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은 왜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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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8 09:42:1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비평가는 본래 ‘읽는 자’이자 ‘감시하는 자’이다. 타인이 직조해 낸 텍스트의 숲을 거닐며 그 안에 숨겨진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고, 아름다움의 기원을 추적하며, 때로는 작가조차 의도하지 않았던 무의식의 지층을 파헤친다. 그러나 수많은 걸작과 태작(駄作) 사이

    를 유영하며 내가 깨달은 단 하나의 냉혹한 진실은, '쓰이지 않은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영상의 시대, 숏폼의 시대에 왜 굳이 고통스러운 침묵을 뚫고 글을 써야 하느냐고.

    그리고 왜 쓰는지 ?

    그러나 인간의 뇌는 한계치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력 , 행동, 모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며 모든 기능이 저물어 간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생로병사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루라도 젊음이 있을 때 서사를 그리라는 것이다. 하여

    평론가의 시선에서 이 질문은 곧 "왜 당신은 당신의 삶을 해석하기를 포기하려 하는가?"라는 질문과 동치다.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지는 존재의 파편들을 언어라는 그물로 건져 올려 '의미'라는 생명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1. 망각에 저항하는 유일한 알리바이

     

    인간의 기억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휘발적이다. 어제의 감동은 오늘의 무딤 속으로 사라지고, 고통은 망각이라는 자기 방어 기제 뒤로 숨어버린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 속에 '말뚝'을 박는 행위다.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기록되지 않은 생(生)은 서사가 결여된 데이터의 나열에 불과하다. 우리가 문장을 적어 내려갈 때, 비로소 모호했던 감정은 '슬픔'이나 '환희'라는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된다. 텍스트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조우하는 유일한 플랫폼이다. 1년 전 내가 쓴 일기를 읽는 행위는 타인이 쓴 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비평적 체험을 선사한다. 그곳에는 지금은 잃어버린 시선, 지금은 가질 수 없는 순수함, 그리고 지금의 내가 비판해야 마땅할 과거의 오만이 고스란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를 통과했다는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다.

     

    2. 세계를 재구성하는 주권자의 권리

     

    우리는 흔히 언어를 생각의 도구라고 믿지만, 사실 언어는 생각의 한계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폭이 곧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다. 평론가가 텍스트를 분석할 때 주목하는 것은 작가가 선택한 단어들이다. 왜 '바다'가 아니라 '심연'이라 썼는가? 왜 '슬프다'가 아니라 '눅눅하다'라고 표현했는가?

    글을 쓰는 과정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연마하는 과정이다. 단순히 "오늘 날씨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오늘의 햇살은 굴절된 기억의 파편처럼 바닥을 핥고 있다"라고 적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창조한다. 전자는 세계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방관자의 자세이지만, 후자는 세계에 자신만의 색채를 입히는 주권자의 자세다. 글쓰기는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재정의하려는 고결한 반항이다. 이 반항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타인이 규정한 프레임 속에 갇힌 수동적 소비자(Consumer)로 전락하고 만다.

     

    3. 고통의 구조화: 카타르시스를 넘어선 인식의 도약

     

    비평은 본질적으로 '해석'이다. 그리고 모든 창작물은 그 자체로 작가가 겪은 실존적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다. 글쓰기가 치유의 힘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감정을 배설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공포는 우리를 잠식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라는 제목 아래 번호를 매겨 나열된 공포는 관찰의 대상이 된다. 주관적 고통을 객관적 텍스트로 전환하는 순간, 필자는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비평가가 된다. 내가 나의 고통을 평론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틈이 생긴다. 문장은 감정의 폭풍 속에 세워진 방파제와 같다. 우리는 써야만 한다. 내면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똑똑히 응시하기 위해서.

     

    4. 타자와의 연대: 고독한 개인들의 성좌(Constellation)

     

    모든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갈망한다. 설령 그것이 '미래의 나'일지라도 말이다. 비평가는 텍스트를 통해 작가의 영혼과 대화한다. 글쓰기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정교한 '텔레파시'다.

    우리는 각자의 고립된 섬에서 살아가지만, 글이라는 파동을 보냄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가 쓴 진실한 문장 한 줄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혹은 수백 년 뒤의 누군가에게 닿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을 준다면, 그것으로 글쓰기의 소명은 달성된 것이다. 평론가로서 수많은 텍스트를 대할 때 가장 전율하는 순간은, 화려한 수사학 뒤에 숨겨진 작가의 떨리는 진심을 마주할 때다. 글쓰기는 나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기적 같은 행위다.

     

    결론: 연필이라는 무기를 들라

     

    글을 쓰는 삶은 피곤하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밤을 지새워야 하고, 자신의 빈약한 사유를 마주하며 절망해야 한다. 그러나 비평가의 시선에서 단언컨대, 쓰지 않는 삶은 스스로를 '검토되지 않은 삶'으로 방치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읽는 것이고, 세계를 읽는 것이며, 끝내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다. 당신의 손에 들린 펜 혹은 키보드는 단순히 글자를 입력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채굴하는 광부의 곡괭이다.

    오늘 당신이 적어 내려가는 서툰 문장 하나가, 훗날 당신의 생을 증언할 유일한 비평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써라. 당신의 사유가 잉크가 되어 종이 위에 내려앉는 순간, 당신은 비로소 자기 삶의 진정한 평론가이자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2026.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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