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admission 했다고 가정 해보자, 한국 의학의 경우는 한방이나 양방이나 맥을 짚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문진과 맥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진단이었다면 이는 종합에서 얻은 인간의 시체를 우주로 파악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서양 의학의 경우엔 아픈 부의와 판단에 따라 집중적으로 메스와 항생제가 치료의 주요 수단이다. 우리도 의학이 발전하여 세계적 수준이 되었지만 이는 분석과 해체에서 얻은 전적으로 얻은 서양의 치료 방법이라면 동양은 종합과 분석의 결합에서 제3의 의학적 처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대체 의학이라 말한다.
어느 것이든 전적으로 옳은 일방성은 없다.
문학에서도 이런 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서양적인 이론의 추구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전통의 결합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론에 필요성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문학은 갈림길에 있다는 생각이다.
2000년 초부터 우리 문학의 판도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액티브(activist)한 다양성이 부재한 듯하다. 민중문학이 잠들고부터 정체의 긴 시간이 무료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뚜렷한 없는 이슈가 없는 현실에서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침묵처럼 조용한 현상이 과연 좋은 것인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발전을 위한 모티브가 없으며 고민 없음을 대변하는 현실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물론 우리 문학의 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의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정권 잡이의 문학 – 이도 문학이라면 문학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한 잣대로 말한다면 거론할 말은 제한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정해진 명령의 하달을 실천하는, 이른바 노동당의 기준에 적합한 경우, 충실한 문학인으로 대접받는 일종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우상 같은 표현만 있는 문학은 이미 문학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된다고 믿는다면 남한의 경우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의 승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되뇐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는 간단히 언급하기에는 어렵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전쟁 문학이 없고 – 이런 전통은 고래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 통일 -
나는 통일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의 안목이 없었고 근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 7여 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 통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 때문에 어느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사는 결국 자기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지만 –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에 머무는 논리에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닌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문학이 심도는 돌뿌리에 체이는 안타까움을 맞는다.
북한의 세습 정권을 보면 금새 그 뜻을 알게 된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의 간판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오로지 독재자 김정은이 향하문 이외는 모두 차단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 <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통하여 동원하여 합리 둔갑 될 때 용해되는 <우리> 정서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최면이 깊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벗어나면 악이 되고 나는 우리에 소속된 혹은 없어야 당연해지는 일이 어떻게 문학이 추구하는 휴머니티의 소산이 되겠는가?
한때 남한에서 극심했던 저항의 문화도 그렇다. 결국 끼리끼리의 문화였지 발전적인 <우리>로 이르지 못한 것은 편 가르기의 우리에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란 이분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에 터가 없는바 일방성 때문에, 공통의 선이 없어지고 독선적인 메아리를 던지다가 소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인 사상의 모델이라면 우리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으니,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때 유명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지 정작 작가의 고뇌 어린 해답은 없었다고 느낀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의 깊이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방의 이야기 수준이고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 작품에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다는 예를 들면 결론은 자명해진다. 그는 러시아 귀족으로서 자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땅 만으로는 살 수 없다>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었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 말이 “진리를 나는 열애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은 녹아있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다.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를 이룰 때, 비로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는 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모비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 한 줄도 안 나올 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했었고, 생전에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 후에 평론가의 연구에, 의해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은 1962년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 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은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
1965년 – 40년 후에 박노순 인권 항의<한용운의 연구>에 의해 유명 애국 시인으로 등극했고,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도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런 시인 – 이육사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에는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은 대답이 될 것이다.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한다.
그렇다.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의 실현이고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소설이 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의미로 만드는 비유가 시가 된다면 자기라는 본질에 대한 “찾음”은 결국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와는 멀리 있는 표현일 것이다.
즉 자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신 가치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