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의 이전투구와 상생을 잃어버린 공동체, 그리고 인간을 다시 묻는 문학의 시선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며 문득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의 생각을 부정하며, 상대의 몰락을 자신의 승리로 착각하는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가. 시대는 끊임없이 변한다. 정치의 언어도 변하고 경제의 구조도 변하며 문화가 소비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인간이 지켜야 할 본질적인 가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존중, 공동체에 대한 책임,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현실은 이러한 가치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정치에는 타협보다 대결이 앞서고, 사회에는 이해보다 혐오가 앞서며, 문화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보다 자기 진영의 논리를 강요하는 태도가 강해지고 있다. 우리는 발전된 문명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시대적 모순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며, 평론가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나는 오늘의 현실을 단순한 정치적 갈등으로만 해석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가 권력의 이해관계에 밀려나고, 공동체의 정신이 진영의 논리에 잠식당하는 문명적 위기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1.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권력의 언어만 남았다
정치란 무엇인가. 본래 정치는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삶을 위해 차이를 조정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의견의 일치를 강요하는 체제가 아니라, 의견이 다르더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와 언어를 만들어 가는 체제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이러한 민주주의의 본질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국회는 국민의 삶을 논의하는 공론의 장이어야 한다. 민생의 고통을 헤아리고,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며, 서로 다른 정책적 견해를 토론과 협상으로 조정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조차 정책 검증보다 막말과 정파적 충돌이 부각되고,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담길 장면을 의식하는 정치가 비판받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6년 10월 19일 SBS 보도는 이러한 현상을 이른바 '쇼츠 정치'라는 표현으로 짚었다. 정치가 국민을 설득하는 언어보다 대중의 순간적인 분노와 관심을 붙잡는 장면에 의존할 때, 공론장은 토론의 공간에서 구경의 공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정치인들은 상대의 정책을 비판하기보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국민은 정책의 성과보다 어느 진영이 이겼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그 결과 정치는 공동체를 위한 책임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의 무대로 변질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정치적 갈등이 정치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치권의 적대적 언어는 사회로 흘러들어, 가고, 사회의 갈등은 다시 정치권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국민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삶보다 정치인의 말에 더 많은 감정을 소모하게 된다. 정작 장바구니 물가는 걱정하면서도 정치적 논쟁에는 밤을 지새우고,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정작 그 미래를 결정할 정책의 내용은 진영의 구호에 가려진다.
정치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국민에게 또 다른 갈등의 짐을 지운다면, 그것은 정치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정권도 바뀌고 정치인도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갈등과 불신은 다음 세대의 삶에 오랫동안 흔적으로 남는다. 정치인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음 선거에서의 패배만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분열의 역사가 아닐까.
2. 갈등의 시대, 사회는 서로의 상처를 읽지 못한다
정치의 갈등이 사회의 갈등으로 번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5년 사회통합 실태조사에서 보수와 진보 간 이념 갈등은 4점 만점에 3.2점으로 가장 심각한 갈등으로 나타났다. 계층 갈등, 노사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역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확인되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불신 속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다. 오늘의 갈등은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서로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 않고, 상대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는 확신이 타인의 존재를 밀어내기 때문에 더욱 깊어진다. 청년은 미래가 불안하다고 말한다. 노년은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조차 소외감을 느낀다. 농민은 생산비와 판로를 걱정하고, 자영업자는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한다. 노동자는 일자리의 안정성을 바라며, 중소기업은 불확실한 경제 환경 속에서 버텨야 한다.
각자의 고통은 다르지만 그 밑바닥에는 하나의 공통된 질문이 놓여 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질문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불행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구조적 문제는 정치적 논쟁으로 소비되며,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는 어느새 진영의 유불리를 따지는 도구가 된다. 나는 특히 지역 공동체의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시의 거대한 정치 담론보다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때로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서로 다른 세대가 살고,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주민과 새롭게 이주해 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도 지역의 일상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서로를 이웃으로 인정하는 작은 배려와 공정한 제도다. 공동체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생활의,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정작 공동체를 유지하는 인간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3. 문화의 위기란 인간의 상상력이 가난해지는 일이다
정치가 갈등을 확대하고 사회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화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화는 단순한 오락이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한 시대의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를 보여주는 정신적 거울이다. 문학과 예술은 시대의 권력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의 언어가 감추는 진실을 드러내고, 사회가 외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다수의 시선 밖으로 밀려난 존재에게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문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작품들은 대부분 시대의 상처와 인간의 고뇌를 외면하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내면의 모순과 죄의식을 파고들었고,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속에서 인간 존재의 윤리를 물었다. 빅토르 위고는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 존엄의 문제를 문학적 서사로 끌어올렸다.
우리 문학 역시 식민지의 아픔과 전쟁의 비극, 산업화의 그늘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기록해 왔다. 문학은 역사의 승자만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 시대에 짓눌린 사람들,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언어로 되살렸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의 영역마저 정치적 진영의 논리로 나뉘고, 예술가의 작품보다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먼저 평가받는다면 문화는 자신의 자율성을 잃게 된다. 예술은 어떤 권력의 홍보 수단도 아니며, 어느 진영의 전유물도 아니다. 예술의 가치는 특정한 이념을 얼마나 충실하게 대변하느냐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얼마나 깊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느냐에 있다.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작 환경을 빠르게 바꾸는 시대일수록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해진다. 수많은 정보와 영상이 매일 쏟아지지만, 정보의 양이 인간의 사유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짧은 영상은 순간적인 관심을 얻을 수 있지만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자극적인 문장은 분노를 일으킬 수 있지만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하지는 못한다. 문학은 바로 그 짧은 반응의 시대에 오래 생각하는 인간의 시간을 회복시켜야 한다.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며, 세상을 한 가지 시선으로만 판단하지 않는 훈련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의 문학이 회복해야 할 새로운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4. 상생이 없는 정치는 미래를 잃고, 공감이 없는 사회는 인간을 잃는다
상생이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 상생은 말처럼 쉽지 않다. 상생은 무조건적인 양보도 아니고, 잘못을 덮어주는 타협도 아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공동체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책임 있게 조정하는 능력이다. 정치에서 상생이란 여당이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야당이 여당의 정책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잘못된 정책은 비판해야 하지만 옳은 정책이라면 상대가 제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에는 진영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감시하는 시민의식이다. 이러한 원칙은 정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세대 간의 갈등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고, 지역 간의 불균형은 공정한 기회와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경제적 양극화는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과 구조적 개선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문화적 갈등 역시 다름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름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모든 갈등을 없앨 수는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때로는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갈등의 존재가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대화는 멈춘다. 상대를 함께 살아갈 시민으로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협상의 문이 열린다. 국민통합위원회가 발표한 2026년 국민인식조사에서 국민의 92.4%가 보수·진보 간 정치갈등을 심각하다고 응답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정치적 승리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국민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되는 사회에서 과연 누가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질문이 오늘의 정치권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5. 문학의 새로운 시선은 인간의 존엄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문학이 다시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문학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문학이어야 한다. 정치적 논쟁에 밀려 목소리를 잃은 농민의 이야기, 일자리를 찾아 낯선 나라에 온 외국인 노동자의 이야기, 부모의 경제적 형편 때문에 꿈을 미루는 청년의 이야기, 평생을 가족과 사회를 위해 살아왔지만 노년의 외로움 앞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 이러한 삶의 서사가 문학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삶 속에 한 시대의 진실이 담겨 있다. 문학은 거대한 권력의 움직임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미처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의 눈물을 기록하고, 통계가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새로운 휴머니즘은 인간을 추상적인 이상으로만 찬양하는 데서 탄생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낭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적어도 인간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 줄 수 있다. 그것은 정치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정치가 놓친 인간의 본질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일이다. 평론가의 역할 역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작품의 문장과 형식만을 평가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작품이 시대와 어떻게 만나며 인간의 존엄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지 질문해야 한다.
비평은 작품을 칭찬하는 기술이 아니라 시대의 정신을 해석하는 책임이다. 문학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통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오늘의 문학이 다시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문학의 새로운 시선이자 시대를 향한 비평의 책무일 것이다.
6. 시대를 바꾸는 것은 결국 인간을 대하는 태도다
역사는 권력의 흥망성쇠를 기록하지만, 그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은 숫자와 사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권은 바뀔 수 있고 정치적 구호는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했는지, 약자의 목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얼마나 함께 살아가려 노력했는지는 그 사회의 문명 수준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남는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분열과 적대의 언어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공존의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인가. 정치인은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언론은 자극보다 사실을 앞세워야 하며, 문화예술인은 진영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 시민 역시 자신의 신념을 지키되 다른 사람의 생각과 존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나는 문학이 이 시대의 갈등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은 갈등의 한가운데서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 할 수 있다. 정치가 적을 만들 때 문학은 이웃을 발견하고, 사회가 사람을 숫자로 환산할 때 문학은 한 사람의 생애를 복원한다. 그렇기에 문학은 현실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현실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상처받은 인간을 만나고, 시대의 모순을 읽어내며,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깊은 성찰이다. 더 많은 비난이 아니라 더 정확한 책임이며, 더 강한 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더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다.
정치는 권력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사회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어야 한다. 문화는 소비되는 상품을 넘어 인간의 정신을 성장시키는 힘이어야 한다. 그리고 문학은 그 모든 것의 바깥에서 박수를 치는 관객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인간의 존엄을 증언하는 양심이어야 한다. 나는 오늘 이 시대에 다시 묻고 싶다. 우리가 정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권력인가, 더 나은 삶인가. 우리가 문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인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내 편의 이익인가, 우리 모두의 미래인가. 시대의 진정한 발전은 건물의 높이나 경제의 규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갈등은 시대의 숙명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외면하고 증오를 정치의 자산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불행이다. 문학은 그 불행을 침묵해서는 안 된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문학은 인간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그려야 한다. 권력이 거칠어질수록 언어는 더 깊어져야 하며, 사회가 분열될수록 작가는 더 넓은 인간의 세계를 품어야 한다. 결국, 한 시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가 얼마나 강한 권력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들었느냐에 있다. 정치가 권력의 승리를 기록할 때 문학은 인간의 상처를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넘어 다시 함께 살아갈 희망을 써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새로운 시선이며,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론가가 현실 앞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시대적 책임이다.
2026. 1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