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이상하기만 한 진리]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아마도 오래된 기사일 듯싶다.  언론매체 뉴스를 보고 놀랐다. 미국의 한 북아메리카 매사추세츠에서 어느 장관의 집 앞에 엄청 눈이 내렸는데도 눈을 치우지 않았다고 벌금을 냈다.라고 하는 뉴스를 보았다. 매우 신선하고 역시 자유주의 미국이구나. 하고 중얼거림으로 자소(自訴) 하면서 역시나 했다. 벌금이 많고 작고가 문제가 아니라 역시 선진국인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우리나라를 대비해 보았다. 우리 기준으로 볼 때 벌금까지는 의문이 당연하다. 기꺼이 벌금을 내고 이것이 마지막 폭풍이기를 바란다는 성명서는 정말 부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사실 당연한 기사인데 왜 지면을 할애하는지 우리는 먼 거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 신호 위반의 기사도 곁들여 소개하는 것을 보면 높은 직책의 장관이라도 법을 위반하면 당연하게 벌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례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힘이 이런 작은 곳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상식에도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법을 유지하는 길이 된다는 엄정성에서 박수가 나온다. 반면에 한국을 보자. 우리 국회나 장관들 또는 정치인, 늘 검증의 단골 메뉴인 부동산 투기 의혹, 주식 의혹, 등 커다란 활자로 도배된 것과 비교한다면 씁쓸한 쓴맛만 입안을 헹군다.             나라의 위대한 힘은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앞장설 때 국력이 배가될 국력이 될 것이고 백성은 이를 따르는 순종의 길이 당연함으로 질서를 잡게 될 것이다. 고대 플라톤의 <공화국>은 지도자에 의해 완전한 통제와 엄명이 횡행하는 공산화였지만 결코 유토피아 국가는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독재국가의 말로는 결코 이상 국가가 될 수 없는 먼 상상의 공간일 뿐인데 말이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고 상식을 떠들어 대고 공평을 소리치고 천만번을 소리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솔선수범의 행동 한번 효과에 따르지 못하는 일은 우리 역사 속의 활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국가의 위기 때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솔선수범으로 위기를 돌파한 사례- 문민 대통령 시절 국가 부도 사태 <imf> dp 직면할 때 금 모으기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한 서민들의 힘을 과시한 우리의 국민이다. 그러나 고위공직자들의 미담은 없고-           지금 입법, 사법의 예를 들어 보자?   지금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국민은 모두가 알고 있다.  무조건 정권만 잡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 눈먼 권력 욕심에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반대만 일삼는 입법 독재, 그리고 사법 모두 왼쪽으로 편향되어 대통령을 무자비로 끌어내리려는 세력은 도대체 어느 나라 정치가인가? 법을 무시하고 국민을 개, 돼지로 아는 입법, 사법, 모두 퇴출, 되기를 희망의 기대가 있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렇게 되겠는지 암울하기만 하다.                                돌아보자. 훗날 정당한 권력이 부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를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묻는다. 지키면서 정당한 의사표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탈법과 거짓말로 일상화하면서 이를 자기변명으로 정당화하는 지금까지의 대다수의, 정치가들을 무시하는 이유는 모두가 자기변명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국회의원들이 그랬고 지금도 그런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일도 아니다. 마지막 최후까지 법을 지키는 금도(襟度)가 있을 때 자유민주주의 본령에 이르는 것이지 수단을 합리화하는 일은 지도자가 아닐 것이다.      백성의 모범이 되는 정치가?    헌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믿음이라는 위정자, 깨끗함이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순수함의 정치가의 덕목이지만 철없는 시절에 불과한 불법과 탈법을 모두 당대의 정치가 잘못이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꾼들이 판을 치고 있다.  지조 없음을 넘어 거짓말 행진으로 근근 지탱하는 나라의 운명이 걱정이다.  때문에 망해야 할 패륜집단, 북한이 존립의 근거를 가지고 있음이나, 이를 따르는 종북, 친북, 세력들이 횡행하는 작금의 처지도 따지고 보면 남한의 거짓 정치가들의 이용에 놀아나는 일이 상당수라 이런 추세를 사상이 없는 현상 즉 정신적 가치가 없어서라고 할 수 있겠다.  정신의 줄이 있어야 함에도 그것이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그네 현상만 있고 이를 막지 못하는 양심의 마비가 진행형이라는 것. 이제는 경찰이나 검찰의 말도 신뢰를 일탈(逸脫)했다는 점에서 무지한 여론의 지배적인 풍미와 부정선거라는 막무가내 딱지를 붙이고 선거관리 위원회가 마비된 것은 사실일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북한의 어긋난 추종 세력을 꾸짖지 못하는 일도 참으로 우리 사회가 언제 이렇게 사회주의가 되어버렸는지? 그 옛날 운동권들이 국회에 들어와 주인이라 행세하는 정치관이 무슨 미래를 가질 수 있고 억지와 거짓의 횅행이 당연으로 나타나는 국가의 정의가 있다고 하는 것인지 오죽하면 계엄이 계몽령이 되어 버렸는지 알 수 있겠다.     후안무치한 이 철없는 자들의 정의와 민주를 역설하는 입을 보면 자유민주주의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마치 뼈 없는 입법, 사법, 모두 목청 큰 자들의 세상이고 정치판은 데모와 탈법, 이념 주의자들에 의해 지배하고 있는 한 희망의 불을 켜는 일은 사실 절망이지만- 절망에서 희망은 싹이 나온다는데 믿음을 가지며 팩트로 확인되는 미국에서 중국 간첩을 잡아 조사 과정이 끝났다는 데에 한가닥 희망을 보는 것이다..               국민은 단순하다. 작은 것 쉽게 감동하고 쉽게 동화되는 길은 늘 넓혀있다. 이 단순한 일을 작은 욕심으로 간과하는 일들은 결국에는 정신의 문제로 돌일 일이다. 국가는 국민에게 간섭과 거짓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의 가치 정신이 발현하는 것이다.  통제와 간섭은 꾀를 발동시키고 마침내 서로가 대결하거나 회피의 길이 넓어질 때 지도자의 위신은 추락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할 때, 법이 그물을 펴고 백성의 발목을 잡기 위해 더 많은 그물을 펴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노릇일 것이다.  지도자는 일시적인 선택일 뿐이지 권력을 항구적으로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용기를 갖는 일은 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성과조차 아래로 내려보내는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이 진리일 것이다.     물길을 내는 사람이 지도자요 앞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정작 이를 시행하는 몫은 아래로 물려주는 책임 정신이 요망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도자는 왜 미국의 지도자들과 다를까? 이 간명한 대답은 권위를 지키려는 유교 정신이 바닥에 깔려 있음이 아닐까? 선택받은 지위는 영원성이 아니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가져야 함에도 자기는 높은 사람이라는 은근한 권위의 의상이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당신들과는 다르다.라는 차별성이 결국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리는 잘못이 된다.      이 간단한 대답을 실천하는 일은 자각증상이 필요하다. 미국이나 서방의 선진국 지도자들의 사례를 모르거나 망각되어서가 아니다.  선민의식을 타파하는 개혁의 정신이 필요하지만 정작 자기를 예외 조항으로 남겨두려는 우월성의 마음이 자기를 망하게 하는 동력이라면 결국 이 검은 그림자는 국민의 몫으로 분배받을 때 우울한 공화국이 된다.  지도자의 행동이 거울로 투명해질 때라야 백성은 따라가는 길이 밝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드는 첩경이라는 말에 타당성을 갖는 이유라고 굳게 믿으며 이상한 진리가 아니기를 바라며 에필로그 한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1]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2]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 (10집)3]  

【위기의 대한민국 무법천지의 결말】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大韓民國은 지금 반만년 역사에서 이처럼 잘살고 민주라는 말이 요란함과 아우성 속에서도 그런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언제 있었는지 자못 신기하다. 힘겨운 끼니를 이어가면서 나름대로 배고픔을 참으며 잘살아 보자는 신념 하나로 지금의 국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은 50대 60대 이상 국민이라면 누구도 부정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주변 강대국과 동남아 어느 나라를 보아도 개발도상국을 지나 세계 경제 6위로 올라선 대한민국이 다시 이념 체제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건국 시기에 체제의 전환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내세워 한미 동맹과 자유 민주주의 경제로서 우뚝 선 현재에 또다시 좌우 이념전쟁을 하고 있다는 현실에 필자는 안타까움을 지나 자유 민주주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도약할 수 있는 전진기지 초석을 다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대통령이 고유한 권한인 비상계엄을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무소불위인 선관위를 조사하기 위한 苦肉之策으로 비상계엄 한 것을 가지고 의회 다수라 하여 내란죄로 몰아 이렇게 국가를 흔들고 갈라치기로 인하여 정쟁을 일삼는 것은 의회 폭거라 할 수밖에 없다. 분명 대한민국은 대통령제가 맞다. 공정과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극우와 극좌를 떠나서 상식으로 임한다 해도 그 정신 가치는? 누구나 국민은 자유민주의 가치 정신에서 자유경제 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한미 동맹으로 법과 상식이 통하는 자유민주 체제를 지켜야 하기에 지금 우리는 정신 가치를 똑바로 세우고 반체제와 싸워 이겨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왜 그런가 하니 지난 70년을 보아도 세계에서 대한민국처럼 단기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오른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어릴 적 기억을 상기해도 배고픔에 꿀꿀이죽, 또는 삼베적삼에 가마니를 깔고 비료 푸대 종이에 글씨를 써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가난에서 언제나 벗을까? 하는 아득함에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으로 식전에 나가 체조하고 길가를 쓸던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을 왜일까? 필자도 언제 이렇게 70에 들어선 것인지 정말 세월은 유수이다.         우리가 현재 피부로 느끼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엄중하고도 엄혹한 이 시기에 사회적 경비와 경제적 타격이 엄청난 탄핵 놀이나 하고 있으며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로 이질성의 문제, 이념의 갈등, 세대 갈등, 등 양쪽으로 갈라치기 하는 비이상적으로 내 편 무죄 상대편 유죄로 나뉘어 난장판 싸움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이 모두가 정부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잘났다고 큰소리만 요란하고 입법이 다수라 하여 부동산 3법, 공수처법, 탄핵 등 밀어붙이기식이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이며 또한 당상관들의 사적 물적 이득을 취하며 자신의 이익만이 챙기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마치 원칙은 없으며 무원칙만 사회에 만연되어 가고 있으니 이 어지러운 난국에 협치와 하나가 되어도 세계의 글로벌, 시대에서 승리하지 못할망정 이 엄중한 시기에 서로 간의 갈등과 불신만이 가득한 이 시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입법부와 사법부는 냉철한 판단과 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 저항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른바 이 땅에서 자유롭게 누리는 자유를 오히려 왜곡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슬프기도 하다. 북한은 아직도 3대 세습을 하면서 철저한 통제 속에서 사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흑시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악랄한 저 북한 정권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거대한 발 및 정치에 감염이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볼 것을 제대로 보고 알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지식이라 한다면 또한 살아있는 양식이거늘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 즉 지식인들이라 하는 부류들이 아직도 나는 사회주의자다, 라고 하며 강변을 하는 데에는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언제부터인가 한쪽만 바라보고 대부분 왜곡과 맹목에 눈이 멀었다는 것은 이제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지금 그런 쪽으로의 진행형이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은 대부분, 지식인들이었으며 이완용(학부대신)은 지금의 분당 사람으로 1882년 문과 급제를 했었고, 박제순(외부대신)은 용인 출신으로 1883년 별시 문과 급제를 하였으며 이지용(내부대신)은 1887년 정시 문과 급제, 백작 칭호를 받았고, 이근택(군부대신)은 명성황후가 여주로 피난 갔을 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한 사람으로서 1884년 무과 급제, 권중현(농상공부대신)은 자작의 칭호를 받았고 1884년 부산 감리서 서기관으로 출발한 사람들로 3명이 문과 급제이고 1명이 무과 급제, 당시로서는 엘리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합병은 절대 없다. 라는 신념으로 우리에게 강한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권력에 지위를 버릴 각오로 반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온몸으로 극구 반대 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져주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이러한 시대를 겪었으면서도 근대 지식인들이라 하는 자들이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강변하는 주장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는 합리적인 사회주의자로 물음표? 작금의 현실에 주장과 어필을 하는 것인지는 가히 짐작은 하지만 -   정작 원인(遠因)을 따진다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우리나라에 밀려 들어온 일제 치하에 공산주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연결고리가 깊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 <해금 시인의, 정신 지리> 앞부분에 그 근본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과 당시의 공산주의는 일본제국주의가 엄밀하게 수입 금지와 품목으로 통제했던 사상이 올드 커뮤니즘이며 1948년 김일성의 공산주의와는 지적 구분을 해야 하지만 김일성 집권의 공산주의는 탄압과 권력 투쟁으로 시작된 뉴, 커뮤니즘, 커뮤니즘을 구분하지 못하고 해방 이후 이 둘을 모조리 나쁜 것으로 교육 시킨 그 시대의 반공교육 또는 보리고개, 시대 취약한 정권을 반공으로 무장을 시킨 결과이지만 아무튼 1988년에야 그런 실상을 연구하고 알게 되는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어찌하랴-   하여 지금도 공산주의 실상을(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자들과 연결된 Old Comm과 김일성 일당의 집권 이후 New Comm) 알지를 못하고 무조건 공산주의가 나쁜 것이라는 혼동이 오늘날의 어지러움을 낳게 된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한 1948년 남북이 정부수립 이후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서울에 문인 150명 중 100명 정도가 북한으로 올라가 뒷날 모조리 숙청의 그물에서 비극을 만난 것도 김일성의 공산주의 악랄한 수법을 잊지 못한 것이 한국 문학사에 비극이라고 스승인 황금찬 선생의 강의를 들은 바 있다.   사실 해방 이후 3년여 동안 북한은 비교적 질서가 있었고 남한은 찬탁 반탁 등의 어지러운 초기 이승만 정부의 갈등이 북으로 올라간 문인들의 판단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김일성의 악독한 독재를 미처 모르는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소견이다. 이데올로기의 판단이 아니라 당시의 어지러움이 불러온 사회 현상의 문제가 낳은 비극이 오늘날까지 꼬리가 길게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닐까?   맹목적으로 사상을 따르는 것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실상을 모르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의 비극을 넘어 사회 전체의 어지러움을 가져오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좌파와 종북은 다른 것이라 보기에 시대의 맹목적 아니 당시의 사상의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지 못해 맹목의 행동으로 국가 전체를 혼란과 소란스러운 것은 지금도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배운 자 즉 지식인들의 거의 전부라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인 것이다.   5년제 단임 선택을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들도 물론 미흡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을 거부하고 끌어내리는 욕설의 난무와 애국가와 태극기를 부정하는 자들이 국민의 세금을 꼬박꼬박 받아 챙기는 나리들이 있고 관리들이 있는 이상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해서 우려가 되는 것이다. 북으로 올라가 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말을 들으면서까지 굳이 남한에서 소란을 피우고 일삼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가능한지는 필자도 글쎄올시다이다.   필자는 뼈 속 깊이 자유 민주주의 자이다. 인간은 앞날을 생각하는 길을 생각한다면 오늘을 개선하고 수정하며 고치면서 사는 보수, 진보의 간판이 있고 이를 실천하는 명제가 뚜렷할 때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닐까 한다.   오늘도 아니 지금도 북한을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북한 정권을 숭배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해 불가와 중국만 바라보는 친중주의자가 어쩌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도 있는 법, 북한에도 엄연히 북한 백성들이 굶주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북한 인권을 생각하고 북한 정권을 이해한다면 어떻게 그런 이념을 소신이라 하겠는가?   요즘 다시 이해 불가의 관료들이 오로지 북한 정권에게는 관대하고 북한 백성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평화 자유 통일을 할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이렇게 시끄럽고 아우성치는 속에서도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좋은 일이지만 이상한 논리에 이상한 궤변에 너무나 식상하고 기가 차서 사실 외면하고 싶다. 정말 올바른 판단이 없는 이상한 사람들의 바보 놀음이라 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하게 되었는지는? 서서히 그 내용이 밝혀지고 있으며 사법 카르텔이 얼마나 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지를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오늘까지도 부정선거라 하면 21세기에 무슨 부정선거가 있을 수 있느냐며 외면하는 정치인들?   어쩜 이것이 나라의 흥망이 걸려 있는 변수라 하겠다. 사법부의 카르텔과 우냐 좌냐 하는 이념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아마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련을 맞이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또 70년 만의 좌우 이념의 대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로 갈 것이냐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갈 것이냐 하는 엄중하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무엇이 정답인가는 아마도 국민이 직접 깨달아야 하며 20, 30, 청년들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알고 있다. 1. 부정선거 2. 사법부의 카르텔 3. 국회 입법 독주 4. 사법 카르텔 5, 주사파들의 체제 4. 친중 친북 세력들, 을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들을 2시간의 비상계엄이라는 사실을 보고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 단호히 나설 것이라 본다. 또한 60, 70, 이상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알기 때문에 더욱 가열 차게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피를 먹고 산다고 하지 않든가?   아무튼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결단할 때이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느냐 아니면 사회주의, 아니면 공산주의로 갈 것이냐의 마지막 관문에 서있는 것이다. 참으로 지루한 이념의 대결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필자도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6/25 사변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낸 것인지는 국민 모두 알 것이기에 끝까지 민주 투쟁을 하면서 미국 동맹과 자유 민주주의 서방 국가들과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밑는다.     마지막으로 선거관리 위원회는 회피만 하지 말고 솔직하게 감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요즘 스카이데일리에서 날마다 특종을 터트리고 있는 중국 간첩 문제가 사실이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중국 간첩 99명이 새로운 증거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정말 세계적 이슈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깜짝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 속히 모든 것 오픈하여 국민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국민이 두렵지 않은가? 국민은 위대하다. 이제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앞으로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가야 할 젊은이들이다.   내 나라 내가 지키겠다고 일어난 이상 아마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기에 분노하는 청년들을 쉽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현실은 매우 위중하고 앞을 모르는 안개 속이지만 마지막에는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모두 의식 있는 국민이 아니겠는가? 글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없어 턱없이 모자라는 글로서 현실을 꼬집는 것이 대단하지는 않겠지만 글로서나마 현실을 논할 수 있기에 그나마 부글부글한 마음을 억제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긴다.   내 삶의 계산서에서 목록이나마 남기는 것이 글을 쓰는 자의 도리라 보는 것이기에 - 글은 순수하여야 한다는 스승에게는 죄스럽지만 자기 표절의 과욕이라 해도 희소성이 없다 해도 내 철칙은 곧 자유일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모두가 관용 받을 수 있고 모두가 잘살고 싶어지는 그런 나라였으면 하는 것이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도 이제 지나고 이제 최고의 명절인 구정이 지나면 닭의 모가지가 부러져도 새벽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서서히 봄이 오는 소리를 저 멀리서 들려올 것이라 보며 참담한 현장을 목도하는 필자는 이번만큼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쩜 교수, 지식인, 정치 지도자들이 모두 하늘에서 땅에서 내려온 사회일 때 참으로 진정한 민주사회의 구현이 될 수 있을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속히 부정선거가 백일하에 밝혀지고 입법, 사법, 모두가 바로 서고 법치가 세워지는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광화문에 들려 소리 질러 보면서 작금 요동치는 사회 현상이 오히려 국가의 건강을 찾아가는 대한민국이라 희망을 기대하면서- 뒤집힌 민심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자유 민주주의 위대한 서막이 일어날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 하면서 더욱 자유 민주주의가 굳게 일어나 자유 통일로 가는 초석이 될 것임을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모순과 얽힘과 설킴에도 자유를 구가한다는 목청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지금 현실이 나의 어리석음인지, 오피니언, 리더인지 오늘따라 생각이 별나고 유난스러우며 답답함이 오는 것은 왜인지? 또한 오늘의 나를 이끌고 내일의 높이에 이를 수 있다는 사유의 길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듯이 서서히 자유의 길이 보이는 것 같다.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 자유시장경제가 말이다.   2025.01.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집]   [필자 시평집 2]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10집)]  

[신간] 이승섭 대중문화평론가의 베스트셀러집 {무의식의 평행}

  [베스트셀러 작가 평론가 이승섭] 작가『Best seller』라는 명패를 패용(佩用)을 했다고는 하지만 필자의 문학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 제10집을 출간하면서 지금까지의 내 문학을 정리하다 보니 아직 기대치도 못 미치는 상황이라 얼마나 양과 질이 높은 문학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은 필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집무실에서 유명한 고서들을 독파하는 것도 매우 버거운 일이지만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어떠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문학 정리라는 것도 아직도 본인은 미래를 가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늘 아쉬움만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10집을 출간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미래의 창작을 위해 상당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 즉 고독의 의상을 입고 숙명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한다. 시심은 늘 표현으로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의 모습은 언제나 시인의 마음과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출몰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처연한 정신의 줄기가 흐르는 느낌을 남기는 것이다. 철학은 늘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기에 이 물음은 본질로 귀속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를 수용하는 조건이 붙는 것이다.     나라는 일인칭의 무게는 우주이면서 삼라만상의 전부를 뜻한다. 내가 없다면 이인칭, 삼인칭이나 의미는 없게 되기에 나로 향하는 질문은 늘 겸손하고 근엄한 윤리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난설헌 1· 2는】의 문학을 보면 곧 시인 스스로 허난설헌의 일생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 되어 유사성의 일체를 객관성으로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많은 고독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허무는 번민을 가져오고 이 번민은 고독의 그늘에 갇혀 헤매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부재(不在)의 하루 속에서 점차 지쳐가는 나를 발견하면서 즉 거미집의 허무가 깃드는 장소로 스며드는 시간을 오랫동안 감금당해 보았기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허무는 늘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독에 끌려다니다 보면 자신이 허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일생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에 어떤 행동의 특징이 지배적으로 일생을 관통하는 특성의 집약이 있을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세 살 먹은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의 의미는 좋은 뜻으로 말한다면 행동의 연속성을 말하는 의미일 것 같다. 물론 환경에 따라 변하는 일은 예외가 아닐 것이지만 아무튼 지속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분주하게 움직이며 행동하는 것과 하나하나 정리하는 습관의 차이는 성품의 지배적인 요소일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제의 맥을 나로 돌리면 나는 정리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격이 급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유난을 떠는 것은 사실이다. 집사람과는 다른 성격은 느긋한 성미와 바쁜 성미의 대결은 언제나 충돌의 여지가 많았지만 이제 와서 필자가 지나온 높낮이의 언덕은 많았다고 솔직히 토로한다. 그렇다고 무슨 큰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감회에 젖는 그런 평범 중에도 평범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의 결합이지 하나의 주체로서 용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그러나 평론책이 『Best seller』가 되기란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시와 수필 소설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자가 아니 비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구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무게감이 밀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간만 허락된다면 책상 위에서 글을 씁네 하고 자세를 정좌한다. 가령 하루나 이틀 지나도 어김없이 시간을 내어 책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확인이며 정리라고 한다면 정리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디에 가서 이삼일씩 여행하고 집에 와도 이런 일상은 여전하다. 이러한 습관은 내 삶의 모든 면에서 급한 성미의 일단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필자가 지금까지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한 번도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일도 그렇고 시간을 어긴 적도 없이 정확한 계산 하에 외출하는 것도 그렇다. 사실 이런 일들이 쪼잔하다는 말도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범하다는 것과는 달리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고 정확한 일의 진행이어야 한다는 소심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온 나의 결정판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쓰는 글 중에도 잘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의 소홀함도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은 그만큼 타인의 생각으로는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될 수 있겠다. 역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도 내 성미의 일단이라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평판을 받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글의 세계에서도 선전하면서 문학상이니, 작가상이니 하도 많은 상이 즐비하게 있다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상들을 타기 보다는 오히려 숨고 옆으로 가는 길이 내 적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은 성격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함께하지 못하는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쓴 작품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멀었다는 시간 속에서 부담은 있지만 열정과 우직한 필자는 더욱 정진하고 琢磨해야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에 주위에 지인들이 혀를 차지만, 실은 시간은 내는 것이지 시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내 스승님의 말씀이 자네는 다른 작가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야- 했지만 급한 내 성미와 고지식한 윤리라 할까 그런 것을 어찌하랴, 언제나 반골이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스승과 000 박사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 옛날 이천 문사원대학에서 시평의 기본 틀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존경하는 2분도 작고하신 것을 보면서 화무십일홍이며 인생무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느낌은 아니리라- 어느날 문득 모 대학 학장이 어이 자네 와서 일 좀 맡아 줘, 했을 때도 인연이 되기는 하였으나 반골(反骨)이 앞장서는 일에는 내게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맛이 씁쓸하다. 다만 스승과 000 박사에게 따갑게 들었던 말은 자네는 양주동 박사의 12권 전집을 잊지 말고 양주동 박사의 12권의 전집 정도는 상재 해야만 된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과연, 거개인 그분들의 발밑에라도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라 보지만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outsider의 필자가 되고 싶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말이다.     양주동 박사도 <고가연구 문학>과 <고려가요>의 연구에는 국내에서는 따라갈 학자는 없겠지만 사실 문학의 경우는 그렇게 판단은 하지 않으셨던 000 박사님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스친다. 오골성의 성미를 가진 작가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은사의 탑을 펌훼(貶毁)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돈의 무게를 알고 있지만, 학문 가치로 예술의 무게를 아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저서가 훗날에 고귀한 가치로 담보할 보장도 없는 일에 나를 위한 정감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물론 시를 배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다소 쓸쓸함도 따라오지만 어떻든 고맙다. 그리고 기억하리라-   사실 폭넓고 많은 시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outsider,인 필자가 매번 출간 때마다 best seller에 이름이 올라온 것은 사실 필자 자신도 놀라운 일이라 하겠으나 베스트셀러가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만하지 말고 내 인생의 정리를 하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과 언론인으로서 다음 길을 가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말이다.     2024. 12. 제10집 후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문학평론가의 베스트셀러 평론집 1]  

【『2024. 12. 제10집, {무의식의 평행}을 출간, 후』 허기지는 문학】

『Best seller』라는 명패를 패용(佩用)을 했다고는 하지만 필자의 문학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 제10집을 출간하면서 지금까지의 내 문학을 정리하다 보니 아직 기대치도 못 미치는 상황이라 얼마나 양과 질이 높은 문학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은 필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집무실에서 유명한 고서들을 독파하는 것도 매우 버거운 일이지만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어떠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문학 정리라는 것도 아직도 본인은 미래를 가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늘 아쉬움만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10집을 출간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미래의 창작을 위해 상당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 즉 고독의 의상을 입고 숙명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한다. 시심은 늘 표현으로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의 모습은 언제나 시인의 마음과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출몰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처연한 정신의 줄기가 흐르는 느낌을 남기는 것이다. 철학은 늘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기에 이 물음은 본질로 귀속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를 수용하는 조건이 붙는 것이다.     나라는 일인칭의 무게는 우주이면서 삼라만상의 전부를 뜻한다. 내가 없다면 이인칭, 삼인칭이나 의미는 없게 되기에 나로 향하는 질문은 늘 겸손하고 근엄한 윤리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난설헌 1· 2는】의 문학을 보면 곧 시인 스스로 허난설헌의 일생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 되어 유사성의 일체를 객관성으로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많은 고독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허무는 번민을 가져오고 이 번민은 고독의 그늘에 갇혀 헤매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부재(不在)의 하루 속에서 점차 지쳐가는 나를 발견하면서 즉 거미집의 허무가 깃드는 장소로 스며드는 시간을 오랫동안 감금당해 보았기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허무는 늘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독에 끌려다니다 보면 자신이 허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일생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에 어떤 행동의 특징이 지배적으로 일생을 관통하는 특성의 집약이 있을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세 살 먹은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의 의미는 좋은 뜻으로 말한다면 행동의 연속성을 말하는 의미일 것 같다. 물론 환경에 따라 변하는 일은 예외가 아닐 것이지만 아무튼 지속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분주하게 움직이며 행동하는 것과 하나하나 정리하는 습관의 차이는 성품의 지배적인 요소일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제의 맥을 나로 돌리면 나는 정리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격이 급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유난을 떠는 것은 사실이다. 집사람과는 다른 성격은 느긋한 성미와 바쁜 성미의 대결은 언제나 충돌의 여지가 많았지만 이제 와서 필자가 지나온 높낮이의 언덕은 많았다고 솔직히 토로한다. 그렇다고 무슨 큰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감회에 젖는 그런 평범 중에도 평범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의 결합이지 하나의 주체로서 용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그러나 평론책이 『Best seller』가 되기란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시와 수필 소설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자가 아니 비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구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무게감이 밀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간만 허락된다면 책상 위에서 글을 씁네 하고 자세를 정좌한다. 가령 하루나 이틀 지나도 어김없이 시간을 내어 책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확인이며 정리라고 한다면 정리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디에 가서 이삼일씩 여행하고 집에 와도 이런 일상은 여전하다. 이러한 습관은 내 삶의 모든 면에서 급한 성미의 일단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필자가 지금까지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한 번도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일도 그렇고 시간을 어긴 적도 없이 정확한 계산 하에 외출하는 것도 그렇다. 사실 이런 일들이 쪼잔하다는 말도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범하다는 것과는 달리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고 정확한 일의 진행이어야 한다는 소심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온 나의 결정판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쓰는 글 중에도 잘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의 소홀함도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은 그만큼 타인의 생각으로는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될 수 있겠다. 역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도 내 성미의 일단이라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평판을 받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글의 세계에서도 선전하면서 문학상이니, 작가상이니 하도 많은 상이 즐비하게 있다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상들을 타기 보다는 오히려 숨고 옆으로 가는 길이 내 적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은 성격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함께하지 못하는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쓴 작품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멀었다는 시간 속에서 부담은 있지만 열정과 우직한 필자는 더욱 정진하고 琢磨해야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에 주위에 지인들이 혀를 차지만, 실은 시간은 내는 것이지 시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내 스승님의 말씀이 자네는 다른 작가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야- 했지만 급한 내 성미와 고지식한 윤리라 할까 그런 것을 어찌하랴, 언제나 반골이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스승과 000 박사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 옛날 이천 문사원대학에서 시평의 기본 틀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존경하는 2분도 작고하신 것을 보면서 화무십일홍이며 인생무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느낌은 아니리라- 어느날 문득 모 대학 학장이 어이 자네 와서 일 좀 맡아 줘, 했을 때도 인연이 되기는 하였으나 반골(反骨)이 앞장서는 일에는 내게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맛이 씁쓸하다. 다만 스승과 000 박사에게 따갑게 들었던 말은 자네는 양주동 박사의 12권 전집을 잊지 말고 양주동 박사의 12권의 전집 정도는 상재 해야만 된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과연, 거개인 그분들의 발밑에라도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라 보지만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outsider의 필자가 되고 싶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말이다.     양주동 박사도 <고가연구 문학>과 <고려가요>의 연구에는 국내에서는 따라갈 학자는 없겠지만 사실 문학의 경우는 그렇게 판단은 하지 않으셨던 000 박사님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스친다. 오골성의 성미를 가진 작가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은사의 탑을 펌훼(貶毁)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돈의 무게를 알고 있지만, 학문 가치로 예술의 무게를 아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저서가 훗날에 고귀한 가치로 담보할 보장도 없는 일에 나를 위한 정감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물론 시를 배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다소 쓸쓸함도 따라오지만 어떻든 고맙다. 그리고 기억하리라-   사실 폭넓고 많은 시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outsider,인 필자가 매번 출간 때마다 best seller에 이름이 올라온 것은 사실 필자 자신도 놀라운 일이라 하겠으나 베스트셀러가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만하지 말고 내 인생의 정리를 하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과 언론인으로서 다음 길을 가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말이다.     2024. 12. 제10집 후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베스트셀러]                                                                                                                         [이승섭 시평집 뒷면 2]   [이승섭 시평집 원본3]                                                             [이승섭 시평집 서평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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