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향기를 지니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따뜻한 배려와 진실한 마음의 향기가 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가식과 허영, 감추어진 욕망의 냄새가 풍긴다. 그 차이는 학벌이나 지위, 재산이나 명예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사람을 대하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본래의 인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어도 삶의 태도까지 오랫동안 속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사람에게서는 깊은 신뢰를 느끼지만, 만날 때마다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남을 낮추는 사람에게서는 알 수 없는 피로감을 느낀다. 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고, 후자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진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자신을 얼마나 높이 세웠느냐가 아니라, 자신과 마주한 사람을 얼마나 존엄하게 대했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지성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지성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줄 아는 겸허함이며,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는 인내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조차 옳지 않다면 거두어들일 수 있는 용기다. 지식이 머릿속에 쌓이는 것이라면 지성은 그 지식이 한 인간의 인격과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 주는 힘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배운 것이 많다는 이유로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로 타인의 존엄을 가볍게 여기며, 사회적 명성을 얻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까지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지성은 내면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가면이 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두고 ‘지성이란 탈’이라 부르고 싶다. 지식과 지성은 다르며, 지성과 인품 역시 저절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고, 짧은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할 기회가 많아졌다고 해서 생각이 깊어진 것은 아니며, 정보를 빠르게 전달한다고 해서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기보다 확신을 과시하고, 상대의 말을 이해하기보다 약점을 찾아 공격하며,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선택하는 태도가 힘을 얻기도 한다. 표현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성찰의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인공지능이 지식의 생산과 전달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2026년의 현실은 우리에게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보와 지식을 얻는 일이 점점 쉬워질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아는 능력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까. 지식의 양과 처리 속도는 기술이 대신하거나 확장할 수 있지만, 그 지식을 어디에 쓰고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는 여전히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아무리 정교한 논리와 화려한 언변을 갖추었다 해도 양심과 책임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 지식은 공동체를 밝히는 빛이 아니라 사욕을 감추는 그림자가 될 수 있다.
어느 모임이나 조직에도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공동의 목적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자리와 권한을 확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 회의에서는 정의와 원칙을 내세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꾸고, 다른 사람의 공로를 자신의 성과처럼 포장하며, 비판을 받으면 잘못을 살피기보다 비판한 사람의 의도를 문제 삼는다. 이처럼 공적인 언어를 사적인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순간, 원칙은 장식이 되고 조직의 신뢰는 조금씩 무너진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언제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침묵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자 한 걸음 물러서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기보다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과 배려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양보가 반복되고 침묵이 관행이 되면, 공동체의 빈자리는 목소리 큰 사람의 몫으로 돌아가기 쉽다. 그때 겸손은 미덕으로 존중받기보다 이용당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선량함은 단순히 참고 견디는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타인을 배려하되 부당함 앞에서는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겸손하되 옳은 원칙까지 양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용기는 자신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필요한 말을 하는 데 있다. 침묵이 평화를 지키는 순간도 있지만, 침묵이 부당함을 지속시키는 순간도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는 행태다.
물론 욕망 그 자체를 죄악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더 나은 삶을 바라며 노력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문제는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능력에 있다. 자신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남의 성취를 훼손하는 것은 다르며, 권한을 맡는 것과 권한을 사유화하는 것은 다르다. 정당한 경쟁과 부당한 수단을 구분하고, 자신의 이익이 타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원칙을 침해하는 순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을 가진 인간이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 절제이며,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 자기 성찰이다.
나는 정치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에서 이러한 문제를 더욱 엄격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학문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두 분야 모두 사회로부터 특별한 신뢰와 책임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정치는 시민의 삶을 책임지는 공적 활동이며, 학문은 지식과 진실을 탐구하여 사회의 이해를 넓히는 일이다. 따라서 정치인에게는 권력을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필요에 앞세우는 자세가 요구되고, 학자에게는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지키는 일보다 진실을 탐구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그러나 정치가 당파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되고 학문이 명성과 권위의 울타리 안에 갇힌다면, 그 본래의 목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시민을 설득하기보다 자신의 편을 결집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공론장은 적대와 불신으로 갈라질 것이다. 학자가 연구와 토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검증하기보다 직함과 경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려 한다면 학문은 권위의 장식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물론 정치인과 학자 모두가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는 유지되고 학문은 앞으로 나아간다. 다만 높은 지위와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무게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수라는 직함이 인격의 완성을 보증하지 않으며, 정치적 권한이 도덕적 정당성을 저절로 부여하지도 않는다. 학문적 성취가 인간적 오만을 정당화할 수 없고, 선거에서 얻은 권한이 시민을 무시할 권리로 바뀔 수도 없다. 직함은 사회가 맡긴 역할의 이름이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다.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더 잘 알아야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의 출처를 잊지 말아야 한다. 권위는 타인에게 복종을 요구할 때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할 때 비로소 존중받는다.
우리는 때때로 겉으로 드러난 명성과 화려한 이력에 마음을 빼앗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판단이 옳다고 여기고,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말에 무게를 더하며, 많은 사람이 따른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동까지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성과 진실은 같은 것이 아니며, 다수의 지지와 도덕적 정당성 또한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평가는 때로 정확하지만 때로는 외형과 이해관계에 흔들린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만큼 무엇을 지키는가를 살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이 걸린 순간에도 원칙을 지키는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책임을 인정하는지가 그 사람의 인품을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결국 정도(正道)라는 오래된 말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정도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감정을 넘어 타당성을 살피고 책임을 감당하는 길이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이라도 감추지 않는 것, 타인의 공로를 인정하고 약속한 책임을 다하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변명보다 성찰을 먼저 하는 것이 정도의 구체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화려하지 않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요령 없는 행동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신뢰는 바로 이처럼 작고 평범한 실천들이 쌓일 때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부정한 행위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지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고 낙관할 수만은 없다. 현실에서는 진실이 늦게 드러나기도 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피하기도 한다. 선량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부당한 사람이 이익을 얻는 일도 여전히 존재한다. 정의는 기다리기만 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밝혀내는 절차와 공정한 제도, 책임을 묻는 시민의 관심, 침묵하지 않는 양심이 함께할 때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다. 시간은 진실을 드러낼 기회를 줄 수 있지만, 그 기회를 현실로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실천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소크라테스의 말로 돌아간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타인의 허물을 찾아내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편견, 욕망과 한계를 먼저 살피라는 요청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오만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자존심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타인의 욕심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의 욕심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한다. 다른 사람의 실수는 오래 기억하면서 자신의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넘겨버린다. 인간의 자기기만은 이처럼 정교하다.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순간, 성찰의 문은 닫히기 시작한다.
자기 성찰은 자신을 무조건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되 그 잘못을 고칠 가능성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며, 자신의 장점을 인정하되 그것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아는 동시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찰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과정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현명해지지 않으며, 지식을 쌓았다고 저절로 겸손해지지도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경험은 지혜로 바뀔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 역시 인간의 욕망과 유혹, 선택과 책임이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관계를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로만 읽을 수는 없다. 그 안에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이르려는 인간의 갈망,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치러야 하는 대가,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복잡한 내면의 움직임이 담겨 있다. 인간은 누구나 유혹 앞에 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혹이 자신의 판단을 지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일이다.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보다 욕망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타인에게만 들려주는 훈계로 끝낸다면, 나는 이 글을 쓸 자격부터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오만을 비판하고 학자의 허영을 지적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욕심과 허영을 찾아내는 일은 훨씬 어렵다. 나는 과연 타인의 인정과 명예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유로운가. 글을 쓰면서 진실을 밝히려 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지식과 안목을 드러내려 했는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혹시, 나 자신은 더 높은 자리에 서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나는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작가라는 이름도 예외일 수 없다. 문장을 다듬고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한다고 해서 저절로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글 속에서는 겸손을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명성을 탐할 수도 있고, 정의를 외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은 외면할 수도 있다.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그 거울을 타인에게만 들이대고 자신에게는 돌리지 않는다면 문학마저 허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글이 사람을 감동, 시키려면 표현의 아름다움만으로는 부족하다. 글쓴이 자신도 그 글이 던지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문장이 나 자신에게도 아프게 다가올 때, 비로소 글은 단순한 주장 너머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인간의 마음을 흐리는 삼독(三毒)이라 일컫는다. 이 세 가지는 특별히 악한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낄 때 솟구치는 분노,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악인으로 규정하기에 앞서 그 사람의 행동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같은 욕망이 자신 안에서도 자라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타인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데 있지 않다. 잘못은 분명히 묻되,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데 있다.
결국 사람의 향기는 높은 자리에서 풍기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도 변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아도 약속을 지키는 자세, 타인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넉넉함,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인품을 이루는 향기일 것이다. 그 향기는 화려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며, 때로는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직함도 권력도 명예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으며, 한때 우리를 둘러싸던 박수와 찬사도 세월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 그때 무엇이 남을 것인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가보다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누구의 손을 잡아 주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보다 무엇을 위해 그것을 사용했는가, 얼마나 유명했는가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가가 더 오래 남지 않겠는가. 삶의 마지막에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화려한 이력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남겨 놓은 사람의 흔적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욕망을 감추고 있지는 않은가. 정의를 말하면서 나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의 허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 자신의 허물도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성찰은 남에게 요구하는 덕목이기 전에 나 자신에게 부과해야 할 의무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언제든 틀릴 수 있고 욕망에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이 깊어질수록 겸손해야 하고,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이 무거워야 하며, 명예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살펴야 한다. 지성은 남을 내려다보는 높은 단상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매일 닦아야 하는 거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타인의 위선을 고발하기보다 내 안의 가면부터 벗겨 보고 싶다. 내가 내세운 정의가 혹시 나의 자존심은 아니었는지, 내가 말한 겸손이 혹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는지, 내가 쌓아 온 지식이 혹시 다른 사람을 낮추기 위한 울타리는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싶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한 편의 글로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태도와 선택으로 조금씩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권력과 명예를 좇고, 사람들은 때로 겉모습과 화려한 말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것은 남보다 높아지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낮아질 줄 아는 품격이다. 지성이란 탈을 벗고 인품의 향기로 살아가는 일, 그것은 타인에게 요구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 할 평생의 공부다.
사람은 무엇을 이루었는가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결국 어떤 사람이었는가로 오래 남는다.
2026년 10월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