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책을 읽는 노년은 늙지 않는다 152]

― 독서와 창작은 가장 인간적인 치유다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6.09.10 08:43

 

[필자]

 

사람은 언제 늙는가. 주름이 늘어날 때인가. 허리가 굽고 다리에 힘이 빠질 때인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질문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닫힐 때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육체의 노화는 자연의 순리다. 세월을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정신의 노화까지 운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몸은 늙어도 생각은 젊을 수 있고, 머리는 희어져도 상상력은 푸를 수 있다. 나이는 숫자로 늙지만, 정신은 호기심을 잃는 순간부터 늙는다. 그렇다면 노년의 삶에서 무엇이 정신을 깨우는가.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책이다. 그리고 창작이다. 독서는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가 아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와 타인의 세계로 들어간다. 한 줄의 문장을 읽으며 생각하고, 한 편의 시를 만나며 감정을 움직이고, 한 사람의 삶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본다.

 

그것은 정신의 운동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이 굳듯이 생각을 움직이지 않으면 정신도 굳는다. 그래서 노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무료함의 해소가 아니다. 생각의 근육을 계속 움직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정신운동이다. 더구나 독서는 혼자 하는 행위 같지만 결코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다.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작가가 있고, 등장인물이 있고, 역사 속의 사람들이 있고, 나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과 대화하는 일이다. 나는 이것이 노년에게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년의 가장 큰 적은 가난만이 아니다. 질병만도 아니다. 때로는 고립과 단절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한다. 디지털 기기는 쏟아지고 젊은 세대의 언어는 달라지며 사회의 중심에서 한 걸음씩 밀려나는 느낌을 받는 어르신들이 많다. 가족이 있어도 외롭고, 사람들 속에 있어도 대화할 상대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책은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은 아직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의 기억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작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써보십시오.”

나는 이 지점에서 독서와 창작을 단순한 문화교육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에세이를 쓰는 일은 단순히 글을 잘 쓰기 위한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어릴 적 부모의 모습이 떠오르고, 젊은 날의 사랑이 생각나고, 자녀를 키우던 시절이 떠오르고, 지나간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기억들을 한 문장씩 적다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잊고 있던 내가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창작을 ‘기억의 복원’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가 흔히 치매를 이야기할 때 약물과 의료기관을 먼저 생각한다. 물론 의료적 치료와 예방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치매 예방을 의료의 영역에만 가둘 필요는 없다. 일상에서 뇌를 자극하고, 생각하고, 회상하고, 표현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활동 역시 중요하다. 독서와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정신활동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책을 읽으려면 문장을 따라가야 한다.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등장인물과 사건을 연결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야 한다. 글을 쓰려면 더 많은 정신활동이 필요하다.

무엇을 쓸 것인가 생각하고, 기억을 꺼내고,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만들고, 앞뒤의 맥락을 살피고, 다시 고쳐 쓴다.

한 편의 짧은 에세이를 쓰는 데도 인간의 정신은 쉼 없이 움직인다. 그러니 독서와 창작은 정신의 체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나친 의학적 과장을 경계하는 것이다. 독서와 창작만으로 우울증이나 치매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신질환에는 전문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고, 치매 역시 의료적 평가가 필요한 질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독서와 창작의 가치를 축소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을 건강한 노년을 만드는 생활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것을 ‘양거양득’이 아니라 ‘일석이조를 넘어선 삶의 선순환’​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간다.

집에서 텔레비전만 바라보던 사람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온다. 걸어서 도서관에 가고, 사람을 만난다.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읽는다. 강좌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글쓰기 수업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몸은 움직이고 정신은 깨어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글을 쓴다. 다음 날에는 어제 읽은 책이 생각난다.

 

“그 작가는 왜 이런 문장을 썼을까?” “내 삶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나도 한번 써볼까?” 이 작은 질문 하나가 사람을 다시 삶 속으로 끌어낸다.

나는 이것이 노년문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단순한 수명이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을 가장 강하게 깨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창작이다.

창작을 시작한 어르신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과거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소재가 된다.

시장에 가던 길도 이야기가 되고, 자식에게 미안했던 순간도 이야기가 되고, 첫사랑의 기억도 시가 되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도 한 편의 에세이가 된다.

 

평범했던 삶이 문학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여기에서 문학의 가장 위대한 힘을 본다. 문학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문학은 유명한 작가만 쓰는 것이 아니다. 평생 농사를 지은 사람도 쓸 수 있고,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도 쓸 수 있으며, 자녀를 키우며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도 쓸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의 삶에는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문장이 있다. 흙 묻은 손으로 살아온 세월, 자식을 키우며 흘린 눈물, 가난했던 시절의 밥 한 그릇, 부모를 떠나보내던 날의 기억.

이것들은 모두 문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노년의 창작교육은 단순히 글쓰기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삶은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 한마디가 사람을 일으킬 수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바로 이 점을 너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년복지를 말하면서도 우리는 노인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부터 생각한다. 돈을 드리고, 식사를 제공하고, 시설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물론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르신들이 무엇을 받을 것인가?”에서 “어르신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로. 노인은 복지의 대상만이 아니다. 노인은 문화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

노인은 작가가 될 수 있고, 시인이 될 수 있으며, 지역의 기억을 기록하는 구술사학자가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노인이 자신의 인생 70년을 기록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역사다.

우리가 지금 사라지고 있는 노인들의 기억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 뒤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노년의 독서와 창작은 개인의 정신건강을 넘어 지역문화의 자산을 보존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지방의 작은 마을일수록 이것은 더욱 중요하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은 사람이 걸어 들어가는 문화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아침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시를 쓰고, 저녁에는 서로의 글을 읽어주는 공간. 젊은 사람과 노인이 만나고, 토박이와 귀촌인이 만나고, 서로 다른 세대가 한 권의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

나는 이런 도서관이야말로 진정한 지역공동체의 심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게 하는 것. 그것이 독서문화의 궁극적인 가치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부수효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걷기다. “도서관에 가십시오.” 이 말은 단순한 문화적 권유가 아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생활의 리듬을 만들어주는 말이다.

집에서 나와 걷고, 도서관에 가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이 단순한 일상이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움직인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노년정책의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걷는 노년, 읽는 노년, 쓰는 노년.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 건강한 노년문화가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노인을 너무 쉽게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노인은 여전히 질문할 수 있는 인간이며,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며, 공부할 수 있는 인간이고, 창작할 수 있는 인간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호기심까지 은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아온 시간이 많기 때문에 더 깊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젊은 사람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해야 하지만, 노년은 이미 수많은 삶을 경험했다.

그 경험에 책을 더하고, 사유를 더하고, 문장을 더한다면 얼마나 깊은 창작이 나올 수 있겠는가. 나는 노년의 창작을 ‘늦은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결산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순간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굳어 있던 마음이 풀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에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이것을 복지정책의 변방에 두고 있는가.

왜 어르신들에게 단순히 시간을 때울 프로그램만 제공하는가.

왜 노년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보는가.

 

왜 도서관과 주민센터, 복지관, 평생학습관을 연결하여 ‘읽고 쓰는 노년문화’​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만들지 않는가.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된다. 거창한 시설이 없어도 된다. 책 몇 권과 의자 몇 개,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시작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책을 읽고, 한 편의 시를 쓰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시작이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 나는 확신한다.

 

책은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정신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도구다. 창작은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다시 사회와 연결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노년정책을 다시 써야 한다. ‘노인에게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노인이 어떻게 계속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창조하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의 답 가운데 하나가 독서이고 창작이다.

►책을 읽기 위해 걷고, ►걷기 위해 집을 나서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가고, ►사람을 만나 생각을 나누고, ►생각을 글로 쓰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노년의 선순환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제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년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죽이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시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그 중심에 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야 한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써보십시오.” 인생은 나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 이상 만들지 않을 때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 싶다. 책을 읽는 노년은 늙지 않는다. 글을 쓰는 노년은 멈추지 않는다. 사람과 이야기하는 노년은 고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르신들에게 책 한 권과 한 장의 원고지를 건네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종이와 글자를 건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이유 하나를 건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독서와 창작의 힘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돈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노년복지이며, 가장 조용하지만 강력한 정신건강의 처방이고, 한 사람의 기억을 지키며 한 지역의 문화를 살리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치유문화가 되어야 한다.

 

2026.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무전 여행 중]

 

 
수원본부장 손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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