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작가 평론가 이승섭] 작가『Best seller』라는 명패를 패용(佩用)을 했다고는 하지만 필자의 문학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 제10집을 출간하면서 지금까지의 내 문학을 정리하다 보니 아직 기대치도 못 미치는 상황이라 얼마나 양과 질이 높은 문학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은 필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집무실에서 유명한 고서들을 독파하는 것도 매우 버거운 일이지만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어떠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문학 정리라는 것도 아직도 본인은 미래를 가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늘 아쉬움만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10집을 출간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미래의 창작을 위해 상당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 즉 고독의 의상을 입고 숙명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한다. 시심은 늘 표현으로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의 모습은 언제나 시인의 마음과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출몰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처연한 정신의 줄기가 흐르는 느낌을 남기는 것이다. 철학은 늘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기에 이 물음은 본질로 귀속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를 수용하는 조건이 붙는 것이다. 나라는 일인칭의 무게는 우주이면서 삼라만상의 전부를 뜻한다. 내가 없다면 이인칭, 삼인칭이나 의미는 없게 되기에 나로 향하는 질문은 늘 겸손하고 근엄한 윤리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난설헌 1· 2는】의 문학을 보면 곧 시인 스스로 허난설헌의 일생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 되어 유사성의 일체를 객관성으로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많은 고독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허무는 번민을 가져오고 이 번민은 고독의 그늘에 갇혀 헤매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부재(不在)의 하루 속에서 점차 지쳐가는 나를 발견하면서 즉 거미집의 허무가 깃드는 장소로 스며드는 시간을 오랫동안 감금당해 보았기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허무는 늘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독에 끌려다니다 보면 자신이 허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일생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에 어떤 행동의 특징이 지배적으로 일생을 관통하는 특성의 집약이 있을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세 살 먹은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의 의미는 좋은 뜻으로 말한다면 행동의 연속성을 말하는 의미일 것 같다. 물론 환경에 따라 변하는 일은 예외가 아닐 것이지만 아무튼 지속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분주하게 움직이며 행동하는 것과 하나하나 정리하는 습관의 차이는 성품의 지배적인 요소일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제의 맥을 나로 돌리면 나는 정리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격이 급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유난을 떠는 것은 사실이다. 집사람과는 다른 성격은 느긋한 성미와 바쁜 성미의 대결은 언제나 충돌의 여지가 많았지만 이제 와서 필자가 지나온 높낮이의 언덕은 많았다고 솔직히 토로한다. 그렇다고 무슨 큰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감회에 젖는 그런 평범 중에도 평범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의 결합이지 하나의 주체로서 용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그러나 평론책이 『Best seller』가 되기란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시와 수필 소설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자가 아니 비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구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무게감이 밀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간만 허락된다면 책상 위에서 글을 씁네 하고 자세를 정좌한다. 가령 하루나 이틀 지나도 어김없이 시간을 내어 책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확인이며 정리라고 한다면 정리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디에 가서 이삼일씩 여행하고 집에 와도 이런 일상은 여전하다. 이러한 습관은 내 삶의 모든 면에서 급한 성미의 일단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필자가 지금까지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한 번도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일도 그렇고 시간을 어긴 적도 없이 정확한 계산 하에 외출하는 것도 그렇다. 사실 이런 일들이 쪼잔하다는 말도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범하다는 것과는 달리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고 정확한 일의 진행이어야 한다는 소심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온 나의 결정판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쓰는 글 중에도 잘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의 소홀함도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은 그만큼 타인의 생각으로는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될 수 있겠다. 역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도 내 성미의 일단이라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평판을 받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글의 세계에서도 선전하면서 문학상이니, 작가상이니 하도 많은 상이 즐비하게 있다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상들을 타기 보다는 오히려 숨고 옆으로 가는 길이 내 적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은 성격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함께하지 못하는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쓴 작품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멀었다는 시간 속에서 부담은 있지만 열정과 우직한 필자는 더욱 정진하고 琢磨해야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에 주위에 지인들이 혀를 차지만, 실은 시간은 내는 것이지 시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내 스승님의 말씀이 자네는 다른 작가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야- 했지만 급한 내 성미와 고지식한 윤리라 할까 그런 것을 어찌하랴, 언제나 반골이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스승과 000 박사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 옛날 이천 문사원대학에서 시평의 기본 틀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존경하는 2분도 작고하신 것을 보면서 화무십일홍이며 인생무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느낌은 아니리라- 어느날 문득 모 대학 학장이 어이 자네 와서 일 좀 맡아 줘, 했을 때도 인연이 되기는 하였으나 반골(反骨)이 앞장서는 일에는 내게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맛이 씁쓸하다. 다만 스승과 000 박사에게 따갑게 들었던 말은 자네는 양주동 박사의 12권 전집을 잊지 말고 양주동 박사의 12권의 전집 정도는 상재 해야만 된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과연, 거개인 그분들의 발밑에라도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라 보지만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outsider의 필자가 되고 싶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말이다. 양주동 박사도 <고가연구 문학>과 <고려가요>의 연구에는 국내에서는 따라갈 학자는 없겠지만 사실 문학의 경우는 그렇게 판단은 하지 않으셨던 000 박사님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스친다. 오골성의 성미를 가진 작가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은사의 탑을 펌훼(貶毁)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돈의 무게를 알고 있지만, 학문 가치로 예술의 무게를 아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저서가 훗날에 고귀한 가치로 담보할 보장도 없는 일에 나를 위한 정감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물론 시를 배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다소 쓸쓸함도 따라오지만 어떻든 고맙다. 그리고 기억하리라- 사실 폭넓고 많은 시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outsider,인 필자가 매번 출간 때마다 best seller에 이름이 올라온 것은 사실 필자 자신도 놀라운 일이라 하겠으나 베스트셀러가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만하지 말고 내 인생의 정리를 하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과 언론인으로서 다음 길을 가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말이다. 2024. 12. 제10집 후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문학평론가의 베스트셀러 평론집 1]
『Best seller』라는 명패를 패용(佩用)을 했다고는 하지만 필자의 문학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 제10집을 출간하면서 지금까지의 내 문학을 정리하다 보니 아직 기대치도 못 미치는 상황이라 얼마나 양과 질이 높은 문학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은 필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집무실에서 유명한 고서들을 독파하는 것도 매우 버거운 일이지만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어떠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문학 정리라는 것도 아직도 본인은 미래를 가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늘 아쉬움만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10집을 출간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미래의 창작을 위해 상당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 즉 고독의 의상을 입고 숙명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한다. 시심은 늘 표현으로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의 모습은 언제나 시인의 마음과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출몰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처연한 정신의 줄기가 흐르는 느낌을 남기는 것이다. 철학은 늘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기에 이 물음은 본질로 귀속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를 수용하는 조건이 붙는 것이다. 나라는 일인칭의 무게는 우주이면서 삼라만상의 전부를 뜻한다. 내가 없다면 이인칭, 삼인칭이나 의미는 없게 되기에 나로 향하는 질문은 늘 겸손하고 근엄한 윤리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난설헌 1· 2는】의 문학을 보면 곧 시인 스스로 허난설헌의 일생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 되어 유사성의 일체를 객관성으로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많은 고독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허무는 번민을 가져오고 이 번민은 고독의 그늘에 갇혀 헤매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부재(不在)의 하루 속에서 점차 지쳐가는 나를 발견하면서 즉 거미집의 허무가 깃드는 장소로 스며드는 시간을 오랫동안 감금당해 보았기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허무는 늘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독에 끌려다니다 보면 자신이 허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일생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에 어떤 행동의 특징이 지배적으로 일생을 관통하는 특성의 집약이 있을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세 살 먹은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의 의미는 좋은 뜻으로 말한다면 행동의 연속성을 말하는 의미일 것 같다. 물론 환경에 따라 변하는 일은 예외가 아닐 것이지만 아무튼 지속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분주하게 움직이며 행동하는 것과 하나하나 정리하는 습관의 차이는 성품의 지배적인 요소일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제의 맥을 나로 돌리면 나는 정리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격이 급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유난을 떠는 것은 사실이다. 집사람과는 다른 성격은 느긋한 성미와 바쁜 성미의 대결은 언제나 충돌의 여지가 많았지만 이제 와서 필자가 지나온 높낮이의 언덕은 많았다고 솔직히 토로한다. 그렇다고 무슨 큰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아니다.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감회에 젖는 그런 평범 중에도 평범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은 둘의 결합이지 하나의 주체로서 용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그러나 평론책이 『Best seller』가 되기란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시와 수필 소설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자가 아니 비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구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무게감이 밀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간만 허락된다면 책상 위에서 글을 씁네 하고 자세를 정좌한다. 가령 하루나 이틀 지나도 어김없이 시간을 내어 책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확인이며 정리라고 한다면 정리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디에 가서 이삼일씩 여행하고 집에 와도 이런 일상은 여전하다. 이러한 습관은 내 삶의 모든 면에서 급한 성미의 일단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필자가 지금까지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한 번도 날짜를 어긴 적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일도 그렇고 시간을 어긴 적도 없이 정확한 계산 하에 외출하는 것도 그렇다. 사실 이런 일들이 쪼잔하다는 말도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범하다는 것과는 달리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고 정확한 일의 진행이어야 한다는 소심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온 나의 결정판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쓰는 글 중에도 잘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의 소홀함도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은 그만큼 타인의 생각으로는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될 수 있겠다. 역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도 내 성미의 일단이라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평판을 받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글의 세계에서도 선전하면서 문학상이니, 작가상이니 하도 많은 상이 즐비하게 있다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상들을 타기 보다는 오히려 숨고 옆으로 가는 길이 내 적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은 성격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함께하지 못하는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쓴 작품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멀었다는 시간 속에서 부담은 있지만 열정과 우직한 필자는 더욱 정진하고 琢磨해야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에 주위에 지인들이 혀를 차지만, 실은 시간은 내는 것이지 시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내 스승님의 말씀이 자네는 다른 작가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야- 했지만 급한 내 성미와 고지식한 윤리라 할까 그런 것을 어찌하랴, 언제나 반골이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스승과 000 박사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 옛날 이천 문사원대학에서 시평의 기본 틀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존경하는 2분도 작고하신 것을 보면서 화무십일홍이며 인생무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느낌은 아니리라- 어느날 문득 모 대학 학장이 어이 자네 와서 일 좀 맡아 줘, 했을 때도 인연이 되기는 하였으나 반골(反骨)이 앞장서는 일에는 내게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맛이 씁쓸하다. 다만 스승과 000 박사에게 따갑게 들었던 말은 자네는 양주동 박사의 12권 전집을 잊지 말고 양주동 박사의 12권의 전집 정도는 상재 해야만 된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과연, 거개인 그분들의 발밑에라도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라 보지만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outsider의 필자가 되고 싶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말이다. 양주동 박사도 <고가연구 문학>과 <고려가요>의 연구에는 국내에서는 따라갈 학자는 없겠지만 사실 문학의 경우는 그렇게 판단은 하지 않으셨던 000 박사님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스친다. 오골성의 성미를 가진 작가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은사의 탑을 펌훼(貶毁)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돈의 무게를 알고 있지만, 학문 가치로 예술의 무게를 아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저서가 훗날에 고귀한 가치로 담보할 보장도 없는 일에 나를 위한 정감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물론 시를 배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다소 쓸쓸함도 따라오지만 어떻든 고맙다. 그리고 기억하리라- 사실 폭넓고 많은 시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outsider,인 필자가 매번 출간 때마다 best seller에 이름이 올라온 것은 사실 필자 자신도 놀라운 일이라 하겠으나 베스트셀러가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만하지 말고 내 인생의 정리를 하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과 언론인으로서 다음 길을 가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말이다. 2024. 12. 제10집 후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베스트셀러] [이승섭 시평집 뒷면 2] [이승섭 시평집 원본3] [이승섭 시평집 서평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오늘날 정치만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적대적인 대립의 구도가 진실이 아닌 변명과 부정으로 인한 폐해가 사회적 소비 피해가 극치를 치닫고 있다고 한다.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을 한다.지금도 이 말은 많이들 회자(膾炙)하는 말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상한 진리가 변명이 전부라는 명제가 따른다.사실 법이란 사회 전체가 지켜야 할 우리의 덕목이다. 지키지 못하는 법은 이미 죽은 법인 것이다. 요즘 정당한 권력이 부여되지 않더라도 이를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묻고 있다. 지키면서 정당한 의사표시를 해야 함에도 탈법과 불법을 일상화하면서 이를 자기변명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정치의 달인들이 보는 것이 맞을지?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변명과 거짓 진실의 앞에서 무엇이 맨 앞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지키지 않는 것은 역설하게도 사회적 비용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실수와 변명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한번 상식과 공정을 관직나리들이 지켜가면서 사회적 풍토를 만들 때가 되었다. 실수란 자기반성으로 고치면 되지만 변명은 백해무익한 짓이다. 실수가 실수를 낳는다면 자정을 위하여 꽃도 보고 자연을 알고 살아가는 가치가 참된 행복의 근원이라는 해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할까? 인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귀향하는 본능이 있기에 늘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과 자연 속으로 떠나고픈 마음의 정서가 생기는 이유는 동물만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정서도 같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인간은 늘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生일 것이다. 필자도 어언 뒤돌아보니 허전이 쌓이는 퇴적물 아래 신음하는 일이 요즘의 일상인 듯하다. 실수하며 잘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도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하면서 살아 간다. 상식적인 도덕과 공정을 지키려 하는 노력보다 무너지는 일이 더 많은 삶이 인간의 일상이며 이를 어떻게 처리하고 잘못과 실수를 처리하는 가는 본인의 양식의 문제 상식의 문제일 것이다. 속칭 잘나 보이는 인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게 화려하여 존경이 가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시커먼 웅덩이가 보이는 것도 일상에서 접하는 일이다. 요즘의 정치를 보면서 더욱 실감을 하게 된다. 정치는 원래 거짓말을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들의 입은 비뚤어진 위치에 있는 특별한 집단처럼 엇나간 말이 전부인 듯하다. 또한 변명 안에서 갇혀 이유도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참으로 추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며 해답이 없는 미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일반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일에 잘못하고 실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곧은 길로만 가는 행보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중심을 잡고 걸어가야 하는 신체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2발로 걸어야 하는 보행의 문제는 자칫하면 옆으로 비켜지는 일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옆으로 다니는 게도 결국에는 목적지를 찾아 한치의 틀림없는 행보를 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목적은 달성되는 것 같다. 하긴 어린애들은 어른이 정한 규칙에서 벗어날 때 지적을 받아 고치며 성숙의 길로 들어서는 이치로 보면 잘못은 그야말로 잘못이 아니라고 고칠 줄 아는 일이 오히려 현명한 사람이 아닐지- 요즘 정치꾼들의 말은 모두가 변명하는 정치인 듯하다. 침묵만이 말이 되고 언어는 변명의 달인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모조리 자기 합리요 자기주장이 와전되었다고 하는 등 혹은 전달이 잘못되었다고 모두가 남 탓으로 돌리는 이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 이미 변명의 구실이 미원이 첨가되고 다시 전달되면서 더해진 비대함으로 완전히 눈사람의 형상이 되는 일이니 어찌하랴. 이런 정치가들의 말은 변명의 극치를 배회하는 일로 진실이 어딘가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암호일 것은 아닌지. 자기 합리성을 위장하면서 자기 과시의 말을 찾는 일이 모두이니 참으로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것도 발전의 한 단계라 보겠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정치가들의 화면은 그가 가장 진실하고 진리와 정직을 한 몸에 짊어졌기 때문에 무겁다는 변명 혹은 억울에서 힘겹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위장되게 보이는 것은 필자만일까? 그러나 공익적인 측면에 볼 때 거짓말이 대부분이지만 역사의 水位(수위)는 늘 균형을 유지하는 적정 수위가 이루어지는 일을 보면서 거, 참 요상 하다는 느낌이다. 시간 속에서 정리되는 것에 다행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독선은 가장 민주주의 국가에선 너무나 큰 해악이다. 특히 언론의 일방적 독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 전체의 막강한 영향력이 이익과 손해가 사회적 손해가 너무나 크기에 더욱 신중해야 하지만 어떻게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서 한사람쯤 악마로 만드는 일은 언어 조합에 따라 판도가 달라지는 것인지 도무지 필자도 오리무중이다. 사실 천사로 만들기는 너무도 어렵지만 악마로 만드는 일은 참으로 쉽다. 1번의 기사로 악마가 되는 일은 인내가 없는 요즘 현실에 인간 심리로는 쉽게 쏠리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현대인의 특성은 쉽게 이리 몰리고 저리 휩쓸리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판단의 신뢰성이 없고 남이 어떤 말을 주장하면 쉽게 동화되는 일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거나 신념이 없어서이다. 물론 넘쳐나는 정보 과다의 시대에 인간의 이성을 마비 시키고 흔들리는 신념의 역활론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디지털과 AI, 5차원 시대에 순식간에 전파되는 속도는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빠르기가 제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순간적으로 또 다른 뉴스가 점령하여 누적되는 양상이 더 할 수 없이 무게를 가중(加重)시키며 험난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의 순간적으로 변모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위장과 변명으로 인한 유언비어가 진실 같은 위장의 탈을 쓰고 거짓이 무엇인지 진짜가 무엇인지를 구분(球分)도 하지 못하는 마비 현상이라면 미래를 어떻게 예언할 수 있을는지? 분명 미래는 확실히 있지만 그 판도를 말하는 일은 불가한 현상이 도래한다. 그렇다면 말의 운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언어의 비중은 점차 낮아질 것이지만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가벼워질 것이라는 예측에는 다 수의 학자들이 말한다. 이 예측이 빗나가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아마도 언어의 무게는 점차 메시지의 전달에 가벼운 역할이 고작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진실의 도구 진정성의 도구가 아니라 다만 오고 가는 소통으로의 역할이 언어에 진실의 면모로 변할 때 사회는 더욱 불신과 불행의 가중치는 더 높아질 것 같다. 여기서 언어의 무게를 부여하고 언어의 진실을 위하는 사회 풍토가 있어야 할 것인데 점차 언어의 소용은 줄이고 다시 줄여서 부호화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이 기계의 남용에서 오는 결말이라는 점이다. 자기중심적인 언어 사용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말한다는 투로 자기의 의사를 감추거나 위장하는 셈법이 만연할 때 사회의 축은 무너지게 된다는 점이다. 언어의 소용은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넘어 사회를 이룩하는 바탕으로 소임이 중요하다는 것이 점차 역할이 축소되는 현상이 불행의 종자로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유별난 언론과 방송에 등장하는 말 장사꾼들의 분석이나 변명을 듣고 있노라면 실소가 먼저 앞장서는 일이 진행형이라 입을 닫고 귀를 닫고 시선만으로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다소 우울할 뿐이다. 필자의 귀가 퇴화하고 입만 커지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진실이 숨어버린 암흑의 판도가 된다는 예상에 다시(Depressive disorder)디프래스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최신작}] [이승섭 시평집 [제6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칼럼집 [제 6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우리의 현대 시에 대한 문학 찾기를 제 7권『문학의 혼을 말하다.』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권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 문학의 정통성 찾기를 다하지 못한 상태로 책이 상재되었기에 이제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자유문학의 정통성을 찾을 때가 되었다고 보기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절름발이 문학 시대를 파헤쳐 보고 논리를 정립해야겠다는 의지에서 시작한다. 문학이 인간의 모습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은 상관을 벗어날 수 없는한 문학의 표현은곧 민족이 살아온 모습을 유추하고 연구 기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글의 언어는 주어가 둘이거나 아예 없어도 뜻이 통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온 결과물로 증명이 된다. 우리가 그리는 용(龍은)의 발가락은 넷 아니면 여섯이고, 중국은 다섯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갑오개혁 이전까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엔 서양 문화에 대한 논리적 파헤침이 아니라 당사자에 의해서 고백될 수 있는 여지의 애매성이 담겨있고, 삼복더위에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도 “어”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표현법을 이해할 수 있는 데에는 한국의 오랜 전통의 문화를 이해하기에 가능하지만 우리의 표현법은 수식사- 형용사나 부사가 많은 것도 오랜 민족이 살아온 애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학을 조윤제가 ‘은근과 끈기’라고 말한 것도, 우리 문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며 정몽주의 ‘단심가’를 끈기에 대입한다면, 은근히 밝은 것보다, 오히려 애매모호한 표현에서 나온 우리의 전통이자 삶의 흔적이다. 이는 반만년 동안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존재 방식이었기에 우리의 언어로 굳혀졌고,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우리의 문화- 은근과 끈기와 인내심이었다. 사실 한국 현대문학은 소설이나 시- 모두 절름발이로 출발이라 보는 것이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또한 문학성으로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사건적인 기록 문제- 이런 현상이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과연 한국문학은 문학의 본령에서 얼마나 확고한 모습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1세기를 반토막으로 잘랐을 때 전반부는 일제강점기에서 숨죽이는 표현과 또 KAPF(카프)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이라는 이념의 이데올로기에서 나포된 시기였다면, 후반기에는 해방에 이어 60년대 이후 민중문학- 필자는 능동적 소수라 칭한다. 이와는 상반된 의식을 가진 순수 수동적 다수로 구분한다. 전자는 문학의 그릇을 정치라는 목청에 전부를 쏟아부어 결국은 문학 자체를 잃었고, 악다구니 게임으로 도로에 허송세월 보냈다고 치부한다. 사실 문학은 정치조차 문학의 표현으로 승화할 수 있는 대상이라 하지만 정치를 대결의 대상으로 상대하다 보니 문학적인 표현을 놓치고 목소리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결말이 70년대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는 불안이나 절망조차도 문학적으로 승화되는 현상을 비문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잘못된 발상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어긋난 파행적 문학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최남선 이후 청록파나 생명파의 등장이 가져오는 의미는 이 점에서 현대 시라는 말에 어울리는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 다시 또 절름발이 출발 문학] 이른바 능도적 소수의 <민중문학>(현재는 한국 작가회)로 명칭을 바꾸고 문학성이 실종되는 어둠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이런 추세는 1985년을 정점으로 소강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직접적인 원인은 정치와 문학의 혼돈이 부른 절름발이 문학이라는 현상에서 반성의 목록이 따라다닌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시기- 긴급조치 1.2.3. 게엄령 등 심지어 이데올로기를 정치 메커니즘에 이용하는 불합리의 시기에 시를 통해 반항이니 저항이니 하며 깃발을 들었던 결말이 모순의 표현을 낳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라는 목록으로 독자의 호응을 얻었고 이어 통일 또는 민족, 리얼리즘 등 현란한 목록으로 독자의 입맛을 유지하면서 무려 20년 동안 민중 타령의 시- 문학성은 없고 다만 짧은 형식을 선택하여 정치적인 구호를 가미하는 격앙의 감정 노출로 한국시를 재단(裁斷)하는 일이 한국 시단의 주류인 양 행세하는 모습이 아직도 그쪽을 추종하는 일과벌어지는 일이 횡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기만 하다. 여기에는 황색저널리즘의 센세이셔널한 편향성이 더해져서 적은 숫자의 민중그룹은 계속 사회적 전적으로 등장하여 소수가 주류 행세가 되었다. 무려 18년 동안의 박정희 정권하에서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까지의 긴 세월 동안 이런 불합리한 문학적인 절름발이 행진이 지속되었고 급기야 88올림픽을 계기로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이 벗겨졌지만 김영삼 정권 당시 민중그룹을 동지로 여기는 문화정책이라는 허울로 편향성은 더욱 일방성을 갖게 되는바 다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좌편향 좌파 문화계를 접수하게 되며 이어 노무현 정권 들어 소수의 좌파 문학이 한국 문화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민중은 1천 400백 여명이고 그 반대인 순수 그룹은 일만 명을 넘어서는 숫자였지만 소수가 다수를 집어삼키는 형국이었으니 더 무엇을 말하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른바 민주화를 주창한 권력에 들어서서는 더욱 죄 경향의 문인들이 한국문학의 전 분야를 통일이라는 포장으로 순수계열의 문인들을 추운 벌판으로 내모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필자가 말하는 대로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정권은 바뀌지 않았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인 것을 보면 알만하지 않겠는가? 그로 인하여 한국문학이 척박해지는 칼칼함을 자극하는 일들이 아직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내로남불의 적반하장이 아닌지 묻고 싶다. 사실 문학은 이데올로기조차 표현의 대상이 되고 또한 당연히 소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승화된 작품이 아니라 목청만이 높은 시합인지 떼거리의 문학인지는?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라는 시대에 정치적인 시를 써서 노벨문학상 후보 목록에 올랐던 김지하는 무슨 문학성의 결과물인지? 지금은 성희롱 사건으로 인하여 자취를 감춘 고운을 말한다면 문학적 업적이라 할만한 작품이 없으며 만인보라 하여 추켜들 세우지만 주위를 돌아보고 어른들의 평론가에게 물으면 7000천보 안되는 것을 가지고 부풀리고 있다고 하며 무려 300만이나 백성을 굶겨 죽인 북한의 김정일과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며 김대중의 사이에서 건배사를 올린 시인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추하게 또 성희롱으로 문학계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아닌가! 필자는 문학이란 정신의 문제이고 문학은 정치가 아니고 글로서만이 말하는 것이 순수문학이라 할 것이다. 2006년 10월30일 금강산에서 남북문인 1백여 명이 모여서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출범 했다. 여기에 참가한 남한의 문인들은 북한의 핵 개발에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자제’라는 말 한마디로 만족하고 미국을 점령자라는 “거품의 시”를 낭독- 낭송이 아닌- 하고 끝을 맺었다. 북한의 문학은 오로지 노동당과 김정일과 김정은을 위한 우상 광고가 아니던가?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상위 개념으로 압수당한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의 포로이기에 반대하는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이 2024. 01. 05. 14:30분에 북한에서 대공 포사격을 했다고 들려온다. 이러한 사정임에도 무조건 북한에 추종하는 문인들이 있다면 북한으로 가서 살라고 하는 것이 정당성이 있지 않을까? [3. 절름발이 불균형의 문학] 문학인의 사명은 치열성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치열성의 부재는 문학의 땅을 정체로 만든다는 것이다. 1985년 민중의 시대가 끝났다는 증거는 고은 시인이나 김지하 시인이 초기에 서정성으로 돌아가는 시집을 발간 했던 데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고 그 이후 뚜렷한 상품을 개발하지 못한 민중문학의 흔들림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순수 계층의 문학은 항상 미온적이고 고민이 없는 평온을 유지하는 점에서 독자의 각광을 외면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잡지의 자유화 이후 한국 시단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에 직면해야 했다. 신인 장사를 앞세워 많은 문학잡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문학의 질에 대한 우려를 가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마디로 혼란이고 정체의 소용돌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나 시집을 발간할 수 있는 대중의 시문학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시대에 문제 제기는 거름 장치가 부재 한데서 따른 것이며, 이러한 시가 인터넷 발전으로 인하여 페이스북, 카톡, SNS 등에 횡행한다는 것이 문제로 대두된다는 데에 문제이며 월간지든 계간 얼마의 돈만 있으면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무질서한 사회 인식이다. 이러한 혼란은 전통의 파괴를 가져왔으나 시는 전통적으로 엘리트의 전유물에서- 사실 시는 고도한 문학의 장치를 익히고 배워야 하는 문학의 정수(精髓)라는 사실이 외면되었고, 다만 짧은 행과 연으로 조악한 정서를 나열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는 시를 위험의 벼랑으로 내모는 질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이런 형편을 제공한 것은 60년대 이후 민중문학에서 그 본류를 찾을 수 있다. 민중의 애환을 소설로 쓰기엔 호흡이 부족하고 긴장에 견디지 못하다 보니 짧은 행과 연으로 노동 현장을 고발하거나 정치에 욕설을 투사한 일들이 작금까지 시를 장바닥 쓰레기와 혼동의 표정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거름 장치 즉 한번 걸러주는 장치 부재에 대한 원죄는 아무래도 비평가들, 문단의 장들 모두 몫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거나 서로 눈치 보기, 금전에 끌려다니는 비평가들 등롱(燈籠)잡이에 만족 했던 한국 문단, 비평가들의 실상이기에 필자의 자성 하는 바이며 가능하다면 금전에 눈이 어두워 끌려다니지 않으려 한다. [4. 생명이 있는 영원성] 문학은 늘 시대와 사회 환경에 따라 수용하고 변하지만 문학은 다시 원형으로 돌아가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시, 소설, 혹은 수필, 희곡, 등 이름은 인간의 오랜 삶 속에서 형성된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사물에는 그만의 원리와 매개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원리를 잠시 일탈하였을지라도 다시 돌아가는 속성이 있기에 변화는 필연적이라 본다. 왜 그런가 하면 원(圓)을 일탈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지구는 원래 둥글기에 결국 원으로 다시 돌아가고 접합되는 길을 반추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고 인간이 만든 문화 순환이기에 시는 문학의 본령이고 원형이기에 변한다 해도 다시 원래로 희귀 하려는 운동의 법칙이 작용할 것이다. 영원성에는 생명력이 들어있기에 영원의 이름이 붙게 된다. 한국 시문학의 미래는 결국 혼란의 와중에서 다시 질서의 개념으로 돌아가는 원형이정의 이 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을 적시하면 미래의 한국 시는 오히려 더욱 튼실한 얼굴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란 예상과어떻게 혼란의 현재를 극복할 것인가 의 여부에 따라 답안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대통령만 바뀌었고 정부는 바뀌지 않았다고 하지만 문학적인 시에서도 기대하는 것은 문화정책 기조와 상관이 있기에 정부를 믿고 문학인들의 변화하는 의지가 있다면 정신가치가 살아나는 한국문학을기대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우리는 70년대 이후부터 우리 문학은 왜곡되고 오염되고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투사적인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민중문학이 민주화라는 사칭 이념에 사로잡혀 당시에 평론가의 대다수(大多數)는 외국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문학의 본질을 오도하고 정치적인 수사의 말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서구적인 잣대로 한국문학의 전통을 허무는 일이 정치적으로 변질되고 정치적인 말과 혼합, 상승하는 일들에만 열중하다 보니 민중 타령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첫째는 순진한 김수영이었으나 <창작과 지평>의 등장은 본격적으로 우리 문학의 절름발이의 첫 단추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또한 백낙청은 출 간사도 없는 창간호에 “한국문학은 전통이 없다는” 요지로 사시(斜視)의 입구를 통과했으나 당시의 정치적인 구호와 문학의 구분은 모호하고 감옥이나 민주화 운동이라는 미명에 경찰서 문 앞에나 다녀온 것이 대접받는 투사로 연출했다. 정치와 문학이 어울리는 시대- 이때부터 시작이 김지하의 『오적 시』라면 이후 아류의 목소리는 순화된 문학이 아니라 욕설과 투쟁적인 혼합된 글이 탄생되었고 사장은 모두가 도독이라는 이념으로 정치가는 적으로 생각하는 이분법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일이 이른바 문학을 왜곡하는 황색 좌경문학과, 언론이라는 종사자들의 역할과 혼합하여 한국문학을 모르는 민중문학으로 끌고 갔으며 충실히 수행하는 절차가 지금 도 진행형이라고 본다. 사실 문학은 문학성으로 답을 하는 것이지 문학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변색되고 군 중 집회로 변하여 소리만 지르고 반미, 좌파 문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도(正道)이지만 당시 김지하 시인은 이른바 『오적 시』 한편으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을 넘어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거창한 무게를 결국에는 감당하지 못하는 불행이 되었던 것, 이후 이런 흉내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아류들은 금배지를 다는 정치가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중문학의 풍경은 다음 세대에 먹히는 소리 지르기 게임 양상이 지속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통치에서 전두환 이르기까지 회색 문학 시대가 1기라면 이때의 문학의 순정성을 지키려는 경향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고 제도적으로 민예총은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시대였다. 그러나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회색 시대의 구체적인 문학이 2기로 접어 이 시기에 해금 문인들의 대한 복권은 칭찬을 받을만했다. 물론 올림픽 덕분이었지만- 아울러 민주 투사라는 김영삼의 집권은 2기에 핵심이라 하겠다. 문화예술의 문외한들이 한국문화계를 접수하는 시기가 서서히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교육계는 전교조, 그리고 예술계는 민예총 등이 한국 교육과 문화를 사실상 접수하면서 판도를 넓히는 기초를 완성했다. 이어 김대중의 집권은 구체적으로 회색의 강도를 집중하는 시대가 되었고 이어 노무현시대에는 노골적으로 좌파적인 경도에서 온통 회색으로 바뀌는 무대를 연출했다. 일반 대중의 뇌와 정신을 우둔으로 몰아넣은 영화 - 깡패들의 욕설과 반미의 주제가 흥행의 열쇠로 둔갑하는 시대를 만든 것이다. 우울한 예기지만 노벨문학상을 한국 사람이 받는다면 어떨까?라는 물론 문학의 우수성이라면 한국문학의 위상은 높일 수 있지만, 그러나 김정일과 김대중의 사이에서 술잔을 높이 들면서 감격하는 사람들이 노벨상을 받는 일은 난센스가 아니었을까? 왜 그런가 하면 문학은 휴머니즘이고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라면 김정일이 수백만의 백성을 굶어 죽이는 동토의 땅에서의 행위는 이미 민족을 넘어 죄업일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탄탄함을 이룩하는 시대의 서막이 올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참으로 문학성이 나올 수 없는 시대임에도 좌경문학이 탄생한 것은 설익은 소재를 정치적인 이념으로 포장으로 드러내는 속성에서 파탄에 운명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지? 70년대 이른바 능동적 소수- 필자는 민중문학을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집권을 그늘에 있는 권력 맛에 또 다른 행보를 계속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이다. 좌경의 틀에서 소수의 문인이라는 자들에 상품 품목은 민주화, 민족, 통일, 다시 민족이라는 상품을 포장하여 팔았던 것은 아닌지- 최근에는 민족을 떼고 우리끼리, 보편성을 강조하려는 변화의 기민성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새로운 상품명 우리 민족끼리의 동질성 의식을 주장하고 있다. 해방 이후 남한에 문인은 165명이었고 1950년까지 111명이 북한으로 넘어간 김일성에 의해 숙청의 칼날에 가버린 문인들의 행로- 임화, 이태준, 정지용, 등은 어떤 대접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지는 문인 모두가 기억해야 할 사항들이다. 북의 문학과 한국의 문학은 본질에서 엄연히 다른 것이다. 누구를 추종한다는 것은 이름만 문학이지 문학이 아닌 것. [한 가지 예를 들겠다] 김일성이 교시한 “진실로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문학과 예술은 인간 생활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통하여 생활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더 훌륭한 생활을 창조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에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인민대중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양수단의 하나입니다. 『김일성 저작선집』 2권 356~357면』 이렇게 시작되는 김일성의 문학에 대한 2페이지에 걸친 설명 중 앞부분이다. 문학을 통해서 생활에 깊은 이해와 투쟁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한 김일성의 교시 `- 고딕체로 강조한 말이 어떻게 문학의 정의로 둔갑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문학개론 = 문학의 효용이 지적 쾌락과 간접적인 교훈을 얻는 자기 성찰 혹은 수양의 방편으로 삼을 뿐이다. 출발이 다르면 목적지도 다를 수밖에 없다. 현격한 사고의 차이를 보편적인 문학의 땅으로 끌어올 수 있는 인자(因子)는 묘연하다는 점에서 북한의 문학에 대한 접근은 이해 불가 그 자체뿐이다. {2.정신 가치 문학으로 출발해야} 대한민국의 3대 좌편향 그룹의 출발은 산업화의 후유증인 박정히 독재의 그늘에서 싹이 자랐고 이런 현상은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을 거치면서 불합리한 정권의 투쟁을 하면서 자연스레 정치적인 구호인 민족,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이 개발한 상품은 소비자인 국민에서 합리와 설득력과 우리끼리라는 이념을 갖고 진행되었고 점차 사회에 불합리의 그늘이 벗겨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의 구호로 일관하면서 사회의 동력을 잡아먹는 축으로 전락하였고, 변해야 한다를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신세가 위축 혹은 고사당하고 있음이다. 386, 486.586. 686을 거치면서 이젠 정치권, 사회권 등에서 퇴출해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이나 전교조는 미망에 빠져 투쟁의 목소리만 높일 뿐 소비층인 국민은 벌써 얼굴을 외면한 것도 모르고 좌편향 문학 또한 그렇다. 이젠 어떤 구호, 어떤 상품을 개발에도 이미지의 퇴색이 가져온 불매운동은 계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노무현 정권으로 인한 이런 증거는 백일하에 드러났고 민주화를 외쳤던 실세들의 실체가 목청뿐이지 실력도 없고 내로남불, 이기주의, 안하무인으로 비전도 없으며 데모 집단이라는 학습을 마친 국민의 수준을 따라야 한다는 다시 말해 학습의 진도가 빠른 국민의 수준을 간과하고 여전히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소리치는 일이나 빨치산 추모행사장에 학생을 인솔하고, 대학에서는 이미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고 있는 일을 거부하는 전교조 또한 얼마나 난센스인가를 모르는 집단이 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주노총의 경직된 행동양식에 대한 차이는 독자의 욕구를 위한 상품개발에 다시 한번 머리를 회전하는 기민성을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직도 백낙청의 말은 여전히 오만과 독선의 늪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한국문학 전체를 대표하는 문인단체로 꾸준히 성장한 만큼 더 유연한 자세로 조직 운영 방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명칭 변경은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07년 1월 27일 정기총회에서 찬성 의견을 말했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2006년 12. 20.>은 한국문학의 쭉정이- 차별성은 고사하고 그들이 한국문학 전체를 대변한다는 기가 차는 말은 분명 억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직도 일부 신문들이 문화담당자들의 호기심 때문에 살아남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뼈가 없고 오로지 소리만 있기 때문이다. 민족 문학이라는 앞 수식어를 버릴 수 없는 설왕설래의 증거는 민족이나 민주를 전유물처럼 앞세우는 그들에게 다음 상품 선택이 고갈될 이슈에 직면했음을 뜻한다. 자기들 나름대로 시대적인 변화를 읽고 있지만 문학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 허사가 될 뿐이다. 애 그런가 하면 이젠 민족이나 민주 혹은 통일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문학의 그릇을 채우기엔 문학 여건이 너무 광범위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글로벌 <global> (세계화) 시대의 보편성에 원리를 외면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둘째 이를 뒷받침하는 인터넷의 확산은 이미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지구촌이 한 가족이라는 자기를 지키는 시대가 되었으며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네트워크 <network>로 공유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혈통의 순혈주의(純血主義)는 고립되고 있다. 이미 국제결혼은 보편화되고 있으며 당연함으로 바뀐 시대를 우리끼리라는 사상에 빠져 우리끼리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변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문학적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지 집단이나 단체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말로 문학을 라는 시대는 지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문학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쓰는가? 그리고 정치가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노동자는 누구를 위해 땀을 흘리는가? 이 모든 것을 리더로서 아우르고 서로 인간을 사랑하는 일일 것이며 독재를 미워하고 불의를 보고도 지나치는 일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며 민주라는 허울을 신봉한다면 정치나 문학이나 노동, 교육, 등은 곧 인간의 사랑이라는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은 기초적인 인지 자료라 하면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고 메카니즘은 작동하는 원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초와 유기반응은 어떤 경우에든 반응과 인지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엄존하는 지구에서 살아야 하기에 적응을 위한 함수 즉 자기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병이 생겨 병원에 Admission(입원)해서 수술 같은 것을 받게 되면 Dr가 하는 일은 반응을 알아본다. 일차적 수순이 바로 반응이며 다음 순으로 넘어간다. 지구란 늘 자전하기를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생존해야 하는 관계라 둥근 지구 안에 교차하면서 이런 적용의 원리로서 작동될 때, 복잡한 인지기능에 따라 반응과 대응을 하며 일의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인간 심리학, 또는 전문 심리학 연구는 하지 않았지만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를 근 35년을 근무하다 보니<어깨너머 3년이란 말이 있듯이 정신질환자(精神疾患者)란 망상,환각, 사고(思考)나 기분의 장애 등으로 인하여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중대한 제약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어느 정도의 반응이 통계라고 하면 인간사의 일은 이러한 중대한 사례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지와 작동이 안되고 침묵한다면 인간이라 볼 수 없기에 상대가 알 수가 없는 것이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반복적으로 행동 반응이 나온다면 마침내 부딪침이 되는 것이다. 즉 잘못을 인지하고 의 일이 있을 때 즉각 반응하는 일은 다음 수순을 생략하는 간편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산속으로 들어와 귀 산을 하여 가끔 시골에서만 발생하는 일들과 자주 마주하곤 한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다른 논에 물을 막고 자기의 논에 물을 받으면 심각하게 서로 다툼이 생기고는 한다. 이런 자기 아집과 이기주의가 시골에서는 심심찮게 보고 산다. 물론 한발 양보하면 되지만 1년 농사를 풍년 농사를 짖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사태라 여기면서도 시기가 지나면 수확이 적게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경우가 자주 일어나 앞집 옆집 뒷집 모두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회적 동물이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겪어본 터라 이해는 하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골구로 물꼬를 대면 되는 일을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 기류를 보면서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도시나 시골이나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일이 심각하게 발생 되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이 지나가는 경우와 반응하는 경우는 다음에도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필자 옆 밭이 하나 있는데 10월 지금쯤 우사에서 쇠똥을 잔뜩 받아놓고 몇 날 지나니 그야말로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여 문을 열 수 없는 지경임에도 극심한 공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 시골의 풍경이라 하지만 사람이란 인내의 한계가 있는 법 이것을 놓고 확연히 다른 차원의 행동이기 때문에 필자가 살며시 그분을 만나 사정을 하고 나니 그제야 밭을 덮어 놓는다. 그러니까 행위의 반복을 그냥 넘기게 되면 모든 사람이 피해가 갈 것이라는 점을, 인지 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마 도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소송이 걸리지 않았을까? 서로가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을 알고리즘과 메카니즘의 반응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는 존재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이 반응할 기회가 제공되며 반복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합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지를 주무로서 미리 피해를 막을 수 있고 예방의 조치가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를 너무 드러낸다면 상대방이 반감을 가질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한 존재를 너무 감추다 보면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둘의 사이에서 오고 가는 고민을 소화 시키는 일로 일상이 지난다. 물론 살아간다는 일에 있어 당연히 피할 길 없는 수순 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행동이라는 점에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이라 -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이 정확한 답안이라는 제시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신들의 말조차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자기에 위치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말의 근거로 인하여 장구한 설전이 나타난다. 예로 어느 경전이 수학적인 답안으로 이루어진다면 존립의 근거가 모호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여지가 많은 개입의 자리가 있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신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끝없는 분쟁과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신의 실수라고 해야겠다. 침묵이 금이라면 결국은 인간의 모순에 대한 변명이고 이 변명은 결국 다기(多岐)한 갈래로 말의 포장을 일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은 지속적 실수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신은 인간의 곁을 떠나면 이미 존재가 없다는 것도 인간의 야비하고 교활한 행동양식이다. 신을 만든 인간의 지혜가 신의 발목에 잡혀 함정에 빠지는 영악한 도 물론이지만 - 결국 나는 인간관계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체념의 문을 열어 놓고 살아야겠다. 오는 사람은 반기며 가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는 일로 정리되고 내 모습 그대로 하루하루 희망을 섞어 역사를 쓰면서 지내야겠다. 사실 젊은 날의 몰랐던 일들이 나이가 익어갈수록 알게 되는 상대의 차이가 왜 그렇게 크게 보이는지를 생각하면 사는 일에 해답이 없는 모호한 숲이 고독하게 보이는지는 아직도 물음표이다. (?) 있어야 할 것은 점차 없어지는 것으로 변하는 것도 필연으로 느끼고 사는 것이 불편한 일이 있을지라도 또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이치가 당연한 논리라 한다면 편린(片鱗)을 쫓아가는 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이라고 해야겠다. 허긴 지금에 와서 전체를 조감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부만 떼어서 검토하는 일은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삼삼한 환경의 대응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는다. 이 같은 언덕을 얼마나 넘을지는 모르겠으나 행복이나 희망의 추구가 보편적인 가치로 꿈꾸는 데서 알고리즘, 메카니즘의 반응을 휴머니즘의 주조로 삶의 가파름을 넘어가려는 마음이 여리다 해도 계절의 순환에서 내 모습이 향기로 승화하려는 발상이려니 하며 꿈과 연결되는 필자의 글이 묘미가 있고 탄력적이지 않을까 한다. 작은 마을에서 작가입네 하며 죽은 듯이 사는 것이 소망 일진데 마을을 위해서라도 알고리즘과 메카니즘의 반응일지라도 말이다. 2023. 10. 2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갈럼리스트/이승섭시인] 서로의 정서의 층(層)이 겹겹이 쌓여 있으면 좁힐 수 있는 길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그 현실정치에 살고 있다.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정치가 과연 국가나 사회에 무슨 이득이 있겠으며 상대방의 말은 무작정 무시하고 듣지도 않고 비아냥대는 시대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져 전당포에 맡겨 놓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세상 사람들에게 온갖 술수로 거짓말의 장이 되었고 위장의 탈을 쓰며 가림막으로 그럴 싸 하게 가림막 속에서 온갖 술수를 부리는 모양이 정말 목불인견이다. 왜 그럴까? 어찌 인간이 되어 국민을 섬기며 국민이 주인이라는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입만 살아서 유체이탈로 그럴듯하게 속이며 자신의 말이 옳다는 반어법 논리를 구사하면서 국민을 속이려 하는 정치꾼들 그리도 뻔뻔한지 완전 마이동풍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정서의 층이 어긋날 때 불행이 검은 장막을 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제자가 둘이 있다. 장군 알카이베스와 플라톤이다. 알카이베스가 전쟁에서 패하자 누군가 희생에 재물이 필요하다는 30인의 참주들에 의해 독배를 마셨다. 이때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 나이 70이었고 제자 플라톤은 28살이었다. 30명의 참주 중에는 친척이 있어 도망을 부추기는 자들도 있었지만 배불뚝인 매부리코인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을 한다. 이 말은 지금도 많이도 회자(膾炙)되는 교훈이지만 정작 정치가들에겐 편리할 때 사용하는 인용어이고 유효하게 쓰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00명이다. 이들의 특징은 변명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믿지 못하는 자칭 양심 세력이다. 국민을 대변한다고?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가. 입에 침이라도 바르면서 한다면 봐주기도 하겠지만 -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 것인지 - 온갖 요설로 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을수록 뒷날에 국회의원이 되고 정치가라는 화려한 부활을 하고 배지를 이용하여 그리고 케미(호흡)를 강조하면서 떼로 몰려다니면서 법 뒤에 숨어 방탄조끼를 입었느니 하며 요사스러운 농간을 부리고 있고 자기들은 지도자들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연일 하는 일들이 거짓말 달인이 전부인 것 같다. 참으로 가관이며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법이란 폭력을 배제하는 점에서 지켜야 할 덕목임에도 지키지 않으려면 법은 죽어있는 이름일 뿐이다. 탈법과 불법을 일상화하면서 이를 자기변명으로 정당화 시킬 지라도 국민은 밑지 않을 것이다. 국민 다수가 그렇게 보는 것은 정치를 무시하고 모두가 자기변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국회의원 대부분이 그러했고 지금도 의원 작자들은 잘난 변명을 일상화하는 일은 정말 난센스다. 법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이러하니 무슨 믿음이 있겠는가? 이들은 모두 위정자자 될 것이고 이들을 믿고 따르는 철부지 백성들이 있는 한 한국 민주주의는 껍질 공화국이다. 지금 이 땅 국회의원들의 3/2 정도는 이런 무자격자들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조 없음을 넘어 거짓말 행진으로 근근 지탱하는 나라의 운명이 하소(煆燒)인 것이다. 그렇기에 망해야 할 패륜 집단 북한이 존립의 근거와 조직에 이를 따르는 종북 세력들이 횡행하는 작금의 처지도 따지고 보면 남한의 거짓 정치가들에 의해 이용에 놀아나는 일이 현재도 다수이며 이러한 일들이 버젓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현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추세가 정신 사상이 없는 현상으로 생각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정신의 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정권교체가 되어 다행이지만 아직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네 현상이고 이를 막지 못하는 양심의 마비가 지금도 진행형이 된다는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서구의 개인주의와 “우리끼리”의 붕괴에서 오는 과도적인 현상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정신 사상의 무게와 서구의 개인적 존중 사고 때문에 경찰이 잘못된 자는 가혹하게 다루어도 말이 없지만 우리는 경찰이나 검찰의 말도 신뢰를 일탈(逸脫)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정권 퇴진 운동이니 촛불을 들며 민중 봉기로 착각하는 무지한 여론이 지배적인 풍미로 사회를 마비(痲痹)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묻혀 중심사상의 형성이 미흡하다는 결론이다. 설사 어른이 당연한 꾸중을 해도 “당신이 뭐냐” “간섭하느냐” 반론이 먹히는 마비 현상이 나타났다는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 중 에 하나일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약속을 어기는 자를 받아들이는 속물근성이다. 언제부터인지 맹목적으로 따르는 펜덤정치<Fandom>(광신자)가 되어 떼로 몰려다니는 정치, 북한 집단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을 우리는 21세기 지금 보고 있다. 이런 정치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정치라 볼 수 있는지는 글쎄이올시다 민주국가에서 북한의 어긋난 추종 세력을 꾸짖지 못하는 일도 이런 관성화의 시간이 너무 공고하다는 데서 갈등이 요란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그 시절 운동권 586세대들 대다수가 국회로 대거 들어와 행세하는 정치판이 되었으니 무슨 미래를 가질 수 있고 막무가내의 횡행이 당연시로 나타나는 국가 현상에 무슨 정의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 참 답답함만이 든다. 더욱 후안무치로 이런 철판을 깔고 활개 치는 자들이 정의와 민주를 역설하는 입을 보면 오히려 민주주의가 불쌍할 지경으로 생각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지? 북한의 악랄함에는 입을 닫고 시시콜콜 자기 나라를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는 계기는 결국 정신사상이 투철한 교육과 현 정부가 단호한 결정으로 해결해야 할 목표이고 타개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정신적 사상을 국정과제로 삼아 진정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주기를 기대한다. 북한을 추종하는 것 같은 민주노총, 귀족노조, 언론노조, 교원노조, 사이비 종교 등이 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된 자들이라면 하루속히 뿌리 뽑아야 한다. 마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뼈 없는 인간이 되었고 목청이 큰 자의 세상이고 우기고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탈법 정치꾼들이 지배 하는 한 새 희망의 불을 켜는 일은 절망으로 다가오지만 이 나라를 지켜온 정신사상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이 있으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 투사들이 있으며 공산주의를 지켜본 세대들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가닥 희망을 보면서 또한 정부를 믿어 보면서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정치를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10. 1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의 저서] [고고함의 연꽃] [필자의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프랑스 정서로 재탄생한 파우스트는 죽음 전 1년에 완성 된다. 괴테의 원작을 재 생산한 것이 극시 대표적 작품이 파우스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다룬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실은 독일에서는 19세기 괴테의 원작을 변질 시켰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천회나 상연 되었으니 초연 이후 1893년 구노가 세상을 떠날 때가지 인기를 끌었다. 평생을 진리 탐구를 했으나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두 섭렵하고도 허망을 견디지 못한 파우스트는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인데 사실 필자도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아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렇게 인생의 전체를 파고들어도 늙어버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한탄을 할 정도였으니 모든 것에는 이성의 합리성이 기준이 될 것이라 하겠다. 이성이란 객관적 주관적 이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고들 한다.이러한 이성을 나열은 할 수 없지만 요즘 들어 정치, 사회, 가 모두 갈래갈래 나누어 지다 보니 이념성인지, 도대체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정말 우리나라가 한쪽으로만 편중되어 이기주의, 나 아니면 안된다는 논리, 내로남불에너무나 우려스럽다. 모두가 냉철한 이성과 주관적이 아닌 객관성 합리성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어디 그렇던가 ? 인간은 저마다의 인품의 냄새 가식의 냄새, 거짓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를 지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의 인간의 특성이 있음을 오래 교류하다 보면 자연스레 향기를 발산하고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이 있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도 있을 뿐만 아니라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좋은 사람의 향내가 나는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이기의 함정에서 자기만을 앞세우는 사람을 보면 외면하는 일이 적당한 타협이 되는 것이다. 어느 모임이나 어떤 단체엔 꼭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선량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앞세우지 않기 때문에 의사 결정의 문제에 당면하면 침묵으로 지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반면에 자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항상 끈질긴 자기 욕망의 길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욕을 완성하는 모사의 치부가 진행형이 된다. 그러나 늦지만 언젠가는 불합리의 그물막이 벗겨지고 마침내는 외면당하는 일이 정도(正道)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이때의 시간은 매우 더디고 완만하지만 결국 기다리다 보면 제풀에 넘어지는 일이 당연하게 된다. 세상사는 이처럼 항상 2개의 구분 속에서 진행된다. 이를 굳이 악이나 선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욕심의 함정에 빠진 사람의 경우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항상 자기를 수련하고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이 앞장을 서는 일이. "너 자신을 알라" 의 소크라데스의 거울 논은 자기를 반추하면서 자기를 건져 올리는 작업일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성을 굳게 지키려 해도 항상 반대로 길을 만드는 일에 유혹을 견디는 일은 많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자기를 돌아 보아야 할 사명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생리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이 있다. 이를 사상적인 측면으로 살핀다 해도 그 사람의 특성으로 굳어지면 고치거나 수정하는 행동에는 한계가 노 증 된다. 아마도 이성보다 더 굳은 것이 환경적인 영향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자라난 환경이나 교육에서 형성된 성품은 화석화된 이념을 이룰 수 없는 여지가 많을 것이다. 양보하고 겸손하고, 남을 세울 줄 알고, 자기의 높이를 가늠하지 않고, 낮추는 일이야 말로 사람 냄새 중에 가장 향기로운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요망은 항상 어려운 벽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는 정치가나 교수들에게 가장 많은 이기의 욕망을 많이 보아왔다. 정치적인 이기, 학문적인 오만, 등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고 합리화시키는 일 등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문이 아닌 인간적인 오만은 결코 바람직스럽게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물론 남을 업신여기는 교수가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아마 가장 높은 비율로 나타날 것이다. 특히 자기가 우선시 되어야 하고 보직이나 앞세우고 정도와 학문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 일 수록 이런 치기(稚氣)는 더욱 많은 편이 아닐까. 정치와 학문은 정도와 탑이라야 한다. 이는 도의적인 정치와 학문 속에 인격조차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성으로 국민을 섬기고 열성으로 연구하고 찾고 노력하는 자세에서 비로소 국민이 이해하고 성과 있는 학문은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자리나 염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는 정치의 길과 학문의 길은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시정에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의 철학은 최선의 열심이고 지성(至誠)이라는 예는 허다하다. 그깟 정치가가 되었다고 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국민을 무시하고 당략에만 앞장서는 일, 연구는 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그 냄새는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빈껍데기 때문에 허세의 방향은 항상 거짓이나 이권, 청탁, 등 남을 밟아 만족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람의 판단을 허명으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세상의 흐름을 보면 진리는 항상 옳고 바른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 현실을 늘 직시하게 된다. 천박하고, 무게 없이 경박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가르쳐준 인간들은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아울러 이성의 판단보다 감정이 앞선 그 사람들의 자리는 아니었기에 소화불량으로 국민을 호도하는 광기가 요즘 현실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고 거짓과 선동으로 정치를 하고 있으니 정말 내로 남불이 따로 없다. 이런 광경을 날마다 보고 있는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자괴감만 들어 귀막고 입을 막아야 하지만 명색이 글쟁이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렇게라도 글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시간이 지나면 이성으로 돌아오는 국민의 위대성은 파우스트를 읽어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파우스트의 이성은 항상 뒤에서 천천히 생각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음은 향기로워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작가라는 욕심의 그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미물의 악취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미물이기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하겠다. 사실 이상주의는 매우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성의 논증들은 사람들이 구하고 싶은 아니 만들고 싶은 것들을 궁극적으로 내놓지 못하면 이 사회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다만 모두가 합리적 공유로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다 같이 함께하는 사회, 즉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기대하는 것이다 네게 앞으로 주어진 임무라면 되도록 말을 줄이고 줄여 간단하게 말하는 것으로서 일상의 길을 가는 것이 정답이라 믿기에 글에 초라함의 변명은 어찌할 수 없으나 그래도 아직은 필자가 숨을 쉬고 있다는 의미부여를 하면서 피할 수 현실이라면 정신적 가치로서 감내와 인내 그리고 영혼을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면서 필자의 논지 그리려 한다는 것을 다짐하면서 끝을 맺으며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정신구축의 자전 1] [행복의 꽃길 2] [이승섭 시평집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진보라는 말은 작금에 공공연히 사용되는 말이며아니면 좌파라고도 한다. 지금은우파 <국수적>, 좌파 <급진적>로 나뉘어 서로가 정도라는 일반적인 수사로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좌우 갈등으로 인한 사회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 공산당은 뿔 달린 괴물처럼 금기시되던 말이 현재는 리버럴주위 <자유주의> 시대 앞에 고민하는 사람쯤으로 허용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고 생각하지만이번언론매체를 보면서한국사회도 자생간첩이 생겼다는 뉴스에 경악할 노릇이다. 물론 우리의 정신 공간이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한 다양성의 사회를 뜻할 수도 있겠지만 자생 간첩만은 이해가 안 된다. 엄연히 남북 대치 상황과 정전협정 상황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유경제 바탕으로 이루어 나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에 경도되어 소리치는 좌파들의 목소리는 여전하기에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960년에 나타난 소위 민중문학의 잔치가한창이 던바 21세기 들어서 이제는 노골적으로창궐하는자생간첩이라니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느 정치가는 21세기에 대한민국에 무슨 간첩이 있겠냐며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민중문학의 당위성으로 오도된 이 현실을 보면 민주화, 민중, 통일, 민족, 요즘엔 중도 등의 현란한 변화가 과연 오늘날 정당성이 담보할지 모르지만 이것은아니올시다.이다 애매모호한 문학은 이제는 아니다.라는 말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5년을 보았으면서도 사상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반쪽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 가장 극심한 시절은 김대중, 노무현을 거처 문재인 정권에 와서는 그들의 민족문학이라는금과옥조의 간판조차 명칭을 변경하고 백낙청, 황석영 등에 의하여 최고조를 달렸다. 더구나 백낙청은 2009년 3월 도하 신문에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수단일 뿐”이라는 표제하에 “분단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 남한에도 북한에도 있어 건전중도세력 형성되어야”를 주장하는 면모를 보였다. 문화 정신이 줏대가 없는 정책에 화해, 통일인지는 모르나 기막히게 그들의 또 다른 잔치가 되었다. 우리의 문학이나 문화는 좌파 시대나 우파시대를 지나도 이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은 정신이 나간 청맹과니의 신세처럼 보인다. 현재도 북한은 우리를 적이라 하며 미사일을 쏘아대고 툭하면 핵으로 위협하는 실정에 있다. 좌파들이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수 백만명의 동포가 굶어 죽어가도 핵을 만들고 미사일을 발사하고 꽃다운 젊은이들이 꽃제비로 팔려가는 슬픈 북한의 실상을 보면서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하다니 참으로 이율배반이고 끼리끼리 만나 외국에서 북한과 접선을 하고 있다니하루빨리 검거하여 바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곧추서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은 개인 돌출이라 볼 수 없으며 조직적으로 암약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물론 좌파 문학에 심취한 지식인들도 시대에 따라 우후죽순으로 자생되었지만 경도된 문학은 한계가 있다.대부분 선량한 작가들과는달리다른가치의 이념은기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으로 가서 작가를 해야지 왜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혼란을 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진보의 작가는 이문열의 소설을 폄훼하여 거론하지만 이런 말은 확실히 잘못된 아집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비난하는 자의 시는 잘된 작품인지 묻고 싶다. 특히 문학과 예술은 볼세비키혁명에 의한 지도적 전위들이 이끄는 급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복무해야 한다는 문학론.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문학론으로, 한국 문학에서는 1930년대 초 카프 문학 운동의 이론가였던 임화, 안막 등이 주창 하였던 바 해방 이후 대한민국 많은 지식인들이 볼세비키혁명에 의하여 중국, 러시아로 유학하여 경도된 문학으로 사상의 정신이 바퀸 문제도 있지만 참으로 근대사 역사를 보면 너무나도 슬픈 역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세기도 안되어 세계 10위라는 금자탑을 세웠던 것은 지도자들의 혁혁한 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와중에 독재, 민주화라는 문을 넘어 지금 같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때는 필자도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거리로 나선 적도 있지만 막스주의, 레닌주의니 하며그때만 해도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긴끼리끼리 모여 단파방송을 몰래 듣는 친구도 있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남북이 대치된 사회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민주화란 이름으로 경도되는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시인이나 작가들이 생산하는 작품은 그 나름의 개성과 표정을 가진 살아있는 얼굴들임을 알아야하겠지만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문학을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적 가치로 인정을 받아야 함에도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사회적 혼란과 문학을 이용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2.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렬(慘烈)의 창작』 죽음이란 참으로 참담한 슬픔이다. 그것도 자식의 타계를 앞서 겪어야 하는 어버이의 헤아리기는 그 당사자가 아니라면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지용의 『유리창』이나 허난설헌의 『곡자』 같은 작품은 자식을 보내는 비참한 심정이 가슴을 적신다. 황금찬의 『목련꽃』은 참열이 묻어있는 시이다라고 하겠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집 앞에/목련 두 구루가 서 있다./키가 좀 크고 가지가 적은 나무는/백목련/키가 좀 작고/가지가 많은 나무는 자목련이다./해마다/목련 철이 되면/도제가 와서/목련꽃 시를 쓴다면서/반나절씩/꽃나무 밑에 섰다가 가곤 했다./금년에는 꽃이 다 지고 말아도/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울고 있었다./내가 아니고/꽃나무들이다./눈물도 울음소리도 없이우는/목련꽃나무/시인이 간 그나라에도/목련꽃이 피어 있겠지//내게 그 소식/전해달라/시인아. <황금찬 『목련꽃』> 시인 황도제- 자식의 죽음이 주는 통증을 감추면서 시를 쓴 것이다. 이는 절제의 미학이 되겠지만, 이를 감내하기 위해 안으로 흐르는 눈물의 추억이 고스란히 보인다. 이미 가슴에는 흘러넘치는 아픔과 슬픔이 노 시인의 마음을 의탁하는 목련꽃의 “눈물도 울음소리도 없이” 시나브로 떨어지는 꽃잎의날림 앞에서 처절한 정경이 보이는 듯하다. 그때가2010년쯤인가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용인신갈그때 당시에 같은00 아파트에살고 있었기에 더욱 생각이 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정상으로 떠나지않았지만 떠나간 시인은 소식을 보내는 방법이 없을지라도 사랑으로 지켜본 자식에 대한 연민은 “내게 그 소식/전해달라./ 시인아.”의 절규에는 허공에 씁쓸한 메아리 되어 귓전에 울리면서 가슴으로 파고드는 피 울음인 것을,어찌 위로할 수 있겠는가? 행사 때 이거나, 문사원 대학에서 강의와 축사를 하면서도 황금찬 시인은 일절 입을 굳게 다물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황금찬 시인은 이천 문사원 대학에서강의도 듣고 스승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인간의 호기심은 늘 미지의 공간을 위해 모험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앞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대답이라는 것은 씁쓸한 비유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시는 이러한 이치를 에둘러 스스로를 말하는 독백의 길에 나설 때, 시의 깊이는 함축되는 것이다. 인간이 새가 되거나 꽃이 되거나 결국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엠비규어티 <모호하다>라는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새들이/그리운가 보다./닿지 못하는 하늘이기에/ 되돌아왔다./하늘을 날다/되돌아와서는 /지치어/나뭇가지에 앉아/두리번거리는/새들이 저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지치고/지친 나머지 인간은 길을 떠나 만들고 또 되돌아오는 일로 일생을 가늠하는 것이다. 설사 멀리 떠난다 해도 결국 종말에는 되돌아오는 여정에서 나그네라는 운명을 감내하는 것이 고작이다. “새도 인간으로 환치하면 무한으로 길을 떠났다. 결국 ‘날개짓 하다 지쳐서 확인하면 고작 <나뭇가지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일- 지치고 지친 새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는 데에는 새도 동물이라 가만히 지켜보면 그 나름의 행동을 보면 나타난다. 그것이 인간아니 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안목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촉을 가지고 있는샘이 아닌가? 이것은 시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행동 촉, 상상할 수 없는 창작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개인적 촉으로 사물과 동물을 바라보고 창작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시인들만의 촉을 발휘한다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상상의 나래를 얼마나 펼칠 수 있고 그 사물과 행동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순전히 개개인의 능력이고 창작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시인은 외롭다 할 수 있겠고 또 다른 시인은 여유와 낭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보는 각도, 창조하는 기교에 따라 모두 다를수 있기에 시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허무라 할 수도 있고, 도로(徒勞)라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지친 상태 앞에 무기력해지는 자화상의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길을 떠나는 연습이지만 제자리로 돌아와 자기 앞에 설 때, 비로소 삶의 깊이는 성숙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새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꿈을 가질 때, 새의 운명은 아름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 또한 저마다의 자리를 소유하고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함축과 응축의소산이라여기며에필로그한다. 2023. 03. 2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양천 신정교 구간 데크로드] [이승섭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어느 날 언론매체 뉴스를 보고 놀랐다. 미국의 한 북아메리카 메사추세스에서 어느 재무장관의 집 앞에 엄청 눈이 내렸는데도 눈을 치우지 않았다고 벌금을 냈다. 라고 하는 뉴스를 보았다. 매우 신선하고 역시 미국이구나. 하고 중얼거림을 했다. 벌금이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라 역시 선진국인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우리나라를 대비해 보았다. 우리 기준으로 볼 때 벌금까지는 의문이 당연하다. 기꺼이 벌금을 내고 이것이 마지막 폭풍이기를 바란다는 성명서는 정말 부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사실 당연한 기사인데 지면을 할애하는지 우리는 먼 거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더불어 바이든 대통령 신호 위반 위반의 기사도 곁들여 소개하는 것을 보면 높은 직책의 장관이라도 법을 위반하면 당연하게 벌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례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힘이 여기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법을 유지하는 길이 된다는 엄정성에서 박수가 나온다. 반면에 한국을 보자. 우리 국회나 장관들이 청문회를 보자. 검증의 단골 메뉴인 부동산 투기 의혹이 커다란 활자로 도배된 것과 비교한다면 씁쓸한 쓴맛만 입안을 행군다. 나라의 위대한 힘은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앞장설 때 국력이 배가될 국력이 될 것이고 백성은 이를 따르는 순종의 길이 당연함으로 질서를 잡게 될 것이다. 고대 플라톤의 <공화국>은 지도자에 의해 완전한 통제와 엄명이 횡행하는 공산화였지만 결코 유토피아 국가는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독재국가의 말로는 결코 이상 국가가 될 수 없는 먼 상상의 공간일 뿐이다. 공평을 소리치고 천만 번을 떠들어도 솔선의 행동 한번 효과에 따르지 못하는 일은 우리 역사 속의 활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국가의 위기 때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솔선수범으로 위기를 돌파한 사례- 문민 대통령 시절 국가 부도 사태<imf>dp 직면할 때 금모으기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한 서민들의 힘을 과시한 예가 작금이다. 그러나 고위공직자들의 미담은 없고- 어느 단체장은 깡패와 합세하여 수천억을 꿀꺽, 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현실- 사실 6/25 때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하여 아들을 잃은 미국의 장군이나 모택동의 아들의 예화(禮話)는 지도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의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국민은 단순하다. 작은 것 쉽게 감동하고 쉽게 동화되는 길은 늘 넓혀있다. 이 단순한 일을 작은 욕심으로 간과하는 일들은 결국에는 정신의 문제로 돌일 일이다. 국가는 국민에게 간섭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 정신이 발현하는 것이다. 통제와 간섭은 꾀를 발동시키고 마침내 서로가 대결하거나 회피의 길이 넓어질 때 지도자의 위신은 추락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할 때, 법이 그물을 펴고 백성의 발목을 잡기 위해 더 많은 그물을 펴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노릇일 것이다. 마치 대통령이 모든 일들 다 하려는 과도한 욕심은 총리나 장관의 역할이 축소되고 상상의 고갈은 마침내 면종복배와 눈치 보기에 머무는 일은 대통령이나 국민이 받아야 하는 상처로 남게 된다. 모르면 모른다는 인정은 훌륭한 지도자의 용기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일시적인 선택일 뿐이지 권력을 항구적으로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용기를 갖는 일은 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성과조차 아래로 내려보내는 겸손이 필요하다. 물길을 내는 사람이 지도자요 앞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정작 이를 시행하는 몫은 아래로 물려주는 책임 정신이 요망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도자는 왜 미국의 지도자들과 다를까? 이 간명한 대답은 권위를 지키려는 유교 정신이 바닥에 깔려 있음이 아닐까? 선택받은 지위는 영원성이 아니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가져야 함에도 자기는 높은 사람이라는 은근한 권위의 의상이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당신들과는 다르다. 라는 차별성이 결국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리는 잘못이 된다. 이 간단한 대답을 실천하는 일은 자각증상이 필요하다. 미국이나 서방의 선진국 지도자들의 사례를 몰라서나 망각 되어서가 아니다. 선민의식을 타파하는 개혁의 정신이 필요하지만 정작 자기를 예외 조항으로 남겨두려는 우월성의 마음이 자기를 망하게 하는 동력이라면 결국 이 검은 그림자는 국민의 몫으로 분배받을 때 우울한 공화국이 된다. 지도자의 행동이 거울로 투명해질 때라야 백성은 따라가는 길이 밝은 공화국을 만드는 첩경이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0. 02.1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초록으로 물든 눈밭 캐나다 옐로우 나이프1] [경남 통영] [이승섭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우리가 살면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슬픔으로 다가선다. 불통이라는 것은 교육도 아니요 서로의 정서의 층(層)이 겹겹이 쌓여 있으면 좁힐 수 있는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현실정치에 살고 있다.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정치가 과연 국가나 사회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까발리기 싫을 때 결국 위장의 가림막이 있고 그 가림막 속에서 온갖 술수를 부리는 모양이 정말 목불인견이다. 왜 그럴까? 어찌 인간이 되어 국민을 섬긴다고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그리도 뻔뻔한지 완전 마이동풍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정서의 층이 어긋날 때 불행이 검은 장막을 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제자가 둘이 있다. 장군 알카이베스와 플라톤이다. 알카이베스가 전쟁에서 패하자 누군가 희생에 재물이 필요하다는 30인의 참주들에 의해 독배를 마시는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 나이 70이었고 제자 플라톤은 28살이었다. 30명의 참주 중에는 친척이 있어 도망을 부추기는 자들도 있었지만 배불뚝인 매부리코인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을 넘긴다. 이 말은 지금도 많이도 회자(膾炙)하는 교훈이지만 정작 정치가들에겐 편리할 때 사용하는 인용어이고 유효하게 쓰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00명이다. 이들의 특징은 변명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믿지 못하는 자칭 양심세력이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을수록 뒷날에 국회의원이 되고 정치가라는 화려한 부활을 하고 뺏지를 이용하여 그리고 케미(호흡)를 강조하면서 떼로 몰려 다니면서 법 뒤에 숨어 방탄조끼를 입었느니 하며 요사스러운 농간을 부리고 있고 지도자연하는 일들이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참으로 가관이며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법이란 폭력을 배제하는 점에서 지켜야 할 덕목임에도 지키지 않으려면 법은 죽어있는 이름일 뿐이다. 탈법과 불법을 일상화하면서 이를 자기변명으로 정당화하는 지금까지의 대 다수의 정치를 무시하는 이유는 모두가 자기변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국회의원 대부분이 그러했고 지금도 의원들은 최고위원을 하면서도 잘난 변명을 일상화하는 일은 난센스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러하니 무슨 믿음의 위정자자 될 것이고 이들을 믿고 따르는 철부지 백성들이 있는 한 한국 민주주의는 껍질 공화국이다. 지금 이 땅 국회의원들의 3/2 정도는 이런 무자격자들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조 없음을 넘어 거짓말 행진으로 근근 지탱하는 나라의 운명이 하소(煆燒)인 것이다. 그렇기에 망해야 할 패륜 집단 북한이 존립의 근거와 조직에 이를 따르는 종북 세력들이 횡행하는 작금의 처지도 따지고 보면 남한의 거짓 정치가들이 이용에 놀아나는 일이 현재도 상당수이며 일어나는 현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추세가 사상이 없는 현상으로 생각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정신의 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정권교체가 되어 다행이지만 아직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네 현상이고 이를 막지 못하는 양심의 마비가 진행형이 된다는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서구위 개인주의와 “우리까리”의 붕괴에서 오는 과도적인 현상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 사상의 무게와 서구의 개인적 존중 사고 때문에 경찰이 잘못된 자는 가혹하게 다루어도 말이 없지만 우리는 경찰이나 검찰의 말도 신뢰를 일탈(逸脫)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정권 퇴진운동이니 촛불을 들며 민중 봉기로 착각하는 무지한 여론이 지배적인 풍미로 사회를 마비(痲痹)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심사상의 형성이 미흡하다는 결론이다. 설사 어른이 당연한 꾸중을 해도 “당신이 뭐냐” “간섭하느냐” 반론이 먹히는 마비 현상이 나타났다는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 중에 하나일것 같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약속을 어기는 자를 받아드리는 속물 근성이다. 민주국가에서 북한의 어긋난 추종세력을 꾸짖지 못하는 일도 이런 관성화의 시간이 너무 공고하다는 데서 갈등이 요란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그 시절 운동권 586세대들 거개가 요즘에 국회로 대거 들어와 행세하는 정치판이 되었으니 무슨 미래를 가질 수 있고 막무가내의 횡행이 당연시로 나타나는 국가에 무슨 정의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 참 답답함만이 든다. 더욱 후안무치로 이런 철판을 깔고 활개 치는 자들이 정의와 민주를 역설하는 입을 보면 오히려 민주주의가 불쌍한 지경으로 생각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지? 북한의 악랄함에는 입을 닫고 시시콜콜 자기 나라를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는 계기는 결국 교육과 정권이 바뀐 현 정부가 단호한 결정으로 해결해야 할 목표이고 타개 해야 되는 것을 국정과제로 삼아 진정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주기를 기대한다. 민주노총, 귀족노조, 언론노조, 교원노조, 사이비 종교 등이 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된 자들이라면 하루속히 뿌리 뽑아야 한다. 마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뼈 없는 인간이 되었고 목청이 큰 자의 세상이고 우기고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탈법 정치꾼들이 지배하는 한 새 희망의 불을 켜는 일은 절망으로 다가 오지만 이번 정부를 믿어 보면서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정치를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1. 2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거제도(장승포항} [거제시 매미성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한국문학은 현재 이념의 사상과 상대성 원리로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픈 부위를 치료하고 메스(mes)를 들이대 종양을 제거해야 할 상항이라 판단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이념에(이데올로기) 매몰되어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학인, 세속에 묻혀 아웃사이더로 활동하는 인재들을 불러내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이 현상을 타파해야 한다. 사실 한국문학은 1998년부터 현재 문학의 판도는 조용하다 못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소수의 문학인만이 한국문학을 좌우지 하는 것을 보면서 뚜렷한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사는 수많은 문학인이 있거늘 침묵이 일관하는 현 상황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문학 발전을 위한 발언이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필자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또 시작되었다. 이사장을 선출하느니 분과 위원장을 선출한다느니 카톡, 문자 등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실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한국과 북한의 대비가 중요하겠지만 현 북한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젊은이 하나가 왕족 세습과 우상 숭배가 무슨 문학인가?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 무슨 문학이 있겠는가? 한국문학도 만인보니 노벨상 입후보 다 하면서 문학인을 흥분시키더니만 기껏 미투라는 소송에 걸려 보이지 않다 무슨 심산으로 시집을 출간했다고 언론에 집중을 받는 것을 보니 참으로 이율배반이다. 최소한의 도덕적, 윤리적 사과를 하고 상재를 하든가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리도 뻔뻔할 수가 있으며 그리 추한 모습을 보이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만한 이름들이 줄줄이 있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모두가 안속주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문학의 문 앞을 서성거리던 작가들의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지는 물음표일 뿐이다. 늘 반복적으로 환기(換氣)시키고 어필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문학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평가이지 무슨 이념과(이데올로기) 세력과 패거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에게 치열성을 강화하는 일이 한국문학의 심도에 이바지하는 대답일 수밖에 없을 때 한국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문학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국은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思想)의 승화(昇華)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 그런가 하면 설명이 간단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은 이상 없다> 같은 위대한 전쟁 문학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통일 = 『필자는 통일이라고 보지 않지만』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 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 정립에 따른 각 충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일의 안목이 없었으며 근대 시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7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나 통렬하고 패배주의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에게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에 금시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정치가는 지난번 한국에 무슨 간첩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정말 한국에는 간첩이 없는 것인가? 그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버젓이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 해지며 서을시 예산으로 아이들 북한 교육을 시켰다는 뉴스에 기가 막힌다. 북한은 아직도 세습정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겠는가? 오로지 김일성 일가로 향하는 문 이외는 모두가 차단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합리로 둔갑이 되고 지속적인 미사일을 쏘아대는 현실에 <우리>라는 정서가 필요한 것인가. 완전 좌파 사상 최면을 이용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 북한을 찬양하며 편 가르기, 우리라는 이분법으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라는 실정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의 터가 없는바, 일방적으로 공동선(善)이 없어지고 독선적 메아리만 울리니 이 어찌하오라까? <나> 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자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 사상의 발전 모델이라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끼리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는 것이기에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한다는 점에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유행했던 대하소설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로 보여(Showing)주었을 뿐 정작 작가의 고뇌가 담긴 해답(healthy thoughts)은 없다고 단언한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텔링의 깊이에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방 수준이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귀족으로 자기 사상을 실천하기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배분하였고 <땅만으로 살 수 없다.> 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종국에는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이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가장 추운 겨울 1월 우랄철도의 시골 역에서 쓸쓸하게 죽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었다는 감동은 그의 인간의 도의와 의리를 참된 삶의 표상을 보고 멋진 삶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진리(眞理), 열애(熱愛) 왜 톨스토이는 그런 말을 했을 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실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等價)를 이룰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불어 놓고 획득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최고의 걸작 소설인 <모비 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생전 갖은 모멸감과 굶어 죽기 전 언론에 죽었다는 기사 하나 나오지도 않았으며 그만큼 멸시와 모시와 고독을 감내했다. 살아생전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그 후 70년이 넘은 후에 평론가에 의해 빛나는 시인이 되었고 우리의 애국지사 한용운은 1926.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운동의 실패, 옥살이 3년을 한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1965- 40년 후 박노순 인권한의 <한용운 연구>에 의해 유명 시인으로 등극했으며 애국지사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사실 윤동주도 많은 시(詩)를 집필하지 않았지만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유명해지고 애국지사라는 칭호까지 받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 사상의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다. 물론 이육사도 그렇지만-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이 파문은 따라오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라는 함정이 기다리고있다는 것도 경계해야 할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3의 자리에서 창조하는 길인 것이다. 흔히 문학은 정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결국, 문학에 본질은 사상의 실현이고 정신이 곧고 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바라보는 본질에 있어 올바름은 사실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기에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는 멀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끝으로 문인의 사회는 정신이 올곧은 집단이다. 때로는 얼음에 박 밀 듯 완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신의 기둥을 갖고 살아온 선비 사회가 아닌가 선비를 선거로 뽑는 일이나 숫자 놀음으로 어른을 뽑는다면 정치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집단이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면 외면은 당연지사이다.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는 일이 곧 옳은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는 점에서 정신의 조타수인 문인 사회의 헝클어진 현상을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특히 문단이 선거꾼들의 경연장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문단의 상층부엔 쏠림 현상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는 협회의 간부들로 가득한 현상이라면 퇴보로 이어지는 이상이 있음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필요할 것 같다. 2023. 01.1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이승섭시평집] [범바위 전망대]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