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지 물음에는 거의 명확한 대답을 마련하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도 막상 왜 시를 쓰는지 물으면 답을 어떻게 줄 것인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무한 상상이 내게 들어와 시를 쓴다는 신을 떠올리며 설명을 해주게 된다. 물론 스승께 배운 말이지만 사실 자기 시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시를 쓴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시를 생산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시를 분석하고 해제 또는 정리 이후에 비로소 객관적인 관점으로 탄생된 시에 대한 평론가의 조언에 따라 할 뿐이다. 이 경우 시에 대한 객관화는 쉽지 않으며 모든 시인이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에 마치 잉태 전에 어떤 꽃을 만들겠다고 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삼라만상 우주 섭리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따르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시를 그리는 일은 아이의 잉태, 또는 꽃을 만들 수 없는 일과 같은 것이다. 시인 누구나 멋진 시 좋은 시 쓰기 위해 신명을 다하지만 그런 소망은 쉽지 않은 결말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멋진 시와 좋은 시를 그릴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다. 내면을 통찰하여 사물의 특성을 시로 환치하는 일에 부단한 집중력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누구나 그리고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인이란 명칭을 가진 사람만이 시를 그리고 쓰는 것은 아니다. 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내면에 시심을 감추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 시심을 어떻게 꺼내어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가의 집중력 상상에 의해 아마추어와의 차이는 증명되는 것이기에 증명이 되는 것이다. 서길순 시인은 공예방에서 작품을 만들며 깨끗한 시를 쓰는 시인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잡티가 섞이지 않고 순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다. 이는 그의 직업과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견문으로 시화화 하는 독특한 입지를 만들고 있다. 공예라는 작업은 섬세하고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창작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시곗바늘처럼 행동하는 조용한 조건에서 일을 하며 창작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매시간 순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던 순간의 아픔들이 밤낮을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던 나날들을 발췌하는 순간의 환희- <머리말 중>에서 다소 체계적인 글이지만 시인의 내적으로 아파했던 시절을 말하고 싶은 글들이 응축되어 시로 표현한다. 이렇게 시를 쓰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생동감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볼 때 함축된 언어로 그려지는 그의 특성을 만나기로 한다. 2. 시의 언어 시는 언어로 이어진다. 그 구성이 언어일지라도 시인의 정신이 투영되는 점에서 그만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때 단순한 언어의 조합, 조립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을 모두 투척하는 일이면서 생명과 고통을 맞바꿀 수 있는 신념의 진행이라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자화상이고 영혼의 불빛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서길순 시집을 보면 계절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절에 따른 시인의 의식은 계절과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로 의지하며 봄에 꽃을 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사계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꽃봉오리마다 솜털이 보송보송 꼭대기까지 단물 적시며 양지뜰 푸른 꿈 꾸더니 어느새 바람을 이기고 이쁘게 세상으로 나온다. 아직 웅크린 벌 나비 날개 짓 처마 끝 매달려 앵앵거린다. 꼼지락, 꼼지락 양지바른 돌담 아래 키다리 쑥이 터진다. 어머니가 끓여준 쑥국이 문득 생각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이른 봄에 <봄이 오는 소리에> -중- 물이 오르는 봄날의 허박한 풍경화이며 의식을 풍경과 어머니를 그리는 방법은 서정시의 흔한 작시법이지만 실감으로 다가오는 일은 희소한 일이다. “꽃봉오리”가 “바람”과 싸우고 1연 2연 오면 “벌” “나비”라는 혼란스러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어머니의 추억이 개입되면서 상상의 나래로 펼쳐진다. 서길순 시인의 시는 전반적인 작시법이면서 그의 시적 정신과 의식을 투영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1) 삶에 깊이 모든 시에는 삶에 대한 호흡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 자신의 고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회라는 말은 낯설게하기라는 문학적인 기교를 뜻하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말이 되고 그 말은 감동의 방법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무늬와 같은 것이다. 그의 정서는 아마도 꾸밈이 없어 단조롭게 보일지는 몰라도 아주 깨끗한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구가 돈다. 중략- 빙글빙글 새 희망이 익는다 팔랑팔랑 벚꽃 익는 냄새가 향긋하다. <봄날의 패러디>-중- 모순으로 부풀려진 세상에서 자연의 섭리는 구분과 칸막이도 없이 잘도 돌아간다. 때문에 시인은 빙글빙글 띄어쓰기를 안해도 그냥의 의미를 구축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간의 구분일 뿐, 누가 가을이라고 하지 않아도 사계절은 오고 있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가? 다만 자연적인 현상으로 더불어 팔랑팔랑 벚꽃이 지는 섭리 앞에 숙연해지는 모습- 시인의 얼굴에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남으며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이를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개인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해와 달 끌어안고 우린 달렸다. 지구촌 너무 좋아 낮과 밤 구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략- <우리>-중- “우리”라는 의식은 분야가 다르다 해도 질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불평 불평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는 그의 삶에 적용된 의식이 투영된 것과 동일한 문제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의 시는 담백하면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이치가 대입된다. 2) 의식의 정감 시는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시의 무드는, 결국 시인의 정신 무드를 표현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시인의 정서는 다감성을 포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두루 관심을 나타내지만, 지극히 절제된 표정을 관리하는 것 같다. <엄마 얼굴,> <친구야 너는,> <옛 친구> 등을 보게 되면 주변의 지인이나 육친에 대한 정감이 다감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친구야 오늘 하루는 시원한 감로주 한 사발 거나하게 나누고 날 저문 고향길 함께 걸어가 보지 않으련? 나이테가 몰라보게 두꺼워진 네 눈망울 속에서 새 봄맞이 분주한 고향 땅을 그리련다. <옛 친구> -중- 친구와 감로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언이다. 우정은 곰삭은 맛처럼 깊이가 있고 따스한 체온이 교감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옛 친구의 우정을 찾아 방랑의 길을 터벅터벅 가는 것 같은 시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결국 도착한 곳은 고향 땅, 이는 친근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고향을 못잊어 하는 인간의 여린 심정에서 시인 또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굴을 그릴 수 있지만 결국 그릴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에 이르면 서러움 같은 밀물에 점령당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술래놀이 즐겁던 미루나무 아래로 가리라 돌아가리라 꼬까옷 반짝반짝 차려입고서, 고향 땅 산과 들녘이 반가이 다가와 벌써 내 곁에 있네.-중략- <귀향> -중- 추억은 늘 즐겁다. 왜냐하면 추억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여기서 어린 날들의 “술레놀이” 혹은 “꼬까옷” 등의 기억들이무리지어 “벌써 내 곁에 있네.”라는 생각- 생각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고향이 된다. 순수와 아름다움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어린 날들의 순수와 추억들이 어울려서 오늘에 다가온 이름- 추억 속으로의 여행은 정 깊은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풍경화이다. 이 풍경화는 바라볼수록 다정하고 깊은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며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점철 되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희망의 손짓을 보내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묘연함과 긴 시간의 간격 때문에 애절함을 더하는 요소로 인상을 장악한다는 뜻이다. 3. 자화상의 노래 “만추” “겨울 일상” “그리움” 등을 보게 되면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을 노래한다고 할까? 때문에 그의 노래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명상의 숲을 구축하는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아울러 생각하는 것만이 시의 몫은 아닌 것이다. 행동의 길을 안내하면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의 자리를 항상 견고(堅固)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서길순 시인의 시에는 생동감으로 포장된 정서가 신선미를 자극한다. 인생에 대한 발언은 때로 에피그람의, 목청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깊이를 갖춘 희망의 깃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감이 그의 시심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시에서는 고향을 회상하는 따스하고 안온한 이미지의 옷을 입은 시적 행보에는 즐거움이 따라오는 듯 하다. 다시 말한다면 서길순의 시는 노래로 부르는 자화상의 그림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모든 이들의 따스한 시상을 전해주는 시인이 되기를기대 하며 나의 숙제와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으며 나가려 한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제 7집{공정 정의 사색의 길}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9집 {무의식의 시}]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늘 평범하고 추상적 언어 감각이지만 시라는 특수성을 볼 때 이것은 곧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한 개성의 척도에서는 애매모호성이 너무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각주(脚注)가 많은 T.S Eliot의 황무지를 읽으면 그 나름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독자는 일단 난해의 딱지를 붙이며 돌아서는 것이다. 하여 우리 김소월의 시를 읽을 경우 쉽게 아는 척하는 이해가 문득 다가든다. 김소월이나 엘리옷은 분명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가치를 빛내는 점에서 달리 해석을 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경의 이상의 <오감도>를 명쾌하게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평론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황색저널리즘 <인기주의> 고착의 명성을 부추긴 일면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시는 시 같아야 하고 산문은 산문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각주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비유의 장치나 시 적 포장을 걷어내면 속살이 드러나는 의미의 맛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구상화가 있다. 대체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추상화의 숲을 거닐다 구상화의 밭으로 걸음을 옮기고 다시 추상 공간의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시도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질적인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으며 일테면 특징을 이루는 표정을 말한다는 점이다. 시인의 원고를 일별(一瞥)하고 난 느낌은 추상의 숲을 지나는 느낌이고 마치 이중의 기교가 특이하다는 인상이다. 이제 그 표정을 한번 만나보기로 하자. 시집 《골목길 서사》는 총 5부 100편의 시는 이길여시인의 의식 조감(鳥瞰)이 서사로 그린 듯하다. 서사란 현실의 특정한 시간과 과정을 시간의 앞뒤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 촉수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지는 듯 정서가 이어지고 묘미가 다채롭고 신비하다. <2. 길에서 만나는 추상의 표정> 바실리 칸딘스는 순수 추상 예술의 선구자로서 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키고 음악가 바그너의 선봉자로서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탁견(卓見)을 실천에 옮긴 추상 수채화의 화가이다. 정신의 고도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추상은 일종의 변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공로를 갖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만의 정서를 점과 선, 면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문법은 찬탄을 이어오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시에서도 이런 기법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 영역의 한 축을 감당할 때 일정한 자리를 갖는바, 시인의 창조 기법은 그런 측면으로 볼 때 가까움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산길 고당으로 돌아가니 이마를 맞댄 지붕 아래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고행의 삶의 소리가 내 마음 긁고 때마침 눈물방울 달고 서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눈길이 간다. 제 키보다 큰 담쟁이에 기대 한숨과 울먹이는 아이와 자아 속의 내가 함께 한다 그을린 마음 달래려 가까이 서서 미소로 그려 준다 양팔을 벌리고 선 아이의 그림자에 깃 고운 날개가 펼쳐지고 그새 배시시 웃는 눈망울 내 세상 어디를 크게 흔들었고 쉽사리 재울 수 없는 뭉근한 떨림에 선뜻 돌아서지 못해 서서히 거꾸로 걷고 있다. <산허리 천사의 눈> 중 시적 공간은 협소한 산골의 상징에서 화면은 거친 목소리와 더불어 고단한 삶의 목청에 담긴 아픔이 눈물방울 달고 나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과 울먹이는 모습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개입은 시간의 테이프를 먼 곳에서 가까이 화폭을 전환하는 기법을 구사하면서 위로의 승화가 천사의 날개를 그려주는 그림 속에 펼쳐지는 날개의 바람으로 “그새 배시시 웃는”에서 현실 공간에 화려한 채색이 마음 밭을 보여준다. 시의 기교나 그림의 기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할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경계가 없음에서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재미는 시인의 능력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서의 파편들이 부유하면서 언젠가 결합하는 요소로 작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대상의 표현은 시인의 심리적인 경과에 따라 특징이 드러난다. 가령 습작기에서 원숙기로 들어가는 도정(道程)마다 삶의 굴곡이 들어 있으며 이를 심리적인 기제(基劑)로 나타낼 때 추상의 묘미는 복잡을 단순화하는 형태로 정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액센트릭 한 요소를 배제하고 화면 내에 형태적 질서에 예술의 자율성을 구성한다. 결국은 시인의 정서적 특징과 정신의 자유 구가에 한몫을 다하는 에너지의 창출일 것이다. 시인의 정서적 공간을 추적해 보자 잘 달구어진 여름 한낮의 길을 신기루가 덮는다 그 속으로 영혼의 무게조차 가누기 힘에 부친 누군가가 그늘을 거느린 나무에 기댄다. .... 약....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더 울어야만 나를 한 겹 누구를 위해 벗어낼 수 있을까? <매미의 여름 나기> 중 전반에는 객관적인 서술이고 후반에는 주관적인 이미지가 작동되며 전반엔 보여주는 것으로 풍경의 느낌을 독자가 용해시키거나 아니면 간과하거나 유념할 사항이고 후반엔 매미가 곧 시적 화자인 ego로 들어오는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둘의 교합에서 자기를 대입하면서 사는 일이 이치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이 기교는 선명한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또렷한 비교 가치로 승화한다. 이 시인의 시는 그냥 무심코 읽으면 혼란이 올 수 있으나 다시 깊게 읽으면 네거티브 필름에 빛을 쪼이면 포지티브(양화)로 선명한 윤곽이 나타나는 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이를 이해하느냐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3. 메신저의 굴레> 새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으로 옛날부터 고귀한 존재로 인식을 키워왔다. 애 그런가 하면 인간은 늘 하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 하늘을 지향하는 정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향하는 꿈의 이름이기에 비행기는 다시 로켓이 되고 미사일이 되면 이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있고 달 혹은 화성이나 우주의 유영(遊泳)에의 꿈을 실현하는 시작의 실마리는 바로 새에 출발점이었다. 밤나무를 집으로 정한 새들 잠에 취해 뭉그적대는 나를 알람보다 먼저 깨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나와 나뭇가지를 건너 딛고 제가끔 넘놀며 재잘거리며 새들을 쫓는다 서로 깃을 다듬어 주다 한 마리가 가지에 걸린 햇살을 쪼아 먹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하고 나도 눈 시늉을 한다. 시나브로 입꼬리가 슬몃슬몃 올라가도록 내 마음도 몰랑몰랑 해진다. 순한 생명들의 열어 놓은 새털 같은 아침에 마냥 빠져들어 짝다리 짚은 다리에 쥐가 놀아 옴짝 못하고 서 있다. <하루를 새와> 1연에서 새와 나는 부지런한 새의 울음이 깨우는 관계로 이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취하기 때문에 새는 자기 생존 방법으로 일어났지만, 시인으로 다가온 의미는 잠을 깨우는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시에 2연에 따르면 새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아침의 동반자로 설정되어 사이좋은 새들과의 관계에 시인 또한 동화되어 새의 행동에 동반자로 변한다. 이러한 감염(感染)의 정서는 “몰랑몰랑”해지는 마음의 상태는 새로부터 받은 정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하면 새들이 열어놓은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망연함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림으로 걸린다. 새와 시인의 관계망은 “좋음”을 유지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보폭이 시작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는 모르나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끌어내는 논리를 굳이 설명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혹은 사물을 노래하는 자이지 해석을 하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요하여 누군가 떠올리기 맞춤한 풍경이다 갑자기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인정사정없이 톡톡 터지는 기억들은 입가에 한숨을 몰고 콧등이 매워지게 한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잊었다 여겼던 네가 살고 있었다. 멀고 먼 시간을 돌아 내게로 오는 사람 하나 있다. 하여 나는 기억의 불을 밝히려 눈 한 움큼 뭉쳐 설 등 하얗게 매달아 놓는다. <기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바람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바람한줄기 무심히 지나가고”로부터 의식의 창문이 열리고 이로부터 물길이 터진다. 그리하여 잊었던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존재의 이미지로 환생하면서 나와 관계의 과거가 문이 열리게 된다. 즉 그 사람의 모습을 인지할 때, 이 시의 모티브는 바람의 촉수가 일깨워주는 시발점으로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동하는 역할의 바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면의 세계를 깨우는 바람에 의해 외부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달자가 곧 바람의 힘이 될 때 시인은 비로소 길을 꺼내는 시작이 작품으로 창조의 길이 나타난 셈일 것이다. <4. 에필로그> 그의 시 “어떤 그리움” “희망 사항” “기억을 찾아” “하루를 새와” 등을 보면 창조의 기법이 액자(額子) 기법이 있다. 풍경을 그리고 다시 그 속에서 풍경이 들어 있을 때, 감상의 묘미가 길을 넓힌다. 시는 꽃과 자연의 모습이 보이고 향기가 하늘로 오른다. 이는 연상의 꼬리가 따라 이어질 때 풍경을 만들고 다시 전체의 풍경이 아름다움을 생성하면서 여운(餘韻)을 남긴다. 이런 특징은 시적 강조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지배소가 되는 사물 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아름다움의 연출은 언어 감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모자이크로 짜 맞추는 미감은 성숙의 시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시로서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그리고 심중의 깊이를 풀어내는 기교는 곧 언어의 운용에서 탁월한 미래를 기대하는 요소가 되면서 창작의 시를 “액자 시” “사물 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높이 사고 싶다. 삶의 고귀한 가치가 빛으로 승화하는 상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펜을 내려놓는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이승섭 제 8집 시의 숲에 빠지다.] [이승섭의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타시(ecstasy) 의 경지 즉 입신의 경지를 방문함으로써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홍 시인에 감수성의 줄기와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 시인의 자아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시에 허무 자아의 허기 사랑 의미 찾기> 1) 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 시인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 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부모의 마음>-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마음에 들여져 있다고 보인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오기에,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를 사고와,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 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특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하거나 의견이 엇갈린다. 불교에서는 자식이 20세 성인이 되었을 때는 간섭과 조종을 하지 말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성인이 되면 의식의 자체가 뚜렷하게 가치관이 서 있기에 가능하면 자식이 하도록 지도하며 묻는 것, 또한 부모에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에만 조언 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부모는 더욱 시련의 아픔과 고통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뿐만 아니라 가치관이 다른 생각의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부모, 자식 간에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늘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숫자에 노작 거리에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은 아픔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품 안의 자식을 버려본다. <모정의 갈등>-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해결이 가능할 것인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자식 사랑>-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보듬어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가 대부분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과 모성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 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 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생)(生)>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 되는 것이다. 홍 시인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 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 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창조주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 일진데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페달 <삶의 바퀴>-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에 가속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절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과 질펀하게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 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 보인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 시인은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사랑> -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 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본다면 이는 홍 시인의 사랑에 담긴 상처는 겉으로 내보이기에 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끼는 것 같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압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고 바람이 있지만 긍정의 마음으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은 아닐까도 보인다. 그렇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 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않을까, 한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함을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기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의 사고 자신의 자아를 내면에서 승화 시키며 관조의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2. 05. 29.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말하는 시 사람이란 말로서 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 허나 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 한편의 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무의식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왜냐하면 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함께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더 아파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그러나 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필 때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 지는데> 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 시화 되었으며, 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더 아파’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속을 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움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긴밀도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고 있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같을 것이다. 겉으로 같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 놀랄 일은 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유종필은 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 속 몸짓으로 하나일 것 싶은데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 맨 가슴에 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 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발동하는 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이 나게 하는 인자(因子)는 늘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 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일 것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이 된다. 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 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그렇기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와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 날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 닮은 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 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 열린 마음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면 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 자아(ego) 찾기 나를 찾는 것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 종점이라고들 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 놓았는데 ... 중략 ...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 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 뒤집어쓴 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 감동으로의 호소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 꿈속에 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 여정?> 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오욕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 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물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고 다만 날개짓이, 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의 삶에 서 있는 듯 하도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 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 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가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 오는 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 시인> 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에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 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 완료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 마무리 해줄 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1] [대중문화평론가 이승섭의 인문학 시평집 베스트셀러 책 2] [-공정, 정의 사색의 길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이란 역시 무엇일까? 별안간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닐터 - 이런 물음에 필자는 역시 운명론적인 개입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평행이론이란 서로 다른 시와 글, 공간안에서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람의 운명이 같은 식으로 반복되는 것은 아닐지 - 인간의 삶이란 모두가 다른 개성으로 살아갈지라도 삶과 죽음이라는 도정(道程)앞에서는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생명이 테어나고, 자라면서, 학교, 그리고 청년을 지나 장년 그리고 노년을 거치는 과정에서 생의 삶 형태는 거의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특수한 사람의 경우를 본다면 아브라함 링컨이나 케네디의 경우가 일치한다고 할까 독재자의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야심과 정복욕이라는 과욕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공간에서 반복의 횟수는 언제든지 나타날수가 있으며 이런 반복은 인간사나 우주의 질서라는 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상의 논리는 유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실 오늘은 어제의 복사판이고 현실은 과거의 되풀이라는 가정이 틀렸다면 존재의 이어짐은 단절되고 맥이 사라지는 답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명칭과 사건의 성질이 약간 다를뿐 본질에서는 다름이 없는 비유가 될것이기에 -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연속에서 변화일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경우 우연의 일치라는 말로 정리하기엔 너무 많은 시· 공의 대입이 지난(至難)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인간의 지혜로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의 소급은 사실상 물리학의 어려운 숙제 풀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서의 시선의 확보와 정리가 어려운 것은 단순히 지혜만으로 가상의 정리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차(時差)를 두고 주기적으로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에는 많은 경험이나 체험으로 인지(認知)할 수 있을 것이다. <설2>숙명적 표현에 유사성 문학의 표현은 인간의 삶을 전기적으로나 통시적으로나 문자로 포착하는 점에서 복사본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음을 대부분 알 것이다. 도플갱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복사기를 돌리면 똑같은 현상으로 출현하지만 사실 엄격하게 분석하면 유사한 것이지 아주 같다라는 단정은 아닐 것이다. 이점에서 패턴의 반복은 문학의 숙명적인 이름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문학의 내용은 삶의 기록이기 때문에 언제나 유사하게 나타나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춘양전>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도 본질에서 유사한 사랑의 내용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서 굴곡을 이루면서 마침내 사랑의 종점에서 이를 경우는 같은 내용이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 등 반복의 패턴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랄하게 말해서 창조라는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에는 유사한 복사라는 말이 더욱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일생이라는 총론에서 가지가지의 각론이 결합하여 전체의 맥락을 이룩할 때, 감동이 나타나고 기억을 새롭게 윤색하는 일이 작가의 임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나는 아버지를 닮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등 사다리 위로 올라가면 삶을 이룬 길은 같지만, 시간과 공간의 다름이 무대 장치에서는 다르게 처리 되는 것이지만 본질은 하등에 다름이 없는 반복이 문학의 표현 양상일 뿐이다. 2. 평행의 본질 – 이미지 평행론 삶의 진전이 시작되면서 이미지라는 것은 너무나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간의 소통을 전제로 필요한 만큼 의사 전달의 수단이 직접적인 것에서 간접적인 방향으로 필요를 갖고 전달의 평이성이 나타나는 길이 다양해질 때, 비유에서도 직류와 은유 혹은 상징이나 알레고리 등의 다양한 전달의 방편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활의 발전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겠다. 단순한 구상적이라면 추상은 좀더 미묘한 감정의 갈래가 다양성으로 나타난 것을 암시한다. 서로간의 소통이 둘이 있을 경우와 셋 이상의 복수의 집단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은유적인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아마도 고향이나 어머니 혹은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많은 빈도의 비유물이 될 것이다. 1)사랑 평행 사랑은 인간의 원형적인 공간으로 자리잡는 개념일 것이다. 이른바 soul와 anima와 animus의 상반된 현상도 복잡에서 의사 소통의 길을 마련하는 일이라면 태초이래 인간의 문화는 - 우주의 질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랑은 생명체의 본질을 추구하는 먼 개념일시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소설의 줄거리는 사랑을 떠나서는 성립 불가의 판단이고 시(詩)또한 궁극에 도달하는 목적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원형을 찾아 나서는 여정일 것이다. 이광수의 {사랑}을 위하여 {춘향전}의 이야기 질서는 사랑을 이루는 과정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이 삼각형의 구조이든 단순 구조이든을 막론하고 마침내는 사랑의 종점을 이르러 행복을 갖는 행복한 결말과 불행의 결말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현상을 막론하고 사랑을 운위하는 줄거리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근본은 생식적인 사랑, 즉 종족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이성 간의 사랑이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출발의 원형인 것이다. 그러나 살모사(殺母蛇)에 이르면 생각을 멈추게 된다. 테어난 자식이 그 모태의 어머니를 잡아먹는 일 – 그러나 본질에서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여름에 무성한 나뭇잎은 가을이면 떨어지고 다시 봄이 되면 그 자리에서 새싹이 나오는 나무들 – 상수리 나무는 그 모태를 떨어트리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싹이 나온다. 형태만 다를뿐이지 살모사나 인간이나 혹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에는 그 어미의 뒤를 이어 존재가 이어지는 길이 있다. 우주의 질서 속에서 미지(味知)를 향하는 길에 변화를 체험하는 일은 곧 원형질에서는 똑같다 하겠지만 장소와 시간의 배열이 달리 설정 되었을 때, 신기함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는 인간의 문화현상 - 원형의 속 깊이에서는 본질이 한가지의 원리가 나누어지는 길을 문화의 발달 현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인간의 숩관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대칭 평행의 서로 다른 개성의 존재 - 양성이나 음성 혹은 여자나 남자 또는 밤과 낮의 나눔에 따라 인력(引力)현상이 본질의 중심이라 하겠다. 사랑은 일종의 끌어당김이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면 행복이 되는 희극이지만 멀어질 때는 비극이라는 거리가 존재한다. 이 거리를 위해 밀고 당기기가 진행되는 관계망은 항상 구성으로서의 전개양식을 가질 때, 사랑은 풋풋한 뉘앙스로 작가의 마음을 이끌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수없이 고개를 저어도 다시 정지되는 그 얼굴 단한번의 미소에도 환한 마음이 끄덕인다. 미워도 사랑 싫어도 사랑 그 말 한마디 사랑 깊은 내 살 속에 박힌 사랑 수없이 고개 저어도 당신 가슴속으로만 파고 들어가니 이 깊은 사랑 어찌 하오라까 ? 졸시<깊은 사랑>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語義)이다. 그라나 이 보편성 속에서 갖ㅇ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소박하고 질박(質朴)한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다. 모든 시인들은 가장 흔한 사랑을 소재로 신비의 길을 찾으려는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에는 자화상을 만나는 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일 때는 고독의 물살에 잠길 것이지만 너와 내가 하나로 모아질 때는 전혀 다른 나를 만나는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그 때문에 사랑을 노래하는 마음이 많은비중을 차지하는 시의 내용은 비록 뻔한 내용일지라도 호기심을 가지고 나와 연결하려는 동경의 발동이 시작된다. 은유나 비유를 치장(治粧)의 무기로 삼는 그 속살을 꺼내보면 본질은 이성간의 혹은 대상에 대한 나의 연결 고리를 만들려는 발상이 시작된다. 대상의 광범위한 사랑의 설득은 다음의 예로 보편적인 사랑의 범주가 시작된다고 볼 수가 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하드라도, 온갖 신비를 꿰뚤어 볼 수 있는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생략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신약성서 고린도 전서> 중 모든 것을 나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나로 끌어드리는 희생의 마음이 담겨질 때, 사랑의 힘은 위대한 힘을 갖는다는 뜻일게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데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은 신비의 에너지를 갖고 초월적인 강인함을 나타내는 법칙이 따라온다. 굳이 이성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혹은 남과 나 또는 사제지간 등 관계망이 설정되는 모든 관계를 언급하는 사랑은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으로 테어났고 사랑으로 자라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길에서 방황하고 사고하고 더러는 사랑의 영역을 벗어나는 비극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사랑을 선택하는 방법에서 행운과 불행의 갈림길이 나타날 때, 지혜를 동원하는 삶이 피요한 요소가 소이(所以)가 남게된다. 사랑이 아프길래 어디갈까 망설이다 병원에 들려 어디 아프냐 묻는 Dr. 문진에 마음이 아프다 말하니 청진기 이리 저리 심장의 소라 들어도 답을 못찾아 처음 보는 병이라 음식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라는 처방에 가물거리는 아픔 찾지 못해 사랑은 병이 아니고 마음이 병이라 체념으로 돌아서는 시야에 햇살이 따라오면서 눈이 부십니다. <마음의 아픔> 중 사랑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에서 방황인지라, 정리 혹은 안착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어떤 상황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이라는 의미는 저마다 다른 개성의 품성에 따라 이룩되는 것이라 모양은 달라진다는 이미지일 것이다. 마음이 즐거운 상황과 마음이 아픈 상황에는 전혀 반대되는 길에 사랑의 이미지는 분기(分岐)한다 그러나 시는 역설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드릴 때, 오류가 발생한다. 가까이 보이는 사물이 때로는 멀리 있을 때, 실루엣의 아름다움은 더욱 환상과 환영을 자극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일종의 안개 숲에 들어있는 만질수가 없는 대상일 때, 그 아름다움을 실제로 붙잡는다면 실망으로 질펀해지는 것이다. 물론 아픔은 길고 기쁨은 짧은 시간의 선상에서 어떤 지혜로 스스로를 알아가는가는 시간과 개성과 인내심이 결합하여 비로소 일정한 패턴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사랑은 상상의 울림을 주는 것만은 아니며 때론 아픔과 동반되는 산맥을 높이 세우는 걸림일 때, 그 산의 높이만큼 인내의 지도가 그려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2) 고향 평행 고향이란 “제가 나서 자란 곳” 또한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라 사전은 정의한다. 이는 현상(現像)으로 말하는 의미일뿐, 마음이 지향하는 뜻과는 상충되는 점이 많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인 의미의 고향이지 정신의 본질과는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너무 협소하고 태생적인 한계만이 고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고향”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①포근함 ②다정함③그리움④안타까움의 4가지유형으로 정신을 지배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포근함이란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아늑함의 정서가 길게 간직되는 인자(因子)로 가슴을 채우는 이유가 잠재되며 온화하고 꿈 쏙 같은 평안 속이다 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다장함이란 친근미의 정서가 깊게 드리우는 인자(因子)로 마음을 채우는 이유일게다. 사실 명쾌한 설명이 불가함도 사실이지만 논리 속에 또 다른 논리가 담겨있는 양상으로의 정신적인 그림이 될 것 같다. 세 번째는 그리움의 요소는 다정과 그리움의 이유 또한 밀접한 상관으로 접속된다. 때문에 고향은 어머니의 이미지에 닿지만, 이는 지명의 이유가 아니라 마음이 지배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리움의 종적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는 사실 불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답을 찾을길은 없을 것 같다. 마치 안개 속에 들어있는 어릿거림과 같은 이유는 네 번째인 안타까움과 연결된다. 이는 거리(距離)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실상을 만지거나 붙잡을 수 있다면 안타까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붙잡을 수 없는 거리의 문제 때문에 마음에 초조증이 발동되고 그리움과 안타까움과 다정함, 포근함이 연결되면서 고향의 길이 아득함으로 정신의 지도를 그린다. 실제로 고향을 붙잡을 수 있고 땅을 밟고 있다 하면 감각이 발동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떠난 거리와 시간의 상관이 만들어내는 증세가 곧 고향의 정신적인 문제호 등장할 때, 항상 마음 속에서 떠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힌점 꽃이 안정스레 웃고 어린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잎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고향(故鄕)> 정지용의 <향수>와 <고향>은 기억의 재생산이 가져오는 허무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향이 안타까운 거리의 좁힘 - 돌아와서 바라보고 생각하니 예전에 고향은 이미 사라진 아픔이 발설된다. “산 꿩” “뻐꾸기”는 예전 그대로인데 반해 “머언” 항구로 떠도는 이방성이 자리잡은 안타까움이 그리움의 길을 애절하게 재촉한다. 하여 “메” 산 끝에 홀로 올라 회상의 장면을 펼치는 시인의 마음에 위로의 항목은 꽃이 웃는 이미지를 대면해도 쓰디쓴 입맛 = 변화앞에 설명이 부재한다. 이리하여 정지용은 고향에 돌아갔지만 예전의 고향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공허의 방향이 애절성을 재촉한다. 백석의 <고향.1938>은 사투리 그리고 토속적인 정취가 시인의 개성을 발휘 하는 것 같다. 김소월의 고향 인식이나 백석의 고향의 개념은 동질 의식이고 정지용은 상실이라면 둘의 공통성은 그리움이라는 애절성에서는 다름이 없다. 인적(人跡)이 끊긴 산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김상용>< 향수> 월파 김상용의 고향은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로 부유한 한의사를 부친으로 둔 일본 유학생이었으나 일제 침탈로 인해 상실감의 고향 의식이 그의 시(詩)의 정석을 장악한다. <향수>나, <추억>등의 많은 흔적이 시집<망향>의 애절성의 원인이 과거지향의 아픔이 작동된다. “있지만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라는 고백에서 시인이 느끼는 부재의 의식은 언제나 안타까움이 그리움으로 연결을 형성할 때, 그의 노래는 처절한 아픔이 길을 잃었으니 정지용의 정서와 상통되는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밤이면 잎사귀는 한국어로 다독이며 상처를 치유하는데 올해 겨울은 너무 서러워 눈꽃마저도 잎사귀를 붙들고 울었다. 그 울음은 일본어인데도 이웃 사람에게는 한국어로 들려 꽃마저 잘리는 슬픈 겨울이었다. <왕수영><슬픈 겨울>에서 오랫동안 일본에 거주하면서 한국어로 시(詩)를 쓴 시인 왕수영의 감수성이 애달프다. 국내에서 느끼지 못한 고국에 대해 사고는 항상 떨어진 거리와 시간만큼 절절하고 애달픔이 출렁이는 점에서 아픔이다. 며칠동안의 외국 여행에서 돌아와도 새삼 반가움을 느끼는 것이 보편적인 심사 일텐데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삶을 영위하는 마음이야 새삼 필설이 딴청이 될 것이다. 신화의 이론에서 겨울은 악마적 이미지로 상징을 갖는다. 이는 비극적 양식의 비유에서 시인의 정서가 축자적(逐字的)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그 상징 속에 감추고 나타나는 의식이기 때문에 겨울 속에서 살아온 의식이 슬픔으로 정리된다. 모든 시인이 많은빈도로 고향을 노래하는 이미지는 한결같이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상실에서 오는 감수성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도 그런 상실은 추억의 장면을 되살리려는 점에서 또 다른 측면이 인식을 치장한다. 그리하여 고향은 추억을 장식하는 페이지의 가장 앞자리에서 장면을 다양하게 연출한다. 왜냐하면, 많은일들이 얽혀있고 그 얽힘의 실마리는 이어 이어서 오늘에 이른 거리(距離)가 멀리 있지만,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담겨진 저장의 기억이 오늘의 시간 앞으로 출몰하기 때문이다. 동네 큰 마당에 아이들 소리 왁자그르하다. 골목 시장에 나온 재벌가의 새파란 며느리 바구니에 콩나물 사들고 가는 저녁이다. 시락국 된장 끓는 냄새에 밥물 넘는 소리까지 딸각거리는 모두가 고스란히 풍경이 되어 몽당 치마의 언니는 젖먹이 동생을 업고 가는 집집마다 놀기에 참적한 아이 불러들이는지 붙돌아 곰순아 마당쇠야 해드기야 늦둥아 어머니는 또 동생 이름을 한참 더듬거리고 어스름 치마 밑에 불빛 후루룽 날아다니다. <김석규><낙원기행> 시(詩)는 그림의 연출이 또 다른 축을 형성한다. 김석규의 시의 상당 부분이 과거의 풍경이 소재로 사용된다. 이는 과거지향에서 오늘의 꿈과 현실을 대비함으로써 인상 효과를 자극하는 기법일 수 있음이다. 그러나 문학표현의 강조점은 미래, 꿈 그리고 사랑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뒤로 가는 인생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골목의 왁자그르르한 아이들 소리와 콩나물 시락국 밥물 소리까지가 전반의 6~70년대의 풍경이 되고 - “재벌가”의 며느리는 당시와는 이질적인 비유의 이미지 –후반의 풍경은 카메라가 어느 아이 많은 집의 정경으로 일종의 Panning Shot으로 들어간다. 가난하지만 많은 형제의 왁자한 소란에 어머니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필름을 뒤로 돌리면 나타났던 우리의 어럽고 힘들었던 가정 풍경이었으니, 이름 더듬을 정도의 자식 많은 어머니의 안쓰러움이 눈물길로 가는 모습같다. 아무튼, 이 풍경 속으로 가야 하는 시인의 마음은 확고한 신념의 기둥이 되는 정서의 길이 분주해진다. 시인의 고독이 안정감을 찿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뜻이 담겨지는 듯하다 <김석규 론> 그 당시 사실 전쟁의 참화(慘禍)이후 살기 어려운 가난한 풍경이 파노라마로 연결될 때,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필름에는 참혹한 정경이 시(詩)의 비극적인 무드를 장식한다. 그러나 시는 과거만을 노래하는 가락이 아니다. 일종의 carpe diem the 즉 seize the day를 말한 호라티우스의 송가 14번의 노래처럼 희망과 꿈을 가져오눈 도구로의 인유(引喩)에 소속되는 점이 아닐까 한다. 3) 어머니 평행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언제나 밋밋하다. 왜냐하면, 가장 엄밀하고 정확한 필요에 의해서 출발하는 것이 사전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여자”를 국어사전은 뜻을 풀이한다. 이말은 드라이 하고 정감이 없는 말로 설명되지만, 막상 어머니를 연상하면 따스하고 포근하며 정다워 잠들고 싶은 느낌이 어머니의 이미지로 다가든다. 이는 시적인 뉘앙스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다정의 이름과 가장 친밀한 정감으로 시화(詩化)된다. 이는 모든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모태의 근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이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께 있음과 부재의 두가지 구분에 따라 시의 토운은 달리 표현되지만, 근본적인 상징은 그리움, 따스함혹은 애달픔으로 압축된다. 2차대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마닐라 해안을 향해 함포사격을 하려고 할 때, 한 해병의 옷이 바다에 떨어졌다. 상사가 말렸으나 그 해병은 물에 뛰어들어 자기의 옷을 건졌다. 그러나 상사의 명령불복죄로 군법에 회부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사법관 듀이 장군이 왜 물에 뛰어 들었냐고 하니 그는 젖은 옷 속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본 듀이 장군은 감동하여 그에게 악수하며 “어머니의 사진 때문에 이처럼 희생정신을 발휘하였음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한 계급 특진을 시켜 주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먼의 사랑은 위대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까지 어머니의 사진을 건져낸 것이며 그 결과 억울한 죄면에서 풀려났을뿐 아니라 특진까지 했으니 얼마나 어머니의 사랑이 큰 것인가는 우리가 예화로 알고 있다. 이어령 편저 <문장대백과사전>에서 어머니의 사진이 곧 목숨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어머니는 조국이라는 등식과도 어울리기 때문에 장군은 이를 알고, 죄를 묻지 않고 희생정신으로 의미를 받아 드린점은 사병이나 장군, 둘다 위대한 정신의 깊이를 갖고 있다 하겠다. 인간은 우매와 깨어 있음에 따라 부모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지만, 불효라는 말은 아마도 인간만의 경우에 해당 될 것이다. 이는 부모를 버리거나 무시하는 경우 무지의 자기를 투영하는 효심이 감동을 낳게 된다. 동식물 등 모든 존재는 근원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살아 가고 있다. 이는 삶의 원천에 이르고자 하는 본능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동물을 소재로 쓴 시의 경우를 한번 들여다 본다. 깍아 세운 듯한 삼방 고개로 누런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꾸부러진 두 뿔을 들이먹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음머 음머 하고 연해 고기를 뒤로 돌릴때에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한걸음 올리곤 또 올려 움머!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사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말아 떼어 주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세포(細浦)검불랑(劒佛(浪) 길은 끝없이 서울에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둔 고산(高山)땅, 소는 못오네 이광수<서울로 간다는 소> 1926년 10월 <동광(東光) 제6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의미상 두 단락으로 소가 떠나는 슬픔의 모습과 두 번째는 시인이 제3의 눈으로 비극적인 이별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굳이 일제 치하를 염두에서 제거해도 어미소와 송아지의 이별이 아픔으로 오버랩된다.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는 슬픈 행렬과 시대고(時代苦)의 상황이 겹치는 것 같다. 소나, 개, 돼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모정을 벗어나서는 존재의 근원이 없다. 이는 사랑이라는 원심력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을 한다면 태생적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필연이 내장 되었음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모든 작가는 휴머니즘을 어떻게 펼치는가의 생각에 일관성을 사상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광수는 확실히 휴머니즘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왕성하였지만 그의 문학적인 말로는 어긋난 잠시의 행위가 아니었다면 위대한 문호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광수의 문학을 깊이 이해한다면 그의 어린 시절이 아픔과 비극적인 상황을 대입하면 이해의 길이 넓어지는 것도 사실일 것 같다. 이광수만큼 문학적인 넓이와 깊이를 간직한 작가는 대한민국 문단에서 희소(稀少)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에 말발굽 아래 무릎을 꿇고 “세계의 양심이 온다.라 말한 괴테나 간디 – 열혈청년 딩그리 비판이나 카스트 제도의 옹호나 1차대전에서 영국의 총알 받이로 징집에 찬성했던 일이나 토지개혁을 반대했던 일을 파묻고 좋은면만 부각한 인도의 경우 - 우리나라의 가혹한 판단으로 묻어지는 작은 흠결 앞에 게거품을 만발하는 풍토에서 이광수의 문학은 결국 우리의 문학적인 아픔의 표상이 되었다. 아마 섹스피어가 우리나라에서 글을 썼다해도 작은 모순의 발견에는 비난으로 도배될 것이 명(明若觀火)하다. 굳이 이광수를 옹호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이 땅에 풍토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작은 죄를 짓지 않고 일생을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용서와 화해의 바탕이 없는 절대의 부정은 결국 스스로 자기를 함정에 빠트리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음은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손실이고 불행의 연속편이라는 뜻이다 좋은면 그리고 업적위주의 평가가 문학사에 절실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엄마가 준 품이 아늑하고 따스하여 나는 펄펄 날리는 눈발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날 금강의 살얼음은 하얀 눈이 하루종일 내리고 있다. 졸시<엄마의 품> 공간이 겨울이고 눈발이 온 세상을 추위와 점령할 때, 엄마의 품은 보호막이 되었고 차가운 겨울의 신산(辛酸)한 역경을 감싸주는 엄마 품, 그 품은 우람하거나 듬직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 갸날프지만 따스한 품에서 전달해주는 체온의 안온함이 곧 엄마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기억의 문을 열고 다가드는 느낌이다. 10개월동안 태내(胎內)에서 세상에 알리는 울음과 자라나는 긴 시간의 능선을 타고 비로서 성숙한 지경에 이른다 해도 혹은 죽는 날까지 엄마의 기억은 떨어질 수 없는 절대의 상관을 갖고 살아가는 운명 - 추위를 현실의 엄정함으로 치면 그것을 보호하는 희생의 표상이 대칭을 이루면서 엄마의 사랑은 곧 나의 삶에 중추적 역할로 이해되는 느낌이다. 물론 나만이 아니고 보편적인 생명체에 해당하는 사랑의 희생이 고귀함으로 승화되는 사랑의 정신이 곧 엄마의 표상인 것이다. 3. 에필로그 늘 삶이 반복되는 일은 우주의 질서(秩序)일지 모른다. 아니 우리네 생의 삶이 언제나 그렇듯이 평행의 선을 그으면서 살아간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현실을 나타난다는 점에서 평행은 일상적이지만 이 것이 주기적 혹은 상당한 시간을 소요한 뒤에 반복(反復)되면 인간은 새롭다는 호들갑을 부여한다. 어제의 태양이나 오늘의 태양은 변함이 없이 우리앞에 와있지만 – 이는 우주의 질서의 개념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는 신기함을 추가하려 한다는 점이다. 모든 작가나 시인들이 소재로 선택하는 가장 중추적인 소재는 사랑과 어머니 그리고 고향을 빼고 나면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그 대답은 참으로 궁핍하고 궁색한 이유가 될 것 같다. 이런 절대 필요의 반복성에서 평행의 이론은 근거를 갖고 있다. 다만 줄기 혹은 뼈대를 이루는 중심이 사랑이나 고향 또는 어머니일지라도 약간의 가미된 잔가지의 다름에서 개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구 조건이 평행 이론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행 이론이란 근간을 잊는다면 시와 글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평행이론이는 뜻이다. 202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기묘한 자연의 신비]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이승섭시인] 매쉬 아널드는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시(詩)라 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결국은 문학의 임무이자 사명이라는 명제 앞에서 종교는 인간 사랑의 헌신에 목표라면 다양한 의견이나 사고는 화려한 문학의 정원을 이룩하는 것에 한국문학도 서로 사랑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문을 열어야 할 보편적인 소명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마음이란 정신을 나타내는 창구이고 정신은 마음을 움직이는 중추적인 기능을 하기에 마음과 정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로 통합된 의식이지만 때론 서로 다른 몫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신보다 마음에서 행동으로 전환되는 길이 빠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정신의 중심보다 마음은 쉽게 변하는 과정에 쉽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신의 줄기가 있고 마음에 가지로의 역할을 하기에 쉽게 적응할 수 있지만 정신은 오뇌(懊惱) 고뇌(苦惱)를 통해 마음을 조종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채가 마음에 반응하는 것은 마음이 앞서고 정신은 뒤에 호불호의 선택으로 남는다. 정신이 없다는 말과 다르게 마음이 없다는 말에는 거절의 뜻이 함축되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색은 민족마다 결정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은 황하강의 영양으로 황색은 정색이고 우리는 신분 차이에 따라 백색은 백성(피지배층)의 옷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시대는 3가지로 색을 구분하였고 집의 칸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100은 완전의 개념으로 왕의 소유라면 99칸은 신분 높은 신하의 집을 상징했다. 색채 또한 이런 원칙에 의해 백색- 백의민족이라는 말은 하층 백성에게 허용된 옷의 색에서 유래했다. 흑심은 백색 바탕에서는 금시 나타나는 번역의 상징 개념을 띠게 된다. 신석정의 시는 푸른색으로 자유정신을 나타냈고 그 구체적인 암시를 보면 별이나 꿈으로 형상화된다. 신석정의 첫 시집 『촛불』은 30년대 어둠의 일제하에서 어떻게 시인의 의식이 빛 혹은 색채로 지향하는 진로를 설정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상징적인 절차를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운모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그 어느 먼 성좌를 넘어 드니 푸른 가을의 대낮을 하얀 달이 소리 없이 오고 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가려는 바둑돌처럼 흰 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디다 남국의 노란 은행 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까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디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조름 짓는 너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횐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 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중에서 이 작품에서는 많은 색채를 동원했다. “푸른 하늘”의 청색과 “횐 달”의 백색의 대비와 “밤의 어둠 그리고 ”푸른 별과 “ ”노란 은행잎“ ”바람“ ‘붉은 감’ ‘석양하늘’ ‘까마귀’ ‘맑은 소리’ ‘하나, 토끼’ ‘어머니’ ‘숲길’ 등 신석정 시인의 색채가 저의 전부 동원하였고, 구체적인 시어가 망라되어 나타난다. 공간은 가을이고 이동의 메시지를 통해 어둠에서 별이 있는 곳으로 진행하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무드는 다소 쓸쓸하고 나이브(naive) 할 뿐만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나그네 의식을 발동하는 정서가 내포되고,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려 하는 생각이 먼 길로 설정되어 시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신석정은 푸른 하늘과 노란 은행과 바다, 하늘 등 많은 시어에 색채를 담아 자신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는 시인의 정서가 지배하는 심리적인 현상을 뜻하지만 신석정 시의 독특한 입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푸른 하늘 그리고 푸른 숲과 푸른 바다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어딘가 깊은 공간을 지향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어머니 즉 어둠이 모태 의식을 지향하는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황혼을 예비하면서 별이나 꿈을 마련하려는 – 신석정의 순진무구한 정서는 때로 나약한 의식으로 유추할 수도 있지만 깨끗함이 곧 아름다움이고 순수가 곧 평화와 안식으로 연결되는 의식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신석정의 패턴은 A 자유 의식의 B. 이동의 이미지 C, 황혼의 진입 D. 어둠=어머니 혹은 꿈으로 연결된다. [2. 기본 정서의 줄기] 1) 자유 의식 시인은 자유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이미지 선택에서 의도를 나타낸다. 물론 의도는 때로 주제를 선명하게 구사하는 핵심적인 발언으로 다가드는 듯하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바로 독특함으로 형상화한 자기 발언이 시적인 방법으로 발언될 때 – 시는 항상 긴장과 긴축 그리고 함축에 따른 언어의 탄력을 위한 상징에서 시인의 말은 숨겨져 있어 순박하고 검소한 혹은 질박한 표정이지만 그 내용엔 다양한 의미의 줄기가 있어야 한다. 결국 시인이 자기의 말을 고백하기 위해 지난한 시적인 의장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신석정의 시는 이미지가 다소 장식적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어경제의 문제가 대두되지만 비교적 뚜렷한 의도를 내세우고 있다. 시어는 하나의 의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엠비규어티(ambiguity)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는 추상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닌 감동을 수반하는 감수성을 내포해야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신석정의 시적 의도는 자유 의식- 비교적 선명한 최종 종착지를 갖고 있다. 푸른 하늘 혹은 청색의 이미지로 포장된 낙원 의식 또는 어머니와 별 등 다양한 의미역을 갖고 있으면서 의식의 항해를 펼치고 있는 듯하다. 따뜻한 햇볕 물 위에 미끄러지고 횐 물새 동당, 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푸른 잔디 해치는 바람이 있고 횐 염소 그림자 물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까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자졌다. 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푸른 하늘’이 최종 목적지로 설정되었다. 얘기하자면 청색은 이육사나 한용운의 시에서도 구원의 메시지 역할이 수행한 것 신석정의 시에도 청색(푸른 하늘)은 미지의 공간으로 설정되었고 이 공간은 시인이 안주하려는 최종 거처를 암시한다. 이는 밤이나 별이 떠오르는 곳 혹은 숲이나 어머니의 의미와 등가를 이루는 점에서 가야 할 곳이면서 시인의 자유의지가 도달하려는 종착지의 상징이다. ‘햇볕’ 혹은 ‘흰 물새’와의 결합에서 밝은 정서의 표정이 2연에 이르면 ‘푸른 잔디’를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의 결합에서 누른 색채와 횐 색채가 어긋난 암시이지만 밝은 느낌으로써 3연에 전해진다. 즉 까마귀는 신석정의 시에는 불행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친근함을 전달한다. ‘까마귀와’ ‘해오리’의 한가한 춤이 이어지면서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라는 종착에 이른다. ‘푸른 하늘’은 인간이 도달하려는 마지막 공간이다. 때문에 하늘은 인간이 도달하고 싶은 장소이고 가야 할 미지의 지점으로 설정된 이미지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색채로 표현하면 청색을 바라보는 행복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행복은 누구나 주관적이다. 때로는 시인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의미가 상식적으로 일체가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개성의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개성은 차별화라기보다는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 는 신석정이 누리는 행복감- 바라보기의 즐거움- 이는 모두가 누리는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공통된 마음이 아닐까? 한다. 2) 이동의 이미지 정서 인간의 의식 세계는 각기 다른 형태로 자기화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환경이나 성장의 여건 혹은 성품 등에 의해서 자기 구축의 방편이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3살까지는 무조건 모성 즉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키워야 성년이 되어도 모성애의 사랑이 연결된다는 여러 학설 등이 있다. 그렇기에 인격이란 생물학적인 유기체가 사회적인 세계와 상호 소통 혹은 작용하므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신석정이 그의 고향이라는 공간에서 멀리 벗어난 일생을 살지 않았다는 것은 광장공포증이 심리를 지배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고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풍광이 인격의 주요 인자(因子)가 되었음을 뜻한다. 시의 내용에서 동양적인 생각을 지녔고 기법에선 이미지스트적 측면을 나타내었으며 시각적인 심상을 제시한 시인이었다는 현대문학 회장이셨던 김용직 선생의 말은 다소 합당한 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 새끼 포르르 포르르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 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 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보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날개가 돋쳤다면』 중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고리가 날개로 의미된다면, 시인의 의식을 전달하는 다음 행동의 전달 매개체가 필요한 갈증이겠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동원하여 <새>처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열망하지만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의 자각처럼 ‘장난’의 방도가 새와는 다른 물상으로 선택되는 듯하다. 3) 늙음의 진입 어둠으로 가는 길에 황혼(늙음)을 만난다. 신석정의 시에서 어둠은 안식과 꿈 그리고 별이 뜨는 본향으로서의 귀환을 의미할 때, 전 단계로 황혼은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황혼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휘장이지만 역시 아름다움을 부추기는 감각은 사실일 것 같다. 밤의 아름다움을 맞아드리기 위해서는 늙음의 예비가 있어야 한다면 이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시인은 신석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거쳐야 하는 절차이며 또 숙명적인 만남을 뜻하는 일도 되기 때문이다. 신석정의 시에서 색채는 은행나무의 노랑 의미와 푸른 하늘의 청색 그리고 붉은 기미의 황혼 또 밤으로 들어가는 어둠의 검은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의 다양한 마음의 풍경화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둠이 침실 혹은 안주의 꿈을 맞아드리는 공간이기에 일제강점기의 어둠과는 다른 공간에 있음을 뜻한다. 즉 천래의 시적 감수성을 아름다움으로 맞아드리는 순수 그 자체라는 뜻으로 사회의식을 시의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는 시인은 아닐까. 하는 시인인 것 같다. 황혼을 전별하고 밤을 영접할 때 저 깊은 삼림들은 작은 산새들로 하여금 황혼을 전별하기 위하여 거룩한 음악회를 연다고 합니다. 그러길래 숲을 넘어가던 나의 어린 비둘기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직도 음악회의 구경이 끝나지 않은 게지요. 『밤을 맞이하는 노래에서』 중에서 황혼을 전별하고/밤을 영접할 때’를 반복 사용하면서 1연에는 음악회를 구경하느라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들의 기다림이 있고, 2연에는 구름들이 한가한 여정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과 3연에 밤이 야회복을 입고 다가오는 환상적인 상상과 하늘에는 별들을 지키고 삼림에 있는 갸륵한 산새들을 추운 날씨로부터 지키겠다는 적극성을, 4연에는 촛불을 켜고 앉아 인생을 사색하는 명상의 시작과 밤의 일과가 끝날 때까지 지켜주는 보호자의 호소로 막을 내린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밤으로 향하는 마음과 스스로를 지켜주기를 소망하는 주관적인 호소가 교차하면서 안주로 가는 길에 황혼은 가교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면서 황혼의 명상의 길을 닦는 임무가 주어지는 인상이다. 4)어둠의 변용 인간의 의식은 반응하는 데서 생의 의미가 담긴다. 그러나 그 반응의 밥법은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속성을 갖는다. 어둠에서는 정지하고 빛에서는 활동하는 것이 생명체의 대체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어둠을 안식으로 삼는 것은 한낮의 활동을 예비하는 의미도 있지만 신석정의 시에서는 어둠이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밤이 꿈을 기르는 공간이고 별이 뜨고 안식을 찾는 – 환영할만한 이름의 어둠이다. 즉 꿈, 별, 어머니를 만나는 일은 어둠에서 불을 켜고 상상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시의 의미- 때문에 촛불은 곧 시인 의식과 법하는 구체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새 새끼 쪼르르 포르르 날아가버리듯 오늘 밤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 가는 요즈음 땅에는 오늘 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 밤 먼 세계가 그리워 ···· 비나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왜 감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구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 꿩 소리가 그립고 호인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촐촐한 밤』 중에서 촐촐하다는 것은 배고픔의 기운이 약간 있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식욕으로의 배고픔이 아니라 밤에 대한 간절 성이 느껴진다. 이는 ‘나는 오늘 밤 먼 세계가 그리워 ·····’ 라며 미지에 대한 그리움을 배고픔으로 나타냈음을 유추하면 ‘새끼 꿩 소리와’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이 꿈은 소박하고 환상적인 그리움의 대상- 물론 미지의 느낌이 강하다. 시는 일정한 대상을 정해놓고 호소하는 예술이 아니다. 다만 미지의 공간을 향해 상상력의 옷을 입히면 되는 것이다. 신석정의 시는 이런 상상의 여행이 소박하고 다소 수식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밤에 새끼 꿩 소리와 횐 물새 떠다니는 호수- 그런 공간이 어딘지는 모를 일이다. 더구나 비가 땅을 적시는 밤의 고요는 곧 시인의 마음에 담긴 심성과 정서의 그림인 것 같다. 3. 에필로그–꿈과 행복 동화의 나라를 꿈꾸는 것은 그만큼 투명함과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의 정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이는 시인의 성품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나 느끼는 상상의 모두가 동화적인 아름다움을 이미지로 하여 엮어졌고 『촛불』에서의 시는 전반적으로 현실을 장식으로 치장하여 꿈꾸기에 접근되어 시의 진행은 푸른 하늘을 열망하는 자유정신의 구현에 있고, 이를 위해 이동의 메신저 역할로 바람이나 물- 강이나 호수 혹은 새들의 나래에 시인의 의식을 실어 전달하는 느낌이다. 황혼은 이런 전달의 입구를 장식하는 화려함이고 꿈으로 이동하는 단계로서의 미감이 되는 것 같다. 신석정 시의 종착은 어둠- 밤에서 꿈을 엮는 일에 몰두하고 그 꿈의 인식은 다이내믹함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점에서 소극적 방법으로 일관된다. 이는 시인의 성품을 나타내는 또 다른 고백과 상통되는 점에서 그의 시는 곧 시인의 개성과 일체화를 이루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신석정 시인의 모든 시를 평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맥이 상통되는 점을 느끼고 나간다. 다시 한번 그의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점을 배우고 익히면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면서 개선할 점이 무엇인가를 섭렵하려 한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2)] [이승섭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詩)는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는 정신의 맑음과 자정하고 지향하기 위한 조 건이지만 사실 무엇을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마음은 모으는 것을 원하지만 버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詩)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쌓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무심(無心)의 경지로 화(化)하는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詩)를 쓰기는 일상인의 정서와는 다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을 통찰하는 눈 – 아니 심안(Mind�s Eye)의 경지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상의 눈 – 가시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가는 길은 제한이 없고 무한의 거리를 질주할 수 있음에서 형형(炯炯)한 공간을 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詩)는 욕망으로는 쓸 수 없는 특성이 있기에 마음에서 욕망의 파도를 걷어내야 하며 현실에서 언어의 절제를 할 줄 아는 태도와 자정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굴 이 둘의 문제는 시인이 시(詩)를 쓰는 태도와 상관을 갖지만 시(詩)는 정신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산문은 팽창적인 언어 운용이 필요하지만, 시는 수축 적이어야 하며 긴축적인 언어 운용에 따른 언어 탄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詩)는 정신의 도(道)를 갖추는 일이 조건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정신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필요한 문제는 언어 운용의 절제와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현실적 혹은 현상적인 것에 국한되는 시야의 “좁음” 현상의 타개 즉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방법과, 시인은 무엇인가에 정신 문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문제는 시(詩)를 쓰는 본질이겠지만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열성에서 노력을 배가할 일이라야 할 것이다. 시(詩)는 천재적 상상이 빚은 산물이지만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모든 책을 섭렵하여 덧칠하는 문학이 아니라 상상의 날개를 달아 창작의 수순을 밟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무조건 강조하고 싶다. 군더더기가 많은 것은 시(詩)의 노화 현상이고 언어의 절제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시(詩)적인 기교에 부족함을 勞症(노증)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가는 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문학의 길은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길이기 때문에 표현 속에는 작가의 삶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물론 눈으로 보이는 현상적인 길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는 점에서 문학은 진솔한 모습과 만나는 일인 것이다. 물론 전자에서는 위장이 나타날 수 있고 후자에서는 낯설게 하기라는 방법으로 변형을 바꾸어서 진정성이 확인되는 점에서는 문학의 가치는 유용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이다. 진실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기에 감동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한 마음 위에 문학적 언어의 기교를 더할 때,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성(心性)은 대체로 선천적이라 해도 언어의 운용에서는,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천적으로 유산을 받았다 해서 꼭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평범한 말이지만 수련에, 의해 일정 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끝없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맹목의 수도승과 같은 행보를 보여야 한다. 새로운 감수성을 충전하기 위해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자기 시(詩)의 수호자가 되기 위한 방황은 결국 시(詩)의 맑은 표정을 만남으로써 시인의 소망은 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詩)는 항상 시인(詩人)과 먼 거리를 유지하면서 손짓을 보내지만, 詩와 시인(詩人)의 관계는 분리된 거리만큼 시(詩)의 열망은 사랑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詩)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소산이기 때문에 감동을 잉태하는 이치이고 자연의 육화(肉化)와 같을 것이다. 바라보는 자연과 느끼는 자연이 있다면 전자보다 후자에서 훨씬 심화된 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감의 80%가 시각에 의존하는 양이라면 눈으로 보는 것 – 이를 과학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 무당이 시퍼런 작두 위에서 맨발로 서는 이치나, 시인(詩人)이 신을 불러오는 것 – 이를 Ectasy라 하면 이에 대한 정확도나 과학적인 설명은 벽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으로 보는 현상적인 것보다는 심안(minds eye)에서는 천리 길조차 투시할 수 있는 것이 시인(詩人)의 마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을 마음으로 볼 때, 오히려 새로운 것 그리고 신기한 것을 찾아내는 인간의 마음을 과학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시(詩)는 감각적인 통합 작용이 빚은 조화미(調和美)라면 편향성을 넘어선 또 다른 지평을 만나는 일이 감각의 지평을 넘는 조화(調和)의 일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따로따로 구분되는 의식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 속에서 다향함의 특색을 만나는 이치 – 이것이 감각의 통합성이 될 것이다. 자칫 혼합해서 오는 혼란을 부추기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원숙의 길이 열리면 이러한 이치는 염려를 넘어 조화를 이룩하게 된다. 시(詩)에서 결점이 있다면 장식적(裝飾的)인 요소는 이미지의 과시 혹은 꾸밈으로 인해 시적 팽창을 방해하지만, 한약에서는 독약조차 적절한 배합으로 양약(良藥)이 되는 경험의 배합은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추억은 항상 질축(嫉逐)한 정서를 이끌고 오지만 달관의 숲에 들어서 무게를 느낄 수 없는 느낌이 오는 것이 유명의 시인이라 하는 것이다. 명성이 자자한 작가라면 원숙의 경지에 올라서면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시인의 경지에서의 인상이 확인되는 것이다. 길을 재촉하는 인상이나 혹은 조급증이 없는 지상의 시인(詩人) 다시 미지의 공화국 건설을 꿈꾼다. 그 공화국은 아름다움과 순수와 투명한 의식을 가진 시인만을 위해 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상상으로 빚은 낙원의 이름일 때, 꿈꾸는 시인의 모습이 숙연해진다. 자연의 육화는 대상과 대상이 경계를 갖지 않을 때,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 심지어 풀과의 대화나 새들과의 대화에서 있고 없음을 넘는 천의무봉을 지향하는 순수의 깊이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리고 대가의 시인이라면 이제 길을 열어놓고 손짓을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모든 시(詩)에는 그 나름의 시적인 인상이 남는다. 명상의 숲을 지나면 인생의 깊이를 방문하는 의미의 무상함이 본질로 읽히고,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을 소요하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생(生)의 장엄함을 연상케 한다. 황혼의 꿈으로 가는 길이 이어지고 내일에의 손짓이 아름답게 채색되는 분위기에서 초연함이 연출된다. 가는 계절 감각의 추억을 일구는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익어가는 등가를 이루면서 시(詩)의 무드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의미를 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감동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달의 방법은 가장 시(詩)적인 의장을 걸칠 때 언어의 미감(美感)은 살아나는 것이다. 시(詩)와 언어의 결합은 결국 시인의 재능에 귀속할 뿐만 아니라 사상을 내포하는 기교까지 수용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소회는 동양적인 우주관과 일치하고 인식, 정적, 평온한 정서, 관조하는 느림 미학, 등이 시의 그림을 그리고 시의 얼굴을 그려가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마음과 눈으로 보는 상상의 눈으로 시를 그려야 한다는 이치는 불멸의 원칙이 아닌가 하면서 필자의 초라함보다는 그래도 경륜에서 나오는 뜻이라고 애써 갈무리하면서 이 글을 에필로그 한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베스트셀러 1] [이승섭 칼럼집 [제 6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2)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아름다움이란 그리고 신산함에 대한 대명사는 과연 어떤 것일까? 누구는 꽃을 말할 것이고 누구는 자연의 신선한 모습에 찬탄을 발언할 것이며 혹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수 없이 셀 수 없는 많은 환경의 조건들이 첨가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직관의 시선에서 나오는 감성이라면 시는 지적 감수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이기에 생각을 더해야 하고 분석하면서 얻어지는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지칭- 시는 심리적인 반응이 길고 판단의 정상적인 가치 혹은 순수한 지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인식은 정서적 감동과 조화의 길이 상관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적 인식만을 앞세울 때 자칫 어지러운 함정에 빠져서 도그마의 편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딱딱한 돌을 만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라는 시 묘미의 깊은 맛을 부추길 수 있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조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가가이 가면 아름다움의 실체가 흐리게 되며 또 멀리 바라보게 되면 분간하기 어려운 사물로 둔갑하기에 균형이 있는 정서를 대동하고 목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행복이 조건으로 갖추어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를 감상자의 태도라 한다면 생산자인 시인은 고뇌와 아픔 그리고 탄식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시인의 시를 보다 보니 시의 아름다움이 새삼 앞자리에 자리하는 이유는 신선함과 감각적인 표현미 그리고 이미지와 이미지가 교합되면서 잡아주는 탄력에서 나오는 함축미는 시의 이름을 빛나게 한다. 「비울 수 있어야 시인인 것을」 이후 4년 만에 「거울의 시」를 출간한 시에는 자유시가 누리지 못한 긴장과 의미 깊이 조화를 이룬 언어 결합의 뉘앙스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시인 시에는 요란함이 없고 고요하고 금도를 지키는 정신의 고양을 대면하는 올곧은 정신이 숨어 있고 뿐 아니라 때로는 고독의 깊이에서 그리움을 보내는 여린 정서가 보이기도 다. 아울러 깊은 연륜의 오는 이별의 아쉬움과 돌아보는 생의 소회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의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위치에서 시적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에는 정감이 진하게 흐르고 있음을 본다. 2. 정서의 감각적 서정 사실 시를 따지자면 감각적이고 정서를 풀어내는 감수성이 시인의 재능과 일치하는 점을 가질 때 시의 묘미는 아름다움과 보조를 함께 하는 것이다. 김영기의 시에는 그런 감칠맛이 들어있으며 의미와 가락의 조화에는 시가 갖는 정서의 증폭이 일조하는 느낌을 배가 하게 된다. 지분지분 정을 주는 속살 비가 소근, 소근 살며시 부치는 볼이 간지러워 살짝 고개를 틀며 모를 듯 웃고 있다 숨긴 사연들 배시시 오로 시 감추고 내 안으로 차오르는 고요의 살 갓 들릴 듯 말 듯 사랑의 밀어가 봄소식이 바쁜 듯 영혼과 함께 춘(春) 소식이 살랑이며 다가서는 듯하다. <봄소식> 중에서 지극히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의인법 혹은 반복에서 나오는 가락에서는 여유가 있고 맛깔스러운 뉘앙스를 전달하는 듯하다. 언어를 비틀거나 언어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맛에 배치가 적당하다. 지분지분은 살짝 귀찮게 하는 의성어, 나오는 여운은 가락의 여유가 있고 속살은 내면의 부드러움이면서 가는 빗소리 - 소리 나는 빗소리가 아니라 소곤거리는 암시를 포개는 인상, 비가 내리는 날은 무겁고 우울한 기분이 점령되는 바 이 시는 비는 귀엽고 ‘배시시’ ‘웃고 있다’, 는 시어의 조합이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정리로 마무리되어 밝음의 상태로 이어지는 듯하다. 이는 전체적인 시의 표정이 밝아 봄의 정서가 살아나는 것 같은 「우수에」 「꽃의 향기」 등 서정적 이미지가 드러난 모양새다. 3. 희망의 언어 조합 모든 인간은 절망을 겪으며 또 희망을 보며 살아간다. 그 아픔과 희망을 통해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령이라 하겠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손짓이고 예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어려움과 고난에 처한 사람은 환한 불빛의 역할을 하는 일면 평화가 올 때는 화려한 장식으로서의 소임이 시가 갖는 본령이고 시의 역할에 주된 임무이기 때문이다. 시의 특성을 Amdiguity에서 찾는 것도 시가 천의 얼굴, 만의 얼굴을 소유한 보살의 역할처럼 다양한 표정을 내장했을 때, 비로소 시의 기능은 문법 언어를 완수하기 때문이다. 떠날 수 없어 주저앉아 쉼도 없는 곳 눈빛 시린 볼모의 공간 속에서도 봉긋이 예비한 가슴 신들의 꿈은 있거니 지상에 흩어진 오탁의 그림자도 한 올 벗겨보면 샘물이 있을 것 접신(接神)의 영혼들을 닮은 이사야 마음으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 깨끗함을 전한다네 봄을 잉태하는 몸부림을 이 어찌 감동하지 않으리오 봄을 맞이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 중에서 질서 정연한 과정으로 보면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즉 1연에서는 시련, 아픔을 따르는 볼모의 공간이며 2연은 꿈을 연상하고 3연은 물이 올라오는 희망을 말하며 4연은 개화를 완성하는 완성 개화의 단계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남은 삶의 원리를 말한다 해도 인생의 진수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는 생활의 통찰력과 명상에서 얻어지는 정서의 내공이라야 하겠다. 오랫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체험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언어운용의 기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고 민감한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는 삶을 시적으로 표정으로 표현하는 표정이기에 그가 어떤 삶을 잉태하는지 알 수가 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시를 보는 것 같아 매우 흡족하다. 4. 황혼의 고독 시적 표현이 겉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독과 이별이 교차하는 다소 쓸쓸한 형국이다. 아무래도 익어가는 추세에서 오는 감수성이 차분하면서도 쓸쓸함이 보이는 것은 자꾸만 먹어가는 나이가 오버랩으로 형상되는 것은 아닌지 - 시인과 시가 정서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사물을 앞세워 비유라는 도구로 사용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 하는 상징성이랄까 그러나 적절성의 비유에서는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더하는 역할이라 보기에 곰삭은 지혜가 들었지 않았나 나름대로 유추가 된다. 고독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 꾸미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과 같은 이치라 보겠다. 핏빛에 물든 잎에 입술을 가만히 대어 본다. 잎맥을 타고 어질 비질로 익어가는 소리가 세월 등어깨에 누워 붉은 노을만 담아가며 꿈같은 지난날을 누운 세월 붙잡으며 뜬눈으로 자정을 지키나 출구 막힌 회안만 어깨에 걸리면서 함부로 만질 수 없기에 등어깨에 실린 하루해만 건지려다 세월 놓치고 시간에 놓쳐 해 저녁에 노을만 쳐다보다 노을에 지치고 만다. 어느새 <황혼 가는 길> 중에서 사물의 모습을 소리로 듣는 이의 시인은 귀 밝음이 어떨지 궁금하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들이 소리로 다가오는 일은 체험의 깊이에서 알아차린 쓸쓸함이 아닐까? 잎새를 타고 어질 비질로 익어간다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듯한 이명의 낯섦, 은 아닐지? 아울러 시야에 들어온 꿈같은 지난날을 흐린 사물의 윤곽에서 소리로 직결되는 환청으로 들어올 수 있을 때, 마치 출구가 막힌 회안만 더불어 어깨에 걸리면서 만질 수 없다고 하는 상상의 깊이에서 하루해를 건지려다 어질게 시간만 놓치고 어느새라는 늙음의 소리 지친 하루를 찾는 도정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모두가 종점 의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의 고독에 지치고 마는 시간이 자신을 상징할 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5. 고독의 소리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는 인간만이 갖는 정서가 아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섭리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굴리면서 만나면 떠나는 것이고 떠나면 다시 돌아온다는 굴렁쇠 속에서 내 존재라는 이름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고뇌는 곧 이런 이치를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다른 방편으로 본다면 정확한 이름표는 없을 것이다. 만남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반면 이별에는 슬픔의 강물이 수런거리는 일은 천년의 인간에 역사가 축적한 슬픔의 기록일 것이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답안을 찾을 수 없어 두런거리고 슬픔의 깊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별을 건너지 못하는 미련의 줄기가 뒤따르면서 가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계절의 무게만큼 무너지는 겨울의 동거 비범한 고독을 외기러기가 울고 간다. 은하 지는 새벽을 눈물로 건넜을까? 무심결에 놓인 쪽 거울 보고 있노라니 등은 휘어지고 골 깊은 주름살은 자화인데 문턱 높은 세상살이 바람만 굽이치는데 허리를 펼까? 성형할까나?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에이 병 하나 달고 살다 가자꾸나? 이치대로 <개꿈의 세월> 중에서 시는 (Reality) 장면을 사실 그대로 근거하여 상상, 혹은 창작과 상상력에 옷을 입힐 때, 더 넓은 상상의 반경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인의 늙어가는 퀘어를 자신이 시적 언어로 ‘고독’과 계절의 ‘무게만큼 무너지는 겨울의 동거’라는 언어를 지적인 제어로 매우 무상함을 느낀다. 허무와 병치레하는 면면과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 모습을 반추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의 이름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에이 병이나 하나 달고 살고자 하는 일면에서 허무와 동행하는 일들이 흔적으로 보인다. 개꿈의 세월이면 차라리 인정하겠다는 형식에 아픈 기억이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도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나 자신도 늙어간다는 이치 앞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명제에 필자도 반추하는 시간이 되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현실을 비교하는 그런 세월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6. 고독으로 보는 풍경화 <나가면서> 시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 보이는 풍경화라고들 하지만 이의는 있을 것이다. 시에는 서정시의 숲을 이루면서 시원하고 삽상한 미소로 건네준다. 이는 표현의 깊이를 간직한 셈이고 여기서 시의 숙성은 곧 체험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울러 대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의 시선을 사랑으로 감싸는 동화에서 형식의 절제와 언어 탄력을 수용하는 미감과 내용의 무한성에는 여유로운 감상의 길이 보인다. 고독과 허무의식 그리고 그리움의 표정을 나타내는 기법이 시적 기교의 깊음을 방문하는 소감처럼 객관적인 표현일 때, 더욱 친근함을 전달하고 있는 형식에 기쁨을 느낀다. “Allan Tare”가 말한 “문학은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이다.”에 미감을 더한 소독이 따라오는 감동의 시인이 아닌가 느끼면서 밝은 미래가 보일 것이라는데 즐거움과 만족을 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대중문화평론가 이승섭의 인문학 시평집 베스트셀러] [이승섭시평집 베스트 37위] 과 깊 이의 서정.]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은 누구나 그만의 삶의 세계가 들어 있어 조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그려낸다. 시인이 생각하고 살고 있는 세계의 정경은 곧 시의 표정을 관리하는 공간으로서의 작용을 하기 에 시는 곧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단면을 조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시라는 존재는 낯설게 그리고 언어 기교를 통해서 위장한다 해도 시가 고백적인 범주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시는 곧 시인 자신의 모습을 은연중에 투영 시키게 된다. 관념적 고답의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영감을 포착하는 시인, 등 이미지의 성향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자극하면서 시의 표정을 관리하며 그리는 것일게다. 왜냐하면 사물이 시인에게 영향을 주면 시인은 상상의 그물을 펼쳐서 조합 또는 다른 공간으로 자기만의 시세계를 재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활과 상상력이 결부하면 새로운 창조의 동력은 생활환경과 밀접하게 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 생활공간은 기하학적인 도시의 과학메카니즘일 수도 있고 또 전원의 훈풍이나 흙의 생명에 대한 관심과 소화가 시심을 자극하는 역할로도 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물확적인 현상의 최종 목적지는 상상의 근거가 시인의 생활 혹은 삶의 주변 환경과 손을 잡아야만 시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시는 고답적인 혹은 관념의 배회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메시지라 한다. 물론 그 메시지는 시적인 언어의 미학을 도출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이나 알레고리(풍유) 혹은 상징의 숲을 만들어 삽상하고 때로는 눈보라와 폭풍의 맹위를 언어로 담아야 하는 변형의 미학이 곧 메시지의 간접성을 뜻한다. 그러나 독자가 닥아 오는 경로는 친절한 설명이 아니라 우회의 손짓을 통해 스며 와야 한다면 그 만족의 심사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증명된다. 여기 이곳의 내 안의 질서의 원점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곳에 오면』 중 아마도 자동차와 아파트의 관리 혹은 리모컨으로 조작하는 머신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더라도 소록도의 자연에 시정신의 원점 의식을 투영하는 사고에는 만족과 행복의 출발이 시작된다.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라 자연을 깨닫고 자연의 은혜와 충만을 터득했기 때문에 새롭게 느끼는 정서의 감흥인 것이다. 『언제 꽃피니』 묻다보니 그새 개울 건너에 동면을 이겨낸 물고기가 인기척에 낯을 붉히니 매화가 웃는다. 소록도 하루는 어 여 가라 내 익어가는 순간보다 더 빨리 가고 있다. 『세월』 중 흥미는 열망을 달성하는 속도에 먹혀 버리는 것이다. 좋아하는 시간은 그새 지나고 시간의 무료를 달래는 것, 때문에 시간의 존재가 부재한 곳은 행복이라는 것이 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무에 꽃이 언제 피는가를 묻고 물어 언어가 그립지만 인간과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과의 매화가 웃는 상상이나, 꽃에게 말을 거는 나보다도 더욱 빨리 가는 시간을 보며 존재자의 진정한 언어 교감이다. 자기를 잊는 순수한 공간에서 충만감을 느끼는 행복한 발상인 것 같다. 소록도에서 정신의 원점을 찾는 시인의 시는 생명으로서의 활력을 찾으며 가득한 열정을 분발 시키는 촉진제가 되는 것 일게다. 소록도에서의 외로움을 시적 정신으로 승화 시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다. 편지를 써봅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들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서서히 하나씩 ego를 세워 내게로 오네요. 『그대에게 편지를 써봅니다』 중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 새로운 깨달음이 발동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라는 대상과 나와의 관계에서 지금에서야/묻고 물으면서/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와 같은 깨달음이 일어난다. 이는 지금에서야 편지를 쓰는’ 시간성과 거리의 인식에서 그대라는 대상은 더욱 애착으로 변하는 감수성이 소록도에서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한 대상의 발견은 곧 자기의 확충이면서 계기가 소록도라는 공간의 만족에서 나오는 고배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위안과 안도감을 주는 지명으로 시인의 정신 깊은 곳을 장악한 발성임을 증명한다. 이 편지는 어느 한 특정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환치 하면 그 다음 메시지는 그리움을 불러오게 하는 정서가 앞장선다. 그 어느 때쯤 보다 더 어린 날까지 이렇게 그렇게 긴 세월을 두고 생각나는 사람을 오늘은 정말 보고 싶다. 『오늘 사람이 보고 싶다』 중 시간의 여유와 관조는 그리움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어디든지 내가 만족을 한다든지 안주하게 되면 또 다른 상상의 문을 열고 그 곳으로 사연을 보내고 싶은 충동이나, 생각나는 사람을 오늘은 보고 싶다. 의 여유가 보인다. 의식의 창문을 열고 추억을 불러들이려는 시인의 마음에는 오랜 시간의 벽을 넘어 친근하고 사랑 깊은 여유의 마음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그대가 보고 싶다. 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의식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산 속에 내리는 비 개울에 내리는 비 한 송이 장미위에 내리는 비 내 가슴 추억의 한 가운데 내리는 비 그 것은 모두가 시인 것을 『소록도에 내리는 비』 중 봄이던 가을이던 겨울이던 온통 비로 통일된 의식이다. 소록도가 비가 되고 비가 소록도가 되는 통일은 이 통합된 의식의 모습이 보이지도 보일 것도 없는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에서 나라는 존재는 결국 하나의 원융 속에 물성이 없어진 자유 정신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자유 정신은 시가 선의 경지를 방문하는 길을 만나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는 그렇게 내린다. 시인의 마음에도 충만의 이름으로 비가 되고 소록도가 극점을 방문한 시인은 물과 비와 소록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는 고독한 것 같지만 친근미가 넘치고 감동을 자극 시킨다. 참으로 스테딕한 정적인 여유가 보인다. [에필로그] 삶의 성숙은 또 하나의 물음을 준비하는 걸음이 바빠지는 것 일게다. 절망은 희망으로 손을 내밀고 시심을 다독이는 시인의 마음에는 햇살은 빛나고 외로움은 웃음으로 나누는 것 같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시작을 다시 알리는 준비를 안으로 다질 때가 되었음을 헤아려 본다. 자연에서 성숙 되어가는 시향이 자양을 받고 여정을 재촉하는 시심이 안온한 표정이다. 쓸쓸하고 외로운 소록도에서 자양의 정경과 손을 잡고 또 다른 여정을 가는 느낌을 받는다. 더욱 매진하여 독자들이 감동의 숲에 들어가 함께 호흡하면 좋겠다는 소요의 미학의 시집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4. 01. 대중뭉화평론가/칼럼리스/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대는 계속 진화하고 변화를 따라가는 의상의 변천은 전위적이지 않겠지만 상황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있다. 이는 현실과 접목된 변화의 길이기에 과감하게 앞서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왜냐하면 상상의 문제는 변화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요체는 상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농경사회의 상상과 산업화의 상상 AI, 반도체 상상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농경사회는 현실의 구체성을 가질 때 의미를 둔다면 앞으로는 추상적으로 접근하면서 산업사회를 지나 이제 AI, 시대 초현실 시대에서는 공상의 범주를 벗어나 배회하면서 하이에나의 모습인 것이다. 정치(精致)가 아니라 추상의 넓이가 얼마나 넓고 가능성의 범주가 막연할 때 상상의 가치는 이외에도 호감의 도수를 높이는 점일 것이다 상상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심심풀이, 한가할 때 많이 온다고 한다. 낮잠을 자거나 무심히 쳐다보는 천장의 수만 갈래의 길을 발견하고 거기서 소리치는 기찻길도 보이고 때로는 새의 길도 나타날 때 꿈의 이름은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찻길은 미지의 땅으로 달려가는 일도 나타날 것이고 새는 하늘의 깊이 공간으로 호기심의 나래는 계속 이어 어디엔가 무릉도원의 중심에 이르는 꿈이 도래할 것 같은 생각의 명명식이 복잡해진다. 이러한 상상은 상상의 초보 단계인 원시 사고(思考) 이때는 평안에 존재의 광장이 여유가 있었고 느림의 미학에서 일상이 근심의 뱃머리를 출발선에 옮겨 놓았을 때이다. 그러나 인간의 팽창은 달려오는 몫이 문제인 가난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놀람을 깨우기도 하고 멀리 달아나는 혼자만의 꿈도 이어진다. 농경사회 꿈은 땅 문제에 걱정하고 늘리는 일이 생존의 길과 이어지는 상상이 대부분일 때, 춘양과 이도령의 사랑이 지고(至高)의 가치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점차 복잡해지는 사회구조는 수직구조의 사고에 따른 상상이 벼슬이 높아지는 신분의 층계를 가치로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의 구분을 만들고 상층으로 오르려는 생각에 파생되는 모순의 구조는 점차 길이 복잡다단해지고 이를 평등으로 장치를 마련하지만 이에 따르는 제도의 갈래는 그물망을 촘촘하게 인간을 묶는 연습이 날마다 변화한다. 산업화를 거처 이제는 과학, 초전도체에서는 인간의 사고보다 치밀해지고 이기적인 사고의 틀이 공고화 된다. 과학이라는 산물은 꿈조차 점차 영역이 넓어지고 이전에 겪지 못했던 일들이 상상의 틈새를 넓히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상상은 비교적 경계가 확연히 어필하지만 인간 사회가 사다리를 타고 오를 때마다 제도가 주의 단계에서 경각으로 다음은 구금이나 체포의 법률을 제정하여 한계를 설정할 때, 인간의 사고는 오히려 더욱 팽창의 반발하게 될 때, 인간의 문화는 날개를 달고 미지의 방문을 재촉하는 - 재차 말한다면 사회의 제도가 얽어맬 때 상상의 자유는 더욱 넓어지는 길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상상은 도저히 붙잡거나 법으로 금을 긋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상의 길은 넓어지는 일이 꿈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공상 – 보통 일반적인 인간들은 공상이나 상상을 지나치게 하면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에서는 문학에서나 어느 분야에서나 상상과 공상의 구분이 모호한 길을 갖는 이를테면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혹은 생각의 비빔밥이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4차 혁명, 5차 혁명의 기초가 된 것으로 친다면 되지 않을까? 이른바 1998년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의 저술인 <The unity of knowledge >로 알려졌지만 이미 이런 징후는 미술의 피카소가 시작했고 살바도로 달리 등 추상화가들의 솜씨는 이미 예견의 징후를 보냈다. 예술 중에도 특히 미술은 상상의 첨단을 먼저 밟고 음악이나 문학은 뒤따라가는 특징이 있다. 일종의 정리 임무를 맡는 쪽이 음악과 문학이 충실할 때, 미술은 더욱 빛을 발휘하는 임무에 충실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과 대칭인 인문학의 분화는 산업혁명 이후 열성적이었지만 21세기를 넘어 IT, 기술의 발달은 순식간에 이런 증거를 뭉개고 하나로 통합되는 일이 현재 진행형이기에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이 급격하게 진행되어 신들의 나라 그리스에서 점차 르네상스를 지나며 두 관점은 명백하게 분할(분할)의 표정을 나타내는 것을 진리의 명제처럼, 또한 컴퓨터의 출현 동시 자연, 인문의 관점은 하나의 길로 결합하는 상상으로 일치된다는 논리이다. 그 결과물이 로봇의 인간화 앞으로 로봇의 길- 지금 진행형이라 약 35% 몫이라지만 미구에 인간은 의학과 법률의 응용과 적용뿐만 아니라 상상의 결과물인 예술을 빼고는 모도 장악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학에서도 소설, 희곡, 등은 문학 장르에서 빠져야 할 운명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 수필은 구조의 장치가 필요 없다는 논지에서 인간 것이라는 소유권이라 보면 어떨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작금에 우리들의 상상력은 길이 없음에서 길을 찾는 공상의 방문, 상상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imagination의 질서 있는 길 찾기라기보다 길이 없는 곳에서 이리저리 튀는 Fancy의 표정을 앞에 놓고 그 길을 방황하면 무언가 상상의 입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는 시대의 문이 열릴 것이라 예견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이것저것도 아닌 또는 저것도 이것도 결합하는 도처춘풍(到處春風)의 눈부신 시대가 예견할 수 없는 지경의 아득한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귀의 낯섦을 어떻게 적응할까에 대한 새로운 보청기 생길 것 같아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 중이다. 2. 시의 논리 대부분 시를 쓰면서 구조와 논리에 방점을 생각한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가는 순서와 같이 때에 따라 역전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논리의 옷을 입어야 한다. 순서가 관습과 합리적 이유가 내장될 때, 안심하고 시의 종착을 지향하기 때문에 가령 어린이 행동은 어른의 경우와 달리 돌출적이지만 성장하여 관습의 질서를 익히다 보면 거기엔 일정한 루트가 존재함을 생각하고 행동거지를 나타낸다. 시도 이런 이치에 가깝다는 느끼는 이유에 현실의 문제와 표현의 거리가 너무 멀면 다시 고치고 뜯어서 개 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논리의 구조에는 의미에의 합리성이 고개를 내밀고 만족한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신의 흐름은 분석 대상인지 아닌지는 확증(確證) 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정답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발표했을 때 사교(邪敎) 혹은 독신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았다는 것도 우리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시, 공간에 대한 견해 이론인 고전물리학의 뉴턴과 현대물리학의 아인슈타인이 공존할 수 없는 물리학적 학설은 인간의 기준에서 언제라도 뒤바꾸는 점을 여지로 남겨 두겠다. 그렇다면 시의 논리는 과학적인 더하기의 정치(精緻)함을 요구하는가 아닌가는 때에 따라 생각의 길이 다를 것이다. 시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하나 더하기 하나둘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에 사물의 결합은 감정의 결합과 유사하기에 모호성(ambiguity)의 이유를 완전히 제거하고 판단하는 것은 모순일지 모르나, 관습적인 질서를 벗어날 때는 비이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기울어질 경우 시의 상식은 파괴된다고 보는 것이기에- 물론 이상(李箱)의 시를 비이성이라 딱지를 붙일 수는 없지만 애매하고 사리에 근접하기는 어려운 것도 정확하다고 해도 이를 난 해시라 할는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시라는 존재는 이성을 깨우는 것 아니라 감정의 순화와 미적 감수성을 동원하는 정서의 문제이면서 결국 이성에 접근하여 전보다 더 밝고 깨끗한 인간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때, 정서의 전부인 시의 임무는 확실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는 논리의 그물을 벗어나면 난해의 숲에서 인간을 조롱하는 표정을 짓게 된다. 상식이 통하는 시는, 그리고 상식이 아닐지라도 그 상식 범주에 순수와 깨끗함 그리고 순화의 마음을 오로지 지표로 삼아 길을 정하는 목적이 옳을 수 있을 것이기에 시의 논리 상식의 논리 상상의 논리라 개인적 소견을 밝히며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소재의 투명성과 표정의 소재를 찾아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정서의 질서 현상이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누구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력의 조력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지켜가면서 시인 개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서 의미의 조직화에 혼신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 더러는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도로(徒勞)에 그치는 시인도 있다. 그러나 명망(名望)을 얻거나 그 반대인가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유명은 부풀어 오른 거품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그리고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삶과 생이라는 고해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 정화 혹은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 글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의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한정된다. 자신 삶과 오뇌(懊惱)와 고통 신산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와 글은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이름을 갖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한다. 물론 저변에는 부모나 고향, 자연, 삼라만상의 정서가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이기에 늘 순수함을 잃지 않는 정신 정서가 있어야겠다. 2. 함께하는 의식과 아가페 헌신 낮은 곳에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에 있다. 거스름이 없고 순리에 따르는 것은 그만큼 달관의 높은 경지를 확보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교만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아가페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s Souliers」라는 작품 본적이 있다. 한 켤레의 농부 구두에서 서럽게 살아온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한 소명이 담겨 있는 것을 느낀다. 그뿐만 아니라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쉬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작품과 작가의 모든 생을 압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출발한다. 변함없이 발을 감싸는 신발 지치고 고달프고 고통을 당해도 마음 넓게 감싸는 신발 제 몸 모두 닳고 닳아도 내색하지 않고 발을 보호하는 신발 남 보기 부끄러워도 묵묵히 나의 분신 닳고 닳은 모양새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신발 분신이고 내 짝인 너 고맙다. 신발 <분신> 중에서 시인이 시집을 상재 할 때마다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건 작품의 순서를 배열해야 독자에게 강한 모습과 첫인상을 독자에게 어필하려는 발상에서 맨 앞 페이지에 있는 작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을 감싸고 인간을 보호하는 의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의상과 어울리는 신발이 깔끔하면 그 사람의 인상은 멋진 사람으로 인식하고 지저분하게 의상을 입으면 흐린 인상을 각인 시켜주는 일은 우리 인상에서 좌우되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의 신발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구두는 비교가치로 연결되어 가치가 높다 보겠다. 신발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기에 어떤 경우에든지 주인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끈기 있고 /마음 넓게 나를 감싸는 신발”/이라는 임무에 헌신해야 한다. /지치고 고달프고/ 고통을 당해도/마음 넓게 감싸는 신발/남 보기 부끄러워도 묵묵히 나의 분신/무한 성실을 다할 때 우리의 앞날이 밝아지는 희망의 푸른 이름이 빛이 난다. 헌신, 봉사는 때로 고독하고 외로울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바탕 위에서만이 비로소 성립되는 Eros 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늘 변함없이 환한 웃음 선물하고 우리네는 마냥 선물만 받는다. 세상 인연 맺은 날부터 지금까지도 무한 사랑에 에너지를 주었건만 우리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만 하고 빛은 우리네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알려주지만 그 의미 모르고 우리네는 깨닫지 못하고 사네 <감사하는 마음> 중에서 사랑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일 경우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神에게 드리는 기도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햇빛의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네’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沒理解)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오지만 조건없는 사랑을 바칠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은 고귀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3. 아가페 사랑 시인이란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찾아 나서고 그것을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생을 다해 어떻게 작품을 완성하는가의 신명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기에-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어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와 정신으로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는 가장 많은 시적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대상을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시는 공고한 성주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변신」, 「사랑의 그물망」, 「사랑의 전서」, 「꽃의 사랑」 등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1편의 시를 만나는 일기기 때문에 종국은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의 정서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하기에- 시인은 시인의 내적 고백이고,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인지 내게 그대라는 은행이 하나 생겼어요. 장기로 복리 우대로 사랑 계좌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내게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낼 때마다 모두 그대를 위해 입금했어요. 고스란히 찾아서 그대가 가지세요. 사랑의 통장을 <사랑 통장> 중에서 너무나 신선하고 상상 비유의 사랑법인 듯하다. 많은 시평을 해보았지만 사랑을 은행에 저장하여 복리로 부풀려서 주겠다는 비유는 가히 약성의 비유인 듯하여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시인 듯하다. 시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도구를 통해 언어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심지어 언어를 버리면서 언어를 획득하려는 역설의 기교를 높게 평가를 하고 싶다. 은행의 이름은 그대이고 시인은 사랑의 계좌에 수시로 입, 출금이 들락거리면서가 아니라 복리를 위해 장기간 계좌를 준다는 점에서 사랑의 가치가 한층 고조되어 너무나 멋진 시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오로지 저금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뒷날 받을 자산가치는 행복이 넘치는 화려한 것이다. 이는 곧 행복이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됨을 뜻하는 것이다. 4. 에필로그 하면서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헌신은 더 큰 사랑의 길을 여는 아가페 사랑이라면 시는 순수한 투명이 남다르게 시의 표정을 밝게 한다. 이는 그의 삶의 질료(質料)가 되기도 하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소재와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에서 관조의 경지에 오른 듯한 때라야 하늘이 보이고 천지가 보이는 것이다. 소재와 사랑은 그렇게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며 행복을 주는 것이라 이를 지키기 위해서 끝없는 자기 수양과 정화의 노력은 배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 시인은 이러한 이치를 수행하는 행동의 모범이 날마다 자기 수양을 이어가는 것일 것이다. 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정답은 없다. 자기의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의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 시인은 당당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질서의 부당함과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공정, 정의와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의 정신을 이룩하고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은 책무라 보며 진정한 시인이라 할 것이라 강하게 주장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이승섭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의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 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 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 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 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 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최신작}.] [이승섭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베스트셀러가 되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