왜에 있었던 임나국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가야를 임나로 만들기 위해 메이지(明治, 1867~1912) 시대 때 일본군 참모부가 먼저 발상했다. 서기 1882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임나고고(任那稿考)』와 『임나명고(任那名稿)』라는 책을 발행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서기 1883년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사코 가케노부’중위는 광개토태왕릉비 탁본을 가지고 왔다. 비의 하단과 3면 상단에 있는‘왜’에 관한 내용은 훼손하고‘임나가라’만 뚜렷이 보이도록 조작해서 왔다. 가야를 임나가라로 읽도록 했다. 서기 2023.5.9. 모 교수는 한 언론을 통하여 광개토태왕 비문에 석회를 바르고 글을 새로 새겼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서기 1893년‘칸 마사토모’는『임나고』를 집필하여 가야 지역을 임나로 주장하게 된다. 서기 1896년, 일본 도쿄제국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사학잡지』에‘나카 미치요’는‘가라고(加羅考)’를 실어 임나가 가라라고 본격적으로 주장한다. 그는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는 것이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폈다. 일제강점기 때는 노골적으로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쳤다. 서기 1920년부터 일본은‘조선교육연구회’에서 편찬한 『심상소학 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에 가야를 임나가라로 지도하게 했다. 우리의 역사 찬탈이다. 광복 후에도‘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서기 1949년『임나흥망사』를 집필하면서 가야를 임나라고 뼈대를 세운다. 일본은 가야 지배를 전제하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지명을 경상도와 전라도에 비정하고 고증 작업을 한다. 즉, 우리나라 가야 지역 지명인 아라를 안라로, 고령을 가라로, 합천을 다라로, 거창군을 자타로, 창원을 고차국으로, 남원을 기문으로, 김해를 남가라로, 장수를 반파로, 강진을 침미다례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야국과 임나국은 동일시될 수 없고 별개의 국가이다. 가야국은 서기 42년부터 서기 562년까지 존속했고, 임나국은 『일본서기』에 기록되기를 기원전 33년부터 서기 646년까지 존속했다. 건국과 멸망 연도가 다르다. 일본이 서기 369년부터 200년 동안 가야를 지배했다면 『삼국사기』의 ‘신라 본기’나 ‘백제 본기’에 그 기록이 한 건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가야 지역을 임나로 표기한일본 중학사회 새로운 역사 교과서 발행: 2022.1.30. 주식회사 자유사 가야를 임나라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의 정한론(征韓論)이다. 일본은 언젠가는 조선을 정복하여 일본 땅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야욕을 품었다. 그 명분으로 가야를 임나라고 우긴다.『환단고기』에서 임나는 대마도와 일본 규슈 지역 등에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지명은 일본에 있었던 지명이므로 우리나라 가야사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을 남원으로, ‘침미다례’를 강진 및 해남으로 『전라도 천년사』에 그대로 집필되었다. 가야나 전라도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가 바로 잡힐 수 있도록 각성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의 바른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무가 있다. 먼 훗날 가야와 전라도의 역사가 걱정된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이용중 식민사관청산가야사전국연대 상임대표.] 전라도민은 ‘전라도가 왜놈의 땅이냐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고’, 편찬위는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관’이냐고 강변하고 있다. 이 상반된 논리가 왜 나타났는지 추적해보자.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세종대왕이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장하였다고 알고, 아이들은 배우고 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대표적인 사안 중 하나이다. 첫째, 세종실록에는 1426년 4월 과거시험에 「공험진 이남은 나라의 강역이니 마땅히 군민을 두어 강역을 지켜야 한다. 이에 관해 논술하라.」라는 출제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광주.전남.북 시민사회단체로 짜여진 '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 500만전라도민연대(공동집행위원장 박형준 양경님 김영광)'가 지난5월 2일 전북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 식민사관에 더해 중국 동북공정까지 추정한"'전라도천년사' 34권 전권 폐기와 사업비 24억원 투명공개, 전액환수"를 주장하고 있다. 1][ ⓒ전라도 오천년사연대 제공] 이 문제를 출제한 이유는 조선 개국부터 요동 땅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30여 년 벌였는데, 명나라 성조가 조선에 주장이 옳다며 요동 땅을 조선 영토로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이순신 장군이 38~42세까지 근무했던 녹둔도는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약 100리(하류 지점으로 보면)에 있는 녹둔강 주변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고, 명나라와 러시아 각종 역사서로 쉽게 교차검증이 가능한 사안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 국경으로 처음 주장한 자는 대표적인 황국사관 어용학자인 ‘쓰다 쇼키치’이다.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가 그자의 거짓 조작한 것을 싣고 있다는 것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황국사관은 메이지 유신 세력이 ‘일왕 중심 정치체제, 탈 아세아론’으로 정리하며 극우로 치달을 때 역사를 조작하며 탄생한 역사관이다. 황국사관의 핵심 사안 중 하나가 ‘가야=임나’ 조작이다. [식민지 왜곡사관이 반영돼 폐기 논란이 뜨거운 '전라도천년사' 표지그림. 2] 이에 가장 큰 걸림돌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기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창작한 소설」로 딱지 붙이고 그 빈틈을 일본서기를 비학문적으로 해석하여 메운 것이다. 임나는 백제 담로인 ‘야마토왜’가 일본열도에서 가야계 소국을 정벌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지명이다. 그러기에 일본서기에도 ‘기문, 다라, 침미다례, 반파’가 ‘남원, 합천, 강진(해남), 장수’라고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무리해서 ‘가야=임나’로 역사 조작하고 조선을 침탈했다. 대한민국 역사학자는 ‘가야=임나’를 반드시 증명하겠다며 ‘양직공도, 광개토태왕릉비. 강수열전.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등을 억지로 짜 맞추며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이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신념 체계는 일본 극우 사관을 가진 참으로 황당한 자들이다. 그들이 신념 체계가 집대성된 책자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 35권’이다. ‘조선사 35권’의 관점으로 서술한 주요 서적은 아래와 같다. 첫째,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의 동학 이전 내용 대부분은 ‘조선사 35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 2020년 문화재청 이름으로 발간한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직접 편찬하였다고 할 만큼 황국사관에 충실하다. 셋째, 전라도 천년사의 동학 이전 기록은 임나 관련을 제외해도 황국사관이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역사를 조작했다고 대부분 믿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그 구체적 내용은 알지 못하고 그저 광개토대왕비문만 머릿속에 어른거린다. ['역사바로세우기 불교연대'가 6월 5일 전남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전라도 천년사'의문제점을 지적하고광주전남전북 광역의회에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3][ⓒ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500만도민연대 제공] 그 이유가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 35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꼭꼭 숨겨놓고는 그 책 내용으로 조선~단군조선까지 모든 국경을 조작하여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 싣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의 명칭과 강역은 중국 동북공정의 교본 역할을 하는데 대한민국 국민만 모른다. 후기신라 초기 강역은 요동과 연해주 전체와 요서 일부를 포함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통일신라’는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명칭이고, 강역을 평양 이남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통일신라’ 명칭은 외국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민족 정체성을 설명하는 단어가 된다. 중국은 이 단어로 대한민국의 강역은 평양 이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 조작 대국 사이에 끼어 분단되어있는 대한민국은 역사관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어떤 위기로 치달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온 국민이 가스라이팅 당한 참담한 현실에서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라며 극히 소수의 학자가 백마를 탄 초인의 역할을 해왔다. 이제는 전라도민이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전라도천년사’는 단순한 지역사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체성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적 명령을 담고 있다. ‘분단·전쟁·독재·황국사관 가스라이팅’이라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경제·문화·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위기에 강한 우리 민족 DNA의 발현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본래 역사인 독립군의 역사관을 복원하자‘는 해방 당시 그 당연한 요구가 반민특위 해체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조상님께 죄스럽고 아이들에게 한없이 부끄러운 황국사관 청산을 또다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지구촌의 자랑인 ‘5·18 평화정신 구현’과 ‘100년 동안의 가스라이팅’이 부딪치는 형국이다. 결국 ‘5·18 평화정신’은 빛이 되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우리는 어떠한 목적이 있을 때 심신을 수련하면서 성과를 바랄 때가 있다. 김유신 장군은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말을 타고 활쏘기 연습을 하면서 무예를 닦았다. 신라의 변방에 있으면서 나라를 지켜야 하겠다는 염원이다. 김유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심신을 수련한 곳에 가 보았다.진천의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에는 치마대(馳馬臺)로 불리는 곳이 있다. 치마대는 장수나 병사들이 말을 타고 활쏘기, 칼 쓰기, 창 쓰기 등으로 수련하는 곳이다. 치마대는 지역 곳곳에 있다. 김유신 장군도 유년 시절 진천 탄생지 근방에서 활쏘기로 수련하였기에 그 장소를 치마대로 부르고 있다. 탄생지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500m 지점에 있는 투구바위에서도 무술을 연마했다고 전한다. 진천 탄생지에서 열심히 무술을 단련한 김유신 장군은 15세 이전 어느 시점에 서라벌로 와서 생활하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의 외조모인 만호태후는 신라 진흥왕의 여동생이고, 딸인 만명(萬明)과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과의 혼인을 반대했다. 아마도 출신 성분이 달라서 근친혼으로 혈통을 유지하는 데는 곤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호태후는 진천에서 생활하는 외손자를 한없이 보고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으로 제왕(帝王)의 얼굴 모습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성장 소식을 들은 만호태후는 외손자로 인정하고 서라벌로 불러들였다. 김유신 장군을 보자 기뻐하면서,“이 아이는 정말 내 손자다.”라고 했다. 만호태후가 이렇게 하므로 마침내 가야계는 김유신 장군을 받들게 되었다고 『화랑세기』 「유신공」 조에 전한다. 서라벌로 들어온 김유신 장군은 서기 609년(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郞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다. 용화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후세에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3회에 걸쳐 설법을 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향도는 향(香)을 매개로 하여 군과 현 또는 촌락 단위로 조직된 불교 신앙 조직이자 지역공동체를 말한다. 김유신 장군이 거느린 낭도의 집단 명칭이 용화향도였다는 것은 화랑도가 가지는 미륵 신앙과의 관련을 암시한다고 본다.당시의 화랑 집단은 국선화랑인 풍월주 1명에 그 아래 부제(副弟) 1명이 있고, 부제 밑에 여러 명의 화랑과 700∼800명 정도의 낭도가 나라를 지키게 됐다. 김유신 장군은 서기 612년(18세)에 풍월주가 되었다.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화랑들이 수련했던 단석산에도 가 보았다. 단석산은 통일신라 전에는 중악(中岳)으로 불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는 팔공산이 중악이다. 단석산에는 상인암이 있고, 상인암을 탱바위 또는 승상암(僧像巖)이라 한다. 서기 1969년『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에 의하여 상인암은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신명(神明)에게 기도하던 중악의 석굴임이 밝혀졌다. 상인암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상인암의 본래 이름은 신선사(神仙寺)였다.단석산 7부 능선 쯤에 있는 상인암 바로 북쪽에는 6~7세기경에 잠주(岑珠) 스님이 창건한 새로운 신선사(神仙寺)가 있다. 서기 2019년 3월 1일 신선사 요사채에서 만난 용담 주지 스님은,“단석산은 신라 시대 화랑들의 수련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그들은 석굴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석굴사원을 만들어 기도했다. 이 석굴사원이 상인암이다.”라고 했다.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 장군은 서기 611년(17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봤다. 의분이 북받쳐 적(賊)들을 평정할 뜻을 가지고 홀로 단석산 석굴에 들어갔다. 나라의 환란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늘에 고하면서 기도했다. 나흘 후 홀연히 한 노인이 거친 베옷을 입고 나타나 자신을 난승(難勝)이라 하며,“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무슨 연유로 왔느냐?”라고 물었다. 난승은 신령(神靈) 또는 도사(道士)라는 생각이 든다. 김유신 장군도 노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 알고, 다시 절하고 신라 사람이라 말하면서,“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으니 방술을 일러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김유신 장군 단석산 수련도] 김유신 장군이 예닐곱 번 요청하니 노인은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고 의롭지 못한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라고 했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졌다. 김유신 장군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 빛만 찬연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편에 전한다.김유신 장군은 단석산 석굴에서 검(劍)을 앞에 두고 향을 피워 기도 후 신검(神劍)을 얻었다. 시험 삼아 그 칼로 큰 돌을 자르니, 그 잘린 돌이 쌓여 산과 같았다. 그때의 돌이 아직 남아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편에 전하고 있다. 단석산은 월생산(月生山)이었는데 큰 돌을 잘랐다고 단석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잘린 큰 돌 밑에 절을 짓고 단석사(斷石寺)라 불렀다. 단석사는 현재 큰 돌인 송곳바위(천주암) 밑에 절터의 형체만 보인다. 큰 돌은 단석산 정상에 갈라진 바위가 아니다.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약 1km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50m 들어가면 큰 돌인 송곳바위가 잘리고 남은 부분이 아직도 우뚝하게 서 있다.서기 612년(18세)에 이웃 적국들이 한층 더 신라를 핍박해 왔다. 김유신 장군은 장렬한 마음이 더욱 격동하여 홀로 신검을 차고 현재 울주군 두서면과 두동면에 있는 백운산인 열박산(咽薄山) 깊숙이 들어갔다. 가지고 간 신검에 더 큰 영험을 받기 위해 단석산 석굴에서와 같이 기도했다. 3일째 신검이 마치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기 617년(23세)부터 628년(34세) 사이 7년간 가야국 양왕인 증조부 능도 보살폈다. 능을 보살피면서 능 아래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射臺碑)가 김유신 장군을 생각하게 한다.수련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명상이든 운동이든 마음을 집중하고 안정시키면 신체의 면역력이 강화되어 건강과수명에 도움이 된다. 수련은 정도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곳에 마음을 집중시키면 기(氣)가 모여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힘은 초능력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은 강한 수련으로 신비한 능력을 가졌을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가야국(가락국) 마지막 왕의 3왕자는 신라로 들어갔다. 가야국은 서기 42년에 경상도 6개 지역에 각각 가야로 건국했다. 김해지역 가야국은 세력이 약해져 서기 532년 신라에 멸망했다. 신라는 그곳을 금관군으로 바꾸고 마지막 양왕의 3왕자를 진골의 신분을 주어 나라를 지키게 했다. 3왕자가 신라 진출 후 활약한 모습을 보자. 첫째 왕자는 세종(世宗)이다. 『삼국유사』에는 세종이나 『삼국사기』에는 노종(奴宗)으로 기록했다. 그것은 동일한 사람의 이름을 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로 표현한 훈차(訓借)는 세종이요, 의미와 관계없이 한자의 발음을 빌려 표기한 음차(音借)는 노종이었던 까닭이다. 『김해김씨족보』에는 무종(武宗)이다. 세종 장군은 서기 511년에 태자로 태어나 왕위를 잇지 못하고 532년(22세) 신라에 들어갔다. 551년(41세)에는 파진찬(4관등)이 되어 신라 8명의 장군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개 군을 점령하는 데 공헌했다. 554년(44세)에는 백제가 신라 관산성을 침공할 때 동생 무력 장군과 함께 참전하여 승리하는 데 이바지했다. 568년(58세) 함경남도에 세운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 이간(2관등)으로 왕의 어가를 수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흥왕의 최측근이 됐다. [신라 관산성 지도] 577년(67세)에는 백제가 신라의 서쪽 변경의 주와 군을 침공하니, 신라 진지왕이 세종(世宗) 장군에게 명해 군사를 내보내 현재 경북 선산군의 북쪽에서 무찔렀다. 579년(69세)에는 신라 최고 벼슬인 상대등(上大等)이 되었고, 588년(78세)에 사망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관등은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이 되었다. 세종 장군의 사망은 분명하지 않다. 『김해김씨족보』에는 554년 또는 577년에 전사(戰死)한 것으로, 『삼국사기』에는 588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세종 장군의 묘는 울산 태화성 아래에 있다고 기록한 『김해김씨족보』가 있다. 그러나 묘를 찾지 못했고, 비석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세종 장군의 부인은 박씨이고, 장남은 솔우(率友)이며 솔우 부인은 계림김씨다. 후손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둘째 왕자는 무력(武力)이다. 『삼국유사』에는 둘째 아들 무도(茂刀)로, 『삼국사기』에는 셋째 아들 무력(武力)으로 기록했다. 『김해김씨족보』에는 모두 둘째 아들 무력(武力)이다. 무력 장군은 서기 518년 태어나, 532년(15세) 신라에 들어갔다. 549년(32세)에 아간지(6관등)가 되었다. 551년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땅인 한강 유역을 차지한다. 그러자 신라는 나제 동맹을 깨고, 553년 진흥왕이 백제의 동북쪽 변경을 점령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하는데 무력 장군이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신라의 신주(新州) 책임자인 군주(軍主)가 되었다. 554년(37세) 가을 7월에 백제의 성왕이 대가야, 왜와 손잡고 신라의 관산성을 침공하자, 마침 신주에 있던 무력 장군은 급거 출전했다.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도도(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생포한 성왕을 참수하자 백제군은 물러났다.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전투의 성과로 김해지역 가야국의 후예들은 신라에서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무력 장군은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인 아양공주와 혼인하여, 47세 때 서현 장군을 낳았고, 서현 장군은 흥무대왕(김유신)을 낳았다. 진흥왕은 사위인 무력 장군과 협력하여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서기 554년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력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 배내고개 부근으로 추정하는 태화관(太和關)으로 귀향한다. 그 후 신라를 튼튼히 하기 위해 교산윤산성(轎山輪山城)을 쌓는다. 이 산성은 양산 통도사 뒤편 영취산 정상에서 신불산 쪽의 능선에 있는 단조산성(丹鳥山城)으로 추정한다. 이 산성을 쌓은 후 골포(骨浦, 창원지역), 칠포(漆浦, 함안칠원지역), 감문(甘文, 김천개령지역), 초팔혜(草八兮, 합천초계지역), 사벌(沙伐, 상주지역) 등의 나라를 항복 받았다. 무력 장군은 579년(62세) 2월, 백제가 웅현성, 송술성을 쌓아서 신라의 서북 지역에 있는 산산성, 마지현성, 내리서성 등을 공격할 때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반공 격파했다. 그해 10월 다른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장소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사 후 신라 왕실과 백성들은 비탄과 통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무력 장군의 공적을 숭모하여 사패장(賜牌葬)으로 정하여 경상남도 영축산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하고, 석물을 갖추어 안장하게 했다. 관등은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이 되었다. 셋째 왕자는 무덕(武德)이다. 『삼국사기』에는 둘째 아들 무덕(武德)으로, 『삼국유사』와 대부분의 『김해김씨족보』에는 셋째 아들 무득(武得)으로 기록하고 있다. 생몰 연도는 전해지지 않고 후손도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김해김씨족보』에 보면, 무덕의 호는 의경(義卿)이고 현재 강원도 춘천 지역인 수약주(首若州), 현재 경기도 광주 지역인 한산주(漢山州)를 정벌했다고 하니, 무덕 장군도 신라를 위해 공헌했다. 옛날에는 제향을 관정동(觀晶洞) 백중사(伯仲祠)에서 한다고 했다. 현재 관정동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제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부인은 이찬(2관등) 개물(改物)의 딸 김씨라 기록하고 있다. 무덕 장군도 관등은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이 되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생활과 행동의 교훈이 되기도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강점기를 비추어 본다면, 신라는 가야국을 점령하여 왕족과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왕족을 진골의 신분으로 부여했다는 것은 참으로 통 큰 정치다. 3왕자는 신라에 들어가 사심 없이 몸을 바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詩)란 수축, 언어 운용 이미지, 상징, 리듬, 비유, 페러디, 혹은 역설 알레고리 등 시론의 부피는 너무나도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겠다. 요즘은 팽창적인 언어 운용으로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사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산문이란 언어의 사용에서 시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격식과 방식이 무너지는 조선 후반기에 등장한 사설시조는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환을 가져온 과도기적 문학이라 보기 때문이다. 즉 시조이거나 빗대어 조롱하는 정치적 수사는 그 당시 작가들의 신분이 양반에서 점차 서민들이 시(詩)의 영역을 확장하는 문학 생산 주체의 이동 즉 격식 파괴의 일환이었고, 대부분 전해 내려오는 소설이 작자 미상인 이유도 서민이 그들의 애환을 소화하는 그릇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격식을 따지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의 산문에서보다 시(詩)에 적합한 욕설이나 불합리한 사회의 현상을 수용한 현대의 민중(民衆) 시(詩)는 확실히 길을 잘못 들은 방향성의 명칭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누구나 같이 가야 한다는 이중성- 요즘으로 말한다면 펜데믹(Pandemic)으로 뭉쳐진 집단의 민중 타령 즉 80년대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사실 펜데믹을 정확히 명사적으로 말한다면 세계적 유행병이라는 뜻이지만 이상한 논리를 붙혀 요즘에는 유행어가 되었다고 하지만 - 다시 말하면 시(詩)로 소화 시켜야 할 민중 시(詩)가 되었다는 말에도 일간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며 적확(的確)할 것이다. 그러나 시(詩)는 짧다는 이유만으로 행과 연을 끊어서 온통 70~80년대 후반을 도배질 한데는 명백히 무지(無智)가 한 몫 했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근대적 학문적 논문을 보더라도 말이다. 한편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황색 저널리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민중문학의 어페적 학문관이라 하겠다. 문화를 담당하는 기자들의 대부분이 문학 소양이 없는 사회적인 잣대로 문학을 바라보는 사시(斜視)의 편견으로 문학과는 다른 소리로 지르기, 게임에 혹은 저널리스트의 특성이 한 몫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60년대 박정희 집권 이후 민주화, 민족, 민중, 통일, 리얼리티, 반미 등의 현란한 상품품목을 제시하면서 한국 현대 문학사를 분탕질한 내용들이 정작 한국 문학사에 기여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문학으로 승화된 작품성의 작품이 희소한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현상의 소화불량 시절이 아니었던가. 사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았던 설익은 민중 시를 부추긴 결정적인 인자는 문학 비평가들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로 외국 문학을 전공한 문학 비평가들이 우리 문학을 이중적 잣대로 바라본 너무나도 잘못된 시각이 주요 원인이 아닐까? 그 최초의 인물은 백낙청 선생을 꼽을 것이다. 그가 발간한 《창작과 비평》은 80년대 결정적인 오도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1966. 1. 15. 발간한 겨울호에 출간된 《창작과 비평》은 박정희 독재체제와 산업화로 진입하는 길에서 지대한 영향을 당시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묵과했기에 계간지의 내용- 이호철 선생, 김승옥 선생의 창작소설과 JP, 사르트르의 『현대의 상황과 지성 정명환 역』 그리고 CW.밀즈의 『문화와 정치 백낙청 역』 유종호의 『한국문학의 전제 조건』과 3편의 서평과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등 총 9편 중 백낙청 선생의 글은 두 편을 실었고 132페이지였다. 물론 내용에서 특별한 편집상 특집도 없고 또 대단한 기획력도 들어있지 않은 이 계간지는 발간사도 편집 후기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평범 이하의 잡지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잡지는 시대의 기류에 따라 민감하게 편승하는 시대적 운이 썩 좋은 잡지사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독재라 참칭 하면서 정치에 상승기류를 형성하면서 그 인기는 대학가를 모두 점령했고 이 잡지를 읽지 않으면 지식인이 아니라는 현상이었지 않았나? 더구나 대학가를 다니는 영업사원의 권유부터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사회의 불합리를 배설하는 통로의 막힘으로도 이유였지만 그 시절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가 현재 이렇게 세계 10대 강국으로 올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장준하의 《사상계》나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와는 다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실상의 창간사와 같은 백낙청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영어를 전공했던 실력을 여과 없이 나타낸 삐뚤어진 글이었으니, 순수한 정신이나 이념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득세한 유럽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는 등의 논지는 실로 설익은 글이었지만 그의 문학적인 소양의 일단을 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그 당시에 대부분 이데올로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민중 민주라는 타령에 쓰나미가 지나가듯이 하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오적 시(詩)」는 당시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의도된 의식 충돌의 현상이었으니 서구의 순수와 참여의 구분으로는 분간할 수 없었고 판별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에서 출발한 순수의 개념과는 달리 조선 양반계급 – 농경사회 권위주의, 생산성 혹은 생활 태도의 비판에서 당시의 기력 없는 작품이나 작가들을 대입하였으며, 이와는 다른 대척적인 경향의 문학을 현실 참여라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글이 이해 논리의 전부를 차지한 논지는 별로 뛰어난 글은 아니었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글 속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한국문학에 대한 무지가 여기저기 산견(散見)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앞서 논지로 풀어 보았으나 지금 우리의 현대 문화 현상을 서양의 잣대로 대입하는 데서 오는 잘못을 그의 표현으로 예를 들어보련다. 우리의 민속 예술과 실학사상에 대해 새 세대의 대다수 문학인이 아는 바도 없고 알려고도 않는 것은 섭섭하기 이를 데 없는 일로서 새 문학의 창조에 적지 않은 차질을 일으키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산 전통의 유무를 가리는 데는 이러한 섭섭한 사실이야말로 결정적이다. 『허생전(許生傳)』과 판소리가 정철(鄭澈) 김만중(金萬重)을 숭상하는 이에 대한 응수는 될지언정 지금 펜을 들고 글을 써야 할 한국의 시인과 작가들의 길잡이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문학의 발달을 위해 우리는 세계역사 전체에서 감명 깊은 선례를 찾고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의 고전은 물론 우리 과거의 구석구석에서도 이월해 올 수 있는 것은 다 해와야겠지만 무엇보다 앞서야 할 인식은 우리가 소설이나 기타 산문으로 가야 할 길을 부모의 피와 살을 받았 듯 이어받은 문학 전통이란 태무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동양적인 전통은 그 명맥이 끊어졌고 대를 이어 뜻있게 되살릴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나 근대 서구의 고전 문학을 모체로 삼기에도 우리의 언어와 풍습과 제반 사정이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1960년대의 한국에서 문학의 기능은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라고 담담히 말해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선 백낙청 선생의 글은 서구의 잣대로 물론 영문학 전공이기에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편향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동서의 고전을 읽고 또 대응하는 일은 옳은 일이지만 우리 문학에는 〞전통이 태무(殆無)하다는 말은 너무나 잘못된 문학적 모순인 것이다. 러시아의 문학은 풍토와 전통에서 나왔고 미국의 문학은 미국적인 언어와 사고 그리고 풍토에서 탄생 되었듯이 우리의 문학은 우리의 전통과 환경에서 나왔다는 환경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것이다. 가령 일본의 5,7,5의 하이꾸는 일본의 전통과 환경에서 나왔고 대하(大河)와 과장(誇張)의 중국문학은 중국의 대륙 세계의 중심의식에서 나왔다면 3장 6구 45자의 시조는 우리의 풍토에서 나왔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이 태무 -〞거의 없음은 잘못된 이해의 산물이 아닐까? 이런 잣대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반만년의 역사의 맥을 잘못 이해하였기에, 이 같은 사시(斜是)의 순진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용의 발톱이 다섯이 아니라 넷인 이유 또한 우리 삶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궁궐은 100칸이고 99칸이 최대로 허용된 양반의 집이라면 3칸 초옥이 서민의 집, 이론은 있지만 신라의 향가(鄕歌)가 도시 노래가 아닌 시골 노래인 이유와 정곡(正曲)이 아닌 별곡(別曲)인 이유, 수원백리라는 말 이해, 백성은 백색(白色)의 옷을 입어야 하는 애환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전통이 거의 없다는 오해가 한국의 문학을 이해하는 잣대로 잘못 적용된 것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외국 문학은 이해하지만 한국문학의 줄기와 바탕을 모르는 일로 시작된 불행이었으니, TS. Eliot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은 읽었을 터이지만 오늘의 나는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정몽주의 『단심가』를 보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를 예로 하고 또 필자의 선조이신 문경공 이직 선생의 『오로시』“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필자의 선조이신 정당 문학 대제학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선생의 『다정가』“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이 얼마나 대단한 시조인가. 해석, 주석을 설명 없어도 모두 알리라 자정하면서 상대를 꼬집는 무한 의식의 끈기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언어로 표현된 도식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남의 잣대로 자기 집을 바라보면 슬픔이 남는 이외에 자학과 비극의식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필자가 어느 대상을 놓고 조리하는 것은 모순이라 여기며 그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잘못된 일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자가 진정 작가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산 속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자가 문화 권력 있다 한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문화적 이념 전쟁을 지금에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는 미려한 산속에서 사는 무명의 작가라 하지만 말할 것을 말해야 한다고 하는 스승님의 말씀에 마음을 굳게 믿는다. 매쉬 아놀드는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시(詩)라고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결국 문학의 임무이자 사명이라는 뜻이 아닐까? 종교는 인간 사랑의 헌신에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이나 사고는 화려한 문학의 정원을 이룩하는 길이 된다면 인간의 사랑과 구원의 매시지를 향해 문을 열어 놓아야 할 보편적인 소명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것도 아닌 오로지 문학의 본령을 찾아가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익어갈수록 전달의 입구를 장식하는 화려함이고 꿈으로 이동하는 단계로서 미감(美感)이 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인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현상을 적시한다면 더욱 깊이가 넘치는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5. 1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간적 조망의 현재] [정서의 수채화] [그대들은 시의 맛을 아는가?]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