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저널] 부천문화원은 2026년 10월 16일 ‘부천시 항일독립운동 연구지원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부천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성과공유회를 개최했다.
부천문화원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는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는 부천문화원 연구위원들과 외부 전문가가 연구한 결과를 부천시민들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부천 출신의 유일한 의병장인 남광원 의병장의 가문과 활동, 1920년대에 일어난 부천 농민들의 소작료 반대 항쟁, 1940년대 부천의 대표 민족기업인 유한양행 직원들의 항일운동의 양상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부천시 복지정책과와 부천문화원이 함께 하는 이번 사업은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을 행한 부천 출신 혹은 부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발굴, 연구하기 위해 기획됐다.
특히 이번 연구사업을 통해 부천 원종리 출신 남광원 의병장의 묘비와 족보자료, 후손 인터뷰 등을 새롭게 발굴했고 부평수리조합의 연구 과정에서 발견된 부천농민조합의 소작료 반대 항쟁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처음 진행됐다.
더불어 유한양행의 직원으로서 국내 독립운동이 소강기에 접어든 1940년대에 조선총독부의 ‘사이토’총독을 암살하려 한 오상흠, 정문규 지사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관심을 더했다.
첫 발표는 부천학연구소의 권만용 위원이 부천 출신의 유일한 의병장인 남광원 의병장과 원종동 일대에 세거한 의령남씨 집안의 가계를 살핀 발표로 시작됐다.
연구 결과 남광원 의병장은 의령남씨 충간공파의 교위공 후손으로 당시 부천군 오정면 원종리에서 5대조 이상 세거한 집안 후손이었다.
이후 1910년 을사늑약 이전에 광제원 사무위원을 그만둔 남광원 의병장은 전북 군산의 임피면 숯골에서 의병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후 1945년 광복 직후에 별세했다.
이번에 처음 찾은 남광원 의병장의 묘비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이어서 부천학연구소의 장정규 위원은 부평수리조합 조성 이후 발생한 1920년대 부천 지역 농민항쟁에 대한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이른바 ‘부평수리조합비 거부 운동’과 ‘소작료 반대 항쟁’은 지난 2025년 부천문화원이 수집한 부평수리조합의 자료를 바탕으로 진행되어 더욱 의미가 깊다.
특히 1914년 만들어진 ‘부평수리조합’ 이 끼친 여러 가지 폐해와 부작용으로 인해 부천의 대다수 조선인 소작농들이 부당한 처우를 겪으면서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수리조합비 거부와 소작료 반대 항쟁으로 이어진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부평수리조합의 조합장인 일본인 지주와 시공업자가 유착해 부실시공을 한 사실, 1925년 발생한 대홍수로 엄청난 복구비용이 들게 되자 눈덩이처럼 늘어난 조합의 부채를 조선인 소작농에게 부과하려다가 소작비 항쟁까지 일어나게 된 사실까지 입체적으로 조명해 관심을 더했다.
이후 4천여명의 소작농들이 지주의 횡포에 맞서 농민조합을 창립하고 소작료 투쟁에 성공한 ‘메가리’ 공장의 장소를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흥미로웠다.
세번째로 건국대학교의 김명환 강사가 1940년대 부천의 잊힌 독립운동가인 유한양행 직원인 정문규·오상흠의 민족운동을 조명하는 발표를 진행했다.
김명환 강사는 현재 부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일제강점기 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남광원 의병장 뿐이고 부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3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 객석을 놀라게 했다.
이후 소사역을 중심으로 한 1940년대 부천의 성장과 유한양행 본사의 이전이 갖는 의미를 밝힌 후 당시로서는 최상위 엘리트였던 정문규와 오상흠 지사가 유한양행 직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밝혀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도 했다.
모든 발표가 끝난 후 이어진 종합토론에서 좌장인 김희태 소장과 근현대사 전문가들은 부천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본격적 연구의 중요성을 밝히고 향후의 구체적 연구와 독립운동가 현양 정책의 필요성 등에 대해 공감했다.
전문가와 시민이 자리를 메운 이번 성과공유회를 통해 부천문화원은 부천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콘텐츠 발굴, 시민 교육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부천문화원은 부천학연구소와 함께 11월 10일 제4차 부천문화원 지명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