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유리창 너머의 들판, 그리고 거울에 찬 서리
서재의 1층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나에게 한 시대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유일한 망명의 길이었다. 창문을 마주하고 서면, 눈앞으로 아득하게 펼쳐진 넓은 들판이 한눈에 가득 찬다.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대지의 묵묵함, 그 정적 속에서 요동치던 내 안의 파도도 비로소 차분하게 가라앉음을 느낀다. 늘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고대하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는 마음을 마음대로 꺼내어 물에 씻고 수건으로 닦아 다시 갈아 끼울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여정은 참으로 고단한 행로가 아닐 수 없다.
장자(莊子)가 말했던 '명경지수(明鏡止水)', 즉 맑은 거울과 멈추어 있는 잔잔한 물과 같은 마음의 경지를 나는 평생토록 갈망해 왔다. 일상에서 바라는 궁극의 도달점은 늘 그 깨끗함에 있었으나, 현실이라는 거친 흙먼지 속에서 내 마음의 거울은 지속적으로 흐려지기만 했다. 마음이 차오르면 비워내야 한다는 자명한 진리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사실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수만 배는 더 어렵고 아득한 작업이다.
되돌아보면, 나의 지난날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당위적인 다짐과, 그 다짐의 틈새를 뚫고 끊임없이 돋아나는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 '자학의 자화상'이었다. 바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를 온전히 경계하지 못했고, 밀려드는 세속의 유혹 앞에서 적당한 함량의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고백이다. "중용(中庸)의 미학이 마음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어야 비로소 비우는 일이 가벼워진다"던 한 고명한 작가의 말처럼, 삶의 조절 점을 갖출 때에야 비로소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그 안목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삶의 깊은 가을을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앞에는 거대한 물음표로 남아 있다. 늘 자문자답하며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갖기를 일상에서 소망하지만, 지속적으로 흐려지는 거울을 보며 다시금 깨끗해지기를 열망하는 이 간절함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양식일지도 모른다.
2. 일직선의 권태와 굽이치는 능선의 인격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의 본성을 두고 벌이는 오래된 논쟁 속에서 어느 한쪽만을 정답으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으나, 날마다 위선과 오만에 빠져드는 스스로의 마음을 닦고 또 닦아내는 행위 자체가 삶을 바르게 영위하려는 최소한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삶에 이러한 스스로를 정화하는 자정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인생이란 그저 끝없는 어려움과 고통만이 반복되는 슬픈 지정곡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내가 의도한 대로 모든 일들이 처리되고, 삶의 굴곡이나 고통이 아예 없거나 가볍다면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 산도 없고 언덕도 없는 막힘없는 평지, 오직 매끄러운 일직선으로만 뻗어 있는 길을 달리는 자동차를 상상해 본다. 그 긴 여정 속에서 장애물이 없는 일직선의 길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방심과 졸음, 그리고 태만을 쌓이게 할 뿐이다. 긴장이 사라진 평탄함은 다반사로 우리를 인생의 곁길로 벗어나게 만들고, 결국에는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내 앞에 다가오는 적당한 위기와 난제들은 나를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인격을 단단하고 굳건하게 주조하는 풀무질이다. 굴곡진 삶의 능선 위를 걸어갈 때 비로소 우리 생의 도화지에는 다채롭고 풍성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 도화지 위에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인가는 전적으로 스스로가 결정하는 안목이지, 타인의 지시나 교육에, 의해 완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이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인간과, 환경을 스스로 소화해 내는 능동적인 행동의 차이는 결국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마음을 닦는 행위는 화백이 붓을 들고 고뇌하는 일이나, 작가가 백지 위에서 글을 쓰는 것과 일념(一念)으로 통한다.오직 자기 노력이 어느 깊이까지 도달하느냐에 따라, 미완의 파편이 완성된 예술품으로 변환되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3. 마음의 행방, 그리고 밝은 마음자리의 힘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마음을 꺼내어 보여달라"고 청한다면, 나는 그 마음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그 궤적을 추적해야 할 것이다. 마음은 어디에도 구체적인 형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스스로가 느끼는 사고(思考)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다 하고 지나쳐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굳이 그 실체 없는 마음을 붙잡았다 하여 당장 득의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없음의 허무에 빠지기보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다듬어가는 생각은 훨씬 더 깊은 가치의 인품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깊은 산속의 수도승들이 하나의 화두(話頭)를 앞에 놓고 용맹정진하는 것 역시 결국 자기를 찾는 행위이자, 자기 마음을 알고 그것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구도의 몸짓이다. 그러나 역사상 그 누구도 완벽한 찾음 그 자체에 머물 뿐이지, "내가 마음을 완전히, 찾았노라" 확언하는 사람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마음을 얻는다'는 것 역시 상대방으로부터 긍정적인 느낌을 전달받고 전달하는바, 보이지 않는 영혼의 흐름을 서로 유추하고 교감하는 일에 가깝다.
중국의 고전 《채근담(菜根譚)》에는 마음의 고요를 찾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자리가 밝으면 어두운 방 안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생각 머리가 어두우면 백일천일(白日千日)이래도 도깨비가 나타난다." 이 얼마나 서늘하고도 명징한 통찰인가. '마음자리가 밝으면'이라는 시원적 조건이 충족될 때, 인간은 비로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창공의 청천(靑天)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내면의 힘은 오직 부단한 수양 혹은 수도적인 닦음에 기초를 두어야만 길러진다. 우리는 종종 조용해야만 글을 잘 쓴다는 핑계를 대곤 한다. 그러나 시장통 한복판이나 노숙자들의 거친 숨결 속에서도 유연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집중이 가져오는 위대한 소득이다. 주변의 소란함을 탓하는 마음은 결국 내 안의 흐려진 거울을 가리기 위한 변명과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4. 고사(故事)의 길을 넘어, 나만의 밭을 갈다
불가(佛家)의 오래된 예를 들면, 신라 선덕여왕 때 백월산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거처를 마련하여 수도에 전념했던 두 청년, 달달박박(達達朴朴)과 노힐부득(努肸夫得)의 고사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깊은 밤, 묘령의 처녀가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갈 것을 청했을 때, 경전의 엄격한 계율을 따라 단호히 거절했던 달달박박의 선택은 그 자체로 치열한 구도의, 한 길이었다. 반면, 늦은 밤 산속에서 헤맬 처녀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해 안으로 불러들여 재우고, 이내 산기(産氣)를 느끼자 따뜻한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며 뒤치다꺼리를 다해주었던 노힐부득의 자비는 율법을 넘어선 살아있는 깨달음이었다. 결국, 그 처녀는 관음보살의 시험이었고, 노힐부득은 성불의 기적을 맞이했다.
이 고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리는 명확하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고정된 단 하나의 이정표만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가 어떤 마음으로 현실에 임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경전을 철저히 따르면 득도할 수도 있겠지만, 형식에 갇히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찾아 그곳으로 나아가는 '옳은 집중'이야말로 깨우침의 진정한 본질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듯이,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우선적이라는 판단은 옳은 논리가 아니다. 마음의 길도 이렇듯 정해진 틀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삶 속에서 부딪치며 찾아 자정(自淨)하고 정하는 데서 비로소 가치 있는 길로 나타나는 법이다.
지나온 날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더 짧을지라도, 나는 남은 생을 추하게 탐욕으로 얼룩지게 하고 싶지 않다. 그저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과 나를 담담하게 관조(觀照)하면서, 불어오는 바람길을 따라 흘러가는 표표(飄飄)함의 생각으로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작지만, 나의 밭을 성실히 갈아 의미의 씨앗을 심을 뿐이다. 현재를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내가 글을 쓰는 행위는 어쩌면 내 삶의 깊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며, 내 생의 기둥을 단단하게 세우는 거룩한 보루이다. 비록 세상에 거창하게 내세울 것도 없고 또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오직 글이라는 엄숙한 거울 앞에 순응하며, 세상의 트렌드가 바뀌고 어떤 파생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만의 개성을, 고유한 공간으로 만들어 선택을 받을 것이다. 외부의 소음과 내면의 욕망이 온전히 가라앉은 바로 그 자리, 글과 내가 하나가 되어 흐르는 그 고요함이 바로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맨 '마음의 안정'이자 이 시대의 '명경지수'가 아니겠는가. 이제 이 거울을 마주한 독자 여러분의 마음자리는 어디를 향하고 계시는지 묻고 싶다.
2026. 1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