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판단 가치 형태】

    『글의 소용 』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4-05-09 07:56:4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우리 모두는 지구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가늠하는 일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학적인 난제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객관화일 때, 별과 나와의 관계 설정에서 엄청난 괴리를 느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고 인간의 숙제는 점차 많은 양으로 인간의 뇌를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잊고 사는 일도 현명한 삶의 한 방법이라는 가정을 할 때, 우주의 중심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물론 <나>라는 인식이 중심일 때 객관이 성립되고 또한 많은 크기의 사물들이 존재 이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글은 나를 위한 위안의 이름이다. 말 많은 선생의 문학을 살펴보면 모두가 자기와의 관계를 풀어 나가는 일종의 절망 희롱의 형태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반면에 한용운 선생의 글은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철저히 타인을 위한 몫으로 설정하는 것이 정답일 것 같다. 

    시인들의 작품에도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청마) 유치환 선생의 글은 대체로 사회 관심, 혹은 자기와의 설정에 비극적인 인식을 비 분형으로 기록한다면 이 또한 생을 이끌고 가는 방법에 속하는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는 같은 속을 헤엄치고 있는 듯하다. 지느러미는 미적지근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들은 아우성을 지르면서 나의 한 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구리 빛 살결을 한  처럼 뵈는  두셋이 내가 누워있는 곁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이 마니토 모양으로 그들의 같은 을 휩싸고 있다.

    라 들은 어떻게 놀아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 에게 장난감을 주라>는 중에서  

          

    스스로 놀아볼 줄 아는 김해경(이상)은 객관적으로 놀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라는 

    의도는 결국 자기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는 셈일 것 같다. 

    사실 이상 선생의 문학은 모두가 이런 형태인 것 같다. 

    절망을 희롱하고 놀이로 삼는 기록이 이상 선생의 1 인칭 문학이라 본다. 어떤 거창한 초현실주의라는 무거운 의상을 걸친다는 것은 설익은 학자들의 이상한 논리 편법 찾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날개> 또한 금홍과 이상 선생의 기록이고 <주지 회시>, <봉별기> 등은 두드러진 형태로 나타난 선생의 기록인 것이다. 

    장난감의 의미를 풀어가는 일은 곧 이상 선생의 문학 본질에 도달하는 일이고 전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자기표현의 전형에 가까운 책이다. 

    더욱 명확한 것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이윽고 그들은 발명하지 않는가.

    장난감 없이도 놀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 놀지 않는 

    다는 은병이 아니면 일 것이다. “라고 구체적인 상황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결국  선생의 문학은 단 1 편 수필에서도 쉽게 자기 자신과의 놀이 문학이라는 발견은 용이하다고 보는 것이다. 스스로 천재라 생각했고 또 모든 현상이 절망으로 둘러쳐진 사회 상황에서 탈출로를 확보하는 일이 자각될 때, 불안한 존재의 탈출 방법이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중에도 문학은 가장 적합한 탈출 구멍이었던 셈인 것이다.      

    혹독한 겨울로 상징을 앞세운 일제 치하를 대입하면 똑똑한 사람의 절망에의 탈출구가 스스로의 문제를 설정하고 놀이로 처리하는 기법으로 대칭하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어여쁜 온갖 꽃을 

    모두 보았고      

    안갯속 꽃다운 풀 

    두루 누볐네.     

    그러나 매화만은 

    못 만났는데      

    눈바람 이러하니 

    어쩜 좋으랴 

                              한용운 <고우에게 보내는 선화>     

     

    고우는 최린 선생의 아호이다. 독립선언으로 감옥에서 3년의 옥살이 중에 쓴 한시를 풀이한 시이다. “눈바람”의 시대 공간을 한탄하면서 매화를 그리워하는 염원이 절절함에서 자기의 목적이 아니라 공익 목적을 이루지 못한 아픔을 친구 최린에게 하소 하는 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버리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보다 큰 자기를 구원하는 이미지가 우월하게 느껴진다. 한용운 선생의 거의 모든 표현을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남이 없는 작품으로 잘 나타난다. 심지어 소설 <박명>의 주인공인 순영의 삶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불행을 준 남편을 끝까지 봉양하는 희생을 테마로 설정한 것은 곧 한용운 선생의 정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이상 선생과 한용운 선생의 표현 방법이 다름을 갖는 것일 것이다.       

     

     

    결국은 자기만큼 표현한 셈이지 않겠나.

    대 사회적인 의식과 자기만의 한계를 갖는 두 방법은 어느 것이 우열이다.라는 판단은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자기만큼의 스케일을 표현함에서는 차이가 엄존한다는 뜻인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무엇이라 해도 자기를 쓰고 자기만큼 표현한다는 주장이 맞지 않을까.

    단 나는 얼마의 크기인가를 계량하지 못하는 우둔이라 뭐라 설명할 것인가 사실 두렵다.

    독자들은 개인적 사견 입장에서 볼 때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글이니만큼 오해 없기를 바란다.     

    물론 자기중심적인 언어 사용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말한다는 자기의 의사를 감추거나 위장하는 셈법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언어의 소용은 개인과 개인의 소용이 소통을 넘어 사회를 이룩하는 바탕으로서의 소임이 중요하겠지만 점차 역할이 축소되는 현상이 불행의 종자로 남는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씨가 말이 된다는 속담은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매스컴에 등장하는 말 장사꾼들의 분석이나 변명을 듣노라면 실소가 먼저 앞장서는 일이 진행형이라 입을 닫고 시선만으로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아픔이다.

    그저 혼연히 문 열어 맞아 드리는 것도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에서 말이다. 

        

    2024.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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