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언어가 가린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의 본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본질이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대의에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지도자가 소외된 지역을 보듬고 균형 발전을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 언사다. 그러나 통치권자의 언어가 현실의 물리적 조건과 과학적 데이터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오직 SNS라는 휘발성 강한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 수사로만 소비될 때 국민이 느끼는 피로감과 한심함은 극에 달하기 마련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일화는, 지도자가 국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통렬한 경구로 되돌아온다. 진정 국민을 국가의 주인으로 섬긴다면, 감정적 갈라치기나 선언적 구상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공약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현실적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최근 제기된 ‘전라도 반도체 공장 유치’ 구상이 바로 그 시험대다.
반도체 산업의 숨은 핵심, ‘용수(用水)’라는 절대적 조건
초미세 공정을 다루는 첨단 반도체 산업을 흔히 ‘빛과 기술의 예술’이라 부르지만, 그 이면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물질적 기반은 다름 아닌 ‘물(水)’이다. 반도체 웨이퍼 한 장을 깎고 씻어내는 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초순수(Ultra Pure Water)가 필요하다. 현재 경기도 용인과 평택에 조성 중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완공되면 하루에만 약 130만 톤 이상의 용수가 상시 공급되어야 한다.
정치적 논리로 “지방 균형 발전을 위해 전남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공장의 라인을 돌릴 물이 없다면 그 어떤 화려한 조감도도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호남 지역의 수자원 현황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 구상이 얼마나 거대한 자연적·물리적 제약에 직면해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69억 ㎥ 대 157억 ㎥, 냉엄한 데이터가 말하는 수자원의 진실
냉철한 수자원 평론가의 시각에서 공식 통계를 짚어볼 때, 전라도의 젖줄이라 불리는 섬진강과 영산강의 유량(流量)은 반도체와 같은 거대 장치 산업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의 공식 수자원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하천의 연평균 유출량은 낙동강이 157억 ㎥에 달하는 반면, 섬진강은 41억 ㎥, 영산강은 28억 ㎥에 불과하다.
호남의 두 거대한 줄기인 섬진강과 영산강의 유량을 모두 합쳐도 69억 ㎥로, 낙동강 한 곳이 품고 있는 유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약 43%) 것이 엄연한 지리적 현실이다. 게다가 섬진강 물은 이미 광양제철소를 비롯한 여수·광양 국가산단의 공업용수와 인근 주민들의 생활용수로 잔여 용량 없이 낭떠러지 끝까지 쥐어짜 쓰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여기에 막대한 물을 상시 소비하는 반도체 공장까지 들어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뭄이 찾아올 때마다 호남 지역 전체의 가정이 단수를 겪거나, 기존의 핵심 국가 기간산업인 석유화학·철강 라인을 멈춰 세워야 하는 치명적인 ‘용수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 시대, 예측 불가능해진 호남의 물 안보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마주한 기후 위기는 과거의 평균적인 통계마저 무력화하고 있다. 불과 수년 전 호남 지역을 덮쳤던 극심한 가뭄으로 동복댐과 주암댐의 저수율이 한 자릿수 턱밑까지 내려앉아 광주광역시 전체가 제한 급수 위기에 직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반도체 공장은 단 1초, 단 한 방울의 물 공급만 끊겨도 수천억 원에 달하는 웨이퍼를 전량 폐기해야 하는 극도로 민감한 연속 공정 체계다. 자연 유량 자체가 낙동강의 절반도 되지 않는 척박한 수자원 환경 속에서,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 위험까지 가중된 지역에 국가 미래 먹거리의 사활을 걸겠다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직무유기에 가깝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과학적 사실과 기후 리스크를 외면하는 행태야말로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다.
울림이 있는 정치를 위하여: 수사(修辭)를 버리고 본질(本質)을 보라
진정한 지도자의 무게감은 SNS의 짧은 글귀나 지역을 편 가르는 갈라치기 언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배치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책임감’에서 나온다.
균형 발전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가치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각 지역이 가진 물리적 환경과 특성에 맞는 옷을 입혀야지, 물이 부족한 곳에 무작정 물을 가장 많이 쓰는 첨단 산업을 앉히겠다는 식의 공약은 결국 지역 주민들에게 허황된 상실감만 남길 뿐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현실을 직시하는 자리다. 이제라도 지도자는 화려한 정치적 수사와 스마트폰 화면 뒤에 숨지 말고, 데이터가 가리키는 엄혹한 수자원의 한계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다루는 정책이라면, 표를 얻기 위한 선동이 아니라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확실한 수자원 대책과 지속 가능한 그릇을 먼저 증명해 보이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다.
► 참고자료 :
낙동강:연평균 유출량 157억 ㎥(유역면적 23,384 ㎢)
섬진강:연평균 유출량 41억 ㎥(유역면적 4,912 ㎢)
영산강:연평균 유출량 28억 ㎥(유역면적 3,468 ㎢)
두 강을 합친 연평균 유출량은 69억 ㎥(41억 + 28억)로, 낙동강 하나가 보유한 유량(157억 ㎥)의 약 43%수준입니다. 즉, 영산강과 섬진강을 다 끌어모아도 낙동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냉엄한 데이터의 진실이다.
2026.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