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시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이미 시는 이미 달아나 혼비백산(魂飛魄散)한다. 그렇다고 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다시 시는 미궁의 깊이에서 서성이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낸다. 시는 늘 살아있고 생명의 호흡을 날마다 호소하지만 사람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따라 시의 표정은 각기 달라지며 감성과 정서가 많은 시인에게 가면 다른 표정과 언어로 태어나곤 한다. 그렇다면 시는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스피커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진솔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락 펼칠 때, 세상을 향하여 진리에 대한 표정을 관리한다. 그렇다고 시는 진리만을 강조하는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애환에 대한 조언을 멈출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삶의 전면에서 용감한 투사의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더러는 아픔을 위로하는 진정성의 말에 가슴을 치기도 한다. 결국 시는 삶의 곁에 있을 때, 시의 역할과 유용한 임무를 다한다. 한 사람에 시인의 시집은 앞에서 말함과 같이 인간이 만드는 표정의 전부를 시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이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독자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시의 등급은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시적 작품이 탄생에서 명품은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만드는 여부에 따른 이름이 명품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니 누가 명칭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품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2번째 시집을 출간한 홍금선 시인은 여린 감수성과 순수한 정서의 숲이 지고지순하다. 그의 시를 보면 싱그럽고 집약성의 언어가 맛깔스럽다. 자유시와 정형시를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자유스러운 정서의 나열이 시가 될 수도 있고 정형의 일정한 형식에 내용을 담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시라는 범주 안에서는 굳이 구분의 칸막이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문제는 독자가 읽어 감동, 받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시의 맛은 화려한 감동이기 때문이다. 2. 숲의 향기는 어디서 오는가 1) 정서의 특질 시의 구성은 시인의 정서가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이미지의 구축에는 설계로의 얼개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진로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때 한 편의 시는 시인 자신의 표정이고 사상을 나타내는 시인 정신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시는 곧 응축이라는 언어의 절약과 그 탄력으로 튕겨 오르는 리듬의 연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 섞어서 만드는 잡다한 것이 아니라 정제되고 질서 있는 풍경화 혹은 치밀한 구도 속에 언어의 탄력이 튕겨 이미지의 숲을 만들어야 한다면 홍금선의 시는 그런 욕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시가 숲을 푸르게 하고 있다. 가볍게 주섬주섬 온기로 녹이는 마음 빈, 공간 그득히 반질반질 후원하게 ` 돌아보며 빙그레 닦아 보는 너 <마음> 중 원래 시의 특질을 토운(tone)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시적 장치와 특징을 모두 담아서 말하는 총체적인 의미를 말한다. 왜냐하면 단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어조, 소리, 음조, 신호 등으로 해석되지만 시에서는 부드럽다거나 아니면 딱딱하냐, 혹은 냉정한가 또는 직선적인가 등을 의미하면서 한 가지 방향으로 지칭하지 않는다. I. A Richards는 의미와 감정, 의도와 더불어 시의 총체적인 의미라 했고, 르네 웨렉과 윔셑은 “내적 형식”이라는 말로 구분했으니, 한 가지로 특징을 요약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시의 총체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시의 “목소리” 즉 화자의 목소리를 의미할 때 곧 화자의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가의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달리도 말한다.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은 산문적인 장광설도 있고 또 단순하면서 명쾌한 선적(禪寂)인 고요한 방법이 있다면 홍금선의 정서는 후자에서 그의 시적 특성이 집약된다. 시의 중심 언어는 “마음”이다 “가볍게”와 “주섬주섬”을 모아 “빈, 공간을 그득히” 더불어 “반질반질”과 “훠언하게”의 결합에서 어둠이 없고, 밝고 환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빙그레”의 표정에서 시인의 정신이 있어 밝고 투명하고 구김살 없는 정서의 유로(流路)가 아름다움을 남긴다. <마음> 시는 도합 40글자로 되어 있지만 구성된 이미지는 여러 개의 갈래로 파생되는 기교는 시인의 시적 능력을 뜻한다. 이런 특징을 강조한 이유가 함축된다. 하늘을 보노라면 발그레한 노을 물결로 일렁이고 파랑, 파랑 자죽자죽 여울지는 길을 따라 두런두런 하늘 붉은빛 원을 그린 먼 곳 머물고 싶은 마음속 풍경화 <노을 길> 중 시란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는 풍경화 - 이때 시의 특성 중에 회화 즉 (phanopoeia)를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어 그림을 연상하는 일은 의미와 리듬과 3대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이미지 구축술이다. “노을이 물결로 일렁이는” 연상은 고요와 더불어 따라오는 소리의 겹침이 연상 작용으로 이어진다. 또한 <노을 길>의 가장 백미이다. “파랑파랑”과 “자죽자죽”에서 언어의 특징이 한몫으로 드러난다. 이런 언어의 감수성을 터득한 시인의 시적 능력은 감각적인 언어의 탄력을 싱그러움으로 살아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흔히 서정시의 특징을 말하면 자아의 세계와 일체화를 이룩하는 방법론과 주관이나 객관 또는 이성과 감정이 하나로 통합되는 서정적인 자아의 확립을 motto로 나아가는 정서에는 유연한 감성이 파도를 일렁이게 만들어 논을 하는 필자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낙엽> <단비> 풍경> 등 다양한 시가 많지만, 그것을 모두 논한다면 양이 너무 많아 간단하게 그의 주요 부분만 언급하였다. 다만 시는 절망과 아픔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길이라고 늘 말을 하지만 그러나 시는 아무런 힘도 없고 명예도 아닐 것이지만 아픔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한 편의 시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에너지이기에 더욱 위대한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시는 그렇기에 문학이라는 맨 앞자리에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인은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낚아채는 것이 시인이다. 무심히 지나가는 담쟁이넝쿨의 모습에서 삶의 길과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가 시 1편을 보고 느끼는 희망의 담금질을 하는 행위와 표현에서 악착한 삶의 길을 펼쳐야 하는 이유와 기운을 받는 것도 독자의 몫인 것 - 시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는 뜻이다. 3. 에필로그- 독특한 상상의 표현 압축 시인의 시적 언어 감각은 탁월한 것 같다. 특히 서정성의 부드러움과 자아의 대상을 독특한 언어로서 조화를 이끌면서 풍경화를 그리는 섬세함과 솜씨는 일품이라고 장담한다. 더구나 언어의 직조에 번지는 묘미와 응축을 통해 이를 탄력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길은 그만의 성을 구축하는 구상이면서 특징이라 하겠다. 이번 2번째 시집을 출간하면서 꾸준한 열성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시단의 돌풍과 더불어 무서운 기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앞으로 두고두고 볼일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질서 현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력의 조력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갖추면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안을 찾으면서 의미의 조직화에 혼신을 발휘하려 한다. 더러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도로(徒勞)에 그치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망을 얻거나 그 반대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유명이란 말은 부풀어 오른 거품 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생(生)이라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의 정화 혹은 순수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한정된다. 자기 삶의 오뇌(懊惱)와 고통 신산(辛酸)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는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탄생될 수 있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청탁의 의해, 서문용 시인의 시를 접해본다. 그의 시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한다. 물론 저변에는 부모나 고향의 정서 또한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에도 따스한 햇살이 다가든다. 이제 점검의 코스를 통해 정신도(情神圖)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2. 거느린 의식들 1) 헌신의 소리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하다. 거스름이 없다는 것은 달관의 높이와 경지를 점했다는 의미가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교만 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e Souliers』라는 작품이 있다. 한 켤레의 농부화에서 서럽게 살아온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히 담겨 있다. 더구나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의 작품은 작가의 모든 생을 압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언제나 내 발을 꼬-옥 껴안는다 무덥고 지쳐도 언제나 내 편인 남 보기 부끄러워도 전혀 싫은 내색 없다 가다가 쓰려져도 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언제나 보살핀다. 마음도 넓고 고운 아프지도 않는 봄 화신처럼 언제나 나를 지켜준다. 『내 신발』 중 시인이 시집을 상재(上梓)할 때 의도적으로 작품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은 독자의 첫인상을 휘어잡으려는 발상에서 맨 앞자리에 있는 작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머리 위에 모자로부터 발끝을 지켜주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감싸고 의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의상과 어울리는 신발의 모습- 깔끔하면 그 사람의 인상은 멋진 사람으로 인식을 심고 지저분할 때는 흐린 인상을 각인 시켜주는 일은 인상에서 좌우되는 현상이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화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구두는 비교 가치가 연결된다. 시인의 약력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그는 중앙부처의 공무원으로 봉사와 헌신을 좌표로 삼고 살아가는 일이 삶의 방편이다. 공무원은 국민을 위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자리일 때, 그의 임무는 비로소 화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발은 곧 공무원이고 그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은 국민이기 때문에, 신발은 어떤 경우에서나 주인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끈기 있게 “너를 지켜준다.”라는 임무에 헌신해야 한다. “가다가 쓰러져도/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의 무한 성실을 다할 때,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보이는 희망처럼 서 시인의 마음에는 희망의 푸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은 때로 고독할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기본 바탕에서만 성립되는 Eros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날마다 항상 변함없이 환한 웃음을 선물하고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한다 세상 인연 맺은 날로부터 이 시간까지 무한 사랑 에너지를 주었지만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빛은 우리를 향해 행복하게 살라고 알려 주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날마다 감사에서』 사랑이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일 경우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 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햇빛의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펼칠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은 고귀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사랑의 이름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숙고하면서 또 찾아 나서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의 신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어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로 표정을 갖게 된다. 서 시인은 가장 많은 시적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상대를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그의 시는 공고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시인인 듯하다. 『사랑하라』 『당신은』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꽃』 『하얀 눈』 『빈 의자』 등은 사랑의 이미지가 번다, 하게 들어 있다.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교직(交織) 되면서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 정서의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며,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 앞으로 살아갈 시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행복하게 살라 서로 행복하게 살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 행복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중 “살라” “하라”의 형태로 사랑을 명령으로 강조한다. 이런 태도는 독자에게 위압적이고 때로는 독선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타당했을 때는 오히려 감동의 작동 원리로 드러날 수가 있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진리의 정직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에서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는 3인칭 복수의 지시적인 시어에서 사랑을 이룩하면 행복해지는 등식이 전개된다. “하라”와 “살라”의 명령어가 거북스럽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 곧 행복으로의 길을 만들고 있다는 이유에서 시의 묘미는 한층 밝음을 주는 역설의 기교가 된다. 사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된다. 포용의 기대감도 있을 수 있고 하나로 결합하는 통합의 일도 기대되고 또는 포로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면 서 시인은 저축의 의미- 복리의 계산으로 부풀어 오르는 무한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어느날 내게 당신이라는 은행이 하나 생겼어요. 장기간 복리로 사랑 계좌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내게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낼 때마다 고스란히 입금 시켰어요. 『사랑은 만삭』 중 매우 신선한 사랑법이다. 많은 시평을 썼지만, 사랑을 은행에 저당하여 복리로 부풀리겠다는 비유는 서 시인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시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도구를 통해 언어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심지어 언어를 버리면서 언어를 획득하려는 역설의 기교까지 동원한다. 은행의 이름은 당신이고 시인은 사랑의 계좌에서 수시로 입, 출금이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라 복리를 위해 장기간 계약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가치가 한층 고조된다. 더불어 당신이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내올 때 “고스란히 입금시켰어요.”의 진솔성은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지고한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오로지 저금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뒷날 받을 자산 가치는 화려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행복이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함을 뜻한다. 내게 오는 시간을 듬뿍듬뿍 토막 내어 빈 의자에 올려놓고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빈 의자』 중 사랑이 기다림이라는 말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암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의 마음이 허락의 시간까지 기다림이 있어야만 사랑의 진정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은 기다림에서 진실의 불을 켜는 시간 앞에 엄숙한 마음을 가다듬고 긴 시간을 의미로 채우려는 발상이 지극하다. 다음은 포로(捕虜 의식이다. 오늘 하루 이십사 시간 전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 마음 변하여 되돌아오면 내 쳐놓은 그물망에 걸여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두고 오랫동안 묶어두고 싶다. 『사랑의 그물망』 중 사랑의 포로라는 의미를- 앞장서서 오히려 그물로 대상을 포획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강압적인 방법- 이런 강압의 방법은 그 농도에 따라 비례하여 진실함을 나타내는 언어의 기교일 뿐 실제로의 행위는 물론 아니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이라는 가정의 상태이기 때문에 쳐놓을 그물망은 기대할 수 없지만 대상을 사랑하는 깊이가 얼마나 진실한가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어떤 방법이든 진실- 때로 진실이 불통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 시인의 사랑 법은 가능한 한 이룩하고 싶은 열망의 농도와 상관이 있는 것 같은 비유를 모두 동원한 인상이 특이하다. 3) 고향 그리고 부모 인간의 근본은 뿌리를 아는 일일 것이다. 이 출발은 부모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전개될 때 나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친구도 있어 추억의 이름이 더해질 때, 생은 풍윤(豐潤) 해질 수 있게 된다.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먼 나라의 아버지』, 『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 또한 고향을 생각하는 『고향 무정』 『밤하늘 친구』 등 고향에 대한 추억은 많은 편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오십 성상 세월 망각한 채/고향길 달려가서/그때 밤하늘 쳐다 보았네.”(밤하늘 친구)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된 그리움이 있을 뿐 특별한 추억의 이야기는 감춰져 있다. 오십 년이라는 긴 세월의 단절에서 추측의 길이 암시될 뿐이다. 오늘따라 이마엔 골 깊은 주름살이 큰 고랑 선명하게 드러나고 생살 도려내는 아픔처럼 마음이 아프다. 『어머님 모습』 중 “오늘따라”에서 현재의 상황이 느껴진다. 그러니 주름살 낀 어머니의 모습에서 통증을 느끼는 효심에서 느끼는 인상은 가슴으로 따스하게 전달된다. 자기의 원형인 부모에 대한 마음에 통증이 클수록 스스로 모습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커지는 것 같은 형상이다. 효도는 곧 자기 사랑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계신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세상살이 벅차고 힘들 때 더욱 보고 싶습니다. =중략= 『먼 나라 아버지』 부모는 자식의 반면교사가 될 때, 교훈이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강인함을 요구하는 아버지는 때로 외로운 모습이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먼 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가 “밤에 몰래몰래 변신하여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생전의 가난조차도 물려준 아버지를 이해하는 가슴에 그리움이 애절하다. 3. 에필로그 (시 정신의 골드) 1)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고 헌신은 더 큰 사랑의 길을 내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서 시인의 시는 순수와 투명이 남다르게 시의 표정을 밝게 한다. 이는 삶의 질료(質料)가 되기도 했으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 같다. 2) 호수의 아름다움은 관조의 경지에 이를 때라야 하늘이 보이고 맑은 바람조차 시원한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 수양 혹은 정화의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이런 이치를 수행하는 행동의 모범이 날마다 거울 보기 혹은 구두를닦으면서 지혜를 축적하는 비유로 나타난다. 3) 생을 지속하는 데는 정답이 없지만 자기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에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 시인은 당당하다. 4) 사회에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환하게 보이는 정신은 바로 서 시인의 시 정신을 이룩하는 원천이면서 삶의 지표로 적용되는 건강한 시인 서 시인의 시는 그렇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저서]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1> 시는 과학이라는 논지도 있고 시는 과학이 아니라 먼 거리에 잇는 애매성(曖昧性)원리가 작동한다는 논지도 있다. 시평을 하는 선배는 행과 연을 나열하는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의식을 정치(情致)하게 또는 정확한 논리적 구축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시의 품위를 나타낼 수 있고, 시가 필요로 하는 여백의 함축미라 하는 선배도 있다. 즉 응축에서 많은 이미지를 내포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언어의 사용에 정확한 운용(運用)이 필요하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확고하면서도 유연미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는 감동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는 결코 액자 속의 사진과 같은 정물화적인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의 특성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지이다. 정치도 살아있는 생물이라 하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주도하고 그 변화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줄 아는 방법이 그 나름대로 내재 되었기에 생명을 신비와 운용의 바람을 넣을 수 있으며 개성을 살리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일정한 표정을 나타내고 또 표정을 관리하는 주체적인 개성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도정(道程)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를 한가지로 정할 수 없음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없는 이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인간에 의해 표현하는 인간이 표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철학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이치가 있고 인간을 탐구하고 나타내는 시의 자유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시에는 인간의 삶이 있고 애환이 시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며 시를 아름답게 포장을 해야 하며 종이 등으로 포장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기에 어떻게 고착화 시키느냐의 따라 이치가 차이나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인 기교이면서 감동을 생산하는 이유가 있기에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시에는 계절이 표현되고 대칭적 사랑이라는 논지가 필수이며 가족, 모성, 등 다양한 사물을 분해하고 정서를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의식의 흔적 찾기 Personality는 다른 사람에게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한 개체의 모든 인간적, 감정적, 의지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특성의 통합된 체계를 말한다고 심리학에서는 지적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특징적인 흐름이 일정한 지주(支柱)를 이루면서 삶을 형성하고 지속 되는 바 이를 개인적, 사적인 특색으로 지칭하게 된다는 점이다. Allport는 환경에 대한 독자적인 적응을 규정하는 심리 즉 한 개체의 내부에 속하는 생리체계의 역동적 체계라는 말로 정리를 했다. 여기에는 자아와 초자아를 구분 짓게 만드는 모태인 id와 ego와 suqer ego등 복잡한 의식 체계는 결국 한 개체의 정신적인 흐름으로 결정된다. 모든 의식은 personality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모든 시는 자아와 초자아 이드 등의 사이사이를 왕래하면서 삶의 감수성과 의식을 나타내는 생명의 소리에 특징이 특징이 포함되어 발언한다. 1) 사랑의 의식 많은 시에서 사랑은 가장 많은 소재로 작용했다면 사랑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거나 풀어낼 수 없는 문제와 해답 사이에 가로놓인 대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숙자의 시에서는 사랑이라는 암시- 비단 남녀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닌 타인과의 정감 또는 남편 아니면 자식과 주고 받는 정감의 모든 일들이 사랑이라는 명칭에 포괄되는 인상이 너무도 짙다. 어여쁜 꽃잎 사이로 사르락 젖어드는 이슬같은 사랑 하나 영롱한 이슬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네 벙그러지는 꽃잎 사이로 아스라한 꽃잎 만들며 가장 고운 미소로 아름다운 미소 보낸다 청아한 하늘에 두둥실 구름도 너무도 예쁜 사랑에 더욱 눈부시게 비추고 끝없는 메아리 되어 들리는 사랑 노래 하나 영롱한 이슬에 힘입어 빛을 내는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먼 길을 여행하며 피어나는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구려 <사랑의 의식> 사랑에 비밀은 누구나 갖고있는 열쇠가 아닐까? 비록 그 열쇠를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죽음으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며 춘향과 이도령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랑이든 사랑의 이름 앞에 설렘과 아픔 혹은 행복하고 기쁜 추억들이 간직되었기에 사랑은 보편성으로 이해되는 지근거리에의 이름일 것이다. 김시인은 사랑의 개념을 “꿈”과 “추억” 그리고 미소로 “보내는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찾아오고, 가져오는 이기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또는 받음에서 느끼는 행복의 중심을 찾아가는 모습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이 들리는 것을 하늘의 소리에 비유함으로써 “사랑 노래하나”는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길, 행복에 접근하는 모습이 되면서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헌신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라 보내는 혹은 바치는 헌신이 될 때, 비로소 참된 사랑의 이름에 다가갈 수 있기에 고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같다. 머릿속 각인된 목소리 당신이 준 사랑을 호흡하며 둘이 만든 사랑은 행복인가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주는 다정함 포근함입니다. 둘만의 정원을 만들어준 임 눈을 뜨면 곁에서 은은한 향을 전해주는 그윽함에 사랑을 먹습니다. 나목도 아름답게 보이고 외로운 가로등도 정겨운 것은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의 사랑>중에서 정말 사랑은 둘이 만들기 때문에 빛=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짝사랑도 있겠지만- 아울러 행복이라는 느낌을 생산할 수 있고, 다정함을 느끼는 에너지의 파동은 더 큰 사랑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둘만의 정원에서”에서 느끼면서 감상하는 향기에 취하는 절차가 수행되는 것이다. 이런 향기에 젖을 수 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고 영롱하다. 심지어 나목도 그렇고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가로등조차 정으로 채워지는 의식은 바로 사랑이라는 정서에 감염되었기에 아름다움으로 눈이 떠지고 환상의 세계와 접촉하며 승화되는 것이다. 행복은 이런 무의식이 가져오는 세계- 사랑의 위대한 옷을 입은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김시인의 사랑은 하나가 아닌 둘이 결합하는 우주의 원리를 인간에 결합하는 계산법인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온 우리들 우리 이제는 얼마나 산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아픔도 많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웃음으로 날려버릴 친구들의 가슴이 있지 않는가! <친구>중 인간이 살다보면 고독은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이럴 때 친구는 발을 맟출 수 있는 대상이면서 생의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이름으로써, 친구는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름이기에 우정은 더욱 귀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랑도 친구로 시작하고 삶도 친구로 정감을 나눌 때부터 세상은 따스하고 다정한 공간으로 화할 수 있기에 우정에 갈증을 갖는 이유가 된다. 추억을 만들고 세상의 종막이 올 때까지 발길을 함께 하려는 김 시인의 마음은 따스하기 때문에 더욱 따스한 그리움을 우정으로 포장하려는 의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3> 에필로그 하면서 시인의 시적 무드는 안온하고 따스하다. 봄의 향기 짙은 꽃을 피우려는 발심에서 노력의 얼굴이 크로스 업 되고, 순수한 마음에서 꿈과 희망을 간직하려는 일면과 사랑의 마음이 시(詩) 전반을 장악하는 원천이 되는 듯하다. 상징의 숲에 들어 있는 요소들로 보이며 이동의 메신저이면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생명의 원천 의식을 뜻한다. 아울러 가족은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에너지를 저장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동반자” “어머니” “바다” “봄비” 등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이미지들은 곧 시인의 시에 간직된 밝은 표정에 들어 있는 미소와 같다. 아마도 남다른 시인의 특색을 보면서 더욱 기대가 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며 나가려한다. 2022. 08. 18.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조숙현[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시인의 꿈은 1편의 시를 위해 정성과 혼심을 다해 경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을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둘째는 시의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정적 언어의 선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시는 공허함만 부추길 수 있음도 명심할 일이다. 전 세계 많은 인구가 자리하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것이기에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稀少)하기에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 분신일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이라는 명패를 패용함과 동시에 무한의 책임을 갖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함이다. 유기연 시인의 시에는 여러 가지의 표정이 묻어난다. 식물 정서, 사랑정서, 환경 정서 등이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삶의 애환과 정신의 지향 사랑에 대한 애착 등이 표출하는 것으로 유추가 된다. 시는 낯설게 표현하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표현은 종국에는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겠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도시의 복잡한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 흔적들을 만나 보기로 하자. 『2. 정서의 표정들』 1> 식물 정서 시인은 누구나 개성의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로 관심과 집중을 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은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한다. 대체로 식물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은 다이나믹한 것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작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유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으로 정신의 문으로 들어 가보자 텃밭 끝자락에 실하게 여문 호박 하나 살며시 집에 옮겨 놓으니 텃밭이 따라왔다. 혹여 허기를 채워주었던 비우며 살았던 세월이 미소 지으며 굶주림 세월 견디었던 부모님 가뭄과 폭염을 견딘 커다란 호박 온 집안에 가득하다. <과거의 상념> 사실 호박 하나가 일상에서 줄줄이 풀려지는 이야기는 과거의 길을 넓게도 채색 되는 듯하다. 가난한 시절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 하나가” 서글픈 지난날들의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부모님의 가난을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애환의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으로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회상하는 시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호박이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부모님의 가난과 아늑하고 포근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드는 듯하다 이런 풍경과 추억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렸던 동화된 마음과 사랑의 감성이 식물 정서와 지배적인 양(量)으로 시적인 허기를 채우는가를 증명하는 예로서 감흥이 솟아 나는 듯하다 하냥 걷는 길에 만상의 태고의 신비에 산길도 꽃으로 돋아 이리도 고왔는가? 뉘, 있기에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싶다 –중략- <산속 길에서> 시의 구조란 길-꽃-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산속 길을 걷는 목적의 좌표가 시인은 태고의 신비를 만나 산길도 꽃으로 펼쳐진 길을 유영하며 산길을 걷는다. 아무튼 꽃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미지칭으로의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을 표하면서 “고왔는가”의 새삼 발견에서 역시 꽃은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되는 듯하다 시인은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없이 내어준 노을 진 들녘에 찬비마저 내리고 아픈 잔등 쓰다듬다 한기 견디며 삶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문다 까마득히 저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시린 헛된 꿈도 가고 내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도 쓸고 간다. 세월이- <삶의 뜰>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 한기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독목이 있으므로서 봄을 예비하는 안온함이 자리하는 느낌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의 운행 원리와 상통을 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감으로 일어난다 마지막 잎새하나 바람이 스치면 엄혹(嚴酷)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삶의 뜰”은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자리가 보인다. 식물 정서는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이미지로 작용하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듯하다. 어머니 손때 묻은 항아리 그 안에 수련 있어, 고단한 삶을 이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 수려한 어머니의 자태가 있다. 물그림자 뜬 자리 물 배추 펴놓고 가을 햇살이 와서 사랑으로 아픈데 창문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어머니 분냄새 처럼 함초롬 향기 듣는다 <수련>(차분하고 고운 상태) 어머니와 수련의 향기가 동가(同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이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엔 시심이 누리는 연상작용이 복합적인 것 같다. 이는 조용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긴다.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아름다움과 향으로 오르는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되지 않을까? + 2> 부모 가랑잎에 하얀 서리 내리면 깊은 골짜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 시름을 보듬어 소쩍새처럼 소쩍새처럼 못내 서러워 운다 –중략- <아버지>에서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형극(荊棘)의 나날에서 끌려가는 형상- 가족을 책임진 신음을 생각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다. 이는 “소쩍새처럼”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가 고난의 아픔이 연상 된다. 더구나 “서러워 운다.”의 내포는 풀어낼 수 없는 고통과 참혹성을 나타내는 비유일 것 같다 누구나 과거는 무겁고 회상하는 삶의 그늘이 무게와는 달리 친근하고 애착이 가는 그런 경향이 다분하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기에 비록 가난이나 아픔조차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발동된다는 점에서 시름이나 서러움일지라도 동화되기를 염원하는 뜻이 된다. 아울러 부재한 부모에 대한 회상은 더욱 무게가 가중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기연 시인은 이런 정서를 시화(詩化)하는 점에서 다감한 성정으로 생각된다. 나를 찾으면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더 큰 나로 변한다고 한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나를 위해 운행한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나를 찾는 일은 곧 우주의 원리를 찾는 일과 같을 것 같다. 나를 아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고 종점이기에 시련을 감내하면서도 나의 의미는 삶의 가치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부끄러움에 전신을 감추었다. 되비친 것이 사랑이면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중략... 나는 무엇으로 거울 앞에 풍경을 피울 것인가 마지막 아름다운 고백이 되비치기를 기도하며 거울을 닦는다. <거울> 중- 나르시스의 이름은 자기에게 대한 탐닉(耽溺)을 의미한다 거울은 자기를 반사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그것이 자기라는 확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편에 영상으로 나타난 자기의 분신일 뿐이다. 그 분신 속에는 보이는 마음이 없기에 오로지 형태만으로는 완전한 자기의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그러나 자기와 반대편에 서 있는 거울 속에 자기를 부정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형태조차 부정하는 곳에 의미는 찾을 단서를 확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되비친 거울 속에 자기를 애착하는 관심의 농도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비칠 것을 염원하는 생각이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 사랑의 진원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면 자연스레 도착한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하기에 그렇게 간다, 하더라도 사랑의 안온함을 누리기엔 지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고개를 넘으면 다시 고개가 나타나는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 시인은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남편을 향한 노래로 한정 되어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눈이 먼다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한 날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 중 저녁 노을에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 유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사랑을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수사의 사랑을 하는 것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를 보여주며 순수하고 담백한 뜻을 가질 때 사랑은 고귀한 가치의 개념으로 정리 된다면 유 시인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이 아닌가 한다. 3. 에필로그 유 시인의 시는 담담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 짙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점에서 푸르른 식물 같다. 부모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따뜻한 정이 안으로 남기는 점에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러한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되는 듯- 하지만 물론 사랑의 요체는 한 삶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직 사랑을 향한 정성과 시로서 표현하는 인상이 전부이지만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의 지향점,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과 사랑을 위한 현실의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의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놓고 나가련다. 2022. 08. 03.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강해심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