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의 정신과 마음의 축도(縮圖)]

    {1. 에고의 깊이}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4-04-01 08:34:4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개성이고 마음의 축도라는 점에서 시 1편은 자신으로 돌아가는 표정일 것이다. 누구나 시인이라면 마음의 에고가 깊어야 하며 열린 마음의 상태로 시에게 구애하지만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초점에 에고의 깊고 신명이 날 때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끈기와 ego 의식의 길을 갈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과 에고의 정신이 깊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가 인간의 표정을 그리는 얼굴이라 한다면 삶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표정이 스크린으로 담아지는 것이다. 

    여기엔 삶의 진솔성이 있어야 하며 시인의 삶이 곧 시와 동등(同等)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미적 감동을 생산하는 근거는 시인의 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T.S. Eliot이 『고전론』에서 고전의 조건을 첫째 정신의 원숙, 둘째 행동의 원숙, 셋째 언어의 원숙을 주장했을 때 행동의 원숙과 정신의 원숙이 남다른 경우, 작품의 영원한 생명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매우 시사적인 암시를 주는 것이다. 거짓으로는 결코 멋진 시 좋은 시를 창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에게 충실할 때 비로소 시의 가치를 건져 올리는 길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꽃이 지고, 잎이 지면

    이별했던 여인처럼 어서 오라고

    푸른 손짓으로 포옹하며 오는 봄의 전령

    달콤함으로 오는 봄의 전령사 

     

    = 중략=

                      <봄의 전령사> 중에서  

       

    봄이라는 전령사는 푸르른 마음이 담긴 시인의 의도가 보이는 것 같다.

    김성숙의 시에 들어가면 모든 심성과 정신이 순수하고 투명한 햇살을 연상시키면서 끌려가는 듯하다.

    봄의 전령사는 아무 불평불만이 없으며 타인에게도 간섭 없이 저마다의 소임에 충실한 오월의 푸른 정경이 밝아지고 친근함이 넘치는 정경이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고 포옹하는 봄의 전령사” 밝은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물이 “달콤함으로 다가오는 봄의 전령사”가 풍성하고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충분한 풍경화처럼 느낀다.      

     

    2. 의식의 정경들     

     

    1) 풍경과 봄비     

     

    풍광이 보여주는 자연은 봄이 왔다는 의식을 전해주며 비로 환치시키는 기법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긴 호흡의 특징은 약간은 산문적이면서도 산문이 아닌 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시적 풍경은 안온하고 따스하면서도 친근함이 가득하고 편안하다는 인상이다.

    시가 편안하면 독자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어머니의 음성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가슴에서 진정성으로 나오는 시의 깊이가 있고 정겹다면 이는 시의 가치에 충분한 소임을 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김성숙의 핵심으로 전달되는 시를 확인하기로 하자    

     

    봄비가 오면 푸른 잎 돋고

    푸르른 꽃잎 돋아 꽃들은 만발이고

    오롯이 길 위에 날리는 꽃잎들은

    봄비 맞으며 돋던 푸른 잎은 아니며     

    꽃대가 목이 말라 숲은 붉게 타고

    숲은 붉게 타서 철새 날아가는데

    기러기 날아간 하늘에는 숲이 우거져도

    붉게 목말라하던 숲은 아닌 듯     

     

                      <봄비 오는 날> 중에서

     

    시에 역설(Paradox)이 기법을 동원하면 강조의 의미를 부가한다. 내가 가진 의도와 반대로 말하면 전혀 다른 의미인 부정에 대한 긍정의 강조로 살아난다. “돋고” “만발하는” 꽃에서 “꽃잎들은” 앞의 문장 조건에 마지막 “푸른 잎은” 아니다.라는 말에 힘을 주게 된다. 비가 오면 푸른색으로 변모하는 기쁨을 느끼는 꽃들이 붉게 타 떨어지는 이별의 아쉬움-

    식물이 성장하는 비의 고마움과는 달리, 꽃잎으로 떨어지는 아쉬움을 말하는 시인의 생각은 꽃이 지는 슬픔에 대한 아쉬움을 갖는 마음에 서러움과 아픔이 깃든다. 

    그러나 만남의 환희가 있는가 하면 이별에서는 슬픔과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꽃과 꽃잎이 양립할 수 없다는 진리 앞에 인간은 슬픈 전별(餞別)을 보낼 뿐,-

    김성숙의 아름다움의 추구는 그렇게 여리면서도 순수함이 투명성을 남기는 듯하다.     

     

    비 오는 아침 

    창문 열어 바람맞으니

    붓다가 머물고 간 꿈길처럼 보이네

    ...(중략)...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가슴을 적시는 저 비와 같다. 하리오.     

     

                   <비 오는 날 아침> 중에서     

     

    붓다는 만물을 포용하는 것처럼 마치 비가 세상을 적시는 자우(滋雨 )라는 의미와 등가를 이룩하는 데서 일치하는 것이다. 갈증에 세상을 적시는 비는 곧 붓다의 말이고 전령의 임무를 수행하는 의미를 공유할 때 사랑으로 포괄된 자비(慈悲)의 말처럼 은혜로워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비가 붓다의 말처럼 목마름을 해소하는 이미지로 다가올 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생의 윤기를 더하면서 세상의 밝음을 더욱 고귀하게 연상하는 향기가 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가 다가오는 이미지가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역할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결말이 그렇다. “비 오는 날 아침”과 붓다가 머물고 간 꿈길처럼 “보이네”에서 “아침”과 “보이네”의 상황 전개는 시인의 마음에 그려진 소망이자 부처에 대한 존경의 우회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새벽 숲에는 사랑이 오는 길이 있다.

    숲 사이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전령받기도 전에

    가까운 듯 먼 듯 다가서서 키스하는 푸른 숨결이 설레고     

    진달래꽃은 색동옷을 깔아주며 

    기다린 듯 각양각색의 미소가 가득

    그대가 오고 그대에게 내가 다가서고

    봄꽃이 떨구고 간 기억들이 생각난다.     

    숲 속의 봄꽃 나무 

    옆에 홀씨 뿌린 또 나무 하나

    꽃이 지고, 잎이 피면 

    이별했던 연인이 어서 오라고

    푸르름으로 손짓하며 오는 5월이다.

    사랑스러운 키스로 다가온다.     

     

                      <오월의 노래> 중에서     

     

    신선하고 푸르른 마음이 담긴 시인의 의도가 보이는 시다.

    붉은색에 가까이 가면 더 붉어지고 검은색에 가까이 가면 더 검어진다는 말은 동화(同化)를 뜻할 것이다. 

    김성숙의 시에 들어가 보면 심성이 순수하고 투명해지는 햇살 같은 시라 끌려가는 길을 걷게 된다. 

    사실 5월의 나무들은 불평이 없고 타인의 일을 간섭함이 없는 저마다의 소임에 충실한 5월의 푸른 정경이라 하겠다. 

    서로 사랑하고 포옹하며 밝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물이 밝아지고 친근하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시인이 김성숙이다. 

    “사랑스러운 키스”로 다가온다는 풍성하고 아름다움을 전달하기에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의 시 『한 송이 꽃』 『다시 눈』 『기도 마음』 『가을의 시』 등은 시인의 마음을 대상에 일치시키려는 간절함과 애원하는 듯한 작품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참으로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한 축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들을 보면서 못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3. 나가면서         

     

    시는 마음의 거울을 불을 켜는 데에서 시작이라고들 한다.

    왜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전 생애를 걸고 영혼의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과 위선 요설(饒舌)로는 결코 감동을 줄 수 없으며 그리고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꾸민다 해도 결국은 자기 함정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표현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김성숙의 시에는 기도의 나직한 소리가 힘을 주면서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비의 적심은 아름다운 정경을 그리는 풍경화로 다가선다.

    이는 꿈으로 빛으로 전달하는 소임에 피곤을 모르는 시인의 정서에는 소박한 그리움이 붓다의 음성에 도달하기를 염원하는 기원으로 꽉 채워져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기도란 너와 나를 합하는 합장(合掌) 일 것이다.

    대상과 내가 하나로 이룩되는 소원은 소박하지만 순수와 진실을 담았을 때, 자기 위안이면서 결국에는 대상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작동되는 기능의 에너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이룩되는 양 호도(糊塗)하는 것은 위선이라면 자기 아집에 해당 행위이므로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의 땀을 흘릴 때 비로소 희망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기도는 자기 정화의 파문이 세상으로 떠도는 시원한 바람처럼 희망을 주는 이유가 되려는 집념이다. 

    종교는 희망과 꿈 그리고 사랑을 전달하는 존립의 의무와 근거가 된다면 불교는 강요함이 없고 힘으로 해결하는 복수의 칼날이 아닌 오로지 자기만의 정화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문이 넓게 열린 종교라 본다.          

    비우면서 채우는 삶의 자세야말로 허정(虛靜)의 태도에 깃드는 선함의 표정이라면 김성숙의 시에는 그런 음성들이 나긋하고 향기 넘치게 다가오는 힘이 있다고 보면서 마치려 한다.     

     

    202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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