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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學 不在의 현실"
이분희 기자 | 승인 2019.05.12 23:04

철학(philospy)의 어원은 지식(philo)을 사랑한다(Sopy)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무엇인가? "아는 것" 에서 더 나아 간다면 체계적으로는 아는 것 혹은 엮은 것이라 말한다면 틀린 것일까?

법• 철학, 인생 철학 혹은 감정철학, 경험철학, 교육철학에서 전문적으로 구분 한다면 스콜라철학, 선함철학, 경험철학, 초월철학이나 동서양을 갈라 서양철학, 동양철학 등 이해 난감의 분류가 여간 햇갈리는 것이 아니다.

금요저널 주필 이승섭 작가

이렇게 분류가 많다는 것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복잡하고 이현령 비현령의 해석이 많을 수 있다는 뜻도 내포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철학이 단순화할 때 한마디로 정리 되는 용어는 없을까?
바른 것, 혹은 옳은 것,을 추구하는 합리성에 기준 자가 아닐까?
이 기준이 그토록 어렵다는 논리의 갈래는 자기를 개입하는 주관성에서 혼돈이 온다고 보는 것이다

객관적 혹은 나를 좀 더 낮추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잠깐이라도 있을 수 있다면 혼란의 소용돌이는 없을 것이고 사회는 편한 표정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일그러진 표정에서 목청이 높은 자들만 세상인 것 같은 실상이다.

세상은 갈 수록 어지럽고 복잡하고 미로의 행로를 끝없이 이어가는 길에서 살아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자기의 주장이 목청으로 둔갑하고 더 크게 높이는 높은음의 마지막은 찢어지는 비극이 예정된 것처럼 막다름을 질주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철학은 지고지순(至高至純)하고 남의 철학은 개똥으로 버려야 한다는 오만의 질주가 너무 심할 뿐만 아니라 독선의 칼날은 타인의 가슴에 비수(匕首)를 품게하는 악순환의 맴돌이 현상이 증가 폭을 가파르게 높이고 있다.

이런 징후는 사회 전반에 널리 포진해 있고 특히 정치판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으로 유체이탈화법으로 강한 방어막을 치고 서로 권력을 잡으면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는 포용없는 뒤 케기의 행렬이 고구마 줄기를 끌어 올리는 현상과 같이 악순환의 부메랑이 될 것임이 분명할 진데 그렇게 이전 투구를 하는지 필자는 영 이해의 불가이다.

정치는 바른 것을 추구하면 모두가 응하는 일이라면 진보와 보수 혹은 좌와 우라는 분류가 가져오는 비극은 목불인견이다.
정말 철학의 부재성을 삼각하게 노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서로 이견(異見)이 있을때, 이를 화합하고 조화하는 것은 집권의 철학이 있어야 하지만 오로지 내편과 내 것을 많이 확보하려는 일은 결국 언젠가는 수렁에 빠지는 탄식을 불러올 뿐이다.
이런 기저(基底)에서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무한 파급을 사회 전반에 갈라침으로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문학의 판도나 혹은 노조의 판도나 아니면 교육의 판도 등에서 어느 하나도 철학의 본질에 다가가면 경우도 없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심각하다.
그러니 철학이라는 말이 개똥으로 굴러다니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자기 고민이 없는 세상 즉 반대 것만 보이고 자기 것은 간과(看過)하는 어리석음에 나타난 현상이라면 이는 합리성 혹은 이성이 실종된 아우성이 아니겠는가.

산의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한길이 아니라 다양하고 그 다양한 길이 있을 때 정상에서 만나는 즐거움은 모두의 것이 되는 사회 철학이 운용되는 이름일 것이라면 철학은 바로 자기를 찾고 자기를 돌아보는 아주 쉬운 길이 있을 뿐이지만 자기를 감출 때 결국 자기가 사라지는 비극에 직면하게 되게 되는 것이라 본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런 상층 20%
권력층이나 지식인에서부터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너는 나의 적이다"의 명제에 충실할 뿐 -
너는 나의 동지 혹은 친구라는 명제는 없다.

지식인의 머리에는 자기 영달의 목표만 있을 뿐이지 넓게 바라보는 시선의 확보가 없기 때문에 흔들리는 멀미를 앓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는 지식인들의 명망 부재 혹은 자기 수양의 철학이 사라진 허무에서 맹목의 질주가 있을 때 자기 부정의 회의가 절망을 낳을 것이다.
이에 처방전은 자기 찾기의 방법에 대한 고민이라 할 것이라면 문학은 분명 사회를 담아내는 척도의 온도계일 것이다.

문학은 사회를 모두 수용하여 표현의 길을 만드는 거울이라 보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의 경우 대부분이 대립의 각을 세우면서 이익 쟁취의 수단을 지나는 일로 지나 왔다.
그렇다면 이익의 본질은 무엇인가?
돌아보면 자기를 잃어버린 허무 이외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는 문학의 본질이 사라졌고 오로지 너와 나의 삿대질이 지금까지의 현실일 것이다.

詩的論이라는 언어(言語)를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 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닥아 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소통을 하는 것일게다

허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에 힘쓴다. 그 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 하여야 하기 때문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여기에 왜! 라는 의문사를 앞세우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 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과,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 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 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 되어야만 품의로 포장되는 것일게다.

작금의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 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 곳 저 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 하면서 대가연 하는 일이 여즘의 풍경 아닌가.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 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 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풍경에서 나오는 현상인 것 같아 참으로 안쓰럽다고 할까 이올시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어느 지방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 일으켜 절차탁마 하며 절창이라는 신인 발굴에는 소외 하면서 구 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 식의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 될지 캐션마크이다.

끼리 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음에게 바톤을 넘겨 주어 생기가 넘치고 표상의 어른으로 후배를 이끌어 간다면 지금보다 더욱 활발한 지부가 활성화가 되지 않겠나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지부의 장을 내려 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옳은지는 글쎄올시다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콩 나라 팥 나라 하며 관여 하는 모습이 어쩌면 궁색해 보이며 실망스럽다고나 할까

이것이 필자만이 보여지는 광경일지는 머르지만 유능하고 지부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소중한 문인들이 많기는 한 것 같은데 그 무엇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무시하거나 그 것도 아니라면 외면하는 것이리라 -
다시 한번 강조 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 나기를 고대하고 유능한 후배들에게 물려주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지부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문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 하시라 -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되는 것이며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자아는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을 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 되지 않았을까 하며 나를 변명하는 일로 미루는 일이 다반사이다

물론 문학의 토양만은 아니라는데서 더욱 심각성이 있지만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우둔의 실마리는 문학의 표현에서 철학의 수립이 정신으로 승화 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이 놀러 갔을 때 함정에 빠지는 비극이 온다면 지금 우리 문학의 풍토는 그런 위험 중심에 있다. 흐린 흙탕물이 자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물이 담긴 모든 영역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왜 맑아져야 하는가의 생각 즉 철학의 중심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날 때 비로서 공간의 물은 정화 혹은 깨끗한 풍경이 연출될 수 있을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은 몸의 일부이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물이 아니라는 자각을 앞세울 때 너의 아픔은 곧 우리의 아픔이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자기 문학에 철학을 넣고 자기가 소속한 단체에 철학을 세우고 자기가 리더를 해야 된다는 의식을 버리고 자기 철학을 구체적으로 설파하고 타인을 대할 때 중심 사회는 균형의 균형이 유지될 것이라 본다.

우리 사회나 문단이나 어느 한 곳도 이런 대척(對蹠)의 경우에서 왜 너는 나와 다른가를 따질 뿐 너는 나의 일부라는 의식이 없는 쪼개기의 현상에서 당면한 비극에 길을 잃어 헤메는 일이 자심(滋甚)함을 부인할 길이 없는 것 같아 필자 자신도 안타까움일 뿐이다.


2019. 05.12.


- 지방 문협의 自淨의 不在를 보며 -

         금요저널 문화주필/ 작가이승섭

이분희 기자  thesejongtv@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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