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계적 윤리학의 폭력성, 그리고 궤도를 이탈한 정치
폭주하는 기관차는 자비가 없다.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차가운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그 궤도 위에 놓인 생명의 무게를 계산하지 않는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대중의 식탁에 오른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는 단순한 사고(思考) 실험을 넘어 현대 사회의 잔혹한 윤리적 단면을 묻는 날카로운 메스다. 5명의 인부를 구하기 위해 레일 변환기를 당겨 1명의 인부를 희생시키는 행위는 과연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 서늘한 질문 앞에서 공리주의는 다수의 생존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합리적’이라 재단하지만, 생명이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 수학적 계산은 폭력이 될 뿐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작금의 한국 정치사가 보여주는 기형적인 트롤리 딜레마다. 본래의 딜레마가 ‘다수’를 살리기 위한 피를 묻히는 고뇌라면, 현재의 정국은 그 궤도를 완전히 이탈했다. 소수의, 아니 한 줌도 되지 않는 정치적 기득권을 구명하기 위해 도리어 절대다수인 국민의 권리와 사회적 정의를 선로 위에 방치하는 역설이 자행되고 있다. 이른바 ‘검수완박’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법적, 제도적 변환기(Lever) 조작은, 권력이라는 폭주 기관차의 방향을 돌려 특권층을 보호하고 그 파편을 고스란히 대중에게 쏟아붓는 기만적 서사에, 다름 아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원래의 비극조차 사치로 느껴질 만큼, 지금의 시대는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뻔뻔한 선로 위에 서 있다.
2. 숫자의 기만: 5의 무게와 1의 우주
다시 철학의 본질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너무도 쉽게 ‘5’라는 숫자가 ‘1’보다 무겁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저울의 눈금으로 측량할 수 없는 독립된 우주다. "나는 곧 우주이고, 이 우주는 내가 없으면 아무런 존재도 없다"는 실존적 자각 앞에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거룩한 순교가 아니라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끔찍한 날벼락일 뿐이다.
만약 그 선로 위에 홀로 서 있는 1명이 인류의 지도를 바꿀 아인슈타인이라면, 혹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할 위대한 예술가라면 어떠할 것인가? 우둔한 다수와 특출난 소수라는 극단적 대비를 떠나서라도, 사물의 가치와 생명의 무게를 단일한 척도로 획분하는 것은, 오만이다. 트롤리 딜레마가 그토록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당한 자의 슬픔’을 사회가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다. 자율주행 자동차 시대의 알고리즘조차 이 생명의 가치판단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기계조차 감당하기 힘든 ‘존재의 무게’를 인간이 숫자로 환산해 온 것에 대한 거대한 반성문이다.
3. 문학사적 딜레마: 시대의 선로 위에 선 춘원 이광수
이 가혹한 트롤리의 비극은 역사와 문학의 궤도 위에서도 반복된다. 한국 문학사의 가장 아픈 손가락, 춘원 이광수의 생애는 시대의 레일 변환기를 쥐어야 했던 유약한 지식인의 슬픈 딜레마였다.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만큼 시대의 옳은 길(正道)을 알았던 선각자였으나, 혁명가의 심장이 아닌 문학가의 섬세하고 유약한 핏줄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딸 이정화 박사의 회고록과 그의 수필 『인생의 향기』에 나타난 춘원의 모습은 거친 투쟁의 투사가 아니었다. 온갖 시련의 늪을 지나며 형성된 그의 방어적이고 사색적인 성품은, 활달하고 결단력 있는 아내 허영숙의 보호막 안에서 안온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식민 지배라는 폭주 기관차는 그를 선로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41명의 동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옥사할 위기에 처했을 때 춘원은 치명적인 트롤리 딜레마에 빠진다. 41명이라는 동지(다수)를 구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름과 명예(소수, 1인)를 꺾고 친일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선로로 레일 변환기를 당기고 만다. 그러나 비극은 동지들을 온전히 구원하지도 못한 채, 그 자신만이 역사의 오점이라는 영원한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 데 있다. 대중은 그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영웅적 서사를 요구했지만, 도산 안창호와 톨스토이를 흠모하고 종국에는 불교의 자비에 귀의했던 이 명상적 문학가에게, 피 흘리는 투쟁은 제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이었다.
여기에 춘원의 아내 허영숙이 마주했던 또 다른 딜레마가 교차한다. 광복 후 북으로 끌려가기 전, 남편 이광수와 인민군으로 징집될 아들 영근 사이에서 그녀는 아들을 선택하는 강인함(혹은 잔혹함)을 보인다. 시대의 폭력 앞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조차 선택의 저울 위에 올라가야 하는 참담함. 이 가족의 역사는 다수와 소수, 대의와 혈육 사이에서 찢겨 나간 인간성의 비극적 표상이다.
4. 에필로그: 서사의 복원,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읽다
결국 트롤리 딜레마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가르치는 정답지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희생된 자의 몫으로 남겨진 슬픔을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를 묻는 무거운 질문이다.
표면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다수를 구하는 쪽으로 박수를, 치는 사회적 기류 속에서, 비평가와 문학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명백하다. 환호하는 다수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차가운 선로 위에 홀로 희생된 '단 한 명의 우주'를 껴안고 그의 끊어진 서사를 복원하는 일이다.
정치가 기형적인 윤리로 세상을 기만하고 시대가 숫자의 폭력에 마비될 때, 진정한 철학과 문학은 레일 변환기를 쥔 자의 피 묻은 손을 응시하며 끝없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물과 세계에는 늘 단선적인 결론 너머의 이면이 존재하며, 그 틈새를 읽어내는 것만이 시대의 소음 속에서 본질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2026.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