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시평

[작품의 연관성과 삶의 상품]

1. 작품과 삶의 관계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6.04.24 08:51

 

[필자의 한가한 시간]

작가를 존경하는 것과 작품의 경외에 마음을 갖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작가는 존경할 수 없으나 그가 쓴 작품이 훌륭한 것과는, 다르다는 견해가 옳은가 그른가는 비평의 안목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블란서의 도둑 시인 뷔용- 비록 감옥에서만 글을 썼지만, 그의 글과 그의 비행과는 달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연구에 목록으로 분석하는가에

여부에 따라 인생과 작품을 한데 묶어서 비평하는 경우와 따로 분리하는 경우와는 본질에서 다를 수 있지만 작품의 본질을 앞세우는 일은 당연한 의미일 것이다. 주관성만을 고집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객관만의 고집 또한 옳은, 판단은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감상 단계를 지나 가치로 도달하려는 열망을 가질 때 비로소 작품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타락은 광고의 혼란 그리고 상업적 선전 함몰, 혹은 별난 행동의 에피소드로 유명해지는 경우 -

대부분의 작품은 가치 없는 경우가 많다. 블란서의 v. 유고는 박수부대를 동원하여 시 낭송을 했고 s. 모음은 작품의 주인공과 같은 사랑을 위해 광고를 내고 결혼하겠다는 선전으로 일약 유명 대열에 올랐지만, 작품으로써 명망을 지킬 수 있었지만, 작품 가치는 우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bestseller"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허명을 많이 보아 왔지만, 그것들이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온 경우는 희소하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일생과 작품의 성과가 어긋남이 없다면 이는 교훈적인 일이겠지만 이는 매우 희소한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삶은 백설같이 하얗고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때로는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틀린 비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국을 침범한 나폴레옹을 세계의 양심이라 칭하면서 그의 말발굽에 무릎을 꿇은 괴테의 경우나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의 경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이미 판정이 난 사실이다. 다만 모순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 가의 해답은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사물 보기<자아로)

1.

시를 쓰는 조건에 일차적인 관문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보다는 마음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범인들의 눈과는 다르다. 사물의 특징을 포착할 수 있을 때, 마음의 눈을 통하여 바라보는 방법 일게다. 왜냐하면 시인이 바라보는 사물은 화석화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습을 포착하는 물활적으로 보일 때, 시적 창조라는 말을 헌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면 하나의 나무에도 철학이 숨 쉬고 있음을 포착하는 시인의 눈은 결국 마음으로 시를 쓰는 이유와 설명이 되는 것이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글일 때, 진정성의 감동을 잉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2. 색채는 마음에 작용한다. 가령 천자문에서 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으로 주 홍사의 4언 250구의 시 – 색채로 시작했다. 빛이 없으면 우주는 검은색이고, 중국의 正色(정색)은 황화를 닮은 누런색이다. 물론 색채는 민족마다 다른 상징을 갖는바, 우리는 죽음을 백색으로 상징하고 서구는 검은색을 상징한다. 색채는 시인마다 다른 시적 의도를 표현했으니, 이육사나 한용운의 청색은 각기 의미에서는 다른 시적 상징을 나타낸다.

 

노오란 조끼 입은 아저씨가/노오란 은행잎을 쓸고 있다/노오란 말을 하다가/문득 고향 생각에/눈물을 흘렸다/고향의 산이/온통/ 가을을 안고/황금 자랑을 하고 있다./대관령 아래/몇 산골짜기에선/장례가 일어나/온 단풍들이 상주 되어/울고 있다.

 

『가을의 독백, 이성교』 중에서

 

 

가령 신석정의 전성기의 시는+++ 온통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었다면, 이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유아적인 감수성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하니 노란색의 파장은 가장 길고 유아의 선호도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성교 시인의 경우 고향으로 떠나는 향수병과 단풍이 교접을 이루면서 “황금”이라는 고귀한 이미지로 상상의 옷을 입히는 의식의 독백을 접한다.

아울러 고향과 황금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지고(至高)의 암시를 설득할 때, 울고 있는 마음속 가을이 시인에게는 현재 정서가 된다.

 

애당초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아침과 밤은 우주 운행의 질서일 뿐이고 동물들이 아침과 밤을 구분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본능일 뿐이다. 시간은 오로지 인간만의 소유물로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고, 시간에 발목이 잡혀 끌려가는 일면 시간을 단위로 쪼개어 생명의 개념을 확장하려 하는 것이다. 시간의 멍에에 끌려가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현상일 뿐 시간은 항상 어떤 응답도 없이 흐를 뿐이다.

 

보이지 않는/시간을 보고 싶구나/지금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시간에도/흐르고 있는 시간을 ...//뿌였게 물든 노을/태곳적 고요에 잠긴 채/멈춰서면 보이는 것은,/아무것도 없고/다만 떨어져 가는 사람의 소리,/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소리일 뿐//아무리 눈 번쩍, 귀 쫑끗, 곤두 세워도/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있는 듯이 아무것도 없구나//보이지 않는 시간을/꼭 보고 싶구나/그리하여/“타로파”의 노래를/부르고 싶구나.

 

<보이지 않는 시간, 전규태> 중에서

 

보이는 현상의 시간보다는 보이지 않는 저쪽의 시간은 아마도 숙업을 이룬 후에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시간의 늪인지 모른다. 이 피안의 시간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허무를 접하면서 언젠가 받아 드려야 할 명제로 남을 때, 보이는 현실은 더욱 미지의 소리에 갈증이 따라다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의 소망이 자리하는 것 같다.

이도 살아있는 현실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지향하는 깊이의 소리를 들으려는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3. 현실을 살아가는 것도 미지이듯 죽음의 땅도 미지의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상상의 의상을 걸치고 떠나는 미지는 항상 꿈꾸듯 화려함에 치장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상상의 길은 현실과는 달리 장식으로 출발하는 이유에서 부족이 충만으로 혹은 각박함이 여유로 길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저세상으로 가게 된다면/이왕이면 꽃비 내리는 마을/머나먼 그 집으로 가고 싶다//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사시사철 꽃비가 내리는 그 마을/늙은 소년들이/복사꽃처럼 웃으며 살고 있을 그 집//그 집을 향하여/물안개 자욱한 저녁/어슴푸레하게 노 저어 강을 건너면//어쩌면 아슬아슬/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은/아, 머나먼 그 집//나는 그때에는/늙은 소년이 되어, 복사꽃처럼 웃으며/바보처럼 가물가물 그 집으로 가고 싶다.

 

<머나먼 그 집, 송하선> 중에서

 

 

현실의 강을 건너는 “그 집”은 피안의 먼 곳에 있기에 자의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 필연으로 도달해야 할, 그 집은 두려움이나 공포로 채색된 회색의 공간이 아니라 화려한 복사꽃이 만발한 곳에서 사는 “늙은 소년”이라는 역설적인 감수성이 기다림의 이름으로 전환된다. 이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상상이 어둠의 공간이기보다는 오히려 화려한 믿음의 뜻이 꽃피는 공간에 대한 기대-

“바보처럼”의 직유가 꽃피는 마을로 길을 인도하는 시인의 의식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며 필자도 따라가야 할 그런 곳이라고 공감하면서 나가려한다.

 

2026. 0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필자 출간 예정]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