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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으로 밥, 김치, 된장국을 먹어도 또다시 되풀이가 정작 맛깔스럽다거나 아니면 식성에 맞아서 먹는다고 해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싫은 것을, 반복적으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외식을 한다 해도 일상적일 수는 없으며 간혹 즐기는 정도이지 다시 밥, 김치, 혹은 된장국으로 돌아가는 회전의 일상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선대 조상이 그렇게 습관화했기 때문에, 따라 한다는 말도 그럴싸하고, 다른 방도가 없기에 관습의 길을 갈 뿐이라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굳이 외국 여행 중에도 꼭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풍경을 목도(目睹)할 수 있다. 단 며칠의 여행도 그런 감정을 갖는 이유는 우리 것에, 대한 맛이 이미 체질적으로 굳어진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뜻을 우리 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도 생각이 든다. 밥, 김치, 된장국 같은 끈질긴 맛이 떨어질 수 없는 절대의 인자를 내포한 것일까?
필자는 김소월의 1920년도 <진달래꽃>을 오늘에 명작으로 추켜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의 여성상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관습에는 당현함이 오늘에 와서 이별의 주체가 그렇게 나약한 모양을 현대의 자유 발랄한 여성에게 지표로 강요시키기에는 무리라 보기 때문이다.
문학에 보편성의 문제는 시간을 극복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보편성의 기준 잣대에 어긋난 결과라는 뜻으로 보면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의 흐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실 명작의 조건은 오늘에서 내일로 혹은 미래로의 시간으로 등성이를 넘어가는 일은 보편성의 범주 속에서 설정될 것이다. 우리의 맛은 결국 보편성의 범주 속에서 입맛으로 느끼는 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시간의 등성이를 넘어서 좋아하는 맛깔의 시-
그런 바람의 시를 만나면 어디서나 맛깔스러워 좋다. 얼치기 표정의 시가 아니라 순수한 쌀밥에 김치와 된장국을 곁들인 시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비유의 간격이 멀수록 신선한 맛을 전달하는 것은 시가 갖는 특권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산문과는 달리 시는 있음 그대로가 시치미 속에서 상징이나 은유의 의상을 입혀 시인이 의도를 전달하는 묘미는 확실히 시가 갖는 특징이다. 더구나 장황한 진술이 아닌 응축의 표정에서 길고 긴 의미가 있을 때, 시는 산문이 갖는 농설(弄舌)을 잠재우는 매력이 있다.
세상사는 모두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설명된다.
바둑의 돌에 대한 운행에 천만의 길이 있고 운동선수의 손짓발짓에도 다양한 의도가 명백한 것은 삶의 길에서도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2등은 없다. 이겨야 한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승리의 요건이 곧 스포츠라는 이름에 승부를 위한 전략과 고도의 전술을 내장한 싸움의 세계-
16세기 이전부터 스콜틀랜드의 얼음판에서 상대의 돌을 밀어내는, 이른바 스포츠의 이름이 최근에 주목받은 스포츠, 경기이며 전략이 필요한 경기이다.
돌이 돌을 밀어내고 때로는 피하기도 하면서
돌아온 탕자처럼 미끄러지면서도, 어떡하든
한 발짝이라도 더 가야 할 집이 있다.
알몸으로 얼음 바닥 차디찬 승부의 세계에서
돌 하나가 가야 할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컬링> 강우식 중
도달해야 할 ‘집’은 목적지이고, 어떤 방법이든 빨리 집에 이르는 비유는 곧 삶의 일상이 겹쳐진다. 탕아처럼 미끄러지면서도 ‘어떡하든’에 수단과 방법을 스포츠의 룰에 맞추어 온갖 기교를 동원하여 목적지에 빨리 당도할 때, 비로소 성공의 이름이 따라올 것이기에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 삶의 교훈을 오버랩한 시인의 시적 의도는 세태를 비판하는 의도가 명료하다.
오리발과 변명에 악다구니로 상대의 잘못을 적폐라는 이름으로 분풀이를 일삼는 자들-
그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온갖 칼날을 번뜩이는 망나니의 춤을 바라보는 선한 사람들의 눈엔 슬픔의 길이 비극으로 다가온다. 포용과 용서를 통해 올바른 질서를 구축하는 길이 곧 삶의 길이라는 것을, 운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일이지만 무지의 두꺼운 의상을 입은 오늘의 사회 판도를 휘젓는 자기 사상이 없는 자들의 춤판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3. <바람>
이미지 구축에 바람은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어이며 낱말이다. 자유로움과 보이지 않음, 그리고 시, 공을 넘나드는 무한의 표정을 감지하는 것은, 시인의 예리한 통찰에서 나오는 언어일 뿐 바람의 실체는 잡을 길이 없다. 때문에, 신라의 바람과 고려의 바람 혹은 조선의 바람이 교차하면서 오늘에 다가올 때 바람의 기능은 변신을 자유자재로 하며 운용하는 도구의 역할을 볼 수가 있다.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새바람은 방위에 따른 이름이고 고대인들은 하늘 기운 즉 우주의 숨소리로 파악했고 바람의 신인 영등(靈登) 할미와 물 할미, 산 할미와 더불어 민간 신앙에서 3대 신앙 할미 중에 자연 현상인 바람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농경사회에 풍요와 관계가 있다. 구름을 부르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우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바람의 관념인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촉한의 정치가이자 유비의 자는 공명 직위는 무량후, 시호는 와룡이라 불렸으며 유비의 책사 재갈량이 형주 전투에서 바람을 불어와 위나라 조조를 적벽대전을 화공으로 승리한 것처럼 바람은 신비한 대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네 개의 바람벽이 네모난 방에 버티고 살아도
들어오는 바람을 막지 못해 바람이 방안으로 쏟아지고
나는 거리에 나가 홀짝홀짝 뛴다. 바람이 뒤쫓아 와서
내 품속으로 파고들다가 길가 백화점 안의 통유리 속으로 들어간다.
통유리 저쪽에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가고
새 옷을 입은 마네킹들의 옷자락에는 쇠 파람 소리가 난다
모자를 벗어 나에게 던지는 점원들
붕대를 감으며 패션쇼를 시작하는 킬 힐 신은 마네킹들
바람을 데리고 길게 불어오는 시간이
빈집 모퉁이에 집을 짓고 끝없는 명상에 들어간다.
네거리에 갑자기 자동차가 막히는 것은 바람이 쌓여서
교통사고 없는 고속도로를 바람이 가로 막아서
뜬구름 한 점마다 어린 친구의 얼굴이 삐죽거려서-
<바람 바람벽> 김규화 중
시에서 관념은 주인공이 아니고 시를 이루는 요소로 작동되는 잔가지의 역할이다.
또한 관념은 정서를 내포하면서 상호 보완으로 시인의 의도인 사상이 하나로 통합될 때, 이미지 구축에 공고한 줄기를 갖고 뼈대를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규화의 바람은 사위(四圍)가 벽에 막힌 상태에서 심리적인 조정을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바람과 ‘대결의 몸짓’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홀짝홀짝’으로 바람의 행위를 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층 심리학의 기저(基底)에서 볼 때 나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고 바람을 회피할 때, 또 다른
장면이 마네킹의 고독한 모습으로 시인의 의식에 겹치는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진 인상을 배태 (胚胎)한다. 시적 화자나 ‘나’와 ‘바람’의 상관관계가 ‘마네킹’과 ‘점원들’의 행위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고 ‘나에게 던지는’‘붕대를 감은’ 불편한 행위를 일삼는 것은, 시인과 대상의 관계망이 불안 징후이면서 자유로운 바람으로 살고 싶은 시인의 심리적인 소망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이에 증거가 되는 시어는 마지막 연에 ‘바람이 쌓여서’ 바람이 가로 막아서 ‘얼굴이 삐죽거려’ 등은 시인의 속내를 보여주는 막힘의 의미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4. 추리고 나면
자기만큼의 기준을 갖고 산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리라
왜냐하면, 줄이거나 늘이거나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둘 중 하나로 정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자기를 쓰고, 자기만큼 표현한다를 주장하면 결국 시 또한 ‘나’를 말하는 방도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부풀려 살아가기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를 얼마나 아는가의 무게는 결국 인격이라는 말로 정리될 곳이다. 자기 수양의 노력이 필요한 소이가 바로 풍선 부풀리기의 모순을 벗어나려는 일이 삶의 참된 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장편 소설도 모자라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그런 사람일수록
이야기를 추리고 나면
단편 소설도 못 되는 사람 수두룩하다.
<추리고 나면> 윤수천 중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를 돌아보면서 살아라. 그리고 과장의 풍선을 하늘 높이 띄우지 말아라. 더 나가면 겸손이라는 인격을 갖고 살아라.의 간명한 교훈이 펄럭인다. 다변(多辯)으로 꾸미는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자기선전의 도구로 장황하지만 줄이면 빈 공허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정리의 시인 것이다. 윤 시인의 시는 정적이면서 에피그람을 동원한 짧은 시어가 폐부를 찌른다. 장황한 요설로 알맹이가 없는 언어유희의 시들이 판을 치는 요즘 우회하고 비비 꼬는 것이 아니라 솔직 담백한 표현미가 오히려 우리에게 긴 여운을 주고 있는 것은 왜일까?
5. 변증의 직선
논리는 언제나 비논리와 친할 때, 논리의 역설이 곧게 펴지는 것이다. 이런 모순은 곧 다른 길을 만들면서 진행의 선상에 설 때, 침묵을 불러오는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된다. 물론 찿아 오는 것도, 있고 더불어 찿아 오는, 것도 있지만 그 중심에 무엇을 항상 생각하게 하는 자세 -
시는 결코 논리로 쓰는 작업이 아니지만, 그 결과물 -
감동은 논리로 살아나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와 비논리의 상관은 언제나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양파껍질을 벗기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는 대상화가 나의 관계에 비논리가 논리로 다가오는 길이 보이는 이치가 있다. 상관없음에서 상관있음으로 길을 만들기 때문이다.
양파를 벗긴다.
정갈한 마음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 미망의 시간을 벗겨 낸다.
내가 보고 싶었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양파를 벗기는 일은 눈물을 벗기는 일이다.
오랜 슬픈 날들의 저녁 어스름을 벗기는 일이고
몸 안의 갈증을 벗기는 일이며
사막을 건너는 신기루를 벗기는 일이다.
모레들의 안쪽,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서걱거림의 행방을 벗기는 일
양파를 벗기는 일은 그리하여 그 변증의 직선이다.
<양파 그 변증의 직선> 홍문숙 중
양파를 벗기는 본질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홍문숙은 ‘정갈한 마음’을 보는 것과 ‘진실을 찾는’일이 시작되고 더불어 눈물의 길을 만난다. 이 눈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과의 접촉으로 강요된 눈물이다. ‘갈증’과 ‘신기루’와 ‘서걱거리는 행방을 벗길 때, 그 라인은 우회로 갈팡질팡이 아니라 곧게 직선으로 예고 없이 다가와 있는 만남의 길이 보인다.
대상을 시어로 포착할 때, 시인의 내면에서 오랜 기다림의 길이 있는가 하면 거침없이 직선으로 다가오는 의식의 행보 중에 시인은 후자 쪽에 거침없는 시화로 느껴진다. 서술형 종결 어미’다‘는 확신의 정신을 의미한다면, 11행의 시 중에 ’이다‘가 6번 출몰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시에 투영한 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물 통찰의 지혜가 넉넉한 것도 사실로 보인다. 지적인 기다림이 시인에게 보이는 것은, 그의 진실성이 돋보이는 말로 가름을 하면 에필로그 한다.
2026.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