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윤동주(1917~1945) 시인의 대표작이자 마지막 시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1942)의 첫 구절이다. 이 짧은 시 구절만으로도 식민지 시대 시인의 고뇌와 성찰을 읽을 수 있다.
다음 달 11일, 윤동주가 <쉽게 씌어진 시>를 쓴 시기 재학했던 일본 도쿄 릿교대학은 교내에 시 전문을 새긴, 원고지 모양의 가로로 긴 시비(詩碑)를 세운다. 일본 내 윤동주 시비는 지금까지 시인이 1943년 체포되기 전 마지막 행적이 있는 교토 도시샤대학 등 간사이(관서) 지역 3곳에 건립됐다. 수도 도쿄가 있는 간토(관동) 지역에는 이번에 처음으로 시비가 세워진다.
릿교대학은 올해 윤동주 시인 80주기와 내달 기념비 건립·제막 행사에 맞춰 16일부터 내달 25일까지 대학 이케부쿠로 캠퍼스 본관 옆 매서 도서관(Mather Library) 기념관에서 ‘윤동주의 세계’ 특별 전시를 개최한다.
지난 11일 오후 윤동주 특별전 준비가 한창인 릿교대학 매서 도서관 기념관 내 기획전시실을 찾았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 중 대학 측 배려로 전시 내용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윤동주의 생애 전반을 조명하고,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를 비롯한 릿교대학 시절 쓴 5편의 시가 전시됐다. 윤동주 시집이 한일 양국에서 어떻게 출판됐는지 소개하는 코너도 있고, 현재 릿쿄대학 학생들이 생각하는 윤동주를 말하는 영상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마찬가지로 윤동주의 모교인 도시샤대학과 연세대학교(옛 연희전문학교)가 협력했다.
윤동주가 릿교대학에 다니던 1942년 봄은 일본의 진주만공습 직후로 발발한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이 심화하던 시기다. 학교에선 학생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만 시켰다. 이번 전시에선 당시 학교의 여러 모습도 전시했는데,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존경하는 인물’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인물은 ‘히틀러’였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시인 윤동주는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시를 써서 그 어둠을 직면하고 자신을 성찰했다. 그러나 학교 측으로부터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등 억압이 심해지자 결국 윤동주는 이듬해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옮겨 간다. 이날 전시 준비 과정을 공개한 릿쿄대학 기념관 도요다 마사유키 학예사는 “우리 대학이 전쟁에 협력하고 군국주의에 가담했던 역사를 반성하는 의미로 윤동주라는 인물을 기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며 “올해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기념비를 세우고, 대대적인 특별전시를 마련한 이유”라고 말했다.
윤동주 시비를 도쿄 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육첩방은 남의 나라’ 등 문구가 (우익 등 정치적 입장에 따라) 논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질문에 도요다 학예사는 “오히려 시인에게 일본의 방을 그렇게 느끼게끔 했다는 우리의 죄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 시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며 “일본에서 윤동주의 시 자체에 대한 팬들이 많기 때문에 반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