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음의 시대를 건너는 문학적 소명과 시적(詩的) 언어의 구원
오늘날의 시대는 모든 가치가 실용과 효율이라는 가혹한 잣대 위에 놓여 있다. 수많은 지식인과 학자들은 인생을 하나의 '경영(經營)'으로 정의하고, 문학을 한갓 '정신적 영역'에 국한하여 설명하곤 한다. 삶을 기업을 운영하듯 타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된 세상이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행위가 성과와 계산으로 환원되는 일상 속에서, 현대인이 직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깊은 허기와 지독한 허무감뿐이다. 치열한 경쟁이 야기되는 고통과 정신적 중압감, 곧 극심한 스트레스는 현대인의 영혼을 사로잡은 유령과도 같다.
이 정신적 긴장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겠다며 세상에는 온갖 학술적 연구와 자기계발서, 심지어 우후죽순 난립하는 이단 종교들까지 요란스럽게 구원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해법과 행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허구성에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진정한 내면의 평화와 사유의 길은 타인이 제시하는 경박한 구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행복이든 불행이든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며, 죽음이라는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존재다. 그렇기에 생과 삶의 궁극적 과제는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고통이라는 거친 바다를 얼마나 지혜롭게 유영하며 자기 성취와 내적 성숙을 이루어낼 것인가로 귀결된다.
문학에 심취하고 학문의 깊이에 도취하여 밤낮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이들은 말한다. 문학이란 인간 인격의 수용성이자, 사상의 정신성이라고. 나아가 신의 경지와도 같은 몰입과 통찰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한 번의 붓질로도 일필휘지(一筆揮之)의 감동을 줄 수 있으며, 비로소 깊이가 넘쳐흐르는 글이 완성된다고 다수의 학자는 강조한다. 온전히 거리를 두고 평가한다면 100% 진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글을 업으로 삼는 이로서 충분히 가슴으로 공감하고도 남는 진실이다.
1. 전원(田園)의 여백과 내면의 탐구: 나는 누구인가?
나의 자그마한 서재 창가에 앉아 아득히 펼쳐진 이산 저산을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펜 끝에 몰입하곤 한다. 번잡한 도심을 뒤로하고 고요한 전원에 자리를 잡은 이후, 나의 일상은 일정한 아날로그적 정성(靜性)을 되찾았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 보면 어제의 그 시간에 노을이 산자락 넘어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듯, 시간은 어김없이 순환하며 사라짐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이별과 작별이 주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매일 마주하며, 뇌리를 채우는 사유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사라지는 반복이야말로 지금 내 삶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삶의 지평선 끝에 그려지는 나의 풍경화는 어쩌면 텅 비어 있는 여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즐기며 사색할 수 있음은 내 삶에 주어진 더없는 호사이자 축복이다. 비록 제도권 내에서 철학과 인간의 도(道)에 관한 학문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한평생 글과 학문으로 씨름하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완성하며 삶의 끝을 맺을 것인가?" 이 본질적인 물음표를 가슴에 품은 채, 나만의 소망을 화폭에 그리듯 상상의 나래를 펼쳐왔다.
결국 나는 화려한 도식을 떠나 별들이 속삭이는 시골에 내려왔고, 내 마음에 귀 기울이며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내실을 더욱 다져 독자가 원하는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시대를 진단하는 칼럼과 시평, 그리고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는 시와 수필을 써 내려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거부할 수 없는 소명(召命)임을 깊이 자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세로 시대와 세상을 섬길 것이다.
2. 현상의 블랙홀과 붕괴하는 정서의 현실
본래 망설임이나 조바심 같은 가벼운 감정들은 '느림의 미학'이라는 묵직한 정서 뒤편으로 밀려나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서두르고 조급해하는 인간의 본능은 행동할 때 언제나 그 조바심을 맨 앞자리에 가져다 놓곤 한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Black Hole) 속에서 거대한 항성이 붕괴하여 어둠만이 남고, 모든 사물과 이성이 보이지 않는 무(無)의 상태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세상을 꿰뚫어 보는 멋스러운 '지혜의 눈'을 갖는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요,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難題) 임에는 틀림없다.
이제는 욕망을 서서히 내려놓고 지금 모습 그대로에 만족하며, 흐르는 시간을 굳이 쪼개어 다투지 않으려 한다. 행동이 다다르는 대로 거두어들이는 소박한 수확에 기쁨을 느끼고, 한칼에 모든 것을 잘라 버릴 것 같은 천 길 단애(斷崖)의 두려움조차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의 참된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그저 현실에 적응하며 내면의 길을 유유히 걷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바람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문인으로서 그렇게 세상과 단절한 채 안주할 수만은 없다는 엄혹한 현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왜냐하면 글쟁이는 결국 글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글로써 세상과 대화하는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무리 산속 깊은 곳에 조용히 기거한다 한들, 시대의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방관하고 거짓된 현실에 끌려다닌다면 진정한 문인이라 할 수 없다. 다행히 오늘날은 초연결의 IT, 반도체, 인공지능(AI) 시대다. 바지춤에 있는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세계가 초 단위로 급변하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목도할 수 있다. 세상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시국과 정세를 올바르게 진단할 수 없기에, 문인으로서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시대에 대한 거룩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공정과 정의, 상식이 굳건하게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굳이 글 짓는 이가 분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서로가 이중잣대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눈으로 상대를 비난하고, 편 가르기와 진영 논리에 빠져 극단의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얼마나 개탄스럽고 기가 막힌 현실인가.
3. 이념적 분열과 가짜뉴스: 정서적 황폐화의 진단
지구촌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 만큼 급변하는 초경쟁의 시대다. 지금이야말로 온 국민이 단합하고 힘을 모아 미래를 향해 달려가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도 도대체 왜 우리는 이토록 괴이하고 비이성적인 갈등에 빠져 있는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면 잘하는 일에는 박수를 보내고 희망의 길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며,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정서적이고 객관적인 비판을 통해 정도(正道)를 걷도록 지침을 주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팬덤 정치와 극단적 아성에 갇혀, 상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저주와 해악을 퍼붓는 현상이 과연 정상적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정과 정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북이 대치하는 엄혹한 안보 현실 속에서 일탈된 이념과 추종 세력이 버젓이 활동하고, 사회의 중심축이 되어야 할 조직의 인사들이 국가의 안위를 흔드는 현실을 목도할 때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일들이 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세상은 아우성치는 목소리만이 정답인 양 착각에 빠져 있다. 저마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고함을 지른다. 언론과 종편 방송 역시 하루라도 특종이나 단독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처럼 자극적인 기사만을 쫓고 있다. 그러나 그 '단독'과 '특보'의 내면을 들여가 보면 이미 지나간 사실이거나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하찮은 소음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거짓을 포장하고 가짜뉴스를 생산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말의 성찬에 신물이 나 아예 채널을 돌려버리고 영일(零日)의 고요를 찾게 되는 이유다.
|
구분 |
현 사회의 병리적 현상 |
문학적·정서적 지향점
|
|
언어와 태도 |
말의 성찬, 가짜뉴스, 궤변과 변명 |
정갈한 언어의 정립, 진실과 절제의 시적 언어 |
|
사회의식 |
이념적 갈라치기, 적개심, 극단적 맹신 |
공정과 정의, 객관적 비평과 상식의 회복 |
|
내면 상태 |
정서적 블랙홀, 영혼의 소화불량, 불안감 |
느림의 미학, 내적 자성(自省), 자아의 길 유영 |
이 사회가 반으로 쪼개져 서로를 향해 맹목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고,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는 지경에 이른 것은 만시지탄(萬時之歎)의 아쉬움을 남긴다. 거짓도 반복하면 사실처럼 둔갑하는 둔갑술의 시대,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고 자기들만의 박수와 복수심만이 이글거리는 전쟁터가 되었다. 타협과 휴전조차 없는 이 사회의 통곡을 신(神)은 듣고 있는가?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불의에 맞서 이제는 분연히 일어나 사회의 기준과 법도를 바로 세워야 한다. 불의에는 엄정한 법을, 잘한 일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만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회로 돌아가는 길이다.
4. 말의 질서 회복과 시(詩)의 구원적 소명
지금 우리 사회는 '정서의 블랙홀'에 빠져 있다. 뉴스 속에는 어둠과 갈등만이 가득하며, 이 현상을 매일 소비해야 하는 백성들의 위장은 소화불량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부재의 시대 속에서도 민초들은 다시 희망을 찾아야 하고, 스스로 길을 내어야 하며, 신념의 불꽃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자성(自省)과 자정(自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인간은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근본을 되돌아보는 지혜를 발휘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지팡이가 필요하고, 듣지 못하는 이에게 보청기가 필요하듯, 마비된 정서의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한 줄의 책을 읽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유의 샘물을 퍼 올려야 한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주장이 너무 고지식하고 낡은 레코드판을 돌리는 것처럼 신선미가 없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선함이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유성이나 번개가 아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부하려 해도 자식의 피속에 아버지의 DNA와 철학이 면면히 흐르고 있듯, 과거의 지혜를 새로운 시선으로 재발견하는데 진짜 새로움이 존재한다. 정교한 말장난과 말의 성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성이 마비되고 정서를 잃어버리게 된다. 청년과 장년, 어른들의 의식 대결이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한 이유도 결국 정서가 마비되어 말의 참된 뜻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이 말라 허덕이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겉만 화려한 말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모금이다.
쓰레기장에 던져진 말은 소음과 아우성이 될 뿐이다.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말의 줄'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의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바로 문학의 장(場)이다. 소설이 현실을 묘사하고 반영하는 풍경화의 제시라면, 그 본질적인 대답과 구원의 열쇠는 오직 시(詩)라야 한다.
시를 앞세우는 이유는, 시야말로 정갈한 단정함과 절제된 언어의 엄밀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말이 바로 서면 비로소 인간의 정신이 바로 선다.
정신이 곧추서면 올바른 행동과 예의범절이 회복된다.
언어의 질서가 세워질 때 비로소 혼란스러운 사회는 구원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말장난과 변명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궤변가들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입을 닫고 눈만 굴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으로 우울하고 아프다. 이 사회라는 거미줄에 걸려 허송세월하는 국민이 한없이 안쓰럽다. 세속의 소음에서 비껴나 한적한 전원에 홀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무섭고 가슴 저리지만, 나는 오늘도 문인으로서 펜을 놓지 않는다. 정갈한 시적 언어로 말의 질서를 바로잡고, 혼탁한 시대를 비추는 작지만, 강렬한 등불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마침내 이루어야 할 육화(肉化)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2026. 08.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리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