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한국 시에 대한 정신 가치와 변화의 정통성 찾기]

  [대중문화펴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우리의 현대 시에 대한 문학 찾기를 필자의 저서 제7권에 『문학의 혼을 말하다.』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권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 문학의 정통성 찾기를 다하지 못한 상태로 책이 상재되었기에 이제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자유문학의 정통성을 찾을 때가 되었다고 보았기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절름발이 문학 시대를 파헤쳐 보고 논리를 정립해야겠다는 의지에서 시작한다. 문학이 인간의 모습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은 상관을 벗어날 수 없는 한 문학의 표현은 곧 민족이 살아온 모습을 유추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 기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글의 언어는 주어가 둘이거나 아예 없어도 뜻이 통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온 결과물로 증명이 된다. 우리가 그리는 용(龍은)의 발가락은 넷 아니면 여섯이고, 중국은 다섯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갑오개혁 이전까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엔 서양 문화에 대한 논리적 파헤침이 아니라 당사자에 의해서 고백될 수 있는 여지의 애매성이 담겨있고, 삼복더위에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도 “어”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표현법을 이해할 수 있는 데에는 한국의 오랜 전통의 문화를 이해하기에 가능하지만 우리의 표현법은 수식사-   형용사나 부사가 많은 것도 오랜 민족이 살아온 애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학을 조윤제가 ‘은근과 끈기’라고 말한 것도, 우리 문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며 정몽주의 ‘단심가’를 끈기에 대입한다면, 은근히 밝은 것보다, 오히려 애매모호한 표현에서 나온 우리의 전통이자 삶의 흔적이다. 이는 반만년 동안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존재 방식이었기에 우리의 언어로 굳혀졌고,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우리의 문화- 은근과 끈기와 인내심이었다.                사실 한국 현대문학은 소설이나 시- 모두 절름발이로 출발했다고이 보는 것이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또한 문학성으로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사건적인 기록 문제- 이런 현상이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과연 한국문학은 문학의 본령에서 얼마나 확고한 모습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1세기를 반토막으로 잘랐을 때 전반부는 일제강점기에서 숨죽이는 표현과 또 KAPF(카프)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이라는 이념의 이데올로기에서 나포된 시기였다면, 후반기에는 해방에 이어 60년대 이후 민중문학- 필자는 능동적 소수라 칭한다. 이와는 상반된 의식을 가진 순수 수동적 다수로 구분한다.    전자는 문학의 그릇을 정치라는 목청에 전부를 쏟아부어 결국은 문학 자체를 잃었고, 악다구니 게임으로 도로에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치부한다.   사실 문학은 정치조차 문학의 표현으로 승화할 수 있는 대상이라 하지만 정치를 대결의 대상으로 상대하다 보니 문학적인 표현을 놓치고 목소리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결말이 70년대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는 불안이나 절망조차도 문학적으로 승화되는 현상을 비문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잘못된 발상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어긋난 파행적 문학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최남선 이후 청록파나 생명파의 등장이 가져오는 의미는 이 점에서 현대 시라는 말에 어울리는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 다시 또 절름발이 출발 문학]        이른바 능동적 소수의 <민중문학>(현재는 한국 작가회)로 명칭을 바꾸고 문학성이 실종되는 어둠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이런 추세는 1985년을 정점으로 소강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직접적인 원인은 정치와 문학의 혼돈이 부른 절름발이 문학이라는 현상에서 반성의 목록이 따라다닌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시기- 긴급조치 1.2.3. 계엄령 등 심지어 이데올로기를 정치 메커니즘에 이용하는 불합리의 시기에 시를 통해 반항이니 저항이니 하며 깃발을 들었던 결말이 모순의 표현을 낳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라는 목록으로 독자의 호응을 얻었고 이어 통일 또는 민족, 리얼리즘 등 현란한 목록으로 독자의 입맛을 유지하면서 무려 20년 동안 민중 타령의 시- 문학성은 없고 다만 짧은 형식을 선택하여 정치적인 구호를 가미하는 격앙의 감정 노출로 한국시를 재단(裁斷)하는 일이 한국 시단의 주류인 양 행세하는 모습이 아직도 그쪽을 추종하는 일이 벌어지는 일이 횡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기만 하다.                   여기에는 황색저널리즘의 센세이셔널한 편향성이 더해져서 적은 숫자의 민중그룹은 계속 사회적 이슈를 갖고 전면으로 등장하여 소수가 주류 행세가 되었다. 무려 18년 동안의 박정희 정권하에서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까지의 긴 세월 동안 이런 불합리한 문학적인 절름발이 행진이 지속되었고 급기야 88 올림픽을 계기로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이 벗겨졌지만 김영삼 정권 당시 민중그룹을 동지로 여기는 문화정책이라는 허울로 편향성은 더욱 일방성을 갖게 되는바 다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좌편향 좌파 문화계를 접수하게 되며 이어 노무현 정권 들어 소수의 좌파 문학이 한국 문화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민중은 1천400백여 명이고 그 반대인 순수 그룹은 일만 명을 넘어서는 숫자였지만 소수가 다수를 집어삼키는 형국이었으니 더 무엇을 말하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른바 민주화를 주창한 권력에 들어서서는 더욱 죄 경향의 문인들이 한국문학의 전 분야를 통일이라는 포장으로 순수계열의 문인들을 추운 벌판으로 내모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필자가 말하는 대로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정권은 바뀌지 않았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인 것을 보면 알만하지 않겠는가?                 그로 인하여 한국문학이 척박해지는 칼칼함을 자극하는 일들이 아직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내로남불의 적반하장이 아닌지 묻고 싶다. 사실 문학은 이데올로기조차 표현의 대상이 되고 또한 당연히 소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승화된 작품이 아니라 목청만이 높은 시합인지 떼거리의 문학인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라는 시대에 정치적인 시를 써서 노벨문학상 후보 목록에 올랐던 김지하는 무슨 문학성의 결과물인지? 지금은 성희롱 사건으로 인하여 자취를 감춘 고운을 말한다면 문학적 업적이라 할만한 작품이 없으며 만인보라 하여 추켜들 세우지만 주위를 돌아보고 노 평론가에게 물으면 7000 천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부풀리고 있다고 하며 무려 300만이나 백성을 굶겨 죽인 북한의 김정일과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며 김대중의 사이에서 건배사를 올린 시인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추하게 또 성희롱으로 문학계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아닌가!   필자는 문학이란 정신의 문제이고 문학은 정치가 아니고 글로서만이 말하는 것이 순수문학이라 할 것이다.     2006년 10월 30일 금강산에서 남북문인 1백여 명이 모여서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출범했다.  여기에 참가한 남한의 문인들은 북한의 핵 개발에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자제’라는 말 한마디로 만족하고 미국을 점령자라는 “거품의 시”를 낭독- 낭송이 아닌- 하고 끝을 맺었다. 북한의 문학은 오로지 노동당과 김정일과 김정은을 위한 우상 광고가 아니던가. 더 어떨게 표현할지는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들에게 한번 더 묻는다.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상위 개념으로 압수당한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의 포로이기에 반대하는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이 2024. 01. 05. 14:30분에 북한에서 대공 포사격을 했다고 들려온다. 이러한 사정임에도 무조건 북한에 추종하는 문인들이 있다면 북한으로 가서 살라고 하는 것이 정당성이 있지 않을까?            [3. 절름발이 불균형의 문학]             문학인의 사명은 치열성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치열성의 부재는 문학의 땅을 정체로 만든다는 것이다. 1985년 민중의 시대가 끝났다는 증거는 고은 시인이나 김지하 시인이 초기에 서정성으로 돌아가는 시집을 발간했던 데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고 그 이후 뚜렷한 상품을 개발하지 못한 민중문학의 흔들림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순수 계층의 문학은 항상 미온적이고 고민이 없는 평온을 유지하는 점에서 독자의 각광을 외면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잡지의 자유화 이후 한국 시단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에 직면해야 했다. 신인 장사를 앞세워 많은 문학잡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문학의 질에 대한 우려를 가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마디로 혼란이고 정체의 소용돌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나 시집을 발간할 수 있는 대중의 시문학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시대에 문제 제기는 거름 장치가 부재한 데서 따른 것이며, 이러한 시가 인터넷 발전으로 인하여 페이스북, 카톡, SNS 등에 횡행한다는 것이 문제로 대두된다는 데에 문제이며 월간지든 계간 얼마의 돈만 있으면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무질서한 사회 인식이다.       이러한 혼란은 전통의 파괴를 가져왔으나 시는 전통적으로 엘리트의 전유물이라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아무 문단에서 데뷔하면 된다. 그리고 책값만 지불하면 되는 현실이다.        사실 시는 고도한 문학의 장치를 익히고 배워야 하는 문학의 정수(精髓)라는 사실이 외면되었고, 다만 짧은 행과 연으로 조악한 정서를 나열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는 시를 위험의 벼랑으로 내모는 질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이런 형편을 제공한 것은 60년대 이후 민중문학에서 그 본류를 찾을 수 있다. 민중의 애환을 소설로 쓰기엔 호흡이 부족하고 긴장에 견디지 못하다 보니 짧은 행과 연으로 노동 현장을 고발하거나 정치에 욕설을 투사한 일들이 작금까지 시를 장바닥 쓰레기와 혼동의 표정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거름 장치 즉 한번 걸러주는 장치 부재에 대한 원죄는 아무래도 비평가들, 문단의 장들 모두 몫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거나 서로 눈치 보기, 금전에 끌려다니는 비평가들 등롱(燈籠) 잡이에 만족했던 한국 문단, 비평가들의 실상이기에 필자도 자성하는 바이며 가능하다면 금전에 눈이 어두워 끌려다니지 않으려 한다.                 [4. 생명이 있는 영원성]                       문학은 늘 시대와 사회 환경에 따라 수용하고 변하지만 문학은 다시 원형으로 돌아가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시, 소설, 혹은 수필, 희곡, 등 이름은 인간의 오랜 삶 속에서 형성된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사물에는 그만의 원리와 매개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원리를 잠시 일탈하였을지라도 다시 돌아가는 속성이 있기에 변화는 필연적이라 본다. 왜 그런가 하면 원(圓)을 일탈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지구는 원래 둥글기에 결국 원으로 다시 돌아가고 접합되는 길을 반추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고 인간이 만든 문화 순환이기에 시는 문학의 본령이고 원형이기에 변한다 해도 다시 원래로 희귀하려는 운동의 법칙이 작용할 것이다. 영원성에는 생명력이 들어있기에 영원의 이름이 붙게 된다. 한국 시문학의 미래는 결국 혼란의 와중에서 다시 질서의 개념으로 돌아가는 원형이정의  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을 적시하면 미래의 한국 시는 오히려 더욱 튼실한 얼굴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어떻게 혼란의 현재를 극복할 것인가 의 여부에 따라 답안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대통령만 바뀌었고 정부는 바뀌지 않았다고 하지만 문학적인 시에서도 기대하는 것은 문화정책 기조와 상관이 있다고 보기에 정부도 이제 문화의 기틀을 잡을 때가  되었지 않았나 기대하면서 이번 이승만의 다큐가 100만이 넘었다는 사실에 변화하는 의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 전쟁은 쉽지 않을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우파니 좌파니 하며 아직도 좌우 대결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하나 필자는  사고와 정신가치가 확고 하기에 필자만이라도 묵묵히 갈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것이 기본 정도이고 태생의 고유한 정신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또 누가 뭐라 한들 전체주의자는 아니기에 빈자일등 초심의 마음으로 자유 민주주의 신봉자이기에- 뚜벅뚜벅 내 길을 갈 뿐이라고 자위하며 나가려 한다.    2024.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베스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이기주의적, 이해하기 힘든 의사 파업?]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요즘 의대 2,000명 증원 이슈로 인해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을 정부가 강경 대응으로 맞서고 있다. 예비 의사인 의대생들까지 동참하며 휴학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한 집단행동으로 국민의 우려가 심화 갈등으로 가고 있다. 복지부는 사직 등 근무지를 이탈한 의사들에게 업무 개시 명령 및 미 복귀 시는 면허정지로 엄정 대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났다. 그들의 대표가 페이스북에 여러 건 글을 올렸다.  응급의학을 택한 젊은 의사의 고뇌를 엿보며 읽다가 고개를 갸웃한 대목이 있었다. “정말 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정부와 의료계의 합의에 의사 인력을 추계해야 합니다.” 이는 의사 집회의 피켓 문구이기도 했다. ‘의료계와 합의 없는 의대 증원 결사반대.’    합의? 의대 정원 결정을 의사들과 합의를 해야 하나?  대학 정원 조정하면서 그 졸업생 허락을 받는 학과가 있나?  300명 사시 정원을 1,000명까지 늘리고 로스쿨 도입해 2,000명으로 확대할 때 정부가 변호사 단체와 합의를 했던가?    현장 목소리는 매우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전부일 순 없다.  법률 서비스 이용이 어렵다고 변호사들이 책임질 리 없듯이, 의료 서비스가 기능 못할 때 결코 의사들이 책임지지 않는다.  그 책임은 오롯이 정부에 있다. 책임지지 않을 이들이 정부 정책에 ‘협의’도 아닌 ‘합의’를 요구하는 상황. 이번 의사 파업을 보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요구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적어도 그 내용이 이해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들의 주장을 도저히 납득을 할 수가 없다. 먼저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논리. 의사 단체는 1. 우리나라 활동 의사 수의 증가 속도가 빨라서 의대 정원을 안 늘려도 머잖아 OECD 평균을 따라잡고 2. 급격한 인구 감소로 미래에 의사가 남아돌 거라고 주장한다. 1은 대한의사협회가 2013년 꺼낸 추계인데, 당시 “2023~2026년이면 따라잡을 것이라고 했었다.”  2024년인 지금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고, 의협은 추월 시기를 40년이나 늦춰 2063년으로 수정했다.    2. 는 저출산 고령화의 인구 변화에서 한쪽만 얘기하고 있다. 통계청 추계를 보면 향후 30년간 우리나라 인구는 8% 줄어드는 반면 노인 인구는 234% 늘어난다. 아픈 사람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뜻이니 의사가 더 필요하다고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 어떤 의사 단체도 이 부분을 말하지 않는다. 의대 학장들은 성명에서 “의사 교육 기간과 급격한 인구 감소를 고려하면 인력 수급 정책은 30년 뒤를 내다보고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30년 뒤를 보라면서 30년간 폭증할 노인 인구는 쏙 빼놨다.    다음, 의사가 늘어나면 의료비가 증가한다는 논리. 늘어난 의사들의 과잉 진료에 의료비가 상승한다는 1970년대 유인 수요에 근거하고 있다. 유리한 가설이니 차용, 했을 테지만, 너무 오래전 것이다. 이후 숱한 후속 연구가 이뤄졌다. 의사들의 경쟁에 의료비가 낮아진다는 정반대 학설부터, 국내에선 의원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주로 유인 수요가 나타나 오히려 긍정적이라거나, 의료비는 국민소득과 노인 인구에 크게 좌우돼 의사 수와 별로 관계가 없다는 논문이 즐비하게 쌓여 있다.    이렇게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 의료비가 늘어난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지다 보니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나머지 두 가지 명분은 자연히 힘을 잃는다. “의사 늘린다고 필수 의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 필수 의료 살릴 방법을 요구해야지, 부족한 의사를 늘리지 말라고 파업할 일인가. “의대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 그럼, 교육 요점 핵심에 더 투자하라고 이참에 주문해야지, 증원 자체를 막을 일인가. 의사들은 정부가 필수 의료에 쏟겠다는 10, 조원을 “이렇게 쓰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대화에 나서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거꾸로 병원을 비웠다.    한동안 전공의 없는 병원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기왕 벌어진 사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병원 이용 관행’이 바뀐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상급종합병원의 중증 환자 비중은 50% 정도였다. 나머지 절반은 더 작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데, 큰 병원을 찾는 오랜 인식이 심각한 쏠림 현상과 의료 지연을 초래했다. 정부가 지금, 이 절반을 원래 갔어야 할 병원으로 보내는 회송 작업을 하고 있다. 국민에게 질환의 경중에 맞는 병원을 찾아 달라 호소하는 중이다. 전공의 공백 피해를 줄이려는 이 조치는 왜곡됐던 의료전달체계를 정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 사태가 많은 『new normal』 낳았듯, 파업 사태로 병원 이용의 새로운 기준이 정착한다면 한국 의료의 숙원이 풀릴 수 있다. 국민적 호응이 필요하다.      아무튼 필자가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이것이 정의로운 의사들의 행동인지는 글쎄올시다?이다. 과연 의사들이 집단적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면서 파업하는 것이 정당성이 있는가는 차치하고 이번 DR. (의사) 증원(2,000명) 관계로 전공의들이 파업을 종용하고 대부분 정부와 강대, 강으로 치닫고 있는 면을 보면서 의사들의 인성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 의사의 윤리 등에 대한 선서문을 보게 되었다. 그 속에는 희생 · 봉사 · 장인 정신이 담겨 있으며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전문을 필자는 보게 되었다.       오랜 시간 의술을 배운 의사들은 사실, 아무나 대처할 수 없는 고급 인력은 틀림없으나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여러 차례의 집단행동은 그들의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의사의 진료 특수성 때문에 파업, 집단휴진 등으로 인한 그들의 요구를 매번 정부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없는 대처 불가한 자리의 의료 붕괴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그러나 전 국민의 90%가 의사 증원을 찬성하고 있고 히포크라테스 선서 : 의사의 윤리적 지침, 제네바 선언문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난맥상이 아닐 수 없다.       의사 부족으로 인하여 업무 과중과 전공의들의 열악한 조건을 충족시켜주고 또한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의사 증원을 하겠다고 정부에서는 더 이상 이대로 간다면 국민의 생명을 담보할 수 없다는 데서 불가피한 상황이라 증원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그들은 왜, 반대하며 파업하는 것일까? 그들의 수입은 일반인들의 수십 배가 되어 이미 사회에서는 특권층에 속하는데 결국 그들의 밥그릇 싸움이 맞나? 의사 증원이 되면 수입이 줄어들까? 걱정 때문에 -            상식적으로 의사가 되기 위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안다. 오늘날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수정한 '제네바 선언문'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할 때 쓰이는 선서문도 사실은 제네바 선언문이다.      히포크라테스(약 BC 460년~약 BC 370년)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로 보통 그를 의학의 아버지, 혹은 '의성(醫聖)'이라고 부르며, 의학사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히포크라테스 학파를 만들어 고대 그리스의 의학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으며, 마술과 철학에서 의학을 분리해 내어 의사라는 직업을 만들었다.       특히 그는 이전 학파의 생각을 정리하여 시행해 보고, 환자를 치료한 것을 기록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만든 것을 통해 치료 의학의 발달을 세웠다. 한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읽어보자            ◆ (제네바 선언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의 스승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다. 나의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겠다. 나는 환자에 관한 모든 비밀을 절대로 지키겠다.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다. 나는 동료를 형제처럼 여기겠다. 나는 종교나 국적이나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 나는 생명이 수태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 어떤 위협이 닥칠지라도 나의 의학 지식을 인륜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의 명예를 걸고 위와 같이 서약한다.      위와 같이 되어 있다. 물론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MZ세대라 하여 자기 자신들의 가치관을 중요하다는 점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대학교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학교수들도 생각이 같은 것인가?      세상에 주체의 의미는 여러 갈래이기에 공동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체는 국민이다. 특수의 의사라는 지성은 바로 히포크라테스 정신이다. 특권층 해당도 되지만 국민의 생명도 담보하는 막중한 지성인이기에 의사의 정신 가치가 육신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판단에서 서로 보완하는 작동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옛말에 주체 권력이 한 단체의 힘만 가지고 밀고 간다면 그 단체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며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 옛날 절대권력의 화신 진시황제도 망하고 죽었다. 이런 평범한 명제 앞에 지식인이며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의사들이 단체적으로 이익의 단면만을 보고 현재 동조 파업을 하는 것이라 한다면 자신들만 주장하는 독선과 아집의 결핍된 사람들이라 볼 수밖에 없다.      보자, 민주노총, 한국노총, 공무원노조, 교원노조 등 많은 집단적 이기주의 자들이 자기들 밥그릇 챙기기, 정부와 정면에 서서 충돌하면서 이익을 챙기는 시대는 지났다. 그 영향력이라는 문제가 오호(好惡)로 판명이 나는 일은 얼마나 많은 전달 했는가의 함량과 분리되는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대학병원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일주일째 이어지면서 2차 병원으로의 환자 몰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응급실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2차 병원까지 의료대란이 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오늘날 의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의사의 역할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인류사회의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의사의 봉사활동으로 지구촌의 건강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천사와도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어쩌면 하늘이 내려주는 책임이고 가치 있는 인생의 길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분야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가 발생하고 있다. 업종별, 분야별 전문성은 많은 경험에서 축적된 귀중한 자산이고 경쟁력을 창출시킨다. 따라서 기득권이란 중요하다.      문제는 기득권이 그들을 정체시키고 자기들 스스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기득권으로 인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변화에 대비하기를 거부하여 변화하지 못함으로 도태된다는 것이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1차 산업혁명을 만든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운송수단이고 교통수단이었던 마부들의 일자리가 위태롭다고 판단하여 영국에서 최초의 마부 파업이 유럽을 강타했다. 결국은 증기기관이 이끌어가는 변화에 굴복하고 오히려 그들이 증기기관의 기관사로 취업하는 시대적 변화가 되었다.      시대는 변한다. 진보하는 사회는 변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에너지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기득권은 물과 같다.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듯이 분야별 기득권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힘이지만 변하지 않으면 기득권은 썩는 물이 된다.      4차 산업혁명이 만든 빅데이터는 치료하는 [인공지능로봇] (watson, Kaspar 등)을 만들었다. 의사의 전문성은 인간의 생명과 연장을 시킨다는 차원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해 왔다.      유능한 의사는 수많은 경험과 노하우(knowhow) 의해 남보다 정확하게 병명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병원은 첨단기기에 의하여 불치병도 치료하고 있다.  첨단기기를 발명한 사람들은 의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치료에 필요한 다양한 의료기기가 개발되었고 병원을 평가하는 의료시설의 기준이 되었다.      지구촌의 수많은 인종이 다양한 병으로 치료받고 치료 과정에서 습득된 수백만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 데이터 (watson)가 오늘날 명의들의 치료 정보로 활용되고 있다. 수십 년의 치료 경험과 능력이 지구촌의 수백, 수천, 수억 명의 진료데이터를 바탕으로 명의가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명의로 명성을 얻기 어려운 시대다. 이러한 시대변화에 의료진의 역할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며 허균의 『성소부부고』 중 『호민론』에 ‘호민이 된다는 것은 곧, 백성은 판단의 영민함을 뜻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심판이고 원리라 할 것이다. 평소에는 잠잠하나 결정적일 때 판단을 내리는 호민 정신이 이 나라를 지켜온 기준이라 본다면 자신들에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계속 이어진다면 백성이 일어날 것이다.      백성은 무서운 것이다.  이제 거리에서 집단적 패거리를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모든 국민과 함께 가는 정부와 대화를 모색하는 국민을 위하는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선국후사로 조금씩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부족한 시대라 하지만 지성인, 지식인, 의사라는 특급 위치에 있는 그대들이 국민을 위해 깃발을 세워 주기를 바란다.             요즘 현실을 보는 정치와 무엇이 다름일 것인가? 때마다 집권한 정권은 언제나 엄히 법대로 처리한다는 말을 언급하지만 결국 사회 혼란을 지속하는 말 잔치가 되었으니, 정치는 없고 기회주의, 이기주의 집단만이 있기에 뉴스의 한복판은 어지럼증과 멀미가 끝이 없다. 그야말로 법 대로와 엄중하게 처리하는 해답은 명확하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지도자에 의해 이 나라의 애국은 자꾸만 회의에 깊이를 방문하고 있음을 애달파할 뿐이다. 이제 정권도 교체가 되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총체적 난맥상을 헤쳐 나가는 길만이 우리가 가야 할 문제라 보면서 나가려 한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인생은 경영, 문학은 정신 ?】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요즘 시대에 지식인들이 말들을 한다. 인생은 경영이며 문학은 정신이라고 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학자들은 부르고 있다. 인생과 삶을 경영, 또는 운영이라고 하며 살아가는 일이 다반사라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며 고민과 정신적 긴장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스(stress)로 인한 정신적 긴장감을 어떻게 슬기롭게 잘살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연구와 도서들, 각종 종교와 인도의 요가 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신적 긴장과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물질적으로 자신에게 투자와 시간을 갖는 사회가 되었다. 그만큼 개인들의 삶이 풍족하고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 자신을 찾는 정신의 탐구는 생각과 명상으로 수도(修道)하는 것이 하나에 도구가 되어가는 듯하다. 정신의 탐구는 좋든 싫든 자아가 살아 있기에 신명과 열성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중에 허세와 허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음은 인간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또한 저마다의 삶이 있고 가는 길이 다르며 방법의 차이도 클 것이다.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 맡은 소임에 따라 반복과 다른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고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따라가는 것은 아닐지 - 인간의 경영을 어떻게 하느냐의 따라서 행·불이 정해질 것이기에 삶의 파탄은 대체로 올바른 판단의 기준이 없어 멋대로 아집이나 이기를 발동하는 데서 오는 불행이라면 낮은 자리에서 자리를 잡을 줄 아는 일이야말로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틀림없는 것은 내 그릇대로 담은 그릇만큼 세속의 호사를 누리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자아의 정립은 끝없는 일상의 파문이 이어지는 무늬 같기에 때로는 감동하고, 실망도 하고 더러는 폭발하고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잘못도 있는 것이 삶의 경영일 것이다.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행보이든 불행이든 결정해야 하며 목적을 세우고 죽는 날까지 가는 것이기에 결국, 생과 삶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고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의 귀결된다, 할 수 있겠다.     『2. 문학의 정신』     문학의 정신은 문학에 심취되고 학문에 도취 되어 연구에 몰두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도 문학은 인격의 수용성, 사상의 정신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접신(接神)에 올라야 깊이가 넘치는 글이 된다고들 어느 교수는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공감하는 말이다. 문학은 시대적 요소를 요구하는 우주의 법칙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수단으로 정신 운영을 하는가의 따라 순리론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예를 들자면 문학은 친절, 화합, 등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길이라 했다. 이상의 꿈과 상상으로 떠나는 배가 되듯이 꿈을 대상에 담아 즐거움을 주며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신념에 불가분의 개성과 “무엇”에 합당한지 연출의 대상, 목적의식의 뚜렷함, 등이 문학성의 정신 가치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꿈, 사랑, 삼라만상의 민감한 청력, 자신감, 조국의 애향심 등이 자리 잡아야 확고한 문학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한다면 망설임이나 조바심은 정서와 느림의 미학으로 언제나 사전 뒷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란 모두 어떤 행동을 할 때 맨 앞자리에 놓고 생각하는 경향을 쉽게 불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3. 이성의 마비』     블랙홀(BlackHole) 항성의 붕괴처럼 어둠이고 모두는 보이지 않는 무(無)의 상태에서 멋스러운 눈을 갖는다는 것은 지난(至難)하고 난제(難題)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업 식을 서서히 내려놓으면서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며 더디게 가는 시간을 쪼갤 필요 없이 행동이 가는 대로 올리는 수확에 재미를 알고 주저 주저의 마음으로 칼을 들이대고 무작정 잘라 버릴 것 같은 천 길 단애의 두려움조차 없어지는 일에서 비로소 마음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고 보기에 현실에 적응하면서 자아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면서도 요즘 현실이 너무나 암울하고 사실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것을 방관하고 현실에 이끌려 다닌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 정의가 바탕을 이루는 현실이라면 모를까? 서로가 내로남불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상대를 보는 현실에 어찌 두고 볼 수가 있겠는가?     보라, 선관위 사건, 돈 봉투 사건, 거짓말 등 말이 말이 아니라 거짓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이를 보는 초라는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 세계 정세와 지구촌은 하나로 연결되어 한 치 앞을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초를 다투는 이 시대에 서로가 단합하고 하나가 되어 달려가도 쫓아갈지 의문인 이 시대에 아무리 말로 하는 정치라 하지만 서로 대결로 이어지는 마지막 승부수인지 아니면 국민을 가, 붕, 개로 아는 것인지 정신들 차려라- 직무 유기를 일삼는 신의 표정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 노릇이 아닌가.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일에 진저리가 처진다. 정말 불의에는 법대로 잘한 일에는 박수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정서적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정말 정서의 블랙홀이다. 아무것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 바람도 없고, 산도 없고 오로지 어둠의 깊이에서 살아야 하는 의무감밖에 달리 없음을 뉴스 속에만 가득하다. 이런 현상에서 골라 먹는 백성들의 위장은 소화불량으로 탈이 났고 고칠 수 있는 제동 장치나 의사가 없다는 부재의 갈망이 끌려다니는 개와 같지 않을까?     그래도 백성들은 희망을 찾아야 하고 길을 만들어야 하고 신념을 일으켜 세우는 불을 켜야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 자정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말은 쓰레기장에 던져지면 아우성이 된다. 질서를 회복하는 일은 말의 줄을 옳게 세우는 일이라면 길은한 가지이기에 말의 성찬에 기울이다 보면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설득당하는 뜻이고 이런 현상은 정서를 잃어버리는 결과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유의 구가하는 이성의 일탈이 심하고 정도가 없는 혼란이 가중되는 느낌을 많이 갖는다.     젊은이나 나이 많은 어른들의 의식 대결이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하는 불행이 깊다는 것도 말의 성찬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서 마비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좋은 글 한 구절이 구원의 메시지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갈증에는 물 한 모금이 필요한 것이지 말의 꼬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 씨가 되는 말이 있듯이 말 장사꾼들의 분석이나 변명을 듣노라니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입을 닫고 눈만 굴려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너무 우울하다. 이 사회의 덫에 걸린 거미줄이 된 것 같아 이 사회에 백성만 불안할 뿐이다. 이제는 사랑이다. 자기 사랑, 문학 사랑, 뿐이며 인생은 경영, 문학은 정신이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선동의 정치 민주주의 정치 】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벌써 2024년 갑진년도 2월로 접어들었다. 벌써 갑진년 푸른 용띠 해가 시작되었고. 2월 입춘대길(立春大吉)도 다가오고 최대명절인 설날도 2월 10일 다가왔으니 세월이 유수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봄이 오는 듯한 비가 내리고 타 계절 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정감(情感)을 주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혹독했던 추위도 춘련(春聯)이라는 입춘대길·건양다경(立春大吉·建陽多慶에)에는 속수무책인 듯하다. 갑진년 첫 번째 절기로 새해의 시작을 알리고 다가오는 봄을 알리는 그리고 좋은 일들만 있으라는 의미에서 춘련(春聯)을 붙이는 것이다.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으면 하는 건양다경(建陽多慶)이지만 봄을 기다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서민들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볼 수가 없다. 전 세계가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각종 이상기온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 사회와 정치는 이념의 갈등으로 상대는 적이고 나 아니면 그르다는 이분법으로 개싸움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고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이성이 있을 때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듯이 이성이 불을 켰을 때 비로소 다수가 지배하는 판세를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을 보라-   우리의 현대사에서 민주라는 말은 전가의 보도처럼 내 갖는 것이 오로지 라는 패권적인 사상과 사고가 지배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늘 불통, 이분법, 거짓, 변명 등에 막힘이 나타나고 독선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가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온 것이다. 내가 가장 옳고 상대는 타도의 대상임을 억지로 강변하는 데는 세계에서 1등일 것 같다. 심지어 북한의 이름조차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란 미명에 합리주의니 또는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고 자랑까지 하며 사회주의라 하기도 하며 자랑스럽게 민주주의를 대표한다는 신성한 국회 안에서 무슨 북한이 정당한 국가라는 세미나를 열고 있는 현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정말 정치판의 사상이 실종된 자들의 소행이라면 한나라의 진로가 암담할 뿐이다. 이제는 정면으로 본색을 들어내면서 이른바 통일이라는 미명에 다수의 의석으로 마구잡이식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좌파의 정치는 자기들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무서운 복수의 열전을 보는 것 같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무슨 안건이건 서로 협치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좌파에 속성 거짓 집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국민이 안타깝다. 좌파 언론들에 거짓 선동이나 떼쓰기의 본보기가 지금도 여일(如一)한 수법은 끝이 없는 듯하다   우리의 정치는 가히 집단적 이기주의, 편협한 사고,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치의 실종이 너무 심하다. 전통이 부재한 데서 나오는 천박한 사고의 전형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생각의 깊이가 없는 결론 아니면 답안이 도출될 수 없는 예일 것이다. 하루가 멀게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서로 비방과 선동에 춤을 추고 있음은 오늘의 우리가 되었음은 정말 부끄러움으로 치부할지, 아니면 이 현상을 어찌해야 할지는?   정치가는 자기 영혼을 팔아 권력을 쟁취하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역사를 바꾸지 못하는 잠시 왔다 사라지는 하루살이의 존재의 길을 선택한 우매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름 석자는 이내 사라질 뿐이다. 그래서 권력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무상이라는 말은 허무라는 뜻이 있지만 정작 다시 권력의 맛을 추종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을 보면 아마도 권력은 무안함인 것 같다. 누구나 우뚝 서기를 바라며 남보다 앞서 누리는 권력 맛을 누리는 것은 비단 고메한 사람만은 아닐 것 같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그렇고 모든 사람은 정작 권력에 굴종하고 아부하고 또 그런 맛을 음미하려는 동작이 은근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다시 또 선거철이 되었나 보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면서 줄 서기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 어디를 가든 요지경 속이며 분주한 일상이다. 선거철만 되면 우후죽순으로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개구리 튀듯 여기저기 분주하다. 그러나 화려는 짧고 허무는 길 것이라는 되풀이 예는 실컷 보아왔다. 사람 같은 사람은 숨고 개구리 튀듯 여기저기서 물장구치는 때가 오고 있다. 이솝의 <파리와 꿀단지>를 읽으면 허망은 항상 입을 벌리고 있는 불행의 증명일 것이다. 오늘날 정치라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타매(唾罵)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자질의 문제인 조정과 수습의 능력이 부재한 데서 나온 일이면서 시대의 앞에서 사고하고 이끌어야 하는 안목의 결핍으로의 원인이 정치를 희화화 혹은 불신으로 바라보는 필연이 아닐까?     그러나 역시나 정치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특별한 권력의 매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렇겠지만 자기를 모르고 덤비는 일이야말로 자기의 불행과 국가적인 불행을 함께 맞게 되는 아픔이기에 스스로 돌아보는 일이 우선이 아닐까? 서민으로부터 임무를 갖는 일도 지도자의 덕목 못지않게 비중을 갖는 일이기 때문에 백성은 현명한 판단과 행동이 주요 임무라면 서로 간에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자기 영역에 충실한 경계(境界)의식을 필요로 할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백성은 사고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자각증상 혹은 사명을 의미할 것이다.     현대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고 한다. 대통령으로 군림하려는 사고를 갖고 지도자가 되려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시대는 이미 과거와는 완전히 패러다임이 버뀐 시공의 구조를 이해하는 정치(精致)한 영역을 이해하고 조정하는 능력과 미래를 조감하는 안목까지 갖춘다는 것은 결국 조언자그룹의 결성과 조정의 기술을 갖는 통솔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명망을 거머쥐기 위하여 또한 한풀이로 정권을 잡겠다면 자기 비극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쉽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혁명의 시대도 아니요 또 느슨한 행정의 시대도 아니다. 급격히 다변하게 변하는 IT, 시대, 반도체, AI, 시대이며 희망의 언덕을 말하는 안목이 있어야 변화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균형의 분배경제, 균형의 권력분배, 균형의 문화 향수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지대한 것은 물론이고 다가오는 미래의 변화를 예견하고 수용하는 준비의 길을 말하는 지도자를 갈구한다. 지금은 오로지 어둠의 시대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갈망할 뿐이다. 그리고 기대한다. 엄혹한 시대에 백성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제 5의 경제 터널을 벗어나 보자.   수신제가치구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일 뿐이로다.   필자가 칼럼을 쓰는 이유도 이러한 이치에 소회(所懷)일 것 같다. 세월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면 땅으로 떨어진 낙엽의 군상에 초라함도 보이고 더러는 책꽂이에 꽂아 둘 만큼 아스라한 색깔이다.     겨울비가 추적거리는 날 거실로 들어온 늦겨울 풍경에서 필자의 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서성거림이 눈에 들어온 정경이 세상의 이치는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봄으로 가는 입춘(立春)에 그래도 모나지 않게 살면서 꿈속으로 그리는 명품 사회에서 다시 볼 일이기 때문이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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