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대한 대명사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꽃을 말할 것이고 더러는 자연의 신선한 모습에 탄복을 발언하는 사람, 혹은 피어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명백한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목록들이 첨가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중에 시-
시의 아름다움도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직관의 시선에서 나오는 감성이라면 시는 지적 감수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이기 때문에, 생각을 더 해야 하고 다시 분석하면서 얻어지는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지칭- 시는 심리적인 반응이 길고 또 판단의 정상적인 가치 혹은 순수한 지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인식은 정서적 감동과 조화의 길이 상관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적 인식만을 앞세울 땐 자칫 어지러운 함정에 빠져 도그마의 편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딱딱한 돌을 만지는 설명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에는 시적 묘미의 깊은 맛을 부추길 수 있게 된다. 시는 조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가까이 가면 아름다움의 실체가 흐리게 되고 또 멀리 자리잡고 바라보면 분간하기 어려운 사물로 둔갑하기 때문에, 균형이 있는 정서를 대동하고 목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행복이 조건으로 갖춰져야 한다.
이를 감상자의 태도라 칭하면, 생산자인 시인은 고뇌와 아픔 그리고 탄식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김정석의 시에서는 요란함과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요하고 금도를 지키는 정신의 고양을 대면하면 올곧은 정신이 숨 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독의 깊이에서 그리움을 보내는 여린 정서가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나이테나 세월의 깊이에서 오는 이별의 아쉬움이나 돌아보는 생의 소회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의 의식을 보여준다.
더불어 근엄한 시적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에는 정감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감각 서정, 정서의 감성
때로는 시는 감각적이어야 하며 정서를 풀어내는 감수성이 시인의 재능과 일치하는 점을 가질 때 시의 묘미는 아름다움과 보조를 함께한다. 김정석의 시에는 그런 감칠맛이 들어있고 의미와 가락의 조화에는 시조가 갖는 정서의 증폭에 일조하는 느낌을 배가하게 된다.
시조의 태생적인 특성이 가락 위주였음은 누구나 알 것이지만 자유시와 경쟁 구도를 갖춘 이후에 시조의 자리는 의미와 가락을 함께 담으려는 데서 위축되거나 정체 혹은 현상 유지라는 점에서 답보에 머물고 있음이 현재의 시조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가 엄존할 때, 오로지 정형에만 특징을 붙잡아 두려는 데서 시조 시인의 노력 없음이 더 하다, 라는 느낌이지만 그러나 김정석의 시(詩)-
시조라는 구분의 말이 없으면 자유시와 다름이 없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자분자분 정을 주는 속살속살 비가 온다
산당화 살진 볼에 목덜미가 간지러워
배시시
왼고개 들며 알 듯하게 웃고 있다.
숨겼던 사연들을 당사실 올로 감춘
안으로 차오르는 고요의 살 핏줄에
들릴 듯
사랑의 밀러 봄 기별이 바쁘다.
『입춘 부근』
지극히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의인법 혹은 동음 반복에서 나오는 가락은 여유가 있고 맛깔스러운, 뉘앙스를 전달한다. 언어를 비틀거나 완곡하게 조종하는 것이 아니며 유연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 반복적인 시어의 배치가 매듭 없는 마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오르고 소요하는 인상을 준다.
“자분자분”과 의성어 “속살속살”에서 나오는 여운은 의미의 중첩-
속살속살은 내면의 부드러움이면서 가는 빗소리- 왁자한 비가 아니라 소곤거리는 암시를 포개는 인상을 준다.
비가 내리는 날은 무겁고 우울한 기분이 점령하지만 김정석 시인의 비는 무겁고 칙칙함보다는, 귀엽고 산뜻한-
“목덜미가 간지러워,”와 “배시시” 웃고 있다는 시어의 조합이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정리된 의미로 옷을 입어 밝음의 상태를 전달한다. 이는 시의 전체적인 표정이 밝아 봄의 정서가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산당화가 사랑의 모습으로 전이되는 풍경이 따스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우수 지나』 『해당화』 등은 김정석의 서정적 이미지가 드러난 수작으로 시인의 재능과 원숙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3. 문법 희망
절망에서 희망 그리고 아픔에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령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손짓이고 예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곤궁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불빛의 역할을 하는 일면 평화로울 때는 화려한 장식으로의 소임은 시가 갖는 본령이고 시의 역할에 주된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특징을 Ambiguity에서 찾는 것도, 시가 천의 얼굴을 소유한 보살의 역할처럼 다양한 표정을 내장했을 때, 비로소 시의 기능은 희망의 문법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떠날 수도, 주저앉아
쉴 곳도 없는 세상
촘촘한 눈빛 시린
볼모의 공간에도
봉곳이
예비한 가슴
신들의 꿈은 있다.
지상에 널브러진
오탁의 그림자도
한 켜를 걷고 보면
땅줄기의 물이 올라
신들의 영혼을 닮은
꽃으로 피어난다.
『해토머리』 중
매우 질서 정연한 과정으로 엮어진 시이다. 즉 1연에는 시련과 아픔이 따르는 “볼모의 공간” 2연은 “꿈”을 말하고 3연은 “땅줄기 물이 올라” 4연에서는 비로소 개화의 의미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꽃”에 최종 목적이 발현된다.
시련, 꿈, 희망, 꽃으로의 4단계 진전은 삶의 원리를 대입해도 정확한 일정이 된다.
시는 비유로 진실을 말하는 기교라면 김 시인의 시조에는 녹아있는 삶의 진수가 담겨있다.
이는 생을 통찰하는 그리고 명상에서 건져 올린 정서의 내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랫동안 훈련된, 그리고 시의 장인만이 이룰 수 있는 언어 기법인 것이다.
이럴 경우 시와 정신의 결합이 공고했을 때 비로소 시의 속살을 꽉 채우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민감한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표정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내일을 생각하는가의 조차 파악되는 길이 담겨있게 된다.
가슴에
물을 담아
배를 하나 띄울란다.
구름 걷고 맨손으로
밤마다 별을 따는
봄 한날
살가운 저녁
조각달과 같은,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이름 하나 새길 난다.
차운 밤 따스하게 황 촉 밝혀 뜨고
몸으로
몸을 태우는
목이 가는 여인,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중
별과 달은 어둠에서 좌표의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생의 궁극을 말하는 의미조차 내포한다. 그러나 달과 별은 어둠을 전제로 했을 때, 빛의 의미를 구가할 수 있고 희망에의 노래가 합창될 수 있기 때문에 『가슴을 새로 닦아』는 어둠을 생략하고 밝은 빛과 달을 전면에 포진 시키는 기법을 보이는 시가 된다.
2연에 “가슴을/ 새로 닦아/이름 하나 새길란다.”/를 위해 “황 촉”을 켜는 빛의 단계로 진입하기 때문에, 시적 균형이 안정감을 가지면서 의미의 확장을 이룩하는 기교가 환해 보인다.
4. 고독과 황혼의 여운
김정석의 시적 표정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독과 이별이 교차하는 모습이 다소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나이의 깊이에서 오는 감수성이 용약(勇躍)하는 정서이기보다는 가라앉아 차분하고 쓸쓸함-
황혼의 풍경이 다가든다.
시는 시인과 정서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사물을 앞세워 비유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기로 돌아가는 설명을 상징으로 처리한다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절성의 비유에는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더하는 역할과 같기에 곰삭은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 꾸미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과 같은 이치로 보는 것이다.
선홍빛 물든 잎에 얼굴을
대어본다.
잎맥을
타고 흐르며
어질게 늙는 소리
세월의 등성에 누워
감빛 놀만 담고 있다.
『두 겹 다리 위에서』
사물의 모습을 소리로 듣는 시인의 귀 밝음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들이 소리로 다가오는 일은 체험과 세월의 깊이에서 알아차린 쓸쓸함이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귀에서 들리는 이명의 낯설음, 아울러 시야에 다가온 흐린 사물의 윤곽들이 시인은 소리와 직결되는 환청으로 들을 수 있을 때, 마치 멀리 떠나온 것 같은 소회에 잠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더불어 달빛에서 소리를 듣는 일이나 꽃에서 아름다운 연인의 음성을 유추하는 일은 시인의 주된 상상의 깊이와 연결되는 작업이다. “잎에 얼굴을 대어볼 때.” 들리는 “어질게 늙은 소리” 앞에 어떻게 삶을 진행하는가의 숙제가 “어질게”에 모아든다.
즉 “어질게 늙음”과 “감빛 놀”이 아름답게 결합하는 방법을 찾는 도정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둘의 이미지 모두 종점 의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난 바다 물금 넘는 한 사내를 본다
영토를 잃어버린 알 섬 같은 사내를
하루가
전광을 거두는
구부정한 저녁나절
『가을 낙수』 중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리고 영토를 잃어 절망에 의상을 슬프게 걸친 사나이의 모습-
무인도의 비유에서 처절한 표정의 슬픔을 읽는다. 더구나 하루가 마감되는 황혼 무렵의 구부정한 저녁나절은 곧 시인 자신을 보여주는(showing) 풍경이 서러움을 배가 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혼자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유추하면서 깊게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면 숙연한 정감이 눈물을 불러오게 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황혼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은은하고 정 깊은 풍경화가 되는 것은 아닐지
고독은 자기 찾기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삶의 모습을 어떻게 그림으로 아름답게 표출할 것 인가의 기교적인 일이 될 것이다.
생의 궁극이 곧 아름다움을 연출하는데, 목표가 있다면 젊음에서는 젊음의 미가 있고 시니어는 시니어의 표정이 있을 수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그린 그림으로 김정석 시인이 그리는 생의 그림은 담담한 수묵화이면서 철학이 담긴 풍경에는 그 성품의 모습이 고독한 그림자를 이끌고 가는 황혼의 자화상에 여운이 너무 긴 것은 아닌지
5. 이별의 소리
회자정리의 이치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정서는 아니다. 우주의 섭리라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굴리면서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바퀴 속에서 존재라는 이름을 키우게 된다. 석가모니의 고뇌는 곧 그런 이치를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 방편으로 정확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만남에는 즐거움이 따르며 반면 이별에는 슬픔의 강물이 수런거리는 일은 억만년 인간의 역사가 축적한, 슬픔의 기록일 것이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답안지를 찾을 수 없어 두런거리고 슬픔의 깊이에 빠지게 된다.
그처럼 김 시인의 이별에는 건너지 못하는 미련의 줄기가 뒤따르면서 가락으로 형성되면서 길을 찾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사나흘
질긴 비로
봄눈은 트겠지만
아파서 자라는 고독
먼 폐가를 돌아 나온
바람도
어깨 걸려
곡비(哭悲)처럼 울고 있다.
지우면 지울수록 꽃고무신 갈아 신고
출구가 막힌 회안
나선으로 감고 와서
추억의
물목에 앉아
눈뜬 자정을 지킨다.
『이별 이후』
이별의 구체적인 사유는 알 수가 없다.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이별의 사건이 시인을 슬픔의 강물을 띄었는지-
그러나 시는 리얼함을 나열하는 글이 아니고 상상의 생략 혹은 사실에 상상의 옷을 입힐 때, 더 넓은 상상의 반경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인의 이별은 “아파서 자라는 고독”과 “곡비처럼 울고 있다”에서 슬픔의 농도가 처절함을 느끼게 하지만 지적인 제어로 매우 고단함을 주게 하는 인상이며 더불어 “지우면 지울수록” 다가오는 기억들은 추억을 부추기는 이름이 되어 “눈뜬 자정을 지킨다.”에서 불면의 함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의 이름 앞에 흐느끼는 여운이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드러나는 이름에서는 허무와 함께, 동행 모습이 보인다.
6. 에필로그(가슴의 풍경화)
시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 보이는 풍경화라는데 이의가 없다면 김정석 시인의 시에는 한국 시의 서정이 숲을 이루면서 시원하고 삽상한 바람을 미소로 건네준다.
이는 표현의 깊이를 간직한 셈이고 여기서 시의 숙성은 곧 체험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울러 대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의 시선을 사랑으로 감싸는 동화에서 형식의 절제와 언어 탄력을 수용하는 미감과 내용의 무한성에는 여유로운 감상의 길이 보인다.
고독과 허무 의식 그리고 그리움의 표정을 나타내는 기법이 시적 기교의 무아경을 방문하는 소감처럼 객관적인 표현일 때, 더욱 친근감을 전달하고 있다는데 방점을 찍고 싶다.
Allan Tate가 말한 “문학은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이다.에 미감을 더한 소득이 따라오는 감동의 시인 김정석 시인이 그렇다. 라고 말하면서 나가려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며 정서적 감성을 느끼며 오랜 체험의 체취를 맡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