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상의 평행]

    1. 들머리 글 - [세월의 강을 건너면]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5-08-24 15:35:5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은 세월의 강을 지나면서 나이를 셈하지만 시는 나이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존재의 형상을 말하는 길을 제시하고 감동의 펄럭임을 항상 여일(如一)하게 설득을 한다.

    만약 시가 나이에 비례하여 무게를 갖는다면 태어나 수염이 있는 염소처럼 언제나 할아버지의 역할을 할 것이지만 시는 결코 나이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만 원숙(圓熟)이라는 무게는 연륜과 깊은 상관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젊은 시인들은 패기에 있어, 이것저것 널어놓은 빨래처럼 펄럭이지만, 이미지 연결에서 질서의 시를 갖는 일은 대체로 드물다. 이는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 정당성을 갖는 이론이 될 것이다.

     

     

    무르익었다는 말은 과일의 원숙성을 의미할 것이고, 인간에게는 품성의 높이와 인격의 향기 그리고 지성의 엄정성이 녹아들어 고매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깊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깊은 맛깔이 담긴다. 맛이라는 추상 명사를 굳이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멋과 맛이 상통하는 그런 이미지가 성립된다.

    하서(河書 ) 김시철 선생은 그런 수식사를 입히는 옷이 정확할 것 같다. 18 시집 [나의 외갓집]의 일람(一覽)에는 그런 맛과 멋이 품성으로 직결되는 통로를 갖고 있어 귀감(龜鑑)의 의상이 된다.

     

    오늘날 시가 넘치고 쏟아지는 것도 잡탕으로 만드는 섞어찌개 같은 아닌 시들이 난삽의 통로가 붐비는 시단에서 하서 선생의 시는 청량감을 주는 시원함이 삽상하다.

    작고하셨지만 함북 성진, 태생으로 1/후퇴 때 월남하여 부부 기자로 활동 1956년 임금 출간을 계기로 이산 김광섭에 의해 문단 등단해서 20235월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하서 선생의 깊이가 넘치고 언어가 이끄는 경지를 경청하는 순서대로 직핍(直逼)해보기로 한다.

     

     

    2. 숲에서 들리는 소리의 시

     

    시는 시인에게서 나오는 의식의 숲을 바라보는 일이고 거기서 들리는 여러 가지의 소리 -

    바람과 녹음과 물살의 결합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한 임지들이 엮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복합적인 풍경을 만드는 의식의 풍경화일 것이다. 풍경화에는 다양함과 일관성이 담겨 있어야한다.

    첫 번째는 일정한 프레임의 경치 속에서 한가지의 물상만 나열되었을 때는 단조로움을 가져올 것이라면, 일관성은 일정한 패턴의 기법이 담길 때, 비로소 화려한 경치가 수용된 그림으로 완성된다. 이 두 가지의 모티브는 단숨에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체험이 녹아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원만한 조합으로서의 물감이 배역을 감당하면서 조화미를 연출한다. 이는 시인에게 요구되는 감수성의 결합에서 하나로 모은 유일성은 다른 말로 바꾸면 관태(sensuality)fk 부르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한가지의 감수성으로 엮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 둘 이상의 감수성이 결합하여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진다는 과정에서 시는 곧 감수성이 용해에서 시인은 신명을 도하는 기술자일 것이다.

     

    지도자론과 전통론 또는 독신에서 오는 고독의 물길 그리고 미수의 나이에 천진성과 지난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추억들이 엮어져 제18집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인자들이 따로 노는 모임이 아니라 다양하게 결합하는 양상을 눈여겨보게 된다.

     

    1) 지도자의 정신

     

     

    하서 선생의 제18집 시집에서 많이 등장하는 관심을 본다면 나라의 모양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개꼴이라는 판단이 앞장서며 비난의 과녁을 항하고 전체 사회 단위 구성을 전체의 구성원으로 일정한 임무를 수행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은 전체 중 일부이면서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절대 요소라는 핵심을 꼬집는다. 그러나 나라라는 단위는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파도로 밀려주기 때문에, 나라의 모양은 개인과 뗄 수 없는 상관을 유추하게 된다. 아주 쉬운 비유가 <3층 논>이라 보고 있다.

     

     

     

    예컨대 3층 건물만 해도

    1층은 2, 3층을 힘겹게 짊어져야 하고

    3층은 2층에 업혀서 산다.

    1층은 이 2층의 하중으로

    막중한 이들 기둥이요 어머니인 셈이다.

    1층을 밟고 거쳐야만 하는 2

    1, 2층을 밟고 오르는 3층의 존재

    3층은 휘휘 아래를 두루 굽어볼 수 있으나

    1층이 겪어내는 힘겨운 노고는 실로 크다.

    1,2 층과의 소통 없이는 무용지물인 3층은

    아랫것의 힘겨움을 살펴야만 마땅한 윗자리요

    윗것이 갖추어야 할 소임이다.

    이를테면

    아랫것이 없는 윗것은 없으니까.

     

    <3층 논>

     

    너무 이해가 쉬우며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시는 비유에서 의미를 생산하고 그 의미는 곧 감동을 잉태하는 모태가 될 때, 시의 성공은 담보되기 때문이다.

    3층은 윗것 즉 지도자라면 아랫것 1층은 백성이거나 부하라는 명칭에 부합된다, 할 수 있겠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초가 튼튼하면 비로소 위로 올라가는 층수가 안전함을 유지한다.

    이 상식은 1층이 없는 2층이나 3, 4, 5의 높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만들어질 때, 비극을 만나는 길이 열린다.

    이른바 유행인 필로터 건물이 지진에 금시 무너지는 상징은 곧 기초가 없는즉, 이익에 도취되어 기초를 허술하게 만든 결과물로 무너지는 비극이 오는 것이다.

    이는 <용비어천가> 2장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에 꽃 좋고 열매 많나니의 비유와 일치한다.

     

     

    세상살이란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정리가 가능하다. 뿌리가 깊으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그 의지의 결과에 열매가 많다는 비유에는 매우 생생한 사실로 통한다. 이는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기초의 문제는 국가의 운영이나 회사 등등 매일반일 것이다.

    잘난 사람은 여럿을 한데 묶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는 곧 대중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책임을 갖는 지도자이다. 그렇다면 김시철 선생이 3층 논을 쓴 의도는 확실해진다. 상식이 없는 지도자, 머리가 휑한 지도자, 자기 주관이 없는 지도자, 이것들이 소리 지르고 악다구니 연출을 감행하는 오늘의 판세는 바로 가슴을 겨누는 비수로 날아갈 것이다.

     

    모두 자기 무리끼리 모든 전반적 상황을 결정하고 감행하며 북한에 속을 빼주고도 눈치 보기 줏대 없는 실상은 줏대 없는 신념, 편 가르기 등 사상의 각본 드라마 연출이다.

    자신들의 패거리들끼리 의지하고 믿어 결국은 파탄의 길로 질주하는 것이 몰락의 풍경인 듯 하다. 편견과 아집만으로 중심 잃은 몰상식에 무리일 뿐이다.

    왜냐하면 백성의 의미인 2층과 1층은 중구삭금의 신라적 비유와 같기 때문이다.

    여론의 두려움이고 중구 즉 백성의 입은 쇠도 녹인다는 말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아주 무서운 말이다. 1. 2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무너지는 일은 예약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패거리들의 앞날은 이 점에서 민족사에 아픔과 연결되는 죄악이기에 -

     

     

    가 붙으면 천박함을 의미하고 세사(世事)가 수식으로 오면 엉망진창을 뜻한다. 오늘의 모양을 개판이라고 정의하면 이성이 없고 패거리 당의 무리가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정의 독점주의에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못된 놈

    나쁜 놈을 일러 우리는

    개자식이라 합니다

     

    헌데 요즘은

    가는 곳, 들르는 곳마다 널려있는

    개자식들이

    -중략-

    믿음은 길을 잃고

    불신이 불신을 끼고 살아가는 나라 꼴

    누굴 믿고 우린 살아야 합니까

     

    <개판>에서

     

    정의는 이미 개판 속에서 길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지도자가 줏대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끼리끼리 노는 정치 속에서 미래의 비젼 없는 무모한 눈치꾼이 군림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 지금은 어떤가? 대답은 개판이라는 용어에 녹아있다.

    믿음의 길을 잃고의 선언은 무서운 진단이다. 위정자는 믿음으로 하늘을 삼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불신이 불신을 끼고 살아가는나라 꼴에 탄식 -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갈까?”라는 의문에 비극적인 인식이 자리한다. 재판관도 그렇고 절망에 하느님을 찾지만, 하늘은 결코 인간 세상을 어쩌지 못하는 속수무책이 전부일 뿐이다.

    권력은 썩을 대로 썩었다 하고/ 나라 꼴은 개판/지랄 같은 환경에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진단이 슬픔을 위로할 길이 없다. 역대 대통령이 쇠고랑으로 이른바 적폐라는 미명으로 휘젓는 장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목적지가 없는 불안의 연속 편이다.

     

     

    오래 살수록

    털면 드러나는

    먼지

     

    법은 상식이요

    상식이 눈감지 않는 한

    인간의 욕망은

    한시도

    자유롭지 않다.

     

    <죄값론>에서

     

     

    [법은 상식이다.]는 화해와 용서에 기반한 작용이다. 그물처럼 얽혀 있는 법의 오랏줄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령 자동차를 몰고 길에 서면, 시속 60km에서 단 1km이라도 벗어나면 이미 법의 그물에 걸리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도 용돈을 갖기 위해 마누라의 눈을 피하는 수법은 오래된 일이듯이 얼마의 상식은 용서와 화해로 넘어가야 할 명제 -

    국가 경영의 큰 그릇의 운용은 법의 잣대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털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는 우리네 속언은 결국 부메랑이 될 가능성은 복수의 법칙으로 얼마든지 손오공의 여의봉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되풀이 복수가 죗값론의 핵심인 듯하다. 모든 대통령은 결국 털면 먼지가 나는 일이 슬픈 상식이 되어, 자살하고 감옥 가고 또 감옥 가고의 연속이 이젠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지루하다. 모두 자기 합리의 이론으로 무장하는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법의 적용은 정당해야 한다. 이 잣대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을 때, 합리성 또한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적용 목록에서 위와 아래가 모두 어설픈 연극으로 영일이 없다.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허무로 다가올 일이 넓은 줄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애당초 자유와 민주주의 진 맛을 모르는

    저쪽과

    자유가 넘쳐나 자유를 모르는 이쪽

    이 두 어간에서

     

    휴전선은 편할 날이 없고

    민초(民草)들만 골병 진전입니다.

     

    <이쪽과 저쪽>에서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로 갈라졌다. 파스칼이 말한 이쪽과 저쪽이 오로지 강으로 갈라진 이유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을 욕해야 하고 또 저쪽은 반대로 이쪽을 욕해야 백성은 산다. 오로지 강을 사이에 두었다는 명분 슬픈 일이다. 그러나 국가에는 분명한 잣대가 있어야 한다. 분명 저쪽은 자유가 없는 감옥이고 심지어 고모부까지 기관총으로 가루를 내는 무도한 집단에 비위를 맞추는 놀음은 민초의 골병을 넘어, 비극이다. 지금 그런 진행형은 연속극을 지루하게 이끌고 있다. 결과는 너무 뻔한 일임을 오로지 모르는 집단 무리는 지금 성업(盛業) 중이다. 회색빛으로는 어떤 명분이든 살 수 없다.

     

     

    2) 홀로 사는 일[아웃사이더 {outsider}]

     

     

    사회성의 혼자와 홀로는 다른 것이다. 영어로 alone이지만 전자는 둘이 아닌 혼자이고 후자는 쓸쓸하게 혼자라는 어의로 구분된다. 김시철 선생은 혼자 산다고 한다. 평창의 적당한 높이에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정말 혼자 산다. 쓸쓸하다는 뉘앙스는 없어도 감추고 외로움을 참는 인내도 내면에 담겨있다고 한다. 만약 외롭다느니 고독하다 느니가 지적으로 억제를 받지 않았다면 질 축 거리는 시의 표정이 될 것이지만 억제에서 언어 탄력을 생성하는 노력의 타입이다. 참된 시인의 면모는 여기서 발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감정의 노출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고 탄력으로 생산하는 선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정신의 고귀한 의상을 입어 존경을 획득하는 길을 만든다.

     

    홀로 산다는 것은

    온갖 잡사(雜事) 홀로 짊어지고

    책임지는 일이다.

    - 중략 -

    달은 언제나 곱빼기로 더 보이고

    처마 밑에 늘어 붙은 밤은

    빚쟁이가 되어

    아침을 막아선다.

     

    <독신 산고>에서

     

    1연과 5연을 옮겼다. 6연은 악산이다.’ 7한낱 허공이다.’ 8연은 가슴 속 허기다’ 9술잔을 비워내는 노릇이다.’ 10두레박이다.’ 그리고 11연은 미지수의 투성인 홀로는/뭐냐 해도 홀로 먹는 밥맛이다로 마무리 된다.

    시의 전개는 결국, 홀로 먹는 밥맛이다. 로 모아든다. 혼자 먹는 밥맛을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답안일 것이지만 아마도 소태맛일 것이고 이런 일이 이어지는 일이, 되풀이가 될 때, 슬픈 자화상이 가슴을 쥐어짤 것이다.

     

     

    오래 살면 항상 가야 할 마지막을 추정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를 移徙))라 부르면, 세상의 먼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마지막 작별의 이미지가 보인다고 한다.

     

    이제, 그만 미련 없이

    모두 다 싸들고

    이사할 일만 남았다 하네

     

    한 생애 다 주워 담고

    짊어지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사할 일만 남았다 하네

     

    <미수를 넘기다 보니 1. 이사>에서

     

    경험의 원숙이나 판단의 문제 앞에 지난 세월이 어지럽게 흐린 안개로 출몰한다.

    이 신호는 이제 떠남을 재촉하는 뜻으로 받아드리면 이사는 곧 세상을 하직하는 개념에 운명적인 뜻이 얽힌다. 종착역이고 그 역에서 기차는 다시 떠나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 서글픈 뉘앙스가 다가든다. 필연을 꺾을 수는 없다. 다만 순리에 따라 길을 나서면 그것이 담담한 정리의 일환일 때, 그 뒷모습이 깨끗하면 된다. 이때 그의 시는 뒤에 그림자로 따라가는 행운이면 더욱 아름다운 노년의 발길이라 칭찬할 것이다. 김시철 선생의 행운은 그가 쓴 시가 말하는 가치일 때, 나이는 곧 원숙과 온화 그리고 맑은 호수에 비치는 환영이 될 것으로 믿는다.

     

     

    3. 에필로그 길(이별은 소식 없이 찾아올지라도)

     

    판단이 늙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니라 젊은이와 같다고 한다. 육신만 노쇠했을 뿐 정신이 깨끗하고 청담(淸潭)한 모습에는 인간의 고귀한 인격이 담길 때, 나이는 더욱 원숙한 그리고 온후한 덕망에 이르게 된다.

    김시철 선생은 천진하고 때로는 날카롭기가 비수와 같다. 범접하기 어려운 그의 내면에 담겨진 시선의 정확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정도(正道)의 길에서 질정(叱正)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는 지도자의 덕목이 바른길로 갈 때, 나라의 기틀이 옳게 선다는 이치에 강조되는 긍정의 끄덕임이 옳다. 또한 전통의 줄기를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판단은 미래와 깊은 상관을 강조한다.

    추억은 회고적이고 아픔의 이별이 예상되는 다소 처연함으로 다가오지만 나이의 깊이에서 나오는 숙명적인 탄식으로 들으면 이해의 폭은 넓어질 것이라 믿는다.

    작고(作故) 한지 3년이나 지났지만 선생의 이미지와 정도를 바라보고 질정을 들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감히 짧은 선생의 길을 논하였다.

    우리의 길은 언제나 정도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배우면서 질정을 들으면서 길을 가야 깊이가 넓어지는 것이라 자위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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