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요즘 시대에 지식인들이 말들을 한다. 인생은 경영이며 문학은 정신이라고 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학자들은 부르고 있다. 인생과 삶을 경영, 또는 운영이라고 하며 살아가는 일이 다반사라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며 고민과 정신적 긴장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스(stress)로 인한 정신적 긴장감을 어떻게 슬기롭게 잘살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연구와 도서들, 각종 종교와 인도의 요가 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신적 긴장과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물질적으로 자신에게 투자와 시간을 갖는 사회가 되었다. 그만큼 개인들의 삶이 풍족하고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 자신을 찾는 정신의 탐구는 생각과 명상으로 수도(修道)하는 것이 하나에 도구가 되어가는 듯하다. 정신의 탐구는 좋든 싫든 자아가 살아 있기에 신명과 열성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중에 허세와 허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음은 인간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또한 저마다의 삶이 있고 가는 길이 다르며 방법의 차이도 클 것이다.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 맡은 소임에 따라 반복과 다른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고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따라가는 것은 아닐지 - 인간의 경영을 어떻게 하느냐의 따라서 행·불이 정해질 것이기에 삶의 파탄은 대체로 올바른 판단의 기준이 없어 멋대로 아집이나 이기를 발동하는 데서 오는 불행이라면 낮은 자리에서 자리를 잡을 줄 아는 일이야말로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틀림없는 것은 내 그릇대로 담은 그릇만큼 세속의 호사를 누리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자아의 정립은 끝없는 일상의 파문이 이어지는 무늬 같기에 때로는 감동하고, 실망도 하고 더러는 폭발하고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잘못도 있는 것이 삶의 경영일 것이다.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행보이든 불행이든 결정해야 하며 목적을 세우고 죽는 날까지 가는 것이기에 결국, 생과 삶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고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의 귀결된다, 할 수 있겠다. 『2. 문학의 정신』 문학의 정신은 문학에 심취되고 학문에 도취 되어 연구에 몰두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도 문학은 인격의 수용성, 사상의 정신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접신(接神)에 올라야 깊이가 넘치는 글이 된다고들 어느 교수는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공감하는 말이다. 문학은 시대적 요소를 요구하는 우주의 법칙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수단으로 정신 운영을 하는가의 따라 순리론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예를 들자면 문학은 친절, 화합, 등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길이라 했다. 이상의 꿈과 상상으로 떠나는 배가 되듯이 꿈을 대상에 담아 즐거움을 주며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신념에 불가분의 개성과 “무엇”에 합당한지 연출의 대상, 목적의식의 뚜렷함, 등이 문학성의 정신 가치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꿈, 사랑, 삼라만상의 민감한 청력, 자신감, 조국의 애향심 등이 자리 잡아야 확고한 문학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한다면 망설임이나 조바심은 정서와 느림의 미학으로 언제나 사전 뒷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란 모두 어떤 행동을 할 때 맨 앞자리에 놓고 생각하는 경향을 쉽게 불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3. 이성의 마비』 블랙홀(BlackHole) 항성의 붕괴처럼 어둠이고 모두는 보이지 않는 무(無)의 상태에서 멋스러운 눈을 갖는다는 것은 지난(至難)하고 난제(難題)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업 식을 서서히 내려놓으면서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며 더디게 가는 시간을 쪼갤 필요 없이 행동이 가는 대로 올리는 수확에 재미를 알고 주저 주저의 마음으로 칼을 들이대고 무작정 잘라 버릴 것 같은 천 길 단애의 두려움조차 없어지는 일에서 비로소 마음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고 보기에 현실에 적응하면서 자아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면서도 요즘 현실이 너무나 암울하고 사실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것을 방관하고 현실에 이끌려 다닌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 정의가 바탕을 이루는 현실이라면 모를까? 서로가 내로남불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상대를 보는 현실에 어찌 두고 볼 수가 있겠는가? 보라, 선관위 사건, 돈 봉투 사건, 거짓말 등 말이 말이 아니라 거짓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이를 보는 초라는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 세계 정세와 지구촌은 하나로 연결되어 한 치 앞을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초를 다투는 이 시대에 서로가 단합하고 하나가 되어 달려가도 쫓아갈지 의문인 이 시대에 아무리 말로 하는 정치라 하지만 서로 대결로 이어지는 마지막 승부수인지 아니면 국민을 가, 붕, 개로 아는 것인지 정신들 차려라- 직무 유기를 일삼는 신의 표정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 노릇이 아닌가.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일에 진저리가 처진다. 정말 불의에는 법대로 잘한 일에는 박수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정서적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정말 정서의 블랙홀이다. 아무것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 바람도 없고, 산도 없고 오로지 어둠의 깊이에서 살아야 하는 의무감밖에 달리 없음을 뉴스 속에만 가득하다. 이런 현상에서 골라 먹는 백성들의 위장은 소화불량으로 탈이 났고 고칠 수 있는 제동 장치나 의사가 없다는 부재의 갈망이 끌려다니는 개와 같지 않을까? 그래도 백성들은 희망을 찾아야 하고 길을 만들어야 하고 신념을 일으켜 세우는 불을 켜야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 자정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말은 쓰레기장에 던져지면 아우성이 된다. 질서를 회복하는 일은 말의 줄을 옳게 세우는 일이라면 길은한 가지이기에 말의 성찬에 기울이다 보면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설득당하는 뜻이고 이런 현상은 정서를 잃어버리는 결과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유의 구가하는 이성의 일탈이 심하고 정도가 없는 혼란이 가중되는 느낌을 많이 갖는다. 젊은이나 나이 많은 어른들의 의식 대결이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하는 불행이 깊다는 것도 말의 성찬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서 마비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좋은 글 한 구절이 구원의 메시지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갈증에는 물 한 모금이 필요한 것이지 말의 꼬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 씨가 되는 말이 있듯이 말 장사꾼들의 분석이나 변명을 듣노라니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입을 닫고 눈만 굴려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너무 우울하다. 이 사회의 덫에 걸린 거미줄이 된 것 같아 이 사회에 백성만 불안할 뿐이다. 이제는 사랑이다. 자기 사랑, 문학 사랑, 뿐이며 인생은 경영, 문학은 정신이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벌써 2024년 갑진년도 2월로 접어들었다. 벌써 갑진년 푸른 용띠 해가 시작되었고. 2월 입춘대길(立春大吉)도 다가오고 최대명절인 설날도 2월 10일 다가왔으니 세월이 유수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봄이 오는 듯한 비가 내리고 타 계절 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정감(情感)을 주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혹독했던 추위도 춘련(春聯)이라는 입춘대길·건양다경(立春大吉·建陽多慶에)에는 속수무책인 듯하다. 갑진년 첫 번째 절기로 새해의 시작을 알리고 다가오는 봄을 알리는 그리고 좋은 일들만 있으라는 의미에서 춘련(春聯)을 붙이는 것이다.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으면 하는 건양다경(建陽多慶)이지만 봄을 기다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서민들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볼 수가 없다. 전 세계가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각종 이상기온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 사회와 정치는 이념의 갈등으로 상대는 적이고 나 아니면 그르다는 이분법으로 개싸움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고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이성이 있을 때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듯이 이성이 불을 켰을 때 비로소 다수가 지배하는 판세를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을 보라- 우리의 현대사에서 민주라는 말은 전가의 보도처럼 내 갖는 것이 오로지 라는 패권적인 사상과 사고가 지배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늘 불통, 이분법, 거짓, 변명 등에 막힘이 나타나고 독선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가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온 것이다. 내가 가장 옳고 상대는 타도의 대상임을 억지로 강변하는 데는 세계에서 1등일 것 같다. 심지어 북한의 이름조차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란 미명에 합리주의니 또는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고 자랑까지 하며 사회주의라 하기도 하며 자랑스럽게 민주주의를 대표한다는 신성한 국회 안에서 무슨 북한이 정당한 국가라는 세미나를 열고 있는 현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정말 정치판의 사상이 실종된 자들의 소행이라면 한나라의 진로가 암담할 뿐이다. 이제는 정면으로 본색을 들어내면서 이른바 통일이라는 미명에 다수의 의석으로 마구잡이식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좌파의 정치는 자기들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무서운 복수의 열전을 보는 것 같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무슨 안건이건 서로 협치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좌파에 속성 거짓 집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국민이 안타깝다. 좌파 언론들에 거짓 선동이나 떼쓰기의 본보기가 지금도 여일(如一)한 수법은 끝이 없는 듯하다 우리의 정치는 가히 집단적 이기주의, 편협한 사고,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치의 실종이 너무 심하다. 전통이 부재한 데서 나오는 천박한 사고의 전형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생각의 깊이가 없는 결론 아니면 답안이 도출될 수 없는 예일 것이다. 하루가 멀게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서로 비방과 선동에 춤을 추고 있음은 오늘의 우리가 되었음은 정말 부끄러움으로 치부할지, 아니면 이 현상을 어찌해야 할지는? 정치가는 자기 영혼을 팔아 권력을 쟁취하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역사를 바꾸지 못하는 잠시 왔다 사라지는 하루살이의 존재의 길을 선택한 우매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름 석자는 이내 사라질 뿐이다. 그래서 권력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무상이라는 말은 허무라는 뜻이 있지만 정작 다시 권력의 맛을 추종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을 보면 아마도 권력은 무안함인 것 같다. 누구나 우뚝 서기를 바라며 남보다 앞서 누리는 권력 맛을 누리는 것은 비단 고메한 사람만은 아닐 것 같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그렇고 모든 사람은 정작 권력에 굴종하고 아부하고 또 그런 맛을 음미하려는 동작이 은근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다시 또 선거철이 되었나 보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면서 줄 서기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 어디를 가든 요지경 속이며 분주한 일상이다. 선거철만 되면 우후죽순으로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개구리 튀듯 여기저기 분주하다. 그러나 화려는 짧고 허무는 길 것이라는 되풀이 예는 실컷 보아왔다. 사람 같은 사람은 숨고 개구리 튀듯 여기저기서 물장구치는 때가 오고 있다. 이솝의 <파리와 꿀단지>를 읽으면 허망은 항상 입을 벌리고 있는 불행의 증명일 것이다. 오늘날 정치라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타매(唾罵)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자질의 문제인 조정과 수습의 능력이 부재한 데서 나온 일이면서 시대의 앞에서 사고하고 이끌어야 하는 안목의 결핍으로의 원인이 정치를 희화화 혹은 불신으로 바라보는 필연이 아닐까? 그러나 역시나 정치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특별한 권력의 매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렇겠지만 자기를 모르고 덤비는 일이야말로 자기의 불행과 국가적인 불행을 함께 맞게 되는 아픔이기에 스스로 돌아보는 일이 우선이 아닐까? 서민으로부터 임무를 갖는 일도 지도자의 덕목 못지않게 비중을 갖는 일이기 때문에 백성은 현명한 판단과 행동이 주요 임무라면 서로 간에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자기 영역에 충실한 경계(境界)의식을 필요로 할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백성은 사고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자각증상 혹은 사명을 의미할 것이다. 현대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고 한다. 대통령으로 군림하려는 사고를 갖고 지도자가 되려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시대는 이미 과거와는 완전히 패러다임이 버뀐 시공의 구조를 이해하는 정치(精致)한 영역을 이해하고 조정하는 능력과 미래를 조감하는 안목까지 갖춘다는 것은 결국 조언자그룹의 결성과 조정의 기술을 갖는 통솔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명망을 거머쥐기 위하여 또한 한풀이로 정권을 잡겠다면 자기 비극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쉽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혁명의 시대도 아니요 또 느슨한 행정의 시대도 아니다. 급격히 다변하게 변하는 IT, 시대, 반도체, AI, 시대이며 희망의 언덕을 말하는 안목이 있어야 변화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균형의 분배경제, 균형의 권력분배, 균형의 문화 향수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지대한 것은 물론이고 다가오는 미래의 변화를 예견하고 수용하는 준비의 길을 말하는 지도자를 갈구한다. 지금은 오로지 어둠의 시대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갈망할 뿐이다. 그리고 기대한다. 엄혹한 시대에 백성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제 5의 경제 터널을 벗어나 보자. 수신제가치구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일 뿐이로다. 필자가 칼럼을 쓰는 이유도 이러한 이치에 소회(所懷)일 것 같다. 세월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면 땅으로 떨어진 낙엽의 군상에 초라함도 보이고 더러는 책꽂이에 꽂아 둘 만큼 아스라한 색깔이다. 겨울비가 추적거리는 날 거실로 들어온 늦겨울 풍경에서 필자의 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서성거림이 눈에 들어온 정경이 세상의 이치는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봄으로 가는 입춘(立春)에 그래도 모나지 않게 살면서 꿈속으로 그리는 명품 사회에서 다시 볼 일이기 때문이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우리가 살면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슬픔으로 다가선다. 불통이라는 것은 교육도 아니요 서로의 정서의 층(層)이 겹겹이 쌓여 있으면 좁힐 수 있는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현실정치에 살고 있다.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정치가 과연 국가나 사회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까발리기 싫을 때 결국 위장의 가림막이 있고 그 가림막 속에서 온갖 술수를 부리는 모양이 정말 목불인견이다. 왜 그럴까? 어찌 인간이 되어 국민을 섬긴다고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그리도 뻔뻔한지 완전 마이동풍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정서의 층이 어긋날 때 불행이 검은 장막을 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제자가 둘이 있다. 장군 알카이베스와 플라톤이다. 알카이베스가 전쟁에서 패하자 누군가 희생에 재물이 필요하다는 30인의 참주들에 의해 독배를 마시는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 나이 70이었고 제자 플라톤은 28살이었다. 30명의 참주 중에는 친척이 있어 도망을 부추기는 자들도 있었지만 배불뚝인 매부리코인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을 넘긴다. 이 말은 지금도 많이도 회자(膾炙)하는 교훈이지만 정작 정치가들에겐 편리할 때 사용하는 인용어이고 유효하게 쓰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00명이다. 이들의 특징은 변명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믿지 못하는 자칭 양심세력이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을수록 뒷날에 국회의원이 되고 정치가라는 화려한 부활을 하고 뺏지를 이용하여 그리고 케미(호흡)를 강조하면서 떼로 몰려 다니면서 법 뒤에 숨어 방탄조끼를 입었느니 하며 요사스러운 농간을 부리고 있고 지도자연하는 일들이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참으로 가관이며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법이란 폭력을 배제하는 점에서 지켜야 할 덕목임에도 지키지 않으려면 법은 죽어있는 이름일 뿐이다. 탈법과 불법을 일상화하면서 이를 자기변명으로 정당화하는 지금까지의 대 다수의 정치를 무시하는 이유는 모두가 자기변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국회의원 대부분이 그러했고 지금도 의원들은 최고위원을 하면서도 잘난 변명을 일상화하는 일은 난센스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러하니 무슨 믿음의 위정자자 될 것이고 이들을 믿고 따르는 철부지 백성들이 있는 한 한국 민주주의는 껍질 공화국이다. 지금 이 땅 국회의원들의 3/2 정도는 이런 무자격자들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조 없음을 넘어 거짓말 행진으로 근근 지탱하는 나라의 운명이 하소(煆燒)인 것이다. 그렇기에 망해야 할 패륜 집단 북한이 존립의 근거와 조직에 이를 따르는 종북 세력들이 횡행하는 작금의 처지도 따지고 보면 남한의 거짓 정치가들이 이용에 놀아나는 일이 현재도 상당수이며 일어나는 현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추세가 사상이 없는 현상으로 생각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정신의 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정권교체가 되어 다행이지만 아직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네 현상이고 이를 막지 못하는 양심의 마비가 진행형이 된다는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서구위 개인주의와 “우리까리”의 붕괴에서 오는 과도적인 현상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 사상의 무게와 서구의 개인적 존중 사고 때문에 경찰이 잘못된 자는 가혹하게 다루어도 말이 없지만 우리는 경찰이나 검찰의 말도 신뢰를 일탈(逸脫)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정권 퇴진운동이니 촛불을 들며 민중 봉기로 착각하는 무지한 여론이 지배적인 풍미로 사회를 마비(痲痹)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심사상의 형성이 미흡하다는 결론이다. 설사 어른이 당연한 꾸중을 해도 “당신이 뭐냐” “간섭하느냐” 반론이 먹히는 마비 현상이 나타났다는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 중에 하나일것 같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약속을 어기는 자를 받아드리는 속물 근성이다. 민주국가에서 북한의 어긋난 추종세력을 꾸짖지 못하는 일도 이런 관성화의 시간이 너무 공고하다는 데서 갈등이 요란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그 시절 운동권 586세대들 거개가 요즘에 국회로 대거 들어와 행세하는 정치판이 되었으니 무슨 미래를 가질 수 있고 막무가내의 횡행이 당연시로 나타나는 국가에 무슨 정의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 참 답답함만이 든다. 더욱 후안무치로 이런 철판을 깔고 활개 치는 자들이 정의와 민주를 역설하는 입을 보면 오히려 민주주의가 불쌍한 지경으로 생각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지? 북한의 악랄함에는 입을 닫고 시시콜콜 자기 나라를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는 계기는 결국 교육과 정권이 바뀐 현 정부가 단호한 결정으로 해결해야 할 목표이고 타개 해야 되는 것을 국정과제로 삼아 진정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주기를 기대한다. 민주노총, 귀족노조, 언론노조, 교원노조, 사이비 종교 등이 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된 자들이라면 하루속히 뿌리 뽑아야 한다. 마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뼈 없는 인간이 되었고 목청이 큰 자의 세상이고 우기고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탈법 정치꾼들이 지배하는 한 새 희망의 불을 켜는 일은 절망으로 다가 오지만 이번 정부를 믿어 보면서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정치를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1. 2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거제도(장승포항} [거제시 매미성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한국문학은 현재 이념의 사상과 상대성 원리로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픈 부위를 치료하고 메스(mes)를 들이대 종양을 제거해야 할 상항이라 판단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이념에(이데올로기) 매몰되어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학인, 세속에 묻혀 아웃사이더로 활동하는 인재들을 불러내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이 현상을 타파해야 한다. 사실 한국문학은 1998년부터 현재 문학의 판도는 조용하다 못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소수의 문학인만이 한국문학을 좌우지 하는 것을 보면서 뚜렷한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사는 수많은 문학인이 있거늘 침묵이 일관하는 현 상황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문학 발전을 위한 발언이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필자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또 시작되었다. 이사장을 선출하느니 분과 위원장을 선출한다느니 카톡, 문자 등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실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한국과 북한의 대비가 중요하겠지만 현 북한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젊은이 하나가 왕족 세습과 우상 숭배가 무슨 문학인가?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 무슨 문학이 있겠는가? 한국문학도 만인보니 노벨상 입후보 다 하면서 문학인을 흥분시키더니만 기껏 미투라는 소송에 걸려 보이지 않다 무슨 심산으로 시집을 출간했다고 언론에 집중을 받는 것을 보니 참으로 이율배반이다. 최소한의 도덕적, 윤리적 사과를 하고 상재를 하든가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리도 뻔뻔할 수가 있으며 그리 추한 모습을 보이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만한 이름들이 줄줄이 있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모두가 안속주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문학의 문 앞을 서성거리던 작가들의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지는 물음표일 뿐이다. 늘 반복적으로 환기(換氣)시키고 어필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문학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평가이지 무슨 이념과(이데올로기) 세력과 패거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에게 치열성을 강화하는 일이 한국문학의 심도에 이바지하는 대답일 수밖에 없을 때 한국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문학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국은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思想)의 승화(昇華)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 그런가 하면 설명이 간단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은 이상 없다> 같은 위대한 전쟁 문학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통일 = 『필자는 통일이라고 보지 않지만』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 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 정립에 따른 각 충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일의 안목이 없었으며 근대 시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7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나 통렬하고 패배주의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에게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에 금시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정치가는 지난번 한국에 무슨 간첩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정말 한국에는 간첩이 없는 것인가? 그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버젓이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 해지며 서을시 예산으로 아이들 북한 교육을 시켰다는 뉴스에 기가 막힌다. 북한은 아직도 세습정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겠는가? 오로지 김일성 일가로 향하는 문 이외는 모두가 차단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합리로 둔갑이 되고 지속적인 미사일을 쏘아대는 현실에 <우리>라는 정서가 필요한 것인가. 완전 좌파 사상 최면을 이용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 북한을 찬양하며 편 가르기, 우리라는 이분법으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라는 실정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의 터가 없는바, 일방적으로 공동선(善)이 없어지고 독선적 메아리만 울리니 이 어찌하오라까? <나> 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자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 사상의 발전 모델이라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끼리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는 것이기에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한다는 점에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유행했던 대하소설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로 보여(Showing)주었을 뿐 정작 작가의 고뇌가 담긴 해답(healthy thoughts)은 없다고 단언한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텔링의 깊이에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방 수준이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귀족으로 자기 사상을 실천하기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배분하였고 <땅만으로 살 수 없다.> 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종국에는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이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가장 추운 겨울 1월 우랄철도의 시골 역에서 쓸쓸하게 죽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었다는 감동은 그의 인간의 도의와 의리를 참된 삶의 표상을 보고 멋진 삶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진리(眞理), 열애(熱愛) 왜 톨스토이는 그런 말을 했을 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실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等價)를 이룰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불어 놓고 획득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최고의 걸작 소설인 <모비 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생전 갖은 모멸감과 굶어 죽기 전 언론에 죽었다는 기사 하나 나오지도 않았으며 그만큼 멸시와 모시와 고독을 감내했다. 살아생전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그 후 70년이 넘은 후에 평론가에 의해 빛나는 시인이 되었고 우리의 애국지사 한용운은 1926.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운동의 실패, 옥살이 3년을 한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1965- 40년 후 박노순 인권한의 <한용운 연구>에 의해 유명 시인으로 등극했으며 애국지사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사실 윤동주도 많은 시(詩)를 집필하지 않았지만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유명해지고 애국지사라는 칭호까지 받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 사상의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다. 물론 이육사도 그렇지만-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이 파문은 따라오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라는 함정이 기다리고있다는 것도 경계해야 할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3의 자리에서 창조하는 길인 것이다. 흔히 문학은 정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결국, 문학에 본질은 사상의 실현이고 정신이 곧고 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바라보는 본질에 있어 올바름은 사실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기에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는 멀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끝으로 문인의 사회는 정신이 올곧은 집단이다. 때로는 얼음에 박 밀 듯 완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신의 기둥을 갖고 살아온 선비 사회가 아닌가 선비를 선거로 뽑는 일이나 숫자 놀음으로 어른을 뽑는다면 정치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집단이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면 외면은 당연지사이다.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는 일이 곧 옳은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는 점에서 정신의 조타수인 문인 사회의 헝클어진 현상을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특히 문단이 선거꾼들의 경연장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문단의 상층부엔 쏠림 현상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는 협회의 간부들로 가득한 현상이라면 퇴보로 이어지는 이상이 있음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필요할 것 같다. 2023. 01.1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이승섭시평집] [범바위 전망대]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가 이천시 율면으로 이사를 오게 된 이유는 고향 없는 서러움과 고향의 향수가 그리워 어찌하다 보니 율면 고당리에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부끄러운 과거일시 분명하다. 핑계일지는 모르나 어쩌면 그렇게 그 옛날 용인, 중리 라는 마을과 비슷한 곳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소 늦다고 할지 모르나 후회는 없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이익을 탐하는 노릇이라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익을 탐하기 위해서 이사를 했다면 도시로 나가서 아파트를 사서 돌리고 돌리다 보면 자연스레 이익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없다.라는 것이다 것이 필자의 경제 소신이다. 그래도 필자는 법을 준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노후에 편안한 삶보다는 산속에서 전원을 느끼며 새소리, 수목 산천과 어울리며 자유로운 영혼 속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왔기에 더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고향 같은 산속이라 내 소원을 푼 셈이라 하겠다. 그러나 요즘 들려오는 소리와 나라가 시끄럽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고 너도나도 살기 버겁다 난리들이다. 온 세계가 전쟁과 경제위기와 고물가로 몸살을 넘어 경제가 어렵다는 것에는 모두가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위에 보면 수사를 받는 사람들이 몇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본다면 그 사람들은 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인지 참 기가 막힐 지경이다. 또한 북한의 김정은은 우리를 주적이라 부르며 미사일을 쏘아대고 광기를 보이고 있고 헛소리의 집합이 극심하며 허소리 정보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악성의 댓글들은 정신계를 어지럽히는 중구삭금(衆口蔘禁)이다.물론 여론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며 믿을만한 정보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이런 현상들은 민주라는 이름에 도전하는 도덕 불감증의 잘못일 수 있다는 일로 볼 때 무서운 개인의 파멸을 가져오는 경우가 심하다. 순식간에 퍼지는 악성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으며 진실 게임으로 번지는 일로 치부하면 회복 불능의 아픔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위험의 수위에서 곡예사가 되어 외 줄을 타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러신가? 이제는 그물처럼 펼쳐진 법이라는 테두리를 만들어야 한다. 한번 열거를 해보자, 민주노총, 공무원노조, 등 다양한 단체들이 법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왕국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과연 법치주의가 있는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도덕적인 양식(良識)이 전개되지 않는다면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사실을 알아 지금부터라도 법은 공정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사실 지금도 보면 흔히 청문회에서 이른바 자녀가 명문교를 보내기 위해서 주민등록법을 어긴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공직자가 대부분 아닌가? 분명 잘나가는 사람치고 법을 준수한 경우가 없는 것 같은 현상은 작금의 사회나 청문회 단골 사항인 데서 이젠 식상(食傷)하고 으레 그럴 것이다, 라는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지는 추세에 아픔을 겪는 과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금 전 국토부장관 원희룡 장관이 시무식에 하는 말을 들었다. 작년, LH 사건도 설명하며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공헌하지만 글쎄올시다.이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공염불을 해논 터라 기다려봐야겠지만 7개월에 1회씩 이사를 하였다는 어느 고위 공직자를 보면서 누가 보더라도 자녀 교육 때문에 이사 유혹에 빠진 것을 보면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변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요설(饒舌)일 수 있지만, 그들도 청문회장에서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방어막을 쳤다 해도 너무한 것은 사실이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지나친 느낌이다. 아울러 이 나라 지도자의 수준이 이토록 어리석다는 점에 가슴이 쓰리다. 어디 그뿐이랴 언젠가 고위 공직을 지냈다 해서 전관 예후로 누리는 기막힌 5개월에 16억을 벌었다는 기록에는 숨이 막힌다. 그가 청문회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해도 상식을 넘어선 변명에 누가 따를 것이며 지도자의 덕목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그들만의 생각이 아쉽다. 평범한 변호사는 1년에 기껏 1억의 수임도 힘겨운 현상과의 괴리와 대비가 초라하다. 공동의 목표란 가정의 행복에 초점이 모아지고 그런 일에 의견을 함께 하는 것은 지도층의 경우에는 더욱 엄격한 잣대가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현실을 목도(目睹)하는 필자는 아내나 자식의 허물은 곧 당사자의 허물이고 이를 변명으로 덮으려 하고 있다니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인 것이다.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존경 근처는 갈 수 있어야 지도자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음은 당연지사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말의 성립은 곧 당사자와 가족과 분리되는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에서 출발하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아내가 너무 똑똑하면 남자는 힘겨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똑똑하고 현명한 아내는 남편과 키를 맞출 줄 알고 자식의 교육에서는 비교의 안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 어머니가 남의 자식보다 월등하기를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뛰어난 교육을 받으려는 욕망이 없을 수는 없지만 지도자의 지위는 아무나 누리는 자리는 아니기에 금도(襟度)를 헤아리는 지혜가 없다면 남편도 바보의 행진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땅에 지도자의 회의를 느끼는 것은 필자만일까? 정말 역사적인 줄기에 슬픔을 느낀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거개의 경우 탐욕과 물욕에 삼켜버린 현상이 더 많았음은 역사적인 불행의 그늘로 치부한다. 현명한 지도자를 갖는 일은 국민의 행복이라면 그 점에서 국민의 가슴 아픔은 결국 비극적인 현상을 감수하면서 인내의 길을 걸었던 오랫동안의 아픔이었다. 이 불행의 그늘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계묘년에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정권이 바로 서는 한 해가 될 수 있어야 하지만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상대가 있기에 더욱 의식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법치가 바로 설지는 케션마크 (?)이다. 백성 모두가 깨우침의 농도가 밝을 때 얻게 되는 이름이라면 지금은 지도자의 의식이 국민의 의식을 압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초라하게 따라오는 이름일 것 같아 초조함이다. 국민을 위한 봉사라면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한 의식의 깨우침이 사회 곳곳에 고르게 번질 때 맞게 되는 이름이라면 지금 우리의 경우는 회색빛이 역력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국민성과 법치를 내세우는 기치를 걸고 한번 시동을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통을 역설하는 정치판의 아성은 모조리 소통의 사회학이 낮잠을 자는 어둠을 깨워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삶의 어려움도 동반하는 것 같아 백골난망(白骨難忘)이지만 그래도 이 어둠을 깨우라 지도자, 지식인들이여 2023. 01. 0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경북 성주] [용인 송전호수] [등대사진 공모전 우승 작품]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예술평론가/이승섭 사실 적이 없는 사회는 없다. 그러나 서로가 얼마나 합리성을 갖춘 지혜와 지성을 갖는가의 여부에 따라 야만적인 비참한 모습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은 언제나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한 국가나 시정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에는 본인들 정서와 지성에 따라 또 양심에 따라 불을 켜는 일이 이를 서로 완화하는데 대안일 것이다. 안성시와 의회도 같을 것이라 보기에 인간은 희망의 불을 켤 줄 아는 지혜 때문에 생존하는 것이다. 문제가 서로가 많음에도 해답은 있어야 하며 또 있음이 당연한 이치로 돌리는 것도 이간이기 때문이다. 서로 지성과 양식에 의한 시정을 이끌어야 하지만 당리 당략에 빠져 상대는 무조건 반대해야 된다는 논리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이다. 상대방은 언제 또 그렇게 당하고 상처를 입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는 생물이고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 참으로 모순의 얽힘과 설킴에도 자유를 구가 한다는 목청에 끼지 못하는 필자의 모양이 유난스러운 것인지 몰라도 참으로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안성시 지방자치 역사상 처음으로 안성시의회가 시장과 다른 정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한 여소야대로 구성된 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7월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장과 국민의힘이 다수의석을 차지한 시의회가 출범한 후 의회 인사와 시장 공약사업 문제 등으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내년 본예산안 심의를1개월 남짓 앞둔 상황에서 안성시와 시의회의 갈등이 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예산에도 영향을 미쳐,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안성시가 시장 공약사업을 추진하면 시의회는 공약사업과 관련한 조례안 부결과 예산 삭감을 통해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 안성시는 시의회의 반대를 무시한 채 공약사업을 강행하고,이 사업들은 시의회에서 다시 논란이 되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특히,안성시는 안성도시공사 설립과 관련해 비슷한 내용의 수정 조례안을 만들어 다시 추진한다는 입장이다.시의회가 예산을 삭감한 읍면동 정책공감토크는 다른 예산을 사용해 진행 중이다. 또 시의회가 조례안을 부결한‘공영마을버스’와‘지역화폐’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시 입법예고를 하고 있다. 안성시는 국민의힘이 다수의석을 차지한 시의회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시장 공약사업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 국민의힘 시의원들은 시장의8대 핵심 공약인 안성도시공사와 공영마을버스 등 공약사업을 집중적으로 견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열리고 있는 임시회에서도 시장의 공약사업인‘민원상담 콜센터 운영 민간위탁 동의안’을 부결했고,노후화된 행정복지센터 신축 이전 공약과 평생학습관과 관련된 공유재산관리계획 변경안을 심의 보류했다. 따라서 시의회를 장악한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성시장의 공약사업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막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안성시장과 안성시의원의 임기는4년 남았다. 안성시가 시장 공약사업을 추진하면,안성시의회는 막고,안성시는 다시 시의회를 무시한 채 강행하고,시의회는 다시 공약사업에 제동을 걸면서4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안성시민들의 선택을 받은 정치인이라면 안성시민들을 위해 본인의 고집과 욕심을 버리고 협상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어찌 보면 여소야대의 상황에서는 서로가 한발씩 양보하는 협치가 필수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눈에 비치는 안성시와 시의회의 모습은 시민들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한 협치를 고민하기보다는 상대방을 굴복시켜 본인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안성시는1개월 후 안성시의회에1조 원에 달하는 내년 본예산안을 제출해야 하고,안성시의회는 본예산안을 심의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이라면,안성시는 시민들과 관련된 예산보다는 공약사업 중심의 예산을 편성할 것이고,시의회는 공약사업 중심으로 편성된 예산을 삭감하면서 갈등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된다면 주권자인 시민들과 관련된 예산은 안성시와 시의회 모두에게 외면당해 실망이 더욱 커지면서,민심은 동요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안성시와 시의회는 시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협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시정의 경영이란 페쇄적인 시정이 아니라 개방적인 시정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권자인 안성시민들의 냉혹한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022. 10.31.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예술평론가/이승섭 [안성시 청사]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누구나 처음은 미약하고 소득이 별로 없는 이유를 찾아 반성하고 아파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능숙한 기술자 없고 시작부터 유명해진다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할 여지가 매우 높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은 한쪽발이 땅에서 가까워야 하며 또 견고한 이유가 뒷받침될 때 높이 오르는 길이 다져질 것이다. 필자 스스로 고개 넘어가는 길이다보니 깨닫는 일이 새삼 새로운 것들로 느끼는 요즈음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젋은 날을 지나 장년의 분주함 그리고 닥쳐오는 노년의 길에서 새로운 도전이란 말은 너무나 버거운 일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일이 곧 노년의 마지막과 연결되는 줄에 이어졌기 때문이다. 젋어서의 일이 이어진 삶의 일이고 또 늙어서도 그런 일이 마침표를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방향전환의 일은 매우 희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이유는 타당한 일이 아닐까? 사실 필자의 글쓰기 그리고 전원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은지금도 유효하기에 아직도 왕성한 진행은 하고 있지만, 그리고더욱 많은 것을 써야 하기에 전원을 가서라도 줄기차게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에 사실 마음은 조급증이다. 사실 다소 늦은 글쓰기이지만 은퇴와 더불어 전원에서 다시 글로 길을 넓히는 일이 하나의 생활이 될지언정 글과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자신을 하지만 사람 앞일은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일인지라 그 속도를 따라잡을지는 글쎄올시다.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일이 숫자로만 정하는 것은자랑은 아니기에 나를 시험하는일로 하루하루 재미로 살아가려 노력하려 한다. 타인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고독을 위무(慰撫)하기 위해 글과 맞붙어 살아가고 싶은 자아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내면의 휴머니즘의 사상이지 않을까 한다. 세상의 진행은 모두 이유가 내재해 있다는 점이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고 결과가 원인을 만들 합리가 되지만 필자는 나를 스스로 위촉하는 성적으로 인해 나서기 보다는 오히려 나 스스로에 혹사를 가함에서 즐거움을 갖는 성격이기에 누구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시를 그리고 또 칼럼, 시평 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쓰려고 한다. 사는 일에 가정법이란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오늘을 합리로 이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오늘을 위안하는 일은 곧 현재에 만족을 갖고 살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떻든 나는 많은 글을 요즈음 왕성한 필력으로 그리는 중이다. 물론 전원으로 간다는 다소의 기쁨도 있지만 사실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실험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2022년도 12월에 안성을 떠나 이천으로 나의 삶의 보금자리를 옮긴다는 마음이 평소답지 않게 흥분은 되지만 전원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급적이면 타인에게 베풀면서 버거운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필력을 시험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좌고우면할 시간도 없으며 특별히 성을 쌓을 일이 없기에 신명을 발휘하는 글에 내 삶을 투척하는 일도 어쩌면 행운일 시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내일에 자긍심을 갖고 하는 일이기에 다작은 못되지만 위안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렇다 온종일 책상앞에서 글을 짜내는 일이 달리 보면 웃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23년이 얼마의 글이 써질지 추리하는 내 머리에는 신화의 그물을 치고 싶어진다. 여전히 앞으로 가는 보행은 건강하기에 더욱 왕성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초조의 마음을 안 가지려 한다. 지금까지 직장이나 모임에서 등등 남보다 더 치열성으로 앞서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초조를 달고 살았다. 이제 욕심을 부린다면 추하고 덫에 걸린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체념의 순간도 빨라야 하며 망각의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조짐을 순수하게 받아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부족에 만족을 아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하니 갈증 현상은 더 많은 에너지의 공급을 위해 노력하고 겸손하고 고개 숙이는 삶의 동력을 갖는 이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말수를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앞으로 나의 삶이 전부가 아닐까 하면서 가는 것은 순식간이고 다가오는 것 또한 그렇거늘 이 중심에 선 존재자의 자세는 더없이 중요한 몫을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종국에는 자기의 현실을 받아드릴 때 비로소 적정의 수위를 유지하면서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에 만족을 갖을 줄 아는 일이야말로 만족을 채울 줄 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돌아보면 젊은 날의 패기 있고 사치스러운 지난날들의 기억이다. 무조건 남의 말에 끼어 내말이 옳다. 라는 주장이 얼마나 상대방을 곤란하게 느꼈을지는? 이제 전원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고독의 목록을 이겨야 한다는 숙제가 한가지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무작정 독파한 독서가 내 삶의 모두를 위로하는 목록일 것이기에 이제는 글을 쓰는 일이 주된 시간의 소일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결국은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처지에 소화제와 같은 구실을 다함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저녁을 먹고 서재로 올라와 다시 글 줄기를 이어가는 내 일상은 어쩌면 배고픔을 기다리는 일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 같을 때 허기는 일상적인 명제로 남는 것이 글과 배고픔은 어쩌면 전원에 가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보면서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의 숙명을 타고난 존재라 했듯이 이성의 불을 켜고 곧게 산다는 명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기 수련 혹은 중심 잡기라는 숙제를 처리하는 신념이 우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련을 시련이라 느끼지 않으며 지속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수용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일은 방심할 수 없는 나의 발견이라 생각하며 그 발견이 있다면 바람이 오면 바람을 따르고 물이 차면 비우는 일이 우선이고 때묻은 일은 한사코 거부하는 생리적 몸짓에서 내 삶의 그림자가 흔들릴 때면 집 앞에 연못에 떠 있는 마음을 잡아주는 연꽃에 마음을 묻으면서 살리라고 다짐하면서 이 밤에 달빛이 보고 싶은 충동조차 아름답다. 2022. 10. 30.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황금들녁1]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맞다! "한국 내전 전야에 내린 윤 정부의 선전포고! 죽느냐 사느냐, 그 치열한 싸움 시작됐다! 한국내전(Korean Civil War)이 본격화하고 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헌법수호 세력과 민중민주주의 변혁세력 사이에, 사느냐 죽느냐, 싸움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내전의 성격을 단적으로 정의(定義)했다. “주사파는 협치의 대상이 아니다”이 싸움은, 1985년을 고비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도권과 기조(基調)를 주사파가 장악하면서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 싸움의 기원은? 그러나, 주사파는 내부적으론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다짐하면서도, 대외적으론 마치 자유·민주· 반독재를 지향하는 듯 위장했다. 이 위장이, 일반 대중에겐 물론, 비(非) 좌파 지식인·정치인·미디어에까지 먹혔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자유 우파 국민이 저들의 속내를 분명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운동권의 타락이 국민을 각성시킨 결과다. 김문수 경사노 위원장의 ‘돌직구’ 사상투쟁에, 자유 국민이 감동한 측면도 물론 크다. 양비론과 중간파 연명법 그러나, 다수 국민의 힘 정치인들과 비(非) 좌파 미디어들은, 오히려 우파로 불리기를 계속 꺼리면서 양비론과 중간파 연명법(延命法)을 쓰고 있다. 고소(苦笑)와 경멸을 금치 못할 세태다. 다행히, 이런 우파 진영의 혼란을 정리한 기준이 10월 19일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주사파는, 좌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반(反)헌법 세력이다.” 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과연 어디까지 자유 우파인가를 묻는 여론이 꽤 있었다. 이 궁금증이 이 발언 하나로 상당 부분 풀린 셈이다. 이를 계기로, 국민의 힘부터 제대로 된 정통 자유주의 노선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탄핵동조 세력, 그리고 컴플렉스 찌든 이른바 '중도' 세력 탄핵에 동조, 결과적으로 '촛불정변' 성공 1등 공신이 된 바른미래당 계열, “김문수의 말이 지나쳤다”고 떠드는 자들. 바로, 이들의 어설픔을 배척해야 한다. 말은 모두 변명이라고 본다. 침묵만이 말이 아니며 언어는 변명의 들러리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변명 안하는 사람 보았는가? 모조리 자기 합리요. 자기 주장이 와전 되었느니 혹은 전달이 잘못 되었느니 남 탓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사파는 자기 합리를 더욱 주장한다. 말이 입밖으로 나올 때, 이미 변명의 구실이 첨가되고 다시 전달되면 더해진 비대함으로 완전히 눈사람으 형상이 되는 일이니 말이다. 말의 성찬이 기울다 보면 이성이 마비된다. 지금이 바로 그런때가 아닌가 본다. 이제는 의식 대결이다.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하는 불행이 깊다는 것도 말의 성찬을 구별 못하는 정서 마비와 얼치기 이데올로기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이다. 이제는 정통 자유주의로 무장한 새 팀이 국민의 힘 지도부로 나서야 한다. 역선택을 봉쇄한 100% 당원투표를 통해. 왜, 우리는 주사파를 축출해야 하는가? 주사파와는, 왜, 협치는 고사하고 공존도 불가능한가? 왜, 자유인과 주사파의 아마겟돈 전쟁은 피할 수 없는가?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전복하려는 전체주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정체(政體), 개방된 시장, 자유 기업, 복수정당제, 기본적 인권 등등을, 파괴하려는 일당독재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한의 세습 신정체제, 기본적 인권 도륙, 정치범 수용소에도 단 한 번의 비판조차 한 적이 없다. 주사파 보고 '진보'라고 말하는 얼치기들 이럼에도, 국민의 힘과 비(非) 좌파 미디어들은, 저들을 시종 ‘진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쪽으로 반쯤 좌클릭하겠다고 한다. 제정신인가? 정통 자유주의 진영은 앞으로, 2024년 총선 이전에 주사파 반(反)헌법세력과 국민의 힘 내부의 바른미래당 흐름, 그리고, 비(非) 좌파 미디어들의 투항적 중간파 노선을 치열한 사상투쟁으로 씻어내야 한다. 사이비 '중도'는 주사파 친구 적(敵)은 둘이다. 주사파와 사이비 중간파. 전사(戰士)는, 대적관(對敵觀)부터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 이제는 우파가 일어나야 한다. 사회의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결국 정상적 사상을 가진 민주주의, 자유 경제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바로 세울 때이다. 그래서 혁명은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혁명에는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피 흘리는 전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혁명은 아름다운 것이다. 막히고 막힌 자유민주주의 공간을 뚫는 국민의 희열처럼 민주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틀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누구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그 때인 것이다. 한번 붙어 승리를 이루자 그래야만 정통 자유 민주주와 시장경제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 그래 민주 자유주의 정부를 부정하는 세력과 한번 붙어 정통성을 가진 자유주의 국민의 힘으로 지켜보자.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2022년 10월 22일 말이다. 2022. 10. 22.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개천절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 하야와 조국 법무장관의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 현장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국정감사 때 야당 의원들 앞에서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이다. 왕년의 학생운동은 주사파 운동이었다. 그 주역들이 그걸 청산한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라고 직언한 것이다. 이에 야당은 극도로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김문수 위원장은 소신껏 발언하는 면을 보면서 필자도 그 소신에 찬사를 보낸다. 그는 확실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는 진보, 보수 좌우를 넘나드는 시대적 경험을 하고 대학 시절에는 근로자로 변신하여 산전수전 겪은 그가 경사노위 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은 아마도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는 윤 정부의 현실을 보여 주었다고 본다. 김문수 경사노 위원장은 그 누구도 소신껏 말하지 못하는 것을 김문수 위원장은 본인의 사상 논리를 전개하였다. 지금 그는 엄청난 사상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건 2020년대 한국 정치사, 사상 투쟁사의 획기적인 모멘텀이 될 것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진보 좌익을 정면 겨냥 1. 김문수 위원장은, 오늘의 좌익 운동권의 사상적 정체성을 완전히 홀라당 까발리고 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 가난한 사람 편, 불의에 맞서는 사람 정도로 처신하면서 그럴듯하게 처신을 하고 있다. 그래야 극좌를 꺼리는 대중을 속이고 광범위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문수 위원장은 저들의 이 시커먼 속셈을 적나라하게 벗기고 있다. 운동권은 그래서 김문수 위원장의 폭로에 사생결단으로 대드는 것이다. 저 사람이 우리 장사를 망치려는구나“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 2] 김문수가 누군가? 왕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노동운동가, 혁명가였다. 그 누구보다도 운동권의 내막과 실태를 환하게 꿰뚫어 보는 도사다. 이런 김문수의 공격이 그들에겐 다른 누구의 공격보다도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이른바 '중도'의 허구성에도 도전 2. 김문수의 투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이번 사상투쟁은, 범우파 내부의 ‘투항적 중간파’의 사이비성, 위선, 오류에 대해서도 뼈 때리는 격파(擊破)가 되고 있다. 범우파 안의 일부는, 극좌 운동권에 공포, 부채의식,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왕년의 권위주의 수혜층 일부, 겁나서 운동권 투사가 되지 못한 데 대해 운동권에 미안한 마음을 품어 온 자들, 회색인들, 운동권 득세에 위축이 된 자들,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완전히 좌익으로 갈 수는 없는 자들인지라, 스스로 ‘중간’ ‘중도’를 자처하며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 이런 유형은 보수 정계에도 있고, 특히 미디어 쪽에 많다. ‘중도’는 물론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중도’는, 좌익에 겁먹고 아첨하는 교활한 처세술에 불과하다. 그들은 극좌를 ‘진보’라고 불러주면서 정통 우파, 아스팔트 자유 행동가들을 ‘극우’라고 모함을 한다. 그들은 운동권의 전체주의 정체성을 눈감아주면서,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 한다. 아니, 미움을 사지 않는 정도를 넘어 완전히 극좌 혁명 편을 들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실각시킨 촛불 정변 때, 그들은 최선봉에서 가짜 뉴스를 만들고 퍼뜨리고 선동했다. 김문수의 이번 사상투쟁은 극좌 운동권의 민낯을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사이비 우파, 배신 우파, 가짜 중도의 오류도 여지없이 격파하고 있다. ”극좌 운동권은 너희들처럼 다뤄선 안 되고, 나처럼 정면으로 때려 부숴야 한다“는 시범이다. 이런 김문수를 죽인다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에 경고하는 바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 힘이, 만약 김문수 편을 들지 않고 좌익의 반란에 밀린다면? 그러면 그것은 김문수의 죽음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의 죽음이 될 것이다. 김문수는 영웅적 희생타가 될 것이고,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은 제2의 탄핵 행위처럼 될 것이다. 비(非) 좌파라는 미디어들도, 이번에 또 좌파 편에 서서 행여 김문수에게 등을 돌리면, 그것 또한, 제2의 '탄핵 질'처럼 될 것이다. 김문수는 외롭지 않다. 외롭게 둬서도 안 된다. 그는 전투적 자유 레지스탕스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자유인은 방관자가 되지 말고, 수많은 김문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국민의 힘이 각성해야 한다. 이 시대 자유 투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새삼 깨쳐야 한다. 한심한 그대들,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가? 뻔뻔한 운동권, MBC 조작보도 비판이 언론자유 침탈? 운동권 인식론 "기승전-혁명, 오로지 '변혁'""자유민주주의의 '자유"를 그저 이용해 먹을뿐“ 운동권 2개의 무기, MBC 보도 문제에 임하는 운동권의 ’싸움의 방식‘엔, 두 개의 중요한 무기가 있다. 하나는, 자신들의 왜곡과 조작에 대해 전혀 자성, 자책, 자괴하지 않는 철면피 방식이다. 또 하나 무기는, 반대쪽 반론을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무지로 내리깎는 방식이다. 1. 저들은 왜 저렇게 뻔뻔한가? 저들의 그런 ’싸움의 방식‘은 이쪽에서 볼 땐 ’X 뀐 자가 성내는‘ 격이다. 낯 두꺼운 작태다. 그런데도 운동권은, 그걸 수구반동을 때려 부수는 정당하고도 유효한 무기라고 자처한다. 저들의 이런 ’싸움의 방식‘은 어디서 우려 나오는 것일까? 이걸 알아야만, 자유인들은 비로소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된다. 운동권 사고엔 오로지 혁명뿐 답은 간단하다. 운동권의 인식론(epistemology) 자체가 혁명적 인식론인 탓이다. ”혁명적 인식론이란, 철학적 사유(思惟)의 소임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변혁‘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인식론에 따르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 대신, 현실을 혁명가의 혁명적 목적에 맞춰, 혁명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해야 한다. 현실을 혁명적인 틀(frame)에 억지로라도 갖다 맞춰야만 한다. 혁명적 목적, 혁명적 요청이란 무엇인가? 한국으로 치면, 극좌 운동권의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이다. 운동권은 이 목적과 요청을 성경 구절처럼 신성불가침으로 본다. 사람의 인식, 언론, 정치, 문화, 노동운동도 모두 이 성스러운 목적과 요청에 두들겨 맞춰야 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조작도, 거짓말도, 억지도, 궤변도, 폭력도, 속임수도, 과장 선동도 불사(不辭)해야 한다. 저들의 낯두꺼움은, 이런 혁명적 인식 방법론에 뿌리박은 것이다. 2. 저들은 반대쪽 비판을 언론자유에 대한 불감증이라 하는데? 좌익 운동권은, 본래 자유주의가 구가하는 언론 출판 결사 집회 양심 표현의 자유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독재라 매도한다. 그 대신 저들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로 치닫는다. '자유'를 활용해 '자유'를 깨부수려는 수작 이럼에도 저들은 부르주아 체제에 저항하는 도상(途上)에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유를 십분 써먹는다. 예컨대 저들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다“라고 사기 친다. 거짓을 말해놓고도 그걸 비판하면, 표현의 자유를 몰각한 것이라고 생떼를 쓰는 것도, 다, 자유를 활용해 자유를 깨부수려는 수작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권력을 잡았다 하면, 그들은 그날부터 본연의 반(反) 자유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입법·행정 사법·문화·언론 등 모든 부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당파성으로 치닫는다. 위헌적인 악법도 서슴없이 만들고, 정치적인 판결(判決)도 거침없이 때린다. 나아가 기본적 인권과 자유 체제 자체를 갈아엎는다. "뇌 송송 구멍 탁"이 표현의 자유? 한심한 건, 운동권의 이런 교활한 전략·전술을 우파 안 일부도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산 쇠고길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 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이기에, 그걸 나무라는 건 표현의 자유를 모르는 소치다, 어쩌고. 얄팍한 세 치 혓바닥 놀림일 뿐이다. 자유 진영은 요컨대, 시대적 싸움의 의의(意義)를 큰 틀 속에서 파악하는 안목을 키웠으면 한다. 말단(末端)에 드러나 보이는 쟁점에만 코를 박고 몰두하는 나머지, 싸움의 전체상을 보지 못하는 근시(近視)를 주의했으면 한다. 오늘의 조작 보도 싸움에서도 이점은 예외가 아니다. 이점을 윤정부는 새기고 지도자는 항상 결단의 문제 앞에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은 정(正)이다. 결국에 이 문제는 민초들의 공유와 더불어 원칙으로 가야 된다는 점이다. 김문수 위원장도 더욱 민초들과 소통하면서 꼿꼿한 선비 정신으로 지금 이 현실에 처해 있는 경사노위를 바로잡아 이 시대의 애국자로서 남기를 바랄뿐이다. 오늘도 북한을 찬양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해 불가의 말이 떠도는 아우성에 시끄러워 말할 자유가 있는 것은 민주주의 좋은 일이나 듣기에 너무 식상하고 기가 차서 외면뿐이다. 올바른 판단이 없는 멍한 사람들의 바보 놀음에 가치판단이 흐려지는 듯하여 오골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귀가 퇴화하고 입만 커지는 시회는 불행한 사회라는 것을 그들도 깨우치기를 기대한다. 몰 염치한 정서는 결국에는 몰상식의 인간이다. 너무도 답이 없는 이 시대에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의 꼿꼿한 사상을 보면서 오랜만에 한바탕 웃어본다. 참 잘했다. 2022. 10. 17.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by 조숙현[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칼럼]안성시가 지역 최대 현안 사안인 용인SK하이닉스 관련‘부속협약서 공개 문제’와㈜선진이 양성면에 추진 중인 축산식품복합산업단지 관련된‘부작위’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안성시가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소송 결과로 보면 당연히 처리했어야 할 행정을 하지 않아 민원들이 소송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측면이 있다. 이번 소송의 판결문들을 보면 안성시가 시민들의 이익을 외면하고,얼마나 우유부단한 행정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용인SK하이닉스 관련 부속협약서 공개와 관련한‘정보공개 거부 처분 취소’소송의 판결문을 보면 안성시가 주권자인 시민들의 알권리와 정당한 보상이 아닌,용인SK하이닉스의 이익을 보호·대변하기 위해 정보공개를 하지 않아 주민들에게 소송을 당했다. 그리고 소송 과정에서도SK하이닉스를 위한 억지를 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성시청] 용인SK하이닉스 관련1심 법원은 판결문에서‘보상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는지 누구나가 확인할 수 있어야 지역주민 전체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고,항소심에서는 여기에‘부속협약서의 내용이 향후 사업자가 신규 사업장을 건립하고자 할 때 인근 주민들의 요구하는 최소 기준으로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사업자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을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한 마디로 안성시가 공익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고, SK하이닉스의 이익만을 대변해온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안성시가㈜선진에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을 당해 패소한 양성면의 축산식품복합산업단지는 안성시가 얼마나 우유부단한 행정을 해왔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부작위는 사전적으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아니한다는 의미다. 판결 내용을 보면‘산업단지절차간소화법에는6개월의 승인기간 규정을 두고 있는데,안성시는4년이 경과 해도 승인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것은 책임 있는 행정이 아니다’는 것이다. 사업자가2017년 투자의향서를 제출하고2018년 사업 승인 신청했지만,안성시는3명의 시장이 바뀌는 동안 인허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지 않았다. 이에 법원 역시 안성시가 진행해야 할 행정절차를 미루기만 한다면서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용인SK하이닉스와 축산식품복합산업단지 관련 소송은 안성시가 당연히 공개해야 할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당연히 추진해야 할 행정절차를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민원인이 소송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어찌 보면,안성시가 소송을 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안성시가 민원인들이 소송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소송 유도 행정으로 인해 민원인들에게 시간적·경제적 피해를 준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위해 사용되었어야 할 행정력을 소송하는 데 낭비했고,소송비용까지 안성시가 시민들의 세금으로 부담하게 됐다. 행정기관은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다.소송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는 행정은 책임있는 행정을 한 것이라 할 수 없다.시민들을 법정으로 내모는 행정을 해서는 안 된다. 안성시는 관직에 있는 공무원들은 선제적 주인의식을 갖고 모든 행정에 솔선수범으로 공정과 상식으로앞으로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법 적용을 통한 책임 있는 행정으로 시민들의 불신과 피해를 최소화하는 행정을 해주길 바란다.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작가 2022.10. 16.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선과 지선을 내리 이기고도, 당대표를 둘러싼 내홍과 법적다툼 등으로 집권여당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국민의힘이 최근 '이준석리스크'를 털어내고 심기일전하며 텃밭인 대구·경북을 찾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 당까지 지지율 하락세를 보이자 집토끼부터 단속하는 등 방어선 사수에 나선 것이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북한의 도발 국면에서 강경 노선을 강조하는 것 역시, 전통 지지층부터 복원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TK 달래고, 이재명 정조준하는 국힘당] 텃밭 찾은 與지도부 "우리의 마지막 12척" 고개 숙이며 지지호소 13일 첫 전국 순회 현장 회의 장소로 대구·경북을 찾은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구시당에서 비대위 회의를 열고 "집권여당 비대위원장으로서 대구·경북 당원 동지들에게 저희들의 지난 부족함으로 걱정을 끼쳐드린 점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연이은 내홍으로 정부여당이 제 역할을 못해온 상황에 대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최근 보수 텃밭인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보다 부정평가가 더 높게 나오는 여론조사가 발표되고 있는데, 당내에서는 이들의 실망이 체감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영남권 소속 의원은 "영남지역에서 정부 출범 초기에 나왔던 열렬한 지지세는 사라졌다고 본다"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측면이 크고 정치 자체를 못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언급했다. 대구·경북마저 자신들을 외면할 경우 국정운영 동력이 상실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 정 비대위원장은 "새로운 각오로 심기일전해서 새롭게 변하기 위해 보수의 중심인 대구·경북에서 첫 현장 비대위 회의를 개최하게 됐다"며 "위기의 순간마다 대구·경북은 우리당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대구·경북은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12척의 배"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지역 숙원 사업을 일일이 언급하며 구애에 나서기도 했다. 당 차원에서 대구·경북 신공항 특별법 제정, 군위군의 대구 편입, 국가로봇테스트필드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및 국비 반영 등을 적극 검토하고 예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은 "영남권에서도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무엇이 변화했냐는 지적이 많은 것 같고, 이는 위기 상황"이라며 "대통령 공약이자 지역 숙원 사업들을 추진하면서 당의 주요 지지 기반의 민심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통 지지층에 소구할 수 있는 안보 이슈에 대한 선명성도 더 강화됐다. 정 비대위원장은 "최근 잇따르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그냥 탄도미사일이 아니고 전술핵 미사일 연습을 하고 있는 것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며 "군사 안보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다해나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한미군사동맹을 철벽처럼 강화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며 "한미 양국 간 논의되고 있는 미국의 확장억지력, 쉽게 말해 핵우산을 제공하는 것을 강화해야 되는데, 이런 방안들이 양국 간에 구체적인 중심 현안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국토위 경기도 국감…與, 이재명 대장동·백현동 의혹 정조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언론자유 방송독립을 위한 언론인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언론자유 방송독립을 위한 언론인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대구·경북 지역의 지지를 이끌어낸 다음 날인 14일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 대표의 각종 사법리스크를 부각함으로써 보수층 결집을 넘어 중도층 지지까지 얻어내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열리는 경기도 국정감사를 벼르고 있는 이유다. 지난해 국토위 국감에서 국민의힘은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향해 공세를 집중했다. 치명타는 없었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당내에서는 이재명 대표 관련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공감대가 있다. 국토위 소속 의원은 "김동연 경기지사의 경우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정책과 관련된 지적 외에는 큰 공방은 없을 것"이라며 "이재명 대표의 경우 출석은 하지 않지만 당사자와 관련된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지난해 국감처럼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국감에서도 국민의힘은 대장동·백현동 개발사업과 관련된 공세를 이어갈 예정이다. 특히, 백현동 개발사업의 경우 지난 7얼 감사원에서 "민간업체에 수천억원을 몰아준 특혜 사업"이라는 감사결과 보고서가 발표됐다. 국민의힘은 관련 의혹을 집중 추궁할 계획인데, 국토위 소속 박정하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월 성남시 도시개발사업단은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백현동의 임대주택 비중을 10%로 줄이고 일반분양을 90%로 늘리는 계획에 반대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일반분양으로 전환되면서 민간업자가 대거 추가 수익을 거두게 됐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 골자이기 때문에 국민의힘의 공세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재명 대표와 관련된 의혹의 경우, 새로운 내용을 드러내는 한편 기존에 나왔던 내용을 환기시키기만 해도 민주당에게는 악재일 수밖에 없다"며 "사법 리스크를 부각시키며 이재명은 지지할 수 없다는 국민들이 우리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고 언급했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프랑스 속담에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라는 말을 기억이 난다 속담이란 말 그대로 오래된 말의 숲을 뜻한다. 어디 친구와 포도주만이랴- 묵은 장맛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긍정에 긍정할 것이다. 이른바 씨간장이라 하여 몇십년 몇 대를 거쳐서 내려오는 전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말이다 그 간장 속에는 하늘이 담겨있고 하늘이 푸른 만큼이나 깊은 맛깔이 담겨있음은 가히 경이로울 일이 될 것이다. 시할머니, 또는 시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는 며느리- 종갓집의 며느리의 임무는 그만큼 엄숙했고 법도를 존중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끈이 되어 한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는 습속(習俗)이라는데서 서양의 어떤 개념도 따라올 수 없는 우리의 전통이다. T,S.Elio의 <개인적 전통과 재능>이라는 짧은 논문에서 전통은 곧 새로움을 이어가는 줄기임을 암시했고 공자도 생이지지자에서 아비생이지자, 호고민이구자야라는 말로 전통의 묵수(墨守)는 단지 낡은 것의 명칭이 아니라 오늘을 새롭게 받아드리는 줄기의 개념으로 설파 했음은 현명한 사람이 깨닫는 개방된 사고의 소유자만이 느끼는 일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치졸은 정치판에서 사상이 실종된 자들의 소행이라 한나라의 진로가 암담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좌파들이 정권을 잡자 본색을 드러내면서 이른바 적폐 청산이라는 미명으로 미운 놈 때려잡자는 행패가 자심(滋甚)했었다. 4대강 문제, 박근혜 탄핵을 하는가 하면 일종의 감옥에 보내는 일환으로 감사라는 명목을 빌려 우를 범하는 일이었으며 현재 윤 정부가 수사하고 있는 원전, 북송, 이재명 대표의 대리 변호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단임제 제도가 갖는 한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돌고 도는 정치가 지속 된다면 과연 앞서나가는 지구촌 정세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의 악순환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밤이 지나면 다시 아침이 온다. 무슨일을 시행하면 사소한 잘못이 없으면 그는 신이지 이간이 아닌 것이다. 적폐 몰이의 주인공도 그런 길이 넓게 열린 사실을 모르는 우매한 정치 놀음을 하는 것이다. 메스컴의 위력이나 떼쓰기의 본보기가 지금도 여일한 수법인지는 믿어 보지만 아직은 글쎄올시다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정치란 처음도 정(正) 즉 바름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전통을 무시하면 곧바로 보복의 악순환이 자기로 돌아오는 부메랑의 화살이 가슴에 비극의 상징이 된다는 점이다.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무하는 어른이 되어야만 성공한 정부가 되는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곧 현실을 파묻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종부가 씨 간장을 소중히 여기는 것- 시집살이의 고달픔이 없었겠는가? 해도 그런 일들은 추억으로 삼고 좋은 것만을 간직하려는 가상한 마음이 전통의 줄기로 이어질 때 결국 존경의 이름이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과거를 부정하기보다 보존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질 때 현명한 수범(垂範)의 정치가 되는 것이지만 권력이 주구(走狗)가 될 때 이미 어긋난 길로 들어간 비극의 단초라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또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정치는 지금 희극을 보는 것인지 난센스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가치의 실종이 너무 심하다. 패당 끼리 놀음을 하는 형국이다. 이는 전통이 부재한 데서 나오는 천박한 사고의 전형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생각의 깊이가 없는 결론이 아니면 다른 답안이 도출될 수 없는 예일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전 정권의 비리들이 뉴스들의 전면을 덮고 있어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이다. 이제 그런 일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정(正)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 오래된 유물은 오래된 시간만큼 소중하고 진중한 보물이 된다는 자각은 최근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의 길로 들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라 안도하며 정치가는 자기의 영혼을 팔아 권력을 쟁취하지만 결코 역사를 바꾸지 못하는 잠시 왔다 사라지는 하루살이 존재의 길을 선택한 우매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름 석자는 이내 사라질 뿐이다. 전통이 없는 사회는 쉽게 무너진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둥이 튼실하지 못하면 바람이나 태풍에 틀림없이 쓰러지는 운명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기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지 누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통은 가치의 소중함이라는 강조가 오히려 부족하다. 정의가 왜곡될 때 사회의 파장은 오래 길게 간다. 바르게 정리하고 옳게 나아가는 길은 조금 늦더라도 결국은 빠른 지름길이라 한번 어긋나면 바로잡는 시간은 결국 국민의 몫으로 고통이 된다. 학문이 사회, 정치에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면 이미 다른 곳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처참한 상황에 해당 된다. 정치적인 암흑기는 이미 지난 일이다. 고구(考究)한 정치를 해주기를 기대할 뿐이로다. 분노는 안으로 삭여야 한다. 그래야 사물의 실상을 볼 수가 있으며 또 미래의 길이 보일 것이기 때문에 끝없는 자기 수련의 공부가 내공을 갖추지 않으면 자기 화염에 불타는 비극이 자기 것만이 아니라 타인에 전가되는 비극- 전통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다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한 이유는 결국 국가의 미래와 연결될 것이기에 우리의 전통을 살려 더이상 이게 나라냐 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2. 09. 29.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기흥 호수 공원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by 조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