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기획 칼럼] 시(詩)의 내적 생성: 논리의 뼈대 위에 피어나는 감성의 매혹

들어가며 : 백지 위에서 마주하는 끝없는 자기 검열의 궤적

이분희 취재본부장 2026.10.11 08:33

 

 

 

[필자]

펜을 쥐고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혹은 모니터의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글을 빚어낼 때면 늘 하나의 본질적인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지금 철저한 구조와 논리에 방점을 찍고 합리적 판단의 순서에 따라 시를 직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통제되지 않은 감성의 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가.'

때로는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직관이나 무의식의 흐름(중논)에 이끌려 펜이 먼저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결국 시의 종착지에 다다라 마침표를 찍을 때면, 철저히 계산되고 의도된 구조적 안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술이 독자의 미감(美感)을 자극하고 가슴을 점령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평론가로서 수많은 텍스트와 대중예술을 분석하고, 시인으로서 늘 언어와 씨름하며 고민하지만, '어떻게 써야만 완벽한 예술에 도달하는가'라는 명제 앞에서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 오리무중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글을 그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모든 현실의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텍스트와 독대하는 그 시간만큼은, 파편화된 세상 속에서 온전한 나의 기분을 되찾는 숭고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1. 매혹의 기원: 예술은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점령하는가

 

예술이 감동을 주는 연원(淵源)에는 크게 두 가지 결이 존재한다. 하나는 철저히 심리적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직관의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구조적 합리로 이해될 때 찾아오는 지적 카타르시스다.

전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길을 걷다 우연히 고혹(蠱惑)적인 이성(異性)과 마주쳤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기고 심리적으로 점령당하는 기분을 느낀다. 이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이목구비의 기하학적 대비나 좌우의 균형미를 따지는 이론적 분석이 아니다. 논리의 틈이 끼어들 겨를도 없이, 그저 상대가 내뿜는 고유한 분위기와 아우라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당도한 매혹 앞에서는 어떤 과학적 설명도 무력해진다. 관습의 틀을 벗어나 압도적인 절경(絶景)이나 숭고한 자연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먹먹함 역시 이와 같은 맹목적 감동의 궤를 같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숨어있다고 하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은 늘 감동이 지나간 자리를 뒤쫓아 오며 합리를 주장하기 마련이다. 학자들이 예술을 분석하며 종종 추상의 미로를 헤매는 이유도, 언어로 다 포착할 수 없는 이 '분위기의 권력'을 억지로 해체하려 들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예술의 결과물은 결국 '해석의 길'에 당도하려는 인간 역사의 일환이다. 그러나 예술을 수용미학(受容美學)적인 견지에서 바라볼 때, 독자의 가슴을 점령하는 방식을 계량적인 숫자로 판별하거나 도식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확실한 것은, 감동이 무사히 독자의 내면에 도착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내적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2. 감각의 예술과 사유의 예술: 음악의 직관과 시의 구조

 

대부분의, 예술은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느낌(직관)과 이성적으로 사유하여 결론을 내리는 방법(논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장르에 따라 그 무게중심은 달라지면서 말이다.

음악이 귀로 듣는 순간 청각 신경을 건드리며 찰나의 매혹을 선사하는 '직관의 예술'이라면, 詩(시)는 활자를 눈으로 익히고 행과 연의 여백을 사유하며 '왜 그러한가'라는 이성적인 구조를 해독해 내는 '사유의 예술'이다. 시는 감정의 덩어리를 활자라는 기호로 변환한 것이기에, 감동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의 지적 개입이 필요하다.

 

여기서 시의 질서와 배열에 따른 '구조'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관습적인 기교를 배제하더라도, 시는 엄정한 이론의 길을 밟아야 한다. 시를 쓰면서 논리의 방점이 어디에 찍히는가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시어(詩語)들에 '논리의 옷'을 정교하게 입혀야 하는 이유다.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내정될 때, 시인은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의도한 종착지를 향해 텍스트를 밀고 나갈 수 있다.

 

가령, 어린아이들의 행동은 본능적이고 돌출적이지만, 성장 과정을 거치며 사회적 관습과 질서를 익히게 되면 일정한 행동의 궤적(루트)을 갖추게 된다. 시 창작의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날것의 시상(詩想)이 머릿속을 스칠 때는 제어할 수 없는 아이의 행동 같지만, 그것을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인은 현실의 문제와 표현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다. 그 거리가 너무 멀고 헐거울 때, 우리는 썼던 시를 지우고 다시 고치며 뼈를 깎는 개작(改作)의 늪에 빠진다. 이 지난한 수정의 과정이야말로 의미의 합리성이 고개를 내밀고, 논리의 구조가 만족스러운 방점을 찍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3. 시적 모호성(Ambiguity)과 비합리의 경계

 

물론 시가 과학적 증명처럼 '1 더하기 1은 2'라는 건조한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에서의 사물 결합은 감정의 결합과 유사하기에 필연적으로 '모호성(ambiguity)'을 잉태한다. 시에서 모호성의 이유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균실처럼 깨끗한 이성적 판단만을 남겨둔다면, 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라 설명문이나 논설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관습적인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고 비이성을 맹목적으로 부추기는 방향으로만 기울어진다면, 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상식과 미학은 파괴되고 만다. 1930년대, 한국 문단에 충격을 던진 이상(李箱)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그의 시를 단순히 비이성적이거나 미쳤다고 딱지 붙일 수는 없다. 그의 텍스트는 당대의 상식으로 접근하기엔, 지독히 애매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난해함 이면에는 근대성의 모순을 해체하려는 고도의 지적 계산과 또 다른 차원의 정확성이 숨어있었다. 즉, 훌륭한 난해함은 철저한 이성의 벼림 끝에 탄생하는 역설인 것이다.

 

정신의 흐름이나 무의식의 발현이 완벽한 분석 대상인지 아닌지는 확증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프로이트(Freud)가 정신분석학을 처음 발표했을 때, 인간의 이성을 맹신하던 이들로부터 사교(邪敎) 혹은 신성모독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절대적인 공간과 시간을 믿었던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충돌하며 새로운 우주관을 열었듯, 인간의 기준과 학술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다.

이처럼 시의 논리 역시 과학적인 '정치(精致)함'을 얼마나 요구할 것인가는 시대와 철학에 따라 궤적을 달리해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가 비이성의 가면을 쓸 때조차 그 내면에는 인간 존재를 관통하는 단단한 철학적 합리가 흐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4. 맺으며 : 시(詩)의 임무와 자아의 구원

 

오늘날 우리는 자극적인 영상과 파편화된 정보가 1초 단위로 쏟아지는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매혹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활자를 읽어내고 여백을 사유해야 하는 시의 자리는 좁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詩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각만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찌꺼기를 순화하고, 내면의 미적 감수성을 총동원하는 정서의 문제이면서도, 결국에는 가장 투명한 이성에 다가가게 만드는 통로다. 시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은 보다, 활발하고, 사유하며, 깨끗한 '인간의 길'이다. 정서의 집약체인 시가 이러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할 때, 예술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얻는다.

 

시는 어쩌면 세속적인 의미의 '상식'을 대변하는 임무를 띠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의 범주 너머에서 순수와 깨끗함, 그리고 마음의 순화(淳化)를 오로지 목표로 하여 나아갈 때, 시가 정한 그 이정표는 가장 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내 삶의 베스트(Best)라 부를 만한 절창(絶唱)은 나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 글의 끝자락에 당도할 완벽한 미학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어 방황한다. 그러나 글을 쓰는 그 깊고 고요한 시간만큼은,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정제되지 못했던 나의 자아를 정립하게 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깊은 편안함을 얻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빠져드는 그 몰입의 순간. 그 순간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고통스러운 창작의 과정일지라도 문학은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소중한 벗이며, 나를 깨어있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호흡임이 틀림없다.

시적 감성이란, 결국 이렇듯 치열한 논리의 뼈대 위에서 피어나는 가장 따뜻하고 매혹적인 인간의 체온이다. 오늘도 나는 그 체온을 종이 위에 남기기 위해 묵묵히 펜을 든다.

 

2026.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상산제 장면]

 

이분희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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