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격(人格)의 무게와 첫인상의 서률(曙光)
인간의 가치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인격(人格)'이라는 숭고한 기호는 어쩌면 한 인간이 세상을 향해 스스로 감당해 내는 책임을 다한 '존재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품격을 유지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삶의 깊이를 감지한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나는 찰나, 단 10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의 순간에 마음의 판단과 정리는 이미 조용히 마침표를 찍는다. 이는 외모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격의 향기와 결이 상대방의 감각에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허불호(許不好)의 인상' 때문이다. 숨길 수 없는 삶의 기운,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이 짊어진 영혼의 무게다.
2. 수사(修辭)의 위장과 진정성이라는 미로
글은 때로 교묘한 위장을 일삼는다. 화려한 문장과 현란한 수사학으로 자신을 포장하려 애쓰지만, 역설적이게도 글은 쓰면 쓸수록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야 만다. 그렇기에 글 앞에서는 어떠한 변명도 무용하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인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행위는, 결국 타인을 속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위장하는 자아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시(詩)라는 장르는 이러한 위험성과 가장 맞닿아 있다. 언어를 압축하고 절제하는 시적 특성은 때로 비밀스러운 암호나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시인이 아무리 정교한 언어의 미로를 구축한다 한들, 그 미로의 끝은 결국 시인 자신의 본래 모습을 향해 열려 있다. 암호를 해독하고 나면 도달하는 장소는 언제나 시인의 진짜, 얼굴이다.
한국 문학의 자산을 돌이켜보라. 만해 한용운의 시가 여성적 어조의 유연함과 기다림을 담고 있다면, 청마 유치환이나 육사 이육사의 시는 남성적 기개와 야성, 장엄한 의지를 내뿜는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겉으로 드러난 시적 어조와 내면의 결은 결코 단편적인 일치에 머물지 않는다. 신념과 현상은 표면적으로 차이를 보일지라도, 그들의 문학이 시대를 넘어 우리 가슴에 뜨거운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그 안에 담긴 '진정성(Authenticity)' 때문이다.
시의 소명은 화려한 언어의 유희에 있지 않다. 독자의 가슴속 깊은 곳에 참된 감동과 진실한 울림을 남기는 일, 그것이야말로 시가 다해야 할 궁극의 소임이자 '문학의 자리'일 것이다.
3. '등단'이라는 앙상한 뼈대와 오만(傲慢)의 덫
그러나 오늘날 문단을 둘러보면, 시를 마치 자신의 훈장이나 자만심의 도구로 여기는 이들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언제 등단했노라" 하며 연차(年次)라는 앙상한 뼈대만을 내세우는 모습은 참으로 허망하다. 진실을 품지 않은 채 문학의 탈을 쓴 자, 나는 그들을 감히 '가짜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더욱 슬픈 것은 후배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문학적 권위를 탐하는 시인들의 초라함이다. 나 역시 문학의 길을 걸으며 너무나 황당하고 씁쓸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연배도 비슷하고 문학적 성취나 격이 서로 다를 바 없는 어느 소설가가, 단지 '등단이 조금 앞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겉으로는 오만을 떨고 속으로는 한없이 얽매여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일이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어리석고 유치한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격조차 갖추지 못한 자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가 자신이 만드는 잡지를 계속 보내오는 것을 보면 가끔 기특하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핵심은 명확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밝히는 작업이지,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깊고 뛰어난 작품을 써서 세상과 후학들에게 진정한 존경을 받는가의 문제가 본질이지, 몇 년도에 등단했는가를 나타내는 명찰은 하찮고 초라한 외식(外飾)일 뿐이다. 명찰의 크기는 일정한 규격으로 획일화되어 있으며, 아무리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려 해도 그 본질은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염소가 태어날 때부터 턱밑에 수염을 달고 나온다 하여, 그 수염이 염소의 지혜나 명예를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문학의 진정한 인격은 언제나 언어의 겸손함으로 나타나며, 그 사고의 폭은 드높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되, 표현의 실체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겸손을 담아내는 데 앞장서야 한다.
4. 절차탁마(切磋琢磨)와 끊임없는 부끄러움
지나온 삶과 글을 돌이켜볼 때마다, 여전히 어리석고 부족한 표현의 땟물을 완전히 벗겨내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그 발견은 나에게 언제나 깊은 부끄러움이다.
막힌 둑이 터지듯 시원하고 순수한 영혼의 폭포 같은 글을 써내려가고 싶은 열망은 지금도 가슴속에서 간절하고 절실하게 불타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고뇌해도 문학의 거룩한 '장인(匠人)'에 다다르지 못하는 내 미완(未完)의 모습에 스스로 염증과 회의를 느끼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조급한 성미 탓에 다작(多作)만을 좇으며 속도전에 휘둘렸던 날들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언어의 한계 앞에서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밤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의 문학이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고 내일을 향해 열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자위(自慰)를 얻는다.
"나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얼마나 스스로를 정진하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있는가?""세상에 보탬이 되고 타인의 귀감이 되는 글을 써왔는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질문 앞에서 부끄러움이 앞서기에, 마음은 더욱 겸허해지고 송구할 따름이다.
5. 마음의 편집과 '내 그릇'의 철학
세상에 나와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아러니한 일이다. 글을 쓰는 삶 속에는 재미와 슬픔, 고독과 기쁨이 교차한다. 그 복잡다단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문학의 근본'을 끝까지 지켜낸다는 것은 실로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특히 사회적 시선 속에서 '작가'라는 공인(公人)의 타이틀이 부여될 때, 행동의 반경은 한층 좁아지고 책임은 무거워진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관상학서인 《마의상서(麻衣相書)》에 이르기를, 외형의 상(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결인 '심상(心相)'이라 했다. 작가의 인격이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를 부리거나 거만하게 구는 데 있지 않다.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엄격하게 수양하고 편집하며 현세를 살아가는 일, 그 외의 오만과 허세는 모두 자기 함량 미달의 증거일 뿐이다.
돌아보면 예전의 나는 "만약에…"라는 가정법의 언어를 자주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고 삶이 익어가는 깊이에 이르러 보니, 지나친 가정법은 생각의 유희일 뿐 현실에서는 불필요한 근심과 번뇌만을 불러일으킴을 깨닫는다.
설령 세상이 나에게 고관대작(高官大爵)의 화려한 칭호를 준다 한들, 그에 걸맞은 곧은 인격과 행실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그릇의 크기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그릇에 담기는 양만큼 세상의 이치와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참된 인격이 아니겠는가.
6. 에필로그: 순수의 깃발과 삶의 온기
젊은 날, 철없이 저질렀던 허물과 방황에 대한 후회는 역설적으로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나아가 그 후회는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글의 방향을 '순수'라는 정결한 옷으로 입히는 지혜로운 방법론이 되어 준다. 그러니 지나온 날의 부끄러움조차 나에게는 위안의 목록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성찰의 마음으로 겸손의 키를 갖추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끝까지 고수해야 할 '문학의 근본과 본질'이다.
글이란 모름지기 내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하고,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진실하게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세상이 나를 조금 어리석은 작가라 부른들 어떠하리. 남은 삶 동안 글과 인격을 하나로 구가(謳歌)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오늘 밤도 유난히 뜨겁게 문학의 근본을 가슴에 품으며 이 에필로그를 맺는다.
2026.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