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지 물음에는 거의 명확한 대답을 마련하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도 막상 왜 시를 쓰는지 물으면 답을 어떻게 줄 것인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무한 상상이 내게 들어와 시를 쓴다는 신을 떠올리며 설명을 해주게 된다. 물론 스승께 배운 말이지만 사실 자기 시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시를 쓴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시를 생산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시를 분석하고 해제 또는 정리 이후에 비로소 객관적인 관점으로 탄생된 시에 대한 평론가의 조언에 따라 할 뿐이다. 이 경우 시에 대한 객관화는 쉽지 않으며 모든 시인이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에 마치 잉태 전에 어떤 꽃을 만들겠다고 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삼라만상 우주 섭리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따르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시를 그리는 일은 아이의 잉태, 또는 꽃을 만들 수 없는 일과 같은 것이다. 시인 누구나 멋진 시 좋은 시 쓰기 위해 신명을 다하지만 그런 소망은 쉽지 않은 결말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멋진 시와 좋은 시를 그릴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다. 내면을 통찰하여 사물의 특성을 시로 환치하는 일에 부단한 집중력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누구나 그리고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인이란 명칭을 가진 사람만이 시를 그리고 쓰는 것은 아니다. 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내면에 시심을 감추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 시심을 어떻게 꺼내어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가의 집중력 상상에 의해 아마추어와의 차이는 증명되는 것이기에 증명이 되는 것이다. 서길순 시인은 공예방에서 작품을 만들며 깨끗한 시를 쓰는 시인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잡티가 섞이지 않고 순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다. 이는 그의 직업과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견문으로 시화화 하는 독특한 입지를 만들고 있다. 공예라는 작업은 섬세하고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창작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시곗바늘처럼 행동하는 조용한 조건에서 일을 하며 창작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매시간 순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던 순간의 아픔들이 밤낮을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던 나날들을 발췌하는 순간의 환희- <머리말 중>에서 다소 체계적인 글이지만 시인의 내적으로 아파했던 시절을 말하고 싶은 글들이 응축되어 시로 표현한다. 이렇게 시를 쓰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생동감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볼 때 함축된 언어로 그려지는 그의 특성을 만나기로 한다. 2. 시의 언어 시는 언어로 이어진다. 그 구성이 언어일지라도 시인의 정신이 투영되는 점에서 그만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때 단순한 언어의 조합, 조립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을 모두 투척하는 일이면서 생명과 고통을 맞바꿀 수 있는 신념의 진행이라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자화상이고 영혼의 불빛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서길순 시집을 보면 계절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절에 따른 시인의 의식은 계절과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로 의지하며 봄에 꽃을 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사계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꽃봉오리마다 솜털이 보송보송 꼭대기까지 단물 적시며 양지뜰 푸른 꿈 꾸더니 어느새 바람을 이기고 이쁘게 세상으로 나온다. 아직 웅크린 벌 나비 날개 짓 처마 끝 매달려 앵앵거린다. 꼼지락, 꼼지락 양지바른 돌담 아래 키다리 쑥이 터진다. 어머니가 끓여준 쑥국이 문득 생각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이른 봄에 <봄이 오는 소리에> -중- 물이 오르는 봄날의 허박한 풍경화이며 의식을 풍경과 어머니를 그리는 방법은 서정시의 흔한 작시법이지만 실감으로 다가오는 일은 희소한 일이다. “꽃봉오리”가 “바람”과 싸우고 1연 2연 오면 “벌” “나비”라는 혼란스러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어머니의 추억이 개입되면서 상상의 나래로 펼쳐진다. 서길순 시인의 시는 전반적인 작시법이면서 그의 시적 정신과 의식을 투영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1) 삶에 깊이 모든 시에는 삶에 대한 호흡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 자신의 고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회라는 말은 낯설게하기라는 문학적인 기교를 뜻하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말이 되고 그 말은 감동의 방법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무늬와 같은 것이다. 그의 정서는 아마도 꾸밈이 없어 단조롭게 보일지는 몰라도 아주 깨끗한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구가 돈다. 중략- 빙글빙글 새 희망이 익는다 팔랑팔랑 벚꽃 익는 냄새가 향긋하다. <봄날의 패러디>-중- 모순으로 부풀려진 세상에서 자연의 섭리는 구분과 칸막이도 없이 잘도 돌아간다. 때문에 시인은 빙글빙글 띄어쓰기를 안해도 그냥의 의미를 구축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간의 구분일 뿐, 누가 가을이라고 하지 않아도 사계절은 오고 있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가? 다만 자연적인 현상으로 더불어 팔랑팔랑 벚꽃이 지는 섭리 앞에 숙연해지는 모습- 시인의 얼굴에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남으며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이를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개인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해와 달 끌어안고 우린 달렸다. 지구촌 너무 좋아 낮과 밤 구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략- <우리>-중- “우리”라는 의식은 분야가 다르다 해도 질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불평 불평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는 그의 삶에 적용된 의식이 투영된 것과 동일한 문제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의 시는 담백하면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이치가 대입된다. 2) 의식의 정감 시는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시의 무드는, 결국 시인의 정신 무드를 표현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시인의 정서는 다감성을 포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두루 관심을 나타내지만, 지극히 절제된 표정을 관리하는 것 같다. <엄마 얼굴,> <친구야 너는,> <옛 친구> 등을 보게 되면 주변의 지인이나 육친에 대한 정감이 다감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친구야 오늘 하루는 시원한 감로주 한 사발 거나하게 나누고 날 저문 고향길 함께 걸어가 보지 않으련? 나이테가 몰라보게 두꺼워진 네 눈망울 속에서 새 봄맞이 분주한 고향 땅을 그리련다. <옛 친구> -중- 친구와 감로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언이다. 우정은 곰삭은 맛처럼 깊이가 있고 따스한 체온이 교감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옛 친구의 우정을 찾아 방랑의 길을 터벅터벅 가는 것 같은 시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결국 도착한 곳은 고향 땅, 이는 친근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고향을 못잊어 하는 인간의 여린 심정에서 시인 또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굴을 그릴 수 있지만 결국 그릴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에 이르면 서러움 같은 밀물에 점령당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술래놀이 즐겁던 미루나무 아래로 가리라 돌아가리라 꼬까옷 반짝반짝 차려입고서, 고향 땅 산과 들녘이 반가이 다가와 벌써 내 곁에 있네.-중략- <귀향> -중- 추억은 늘 즐겁다. 왜냐하면 추억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여기서 어린 날들의 “술레놀이” 혹은 “꼬까옷” 등의 기억들이무리지어 “벌써 내 곁에 있네.”라는 생각- 생각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고향이 된다. 순수와 아름다움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어린 날들의 순수와 추억들이 어울려서 오늘에 다가온 이름- 추억 속으로의 여행은 정 깊은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풍경화이다. 이 풍경화는 바라볼수록 다정하고 깊은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며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점철 되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희망의 손짓을 보내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묘연함과 긴 시간의 간격 때문에 애절함을 더하는 요소로 인상을 장악한다는 뜻이다. 3. 자화상의 노래 “만추” “겨울 일상” “그리움” 등을 보게 되면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을 노래한다고 할까? 때문에 그의 노래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명상의 숲을 구축하는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아울러 생각하는 것만이 시의 몫은 아닌 것이다. 행동의 길을 안내하면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의 자리를 항상 견고(堅固)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서길순 시인의 시에는 생동감으로 포장된 정서가 신선미를 자극한다. 인생에 대한 발언은 때로 에피그람의, 목청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깊이를 갖춘 희망의 깃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감이 그의 시심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시에서는 고향을 회상하는 따스하고 안온한 이미지의 옷을 입은 시적 행보에는 즐거움이 따라오는 듯 하다. 다시 말한다면 서길순의 시는 노래로 부르는 자화상의 그림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모든 이들의 따스한 시상을 전해주는 시인이 되기를기대 하며 나의 숙제와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으며 나가려 한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제 7집{공정 정의 사색의 길}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9집 {무의식의 시}]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늘 평범하고 추상적 언어 감각이지만 시라는 특수성을 볼 때 이것은 곧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한 개성의 척도에서는 애매모호성이 너무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각주(脚注)가 많은 T.S Eliot의 황무지를 읽으면 그 나름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독자는 일단 난해의 딱지를 붙이며 돌아서는 것이다. 하여 우리 김소월의 시를 읽을 경우 쉽게 아는 척하는 이해가 문득 다가든다. 김소월이나 엘리옷은 분명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가치를 빛내는 점에서 달리 해석을 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경의 이상의 <오감도>를 명쾌하게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평론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황색저널리즘 <인기주의> 고착의 명성을 부추긴 일면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시는 시 같아야 하고 산문은 산문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각주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비유의 장치나 시 적 포장을 걷어내면 속살이 드러나는 의미의 맛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구상화가 있다. 대체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추상화의 숲을 거닐다 구상화의 밭으로 걸음을 옮기고 다시 추상 공간의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시도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질적인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으며 일테면 특징을 이루는 표정을 말한다는 점이다. 시인의 원고를 일별(一瞥)하고 난 느낌은 추상의 숲을 지나는 느낌이고 마치 이중의 기교가 특이하다는 인상이다. 이제 그 표정을 한번 만나보기로 하자. 시집 《골목길 서사》는 총 5부 100편의 시는 이길여시인의 의식 조감(鳥瞰)이 서사로 그린 듯하다. 서사란 현실의 특정한 시간과 과정을 시간의 앞뒤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 촉수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지는 듯 정서가 이어지고 묘미가 다채롭고 신비하다. <2. 길에서 만나는 추상의 표정> 바실리 칸딘스는 순수 추상 예술의 선구자로서 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키고 음악가 바그너의 선봉자로서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탁견(卓見)을 실천에 옮긴 추상 수채화의 화가이다. 정신의 고도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추상은 일종의 변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공로를 갖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만의 정서를 점과 선, 면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문법은 찬탄을 이어오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시에서도 이런 기법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 영역의 한 축을 감당할 때 일정한 자리를 갖는바, 시인의 창조 기법은 그런 측면으로 볼 때 가까움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산길 고당으로 돌아가니 이마를 맞댄 지붕 아래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고행의 삶의 소리가 내 마음 긁고 때마침 눈물방울 달고 서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눈길이 간다. 제 키보다 큰 담쟁이에 기대 한숨과 울먹이는 아이와 자아 속의 내가 함께 한다 그을린 마음 달래려 가까이 서서 미소로 그려 준다 양팔을 벌리고 선 아이의 그림자에 깃 고운 날개가 펼쳐지고 그새 배시시 웃는 눈망울 내 세상 어디를 크게 흔들었고 쉽사리 재울 수 없는 뭉근한 떨림에 선뜻 돌아서지 못해 서서히 거꾸로 걷고 있다. <산허리 천사의 눈> 중 시적 공간은 협소한 산골의 상징에서 화면은 거친 목소리와 더불어 고단한 삶의 목청에 담긴 아픔이 눈물방울 달고 나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과 울먹이는 모습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개입은 시간의 테이프를 먼 곳에서 가까이 화폭을 전환하는 기법을 구사하면서 위로의 승화가 천사의 날개를 그려주는 그림 속에 펼쳐지는 날개의 바람으로 “그새 배시시 웃는”에서 현실 공간에 화려한 채색이 마음 밭을 보여준다. 시의 기교나 그림의 기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할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경계가 없음에서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재미는 시인의 능력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서의 파편들이 부유하면서 언젠가 결합하는 요소로 작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대상의 표현은 시인의 심리적인 경과에 따라 특징이 드러난다. 가령 습작기에서 원숙기로 들어가는 도정(道程)마다 삶의 굴곡이 들어 있으며 이를 심리적인 기제(基劑)로 나타낼 때 추상의 묘미는 복잡을 단순화하는 형태로 정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액센트릭 한 요소를 배제하고 화면 내에 형태적 질서에 예술의 자율성을 구성한다. 결국은 시인의 정서적 특징과 정신의 자유 구가에 한몫을 다하는 에너지의 창출일 것이다. 시인의 정서적 공간을 추적해 보자 잘 달구어진 여름 한낮의 길을 신기루가 덮는다 그 속으로 영혼의 무게조차 가누기 힘에 부친 누군가가 그늘을 거느린 나무에 기댄다. .... 약....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더 울어야만 나를 한 겹 누구를 위해 벗어낼 수 있을까? <매미의 여름 나기> 중 전반에는 객관적인 서술이고 후반에는 주관적인 이미지가 작동되며 전반엔 보여주는 것으로 풍경의 느낌을 독자가 용해시키거나 아니면 간과하거나 유념할 사항이고 후반엔 매미가 곧 시적 화자인 ego로 들어오는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둘의 교합에서 자기를 대입하면서 사는 일이 이치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이 기교는 선명한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또렷한 비교 가치로 승화한다. 이 시인의 시는 그냥 무심코 읽으면 혼란이 올 수 있으나 다시 깊게 읽으면 네거티브 필름에 빛을 쪼이면 포지티브(양화)로 선명한 윤곽이 나타나는 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이를 이해하느냐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3. 메신저의 굴레> 새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으로 옛날부터 고귀한 존재로 인식을 키워왔다. 애 그런가 하면 인간은 늘 하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 하늘을 지향하는 정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향하는 꿈의 이름이기에 비행기는 다시 로켓이 되고 미사일이 되면 이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있고 달 혹은 화성이나 우주의 유영(遊泳)에의 꿈을 실현하는 시작의 실마리는 바로 새에 출발점이었다. 밤나무를 집으로 정한 새들 잠에 취해 뭉그적대는 나를 알람보다 먼저 깨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나와 나뭇가지를 건너 딛고 제가끔 넘놀며 재잘거리며 새들을 쫓는다 서로 깃을 다듬어 주다 한 마리가 가지에 걸린 햇살을 쪼아 먹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하고 나도 눈 시늉을 한다. 시나브로 입꼬리가 슬몃슬몃 올라가도록 내 마음도 몰랑몰랑 해진다. 순한 생명들의 열어 놓은 새털 같은 아침에 마냥 빠져들어 짝다리 짚은 다리에 쥐가 놀아 옴짝 못하고 서 있다. <하루를 새와> 1연에서 새와 나는 부지런한 새의 울음이 깨우는 관계로 이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취하기 때문에 새는 자기 생존 방법으로 일어났지만, 시인으로 다가온 의미는 잠을 깨우는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시에 2연에 따르면 새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아침의 동반자로 설정되어 사이좋은 새들과의 관계에 시인 또한 동화되어 새의 행동에 동반자로 변한다. 이러한 감염(感染)의 정서는 “몰랑몰랑”해지는 마음의 상태는 새로부터 받은 정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하면 새들이 열어놓은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망연함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림으로 걸린다. 새와 시인의 관계망은 “좋음”을 유지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보폭이 시작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는 모르나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끌어내는 논리를 굳이 설명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혹은 사물을 노래하는 자이지 해석을 하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요하여 누군가 떠올리기 맞춤한 풍경이다 갑자기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인정사정없이 톡톡 터지는 기억들은 입가에 한숨을 몰고 콧등이 매워지게 한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잊었다 여겼던 네가 살고 있었다. 멀고 먼 시간을 돌아 내게로 오는 사람 하나 있다. 하여 나는 기억의 불을 밝히려 눈 한 움큼 뭉쳐 설 등 하얗게 매달아 놓는다. <기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바람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바람한줄기 무심히 지나가고”로부터 의식의 창문이 열리고 이로부터 물길이 터진다. 그리하여 잊었던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존재의 이미지로 환생하면서 나와 관계의 과거가 문이 열리게 된다. 즉 그 사람의 모습을 인지할 때, 이 시의 모티브는 바람의 촉수가 일깨워주는 시발점으로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동하는 역할의 바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면의 세계를 깨우는 바람에 의해 외부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달자가 곧 바람의 힘이 될 때 시인은 비로소 길을 꺼내는 시작이 작품으로 창조의 길이 나타난 셈일 것이다. <4. 에필로그> 그의 시 “어떤 그리움” “희망 사항” “기억을 찾아” “하루를 새와” 등을 보면 창조의 기법이 액자(額子) 기법이 있다. 풍경을 그리고 다시 그 속에서 풍경이 들어 있을 때, 감상의 묘미가 길을 넓힌다. 시는 꽃과 자연의 모습이 보이고 향기가 하늘로 오른다. 이는 연상의 꼬리가 따라 이어질 때 풍경을 만들고 다시 전체의 풍경이 아름다움을 생성하면서 여운(餘韻)을 남긴다. 이런 특징은 시적 강조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지배소가 되는 사물 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아름다움의 연출은 언어 감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모자이크로 짜 맞추는 미감은 성숙의 시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시로서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그리고 심중의 깊이를 풀어내는 기교는 곧 언어의 운용에서 탁월한 미래를 기대하는 요소가 되면서 창작의 시를 “액자 시” “사물 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높이 사고 싶다. 삶의 고귀한 가치가 빛으로 승화하는 상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펜을 내려놓는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제 10집 무의식의 평행] [이승섭 제 8집 시의 숲에 빠지다.] [이승섭의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모두들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면 우선 후회와 더불어 찾아오는 의식의 발견에 직면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발전의 의미이고 자기 각성의 길을 확보한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돌아보는 일이라면 나이와 깊이 상관관계가 있으며 체험의 축적이 어느 정도 쌓일 때 지혜의 성을 구축할 때, 비로소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즉 젊음이 있을 때야 가속도로 달리며 길 찾기에는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의 언덕을 넘으면서 자연스레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정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즉 주름살 깊은 모습을 보면서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기에 흰머리가 보이고 잘못 살아온 인생의 후회 또한 겹치고 스크린 되어 검은 강으로 흐르는 의식의 소리가 새벽을 흔들고 있을 때 “허망의 덩어리”에 짓눌러 살았던 지난날들에 보내는 연민이 애절해지는 것이다. 찾고, 쌓고, 높이려는 이기적인 삶을 돌아보면 모두 헛것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무념무상”으로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에 눈을 뜨지만 이미 지난 바람 소리의 행방을 결코 찾을 수 없는 현재 - 고달픈 여정의 자화상엔 또 다른 강물이 흐르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갖는 심사(心事)이겠지만 돌아보는 길에서는 아픔이고 돌아오는 것은 허무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확인하는 것이다. 유난스럽기까지 하지만 여기부터 방황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논어』 양화 편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마치 벽을 보는 것처럼 같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시인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은 감정과 사리 분별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를 모른다 해서 세상을 살아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일 또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에는 아무래도 시를 알고 세상을 너그럽게 보는 안목의 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공자는 세상을 가장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이자 성인으로 자식을 향한 지혜로운 부탁이다. 아울러 시경(時經)에 소재한 시 305수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의 표현에서도 그가 어떻게 시를 접했고 일상의 진실한 삶과 시의 연관을 얼마나 중요 시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시는 진실이라는 방패를 갖추어야 그릴 수 있고 진정한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고정관념의 잣대로는 사물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험의 강에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시는 현재의 모범이 될 수 있고 미래의 안목 가치를 창조할 수 있기에 시는 생명의 영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자연과 사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단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복합이라는 데서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하는 일이 우선이겠지만 대별한다면 동양, 서양적인 태도 또한 저 아프리카 쪽의 삶도 귀중한 요인이라 하겠다. 사실 문화적인 흐름은 서양과 동양으로 대별했던 관례에 따른 차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에서 차이는 동양은 묵언 수양, 또는 침묵으로 전달하는 기교가 우선이라 한다면 서양은 행동 양식으로 증명하는 일로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옛날로 뒤집어보면 종교적인 현상이 지배적인 요인이라는 판단의 근거에서 언어의 표출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상은 두 개의 질서 속에서 세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결국 문학이란 서양적 표현의 기법과 동양적인 표현의 기교적인 차이는 필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삶의 재료가 소재로 작동된다는 것에서 본질은 같을 것이다. 다만 방법상에서 차이는 삶의 원리에 궁극을 찾아 나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 해답이 된다는 일치점을 예외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교란 본질에서 직접 닿기 때문인 것이다. 한가지 부연할 점은 서양의 Rheroric은 웅변의 뜻에서 출발하여 예술로 생각했던 서구의 사고와 동양은 애당초 침묵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차이에서 동양은 말과 기교에 발달 논리가 부족했을 지라도 인간 사고의 본질을 나타내는 차이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석가모니와 예수가 똑같은 결론에 답안을 작성한다는 예를 말들을 한다. 제자들과 소요하다 연못에 핀 연꽃을 들고 석가는 그냥 빙그레웃었을 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웃었고 다른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가를 몰랐다. 이러한 예가 “염화지중”의 미소 답안이라면 예수는 아마도 연꽃 앞에서 “제자들아 이리 모여라” 이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꼬을 피운 것처럼 너희들도 열성으로 기도하고 따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지의 말을 가정한다면 논리와 함축의 차이- 그 본질에 교훈은 같을 것이다. 방법의 차이는 결국 본질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는 “이지지”라는 말은 시론에 가득 들어있는 말이다. 동서양의 시를 막론하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지를 구사하고 창조하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시는 이미지 구축하는 것이 정서의 답이요. 이미지로 시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소설은 묘사라고 한다면 시는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무를 갖는 언어의 표현이라 이 점에서 시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공통된 정서의 집합을 이루는 특징 구유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같음에도 유사한 생각, 또는 표현에 일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민족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이론- 사고와 판단의 차이가 엄존하는 이질성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휴머니즘의 사랑』 사랑은 결합을 위한 갈증인 것이다. 휴머니즘의 거리가 좁혀질 때 비로소 사랑의 발생은 문을 열고 갈증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변모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거리가 발생 되고 그 거리를 유지 혹은 단축하려는 현상을 삶의 본질이라 정의한다면 갈증은 지정된 대상에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사랑으로 진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갈증이고 그 갈증을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의 따라 표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마음의 거리감으로 생각하는 거리와 실제의 현실감에서 바라보는 거리에는 욕망이 발동될 것이고 거리의 소멸은 존재와 대상을 현상에서 말하는 멸각(滅却)의 상태로 진전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을 위한 마음이 발동될 때 비로소 말의; 성찬(盛饌)이 준비되는 것이다. 시 또한 시인의 정신적 갈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에 대한 열망 혹은 표현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한 거리의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리의 파생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지려는 심리적인 거리와 또 멀어지려는 의도적인 거리가 있을 수 있기에 대체로 시의 경우 가까워지려는 점에서 갈증에 속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갈증과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원(圓)으로의 순환과 같은 연결이 되기에 사랑의 에너지는 갈증이 있기 때문에 비움이고 또 채움을 향해 에너지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는 단안에서 사랑은 인간이 실현하는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부재를 암시하기 때문에 어둠이고 비극이 되는 이치라는 것이다. 인간과의 사랑 혹은 우주 자연의 모든 대상을 바라보는 휴머니터의 가슴을 갖는 일로 강조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사랑의 마음은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 수 있기에 마술사가 될 수도 있고, 또 외롭고 쓸쓸함을 아름다움으로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로 치환(置換)될 수 있다는 이미지 발상법이라 하겠다. 3. 『자연풍경과 이미지의 꿈, 맥락』 자연이 주는 풍경 이미지는 가장 편리하고 찾기 쉬운 대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보고 듣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오며 자연에서의 일부이며 사건이며 삶의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들어있는 시가 곧 우리의 문제와 직결되며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단편적인 단일 소재로도 수 편의 시를 창작하는 자연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료(質料)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이미지로 구성되는 만큼 인간 모두의 자연풍경 이미지를 어떻게 그리느냐의 시의 근간이 이루어지기에- 꿈도 상상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로 이해될 때 삶의 길을 넓히고 생의 이유를 긍정으로 생각하는 빌미이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정서 이유가 명확하게 조절된다면 많은 시인도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꿈이 명료하고 정확하다면 이는 현실과 구분되지 못하는 잘못일 것이다. 꿈은 선계이며 이 설계는 신념을 가질 때, 꿈은 비로소 현실로 이끌려 나오는 속성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꿈은 모호하고 암담한 색채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꿈을 갖는 것은 신념의 공고화를 요구하고 또 찾아 나서기 위해 고된 일상의 언덕을 넘고 또 넘고 하는 것이다. 쉽고 편안하고 안정된 곳에서는 꿈은 나래를 접고 보이지 않는다. 안개, 호수라는 희미한 곳에서 다가오는 신념의 이름은 꽃의 향기를 대동하고 무지개색을 연출하는 장관이 될 수 있기에 자연의 꽃과 꿈이 보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살아간다는 삶의 이름은 누구나 무거운 것이기에 이런 이유로 짧고 빠른 길을 염원하고 있지만 인생의 길은 그런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직하고 솔직함에는 먼 길일지라도 삶의 자세가 아름다워진다면 시인의 정서는 그런 자리에 서있기를 고집한다. 어린시절의 이미지가 오늘을 지탱하는 깃발이기에 산속의 물소리, 그리고 벌, 달, 바람 등 자연의 모습은 천연의 시가 되는 재료가 되기에 삶이라는 말에는 방법의 문제가 담겨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따라 다니는 철학이자 숙명의 과제물인 것이다. 계절과 새, 그리고 싱그러운 자연의 풋풋함이 시인의 정신을 맑고 꿈과 만나게 되면 환한 길로 인도하는 것 같은 모습, 다음 시로 위안으로 삼는다면 사는 일이 희망으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꿈을 가지면 삶과 인생이 썩지 않고 싱싱해지는 소금의 빛이 되기에 꿈은 늘 그런 방향으로 지시하고 일러 주어야 멋지고 깊이가 넘치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속에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은 겉으로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의 이미지가 내면으로 꾸밈이 없어야만 살아나는 이미지로 결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동초의 시련을 감내하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묻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하여 진정한 삶은 성실하고 바른 삶 가치가 더욱 고귀한 이유로 돌릴 수 있다. 인생 평가는 이름의 무게나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 내면 가치로 환산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4. 『고독 그리고 허무주의』 고독과 허무가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은 나이의 깊음을 감지한 시심이 그런 방향으로 지향하는 정서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허무란 인간이 맞이하는 궁극의 지점에서 느끼는 공통성에 있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의 지혜는 시작과 끝을 느끼는 예지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젊은 날의 열정과 노년의 지혜에는 삶의 흔적이 축적되었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습득했기 때문에 노년에 이르면 나이브 하고 처연(悽然)함에 젖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아갈 시간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교차하기에 삶의 모습이 부드러워지고 느슨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돌아와 그 소득의 명세서를 보면 정작 어떤 것도 없다는 공(空)이라는 바닥을 실감할 때 돌아보는 길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여기에 허무가 짙은 음영을 그리면서 출몰하게 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꽃이 핀들 꽃이 진들 무아지경으로 모든 것 가고 있는데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나? 파라다이스가 있을 것인지 황홀경이 있을는지 허무로 모든 것 떠나가는데 이제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부자인들 가난뱅이인들 보이지 않는 작별인 것을 무슨 꿈이 필요하겠나? 이제 놓친 것 잃은 것 얻는 것 무의미로 지난 세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것을 <흔적의 세월> 지나가 버리고 떠나 버리고 작별인 것은 세월이 만든 사연이라 이러한 사연은 곧 허무와 고독을 불러오는 이름인 것이다. 이런 시인의 정서는 자연스레 마음이 공허하고 약해지는 자아를 키우게 되고 모든 것들이 떠나간 그리움과 작별의 아쉬움 그리고 부재에 따른 절망이 자리하는 시간 허무는 그렇게 스미듯 찾아오고 출몰하는 원인은 삶의 고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자연스레 찾아온 이유 나이는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와 가슴을 적시는 현상 때문에 작별이나 이별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란 자괴(自壞)의 마음을 가져왔고, 다시 돌아보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것이 상정(常情)인 것을 어찌하리오. 5. 『Humanism』이란 <사랑의 가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임무이지만 이를 어떻게 표현미로 이미지 승화 시킬 것인가는 시인의 재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사랑을 말하는 혹은 사랑으로 포장하는 점에서 휴머니즘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시가 모성을 바탕으로 진전할 때, 화려하거나 요란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섬세하고 따스함을 포장하기에 이는 어머니의 마음– 또는 사랑이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모두에 헌신으로 통하고 희생을 앞세우면서 세상을 포용하는 점에서의 아름다움이라면, 아마도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모성애에 대한 회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어머니의 태반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상을 가장 속 깊게 간직하는 정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귀의처의 공간이 어머니의 이미지라는 뜻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인 삶의 회귀를 뜻하는 일이며 휴머니즘은 시의 모태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피에로 엄니 날마다 반복이 변죽 되어 횐 종이에 빼곡히 그려보아도 당신의 얼굴 꽃 같은 미소 오간 데 없으이 주름살 백옥에 희생의 시간들이 그릴 수 없어 애끊는 마음만 통증으로 변해 버리고 되돌릴 수 없는 한탄 속에 오늘도 피를 토하는 마음 어찌하오리까? <피에로 엄니> 이승섭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인은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특별한 상징의 기법이 들어 있지 않지만 보편성에서 오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매우 구구절절하다. 분신이 날마다 변죽만 울리는 엉뚱한 말만 하시는 어머님을 지켜보는 이는 사실 다시 일어나시기 어렵다는 무 희망 속에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긴병에 장사 없다고 했듯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긴병을 간호하는 필자는 자식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애끊는 마음과 피를 토하는 한탄 속에 원천적 모태 의식을 발동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 안타가울 것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정감은 연민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화상을 보는 것일 것이다. 10년 넘게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그 마음 아마도 절벽의 늪이 아닐까? 하면서도 실날 같은 희망에 부모와 같은 인자가 휴머니즘의 일단일 것이다. 6.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이미지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 한다. 건축술의 일정한 방법은 필요할 것이기에 공간의 미학이나 효율성의 문제는 건축에 가장 중심을 이루는 핵심이라 한다면 시에서는 이미지가 그렇다. 이미지는 곧 시의 생명을 활력으로 전환하는 일이 언어의 평면성을 입체적으로 전환하는 가교적인 역할 또한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의 산, 강, 고향, 부모형제, 여행, 삶의 문제, 사랑, 그리움, 자연풍경, 바다, 등의 범주에 시의 표현이 한정되어 있다. 이는 모든 시인들의 상상력의 범주가 대체로 일치함을 추적할 수 있는 소재들- 모든 시인들의 시에 가장 많은 흥미를 유발하는 절실성과 상관이 있는 이미지의 목록들이다.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접촉하는 대상이 곧 시의 소재로 전환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상화가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시인마다 관심의 집중화에 따른 선택의 폭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많은 빈도의 시적 이미지는 거의 비슷하다는 특징이 우리 시의 표정이라는 점이다. 라고 정리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2. 12. 14.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전원의 자택] [소백산 비로봉 정상 부근 고사목(소백산북부사무소 사진제공)]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어느곳에서 어디서 오는 것인가 창조의 길은, 두눈으로 타고오는 구불길인가 아니면 곧은 길 고속도로의 숨가 뿐 길일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보일 것도 같지만 결코 그런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누구나 자기 시의 행로를 의문으로 설정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어느 순간에 시심의 발동이 시작하고 얼마동안의 의식의 중심에서 느닷없이 사라지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고심 고심을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고뇌의 길을 한번도 갖지 않았다면 그 시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의 시를 쓰는 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알고 또는 정립(定立)하면서 진로를 설정하는 행로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무작정 길을 가는 나그네는 초라한 행로의 비틀거리는 산물일 뿐 아니라 때로는 환희의 풍선을 타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표정을 관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소설과 달리 의식으로 엮어가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인의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무의식이 충만한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의식의 명확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퍼의 섬세함도 구분되어야 하는 - 더러는 알 길 없는 단애(斷崖)의 벼랑에서 건져 올리는 시심도 있고 또는 평온의 느긋한 행복속에서 향기를 피어 올리는 경우가 있기에 시는 예측불허의 심연(深淵)에서 확실히 만나는 아니 정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것이다 어찌하든 시는 순간보다 더욱 빠른 찰나를 가로지르는 섬광(閃光)같은 이름이라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접신을 만나지 못하면 시를 그리지 못한다는 것을 주문한다. 때로는 두려움과 침착함이 돌 같은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때라야 시인은 비로소 시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내가 믿는 창조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어눌한 병일지도 모르겠다. <2. 갈망의 변증법> 얼마전 지인에게 2권의 시집을 보내왔다.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과 읽으라 하기에 천천히 시의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얼마 뒤에 또 1권을 보내왔기에 지인이 사는 곳은 포항이라 이 친구는 많이 쓰고 너무도 부지런한 시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를 이렇게 빨리 쓸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4개월에 시집 1권을 쓴다는 그에게 정말 존경스럽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1년에 시집 1권도 상재 하기가 어려울 텐데 1년에 4권을 상재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접신이 내리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아지경 속에서 쓰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베개 밑 꿈자리 이라도 시린 밤은 일어나 짧은 시만 쓰자. 9월 상달도 추석 한가위로 접어 드는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횐남도 태풍이 괴력으로 변하여 한반도 제주도를 향해 사납고 거센 비와 함께 온다는데 안성에 거주하는 나도 좌불안석이다. 초조함으로 농사를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년 다가오는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이 현실에 정말 마음의 동요가 심해 글을 쓸 수가 없으나 어찌하랴 쓸 수밖에 없는 이 시간 검은 구름이 까맣게 몰려오는 창문 넘어 비 오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다. (미상불) 나이가 들면 불면이 찾아와 나그네의 밤이 날마다 지속될 때, 가을의 적요한 밤의 길이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할 경우 - 그나마 시인은 시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표정이 오히려 불면의 푸른 밤 - 오히려 친근감으로 전환되는 풍경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 긴 편지는 보내야 할 사연이 아니라 흘러간 사람 혹은 나같이 짧아지는 시름 깊은 지인들의 사념이 일렁이는 편린(片鱗)들 일 것이다. 그 긴 밤을 지나며 다시 하염없이 내리는 창문 넘어 태풍의 고요처럼 잎새 하나 떨리지 않는 태풍의 고요 속에서 거센 태풍을 기다리는 필자가 체념조차 아름다울 것인지 모르겠다. <3. 시의 위안> 시가주는 효과는 무엇인가는 시를 쓰는 목적에 근접하는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예술은 선(善))에 가깝다. 생기와 발랄 혹은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론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활일 것이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무목적이 아니라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기에 언제나 시인은 무료의 심심풀이의 풍선 띄우기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수반된다. 관(觀)이란 말에는 “보다” 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있을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엔 언어의 조합이며 후자의 경우는 짧은 응축의 경결함의 언어에 의미의 숲을 이룩할 수 있다. <4. 상상의 여정>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딪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따스하고 다감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이다.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 도시 체질은 간혹 망각을 앞세운다. 그러나 개울이 흐르고 얕은산 아래 동네에서 친구들과 작은 동산을 넘어 추억을 달리던 기억들은 잊지 못하는 냄새 - 이 후각은 언제나 버리지 않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고픈 귀향의 에너지는 심장 깊은 곳에서 숨을 쉬는 인자이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 여정이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언어의 귀향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길 만들기가 시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사람이다” 는 말은 블란서 뷔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외도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 <5. 정신의 구축>에필로그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의 힘과 신념의 부여가 갖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느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이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 있고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가 된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는 그런 꿈이 들어 있어야 하며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볼 때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내장 되었기에 자기애의 확신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목소리다. 둘째는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매우 현명한 도리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늘의 표정을 어떻게 나타내는 가는 자기 신념의 줄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우주 만물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한 청력을 보유하여야 한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洞察)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모습에 확고한 믿음이 전재 되어야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서번째는 문화의 힘과 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발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데서 나라 사랑의 본질이 시 – 문화의 진수라는 강조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런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되어야 한다. 창작이란 쉽고도 어렵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지만 접신(接神)을 만나야 깊고도 독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하면서 필자의 책임을 내려 놓아야 겠다. 2022. 11. 20.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황금들녁 사본 -공정, 정의 사진 1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문학 현상 대한민국의 문학은 농경사회인 18세기~19세기 산업화 혁명의 여파는 급진적 급속하게 인간 문학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어 산업화와 함께 자동차, 전기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3차 산업, 4차 산업의 토대와 전기가 마련되었고 1943년 컴퓨터 등장과 1976년 스티브 잡스의 위즈니악이 차고에서 PC의 발명은 인간의 문화를 획기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컴퓨터의 출연으로 터치의 문학도 급속도로 전환 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현상은 Pen문화에서 Power⤍Man의 중심문화가 컴퓨터의 자판- 터치로 넘어오는 시기에 여성의 중심으로 전환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 전반의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모든 분야에서 석권하는 이유는 Power의 남성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역할이 터치의 역할로 컴퓨터의 자판에 유리한 여성의 장점에서 더욱 눈부신 장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볼 수 있겠다. 문학의 발전 속도는 100년이라는 단위에서 30년을 지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단 3년이면 과거의 100년 변화와 맛 먹는 진전을 이루어 있고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감당하고 어려운 복잡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를 운위하는 중심에는 AI와 인간의 문화 - 기계와 인간의 문화 현상이 나란히 동행하면서 진행 되어지고 있다. 심지어 종교 조차도 금기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지구를 움직이는 서방국가들과 주도적으로 기술이 앞서 나가는 미국, 영국 등은 AI라는 종교까지 등장했다고 몇 년 전 들은 바 있다. 오늘의 인간은 점차 신(新)원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IT매체인 외이어드(Wired)sms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브스키 (41.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er)이라는 이름의 AI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에서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 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09월에 설립,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혜택을 당국에 요청하면서 2017년 실체가 밝혀졌다.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情致)하고 합리적인 설교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데 이른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아찔하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니, 기미스 히사비스가 개발한 알파고와 바둑대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경천동지할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05년 저술한 <특이점 singulalty>에서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고 2045년에는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런 추세를 추적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직업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간 대신에 컴퓨터가 수술을 하고 변호사, 판사, 회계사, 금융사무원, 의사의 직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사물 인터넷전문가, 인공지능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3디 프린팅 전문가, 드론전문가, 생명공학자, 로봇공학자 전문가, 등이 유망직업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히 어떤 가상 현실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분야는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누구나 말을 하고 있다. 2. 상상력의 미래 예술은 앞으로 주목을 받을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소설, 평론, 희곡 등 장르에서는 구조(plot)의 분야-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이미 로봇이 쓸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니온게이자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보도는 들었지만 2차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 작품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나 수필 등은 살아남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4600년 전에 티그라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수메르 문화의 유적지에 우르크 왕조 5대 왕인 길가메쉬의 신화를 점성토 636 장에 수메르어로 쓴 서사시인 영웅<길가메쉬>를 필두로 시의 길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2 천년 뒤 기원전 600~700년 전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이후 시의 발전은 인간 지혜의 발현(發現)으로 이어왔고, 이제 그런 현상이 4차 산업의 혁명적인 여지는 문학에도 엄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보수적인 분야가 문학이라면 보다 속히 그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장편을 외면한다. 여기서 시 또한 장시이기보다는 짧은 서정시의 아포리즘적(짧은글)인 현상이 기호를 자극할 것이다. 과거의 명작은 점차 읽히지 않는 추세는 오래된 현상이 되어 버렸고 서정시는 이런 견지에서 문학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의 계보는 매우 장황하다 못해 우후죽순이다. 본격적인 단초는 BC 7세기 알카이오스와 그리스의 노래를 담은 도리아 지방의 여성 시인 사포오와 로마에서는 BC 1세기 카룰로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그렸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엔 폐트라르카, 섹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죤 밀턴 등의 서정시로 14행 소네트의 두드러진 발전에 이어 18세기 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인 로버트 번즈,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위즈, 키츠, 셀리, 위고, 괴테 등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19세기 말과 20세기는 대부분 서정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이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서정시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왕비 송씨가 죽자 화회와 치희를 후실로 맞았으나 질투로 치희가 궁궐을 나간 외로움을 사이좋은 꾀꼬리에 비유한 서정시의 원조가 이별의 노래로 담아지는 내용이다. 5세기 신라의 향가 25수와 고려 가요인 <가시리>와 조선의 3음 중심의 양반 노래인 시조(13~14) 등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의 가락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양반들의 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들어 1908년 잡지<소년>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마리로 주제를 삼지만 이보다 10년 전 1898년 협성화보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고목가>라 할 수 있겠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서있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 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조지(쪼지) 마라 조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할꼬)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강근(强近)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 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외세<일제시대>를 딱따구리로 보면서 쓰러지려는 고목을 대한민국의 처지로 상징하는 노래는 절절한 애국심이 오히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생각과는 정신적인 집중이 층위가 완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봄, 부산에서 <전쟁 중의 봄> 연작 시조를 그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치는 연기 자욱하고 되 기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만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선 마슬엔 새 밭 메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빼어난 한시(漢詩)시인이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말 창경원에서 전국 시조 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를 내기도 했으니 대단한 시조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오면 김소월과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주류가 아니고 사실은 아웃사이더였다. 설익은 외국 상징주의 흉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서정시는 1930년대 후반 “시 문학파와 인생파” 등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양으로 출발을 했으며 이러한 명맥이 1960년대의 소용돌이와 70년대 민중문학 소용돌이에서 서정시인들은 위축과 민중문학에 의해 뒤 켠으로 물러난 시대의 강을 넘어왔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민중문학의 맹장들의 거처인 <창비>의 <문지> 등의 중심세력들이 문단의 목청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장악한 한국 서정시의 맥락은 침체와 의기소침, 위태로운 강을 비틀거리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이론가라고 하는 백낙천이나 고은 등 문단의 거목 행세로 노벨 문학상이라는 허풍을 부풀린 거품의 본질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작품성은 민중 타령으로 작품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우성과 민중 이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는 점이 비극 표현의 몰락의 길을 걸었지 않았나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Harvey Weinstein을 최초 고발한 애슐리 쥬드의 mee too의 파도에 좌초된 현상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빈약한지 부풀리기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절대 요소이기 때문에 허세와 풍선은 언젠가 터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3. 문학이라는 땅 인간은 자연이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인간 갖고 있는 모태는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자연과 하나가 되느냐의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이 주는 일부는 인간이 소유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과 공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은 다르다. 서양은 정복으로의 자연관이며 동양은 조화(調和)로의 자연일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양의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합일점은 4차산업혁명의 여파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생명력을 상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현실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 생활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의 학문, 통섭의 여파로 문학 또한 그런 경우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창조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딥마인드의 로봇과의 시합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여 상상력이라는 것은 깨우침의 훈련으로 그 높이를 더욱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의 인간화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사고에서 상상을 새로운 시발점이 가지를 만날 수 있고 숲을 만나 상상에서 또 다른 상상의 경지를 가질 때 인간의 문화에 중심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의 원천은 시(Poem, Poetry)를 강조하는 이유가 나변(那邊)은 아닌 것이다. 문학의 출발은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본질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영원한 명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세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의 이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허접한 정치에 매달려 이데올로기의 간판도 아니며 타령조의 애소(哀訴)도 아니며 오로지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문제인 사랑의 길을 찾고 말하는 일이 문학의 숙명이자 길이라는 점에서 시는 그런 상상의 원천에 도달하려는 창조라는 점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시(詩)다 라는 매쉬 아놀드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4. 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인지- 아미 로우엘은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모른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인 근원을 묻는 일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시가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의 융합인지를 묻는 영국 시인 그레이브스와 미국의 여류시인 새러 티스데일이 말한 흥분과 긴장의 결과요 해소라는 주장과 백일몽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의 몰입으로 말한 프레스콧의 말 등 한가지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잠재된 신비의 상태를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접신(接神) 즉 무아지경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공자가 말한 시경을 두고 시 300수를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는 말에는 무아경의 깊이가 없고 현상적 사실을 정리한 뜻에 불과 하다고 말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고 독자 또한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상상의 또 다른 창조의 추체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상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라는데 진리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문화 현상 또한 밑바탕 위에서 새로움을 구축하는 일이 문화의 근간을 이르는 인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만이 상상력이라는 결론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시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 같다고 확신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2. 11. 15.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시인 [문광호수] [태백 눈풍경] [부여 부소산성(영일루)]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1. 문학 현상 대한민국의 문학은 농경사회인 18세기~19세기 산업화 혁명의 여파는 급진적 급속하게 인간 문학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어 산업화와 함께 자동차, 전기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3차 산업, 4차 산업의 토대와 전기가 마련되었고 1943년 컴퓨터 등장과 1976년 스티브 잡스의 위즈니악이 차고에서 PC의 발명은 인간의 문화를 획기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컴퓨터의 출연으로 터치의 문학도 급속도로 전환 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현상은 Pen문화에서 Power⤍Man의 중심문화가 컴퓨터의 자판- 터치로 넘어오는 시기에 여성의 중심으로 전환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 전반의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모든 분야에서 석권하는 이유는 Power의 남성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역할이 터치의 역할로 컴퓨터의 자판에 유리한 여성의 장점에서 더욱 눈부신 장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볼 수 있겠다. 문학의 발전 속도는 100년이라는 단위에서 30년을 지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단 3년이면 과거의 100년 변화와 맛 먹는 진전을 이루어 있고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감당하고 어려운 복잡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를 운위하는 중심에는 AI와 인간의 문화 - 기계와 인간의 문화 현상이 나란히 동행하면서 진행 되어지고 있다. 심지어 종교 조차도 금기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지구를 움직이는 서방국가들과 주도적으로 기술이 앞서 나가는 미국, 영국 등은 AI라는 종교까지 등장했다고 몇 년 전 들은 바 있다. 오늘의 인간은 점차 신(新)원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IT매체인 외이어드(Wired)sms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브스키 (41.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er)이라는 이름의 AI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에서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 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09월에 설립,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혜택을 당국에 요청하면서 2017년 실체가 밝혀졌다.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情致)하고 합리적인 설교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데 이른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아찔하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니, 기미스 히사비스가 개발한 알파고와 바둑대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경천동지할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05년 저술한 <특이점 singulalty>에서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고 2045년에는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런 추세를 추적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직업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간 대신에 컴퓨터가 수술을 하고 변호사, 판사, 회계사, 금융사무원, 의사의 직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사물 인터넷전문가, 인공지능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3디 프린팅 전문가, 드론전문가, 생명공학자, 로봇공학자 전문가, 등이 유망직업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히 어떤 가상 현실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분야는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누구나 말을 하고 있다. 2. 상상력의 미래 예술은 앞으로 주목을 받을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소설, 평론, 희곡 등 장르에서는 구조(plot)의 분야-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이미 로봇이 쓸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니온게이자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보도는 들었지만 2차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 작품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나 수필 등은 살아남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4600년 전에 티그라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수메르 문화의 유적지에 우르크 왕조 5대 왕인 길가메쉬의 신화를 점성토 636 장에 수메르어로 쓴 서사시인 영웅<길가메쉬>를 필두로 시의 길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2 천년 뒤 기원전 600~700년 전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이후 시의 발전은 인간 지혜의 발현(發現)으로 이어왔고, 이제 그런 현상이 4차 산업의 혁명적인 여지는 문학에도 엄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보수적인 분야가 문학이라면 보다 속히 그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장편을 외면한다. 여기서 시 또한 장시이기보다는 짧은 서정시의 아포리즘적(짧은글)인 현상이 기호를 자극할 것이다. 과거의 명작은 점차 읽히지 않는 추세는 오래된 현상이 되어 버렸고 서정시는 이런 견지에서 문학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의 계보는 매우 장황하다 못해 우후죽순이다. 본격적인 단초는 BC 7세기 알카이오스와 그리스의 노래를 담은 도리아 지방의 여성 시인 사포오와 로마에서는 BC 1세기 카룰로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그렸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엔 폐트라르카, 섹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죤 밀턴 등의 서정시로 14행 소네트의 두드러진 발전에 이어 18세기 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인 로버트 번즈,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위즈, 키츠, 셀리, 위고, 괴테 등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19세기 말과 20세기는 대부분 서정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이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서정시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왕비 송씨가 죽자 화회와 치희를 후실로 맞았으나 질투로 치희가 궁궐을 나간 외로움을 사이좋은 꾀꼬리에 비유한 서정시의 원조가 이별의 노래로 담아지는 내용이다. 5세기 신라의 향가 25수와 고려 가요인 <가시리>와 조선의 3음 중심의 양반 노래인 시조(13~14) 등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의 가락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양반들의 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들어 1908년 잡지<소년>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마리로 주제를 삼지만 이보다 10년 전 1898년 협성화보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고목가>라 할 수 있겠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서있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 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조지(쪼지) 마라 조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할꼬)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강근(强近)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 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외세<일제시대>를 딱따구리로 보면서 쓰러지려는 고목을 대한민국의 처지로 상징하는 노래는 절절한 애국심이 오히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생각과는 정신적인 집중이 층위가 완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봄, 부산에서 <전쟁 중의 봄> 연작 시조를 그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치는 연기 자욱하고 되 기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만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선 마슬엔 새 밭 메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빼어난 한시(漢詩)시인이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말 창경원에서 전국 시조 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를 내기도 했으니 대단한 시조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오면 김소월과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주류가 아니고 사실은 아웃사이더였다. 설익은 외국 상징주의 흉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서정시는 1930년대 후반 “시 문학파와 인생파” 등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양으로 출발을 했으며 이러한 명맥이 1960년대의 소용돌이와 70년대 민중문학 소용돌이에서 서정시인들은 위축과 민중문학에 의해 뒤 켠으로 물러난 시대의 강을 넘어왔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민중문학의 맹장들의 거처인 <창비>의 <문지> 등의 중심세력들이 문단의 목청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장악한 한국 서정시의 맥락은 침체와 의기소침, 위태로운 강을 비틀거리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이론가라고 하는 백낙천이나 고은 등 문단의 거목 행세로 노벨 문학상이라는 허풍을 부풀린 거품의 본질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작품성은 민중 타령으로 작품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우성과 민중 이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는 점이 비극 표현의 몰락의 길을 걸었지 않았나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Harvey Weinstein을 최초 고발한 애슐리 쥬드의 mee too의 파도에 좌초된 현상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빈약한지 부풀리기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절대 요소이기 때문에 허세와 풍선은 언젠가 터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3. 문학이라는 땅 인간은 자연이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인간 갖고 있는 모태는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자연과 하나가 되느냐의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이 주는 일부는 인간이 소유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과 공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은 다르다. 서양은 정복으로의 자연관이며 동양은 조화(調和)로의 자연일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양의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합일점은 4차산업혁명의 여파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생명력을 상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현실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 생활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의 학문, 통섭의 여파로 문학 또한 그런 경우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창조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딥마인드의 로봇과의 시합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여 상상력이라는 것은 깨우침의 훈련으로 그 높이를 더욱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의 인간화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사고에서 상상을 새로운 시발점이 가지를 만날 수 있고 숲을 만나 상상에서 또 다른 상상의 경지를 가질 때 인간의 문화에 중심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의 원천은 시(Poem, Poetry)를 강조하는 이유가 나변(那邊)은 아닌 것이다. 문학의 출발은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본질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영원한 명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세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의 이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허접한 정치에 매달려 이데올로기의 간판도 아니며 타령조의 애소(哀訴)도 아니며 오로지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문제인 사랑의 길을 찾고 말하는 일이 문학의 숙명이자 길이라는 점에서 시는 그런 상상의 원천에 도달하려는 창조라는 점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시(詩)다 라는 매쉬 아놀드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4. 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인지- 아미 로우엘은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모른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인 근원을 묻는 일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시가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의 융합인지를 묻는 영국 시인 그레이브스와 미국의 여류시인 새러 티스데일이 말한 흥분과 긴장의 결과요 해소라는 주장과 백일몽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의 몰입으로 말한 프레스콧의 말 등 한가지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잠재된 신비의 상태를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접신(接神) 즉 무아지경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공자가 말한 시경을 두고 시 300수를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는 말에는 무아경의 깊이가 없고 현상적 사실을 정리한 뜻에 불과 하다고 말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고 독자 또한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상상의 또 다른 창조의 추체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상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라는데 진리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문화 현상 또한 밑바탕 위에서 새로움을 구축하는 일이 문화의 근간을 이르는 인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만이 상상력이라는 결론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시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 같다고 확신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2. 10. 02.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 시인 {이승섭 시평집}[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 시집[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2) [평택호에서 필자]
by 류남신 취재본부장[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를 만나러 가는 길엔 햇살이 유쾌하게 비추어도 좋고 비가 내려도 좋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변화의 정서를 담는 그릇이기에 비가 오면 젖어 찾아오는 그리움이 있고, 햇살은 찬란한 미소가 가슴에 점령되어 희망의 노래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즐거움이거나 아니면 슬픔이거나 시는 늘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는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에 사랑을 믿고 또 찾아가는 길이 봄비가 된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사랑의 호감으로 포장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시적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만날 때, 비로소 눈이 뜨여지고 속삭임이 들리고 희망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지고(至高)한 가치로 의미의 의상을 펄럭이는 향기에 묻히게 된다. 더구나 완성도 높은 시의 숲에 들어가면 황홀한 마음에서 하늘로 오르는 열락(悅樂)의 나래는 삶의 의미를 고상하게 그리고 높은 지향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꿈이 깃드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시는 꿈을 만드는 일이고 시인은 이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투척하여 언어의 조합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심지어 콤마 하나에도 열정의 땀이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시는 눈을 뜨고 독자의 곁으로 다가서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김여선의 시는 사랑과 그리움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서 다른 정서의 숲을 이동하는 특성이 있다. 하나의 중심에서 다른 정서의 숲으로 가본다. 『2. 의도적이면 길이 보인다.』 ⑴ 사랑 혹은 그리움 인간의 삶이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을 한계로 설정할 수는 없다. 삶이라는 중핵(中核)에서 그 주변을 위호(衛護)하는 여러 요인들이 모아 져서 의식을 형성하고 이 의식에서 자기의 의도가 가미된 행동 양식이 도출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행동 양식은 곧 개성이 될 수도 있고 생활을 이룩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개성이란 일종의 이름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중심의 의지가 특징일 때, 커다란 이미지가 누구는 “어떻다”라는 결과로 결정된다. 시인 김여선의 시에 그리움이나 사랑은 곧 그의 삶을 구성하는 인자(因子)중에서도 가장 중심을 이룩하는 이미지로 작동되는 시들이 선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명확하게 정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즉 그리움이 먼저인가 아니면 사랑이 앞선 의미인가에 대한 정리- 물론 그리움이란 아련한 느낌이 점차 굳어질 때, 사랑은 그 뒤를 따라오는 순서가 당연한 질서의 개념이라는 편이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리움의 요소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진실로 막연한 시작으로 사랑을 불러오는 계단을 점진적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그리움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일은 턱도 없는 것이다. 때로 둘의 이미지는 뒤섞어서 앞서거니 뒤 서거니 하며 교차 감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움은 첫째로 물로 젖어서 찾아온다. 비가 내리는 날에 풀잎은 잎을 벌려 온몸을 씻어내지만 그대는 낯선 그리움 하나 가슴에 몰고 온다. <그대> 시인마다 시적 대상을 의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동의 매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 혹은 현재 등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의식의 이동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보오들레오의 조응(照應)(Corres pondences), 발레리의 운율(melodies)나 랭보의 견자(Voyant)혹은 말라르메의 무한(lnfinite)등은 상징 시인의 의식 전달의 수단으로 작동되었다. 이렇듯 시인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막론하고 자기의 정신을 시로 옮기는 수단의 일환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물, 혹은 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햇살이 밝은 날보다도 오히려 “비가 내리는 날”에 시적 감수성이 그대하는 미지의 대상에 젖어서 다가오는 의식 혹은 기다리는 개념이 교차하면서 시의 행로를 진행 시킨다. 비가 “오면” 풀립- 이는 시인의 상징을- 씻어내는 정화의 개념을 수반하면서 “그대는/낯선 그리움 하나 가슴에 몰고 온다”는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면”의 조건은 그대가 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으로 기다리고 바라보는 마음의 애타는 면이 그리움의 가치와 등가(等價)를 형성하는 이미지가 성립되는 것이다. 시는 대상의 집중화에서 일체화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숨는다. 안개 속에 숨어도 그대는 보이고 은행나무 잎새에 숨어도 나직히 그대의 숨소리가 들린다. 새가 날지 않아도 호수는 그리움을 토해내고 달빛은 사각대는 바람 소리를 삼킨다. 숨는다 아무리 숨어도 그대가 보인다. <그대의 그리움> 중 사랑의 대상이 세상 어디에 숨어도 보이는 눈을 가진 시인의 의식- 그야말로 시를 위한 파파라치라는 명찰이 선명해 보인다. 어디에 숨어도 “그대” 미지의 대상- 사실 시로 바꾸거나 그리움의 연인으로 바꾸거나 시는 애매성(ambiguity)의 의상을 걸치는 것과 같은 뜻을 첨가하면 그대의 의미를 굳이 명료하게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안개” “은행나무 잎새” 등 세상 어디에 숨어도 찿아내는 형형한 눈을 가진 시인의 마음은 통찰의 시선을 레이저로 발산하는 것 같은 시인의 모습이 매우 진지하고 애달프다. 시인은 사물과 의식이 하나로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을 위해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시인은 숲을 소요하면서 혹은 차를 마시면서 또는 음악을 들으며 등 시인의 의식이 하나로 합치하기 위한 일종의 방법 찾기라면 김여선의 의식은 집중화가 남다른 특징으로 그리움의 거처를 어디든 찾을 수 있는 자신감 때문에 그리움이 사랑으로 길을 만드는 방법론이 뚜렷하다. 그대 오고 있는가 비 뿌리는 강을 건너 안갯 속에서 그대, 발을 적시는가 오늘도 낮은 창가에서 그대를 기다렸지 <그대 오고 있는지> 역시 비와 시인의 사고에는 그리움의 길이 보인다. 이는 의식을 연결하는 일이 곧 시의 완성도와 밀접하다면 심리적인 집중의 초점이 명확해진다. 이처럼 그의 시는 물이 가장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하는 기능이 있다.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방법론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면서 큰 길과 작은 길이 분기하듯이 목적을 위해 가는 방법이 한 가지 방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메신저의 본질은 “그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이 간절함에 모아들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백련/에서도 그리움은 절절하다. 지금 우리는 저 서글픈 영혼의 아픈 숨소리를 고이 간직한 채 찬 겨울 씨앗을 잉태하는 아픔을 되세기며 거센 비바람과 폭풍보다도 더 세차게 일고 있다. 먼 발치의 인내로 가녀린 시녀의 옷깃과도 같이 다시 사랑이라는 불씨 하나로 새롭게 테어나고 있다. <사랑의 불> 사랑은 달콤한 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선 신산(辛酸)하고 굴곡의 계곡을 지나거나, 천인단애(千仞斷崖)의 벼랑을 지나야 하고, 비바람 폭풍의 악착한 도정을 지나서 당도하는 어쩌면 슬픔의 정점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형극(荊棘)의 가시발길을 지나 사랑의 땅에 이르려고 열망하는가? 그 대답은 아주 간명하다. 고통의 심연을 지나 얻는 행복감 때문일 것이다. <3 육친의 정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다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궁극에서는 다른 것이다. 외면적인 행동반경이 아버지라면 어머니는 내면으로 따스함을 창출하는 뜻에서 다름이면서 같다는 말이 성립된다. 왜 그런가 하면 큰 울타리의 아버지와 그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주어지는 분담의 사실을 깨달으면 사랑의 공간이 따스해진다. 시인의 그런 균형 감각이 깨달음으로 표시 되는 듯하다. 늦은 귀가에 아버지는 서둘러 군불을 지피고 아궁이에 거품 문 생가지의 아우성, 매운 연기에 먼저 눈물을 쏟고 굳은 살 가득한 손으로 어린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신다. 아버지 기침 소리 가끔 들리던 밤, 어느새 잠든 나를 안고 군불을 때던 아버지 <아버지 사랑> 어제는 비가 내렸죠 어머니가 심어 놓은신 꽃에게 눈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소중한 자식 어머니의 예쁜 꽃입니다. 난 알아요 우리를 보듬는 거칠어진 손마디가 우리에게 주는 값진 사랑리라는 것을 <어머니 사랑> 아버지 역할은 비교적 어머니보다 행동반경이 크고 어머니는 내면적으로 사랑으로 대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아버지의 큰사랑 어머니의 작고 속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는 것을 시로 표현하고 시로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곧 사랑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식을 위해 온갖 시련을 감내 하면서 사투를 벌인다. 짐승이나 인간이나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아픔이나 비극도 몸소 감내하는 이유는 단지 종족 보존의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위한 존재의 합리화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누구나 그렇듯 맹목일 수도 있고 그런일로 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은 식솔을 위함이고 이는 긍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면 그 이유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은근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따스함이 어머니의 사랑에 닿고 있을 때 한 가정의 화목과 평온 행복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이기에 기둥으로서의 아버지 사랑은 너무도 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날아오르는 꿈을 위해>에필로그- 시인은 그리움과 사랑을 모티브로 그의 시 정신을 현란하게 요리 하는 듯하다. 모든 시의 바탕은 이런 정신의 기저(基底)위에서 출발하고 또 귀환하는 것이다. 그리움이 사랑으로 가기도 하며 또 사랑이 그리움으로 내장된 의상을 걸치는 순환의 이미지가 포장될 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라 본다. 또한 시인의 시적 기법은 물의 의미를 통하여 이쪽과 저쪽으로 이동하는 매개체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비나 물이나 바람의 이미지는 그런 충실한 전달의 임무-일종의 배달과 같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역시 삶의 깊은 원동력의 근거가 되고 이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에너지 공급의 은혜를 잊지 않고 노래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정이 깊은 시적 감수성이 예리한 듯하다. 삶의 동력은 다이나믹하지만 심사(深思)한 내면에서는 애조의 마음이 때로는 여린 듯하다. 그의 시에 자유 정신은 중심축을 이루면서 시의 깃발을 휘날릴 때, 안식과 평화의 도달을 염원하는 정서적인 사랑의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라 느끼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02. 09. 16.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이승섭 주필 시집]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by 조숙현 공동대표,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1>소요의 여행 사는일은 모두가 여행하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일상의 여행이 있는가 하면 미지의 공간으로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전자에는 목적지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만 후자에는 확실한 장소가 없이 떠나는 어둠의 여행일지 모른다. 인간은 어짜피 살아가는 일이 여행인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삶의 길을 떠나는 여행은 태어나서 마지막 공간에 이를 때까지 생의 길은 굴곡과 시련을 지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끝 모를 방황이 여정(旅程)으로 설정된다. 이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길이 아닐까? 시는 언제나 삶의 길에 대한 표현이 된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악착(齷齪)한 삶의 괴로움을 버티는 인내의 노래도 있지만, 더러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환희의 가락도 있다. 어느것을 선택하든 자기의 삶에 대한 한계를 갖고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시인마다 삶의 태도에는 일정한 규격화가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시화(詩化)의 길을 걷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표현의 맛을 구가하게 된다. 이를 시를 읽는 이유는 이런 맛깔스런 개성의 감상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세계의 지향(志向)에 감동을 보내게 된다. 사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정서와 전원에서 사는 사람의 정서가 시로 나타내는 표현은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그런가 하니 환경의 영향이 시로 흡수되는 과정이 표현의 묘미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본질이고 이 자연을 어떻게 육화하여 표현하는가는 흡수되는 환경의 결과에 따른 시적 표정- 도시는 메마른 상상의 기저가 중심이 된다면, 전원에서는 생산된 시는 물기 있는 상상의 흡수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시는 어떤 시일까? 의문이다. 2> 은유의 길 건너기 시는 비유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특성은 응축(凝縮)이라는 줄임의 미학일 때, 그 전개의 방식은 산문과는 확연히 달리 가지치기의 군말을 버리고 오로지 줄기만을 위한 표현의 미학은 곧 비유의 방도로 이미지 뼈를 어떻게 산뜻하게 건져 올리는가의 방법에 시인 재능이 귀속되는 것이다. 늘이고 펴는 일은 산문의 서술(敍述)기법이라면 시는 이런 방법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함축(含蓄)의 여백을 갖는 일이 우선 시 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학은 서양화의 논리의 구축과는 다르다. 왜 그런가 하면 서양화는 칠하고 다시 닷칠하고의 기교에 여백을 갖지 않는 채움의 정치(精緻)조력을 받아서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정신 표현이라면, 시는 이와는 달리 여백과 함축을 방도(方途)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해주는 고급한 여유를 갖는 비유가 성립된다. 때문에 시는 여타 산문의 어떤 것보다 어렵고 지난(至難)한 기교를 갖는 첫째 방도가 비유의 도구를 앞장 세우는 일이다. 물론 시적 전개의 장치에는 리듬과 이미지, 비유 그리고 상징이나 인유 그리고 패러디 등 다양한 구조적인 내포(內包)가 있을 때 풍윤한 표현의 길이 넓어지는 것에서 고급화의 방도- 시인은 결국 자기 정신의 고급화를 지향하는 예술논의 중심에 자기 정신의 의도(意圖)를 세우는 일이 언어 기교로 나타는 바, 이는 언어운용의 응축이라는 절차가 가장 먼저 등장하게 된다. 언어 감각은 생동감 있고 온화한 내면의 기품이 담담한 것을 풀어내는 기교가 신선함을 주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본다. 겨울과 봄 사이 봄 눈 녹듯 메마른 둥지 헤치고 이곳 저곳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간지러움 긁으면 긁을수록 더욱 가려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여 <겨울과 봄 사이> 중 사실 겨울이란 삭막하고 모든 물상이 잠들어 조용한 이미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의 겨울에서 점차 여명의 봄날로 다가들수록 “이곳 저곳”이 스멀 거리면서 살아나는 신비가 “간지러움”으로 생동감을 부추긴다. 이런 표현의 묘미는 결국 리얼한 표현의 여운을 대동하면서 시가 갖는 여백의 미학이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 글의 비유의 신선함은 마무리에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비 시적인 언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절함을 기준자로 한다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은 그야말로 시의 화룡정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어가 된다. 독목(禿木)의 앙상한 나무들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스멀스멀 솟아 나오는 부스럼딱지같은 여기 저기의 “선연한 눈빛”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모양- 시인의 가슴을-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생명의 보임은 찬탄을 불러 온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 본다. 앞산이 서운산이 각혈하는 어느 소리꾼의 득음인 양 긴 여운을 담아 오늘 아침 초대장을 보내 왔다 그리고 산을 안고 오는 각혈을 품으란다. 웅장한 소리꾼의 각혈을 그리란다. <가을 풍경> 가을의 깊이로 접어드는 풍광의 리얼함이 눈에 보이는 듯 “각혈”하는 소리꾼“의 비유가 강력하고 적절하며 상상의 여정을 초청하는 역활을 다하는 모습에서 아주 심오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각혈은 소리꾼의 길고 멀고 닦은 세월의 흔적이며 수행의 결과물이 완성된다. 득음(得音)으로 이어지는 길이면서 소리꾼의 존재가 빛나는 이름으로 환치되는 상상이 마무리되는 뜻 일게다. 완성의 표정을 시인에게 그리라고 하는 초청장에서 과정의 깊이를 상상하면서 각혈을 시인이 직접 표현하라는 것은 독자에게 펼쳐지는 것이기에 시의 맛깔이 나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함축의 묘미를 여백의 무궁한 깊이를 제공하여 재능을 보는 것 같아 심히 즐겁다. <2>의미의 전개와 플라톤의 변증법 모든 사물에는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실물과 접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구조를 통해 그리지만 시는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으로 전해진다. 의미는 곧 소설의 구조와 상통하지만 시의 의미는 결코 앞장서서 깃발을 흔드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추고 숙이면서 드러내는 은근미의 속살을 보여주는 이름이어야 한다. 우회하지만 결코 멀리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쉽게 또는 가까운 곳에서 비유의 의상(衣裳)을 걸치고 화려하게 혹은 고담(枯淡)한 정서의 깊이가 살아있는 것 같은 신선미가 전재되어야 한다. 시어의 선택에 어려움은 이런 조건들이 결코 정석이 없는 시인만의 뇌수(腦髓)에서 발원하는 맑음이어야 한다. 이는 미적 경험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표현되는 과정에서 시인의 숨은 기교가 발휘되는 특성을 뜻한다. 결국 의미는 감동의 일차적인 관문이고 이 관문을 지나면서 삽상(颯爽)한 기운을 대동하는 데서 의미의 신선감은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온몸으로 밤을 노래하는 너 홀연히 들어 날 아득한 세상 별 자리로 이끌며 새벽을 낳는가 왜 그리 호젓한 음악을 틀어 놓는가 무엇이 안타까워 무엇이 외로워 이슬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너 함께 노래를 부르자꾸나 <한 밤의 귀뚜라미 노래>중 ‘온몸으로’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 과정을 지나면 비로소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이 자기화가 되기 때문에 신기한 ‘새벽을 낳는가’라는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여백이 담겨진다. 이는 시적인 안정감 즉 시인의 정서 균형이 평형을 유지하는 건강성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예술의 미학에서 이른바 개념에 알맞게 이룩된 형태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상(理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정한 사물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시에는 비유로 시인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때, 자신 속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역할이 수행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결국 이런 자기 표현의 그림이 비유와 상상의 결합으로 형태화되는 과정이 수립되는 결말이 감동으로 정리 된다는 뜻이다 <3> 갈증과 물의 변증법 시는 자연의 이치와 등가(等價)를 이룰 때, 합리성을 갖는바, 세상의 진리와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라는 의미는 상식과 같고 이 상식은 인간이 정한 오랜 도덕적 기준이다. 물론 이 기준은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의 진리이다.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또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갑고 있는 기준이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자체가 절대의 논리에 갇힌 존재가 아니고 때에 따라 변하는 일이 당연지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갈증에는 물이 필요하고 목마름을 채우면 이내 또다른 공간의 욕망이 발동될 때,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고 이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또 다른 영역의 변화가 진행형이 된다. 그렇다면 갈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구가 일어나고 갈증은 물의 부족을 요구하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존재 자체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체는 순환의 기운이 있고 이런 요구에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 갈증의 농도가 도(度)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둠이 태풍처럼 몰려와 거대한 몸 짓으로 위협하지만 지극히 작은 촟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빛의 그림자일 뿐 헛것에 넋 나가 탕진한 젊음이다. 어떻게 살아갈 할 것인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붙잡고 습한 음지 굼뱅이처럼 붙잡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숨죽여 견뎌온 어둠의 시간들 닿지 못할 먼- 별 꿈꾸며 뜬눈으로 밤새는 목마른 동물이다. <어둠의 빛> 중 어둠은 빛을 낳는 모태로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인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지극히 작은 촞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어둠이 포장되었기 때문에 빛을 향하는 행동이 다음 단계의 진전을 예약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벗어나려는 의지의 물살을 일으킬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상징인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와 별을 꿈꾸는 ‘목마른 동물’ 로 갈증의 늪을 벗어나는 길이 보인다. 고난의 상징인 얼음장의 아래로는 소리로 환생하는 흐름에서 절망을 탈출하는 시인의 마음이 밝아지는 듯하다. 이는 곧 춘봄을 암사하는 것 같다. <4>산뜻한 자연의 시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시인의 정서가 감수성의 표정이라 하겠다. 어떤 정서가 주류를 이루는가는 그의 삶이 뒷받침될 때, 시의 표정으로 말하게 된다. 시는 순수의 정서가 온화하고 질박(質朴)하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시어로 포착되는 심성의 이유도 있지만 청량한 자연의 요소가 바탕을 이루면서 더불어 시인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풍광이 한몫 거드는 요소도 부인할 수 없겠다. 생동하는 은유의 숲속을 거니는 신선미와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는 생명 약동이 의미를 생산하고, 물의 요소가 많은 것도 자연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시심의 흥취(興趣)라는 생각인 듯하다 특히 풍경을 만들면서 여기에 소리의 개입이라는 시를 찾고 사는 독특한 득의(得意)로움 같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에필로그 한다. 2022. 08. 23.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안성 금광 호수 어느카폐에서 선배와 담소] [이승섭 시평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1> 시는 과학이라는 논지도 있고 시는 과학이 아니라 먼 거리에 잇는 애매성(曖昧性)원리가 작동한다는 논지도 있다. 시평을 하는 선배는 행과 연을 나열하는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의식을 정치(情致)하게 또는 정확한 논리적 구축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시의 품위를 나타낼 수 있고, 시가 필요로 하는 여백의 함축미라 하는 선배도 있다. 즉 응축에서 많은 이미지를 내포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언어의 사용에 정확한 운용(運用)이 필요하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확고하면서도 유연미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는 감동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는 결코 액자 속의 사진과 같은 정물화적인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의 특성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지이다. 정치도 살아있는 생물이라 하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주도하고 그 변화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줄 아는 방법이 그 나름대로 내재 되었기에 생명을 신비와 운용의 바람을 넣을 수 있으며 개성을 살리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일정한 표정을 나타내고 또 표정을 관리하는 주체적인 개성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도정(道程)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를 한가지로 정할 수 없음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없는 이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인간에 의해 표현하는 인간이 표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철학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이치가 있고 인간을 탐구하고 나타내는 시의 자유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시에는 인간의 삶이 있고 애환이 시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며 시를 아름답게 포장을 해야 하며 종이 등으로 포장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기에 어떻게 고착화 시키느냐의 따라 이치가 차이나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인 기교이면서 감동을 생산하는 이유가 있기에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시에는 계절이 표현되고 대칭적 사랑이라는 논지가 필수이며 가족, 모성, 등 다양한 사물을 분해하고 정서를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의식의 흔적 찾기 Personality는 다른 사람에게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한 개체의 모든 인간적, 감정적, 의지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특성의 통합된 체계를 말한다고 심리학에서는 지적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특징적인 흐름이 일정한 지주(支柱)를 이루면서 삶을 형성하고 지속 되는 바 이를 개인적, 사적인 특색으로 지칭하게 된다는 점이다. Allport는 환경에 대한 독자적인 적응을 규정하는 심리 즉 한 개체의 내부에 속하는 생리체계의 역동적 체계라는 말로 정리를 했다. 여기에는 자아와 초자아를 구분 짓게 만드는 모태인 id와 ego와 suqer ego등 복잡한 의식 체계는 결국 한 개체의 정신적인 흐름으로 결정된다. 모든 의식은 personality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모든 시는 자아와 초자아 이드 등의 사이사이를 왕래하면서 삶의 감수성과 의식을 나타내는 생명의 소리에 특징이 특징이 포함되어 발언한다. 1) 사랑의 의식 많은 시에서 사랑은 가장 많은 소재로 작용했다면 사랑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거나 풀어낼 수 없는 문제와 해답 사이에 가로놓인 대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숙자의 시에서는 사랑이라는 암시- 비단 남녀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닌 타인과의 정감 또는 남편 아니면 자식과 주고 받는 정감의 모든 일들이 사랑이라는 명칭에 포괄되는 인상이 너무도 짙다. 어여쁜 꽃잎 사이로 사르락 젖어드는 이슬같은 사랑 하나 영롱한 이슬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네 벙그러지는 꽃잎 사이로 아스라한 꽃잎 만들며 가장 고운 미소로 아름다운 미소 보낸다 청아한 하늘에 두둥실 구름도 너무도 예쁜 사랑에 더욱 눈부시게 비추고 끝없는 메아리 되어 들리는 사랑 노래 하나 영롱한 이슬에 힘입어 빛을 내는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먼 길을 여행하며 피어나는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구려 <사랑의 의식> 사랑에 비밀은 누구나 갖고있는 열쇠가 아닐까? 비록 그 열쇠를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죽음으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며 춘향과 이도령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랑이든 사랑의 이름 앞에 설렘과 아픔 혹은 행복하고 기쁜 추억들이 간직되었기에 사랑은 보편성으로 이해되는 지근거리에의 이름일 것이다. 김시인은 사랑의 개념을 “꿈”과 “추억” 그리고 미소로 “보내는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찾아오고, 가져오는 이기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또는 받음에서 느끼는 행복의 중심을 찾아가는 모습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이 들리는 것을 하늘의 소리에 비유함으로써 “사랑 노래하나”는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길, 행복에 접근하는 모습이 되면서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헌신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라 보내는 혹은 바치는 헌신이 될 때, 비로소 참된 사랑의 이름에 다가갈 수 있기에 고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같다. 머릿속 각인된 목소리 당신이 준 사랑을 호흡하며 둘이 만든 사랑은 행복인가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주는 다정함 포근함입니다. 둘만의 정원을 만들어준 임 눈을 뜨면 곁에서 은은한 향을 전해주는 그윽함에 사랑을 먹습니다. 나목도 아름답게 보이고 외로운 가로등도 정겨운 것은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의 사랑>중에서 정말 사랑은 둘이 만들기 때문에 빛=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짝사랑도 있겠지만- 아울러 행복이라는 느낌을 생산할 수 있고, 다정함을 느끼는 에너지의 파동은 더 큰 사랑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둘만의 정원에서”에서 느끼면서 감상하는 향기에 취하는 절차가 수행되는 것이다. 이런 향기에 젖을 수 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고 영롱하다. 심지어 나목도 그렇고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가로등조차 정으로 채워지는 의식은 바로 사랑이라는 정서에 감염되었기에 아름다움으로 눈이 떠지고 환상의 세계와 접촉하며 승화되는 것이다. 행복은 이런 무의식이 가져오는 세계- 사랑의 위대한 옷을 입은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김시인의 사랑은 하나가 아닌 둘이 결합하는 우주의 원리를 인간에 결합하는 계산법인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온 우리들 우리 이제는 얼마나 산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아픔도 많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웃음으로 날려버릴 친구들의 가슴이 있지 않는가! <친구>중 인간이 살다보면 고독은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이럴 때 친구는 발을 맟출 수 있는 대상이면서 생의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이름으로써, 친구는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름이기에 우정은 더욱 귀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랑도 친구로 시작하고 삶도 친구로 정감을 나눌 때부터 세상은 따스하고 다정한 공간으로 화할 수 있기에 우정에 갈증을 갖는 이유가 된다. 추억을 만들고 세상의 종막이 올 때까지 발길을 함께 하려는 김 시인의 마음은 따스하기 때문에 더욱 따스한 그리움을 우정으로 포장하려는 의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3> 에필로그 하면서 시인의 시적 무드는 안온하고 따스하다. 봄의 향기 짙은 꽃을 피우려는 발심에서 노력의 얼굴이 크로스 업 되고, 순수한 마음에서 꿈과 희망을 간직하려는 일면과 사랑의 마음이 시(詩) 전반을 장악하는 원천이 되는 듯하다. 상징의 숲에 들어 있는 요소들로 보이며 이동의 메신저이면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생명의 원천 의식을 뜻한다. 아울러 가족은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에너지를 저장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동반자” “어머니” “바다” “봄비” 등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이미지들은 곧 시인의 시에 간직된 밝은 표정에 들어 있는 미소와 같다. 아마도 남다른 시인의 특색을 보면서 더욱 기대가 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며 나가려한다. 2022. 08. 18.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조숙현[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시인의 꿈은 1편의 시를 위해 정성과 혼심을 다해 경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을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둘째는 시의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정적 언어의 선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시는 공허함만 부추길 수 있음도 명심할 일이다. 전 세계 많은 인구가 자리하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것이기에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稀少)하기에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 분신일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이라는 명패를 패용함과 동시에 무한의 책임을 갖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함이다. 유기연 시인의 시에는 여러 가지의 표정이 묻어난다. 식물 정서, 사랑정서, 환경 정서 등이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삶의 애환과 정신의 지향 사랑에 대한 애착 등이 표출하는 것으로 유추가 된다. 시는 낯설게 표현하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표현은 종국에는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겠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도시의 복잡한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 흔적들을 만나 보기로 하자. 『2. 정서의 표정들』 1> 식물 정서 시인은 누구나 개성의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로 관심과 집중을 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은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한다. 대체로 식물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은 다이나믹한 것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작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유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으로 정신의 문으로 들어 가보자 텃밭 끝자락에 실하게 여문 호박 하나 살며시 집에 옮겨 놓으니 텃밭이 따라왔다. 혹여 허기를 채워주었던 비우며 살았던 세월이 미소 지으며 굶주림 세월 견디었던 부모님 가뭄과 폭염을 견딘 커다란 호박 온 집안에 가득하다. <과거의 상념> 사실 호박 하나가 일상에서 줄줄이 풀려지는 이야기는 과거의 길을 넓게도 채색 되는 듯하다. 가난한 시절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 하나가” 서글픈 지난날들의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부모님의 가난을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애환의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으로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회상하는 시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호박이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부모님의 가난과 아늑하고 포근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드는 듯하다 이런 풍경과 추억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렸던 동화된 마음과 사랑의 감성이 식물 정서와 지배적인 양(量)으로 시적인 허기를 채우는가를 증명하는 예로서 감흥이 솟아 나는 듯하다 하냥 걷는 길에 만상의 태고의 신비에 산길도 꽃으로 돋아 이리도 고왔는가? 뉘, 있기에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싶다 –중략- <산속 길에서> 시의 구조란 길-꽃-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산속 길을 걷는 목적의 좌표가 시인은 태고의 신비를 만나 산길도 꽃으로 펼쳐진 길을 유영하며 산길을 걷는다. 아무튼 꽃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미지칭으로의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을 표하면서 “고왔는가”의 새삼 발견에서 역시 꽃은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되는 듯하다 시인은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없이 내어준 노을 진 들녘에 찬비마저 내리고 아픈 잔등 쓰다듬다 한기 견디며 삶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문다 까마득히 저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시린 헛된 꿈도 가고 내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도 쓸고 간다. 세월이- <삶의 뜰>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 한기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독목이 있으므로서 봄을 예비하는 안온함이 자리하는 느낌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의 운행 원리와 상통을 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감으로 일어난다 마지막 잎새하나 바람이 스치면 엄혹(嚴酷)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삶의 뜰”은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자리가 보인다. 식물 정서는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이미지로 작용하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듯하다. 어머니 손때 묻은 항아리 그 안에 수련 있어, 고단한 삶을 이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 수려한 어머니의 자태가 있다. 물그림자 뜬 자리 물 배추 펴놓고 가을 햇살이 와서 사랑으로 아픈데 창문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어머니 분냄새 처럼 함초롬 향기 듣는다 <수련>(차분하고 고운 상태) 어머니와 수련의 향기가 동가(同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이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엔 시심이 누리는 연상작용이 복합적인 것 같다. 이는 조용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긴다.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아름다움과 향으로 오르는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되지 않을까? + 2> 부모 가랑잎에 하얀 서리 내리면 깊은 골짜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 시름을 보듬어 소쩍새처럼 소쩍새처럼 못내 서러워 운다 –중략- <아버지>에서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형극(荊棘)의 나날에서 끌려가는 형상- 가족을 책임진 신음을 생각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다. 이는 “소쩍새처럼”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가 고난의 아픔이 연상 된다. 더구나 “서러워 운다.”의 내포는 풀어낼 수 없는 고통과 참혹성을 나타내는 비유일 것 같다 누구나 과거는 무겁고 회상하는 삶의 그늘이 무게와는 달리 친근하고 애착이 가는 그런 경향이 다분하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기에 비록 가난이나 아픔조차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발동된다는 점에서 시름이나 서러움일지라도 동화되기를 염원하는 뜻이 된다. 아울러 부재한 부모에 대한 회상은 더욱 무게가 가중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기연 시인은 이런 정서를 시화(詩化)하는 점에서 다감한 성정으로 생각된다. 나를 찾으면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더 큰 나로 변한다고 한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나를 위해 운행한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나를 찾는 일은 곧 우주의 원리를 찾는 일과 같을 것 같다. 나를 아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고 종점이기에 시련을 감내하면서도 나의 의미는 삶의 가치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부끄러움에 전신을 감추었다. 되비친 것이 사랑이면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중략... 나는 무엇으로 거울 앞에 풍경을 피울 것인가 마지막 아름다운 고백이 되비치기를 기도하며 거울을 닦는다. <거울> 중- 나르시스의 이름은 자기에게 대한 탐닉(耽溺)을 의미한다 거울은 자기를 반사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그것이 자기라는 확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편에 영상으로 나타난 자기의 분신일 뿐이다. 그 분신 속에는 보이는 마음이 없기에 오로지 형태만으로는 완전한 자기의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그러나 자기와 반대편에 서 있는 거울 속에 자기를 부정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형태조차 부정하는 곳에 의미는 찾을 단서를 확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되비친 거울 속에 자기를 애착하는 관심의 농도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비칠 것을 염원하는 생각이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 사랑의 진원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면 자연스레 도착한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하기에 그렇게 간다, 하더라도 사랑의 안온함을 누리기엔 지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고개를 넘으면 다시 고개가 나타나는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 시인은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남편을 향한 노래로 한정 되어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눈이 먼다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한 날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 중 저녁 노을에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 유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사랑을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수사의 사랑을 하는 것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를 보여주며 순수하고 담백한 뜻을 가질 때 사랑은 고귀한 가치의 개념으로 정리 된다면 유 시인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이 아닌가 한다. 3. 에필로그 유 시인의 시는 담담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 짙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점에서 푸르른 식물 같다. 부모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따뜻한 정이 안으로 남기는 점에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러한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되는 듯- 하지만 물론 사랑의 요체는 한 삶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직 사랑을 향한 정성과 시로서 표현하는 인상이 전부이지만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의 지향점,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과 사랑을 위한 현실의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의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놓고 나가련다. 2022. 08. 03.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강해심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