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타산과 몰상식의 풍토 속에서 성찰하는 본분과 정신의 파수
“자기만의 금도(襟度)를 잃어버린 시대는 요란하나 빈곤하고, 직함을 좇는 삶은 거창하나 허무하다. 글을 쓰고 정신을 다듬는 문인의 길이란 본래 화려한 상석(上席)에 앉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알아 영혼의 품격을 지켜내는 묵묵한 수도(修道)의 정진이어야 한다.”
1. 금도(襟度)의 분실과 종교적·사회적 훈수의 모순
인간이 제 몫의 삶을 단정하게 영위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스스로의 한계와 위치를 아는 ‘금도(襟度)’이다. 금도란 단순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지닌 무게를 인식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절제와 자각을 의미한다. 공무원은 공무원대로의 법적·윤리적 금도가 있고, 종교인은 종교인대로의 거룩한 한계가 있으며, 문인은 문인으로서 지켜야 할 정신적 파수의 영역이 존재하는 법이다. 자기를 바로 알 때 비로소 그 위치에 걸맞은 삶의 가치와 참된 행복이 깃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사회적 풍경은 이러한 금도의 붕괴로 얼룩져 있다. 특히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종교계 일부 인사들이 본분을 잊고 세속의 정치와 권력 중심부에 깊숙이 개입하여 훈수를 두는 모습은 깊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국민이 합법적 절차와 직선제를 통해 선출한 권력을 향해 거친 언사로 하야를 요구하거나, 스승과 멘토를 자처하며 언론의 중심에서 선악을 독단적으로 규정하는 행태는 권위의 엄정함이 사라진 시대가 낳은 어리석은 과시이자 일종의 허세에 불과하다.
종교의 본래 소명은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며,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불어넣는 데 있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세속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도하려 드는 순간, 종교는 이미 그 순수성을 잃고 세속의 이해타산으로 전락한다. 누구도 타인의 삶을 일방적으로 지도할 절대적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가 자기 삶의 스승이어야 하며, 제 행위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는 독립된 주체여야 한다.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군림하려는 모든 허위의 의식은 자아를 잃어버린 자들의 연민 어린 자화상일 뿐이다.
2. 허화(虛華)의 유혹과 분수에 넘치는 이해타산
삶의 거센 파도와 변화무쌍한 세파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빙판 위에서 균형을 잡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나 평행봉 위의 체조 선수가 고난도의 동작을 완수하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거치는 것처럼, 인간이 세속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바로 서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도의적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은 내면의 깊이를 채우기보다 겉모습을 부풀리는 허화(虛華)의 늪에 빠져 있다.
직함과 명함에 연연하는 문단의 풍토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글을 쓰는 글쟁이가 왜 강사, 교수, 이사장, 부이사장 같은 외형적 타이틀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녀야 하는가. 글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지닌, 직함의 높낮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그 문장에 담긴 영혼의 깊이와 통찰에서 비롯된다. 저서의 약력 란에 최소한의 학술적·문학적 기록을 남기는 것은 연구와 사료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만, 실질적인 문학적 본질과 무관한 직함을 과시하는 것은 껍데기로 알맹이를 대신하려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허세는 개인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기도 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에 집착하며 내면의 향기 대신 외형의 화려함만을 좇는 풍조는 영혼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탈이다. 월 백만 원을 버는 사람이 허영과 체면을 위해 이백만 원을 소비하며 타인에게 손을 벌리는 삶은, 결국 풍선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모순과 허무의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도의를 버리고 이해타산에 매달리는 행태는, 자기 파멸로 치닫는 어리석은 자해 행위와 다름없다.
3. 문단의 전모(全貌)와 붕괴된 위계의 비극
정신을 지키는 파수꾼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문단(文壇)조차 이러한 허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심각한 비평적 성찰을 요구한다. 필자가 경험한 수많은 문학 행사와 단체들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화합과 학술적 탁마의 장이라기보다는 권력과 자리를 둘러싼 소인배적 이해타산의 투회장에 가까웠다.
단적인 예로, 엄연한 스승과 제자의 도리가 존재하는 문단 행사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화는 오늘날 문학판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문단에 등단시켜 준 스승을 마다하고, 무슨 관변 단체나 권력 기관의 ‘부(副)’ 자 직함을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제자를 상석(上席)에 앉히고 스승을 하석에 배치하는 몰상식한 풍토를 목도한 바 있다. 이는 아들과 아버지의 위치가 뒤집힌 것과 같은 윤리적 하극상이며, 도덕적 질서와 인격적 존경이 권력과 직함이라는 세속적 기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현장이다.
비평적 고찰: 문학, 단체의 존재 목적이 회원 간의 진정한 화합과 예술적 성찰에 있지 않고,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가짜 존경을 연출하거나 정치적 세력을 과시하는 데 있다면, 그 단체는 이미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위계질서가 인격과 학문의 깊이가 아닌 세속적 직함에 의해 결정되는 순간, 글을 쓰는 자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고 진정한 비평 정신은 고사한다.
이러한 모순을 견디지 못해 외면과 침묵을 선택하는 스승들의 모습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씁쓸한 비극이다. 사소해 보이는 좌석 배치와 예우의 문제는 결코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단이 비평 정신을 상실한 채 얼마나 속물적인 권력 구조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증명하는 서글픈 시그널이며, 문학에 대한 참된 열정을 가진 이들로 하여금 문학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4. 비평 정신의 회복과 수도(修道)로서의 문인론
그렇다면 이러한 허세와 몰상식의 시대 속에서 문인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문학이란 본래 자아를 찾아가는 치열한 정신의 탐구이자, 영혼을 다듬는 수도(修道)의 일환이다. 문인이 남긴 궤적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직함이나 세속적 명성이 아니라, 그가 밤을 지새우며 써 내려간 오롯한 ‘글’ 그 자체로 증명된다.
문학에 대한 진정한 존경은 강요된 자리나 권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세상의 그릇된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고, 인간 존재의 고독과 모순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비평 정신’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문학의 가치가 상승하고 문인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확립된다. 세속의 기준으로 볼 때 타협하지 않고 자리를 탐하지 않는 문인은 시대의 패배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세의 함정에 빠져 권력의 주변을 돌고 도는 이들의 허망한 삶을 돌이켜볼 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은 가장 숭고한 도의적 승리라 할 수 있다.
문인은 가도 가도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허기와 아득함 속에서도 자신을 일깨우는 내면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세속적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 타인에게 베풀고 양보하는 아량을 품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인이 가야 할 진정한 도(道)이다. 한 편의 절창(絶唱), 영혼을 울리는 명품의 글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이야말로 우리가 이 험난한 비평과 창작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유일한 이유이다.
모든 허화(虛華)와 허세가 바람처럼 사라진 뒤에도 오직 진실한 글 한 줄만이 남아 역사와 영혼을 울릴 것이다. 체면을 넘어 도의를 바로 세우고, 내면의 향기를 채우는 일에 매진할 때, 비로소 우리의 문학은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구원할 파수꾼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2026.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