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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영 경주시장 기고문_불법현수막 없는 경주 만들자] 아침 출근길에 신호등 앞에 서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불법현수막이 신호등을 가려 초록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아이 손을 잡은 부모도, 운전대를 잡은 시민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년고도 경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품은 대한민국 대표 문화도시입니다. 그러나 도심 곳곳에 무분별하게 걸린 불법현수막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때로는 안전까지 위협합니다. 신호등을 가린 현수막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도심 곳곳을 뒤덮은 불법현수막은 국제관광도시 경주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달 말 경주에서는 미·중·일·러를 비롯한 21개국 정상과 대표단이 모이는 APEC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 시기, 깨끗하고 정돈된 거리를 가꾸는 일은 단순한 미관 개선을 넘어 경주의 품격과 신뢰를 지키는 기본이자 시민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기간만큼은,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불법현수막 없는 경주’를 만들어 가길 제안드립니다. 경주시는 그간 불법현수막 근절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경주시는 지정게시대와 가로등 현수기, 벽보게시판 등을 활용해 합법적이고 체계적인 홍보 수단을 마련했으며, 교육환경보호구역과 어린이보호구역을 중심으로 불법 광고물 집중 정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단속 전담반을 운영하는 동시에 시민과 함께하는 ‘불법 광고물 수거보상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2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해 1억 2,000만 원이 넘는 보상금이 지급되는 등,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수많은 불법 광고물이 시민의 손으로 정리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지난 2월에는 경주시 공무원, 옥외광고협회, 자원봉사자 등 관계자들이 모여 불법현수막을 철거하고 올바른 광고문화를 계도하는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현수막은 숨바꼭질하듯 다시 나타납니다. 단속을 피해 옮겨 다니고, 철거해도 며칠이면 다시 걸립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시민·상인·단체가 모두 나서서 “불법현수막은 경주의 품격을 해친다”는 공감대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주체는 정당과 공공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행 제도상 ‘정치 활동’이나 ‘정책 홍보’ 등의 명목으로 단속 예외가 적용되다 보니, 도심 곳곳이 현수막으로 뒤덮이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는 정치적 갈등을 부추기거나 자극적인 표현으로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민들께서는 “정당이나 관공서 현수막이 오히려 가장 눈에 거슬린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현수막을 가장 많이 다는 주체가 정당과 공공기관인 만큼, 이들부터 앞장서 자제해야 합니다. 경주시 또한 앞으로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현수막 게시를 최소화하고, 다른 홍보수단을 적극 활용해 솔선수범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 여러분의 작은 실천입니다. 이번 APEC 정상회의 기간만이라도 불법현수막을 걸지 않고, 지정게시대를 활용해 주시고, 위반 사례를 보면 신고해 주십시오. 작은 손길 하나가 모여 천년고도의 품격을 지키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APEC 정상회의는 세계에 경주를 알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깨끗한 거리, 질서 있는 광고문화야말로 세계인에게 보여줄 진짜 경주의 얼굴입니다. 불법현수막 없는 경주, 우리 모두의 힘으로 경주의 자존심을 지켜나갑시다.
[이정희 청송소방서장] 불은 한순간에 발생하여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깁니다. 특히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택에서의 화재는 불길보다 연기확산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때 방화문을 닫는 단순한 행동이 연소확대와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큰 차이를 만듭니다. 방화문은 화재 발생 시 불길과 연기의 확산을 지연시켜 대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확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방화문을 항상 열어두거나 물건으로 고정하는 경우가 많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청송소방서에서는 방화문 닫기 안전 문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방화문은 반드시 닫는다”는 습관을 생활화한다면 대형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소방청이 최근 5년간 아파트 화재 통계를 분석한 결과 인명피해 요인 중‘대피 도중 연기흡입’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동주택에 화재가 발생하였다면 무조건적인 대피보다는“살펴서 대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주택 연소 확대 특성상 대부분의 화재가 발화층 이내로 국한됨에 따라 무리한 피난 대신 자기 집에서 대기를 하는 것이 올바른 피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재로부터 안전한 사회는 소방시설이나 첨단 장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작은 실천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작은 실천이 안전을 지키는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청송소방서는 각종 재난 및 화재 현장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미래의 풍요를 위해 우리는 희망을 안고 열심히 사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고난의 시대에는 예술은 희망의 인도와 예언의 역할을 해왔다면 풍요의 시대의 예술은 장식의 기능이라 한다고 한다. 또한 예술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고 정서적 안정감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이성의 회복을 기할 수 있을 때 인간성의 유지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인간성의 돌변은 가치가 변모할 때 가장 불행한 경우에 직면한다면 예술은 인간이 알고 있는 구원의 메시지라 보는 것이다. 미술은 안정감의 여행(旅行)을 촉구하고 상상(想像)의 부산물로 따라올 때, 현실을 보다 더 조직적으로 의식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긴장감을 가질 때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자기 발견의 모티브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極大化)로 시키느냐의 함량(含量)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된다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는 현재 오로지 상업적으로 의존해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表現)의 자유가 구가되는 현상을 올바른 판단이며 미래를 낙관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문학은 심도에서 사상(思想)의 승화(昇華)가 부족하다는 말을 명망이 높은 어른들을 말한다. 감각적(感覺的)인 표현(表現)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서로 갈라진 남북의 이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문화(文化)에 녹아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위대한 전쟁 문학이 결여가 되어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洞察)의 안목이 없었으며 근대사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慘火) - 7년여의 임진왜란, <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갖다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도 통렬(痛烈)한 가슴의 아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에 그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은 결국 자신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적 논리로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니며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는 것은 아닐지- 여기서 우리 문학의 심도(深度)는 돌부리에 채이고 가시에 찔리고 함이 안타까움일 것이다. 만약 서구적인 사상의 발전 모델이라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있을 뿐 깊이가 내재 되어 표피(表皮)적인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한때 유행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이거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로 보여 (Showing) 주었을 뿐 정작 작가의 고뇌(苦惱) 어린 해답(heaithy, thoughts)은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소설(小說)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에 깊이엔 작가의 사상(思想)이 뼈대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방 이야기가 되는 고작이라 하지 않을까? 톨스토이의 대작품에서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며 예를 들자면 결론(結論)은 자명해지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귀족으로 자기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땅만으로는 살 수 없다>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思想的) 표현(表現)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러시아 농민혁명(農民革命)의 도화선(導火線)이 된 톨스토이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感動)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고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의 유언의 마지막 말이 “진리(眞理)를 나는 열애(熱愛)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思想)은 녹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라 황금찬 선생이 말했듯이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等價)를 이룰 때, 작품(作品)은 비로소 생명력(生命力)을 획득하는 것이라 수차 강의를 들은 바 있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모비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 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訃告)한 줄도 나오지 않을 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堪耐)했으며 생전에 1775 수의, 시(詩)를 쓴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 은 살라 7편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 후에 평론가들의 연구 때문에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 선생은 1926년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고 난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시라는 점 -- 1965년 – 그러니까 40년 후에 박노순, 인건한, <한용운 연구>에 의해 유명의 시인으로 등극을 했으며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 선생도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며 또한 이육사도 마찬가지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과 일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深度)에 감동(感動)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고로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陷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經界)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르지 않을까? 명작(名作)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신을 버리고 제3의 공간(空間)을 창조(創造)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表現)하는가에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지 않을까?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하지 않든가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思想)의 실현(實現)이고 어떻게 구조화(構造化), 시키는가의 따라 소설이 되며 수필(隨筆)이 되고 이미지를 결합(結合)하여 시(詩)가 된다는 것이라면 본질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일 것이다. 표피(表皮)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인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넋두리로 본인을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술은 시대적인 의미(意味)에서 안정감(安定感)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때나 비극(悲劇)은 있으며 슬픔도 있지만 여기서 희망(希望)의 대칭이 이루어진다면 예술은 언제나 이를 방지하는 깨달음의 약이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혼이 필요한 소이(所以)가 아닐까 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고 내면의 마음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매진하고 더불어 정체성의 정신이라고 믿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의 시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문정환 청송소방서장님 증명사진(제복)] 벚꽃이 피고 지는 따스한 봄을 지나서 어느덧 무더운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 날씨가 더워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강과 계곡으로 향하고, 그에 따라 수난사고 발생위험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최근 청송에서는 5월 초에 한 50대 남성이 다슬기를 주우러 갔다가 실종되었던 수난사고가 있었으며 물놀이 또한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에 예방법을 숙지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물놀이 안전사고 예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물놀이를 가기 전 그리고 휴가 중에 날씨 정보를 확인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7월부터 9월까지 장마 또는 태풍의 영향이 집중되는 기간이다. 장마와 태풍은 강과 계곡에 있는 물을 갑자기 불어나게 만들며 또는 산사태를 발생시킨다. 사전에 날씨 정보를 확인 후 물놀이를 계획해야 하며, 장마 또는 태풍이 예상될 때는 계획을 변경하여야 한다. 둘째, 물놀이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처하는 요령을 숙지한다. 수영 전에는 준비운동을 하고 입수할 땐 심장에서 먼 부위부터 들어가야 한다. 물놀이 중 소름이 돋고 피부가 땅긴다면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야 한다. 만약 주변에 긴급상황 발생 시 구명환이나 구명줄이 있다면 던져주고, 구명 기구가 없다면 주변에 긴 막대를 이용하거나, 페트병이나 아이스박스를 던져 부력을 이용하여 떠 있게 해주면 긴급상황에서 훌륭한 구조기구가 될 수 있다. 셋째, 물놀이 시 구명조끼 등과 같은 안전 장비를 반드시 착용하고 물놀이를 즐겨야 하며, 119구조대나 안전요원이 없는 계곡, 강변 등에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한 경우 구조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모한 구조를 금하고, 직접 구조하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고 사실을 큰소리로 알려 도움을 요청한다. 추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한 후에 의식 및 호흡이 없다면 무엇보다 119에 빠른 신고가 중요하며 구급대가 올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시행한다. 최근에는 영상통화로 119상황실 근무자가 방법을 잘 알려주는 경우가 있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예방수칙을 모두 숙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은 내가 지킨다는 생각으로 항상 조심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안전사고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여름철 물놀이를 떠나기 전 충분한 대비와 물놀이 안전 수칙을 지켜 즐거운 여름 휴가를 보내길 바란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안성시 양성면 반투위 현수막 설치와 주민들 1] 지난 8년여간 걸쳐 안성시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고속도로가 안성을 관통하여 나들목이 건설되면서 향후 발전이 기대되고 있으며 안성맞춤의 도시, 특산품의 관광지, 성지 호수 등이 있고 농·축산이 함께하는 복합 도시이다.아직은 오염되지 않는 친환경적인 명품의 수도권 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나 안성시도 머지않아 환경오염과 교통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이때 또다시 의료폐기물 소각장이 들어선다니 안성시 양성면협의회장(안성시 의료폐기물 소각장 반대투쟁위원회) 이천우 위원장, 진범화 사무국장 외 임원진 인근 장서리1리, 2리 이현리주민들, 궁도장, 기업체 인근 축산농가 등 100여명이 모여 소각장 업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환경청 담당자에게도 이곳은 분지형 지역으로 사계절 공기가 정체되고 인근에 궁도장, 주민 거주시설, 사회복지시설, 기업체, 축산시설, 농경지 등이 있어 소각장 입지 조건으로는 부적합하다고 강력히 전달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면담을 요청하였다. [한강유역환경청 관리자와 이천우 반투위 위원장 및 주민 면담 현장 2] 의료폐기물 소각장이 들어올 시 발암물질 등 자연경관 훼손 농축산 지하수 오염 등 향후 이로 인한 환자 발생, 1차 2차 3차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에 절대 입지가 선정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며 『의료폐기물 소각장』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시위에 들어갔다. 벌써 5회째 입지 선정이 반려가 된 상황에서 재차 입지를 선정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지 않고는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하소연을 하고 있다.지금도 의료폐기물 소각장 허가 지역에서는 금품, 상품권 등을 미끼로 주민을 매수하고 각종 설들이 있으며 주민들 이간에 서로의 불신들이 커지고 있는 상태이다.또한 안성시 서부권은 더욱 심각하다. 인근에 변전소, 물류센터와 (5.4km) 떨어진 용인시 남사면에 위치한 의료폐기물 소각장을 증축한다는 설이 난무하다. [의료페기물 소가각장 반대시위 현수막3] 요즘에도 교통이 막혀 대형차량, 냉동차, 콘테이너 차량이 수시로 다니고 있어 마을 주민들은 불편을 호소한다.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519-63, 현장을 답사하려 했으나 입구에서 장정들이 막아서며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다. 본 기자는 2022년에도 입지를 정한 519- 63을 답사하였고 그때 당시에도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반려한 곳임에도 사업자 명의만 변경하여 2023. 05. 08.에 허가를 신청한 것이었으며 23. 05. 20. 오전 10시 30분경 한강유역환경청에서 현장을 방문한다기에 본 기자도 참석해 담당자와 반대투쟁위 위원장 면담과 주민들 약 100명 이상이 모여 의료폐기물 소각장 반대를 위해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지금 주민들은 한창 농번기에 모내기 등 일손이 모자라 허덕이고 있는 이때 또 의료폐기물 소각장 반대하기 위해 1인시위를 하게 되었다고 좌불안석(坐不安席) 조바심에 농민들만 애가 타들어 가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의료폐기물 소각장』이 반려되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오늘도 주민, 기업, 궁도장 등은 『의료폐기물 소각장』만은 결사반대한다며 강력한 투쟁 의지를 밝히며 주민 어르신들은 눈물과 함께 엎드려 빌고 있다는 사실에 본 기자도 드릴 말이 없었다. 1개 사업자의 허가를 위해 주민들은 얼마의 비용과 인력을 소모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다시 한번 안성시청 관계자 여러분과 안성시 의회에 강력히 주문을 요구하는바 주민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조속히 반려시켜 줄 것을 바란다. 2024. 06.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의료페기물소각장 반대 시위 중 1] 2024년 05. 20. AM 11:00에 한강유역환경청 000 과장과 담당이 나와 의료페기물소각장 환경심사평가를 한다기에 본 기자는 안성시 양성면 양성로 519-63 위치한 현장에 가보았다. 그사이 주민들이 남, 여, 노소를 불문하고 약 60여명의 어르신들이 프랭 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2022년 당시와 똑같은 현장을 목격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한 소재지는 주거지역과 밀집되어 있고 각 공장이 둘러싸여 있어 벌써 8년째 4회나 반려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5회째 의료페기물소각장 심사평가한다고 하니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다. 한강유역환경청 주무관청은 이를 모를 리가 없는데 계속 환경심사평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으며 이러한 소모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의료페기물소각장 반대 시위 중 2] 양성면 의료폐기물 소각장 설치 사업은 지난 2017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양성면에 추진되었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과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으로 인한 부적절함 때문에 반려되었지만 지난 2023년 8월 또다시 사업 신청이 추진되고 있다. 이에 소각장 반대투쟁대책위원회는 2년 전과 같이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무려 55일에 걸쳐 한강유역환경청 앞에서 1인시위를 펼친 바 있으며, 안성시의회에서도 반대결의안을 채택하고, 김학용 국회의원도 한강유역환경청장을 면담한 바 있으며 한강유역환경청장도 사업 예정 부지를 방문한 바 있다. [의료페기물소각장 반대투쟁 위원장 임원 면담 3]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업추진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 한강유역환경청에서는 사업자에게 보완 서류 제출을 요구한 바 있지만 반려되었던 사업이다. 또다시 양성면 의료페기물소각장 반대대책위원회도 지난 5월 14일 반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신임 위원장을 선출하여 반대 의지를 보다 분명히 하고있는 상황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재차 환경업체를 계속 바꾸어 가면서 의료페기물소각장을 접수를 하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의료페기물 소각장 예정지 4] 안성시 양성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막대한 인력과 정신적 스트래스로 인하여 피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호소한다. 현재 반투쟁위원회위원장 이천우 양성면 이장협의회장은 양성면 주민을 더 이상 우롱하지 말라며 울분을 토하며 강력한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농번기인 요즘 농사일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투쟁위에 전념하다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주민들의 소리에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주민들 또한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며 목소리를 더욱 높이고 있다. [지난 10년간 소각장 반려 건 (출처: 최혜영의원실) 5] 마지막으로 안성시청과 안성시 의회에 강력히 촉구한다. 문학의 도시라 자부하는 안성시 주민을 위해서라도 현재 평택시가 입법 예고한 것처럼 미세 먼지, 악취, 소음, 수질오염 등으로 시민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원 순환 시설을 설치할 때 주택과 하천은 이격을 두는 조례를 만들어 안성시 도시계획조례 안을 일부 개정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며 페기물업체 등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경관 훼손, 등 피해를 호소하는 집단 민원이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조례안을 입법 예고 조례를 만들고 규칙 심의 위원회 구성도 착수하여 주민이 쾌적한 환경 속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한강유역환경청 담당자와 위원장 면담 6] 8년여를 끌며 4번이나 반려된 의료페기물소각장을 해결치 못한다면 안성시 특히 양성면 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과 보가 될 것이라 본다. 끝으로 시장, 의회는 시민과 안성 발전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주민자치 행정이라 해서 무엇이 올바른 행정이고 무엇이 시민을 위한 행정인지는 국민이 더욱 잘 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024. 05. 22.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리스트/이승섭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천 년이 넘은 온돌방이 있다. 자연이 푸르름을 더해가는 4월 말, 그동안 복원 공사를 마친 칠불사에 있는 아자방이 원래의 모습으로 완공되어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매스컴에서 들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경남 하동 쌍계사에서 자동차 길인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칠불사가 나온다. 칠불사에는 스님들이 수행하던 온돌방이 있다. 이 온돌방이 있는 건물이 1948년 ‘여수순천사건’ 때 전소되었다. 건물은 복원했으나 구들은 그대로 두었다. 그전에도 소실된 적이 있었다. 복원되지 않은 온돌방을 조사 발굴한 후 8년 만인 2023년 말에 복원했다. 칠불사 온돌방은 방 안에서 보면 버금 아(亞)자 모양으로 생겨서 아자방(亞字房)이라 부른다. 이는 신라 효공왕(897~912) 때 가락국에서 온 구들 도사라 불리던 담공 선사가 처음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1,100년이 넘었다. 유구한 세월이다. 아자방은 구들의 탁월한 구조로 1975년 세계건축물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하다. 복원 후 아자방 건물 서쪽으로 출입하도록 문을 내었다. 담장의 일부는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올곧게 정진하라는 의미가 담긴 듯하다. 대나무 울타리를 보는 순간 허리부터 쭉 펴게 된다. 아자방의 서쪽에서 보아 오른쪽에 있는 큰 아궁이에 오후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아궁이 입구는 입 구(口)자 모양으로 버금 아(亞)자와 입 구(口)자를 합쳐 동쪽에서 보면 전체는 벙어리 아(啞)자 모양이 된다. 아마도 수행 중에는 묵언하고 정진하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아자방은 처음 축조했을 때 땔감을 지고 아궁이로 들어갔다니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 번 불을 땔 때 일곱 짐 정도를 한꺼번에 땠다고 한다. 불길이 막히지 않고 서서히 타들어 갔고 골고루 따뜻했다고 한다. 한 번도 크게 고친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아궁이를 들여다보니 내가 그대로 들어가도 될 정도다. 축조 당시 불을 한 번 때면 ‘석 달 열흘’은 온기가 골고루 유지되었다고 한다. 신비감이 더해진다. 지금은 이틀에 한 번씩 많은 땔감은 아니지만 불을 땐다고 한다. 『천 년의 비밀, 아자방 온돌』 의 저자 김준봉은, “아자방 아궁이는 서서히 오래 열기를 공급하고 구들과 불길이 움직이는 길과 형태가 다른 온돌과 달라 오랫동안 열기를 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라고 했다. 우리의 온돌 문화는 세계적이다. 직접 방에 들어가 보니 방의 긴 쪽이 약 8미터로 직사각형이다. 방바닥에서 약간 높은 좌선대가 네 귀퉁이마다 설치되어 있다. 스님들은 아자방에서 눕지 않고, 한 끼 먹고, 벽만 보고 앉아서 수행한다니 고행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방바닥은 좌선대에 올라 수행하다가 피곤함을 풀기 위해 다리를 내리면 방바닥까지 펼 수 있게 만들었다. 중앙의 낮은 방바닥은 불경을 읽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고 한다. 평생토록 눕지 않고 수행한 스님은 혜암과 청화가 알려져 있다. 평생토록 눕지 않았다니 사람으로서 가능한지 의문이 가나 실제의 기록이다. 보통 사람은 며칠만 지나면 힘들어서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하는데 꾸준히 수행하면 경지에 오르나 보다. 아자방 온돌은 2023년 말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칠불사 측은 내부를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하고, 2024.2.7.부터 같은 해 부처님 오신 날까지만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한다. 스님들이 수행에 들어가면 공개할 수가 없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9년에 보면, 선전관 이윤춘이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에 대해 임금께 올린 글이 있다. “취령(鷲嶺) 아래 칠불암(七佛菴)은 문양해가 살던 하천 산당(荷川山堂)과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그 문 귀에 달린 현판에는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苑)이라고 썼습니다. 그 안에는 아자형(亞字型)으로 된 승방(僧房)이 있었는데, 승려들을 대사(大師)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벽을 향하여 말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아홉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아침에 모여 묵언 수행하다가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 흩어졌습니다.” 아자방에서 수행한 큰 스님이 여러 사람 있다. 정명, 벽송, 조능, 서산, 부휴, 초의, 월송 등이다. 유명한 고승들이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많은 스님이 아자방에서 수행하는 것을 꿈으로 여긴다고 한다. 특히 기억에 떠 오르는 스님은 서산(휴정) 대사다.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선조의 부름을 받고 승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또한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에게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제자인 사명(유정) 대사와 처영 스님 등이 승병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그는 사명 대사와 합류하여 명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한양을 되찾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이라는 직책도 받았다. 도총섭은 전국의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직책이다. 그 후 벼슬을 사명 대사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에 들어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수도 생활을 계속했다. 1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큰 스님이다. 직접 아자방에서 스님처럼 벽면을 보고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온갖 상념들이 떠 오른다. 하나씩 버리니 잠깐이나마 마음이 편안하다. [아자방 내부]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모임에서 부산에 있는「재한유엔기념공원」에 갔다.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 때 우방국의 젊은이 수천 명이 영면하고 있다. 이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의 무덤 앞에 숙연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리는 참전국 국기가 게양된 곳으로 갔다. 유엔기 게양대 앞에서 한국을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의 명복을 빌며 각각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쳤다. 고개를 들고 게양한 각 나라의 국기를 보는 순간 제일 뒤편 오른쪽에 독일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독일 국기를 주목했다. 한국에 직접 전투병을 파병한 나라는 열여섯이고 의료진을 보낸 나라는 다섯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독일이 추가되었다. 왜 독일이 추가되었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연유를 알아보았다. 독일은 왕권 국가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히틀러는 다시 독일로 국호를 바꾸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평화협정인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도 패했다. 패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담당으로 분할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지역은 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으로, 소련이 담당한 지역은 공산주의 체제인 동독이 되었다. 1990년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한 후 같은 민족으로서 강대국이 되었다. 한국도 평화통일로 더 발전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서독은 6•25전쟁 중에는 의료진을 파견하지 않았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긴 서독은 1953.7.27. 정전협정이 있기 몇 달 전에 자기들도 의료진을 파견하겠다고 유엔에 제안했다. 유엔에서는 서독의 의료진 파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휴전이 된 후에 서독은 자진해서 부산에 의료진을 도착시켰다. 그들이 치료하던 곳을 부산 시민은 서독병원이라 불렀다. 공식 명칭은 적십자병원이다. 일백여 명의 의료진이 1953년부터 5년간 30여만 명의 부산 시민과 피난민을 무료로 치료하고 약도 제공했다. 6천 명 이상의 임산부도 돌봐주었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들의 봉사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서독 의료진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최신 의료 장비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또한 의학 지식도 모두 전수했다. 그들의 인류애가 나의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후 한국은 독일의 위대한 의료정신을 빛내기 위해 통일된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2018.6.부터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독일 국기를 게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공원은 유일한 유엔 묘지로 평화의 성지(聖地)다. 이러한 성지에 자기 나라 국기가 게양된다는 것은 큰 경사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폴란드에 아우슈비츠(Auschwitz), 헤움노(Chełmno) 등의 절멸수용소를 세웠다. 거기에 유대인들을 가두었다가 틈만 나면 죽이곤 했다. 독일군의 유대인 대우는 매우 잔인했다. 목욕탕으로 위장한 가스실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유대인들을 가두고 가스를 살포해 한 번에 수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다. 후에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과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뒤늦게나마 사과를 한 것에 조금은 내 마음이 풀린다. 전쟁은 서로가 희생당한 사람이 많게 마련이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쟁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 국민이 평화의 성지에 자기 나라의 국기가 게양된 것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으로 본다. 2022.11.에 독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내외도 재한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고 계속해서 독일 국민이 단체 참배를 많이 오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독일 군인들이 참배를 많이 오는데 그들이 들어올 때의 표정은 어두운데 자기 나라 국기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환해진다고 한다. 독일은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4.12.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한국은 산이 많은 지형인데 산업 발전을 하려면 일본과 손잡고 고속도로를 놓는 게 나라를 발전할 수 있다.”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거절하자, 에르하르트 총리가 “독일은 프랑스와 열여섯 번을 싸웠는데 그래도 전후에 양국은 손을 잡았다. 지도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라고 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다. 독일의 부활을 위해 프랑스의 지원이 컸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국은 1965년 한일(韓日)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이 체결되자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며 상식을 벗어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에 의한 배상 청구권자금과 서독 차관으로 1970년 포항 종합제철소가 착공됐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포항제철이 생산한 철강 제품으로 ‘포니’ 자동차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지도자는 소신이 있고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숙한 마음으로 유엔기념공원을 계속 둘러보았다. 미국은 6•25전쟁 때 전사자가 수만 명이었다. 이곳에 묻힌 병사가 적었다. 미국은 전사자가 발생하면 그들의 유해를 자국으로 가져가서 봉안한다고 했다. 이곳에 묻혀 있는 40여 구는 전쟁 후에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병사들이었다. 한국에서 사망한 미군들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거나 가족들이 한국 땅에 봉안하기를 원하는 경우라 한다. 자국의 전사자를 모국의 영토에 묻히도록 하는 미국의 병사 사랑 정신도 본받을 만하다. 미군들의 부부 합장묘가 다섯 쌍 있는 것은 부인이 모두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현재 한국을 도운 임들이 있었기에 자유롭고 발전한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희생과 봉사 정신이 고마움으로 내 가슴에 새겨진다. 오늘따라 이 공원에 핀 붉은색의 겹벚꽃이 임들의 고귀한 정신을 한층 더 빛내 주는 듯하다.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광주 전남 가정평화 지구 조병석 회장] 5월 가정의달을 맞아 가정평화협회 광주 전남지구(회장 조병석)는 회원 100여 명과 함께 지난달 전국적인 행사가 4/27-28, 문경리조트에서 '한국가정평화협회 FPA지도자 한마음축제'가 열렸다. 저출산, 고령화 대한민국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시점에 열린 이번 행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층이 함께한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듯한 재미있는 분위기로 모든 세대, 연령층이 참여한 행사여서 서로가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더욱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행사였다.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계몽슬로건으로 가정의 위기를 타파하자는 어느 지도자의 소감발표는 제2의 새마을운동 정신으로 전국민이 함께 극복해 가자는 말처럼 의미있게 다가왔다. 내 가정부터 참된 가정을 꾸려 주변 이웃에 실천하자는 홍익인간 정신을 살려 한국형 가족주의의 근본을 되살리자는데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 홍익인간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가정 이상을 올바로 세워 글로벌 가족공동체로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의 큰 이상은 우리가 노력하고 실현해 가야 하는 과제다. 세계를 선도하고 리드하는 정신문명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우뚝서서 가기위해서는 나 자신과 가정을 둘러봐야 하고 '가화만사성' 한자어를 늘 되새겨 봐야 한다 이제, 가정가치회복운동의 큰 깃발을 올리고 올바른 가치관 정립으로 결혼.성, 가정에 대한 정립과 축복된 가정 만들기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그리고, 가족 속에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정의 소중함을 어린 자녀에서부터 가르치고 가정 행복의 아름다움을 사회적으로 더 드러나게 해야 한다. 또한, 모범적 부부.부모, 자녀 발굴하고 칭송해 주는 사회적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국가 사회발전은 가정평화로부터 온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이슈를 대중적인 사회화 운동으로 확대해 가는 K- 가족 축제 한마당으로 진일보해 가기를 희망해 본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문학 단체에서 대구에서 먼 거리에 있는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에 갔다. 수목원과 접해 있는 천리포 해변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무인도 닭섬을 보았다. 우리나라 남과 서해안에는 많은 섬이 있다. 각 섬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붙어 있다. 특히 닭의 볏처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무인도 닭섬이 여러 개 있다. 그중에서 천리포 해변에서 보이는 닭섬은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닭의 볏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닭의 볏처럼 생겼으므로 주로 닭섬이라 부른다. 닭섬 서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전한다. 나는 이곳을 낭새섬이라 들었다. 수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한국에 귀화하여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밀러(Call Ferris Miller)가 섬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사는 ‘바다직박구리’인 낭새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낭새섬이라 불렀다고 했다. 천리포 해변에서 닭섬까지는 약간 떨어져 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해변에서 닭섬까지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직접 눈으로 바닷물이 좌우로 갈라져 모래사장이 드러나는 광경은 신기했다. 달의 인력에 의한 밀물과 썰물의 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이곳 주민 모두가 이곳에도 신통한 힘이 존재해 있으리라 믿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닭섬과 천리포수목원 사이를 바닷물이 꽉 채워져서 바닷물 밑이 어떠한 모습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평소처럼 평범한 바다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맑고 푸른 바닷물의 파도 소리는 나의 내면을 뽑아내려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밀려 나가는 파도에 평소 불쑥불쑥 올라오는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훌훌 던져 버리게 한다. 마음이 정화된다는 것은 이러한 느낌인지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닭섬에 살았다는 낭새의 모습이 궁금했다. 낭새의 수컷은 등, 목의 앞쪽, 위쪽 가슴은 잿빛이 도는 파란색이고 가슴 이하 아랫면은 진한 밤색이다. 암컷은 수컷보다 옅은 밤색의 바깥꽁지깃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닭섬에 직접 가 볼 수 없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멀리서 바라볼 기회가 주어져서 이 또한 즐거움이 채워진다. 낭새는 주로 해안 절벽에 살고 내륙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암수 단독으로 생활하고 각자 세력권을 형성한다고 한다. 번식기에는 계속 지저귀며 수직으로 날아올라 과시하는 행동을 한다니 동물의 수컷이 과시하는 행위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낭새는 자기들 영역에 사람이 침범하면 ‘삐이익~~, 삐이익~~’ 소리를 내면서 경고한다고 한다. ‘저리 가라’는 뜻의 울음소리로 들린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예쁜 소리를 낸다고 한다. 낭새들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다. 간혹 산행하다가 보면 자연의 경치와 청명한 새소리에 내 마음이 황홀감 속으로 빠질 때가 있다.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힐링 되는 듯했다. 이럴 때는 나도 그 새의 소리처럼 내면 가만히 있다가 똑같은 소리를 내어준다. 그 새의 이름과 소리의 뜻은 모르지만, 새와 함께 자연 속에 동화되는 느낌이었다.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사람 4명이 썰물 때 닭섬에 들어가 낚시하다가 밀물에 갇혀서 고립되었다는 보도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얼마 후 태안해양경찰서 구조대에 의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는 소식은 나의 가슴을 안정시켜 주었다. 나도 오래전 썰물 때 남해 해변 바위 위에 선글라스를 두고 나온 후 생각이 났을 때는 선글라스 둔 자리가 흔적도 없이 바닷물이 차 들어와서 안타까운 일을 경험했다. 소리 없이 밀려오는 밀물의 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단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도 현명한 삶인 것 같다. 닭섬에 낚시꾼과 해산물 채취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낭새가 날아간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생태계를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닭섬은 천리포 해변에서 보면 바다에 조그마하게 떠 있다. 닭섬과 닮은 뭍닭섬도 있다. 뭍닭섬은 천리포 해변 남쪽에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뭍닭섬이라 부른다. 뭍닭섬 가장자리 해상에 덱(deck)이 설치되어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섬의 산책로 중간쯤에 있는 출렁다리는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한 바퀴 도는데 바다의 풍광과 싱그러운 수목의 향기를 맡으면서 가볍게 산책할 수 있었다. 동료 몇 명과 뭍닭섬을 한 바퀴 산책하고도 출발 시간이 남았다. 천리포 해변에서 한 동료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에 도착해서 닭섬에 들어가 갯벌 체험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갯벌 체험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바다 생물을 채집할 좋은 기회다. 태안의 갯벌은 주로 바닥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바닥이 단단해서 바지락, 동죽조개, 서해비단고둥, 갯고둥 등이 주로 잡힌다. 태안의 갯벌은 찾는 이들에게 체험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밀물 때 바닷물로 덮여 있다가 썰물이 되면 육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썰물 때 바다 깊은 곳까지 가서 갯벌 속에 숨어있는 고둥이며 조개 등을 자녀들과 직접 채취할 수 있는 체험은 부모와 자녀 간의 정을 두텁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천리포 해변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지난날에 가졌던 욕망, 이기심, 불친절 등 마음의 사진들이 한 장, 두 장 떠 오른다. 이내 바다가 삼킨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충북 진천에는 돌로 만든 농다리(籠橋)가 있다. 진천에서 볼일을 마쳤는데 동료 한 사람이 진천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 년된 농다리에 가 보고 싶다고 한다. 어떠한 다리인지 궁금하여 나의 승용차는 농다리로 향했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농다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농다리까지는 지척의 거리라서 걸음이 가벼웠다. 좁은 길옆에 있는 「농다리유래비」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농다리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세금천(洗錦川)에 축조된 석교로써 사서(史書)인 『상산지(常山誌)』와 『조선환여승람』에 축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농다리를 놓기 전 추운 겨울 어느 날 친정아버지의 죽음으로 다리가 없는 세금천을 건너려는 아낙이 있었다. 임 장군은 아낙의 효심에 감동하여 말을 타고 돌을 날라 농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농교라는 용어는 돌들이 대바구니처럼 얽히고설켜 있다고 해서 대바구니 ‘농(籠)’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진천군 향토지 『상산지』에 보면 농다리는 진천읍에서 남쪽 방향 4km 지점에 있는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다리다. 고려 초엽에 굴티마을에 사는 임씨(林氏) 장군이 음양을 배합하여 자줏빛 돌로 축조했다. 별자리 28수(宿)에 따라 수문 28칸으로 만들어 1개의 상판석으로 이어 하나의 활(弓)이 뻗쳐 있는 것처럼 축조했다. 이미 오래되어 4칸이 매몰되어 현재는 24칸이라고 했다. 유래비 바로 옆에는 2008년 11월에 세운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가 있다. 「사적비」에는 28칸을 모두 복원했고, 28수는 신비력을 내포하고 있는 경성(經星)의 수라고 한다. 경성은 천문학에서 별자리를 이루는 항성을 말한다. 이 항성을 대표하는 별자리인 28수는 제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임 장군은 28수의 별자리를 생각하여 농다리를 만들어 소원을 빌게 하는 기도 도량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별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별을 행성이라 하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해와 달을 합쳐서 7정(七政) 또는 7요(七曜)라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 월, 화, 수, 목, 금, 토로 요일 이름이 되었다니 천문학자들의 지혜에 새삼 놀랐다. 동료와 「농다리유래비」,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를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확 트인 세금천에 걸쳐 있는 기다란 농다리가 펼쳐졌다. 농다리 앞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생거진천’이란 글씨를 큼직하게 배치해 두었다. 처음 보는 문구에 매료되었다. 생거진천(生居鎭川)과 함께 ‘사거용인(死居龍仁)’이 사용되고 있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었다. 진천에는 옛날부터 물이 많고 평야가 넓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풍수해가 없어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므로 생거진천이라 했다. 용인은 산수의 경치가 아주 좋고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으므로 사거용인이라 불렀다고 한다.다른 이야기로는 옛날에 같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진 ‘추천석’이 진천과 용인에 살았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은 마음씨가 착한 농부인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용인의 추천석이 아닌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왔기에 다시 돌려보냈다. 이미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신에 진천의 추천석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 살았다고 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라 한다고 했다. 농다리 위로 걸었다. 자줏빛 색깔의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교각을 쌓아 올렸다. 교각을 쌓으면서 석회나 시멘트 없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조상의 지혜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교각과 교각 사이에 약 1.5미터 정도의 기다랗고 무늬가 있는 상판석을 얹어서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농다리 위를 건너는데도 서로가 질서를 지켜가며 웃는 표정으로 상대방이 살짝 건너길 기다려 주는 모습이 농다리를 더 기억하게 만든다. 농다리 교각 위에 걸친 기다란 상판석 옆으로는 좌우에 공간이 있다. 다리 위로 오가는 사람을 피해 잠시 교각 위에 앉았다. 교각 사이를 지나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임 장군이 고장 사람들을 위한 정신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다리를 오가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농다리가 높아서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 바닥이 높아져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강물 줄기가 힘차게 흐른다. 진천의 기상을 연상하게 한다. 농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길 따라 낚시하는 사람의 여유로움은 농다리와 어우러져 시 한 수라도 지어야 할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높은 곳에 있는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덱(deck)이 잘 설치되어 있고 주위에 있는 화초와 나무는 오르는 길을 마음 편하게 한다. 덱 주위로는 따뜻한 봄 햇살을 머금은 벚꽃이 활짝 피어 목화꽃처럼 보인다. 농암정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세금천의 풍광은 구포 다리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만큼 널찍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초평호도 한눈에 보인다. 초평호를 가로지르는 푸른색의 긴 하늘다리는 천상의 세계로 연결하는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옆에는 진천군과 관련 있는 역사 인물들의 명패석이 인상 깊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조선의 문인화가 이하곤, 『여지승람』의 증보 편찬자 최석정, 가사 문학의 대가 정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군 김유신(흥무대왕) 등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세월의 향기가 있는 곳이었다.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고 소박했다. 다리 하나에도 28수라는 천문학을 접근하여 축조한 임 장군의 주민 사랑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농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소원 성취는 지금도 계속되기를. [진천의 농다리]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충북 진천군에는 신라가 적군을 방어한 최전방 산성인 도당산성(都堂山城)이 있다. 이 산성은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산과 행정리에 걸쳐 있다. 도당산성으로 오르기 위해 진천읍에 있는 길상사(吉祥祠)로 갔다. 길상사에는 김유신(흥무대왕)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흥무전(興武殿)이 있다. 흥무전 남쪽 담장 밖으로 나가면 바로 도당산성으로 연결된다. 현재 진천군인 만노군 태수 김서현은 김유신(흥무대왕)의 아버지이다. 만노군 서쪽은 백제군이, 동북쪽은 고구려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적군을 막아 내기 위해 김서현 태수는 길상사 뒤쪽 해발 약 190m의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7~9부 능선을 따라 테뫼식 석축 산성을 축조했다. 이 산성은 진천읍 서쪽의 낮은 구릉지에 축조하여 넓은 평야 지대를 이루는 진천 지역의 외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전설에 의하면 도당산성은 김유신이 하루아침에 축성했다고 하고, 당나라의 소정방과 함께 고구려 방어를 위해 이 성에 주둔했다고 전한다. 하루아침에 축성할 수는 없으나 아버지인 김서현 태수를 도와 빨리 축성해서 적군의 침략을 막았다는 뜻으로 전설이 된 것 같다. 김유신은 진천에서 태어나 15세에 서라벌로 이사했다. 어떤 이는 도당산성을 만노군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김서현 태수의 치소는 김유신의 탄생지인 진천읍 상계리로 고증한다. 산성의 축조 시기가 나타나는 문헌은 보이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천현」조에서 도당산성은 현의 서쪽 3리(약 1.2km)에 있고 돌로 축조했다고 한다. 그 둘레는 1,836척(약 570m)이고 성안에 우물이 2개소가 있었으며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실존한 산성이다. 현지를 직접 가서 보니 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방형에 가까우나 동벽, 남벽, 서벽은 성 안쪽으로 휘어들어 왔다. 북벽은 성 밖으로 약간 둥글게 내밀었다. 또한 서남, 남동, 동북 모서리의 3곳은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보다 많은 석재로 높게 축성하여 곡성(曲城)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서남쪽 모서리는 특히 밖으로 많이 돌출했고, 4m 높이로 비교적 높게 쌓았다.『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서 산성의 둘레는 실측 결과 823.5m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산성의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의 중간 폭은 각각 약 180m라 한다. 지금은 지상의 성벽이 거의 붕괴되고 성벽 안쪽을 따라 산행로가 있어 진천 주민의 체력 향상에도 한몫한다. 성벽은 지하에 매몰된 부분도 많이 있어 발굴하면 성벽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노출될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채석 과정에서 대충 다듬은 판석을 포개어 외벽만을 가지런히 하여 쌓아 올렸다. 남쪽 성벽의 밖에는 해자(垓子)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성벽의 기단에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 성벽을 따라 폭 5m 정도의 구덩이를 파냈다. 해자 밖으로 토석재의 무더기가 있어 마치 이중의 성벽처럼 보인다. 산성의 입구에 해당되는 동벽은 남북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중앙부는 1927년에 김유신의 위패를 봉안한 길상사를 지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길상사 내의 흥무전 삼문 밖의 축대는 길상사 건축 때 쌓은 것이나 위치상으로는 산성의 동벽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지(門址)와 수구문지(水口門址)는 현재 길상사로 인하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길상사의 삼문(三門)이 세워진 곳에 문지가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물이 2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길상사 바로 남쪽에 돌로 잘 조성한 우물이 있다. 오늘도 물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그 당시 물 걱정은 없었을 것 같다. 이곳이 옛 우물터의 하나로 추정된다. 도당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붕괴했으나, 성안에는 평탄한 대지가 곳곳에 있다. 평평한 대지에서 기와 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건물지로 추정한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기와 조각이 대부분인데,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진천 역사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라 생각한다. 김서현 태수와 그의 아들 김유신 장군의 호국정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도당산성은 지금도 그들의 정신을 말해 주고 있다. 흥무전 앞쪽에 있는 커다란 겹벚나무 한 그루가 흰색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도담산성과 길상사]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