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별이 지던 날

    김성문 (사)가야연구원 원장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
    2023-12-01 09:02:11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길어야 100세를 넘기가 어렵다. 김유신 장군은 한평생 나라를 위해 전쟁하다가 건강이 다해 승천했다. 사서(史書) 여행에서 승천의 기록을 만나보았다.

     

    신라가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할 때 김유신 장군은 몸이 불편하여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남아 나라를 지켰다. 그 후 5년이 지나 79(서기 673)가 되었다. 그해 음력 1, 신라에서는 큰 별이 경주에 있는 황룡사와 반월성 중간에 떨어지고 지진이 있는 등 천재지변이 있자 문무왕은 걱정했다.

     

    김유신 장군은 왕에게 나아가요즈음 변고(變故)는 그 액운이 늙은 저에게 있습니다. 나라의 재앙이 아니오니 전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과인이 더욱 걱정할 일이오.”

     

    자기 몸이 불편한데도 문무왕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한 김유신 장군의 충성심에 가슴이 뭉클하다. 문무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해 기도하여 천재지변의 걱정거리를 물리치게 했다.

     

    김유신 장군이 79세가 된 음력 6월에는 간혹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사람들 수십 명이 김유신 장군의 집에서 울면서 조금 후 사라지는 것이 사람들 눈에 띄기도 했다.

     

    김유신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이것은 반드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陰兵)들이 내 복이 다한 것을 보고 떠난 것이니 내가 이제 죽겠구나!”

     

    나라에 충성한 김유신 장군이 먼 미래를 보는 듯하다. 자기를 보호하는 음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10여 일 뒤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니, 문무왕이 친히 왕림해 위문했다.

     

    신은 팔다리의 힘을 다해 폐하를 받들고자 했습니다. 제 병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늘 이후로는 다시 용안을 우러러보지 못하겠습니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오.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되면 이 백성을 어찌할 것이며, 사직(社稷)은 또 어찌할 것이오.”

     

    신은 어리석고 어질지 못한데 일을 맡기어 신뢰해 주신 까닭에 작은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신라, 고구려, 백제가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이 여러 임금님을 보건대 끝까지 훌륭한 경우는 드물어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공()을 이룸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또한 이룬 것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아셔서 소인(小人)을 멀리하시고 군자(君子)를 친근히 하시기 바랍니다. 조정은 위에서 화목하고 백성과 만물은 아래에서 평안하도록 하시면 앙화(殃禍)와 난리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를 끝까지 이어지게 하신다면 신은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김유신 장군은 돌아가실 때를 아는 것 같고, 자기를 낮추는 언행은 내가 본받을 일이다. 김유신 장군은 서기 673년 음력 71일 자택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향년 79세였다. 그 당시는 꽤 오래 사신 것 같다. 문무왕은 김유신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크게 애통해하며 여러 가지 물품을 부의로 내리고, 군악대 1백 명도 함께 내려 주었다. 김유신 장군을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 금산원은 현재 경주시 송화산 기슭이다. 문무왕은 관리에게 명해 비를 세우고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묘를 지키는 백성도 두었다.

     

    김유신 장군의 부인은 지소(智炤)이다. 일명 지조(智照) 부인이라고도 한다. 부인은 태종무열왕의 공주로 두 번째 정실 부인이다. 아들 5명을 두었다. 김유신 장군이 사망하고 지소 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베옷을 입고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문무왕은,

     

    오늘날 나라 안팎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김유신 장군 덕이오. 생각해 보면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고 남편을 도와 이루었으니 숨은 공이 크오. 과인은 그 은덕을 갚고자 하여 일찍이 하루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오. 이에 남성(南城)의 곡식을 매년 1천 석씩 드리겠오.”

     

    남성은 경주시 남산의 남산성으로 추정한다. 남산성에는 곡식과 병기를 저장하는 창고인 장창(長倉)이 있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삶을 영위하는 동안 바르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가 존재해야 한다. 국가의 존재를 위해서는 국가를 위한 일에 몸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김유신 장군은 한평생 나라를 위해 살다가 승천했다. 신라 흥덕대왕은 서기 835, 김유신 장군이 승천한 지 162년만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했다는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만났다. 그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유신 장군은 진정한 신하이면서 리더(leader)였다. 신하와 리더로서 피운 꽃나무가 현재도 피어 있어 내 가슴에 와닿고 있다. 나도 김유신 장군처럼 진정한 나라 사랑 정신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김유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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