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과 조정 거리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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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2 09:57:24

    시는 무엇으로 쓰는가의 시인은 물음을 항상 갖는다. 누구나 펜으로라는 답을, 하겠지만 도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란 시인 영혼의 기록이며 체험과 상상력의 결합이 주는 맑은 정신과 수수를 가질 때, 시의 진액을 문자로 의탁하여 시인의 정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때론 주술사이거나 냉엄한 현실을 자로 잰 듯 치밀한 정신을 엮어내는 논리적인 사람 특별한 사람이라고 칭하여야 한다. 귀걸이 목걸이 등의 치장으로의 시가 아니라 들끊는 내면의 순화를 거치면서 걸러낸 영혼에서는 독자 앞에 꾸밈없이 감동의 길을 만들게 된다. 치장하고 꾸미고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고 순수한 민낯일 때, 가장 평범한 언어의 조립에서도 생명을 득(得)하는 시의 길이 강물을 이루게 된다. 비유하자면 꾸밈이 없는 자연의 일부를 옮기는 시는 곧 좋은 시가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꾸밈이 없는 천의무봉에는 진솔하고 질박한 순수가 호흡하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요컨대 시는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진실로의 가치에 무게가 담기게 된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자유정신의 발현이 당도할 때, 가능한 임무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 7>에서 억지로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듯 자유의 영혼은 지식을 습득하는데도 자유의 영혼이라는 말로 쇠사슬도 얽혀서는, 안된다는 뜻을 피력했다.

    물론 도취의 심연에 빠지기 전에 자기 영혼을 희망으로 날리는 정신의 모음이 전제될 때, 시 또한 자유로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철학의 산파술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산파술이라고들 말한다. 깨달음의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알려 주기보다는 알 수 없는 길을 제시하고 암시하는 역할이 선행된다. 시 또한 그런 교훈적인 목적으로 다가들 때, 독자의 가슴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직접적인 교훈이 아니라 포장까지 감싸는 간접의 방도로 독자에 다가들 때, 오랜 관습의 사리들이 비유로 인용된다. 어쩌면 전통이 현대로 이어오는 길을 상징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가 갖는 영역의 일환일시 분명하다.     

     

    화로 부 젓갈에 얹혀 자글자글 끓던

    뚝배기 장맛을 아느냐 너는

    그렇게 지진 장에 횐 쌀밥에 갓김치 걸쳐 먹던 그 맛을     

    찌그러진 양재기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부어 한숨에 쭉-욱 들이키던

    차디찬 막걸리 맛을 너는, 아느냐

    아랫목 뜨끈한 구들장에 열십자로 드러누워

    날 잡아 잡 수, 곤한 낮잠 맛을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중에서     

     

    세상이란 늘 변하며 작금엔 변화의 속도가 우리네가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어제의 지식은 오늘에 와서는 사용 불가의 이름으로 변하는 것도 미처 알아차릴 수 없는 속도에 휩쓸리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제4차 5차로 이어지는 혁명의 예고는 미처 숨고를 틈도 없는 지경에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아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미래가 불투명할 때, 추억은 위로의 단맛을 알려준다. “뚝배기 장맛과” “횐 쌀밥”과 “막걸리” 그리고 “곤한 낮잠”의 맛을 설의법으로 독자를 자극하는 “아느냐”로 다그칠 때, 향수의 이름이 회고의 길을 넓힌다.      

    여기에 이해의 도를 높이는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는 체험의 농도가 많은 사람에게 확실히 “그럴 것”이라는 긍정이 오지만 뜀박질 젊은 세대에겐 “무슨 소리냐”의 의아도 있을 것이다. 찬 막걸리보다 맥주 맛이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전통은 현재를 아는 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시인이 웃고 있을 것이다.     

       

    3. 부끄러운 일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의 분기가 있을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과 겉으로 세상을 휘젓는 사람의 태도가 있다면 둘은 다른 개성으로 펼쳐지는 행동이 보일 것이다. 내면과 외면의 차이는 결국 시적 분위기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면 전자는 조용함, 그리고 후자는 시끌벅적한 뉘앙스가 승(勝)할 것이다. 의지와 추슬림이 시인의 섬세한 정서라면 자아를 깨우치고 다잡는 길을 선택한 시적 무드가 적요한 의상을 입는다.     

    꽃 앞에 서면 나는 부끄럽습니다.

    나무 앞에서도 나는 부끄럽고

    풀잎 앞에서도 부끄럽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했느냐고 나뭇잎 하나

    꽃 한 송이라도 제대로 피워 보았느냐고          

    돌아보면 거짓과 욕심만 가득한 모습

    아무리 변명해도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

    오늘 하루도 부끄러운 하루가 지나갑니다.      

     

                      <부끄러운 일> 중에서      

     

    돌아보아 부끄러운 자책의 1연에서 원인을 서술하고 2연에 오면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했는가를 자문자답할 때, 그 결과는 “거짓과 욕심만 가득한 세상” 세상살이에서 반성이 가득하다.

    인간은 항상 부끄러움을 가리는 일상으로 변명으로 넘기면서 살아가는 존재-

    이런 원인으로 부끄러움을 자책하는 시인의 모습은 선량한 사람의 처연함이 떠오른다. 잘못하고 다시 지우면서 하루하루 자각의 길이기 때문에, 사회의 밝음을 가져오는 불빛이 될 수 있다. 이리하여 시인은 한 편의 시로 자기를 떠나 사회의 불빛으로 남아야 하는 합리성에 도달한다.   

       

    4. 내 집      

     

    나를 일인칭이라 부른다. 내 집이거나 내 소유이거나 나와 연관된 이미지는 최우선으로 친근함을 갖는다. 내 것과, 남의 것이라는 분리에서는 소유의 개념이 자리하고 일정한 경계가 엄존한다. 내 경계를 넘어가면 분간 없는 사람으로 비난을 자초한다. 이를 사회생활의 방편이라 칭하면 나를 아는 일은 모든 일에 우선한다. 그래야 남을 알 수 있고 남을 알면 다시 나를 정립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도덕률은 사회 규범이 되고 다시 지키고 선을 넘지 말아야 할 규칙으로 확립된다. 내 집이라는 소유에는 자기 영역의 존재가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    

       

    창밖 하늘가 구름 흘러도 더 이상 늙지 않는 저 사람 곁

    아직은 숲의 말을 철마다 울타리 모아 담는 반듯한 벽뿐인 하야 집터     

    어느 훗날 내 숨 놓고 생전 살던 집 떠나는 때

    정히 사진 한 장 들고 입주할 국립 호국원 그의 곁에 영면의 주택 내 집이랍니다.     

     

                                              <내 집>             

      

    나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사람이 세상에 부재할 때, 또 다른 집이 마련된다. 이른바 유택(幽宅)이라는 문패를 걸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야 할 집-

    가까운 사람의 곁에 영원을 마련하는 확실한 예상 앞에서 삶의 길이 망연한 뉘앙스가 안개발을 일으킨다. 현실에서 내 집이 이주와 이사를 반복하면서 안온함을 유지하는 방편이었다면, 마지막으로 돌아갈 유택은 아주 오래오래 내 소유로 이름을 남기지만 자고 작은 호국원의 칸칸 이름에는 국가 유공자 혹은 전쟁에서 산화한 사람들이 잠든 곳이다. 아울러 칸칸마다 명패가 쓸쓸함으로 배우자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는 안식의 거주처가 된다.           

     

    5. 비가 내린 뒤     

     

    자연은 시요 시는 자연이라고 할 때, 순환의 논법은 다시 이면에 숨은 시인도 자연의 일부가 될 때 세상은 곧 자연의 조화에 미감을 도출하는 것이 시 쓰기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자연과 시인이 육화 될 때, 비로소 안정감의 풍경이 그려진다. 이로 보면 시는 곧 자연의 일부를 옮기는 정서의 의도된 작업에 불과하다.      

    모든 시는 궁극적으로 밝음을 지향하는 감수성이다. 왜냐하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걸을 때, 독자는 의도된 즐거움과 희망이란 글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린 산하는 맑고 깨끗하고 순수의 의상을 나폴 거리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는 시인의 정서에 담긴 지향의 이미지가 언어로 포착된 느낌이다. 비가 내리면 녹색과 수면 그리고 새들의 생기발랄한 비상과 바람조차 화창한 날에 동화되어 맑은 표정을 더욱 밝음으로 유도할 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는 세상의 화려함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언어로 나타낸 감성이 따뜻하다. 이는 맑음에 동화된 감정이입의 순서가 질서를 회복하는 평정심의 발로가 곧 비 내린 풍경의 정경이다.          

    6. 열정과 냉정 사이        

     

    인간사는 사이와의 간격을 어떻게 조정하는 가의 문제 앞에 삶의 길이 열린다. 너무 멀어도 아니 되며 너무 가까워도 아니 되는 적당의 거리에서 결국 원만이라는 말로 이해하지만, 사실 원만의 문제는 사람에 따라 수용의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격이 급한 사람과 느린 사람이 있듯 원만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의 사이 혹은 사랑과 이별 사이, 산과 산의 사이 등 구분이 남는 사이에 선택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인두에 다친다.

    그대여 가까이, 그러나 너무 가깝지 않게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우정은 그네를 탄다.    

     

                                             <열정과 냉정 사이>      

        

    아주 간명한 시이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불에 상처를 입고 너무 멀어지면 춥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그대”와의 사이에서도 적당히 발동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원만의 기준에서 멀어지는 결과는 좋지 않음이라는 사이가 될 때, 불협화음의 이름으로 남기 때문이다. 우정 또한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거리를 조정할 때, 비로소 좋음이라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 시소를 타듯 조정의 묘미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울러 너와 나의 사이를 감지하는 것은, 존재가 숨을 쉬고 있는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현상 유지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의식과의 대화를 나누면 자유로운 생각이 상상의 끝까지 여백을 채우는 마음에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변화의 이름이다.

    이를 추구의 이름들을 모아서 아름다움을 구축하는 정경은 풍경화가 벽에 걸리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그만 나가려 한다.       

     

    2026. 01. 02.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이승섭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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