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의 여백과 부재의 온기 동료 시인 이성두의 다섯 번째 시집 《별꽃은 피고 지고》를 펼쳐 들며, 나는 한동안 깊은 내면의 동굴 속을 걷는 듯한 먹먹함에 잠겼다. 시가 건네는 질문들은 언제나 가볍지 않지만, 이번 시집은 특히 인간의 근원적인 시간과 상실, 그리고
1. 결핍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언어들 시는 언제나 결핍의 자리에서 피어난다. 존재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심연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감내할 때 비로소 시적 진실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성두의 다섯 번째 시집 『별꽃은 피고 지고』는 삶의 가
1. 서론: ‘사무사(思無邪)’의 미학적 환원과 시적 당위성 공자는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서 그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마치 벽을 등지고 마주 선 것과 같다(불학시 무이립 不學詩 無以立)”라고
시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예민하고도 숭고한 반응의 예술이다. 시대가 탁류처럼 흐르고 물질의 소음이 정신의 고요를 잠식할수록, 시는 인간의 내면을 정화하고 감성의 잃어버린 촉수를 복원하는 맑은 거울이 된다. 문학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시가 유독 우리 영혼의 자정(
글을 쓴다는 행위, 특히 시를 지어내는 작업은 일상의 평범함에서 출발하는가, 아니면 특수한 경험의 집합체인가에 대한 질문은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거듭되어 온 본질적 질문이다. 이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내리는 일은 매우 애매모호하다. 일상의 단순한 포장은 자칫 식상하고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을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마치 벽을 마주 보고 선 것과 같다(不學詩 無以立)"라고 경계한 대목이 나온다. 이 가르침의 본뜻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리 분별에 막힘이 없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유
마이클 센델이 제기한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는 잔인한 사고 실험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질주한다. 선로를 바꾸면 5명의 인부를 살리고 1명의 인부를 희생시킨다. 당신은 레일 변환기를 당길 것인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 집단의 도덕률은
폭주하는 기관차는 자비가 없다.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차가운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그 궤도 위에 놓인 생명의 무게를 계산하지 않는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대중의 식탁에 오른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
시는 스스로 걸어와 시인의 어깨에 앉는 영적 계시인가, 아니면 시인이 고독한 추적자가 되어 붙잡아야 하는 미지의 실체인가. 이 해묵은 질문은 시인의 실존적 운명과 그가 받아 적은 언어의 유기적 관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사제(司祭)가 속세와 구별되는 영적 개성으로 신성
詩를 일별(一瞥)한다는 행위는 단순히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시인의 영혼에 새겨진 무늬와 그 생의 지문을 읽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듯이, 시인이 선택한 시어의 빈도와 그 행간의 질감 속에는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신념의 궤적과 내밀
작가를 존경하는 것과 작품의 경외에 마음을 갖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작가는 존경할 수 없으나 그가 쓴 작품이 훌륭한 것과는, 다르다는 견해가 옳은가 그른가는 비평의 안목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블란서의 도둑 시인 뷔용- 비록 감옥에서만 글을
글을 쓰는 일이란 엑스터시(Ecstasy) 즉 감정의 경지 또는 신의 경지나 무아지경을 방문함으로 입구를 방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의 행로는 삶의 과정과 표정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글이란 글의 표정은 곧 작가의 생을 대변하는 일이며 인생을 묘사하는 글이며 시
전통적으로 무의식은 ‘수직적 심연’의 영역이었다.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은 의식 아래에 침잠된, 발굴해야 할 유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난번 비평집『무의식의 평행』은 이러한 고전적 관습을 단숨에 전복시킨다. 화자는 무의식을 ‘아래&rsq
우리는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 소음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전원이나 산속에서 유유히 사는 사람들이야 틀리겠지만 우리네 일상은 아침을 깨우는 알람 소리부터 지하철의 굉음, 끊임없이 울려대는 스마트폰의 알림,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압박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