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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와 절차의 숲사는 이야기
이분희 기자 | 승인 2019.05.15 23:59


1. 작은 것의 소중함

사실 나는 무슨 직함으로 친다고 한다면 백면서생이라는 무관(無冠)의 형편이라도 그렇게 一喜一非 하지 않는다. 그저 문학이 좋을 뿐이다. 선거때만 되면 당상관들 나리들이서서 거들먹 거리는 것을 자주 보고 작가라고 하는 문학인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여러 장소에서 행세나 하며  허세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면을 많이도 보아온 터라 지금까지 어떤 자리를 탐하거나 욕심을 가져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작 본말은 어떤 글이 얼마나 진지하게 썼는가를 자문하는데서는 거추장스러운 의상이라고 밑기 때문이다.

옷이란 자기 몸에 맞아야 태(態)가 나고 맵시가 있을 것이라는 유추는 당연시이기 때문이다.작가란 어떤 글인가의 판별이 가장 진귀한 평가의 항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설사 늦거나 빠르거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슨 소득으로 자화상을 그려가는 가는 필연의 종착역이기 때문에 글 쓰는 작가의 숙명은 외적인 일이 아니라 내적인 충실도에 판단이 앞장설 것이기 때문이다.

금요저널 주필 칠보/이승섭시인

 본인은 너무도 늦게 글을 시작했지만 돌아보면 오히려 그 것이 분발의 계기가 되었고 이런 현상은 결과적으로 대만족을 하진 못하지만 깃발은 들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갈팡질팡 갈지자를 걷는 뱃전의 승객이라 여기 저기 떠돌이 신세라 어정쩡 내 기초의 부실로 형편없는 신세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유추한다면 인간의 운명은 본인의 몫으로 정해진 길을 가는 것으로 믿는다.

다시 말하면 결국 잘되는 쪽으로 운명이 길을 만들고 있음이다. 억지로 만들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삶에 합리성이 결정 된다는 운명론자의 말이기는 하지만 국문과에만 들어가면 무슨 대단한 시인, 작가가 된다는 허풍론에 속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글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고달픈 여정이 숙명의 길이 되리라고는 합리성의 변명이라 해야겠다. 하여 추종성이 가미 되었으나 생활의 방편으로 고서점을 한다는 삶의 일상과 부모님의 병환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이 길로 들어셨음은 참으로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자리서 밝혀두는 바이다. 돌아보면 나는 글은 숙명의 조우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글을 너무도 열성적으로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언더라인을 긋는 버릇이 생겼고 국민교육헌장을 하루만에 암기한 것을 보면 지금도 그 것이 나의 모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축적의 지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읽고 쓰고의 도정이 나의 지식 쌓기의 일이었고 이러한 결정물이 지금의 도움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본다. 인간은 자기를 얼마만큼 밑느냐 하는 깨달음이라 보기 때문이다. 끈기와 집념이 키를 높이면 언젠가는 때가 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갖으면 성과와 소득은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결과론이라 밑기 때문이다.

사실 시골에 살다보니 풀 한포기라도 뽑고 일어나는 습관, 어쩌다 지나가다 밭에 풀이 있으면 뽑는 습관, 집념 늘상 하는 일이지만 시골에서는 당장 소득을 보지 않드라도 소득이 생길 것이라는 기질성, 이런 작은 하나 하나가 모이다 보면 큰 것이 된다는 진리일 것이라는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 옛날 복권을 사서 운명을 바꿔야겠다는 허황이 나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으나 시골에 살다보니 복권을 구입할 기회도 없을뿐 아니라 땅의 소중함을 알다보니 자연스레 성장론의 주정자가 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돌아보니 그렇다.

2. 작음이 큰 것이 된다.

인간의 성격따라 재산을 형성하는 일도 성격과 같은 축재의 방법이 열린다고 한다. 글을 쓰는 것도 이런 특징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일확천금의 복권 사는 일은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버리고 허황한 풍선 타기 요행에 매달린 사람일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목적한 설정을 마음이 엎장서야 되는 일이다. 설령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다 하드라도 도전에 대한 열망이 결국은 매끄러운 길을 낼 수 있다고 했듯이 -
세상사는 의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따라 성취의 길은 만들어진다는 신념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미상불(未賞不) 사는 일은 자기 행동에 따른 결과에 평가가 다가서지 않을까?
나는 많은 글은 쓰지 못했으나 노트에 남겨진 글은 언제는 반드시 속세에 나올 날이 있을 것이라 밑는다.
이광수선생은 평생을 글과 씨름하였다 한다. 결핵균이 척추에 들어가 발생하는  - 척추 카리에스라는 병이 들어 거의 누워서 방대하고 그 많은 소설과 평론 그리고 시를 썼다고한다. 2단 편집인 그의 전집(삼중당)20권은 1단으로 펼치면 그 부피는 가히 놀람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문호라 불러야 한다고 한다. 다만 일제 치하에 어긋난 한때의 행동으로 그의 빛나는 업적을 덮어 버리는 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칼럼리스트 이승섭 작가

그의 문학적인 열정을 땅에 버리는 일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다. 한국문학의 지평을 어둡게 만드는 우메한 노릇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기의 조국 독일을 침공한 나폴레옹의 말바굽 아래 "세계의 양심이 온다"고 칭찬한 괴테나 나치에 협력한 하이대거 그리고 성인이라 칭하는 인도의 간디 - 소작농을 반대 했고, 인도의 고질병인 카스트 제도를 옹호했고 열혈 청년 딩그리를 다매(嗲駡)했던 그의 행동은 우리 기준(基準)으로는 도저히 용납의 허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기준은 남에게 관대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가혹한 잣대가 문제인 것이다.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열외로 여기는 요즘 내로남불이라는 어리석음이 스스로를 옥죄는 단단한 밧줄이라는 점에서 모자라는 처사인 것이다. 이런 원인(遠因)은 아주 간단히 진단된다.

이른바 국가 운영 주체인 양반의 처사와 생산의 주체인 서민의 국가 가치관의 문제에 간극(間隙)이 있기 때문이다. 양반은 관리의 방법만 가졌지 백성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를 외면하는 독선과 오만 때문에 위난(危難)에의 국가 상황에는 도망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한국전쟁에 우리 장군의 아들이나 지도자의 아들은 거의 죽지 않았다면 모택동의 아들이나 미국 장군의 아들이 한국전쟁의 와중에 순직했다는 일화는 지도자의 국가관이 왜곡과 비뚤어진 현상인가를 말한다. 그 때문에 존경을 잃었고 신뢰를 잃은 불신의 근인(近因)이 뛰어난 사람 죽이기의 전통이 단단히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었는가의 계산이 아니라  모두를 잃었기에 근성 없는 불신의 포장지만 남발하고 있는 셈이다.
각설(却設)하고 내 글쓰기는 이제 정점에 올라 멀리 바라보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기실 내 딴에는 자부심이지만 아직 초보라 보는 것이 맡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참 가야하는 진행형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삶의 모든 것을 표백하는 절차로서의 글이고 내 삶의 진솔한 향기가 있던 없던 별개의 문제라 보기 때문이다.
본인은 남이 못하는 일에는 나도 두렵다. 이제는 무모한 일은 못한다고 할까? 우리나라에도 그 얼마나 수많은 작가가 있는가

그들은 그들만의 특성을 갖고 글을 쓰면서 모두 자부심으로 정신의 기둥을 세울 것이다. 더러는 몇편의 에피소드로 이름을 앞세울 것이고 또는 오불관언으로 앞뒤 없이 그냥 좋아서 글의 깊이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면 나는 후자에 속한다. 까짓 유명이 무슨 대수이며 누가 박수를 친다해서 날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 대중은 언제나 에피소드의 입 맛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바는 아니다.

그러나 정작 작품의 질에 이르면 달라질 것이라 본다. 콩밭을 수확하면 더러는 아주 탱글한 놈도 있고 쭉정이 같은 놈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농부는 모두를 소중하게 여긴다. 이 것이 진심일 때 자기 일에 자부심과 애착이 함께 따라오는 이치가 되는 것이다.

3. 내 속의 살

제 고향의 영웅이 없다 한다. 블란서의 장군 드골이 대통령에 출마 했을 때 그 고향의 모든 주민이 드골에 투표했지만 딱 한사람만이 반대 투표를 했으니, 바로 그 집안의 가정부였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드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드골과의 이별이 이유였단다. 이뿐인가 나폴레옹도 그렇고 어느 사람이든 거의 자기 고향에서는 거개가 한호 작약을 외면한다. 이런 현상은 심리적인 자기 부정의 이유가 아닐까 혹은 시기심의 깊이가 발동되는 자기 변호의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쓸 때는 심사숙고 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며 글을 쓸 것이다.
본인도 그렇지만 막상 글을 출간 한다거나 어디 매체에 올리려고 다시 보면 실망에 빠지거나 실의에 빠진다.
본인이 열과 성의를 다해서 글을 썼다지만 막상 올리려 하면 만족을 못한다. 본인만 그렇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창찬을 받기 위해서 올린 글은 아니라도 비감을 갖게되는 이유가 다시 보게되면 수정할 곳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반추하고 부질없음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또 돌아보곤 한다. 허무함이요 무상함이요 절망의 깊이요 또한 처참함이라는데 이르면 나를 멸시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래도 애착의 기억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올 때면 무언가 가슴이 차 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아, 내가 한편을 만들어 내었구나 하는 안도감에서다. 글 한편 완성 하였다는데에 느낌이랄까?
노래를 부르면 하늘로 사라지고 먹으면 다시 먹어야 하는 반복 속에 삶의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침을 보내면 어김없이 밤이 오고 또 아침을 맞아드리는 일이 되풀이 된다고 해서 의미를 부정하는 일은 부질없음이기 때문이다. 사는일이 빈 것이고 채우면 다시 비워지는 일이 항아리의 운명이라 보기 때문에 절망이나 허무는 일상의 이름일뿐이라 체념이다.
열심히 열성으로 산 자도 후회로 마감 되고 대충 산 사람도 후회로 끝나는 운명이 인간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써놓고 북망산천이라면 만족이기에 -
쓰고 가리라
누가 기억을 하든 하드에 넣고 쓰던  그 것은 내가 생각할 바가 아니다
다만 쓰는 일이 좋아서 쓰고 또 쓸뿐이다. 만족하는 수식어가 있을 때까지 말이다. 내 삶이 헛되지 않음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분희 기자  thesejongtv@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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